몽학선생과 두 세계의 교육

2010년 7월 17일 토요일 오후 4:37:34   김대식

(갈 4:1, 개역)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 4:2, 개역)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갈 4:3, 개역)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갈 4:4, 개역)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개역)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6, 개역)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7, 개역)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8, 개역)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갈 4:9, 개역)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갈 4:10, 개역)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갈 4:11, 개역)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 4:12, 개역)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갈 4:13, 개역)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 4:14, 개역)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갈 4:15, 개역)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갈 4:16, 개역)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 4:17, 개역)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갈 4:18, 개역)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몽학 이라는 뜻은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는 학문이다.

어제 베스트 키드 (The Karate Kid, 2010) 라는 영화를 며칠에 걸쳐 겨우 봤다.
그리고 24 리뎀션 (24  Redemption, 2008) 이라는 영화는 재미가 없어서 그냥 대충 흩어 그림만 봤지만 초반의 어린이 병사를 키우면서 전쟁군사를 키우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이런 장면은 오히려 블러드 다이아몬드 (Blood Diamond, 2006) 라는 영화에서 좀 더 극적으로 스토리 있게 잘 다루었다.

아무튼 베스트 키드 라는 영화를 보면서 특이한 장면들이 스치면서 한가지 생각난 것이 뭔고 하니

왜 이스라엘의 교육은 다른 이방나라의 교육과 다른가 하는 점이다.

모든 민족 마다 서당 선생 곧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

예로 늘 주장하지만 두 할례가 있다. 하나는 손 할례 또 하나는 마음의 할례이다.
손 할례는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다. 또 실행 조차도 가능하다. 인간이 행할수 있는 행함 문제이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는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이 도저히 건널수 없는 불가능의 문제인 믿음의 문제가 된다. 결국 마음의 할례는 그 실상이 십자가 임을 보여준다.

죽으라는 소리인 셈이다. 자기 사적인 인간 죽음이 아니라
누구의 죽음을 보라는 취지이다. 그 누구의 죽음을 보기 까지는 손 할례 라는 그림자에 갇혀 있는 것이다.

표현이 재미 있지 않은가? 할례 라는 표현 조차도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있는데
손 할례 라는 표현까지 할 정도면 그 상대적인 다른 의미와의 차이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보통 이방민족의 할례 개념은 남자에게서는 성인이 되는 의식을 치르는 관습과 연관된다.
그 성인이란 전쟁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셈이다. 용사다. 군사다.

총이나 칼이나 방패는 아무에게나 줄수 없다.

훈련된 자 에게만이 주는 것이다. 그것은 힘의 구축이다. 힘의 우열이 좌우는 전쟁에서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자격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심하면 할례식을 치르다가 죽는 경우가 많다.
또는 할례를 부여하는 자격으로써 성인이 되는 관문을 통과하는 시험을 치르다가 개죽음 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방인의 할례의식 조차도 이렇게 살벌한데

이스라엘은 더 기가막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 개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교육은 아주 아주 특이하다 라는 점이다.
다른 이방 나라의 교육과의 차이성이 상당히 대조적이다는 점이다.

베스트 키드 라는 영화에서 한 소년이 낯선 고장에서 적응하기 위해서
성장 발전을 다룬 영화다.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이 영화는 어려운 난관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자기발전을 위해 선생을 찾으면서 하나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나는 이 어린아이가 상당히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데 있어서 아무에게나 접촉을 시도하는 스킨쉽을 하는 장면을 보고

아 잉여란 바로 이런 모습이구나
자기 방어 따위란 일체 없구나 라는 것을 보았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 이런 의미이다.
잉여란 이런 모습이다.

즉 약자와 이웃 의 의미는 잉여성을 보여준다. 곧 은혜다.

고로 젖먹이의 전쟁은 반드시 잉여적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든지 접촉과 스킨쉽이 어떤 경계심도 없이 진행이 되는 이 영화의 주인공 어린아이에게도 그 접촉과 스킨쉽을 거부하는 비영적존재를 대립시킴으로써 이 영화는 그 충돌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가 된다.

자 충돌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어린아이는 이 숙제를 풀어야 한다.
그 숙제를 풀기 위해서 선생을 찾는다.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선생을 말이다.

그러나 그 선생은 일체 타인과의 접촉과 스킨쉽 조차도 거부하는 자기 안에 갇혀버린 외부의 세계와 단절된채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 이 꼬마 아이가 고요한 호수 물에 돌맹이 굴러오듯 물결파동을 일으키면서 몽학선생에게 사건으로써 다가온다.

아이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전쟁의 기술을 이 몽학선생으로부터 습득해야 하고
이 몽학선생은 이 어린아이의 파동으로 인해서 자신이 쌓은 외부와의 단절이 허물어지는 혼란을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이 서로의 욕구의 충족에 접촉점이 되는 교육이 바로

쿵 푸 이다.

우리가 어릴적에는 쿵후 라고 발음했는데 요즘은 쿵푸 라고 더 불린다.

즉 功夫 공부다 공부  Kung fu

지아비 부 와 같은 윗사람으로부터 뭔가를 잇는 것을 습득하기 위한 기술 익히기 이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가 배우는 교육 학문과
이스라엘이 배우는 교육 학문인 율법과의 차이성을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몽학이나 쿵푸는 그런 면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잇는가에 따라서 완전 딴판이다.

맞다 관건은 위의 사람이 무엇을 잇고자 교육하는가 이다.

무엇을 이을려고 잇고자 물려주는 것일까?

그것은 선생에 해당되는 가르치는 자의 기업이다.
그 기업의 내용물이 바로 잇고자 하는 교육내용물이다.

기업이란 전 재산 또는 자신의 모든 소유물 재산 지식 경험 그 모든 것을 기업이라고 한다.
기술업적

결국 이스라엘은 특이한 기업이 있다. 곧 약속이다. 언약이다.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영화에서 성룡은 자신이 유일한 기술은 쿵푸 로써 세상과의 담을 허물면서 소통을 이룬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아무에게나 다가갈수 있는 소통을 쿵푸로써 말이다.)

이 선물 잇기, 기업잇기, 약속잇기, 잉여잇기 가 바로 몽학선생의 역할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린아이 때 까지만 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 선물의 취지 기업의 취지 약속의 취지 잉여의 취지를 실제로 체험하는 때에는 몽학선생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갈 3:10, 개역)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1, 개역)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 3:12, 개역)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4,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15, 개역)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갈 3:16, 개역)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7, 개역)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8, 개역)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 3:19, 개역)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 3:20, 개역)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갈 3:21, 개역)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 3:22, 개역)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 3:23, 개역)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4, 개역)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5, 개역)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6, 개역)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개역)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8, 개역)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9, 개역)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7, 개역)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8, 개역)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갈 4:9, 개역)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갈 4:10, 개역)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갈 4:11, 개역)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쉽게 말해서 아무리 전쟁 기술을 가르치는 전쟁기술훈련조교에게 배웠다 손치더라도
이미 전쟁이 벌어진 입장에서는 훈련조교는 필요치 않다.
전쟁 자체가 실상으로 다가오게 된 입장에서 전쟁이 이미 자신의 선생으로 활동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더 이상 학생이 아니고 더 이상 훈련병이 아니라 전쟁군사다 라는 것이다. 실전배치가 충분히 가능한
사건에, 전쟁에 투입이 가능한 자 이다 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을 만나기 전에는 초등학문에 매인것처럼
몽학선생 아래에 있는 것처럼
이론 적으로만 그 점수따기에만 정신팔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백점 맞아도 실전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믿음(약속 또는 실상 또는 믿음의 주체)이 오니까
화로다 화로다 나는 빵점 맞았네 아무리 이 땅에서 백점 맞아도
화로다 화로다 하늘에서는 빵점 일 수 밖에 없음을
너무 너무 영광스러운 그 완료를 보고서
안 죽는게 도리어 이상하다 라는 것이다.

남들은 그렇게 말하는 바울을 이해 못한다.
당신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백점 중에 백점인데 우찌 빵점이요 배설물이다 라고 합니까?

문제는 더 나은 의를 만나버렸다는 것이다. 그 의 로움 앞에서 자신의 눈이 어두운 눈이요 어두운 입술이요 부정한 입술이다 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 할 뿐이지

그야 말로 허걱 일 뿐이지
남들이 우찌 보든 우찌 말하든 신경쓰거나 눈치 볼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몽학선생이 가르치는 것은 바로

아버지께로 온 기업을 잇고자 하는 기초마련 기반마련
원천자리마련이다. 그것이 곧 빈자리 이다.

 
그 빈자리인 원천자리에 머리가 와야 하는데 그 머리가 바로 약속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 믿음이 와야 잇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처소 곧 잇고자하는 자리 마련 자체가
대상이 아닌 하나 이기 때문에

대상과 하나의 차이를 이스라엘 속에 두 패로 갈라서 두 이스라엘과 두 하나님으로써 증거하신다. 그러나 이런 구약의 내용물 조차도 몽학선생으로써 가르칠 재간이 있는 선생이 아무도 없다.

가르칠 선생이 없으니 약속이 직접 선생이 되어서 가르쳐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산상수훈이다.

율법 강화 라는 별명처럼 불리우지만 사실상 율법 강화가 아니라
순엉터리로 가르친 자를 의식해서 완전 딴판의 내용으로써 예수님께서 율법을 재해석
새로운 해석을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 산상수훈의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거부한 그 빈자리에 긍휼로써 앉게 된 개같은 이방인,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인 지옥에서 폭삭 주저 앉은 앉은뱅이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바로 산상수훈이다.

희년은 갇힌자 포로된자 얽매인자에게만 해당 되지
안갇힌자 자유로운자 묶인사슬이 없는 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그것은 곧 믿음이 온 이후 부터의 변화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그 믿음의 상대적인 자리에 놓여져 있다.
포로되고 갇히고 사슬에 묶인 자리이다.

그래서 몽학선생은 죽음을 최종적으로 알려주는 교육을 한다.
세상 교육은 반대로 생존을 최종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이다.

참 희한하다 완전반대이다.

약하기에 무능하기에 약자이기에 이웃으로 삼음을 당하여서 긍휼을 베풀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죽은자와 같은 자임을 아는 것이 이스라엘 교육이다.

이스라엘 출발 자체도 없는 자에서 출발 했다.
그들의 원천지 근원지 잉여지는
없다. 빈자리이다.

그래서 할례당한 남자 곧 남자의 성기가 짤려진 남자와
임신 자체가 불가능한 불임여성 곧 여성의 성기능이 죽어버린 태 인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식 후사 가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첫사랑의 자리, 잉여의 자리 원천지 이다.

곧 죽음의 자리이다. 무능의 자리이다.

그 처소에서 자신들이 약속을 말하기 위해서 약속을 유업으로 잇고자
약속을 배우고 가르치고 물려주고 잇는
그런 교육을 하는 자들이 바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는 교육을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교육이다.

모든 것이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제사도 모조리 죽은 제사 이다.

왜?
산 제사를 말하기 위해서 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든 누구든 이스라엘 안에 있는 자는 항상 믿음을 쳐다보도록 되어 있다.
실상이 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림자는 실상, 실체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 세대도 넘기지를 못하고 이스라엘은 그림자 자리에서 실상의 자리인 빈자리에 넙죽 앉아버리게 되니 아무도 약속을 이을 재간이 있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된다.

교육이고 뭐고 선생 조차도 없다.

약속 자체가 선생으로 직접 나설 뿐이였다. 그것도 이스라엘 속에서 몰래 몰래 과외로 뒤로 꼬불쳐 놓고서 매로 징계로 가르친 남은자를 이스라엘 속에 감추어 가면서 말이다.

왜 이런 교육을 참으로 편파적으로 하는 것일까?

교육 자체도 정치적으로 골고루 분배되어 불공평하지 않게 평등하게 교육을 허락하지 않고
몰래 몰래 편파적으로 불법과외를 하는가 말이다.

아예 기회 조차도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모조리 다 죽음 아래로 가두는 특별불법과외로 이스라엘을 서울대에 모조리 다 떨어뜨리는데 성공한다.

도리어 지옥대학에 모조리 다 합격하도록 만들어버렸다.
불법과외를 받은 자들은 지옥대학에 입학하고자 뽑힌 남은자들 이였다.

모조리 참수 당할 판국이다.
혹시나 빠진 자들이 있을까 싶어서
세례요한은 요단강에 이스라엘을 참수 시킨다.

이것이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이 하는 일이다.

어떤 민족에게도 없고 앞으로도 없는 특이한 교육이다.

그 이유는 다시 언급하지만
믿음을 맞이하기 위한 반대급부에 놓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 자만이 8복에 해당 되는 자이다. 복받은 자 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쉽게 말해서 저주 받은 자 자리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의 역할이다.

물에 빠뜨리기 이다.

물에서 건짐을 받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 오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딱 하나 이다.
잘해도 물에 빠뜨리기
못해도 물에 빠뜨리기
매일 매일 원천의 자리 곧 고아 과부 나그네 자리
또는 할례당한 남자의 자리 불임의 죽은태가 된 여인의 자리
다른 말로 하면 약자보호법에 혜택을 받아야만 하는 자리
이웃 환대법에 혜택을 받아야만 하는 자리

그러나 아무도 약자를 보호하거나
이웃으로 환대해 주는 자가 이스라엘 속에서도 나타날수가 없기에
믿음이 오기 까지를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는 자리

또 그러나 그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는 자리 조차도
모조리 사라져버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그 자리에

믿음이 오는 겁니다.

아무도 약속을 이을 자격이 있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

(마 8:10,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눅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말세 곧 세상의 종말 때 세상을 심판 할 때에는
믿음이 직접 자신의 유업을 이을 자를 직접 고르고 가르치고 유업으로 삼기를 당하는 일들이 실상으로 벌어진다는 것을 믿음이 약속을 한다.

아예 성령이 일임을 하여서 인간의 손에 일체 허용치 안도록
성령이 직접 활동하여서 이루도록 했다.

종말이라는 전쟁 터가 덮쳐져서
성령이 직접 이미 완료된 믿음의 승리를
우리의 삶 속에 지뢰밭(응축점)으로써 깔아버렸다.

이제 십자가라는 지뢰 밭을 하나 하나 밟아 갈 때마다.
나 라는 자아는 발모가지 팔모가지 얼굴모가지 허무하게 휭 하니 날라감에도불구하고
예수님의 형상은 도리어 날로 날로 새록 새록 새로움을 흘러넘치는 강물 속에서
맛보게 되어 있다.

비록 불 속에라도 광야속에라도 모래 속에라도 죽음 속에 라도

그 사랑은 든든하고 넉넉함을 누리면서 말이다.

그토록 보고파도 보고파도 보지 못했던 그 실체

비로소 보지 못하는 증거를, 약속을 인치심을 선물로 받음으로써 말이다.
(성령으로써 보혜사 곧 보증수표로써 100% 본래값 원상복귀에 20% 더 보상인 속건제가 아닌 100 원상복귀에다가 더 100 % 배상, 보상은 곧 자아의 것이 일체 없는 완료된 예수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모든 미래로 채워버리겠다 라는 뜻이다.)

(히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의 교육은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신체에 신나게 흔적으로 남기우는 교육이다.

매일 매일 예수님의 죽음에 넘기우는 신나는 일만 누릴 교육을, 실상을,
성령께 직접 매맞으면서 배우는 기쁨이 있다.

(딤후 3:15, 개역)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개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개역)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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