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파라오 왕의 아비 됨과 사도행전의 주의 주 되심

2011년 2월 28일 월요일 오전 8:02:12   김대식


(창 45:8, 개역)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되다 라는 의미는 고정적인 유기체에서 흐물흐물한 사랑덩어리로 완료 성취 되었다는 의미이다.

새피조물이다는 의미도 그러하다. 그렇기에 동시에 반드시 선민사상이라는 것이 깨지면서 반대적인 의미로 다가오는데 정작 문자를 소유해 버리고 자신의 육체에 말씀의 의미를 따로 챙겨버리면 정작 단어나 문자나 자신의 그릇에 담아버리고 저장해 버리는데 성공했다손 취급해도 도리어 그 새피조물의 의미에 올무로 걸려드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회라는 의미이다. 단 한명도 빠진적 없이 목사는 교회를 삼켜버린다. 사유화 한다. 돈을 싫어하는 것을 슬로건을 내걸면 돈 싫어하는 참 괜찮은 목사 라는 타이틀로 교회를 삼켜 버리고, 개혁을 참 잘 하는 목사로 내걸면, 건전한 신학을 내거는 목사, 등등의 것으로 교회를 삼키지만

정작 교회라는 의미는 논개다. 물귀신 작전이다. 같이 빠져 죽자 라는 것이다.
괜히 교회를 소유하고, 사유화 하니 걸려든 것이다.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의 의미들은 올무다. 걸려들 놈은 제발 걸려들어라 이다.

그래서 최근 몇 달 동안 몇몇 분들에게 아주 강력하게 증거했다.

제발 성경 말씀 좀 지키지 말라고

성경 말씀은 마귀가 지키라고 준 것이지 우리 보고 지키라고 준 적이 없다고 말이다.

말씀 자체가 마귀를 겨냥한 것 뿐이다.
우리를 겨냥한 것은 일체 없다.

그런데 좀처럼 마귀는 안 보이고
말씀은 보이니
말씀을 냉큼 먹어버린다. 선악과처럼 말이다.

예수님의 주 되심은 바로 이런 배경을 깔고 등장 한다.

요셉의 바로 왕의 아비됨과 온 애굽 나라 집의 주 가 됨은

곧 가로지름이다.

야곱이라는 요셉의 아비를 가뭄과 죽음 속으로 몰아간다.
여기에 온 나라가 같이 가뭄과 죽음 속으로 몰려 버린다.

그리고 요셉은 애굽의 주가 되어서
즉 마귀의 주가 되어서

야곱을 애굽 나라의 뚜껑을 여는
원수의 성문을 여는 이스라엘로 만드는 작업인 주 라는 작업을 펼친다.

이미 야곱에게는 주가 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정말 야곱의 주가 주가 맞다면 요셉의 주 됨과 일치 결탁해야 한다.

그 결탁의 유일한 확인 물증은 곧 피흘림 죽음이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약속을 캐내는 것이다.

야곱의 배를 째고 갈라서 주께서 창세전에 심은 예정된 십자가의 피가 발렸는지 아는 유일한 길이다.

창세전의 소유물(성령의 소유)이니 야곱의 어떠한 행동 마음자세 와는 일체 무관하다. 사랑실천? 말씀 지키기? 다 소용없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창세전부터 무조건 사랑 편애 받기로 되어 있는 그 약속의 용서의 피를 배를 가르고 찾아내는 것이 바로

주 되심 이다.

이스라엘이란 반드시 배를 갈라서 잃어버린 보물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나라 비유이다.

여기에 유다는 다말로부터 따먹힘을 당해서(부정적 보편성 : 성령의 은사) 창녀로 변한 며느리 다말에게 물증을 3가지 잡혀 버린다.

그 더러운 부정적 물건이 도리어 자신을 살리는 가로지는 물건이 될 줄 누가 알았으리야?

그러나 정작 그 부정적 물건은 다말이 유다로부터 반드시 뽑아 내어야 할 죄인의 자리이다.
감히 건방지게 죄인의 자리가 아닌 죽지도 않고 약속의 자리에 앉아 버팅기고 있으니

반드시 미끄러뜨리는 것이다. 줄꾸덕 미끄러지는 굴욕 속에서
그 죽음 속에서

자신의 형제들의 미움 속에 죽은 주께서 사랑하고 편애한 자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요셉의 죽음이다. 구덩이에 파 묻어 죽여버린 요셉.

그 부정적 보편성을 다말을 반드시 끄집어 내어야 한다. 시아버지 유다.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로 몰아가는 길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오로지 우리 손에 죽는 자 만이 하실수 있다.

우리 손에서 저 화냥년을 불 태워 죽여라. 그것도 아주 아주 약속(말씀의 법) 대로 처형해 불태워 죽이는 것이다.

유다의 깨끗한 약속관을 쳐 버려서 다말의 더러운 약속관을 세우는 것이 주의 주 되심이다.

요셉의 주 됨은 바로 이것을 뽑아 내는 것이다. 그래서 간첩으로 몰아가고 계속 뺑뺑이 돌려서

야곱이라는 최후의 보루 까지 끝까지 땡겨와야 한다. 야곱의 자리는 원수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원수의 뚜껑을 열지 않겠는가? 이것이 주의 주 되심이다.

애굽 나라의 주 가 되었으면 되었지 뭘 또 주의 주 되심인가?
아니다. 주로 세우고 그 주를 다시 주가 쳐 버리는 식이다.

성전 세우라고 해 놓고 그 성전을 허물어 뜨려서 다시는 다시 세울 필요 없는 참성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식이다.

이 말은 다른 몸을 겨냥한 것이다. 바로 육체 라는 몸을 대비해 예수님의 몸은 모든 인간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겠다는 새로운 창조를 기존 창조를 깨면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 어리석고 미련한 허무한 일에 모든 피조물이 동참 한다.
마귀 씌인 인간만이 유일하게 끝까지 반발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뒤틀림 가로지르기 이다.

이스라엘 자체가 잃어버림 속에서 되찾은 가로지름 그 자체인데

항상 우리는 고착된 유기체로 남고자 한다.

사도행전인 성령행전은 바로 이 유기체들인 세상과 예수님의 주 되심 앞에 무릎 꿇고 종이 된 자들에게 똑깥이 양쪽다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으로써 동원이 된다.

한 쪽은 에서처럼 미움 받기로 작정된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 그릇으로써
또 한 쪽은 야곱처럼 사랑 받기로 작정된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 그릇으로써

사랑 받기로 되어 있다는 말은 매일 매일 쏟아내는 것은 결국 죄 뿐임을

그 죄를 매일 매일 발각 당하고 발가벗겨지는 잃어버리는 특이성 곧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예 된다. 이것이 세례 곧 참예이다. 그래서 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 받는 지적 받는 감사를 누리게 된다. 사랑하기에 사생아가 아니기에 매를 대신다. 그러나 사생아는 매 조차 없다. 누가 때려주는 끝까지 사랑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지적 받지 않는 죄를 지적 받는 것은 오로지 잃어버린 자기 양 뿐이다.

그래서 주의 주 되심은 매일 매일 새로운 완료된 약속 앞에, 또는 주 앞에

그 약속과 주를 쳐 버리고, 다시 공급 되는 약속과 주를 제공한다.

어제까지 고인 물은 소용 없다. 새로운 죄, 오늘의 상상도 못한 요셉처럼 새롭게 뒤집어 씌운 간첩(죄) 앞에서 우리는 새로 공급 되는 주의 주 되심이 아니면 용서 받을 길이 없는
(유일한 가로지르기 탈주는 십자가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십자가 조차 사유화 하지만 참보기좋게도 그 빈자리는 빠다발린 미끄러운 자리다. 앉자마자 미끄러진다. 미끄러져 홈패인 그 상처난 자리에서 새 살이 헌 살을 탈주하면서 밀어내며 끊임없이 분절 분화 한다. 늘 새롭게 공급 되는 생명수처럼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생명샘이다. 새 살이 돋은 미리암이 부끄 부끄 자신이 비방했던 구스 여인 보다 더 새색시처럼 어린아이 피부가 되어서야 비로소 놀래 자빠진다. 이것이 긍휼의 능력이다. 피의 능력이다. 흘리시고 흘리시고 또 흘려주시는 생명수가 아니면 우리는 고인물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 뻔뻔스럽게도 매일 매일 흘리시는 그 피로써만 아하 이 생명수가 옳았음을 외칠 뿐이다.)

그 십자가의 피의 생생한 현실을

주님 혼자 신나게 펼치신다. 십자가의 영인 성령은 이 주의 주 되심만 적용할 뿐이다.

그 앞에서 어제 까지 소유 했다고 좋아라 했던 내 소유물이 된 사적인 주 되심은 장난 이였음을

주의 주 되심은 시원하게 빼앗고 날려 버린다.

또 용서 받는 감사 속에서

단번에 피흘려 이루신 주의 사랑의 넉넉한 피가

나 보다 옳았습니다 라고만 노래 할 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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