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시기로 작정된 선지자

2011년 2월 14일 월요일 오후 12:22:40  김대식


죽이기로 작정된 성도(선지자)


성도란 성령의 일하심이 덮친자이다. 자기 숙제가 없고 성령의 숙제 뿐이다.

성령의 일하심이란 곧 예수님의 믿음이다.

예수님의 믿음이란 곧 사랑 즉 다 이루심이다. 십자가의 용서를 완료하심이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 곧 인간의 복수심은 이 완료를 미완료로써 자기 숙제로 취급해 버린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이란 마귀를 시기(질투)케 못한다. 마귀를 강퍅케, 실족케, 뚜껑열려 열받게 못한다.

오직 예수님의 믿음과 행함만이 마귀를 뚜껑열게 만든다. 원수의 성문을 연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만이 원수를 유발케 한다.

즉 성경말씀은 우리 보라고 준 적이 없다.
말씀 지키라고 우리에게 준 적이 없다는 뜻이다.

성경말씀은 마귀를 겨냥한 것이다.
오로지 마귀만이 말씀을 지킨다.

하라 하지말라를 희한하게 마귀만 지킨다.
그 마귀 아래 갇히듯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갇힌다. 갇혀 봐야 구조를 안다.

즉 마귀 잡기 위한 올무가 성경말씀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인간들이 그 올무라는 걸림돌이 걸려 넘어진다.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셨다.

마귀 잡을려고 쳐 놓은 올무에 쓸데 없이 나대다가 실족하는,
알 필요 없는 선악에 대해서 알아버렸다.
천국에 대한 결핍, 구원에 대한 알 수 없는 욕망에만 미쳐서
예수도 만들어내고 우상도 만들어내고 온갖 양다리를 걸치면서 갇혀버렸다.
셔틀아일랜드처럼 말이다. 감옥이다.
말씀 지켰다는 마귀 자식들이 지 아비 마귀를 숨기고자 동원이 된다.

가장 잘 믿고, 가장 말씀 잘 알고, 가장 말씀을 지켜 , 행하고 실천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그 빈자리인 미끄러운 자리(상좌: 싫어버린바 된 자리의 반대자리)를 괜히 쓰잘데 없이 앉다가
보기좋게 홀라당 미끄러지는 굴욕을 당하는 것이다.

이미 죽이시기로 작정된 자인데
괜히 건드린다.

리마리오처럼 빠다 발린 그 피발린 몸은 괜히 건드리다가 괜히 자빠져 미끄러지는 것이다.

선지자와 같은 성도란 이렇게 가장 잘 믿는다고 다들 부러워하는 그 믿는자의 뚜껑을 연다.
열받게 하는 일을 인위적으로 할 필요조차 없이 그 존재 자체가 미워서
늘 뚜껑열리고 열받는다.

맞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인
성도의 존재 자체는 마귀를 열받게 만든다.

원수의 성문을 활짝 여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특이성이라고 했다. 특이한게 전혀 없는데 정말 특이하다. 성도의 기능이다. 이미 죽이시기로 작정된 자를 괜히 건드려서 정작 건드린자들이 죽는다. 지옥 간다. 팔 어긋맞게 하는 익살 장난이 잉여 곧 은혜(선물)로써 나타난다.)

미움이라는 미움은 다 동원되어서 퍼붓는다.

그러나 무슨놈의 빠다 기름이 그렇게 듬뿍발렸는지 그 미움이 통하지 않는다.

그 미움을 유발케 해서 예수님의 자신의 사랑을

이유도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넉넉히 발라 놓으셨다.

마귀만 힘들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설정해 버린 이상
미움의 역할을 다 해야 하기에 그 강퍅함을 씌우신 그 값을 톡톡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죽이시기로 작정된 자를 쓸데 없이 건드리는 이유가 뭘까?

맞다 예수님의 장난 때문이다.

헤 헤 헤 예수님은 장난 꾸러기 ! (좀 지나간 유행 개그)

이 말이 곧 막살아라 마음대로 사세요 라는 뜻이다.
즉 원수를 설정하는 일에 예수님이 이미 작정했기에
너의 믿음도 설정할 수 없는 원수를 겨냥한 언어이기 때문에
원수 만이 저 말 때문에 실족한다.

맞다. 성경의 말씀은 모두다 실족케 하기 위함이다.

그것을

(딤후 3:16, 개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표현하신다.

‘책망’ ‘바르게함’ ‘의(義)’ 그리고 ‘교육’이라는 의미가 나올려면
반대의 의미를 말씀 스스로가 설정하지
(마치 얼마전 설교에 이웃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원수를 발생케 하는 확산을 선한사마리아 비유가 도리어 유발케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얼마나 감동 스러운가?

감동 곧 은혜 라는 말은 공짜요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을 반드시 거쳐서 나온 의미이다.

그렇다면 내가 나대다가 박살이 아는 그 장난을 당해야 그 장난이 바로 감동임을 알게 된다.

예로 850 대 1로 싸워 보기좋게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쭐꾸덕 미끄러진다. 까마귀가 먹을 것을 준다. 집에 개 키우면 사람이 개에게 밥 준다. 그러나 개가 사람에게 밥을 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이것이 익살(해학), 가로지르기, 잉여, 채널돌리기, 쥐어짜기(동물-피), 가루만들기, 탈물질적 놀이이다. (이것을 사건이라고 한다. 사건이 아니면 즉 장난이 아니면 유기체조직이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것조차도 마귀가 행한다. 눈치 채고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무조건 말씀 지켜야 하는 맹목성에 빠져서 행할 수 밖에 없다. 믿음이란 눈꼽만치도 있을 수 없다.)

즉 이 말은 상대적으로 반드시 상대방에게는 화냄, 찡그림, 안색이 변함, 고개돌리기 안쳐다보기(불뱀사건), 무시하기(어린아이와 반대), 거부하기를 유발하기 위한

장난 중의 장난이 바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다.

거짓말을 기생라합이 하면 마귀는 반대로 참말만 한다.
그것이 바로 거짓이다.

참선지자(참성도)는 이미 죽이시기로 작정이 되었기에 자유롭다.
그가 거짓말(부정) 하는 것 조차도 참이 된다.  대제사장 만 먹는 진설병은 다윗은 먹었다.
몸이 부정한 자가 이미 성전에서 거룩한 물건들은 마음껏 만진다.

그러나 평생을 거룩을 행한 대제사장은 거룩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죽는다.
시체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딸랑 딸랑 방울 달아서 확인후 끌어낸다.
결국 애초부터 인간의 제사 인간의 믿음은 다 장난이다. 어떤 누구도 예외 없다.

장난(잉여)이야 말로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뜨린다.
십자가야 말로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 말씀 스스로가 이루는 완료이다.

여기에 그 반대되는 어두움의 세력들의 흉내들이 그 강퍅성의 값을 톡톡히 한다.


여기에 걸림돌인 세례요한은 이렇게 외친다.

주님의 장난이 옳고 옳고 옳습니다.

두 세력의 장난(소욕:질투)이 불튀기듯 맹렬하게 충돌한다. (사건유발자)

(요 1:19, 개역)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 1:20, 개역)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요 1:21, 개역)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요 1:22, 개역)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요 1:23, 개역)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 1:24, 개역)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자라』
(요 1:25, 개역)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요 1:26, 개역)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요 1:27, 개역)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 1:28, 개역)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요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0, 개역)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 1:31, 개역)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 1:32, 개역)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3, 개역)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요 1:34, 개역)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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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식사 시간에 어머니가 mbc 북극의 눈물이라는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고계셨다. 이미 지난 재방송인데 안성기의 구수한 목소리가 나를 자극 시켰다.

온난화로 인해서 북극 곰을 살리지 않으면 멸종 당하는 것이다.

그 말 때문에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  곰이 영물입니까? 선지자 입니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도 어머니께서 사람말귀 알마먹고 귀신같다는 느낌으로써 자주 영물이라는 표현을 동물들에게 붙이는 것에 대한 시비로써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은 선지자 라고 했다.

오로지 인간만이 악마다.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곰은 선지자다.

이미 죽이시기로 작정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사 11:8, 개역)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선지자인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노래를 불러 가면서 어머니에게 알려드렸다.

천국에 가서야 아 하고 선지자 맞네 라고 외치지
땅에서는 비밀이기에 알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이다 라고 했다.

곰이 멸종 단계에 와 있기에 인간들이 정신 차려서 곰의 멸종을 막고 상생해야 한다는 취지를
과연 곰이 좋아 할까?

곰이 싫어라 한다.
선지자도 아닌게 선지자 행세를 하며 나대기 때문이다. 꼭 누구처럼 말이다.

(롬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9, 개역)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개역)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개역)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즉 성령의 일 곧 선지자의 일은 이미 죽이시기로 작정하심의 완료이다.
그것을 탄식이라고 한다.
썩어 뭉개진 마음, 상한마음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기도를 반성으로 회개로 자꾸 깨끗한 흰종이를 내놓을려고
더러워진 세상을 하이타이를 발라 빨려고 한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반대이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을 내놓으라고 한다.

더러운 것 내 놓았다가는 남이 아닌 가족이, 직장 사람이 아닌 교회사람들이
왕따 시킨다. 그들이 실망해서 나오는 그 탄식 소리에 자존심이 무너질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장난 곧 선지자의 일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마귀를 겨냥한 일이다.

원수의 뚜껑을 열게 하는 열받게 하는 유일한 일은 어리석은 일 곧 장난이다.

그 장난을 따라해본든 이미 고정화된 낡은 것이다.

새 장난은 오로지 십자가로부터 나온다. 십자가만이 인간의 육의 소욕 곧 마귀의 소욕을 겨냥한 유일한 반대의 일이다. 그것을 선하심이라고 한다.

어떻게 심하디 심한 장난이 선하심일까?

인간은 선 조차도 소유하면 바닥을 치기는커녕 바벨탑 쌓는다.
하여튼 귀신이다. 쌓기의 달인이다.

그러나 주님의 선하심은 그 반대다. 무너뜨리기의 달인이다.
바닥을 뜯고 그 바닥의 바닥 에 무엇이 있는가를 반드시 드러내신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지혜만이 덩그라니 그 자리를 뿌리로써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무조건 빈자리로 만든다.

바보 같이 그 자리 앉으면 쭐끄덕 미끄러진다.

이런 장난을 왜 했냐 도대제 누가 이런 심한 장난을 치는가를 따질때에
(따질때에 참선지자는 자살요청으로써 변론하게 된다. 비로소 예수님의 장난이 아니였다면
자신의 장난침을 볼 수가 없다. 그 장난이 고맙다. 감사하다. 왜냐? 그렇게 자신의 진지하게 행하고 지켰던 믿음들이 주님이 보시기에 쓰잘데 없는 장난이기 때문임을 오직 예수님의 장난(자작극) 때문에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살아나버리는 장난이야 말로 인간이 죽음이라는 무기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은 그 진지한 진리사수가 장난임을 알기 때문이다.)

선지자 자신이 장난쳤음이 발각이 된다.

욥도 그것을 자신의 고통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였음을 입을 틀어막고 가리우고 잘못했슴더 제가 쥐 뿔도 모르면서 까불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독사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을 정도의 천국의 실제상황을
감히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선악이라는 장난
말씀 지켰다는 장난
예수님을 믿었다는 장난 (사실은 인간의 믿음이란 복수심이라고 지난해 글에 말했다)
하라 하지말라를 지켰습니다 라는 장난

이것이 예수님의 장난이 아니였다면

마귀 아래에서 장난쳤음을 알 길이 없다.

마귀 잡을려고 성경말씀을 내 놓았다.

그 마귀 장난을 짤라버리는 예수님의 장난 만이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이다.

ps
참!! 흰 눈이 온 세상을 다 덮어버렸다.

이 흰 눈도 이 세상을 다 얼어 죽여버리는 추위도 다 장난이라고 했다.

즉 탈유기체놀이다. 니 똥이 더럽니 내 똥이 더럽니 서로 우열을 잴때에
입을 띄지 못하도록 시선을 가로지르는 죽음의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어버린다.

인간들 스스로가 금을 긋고 경계선을 나누는 그 헛짖도 흰 눈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다.

먹보다 더 검은 죄 만이
썩고 뭉드러진 마음은 상한 마음만이

이 흰 눈이 고맙다. 눈이 선지자 이기 때문이다.

모두다 불 태워 버리기 때문이다.

이 소멸하는 불이 고마운 자는 많이 탕감 받은 자 뿐이다.

(사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 17:9, 개역)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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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5일 화요일 오전 10:44:53

아침에 외래종 쥐가 과거 모피 생산용으로 키워젔다가 돈이 안되다 보니 방치 되어
자기들 끼리 살고자 닥치는대로 잡아 먹다 보니 환경 파괴가 되어
지금 제주도에서 비상이 걸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쥐도 선지자다.

아무리 없애고 없애고 죽여도 또 등장한다.
(몇년전 어떤 청년이 질문했다. 에반겔리온에 나오는 사도들을 바로 이런 시각에서 보다보니 겁이나서 물었다. 또 어떤 분이 종말에 아기를 임신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라 라는 말씀을 보고 겁을 먹고 질문한 적이 있다.)

소멸성을 보여주는 선지자야 말로
이미 죽이시기로 작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말을 멈추고자 죽여본들 소용없다.

결국 이런 선지자의 죽음은 종말을 더더욱 재촉케 하는 시험(실족케 하는 장난)으로

은혜(장난: 가로지르기, 잉여)을 더욱 더 풍성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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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명화극장.슈퍼맨이었던 사나이.110212.HDTV.x264.720p-Ernie.mkv

2011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2:19:06

광기야 말로 인류 생존의 도움이다.

들뢰즈 철학에서 정신병이야 말로
법(오이디푸스)의 유일한 탈출구 이다.

탈영토, 탈유기체 만이

고착된 우상이라는 법으로 부터의 새로움의 새창조를 보게 된다.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부정하다고 미쳤다고 죽여버린 그 십자가의 저주에서 온다.

유일한 도움이다.
유일한 창조이다.

모두가 갇혀 버린 사망의 권세에서의 구원의 구멍을 뚫는 뿔이다.

이 뿔의 도움이 비록 아프게 다가와도
부정하고 어리석게 다가와도

이 도움의 편지는 반드시 그 목적지에 이미 도착한 채로
넉넉하게 도착한다.

동물 되기 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이 동물 되기가 광기에 빠진 영웅이듯이 ...

그러나 유일하게 인간 만이 동물 되기를 거부한다.

모든 도움을 차단하고자 하는 그야말로 마귀의 장난만을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만든 적이 없는 인간이다.

평생을 죄 책감만 지면서 살아가는 척 하는 죽은 자
죽기를 무서워 평생 사망의 종노릇만 하는

그래서 광기의 선지자만이

보는 자는 더 보고 못 보는 자는 더욱더 못 보도록 하는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도통 도움이 어디서 오는 줄 모르게 차단하는 것 만이 유일한 구원(도움:용서)이듯이,
확정된 미래완료를 냉기 가득차게 외친다.

이것이야 말로 성령이 불타는 교회이다.

죽이시기로 작정된 선지자 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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