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

2010년 7월 20일 화요일 오전 11:07:02  김대식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막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막 12:37,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눅 20:41,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 110:3, 개역)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4, 개역)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5, 개역)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시 110:6, 개역)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시 110:7, 개역)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항상 말하지만 언약도 두 언약이 있고 할례도 두 할례가 있고
선지자도 두 선지자가 있다.
(거짓선지자 참선지자 라는 의미는 그들에 의해서 좌우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기준에서 거짓선지자로 판명이 되고 참선지자로 판명이 된다. 예수님이 오기 전 까지는 알 수 없다. 놀랍게도 바리새인은 거짓선지자라는 표현이 성경이 있음을 알고 거짓선지자를 회피할려고 했지만 도리어 예수님이 오자 자신들이 그 짓을 똑같이 하고 있음을 알수 없었다. 지식도 소용없다. 예수님이 지식의 원천지 이기 때문에 차라리 예수님 앞에서 지식을 포기했어야만 했다. 지식 없는 자를 내세우시는 예수님 앞에서 지식자들은 다 걸려 넘어졌다.)

나무도 두 나무가 있듯이 (선악, 생명)
여자도 두 여자가 있다.

심지어 주(主人)도  두 주인 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못 섬긴다고 했다.)
잉여도 두 잉여다. 창조도 두 창조다.

자 이렇게 되면 그 피조물도 두 피조물이 되는 셈이다. 양과 염소,
천국과 지옥이 있듯이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이 있다.

사건도 두 사건이 있다. 나를 살리는 사건, 나를 죽이는 사건.
나의 육을 후패케 해서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사건이 있는 반면
나를 육의 소욕에 의해 성령의 소욕을 거부하는 사건이 늘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주께서 내 주께]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라는 방식은 인자의 방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인자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인간의 쌍둥이로 왔기 때문에 아무도 못알아본다.

그래서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은 두 인자의 방식이 되는 셈이다.
 
성령도 두 성령이 있다.
한번 비추임으로써 맛보여주고 떠나는 성령과 (가룟유다와 사울왕)
끝까지 집요하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듬고자 아담의 형상을 파괴하는 성령이 있다(베드로와 다윗)

이렇듯 두 상대적인 대조물이 항상 맛수로써 등장함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식이다.

자 그럼 오늘은 두 여자에 대해서 생각난 것을 적어볼까 한다.

사실은 영화를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에비에이터 (The aviator, 2004)

마치 율법처럼 어릴적 주인공의 어머니를 어린아이를 음부의 권세에 가두어 버린다.

그것이 이 어린아이에게는 미래를 풀 열쇠이자 곧 쇠사슬이 되어 자신이 갇히게 된다.

장성하고 난 뒤의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쇠사슬은 점점더 현실적으로 조여든다. 그러나 그 쇠사슬 덕분에 더더욱 벗어날려는 몸부림으로 인해서 그는 자신의 미래에 더 가까이 갈수 있다 라는 집착에 빠지게 된다.

마치 이 영화는 레이 (Ray, 2004)  라는 영화에서도 나타났듯이 항상 어머니 라는 존재는 선악과를 따먹어라 라고 옆에서 부추기는 하와(이브)의 역할로써 자리한다. 또한 율법처럼 죄 아래 가두고자 하는 어머니의 역할이다.

율법도 그런식이다. 거룩이라는 것을 부여한다.
그러나 몽학선생에게서 배우는 아이는 육의 헛된 한계점에 부딧혀서 그저 거룩에 적응할려고 할 뿐이지
인간은 거룩에 실패하고 거룩에 집착하는 결백증만 남아버린다.
(기도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기도에 적응할려고 한다. 광야인간(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데 광야(이스라엘)에 적응할려고 하니 다 실패한다. 약속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약속에 적응할려고 한다. 창조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창조에 적응할려고 한다. 방주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방주에 적응할려는 교회에 적응할려고 한다. 교회는 죽어도 안되고 교회에 다니기 또는 충성 봉사 섬김으로써 적응할려고만 할 뿐이다. 십자가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십자가에 적응할려고만 할 뿐이다. 헛되다 라는 한계점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슨 수로 해결하랴?

레이 라는 영화도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의 헛되고 헛된 한계점을 한 여인이 그 어두운 음부의 권세 속에서 건져줌을 통해서 해결한다. 곧 생명이다.

모태가 교체 당한다. 원천지가 교체 당한다.
약속한 성령을 예비한다는 말은처소를 십자가로써 해산하는 수고로 다시 태어나겠끔
원천의 근원지 뿌리를 새로운 자궁(긍휼)로써 잉태하겠다는 뜻이다.

죽음의 동굴인 무덤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여자의 후손이다.

여자(남자가 붙인 이름)가 음부 속에(정녕죽으리라) 가두어 버리게 해 놓는 빌미를 던져주고

(창 2:22,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 2:23, 개역)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다시 그 여자가 아닌 하와 에게서 생명을 보게 하였다.

(창 3:19, 개역)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20, 개역)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창 3:21,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2,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즉 그 사이에 사건이라는 창조(잉여)가 개입하여서 그 창조를 거친 후에 여자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생명이다 라고.

다시 그 사건의 확대가 에덴동산에서 벗어나서
땅의 죽음(음부의 권세)를 거쳐서 하와의 해산하는 창조를 통해서 생명을 본 그 사건을 확대시키는 마당으로써 두 마당 곧 역사와 묵시의 대립을 생명이 벌리는 사건인 최초의 살인사건으로 확대 시킨다. 가인은 땅의 원리(역사)요 아벨은 하늘의 원리(묵시)이다.

마치 이것은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인자의 방식이라는 묵시 외에는 답이 없듯이

주인공은 자신이 벗어나고자 한 어머니의 숙제를 자신의 모든 것을 부어서라도 풀어보고자 한 것은 한계점이 다달은 헛되다를 알게 된다.

여기에 뛰어드는 생명인 하와로 인해서 그는 갑자기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는 식으로 좀 전에는 예수 밖에는 정죄 뿐인 철저한 곤고한 사람임을 느꼈다.

그러나 생명이 뛰어들었다.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방식처럼

어머니가 가두워 버린 그 굴레를 한 여인이 그 숙제를 다 풀어버렸다. 생명이다.

여자로 인해 선악과를 따먹어버려 하나님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는 판국의 숙제풀기에
도저히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헛됨을 아는 한계점에 도달했을때에

생명이라는 하와가 아주 아주 낯선 생명이라는 아기를 통해서
음부의 권세를 이미 이긴채로 후사 곧 부활을 안겨주었다.

아담은 자신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하와의 해산하는 고통으로 인해 후사 곧 미래의 구원자, 생명의 근원을 보게 된다.
마치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듯이 말이다.

이 사건을 무한반복한다.

무한 ~~ 도 전~~

후사도 이제 두 후사가 있다.

부활도 두 부활이 있다.

가인이냐 아벨이냐?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서
남자가 아무리 날 뛰고 뛰어도 결국 남자의 원천자리를 제공한 어머니의 태에서 못벗어난다.

그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자신의 육의 출처를 부정하지 않으면 벗어날 수가 없다.
(모친의 모태를 부정할려는 시각은 외부에서 새로운 태가 등장하지 않으면 헛되다를 모른다. 율법에서 나온 행함이 헛됨을 모르는 이유는 외부에서 의가 덮친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태가 새로운 자궁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문제는 그 처소가 전혀 긍휼스럽지 않고
전혀 거룩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도리어 더럽고 불륜스럽고 저주스럽다.

십자가 라는 태는 바로 그런 모습이다.

반대로 아담이 이름 붙인 여자로 인해서 먹게된 선악이라는 태는 아주 화려하고 지혜로우며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는 태 이다. 원천이다.

그러나 십자가 라는 긍휼은 아무리 봐도 때깔나지 않는 긍휼이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고
단순히 선택안하면 그만 이다는 자유권을 행사하는게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피하고 거부하고 강력한 반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싫어버린바 된 모습이다. 곧 죽은 태 이다.

요셉은 마리아가 율법을 거슬려 처녀가 아이를 임신한 그 부정함을 종용히 끊고자 했다.
말이 종용히 이지 결과론적으로 볼때는 남자란 다른 남자가 건드린 여자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일단 그 결과로 볼 때 부정한 여자이다. 불륜 스럽다.

또 그 사회는 율법으로써 마리아를 돌로 쳐 죽어야만 그 저주스러운 부정함이 번지지 않도록 자신들의 사회가 건강하고 깨끗하고 심지어 율법으로도 거룩을 지킬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돌로 쳐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적극적인 행동 곧 법을 유발케 하는 비거룩이다.

그러니 마리아는 죽은 태가 된 셈이다. 저주의 태가 된 셈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부정적인 태가 된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부여한 율법에 의해서 율법을 근거로한 저들의 율법 사수를 위해서라도
제거되어야만 하는 죽음의 태이다.

결국 두 원천지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인자 곧 십자가의 방식은
옛언약의 부대에서 새언약의 새부대로 교체 시키는 방식이다.

헛된 한계를 가진 육의 태를 이제 찢어버리고
새로운 태로써 새로운 피조물을 생산하는 방식으로써만 새언약이 진행이 된다.

여기에 아담은 중간에 낑긴 미끼이다.

두 언약의 두 여자의 전쟁에 놓여진 전리품이 바로 남자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 곧 잉여다. 생명이다.

(갈 4:1, 개역)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 4:2, 개역)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갈 4:3, 개역)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갈 4:4, 개역)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개역)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6, 개역)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7, 개역)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