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감사합니다 또 건져 주시네요

2011년 3월 2일 수요일 오전 10:50:08  김대식


아벨은 자기 제사가 없다. 있어도 삭제 당함 당한다.(노아홍수처럼 심판이다. 싹슬이 빼앗김이다.)
그저 미래의 예수님의 제사만 쳐다보고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 제사가 있다. 삭제 해도 다시 자신의 제사를 또 세운다. (바벨탑처럼 노아홍수의 심판의 흔적을 삭제해 버린다. 그리고 결집 일치 협동 조직 시스템화 한다.)

아벨은 자신이 제사를 도저히 드릴 수가 없어서 예수님의 개입을 요청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아무리 봐도 자기에서 나올수 없는 답이기에 예수님의 숙제로 떠 넘겨버리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낯짝 두꺼운 모습이다. 이것이 반칙이라는 사랑 곧 긍휼을 바라는 모습이다. (성전 안의 두 사람 중 세리 강도 창녀의 모습이다. 감히 고개를 못 든다.)

(시 121: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그러나 가인은 제사의 달인이다. 제사 지키기의 왕이니 구지 누구의 도움이 필요가 없다.
누구의 개입이나 도움이 필요가 없으니 가인의 후손들은 나 보다 제사 잘 드리는 놈 나와 보라는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숙제로 자신의 솜씨로 충분하다. (성전의 두 사람 중 바리새인 저 세리 같지 않음을 감사함과, 말씀지킨것에 감사)

(창 4:16, 개역)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창 4:17, 개역)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 4:18, 개역)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 4:19, 개역)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창 4:20, 개역)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 4:21, 개역)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 4:22, 개역)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창 4:23, 개역)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개역)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독자적인 성곽의 유기체인 영웅들의 노래는 누구의 도움이 필요없는 자족과 자기성취감을 만끽하는 자기영광의 노래다.

여기에 이 인간영웅의 영광을 배경을 깔고 아벨 대신 그 죽음의 터 위에서 부활의 약속의 족보 셋의 족보가 가인의 족보와 차이나게 등장한다.

즉 가인의 족보는 이미 끝났고 인간 영웅의 영광의 노래는
예수님의 족보에 짖밟힘을 당하는 예수님의 영광이 차이나게 구별된 참 쉬운 영광이 드러난다.

어둠을 배경으로 깔고 빛의 그 차이성을 극대화 시키니
가인의 족보는 널리 널리 퍼쳐서 깔려야 [낳았더라 족보]
그 위를 예수님의 약속이 등장하는 것이다.

셋의 족보 일명 [죽었더라 족보]는
빨리 빨리 죽어나가버린다.(빨리? 900년인데?)
역사(육)의 종결 뒤에 묵시의 개입을 바라면서
약속의 개입을 노아 홍수심판을 고대하면서
퍼뜩 퍼뜩 죽어나아간다. 종말신앙이다.

그러나 가인의 족보는 노아홍수심판을 더욱더 빛나게 해주는
잔뜩 기념비 될만한 부럽고 영웅스러운것들
곧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을 잔뜩 세운다.
그래야 허물어지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는 종말(심판)이 빛나는 것이다.

허물어질 것도 없는데 심판의 극적 요소가 다가올 리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 허무하게 허물어 질 것에 반해버려서
모든 자신들의 꿈들을 그 허상에 심어서 모두다 쳐다 볼 그 때

타이밍 기가막히게 허물어 버려야 허무를 실감하게 될 것 아닌가?

우상이라는 배경을 깔지 않고서는 약속이라는 보물은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마귀를 거치지 않고서는 알 리가 없다.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는 초등학문인 신학과 철학을 거치지 않고서는 알 리가 없다.

어려운게 아니다 차이나는 것이기에 참 쉽다.

성령의 소욕은 육의 소욕에 무조건 반대이기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만 치닫는다.

모두다 메시아를 바라볼때에
예수님은 바알세불 걸린 마귀의 왕의 모습으로만 비추일 뿐이다.

바로 이렇게 우리의 손에 붙잡히거나
포착 될 수 없는 모습으로 오신 것에 참 감사하다.

만약 내가 충분히 믿을 만 하고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예수라면 이미 그 예수는 내 손에 길들여진 가짜 예수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가 선택하고 믿어버린 예수는 내가 버리고 내가 미워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 해 버리는 예수일 뿐이다. 가룟유다가 그러했다.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예수님이기에(베드로)
내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기에 꼬끼오 x 3 부정적 물증을 담보로 삼아서(죄인 맞제?)
오직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그 부인 못한 증거로
사랑을 완성 하신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예수님이
사랑으로 다가오시니
참 감사하다.

사랑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너무 너무 감사한가?

오로지 여기에 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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