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 깜쪽같이 속이기

2010-08-04 09:08:46 조회 : 268     이름 : 박윤진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칠 때, 저에게 익숙한 도구는 당근과 채찍입니다. 소위 보상과 징계이지요.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해서 더욱 잘하도록 만들고, 잘못한 것은 따끔하게 혼쭐을 내주어 다시는 같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기억시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긴 문장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들 고개가 끄덕이실 줄 압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제가 아이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가며 나름 시의적절하고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효과적이기 까지 한 다양한 방법으로 심어주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토록 철저하게 가르치고 또 반복하도록 교육해서 나는 이 아이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결국 저는 아이들에게 저의 희망사항을 강요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희망사항이라는 것이 2010년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학부모에게 강요된 죄악된 세상의 결과물이기에 매우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살아도 아이가 구원받을 수 없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죽음을 꿈꾸게 하고 자신의 행위에 더욱 종속되도록 가르치고 있구나. 죄인은 뭘 해도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아이들이 충돌하여 박살나도록 깜쪽같이 속이고 있구나.

헛된 것을 목표라고 가르치고 그것에 붙들려 밤낮 자신을 스스로 체크하는 아이에게 자기주도적이라며 칭찬하면서 박수치고, 이왕 죄짓는 거 외국사람들은 어떻게 짓는지 확인차원에서 영어를 알아듣기를 바라고, 먹고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철저하게 짓밟을 수 있도록 좋은 대학나와 좋은 직장에서 자립해서 살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는 자녀교육이야 말로 죄인이 왜 죄인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에게 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을 대속할 죽음을 가르치셨고 담당토록 하셨습니다. 그래 놓고는 모든 영광이 그 아들에게만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자녀교육에 있어 이처럼 무식한 경우가 또 있을 까요? 아브람의 자녀 교육도 현대 교육학자들이 볼 때는 폭력과 다름 없습니다. 아동학대 수준이지요. 죽음을 그것도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하는 끔찍한 교육현장을 통해서 이삭은 여호와 이레를 경험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데 유리한지를 가르치려고 몸부림 치는 저는 결국 아이에게 사망을 유산으로 남겨주지만, 주님은 자식에게 죄가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인지를 통해 결국 생명을 남겨주셨습니다. 죄인인 아버지가 죄인인 아이를 가르치는데 죄 말고 다른 것이 생산되리라 예상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겠지요. 진리이시며 생명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가르치는 방법은 여전히 독특하고 신비롭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독특함과 신비로움을 언어의 유사성에 의존해서 풀어 내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단어를 통해서 나의 육신의 '아버지'를 연상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하나님 아버지는 경험한 적이 없지만 나의 아버지는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기에 그 중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공통될 만한 것들을 뽑아서 모아 놓습니다. 모아 놓은 것들을 쭈욱 살펴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유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근을 주던 채찍으로 때리던 모두 '나 잘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나 살아남으라고 희생하시면서 가르치시고 당신들을 못입고 못먹으면서 나에게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셨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나 살아남으라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 아픈 것 다 낫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무명 장수하라고 성령보내주신다고 겁없이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니 십자가라는 말만 꺼내도 고개가 가우뚱하는 것이고 부활이야기 하면 와 좋다 하면서 덮석 나 구원받았다고 한단 말이죠.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학습될 수 없는 것이고 행위로 이해하거나 접근할 수 없는 것이어서 - 쉽게 말해서 은혜로만 알 수 있는 것이어서 -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결국 죽음을 담당하신 쪽에서 칼자루를 잡고 있는 것이지 살고자 하는 쪽은 결국 다 잃게 되어 있는 짜고치는 고스톱 판입니다.

이렇게 짜고치는 화투판 속에서 아이들에게 IQ, EQ, 영재교육, 인성교육, 특성화 교육 등등을 운운하고 있으니 죄인인 부모는 역시 죄인 노릇하면 제 할 노릇 다 한 셈이지요. 그러기에 세상 속에서 깜쪽같이 아이들을 속이고 있는 저의 입술에서 십자가만 자랑할 수 밖에 없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늘 인용될 수 있다면 정말 삼팔광땡(노름판에서 가장 좋은 패) 잡은 것입니다.

 

 
 
이근호  10-08-04 09:34 
  
아이들은 천사들입니다. 지난 날의 일이라는 이유로 어느새 잊어버린 나의 과오들을 재상영해주는 천사! 그 아이들에게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스승입니다. 아이를 때리는 것은 부모가 자신을 때리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때리지 않는 것은 자기 의로움을 자진해서 부수기 싫다는 반항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때리더라도 죽을 정도로 때리지 마시고, 방치하더라도 일체감이 떨어져나갈 지경으로 방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학대와 버림의 상반된 폭력에 수동적 위치에 놓여 어쩔 수 없이 다 노출된 대상, 그들이 오늘날의 성도입니다. 
 

강구만  10-08-04 17:11 
  
짜고 치는 고스톱 판에 농락당하면서도 항의 한번 해볼 생각조차 못 하는게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지요. 어쩌면 농락당한다는 의식이 있다는 것으로 상당히 수상하기까지 합니다. 만의 하나 믿는 자 일 수도 있기에 그렇지요. 하지만 공정하지도 않고 유치하기까지 한 신에게 눈 한번 흘기지 못하면서 교회로, 신학이란 이름으로 아부하기에 바쁜 현실이 저주속에 태어난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단코 인간들에겐 포착되지 않는, 혹은 너무 쉽게 발가벗겨져 버린 신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하나님입니다. 믿는자나 믿지 않는자나 '없는 하나님' 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참으로‘아무 것도 아닌’피조물의 자리만 고집하면서 우리와 같은 죄의 몸으로 살고,죽으신 하나님, 그래서 성령으로 살리심을 받은 분이 이 땅에 있었고 그 분이 우리와 상관없이, 내 허락 없이 설계한 약속 때문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그 한 사람 예수의 이름 때문에, 날마다 덮치는 십자가의 폭력 앞에 인생 포기각서를 강요당하면서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비참한 외면속에 아주 작은 틈 사이로 잠깐 비치는 은밀한 눈빛에 조바심하며 기다리는 새로운 존재들이 이 땅에 나타나고, 하나님이 인셉션 한 꿈에서 막 깨어난 듯 하나님의 현실을 살게 되는 피 발린 아들들이 이미 나타났기에 십자가는 우리가 농락당해도 좋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고 감히 고백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는‘사랑’입니다
 
 
김영완  10-08-05 00:13 
  
제가 아직 미혼이라 가슴에 와닿지는 않지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을 가끔 보게 되면 유아세례고 뭐고 간에 인간의 실상이 잘 드러나는것 같더군요. 그런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됨니다. 이 아이가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지옥을 가도 마땅하다는 것에 방송을 보며 아멘이 연발...
 
 
김대식  10-08-08 10:25 
  
스플라이스 (Splice, 2009)

스플라이스 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포스터 이미지가 강렬해서 서로들 이거 보자고 개봉날짜만을 기다렸다.
다들 개봉날을 기다리면서 약속시간까지 다 잡았는데
막상 개봉되고 약속이 미뤄지면서
평점을 보니 그리 기대치 만큼 괜찮은 영화가 아니다는 판단에
다들 안 보기로 하고 곧 있으면 다운로드 할 수 있겠다 싶어
약속을 취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운해서 봤는데
생각과는 달리 거의 공포 영화 수준이였다.
공포 영화 딱 질색인데!!

공포라기 보다는 징그러워서 못 볼 정도였다.

장면이 징그럽다기 보다 그 이야기 내용들이 그냥 찝찝하다.
보는 내내 찝찝하기 짝이 없다.

중간에 보다가 박윤진 성도님의 글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맞어 이거다 이거 (요즘 심심하면 맞단다 ㅋㅋㅋ )

대충 내용은 과학자 동거 연인이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한 생명체를 탄생시키는데
매번 실패 중에 우발적인 성공작은 숨긴채로
과학자로써의 호기심으로 그 우발적 생명체에 대한 연구를 몰래 숨기면서 한다.

동물과 인간의 유전자 조합이다.

그런데 성장 속도가 워낙 빨라서
연구를 단 시간내에 빨리 그 과정을 습득하기에 좋다 싶어서
파기 시키지 않고 계속 연구하는 과정에
창조자 과학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넣어서
자신의 부분 부분을 삽입시킴으로써 그 내용물을 관찰하는 가운데에
교육까지 시키고 습득과정까지 다 기록에 남긴다.

여기서 박윤진 성도님의 글이 생각난 이유는
이런말 하기 좀 미안하지만
마치 괴물에게 교육을 시키니 교육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버스 타고 오다가 생각해 보니
정작 괴물인 과학자의 피조물은
동거 연인만의 관계인 사랑을
제일 먼저 습득할려고 달려든다는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을려고 하는 인간처럼 말이다.

선악과 상황이 생각 났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먼저 사랑을 소유할려고 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자기가 사랑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달려든다.
습득한다. 배울려고한다. 지식을 빨아들일려고 한다.

예수님의 죽음도 거치지 않고 말이다.
(십자가의 사건인 언약갱신을 거치지도 않고, 죄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 영화의 괴물이 딱 그런 식이다.
미래의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
바로 직접 사랑이 될려고 사랑을 쟁취할려고 하니
교육이 될 리가 없다.
도리어 그 지식정보는 괴물을 더욱더 괴물 답게 만든다.

그 실패성을 과학자는 인지를 하고
그 실패를 딛고 다시 연구를 몰입 하고자
자신의(여자주인공과학자) 배에 직접 임신 시키는
그야말로 엽기적인 과학자의 창조집착으로 끝을 맺는다.

괴물을 아무리 교육 시켜본들

두 매듭의 연결고리 Splice(Odipus Complex,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

를 잇는 [하나] 됨의 방법을 창조자의 뜻에 따라 하지 않고

부모(창조자) 보다 먼저 머리 꼭대기에 올라 설려는 자녀들의 특성인 죄라는 괴물은
부모를 거치지 않고 사랑을 소유할려는,(독자적인 사랑)
부모 머리 보다 꼭대기에 오를려고 하는 사랑의 주도권을 쟁취할려는 그 괴물성은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못 밖을 길이 없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구자근  10-08-08 18:18    

자식은 괴물이다!
히야~ 자식도 안 낳아본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심오한 분석을 할 수 있는지...
언약갱신의 진수, 십자가를 거친 인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해석이겠지요...?
내 속에 있는 모든 힘을 집중시켜 왕궁의 문지기라도 시켜보며 살고파서
오늘도 속이 타는 이 부모의 심정을 고스란히 열어보여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형제님은 역시 결혼할 필요가 없었군요. 아직까지는. 모든걸 다 알고 계시니^^
자식키우면서 내 속에 있는 괴물을 처음으로 인식했었는데. 얼마나 징그러운지...)

그러나 자식은 천사다! 라는 또하나의 도식이 떠오르네요.
자식은, 부모(십자가의 사랑)도 거치지 않고
끝까지 자기이익만 고집하는 독자적인 십자가의 원수노릇을 충실히 행세함으로써
죄에서는 죄만 나오고, 괴물에게서는 괴물만 나올 수밖에 없는
이땅의 구조를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긍휼로 다가오신 십자가의 사랑만 진리라는 의미에서)
자식은 과연 주께서 보내주신 천사입니다~
내 힘의 집중에서 나오는 것은 자식이고 뭐고 다 괴물일 수밖에 없고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원수같은 자식이고 남편일지라도 모두 다 천사가 맞다는 생각입니다.
숨어있고 은밀해서, 다만 보여줄 때만 알게 되는 십자가의 그 의미가
괴물인 자식을 통해서도 복음적 현실로 다가온다면,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괴물은 없겠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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