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사막)화로 도시집중과 원수의 성문열기

2011년 3월 3일 목요일 오전 10:57:27  김대식


사막화 되는 지구 구석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를 봤다.

노마니즘이라는 유목생활이 불가능한 시대가 오고 말았다.
가뭄은 노마니즘을 활발케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도시 집중화를 초래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애굽에 이스라엘을 탁란 시키는 방식과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에서 남성씨앗의 단절과 약속의 씨앗의 전개방식이다.

즉 창조라는 새로움의 생성은 주님의 솜씨이지 인간의 솜씨가 될 수가 없다.

아무리 다니엘서의 말씀을 보고 묵시운동을 펼쳐 노마니즘을 추구한 바리새인 일지언정
또 남몰래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 선생삼아 그 노마니즘(가로지르기:탈주)의 지혜를 한 수 배울려고 요청해 본들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뿐이다.

육 자체가 갇히는 것이 목적인데 감히 영을 추구하다니?

감히 율법 아래 갇혀버린 육을 건짐받는 구원을 탐하다니 말이다.

(요 3:1, 개역)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 3:2, 개역)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개역)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1,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묵시는 너희 몸은 안된 다는 다른 몸의 제시 이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다.

즉 몸이 다른 몸이어야 하지 너의 그 몸으로는 안 된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이스라엘 선생일지라도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서는 불가능한 숙제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인간의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믿음이란 복수심이다 라고 한다.
그 몸에서 나오는 복수이니 결국 다른 몸 예수님에 대한 복수이다.

예수님께서 참 잘 하신 것이 바로 니고데모의 뚜껑을 열어버렸다는 것이다.
뚜껑열린 니고데모는 자신의 숙제인 믿음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사고방식과 일치하게 된다.

마치 아벨은 다른 몸을 기다렸지 자신의 몸으로 이루는 숙제(제사)를 포기해 버렸다.
그것이 더 나은 제사이다.

그래서 가인은 그 아벨의 몸을 죽여버린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인의 몸을 예수님은 이마표를 주면서까지 확대 확장 시킨다.
자살하면 안되니 말이다. (마귀는 그가 맡은 일을 끝까지 하는 마귀다움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육의 족보와 예수님의 족보의 전쟁이 양상이 우주끝까지 펼쳐진다. 주의 주 되심이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이다.

그 전쟁의 기계들로써 역사는 가득 가득 틈새가 없을 정도로
조밀 조밀하게 빽빽이 역사 구석구석을 채우도록 되어 있다.

약속의 자녀는 그 역사 구석 구석 속에 배치된 현장에서 역사를 구멍 뚫어버리고
역사를 열받게 뚜껑열게 만드는 소동을 일으키는 성령의 은사(사건)를 받은 자인 미끼들이다.
즉 그것 조차도 자신의 숙제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의 숙제를 목격해야할 미끼이다.

고래들 싸움에 등터져 죽어야 할 새우이다. 아벨처럼 다른 몸 쳐다보며 자신의 몸은 원수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원수의 천사의 가면을 벗기는 숨겨진 그 악마성(강퍅함)을 들추어내는
얄밉기 짝이 없는 깨짝 개짝 속을 긁는 일에 원치않게도 당첨된 자들이다.

논개처럼 열가락지 끼고 자폭하는 목베인 영혼이다.
목이 왜 베일까? 머리를 왜 상함 당할까?
논개 자신의 목이 베임을 가지고 적장의 목이 베였다고 뒤짚어 씌우기 위함이다.

(막 9:2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이 일에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이다.
왜?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육의 최종 종착점은 육이니 되돌아가는 것은 육 뿐이다.

그러나 영의 일은 자신의 몸에서 탈출해 다른 몸으로의 입성이다.

즉 소욕이다.

그래서 아무나 그 자리를 앉을 수 없다. 혹시 앉을까 싶어서 걱정하시는 분이 있다.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어느 정도로 걱정하는지? 두려워 하실 정도이다.

절대 절대 네버 네버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빠다 기름 바르고. 미끌 미끌하게 만들어서 앉자마자 쭐꾸덕 미끄러지게 만들어 버린다.

마치 지나치게 강박관념의 정신병자처럼 철수시킨 에덴동산을 이중 삼중 철벽수비로 모잘라서
24시간 불칼 레이저 화염방사기를 쥐고 천사 보드가드가 지키도록 하신것과 같다.
이미 철수 자체가 접근 불가인데
혹시나 오는 놈 있을까 싶어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철저하게 페쇄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서의 천국은 바로 그런 곳이다.

뭐 천국 오겠다고?
뭐~~ 구원 받겠다고?
뭐~~~ 들을 귀? 보는 눈?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 있다고?

오냐 절대 없도록 만들어버리겠다는 다짐의 다짐을 보여주는 것이 천국이다.


그러나 [다른 몸]에게는 있는데도 더 있도록 부어버린다. 충만에 충만이다.

분명 죽임당한 잃어버림당한 아벨인데
믿음으로 다시 살아 예수님이라는 다른 몸에서 늘 증거 되고 되살아난다.

약속의 몸이기 때문에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단절된 족보에서 분명 남자의 씨앗도 없는데 너끈히 예수님의 족보를 능히 이루고도 남는다.
약속의 몸이 이루어진다는 뜻이지

장애인 단체에서 구호로 외치는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들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다 라는 자존심 기죽지 말자 라는 뜻이 아니다.

여러 과부 속에서 한 과부이며
여러 문둥병자 속에서 한 문둥병자로써

다른 몸이지

인간이 이미 자기 몸을 가진 이상 다른 몸은 쳐다보거나 만지거나 해석할 수 있는 지혜는 없다.

다니엘이라는 인자의 몸은
약속의 땅의 단절 곧 사막화 광야화로써 떠돌아 권력이 집중된 곳에 안착케 된다.

거기서 본인도 원하지 않았던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고서는

바로 왕의 뚜껑을 열 듯

마귀의 성문을 열어버리게 된다.

성도란 마귀의 뚜껑을 여는 자이다.
하기 싫어도 다른 몸이니 어쩔수가 없다.

마치 아벨이 가인의 뚜껑을 열어버려서
안색을 변하게 만드는 열받게 만드는 일을 눈치 없이 하듯이 말이다.
뚜껑 열어보니
죄의 소원이 들어 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의 뚜껑을 열어보니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다.

그래서 죽임당한다.

서로의 뚜껑을 열도록 되어 있고
서로의 땅꽁 껍질을 발가벗겨 보니

그 속살이 하나는 육
하나는 다른 몸이 들어 있는 것이다.

까 보기 전 까지는 알 길이 없다.

인간이 아무리 자작극을 벌려 보아도(소위 종말신앙을 소유해도 그것조차도 육이다. 묵시운동하고 하나님나라 운동을 해도 소용없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따로 있다. 따로 있음을 못 증거하니 답답어서 자기가 해 버리니 사무엘선지자가 숨었다가 얄밉게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리 할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외쳐 보아도 소용없다. 믿어도 소용 없다.

도리어 변론의 의미를 통해서(변화산에서 내려오니 변론이 벌어졌다.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는 것에 제자들은 못 고친다.) 마귀와 죽음을 통해서 육이 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막 9:16, 개역)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막 9:17, 개역)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막 9:18, 개역)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 9:19,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막 9:20, 개역)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막 9:21, 개역)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막 9:22, 개역)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막 9:2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4, 개역)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막 9:25, 개역)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막 9:26, 개역)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막 9:27, 개역)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막 9:28, 개역)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9:29, 개역)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즉 변론은 첩경이라는 울극불극한 주름을 무슨 수로 다름질하듯이 펼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이 첩경이라는 불가능성 즉 마귀 문제와 죽음 문제를 두고 말한다.

마귀를 거쳐서 인자를 논하고 즉 변론하고
죽음을 거쳐서 인자를 논하라 라는 뜻이다.

마귀도 죽음도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된 소품이다.

그래서 마귀를 뚜껑 열고
죽음도 뚜껑 열고
원수도 뚜껑 열수 있는 분은

너의 그런 몸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변화된 몸이다.
(변화된 몸의 등장이 언약으로써 나타났다면 그 배경은 비언약인 도시집중의 몸의 등장을 전제로 한다. 그 비언약의 차이로 나타난 새 몸이다. 니고데모는 지식이 집결되는 몸이 되기를 바랬다. 그런 육으로 사망의 문을 열수가 없다. 도리어 뚜껑열림을 당할 처지에 놓여진 사망 그 자체임이 드러난다. 정작 니고데모의 몸과 대비되는 몸으로써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의 신체는 물동이처럼 더 이상 채울 필요 없이 그릇을 깨뜨린다. 그 몸이 교회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몸이다.)

새피조물은 죽어나가 떨어지면서 집요할 정도로 마귀의 뚜겅을 활짝 열어 재끼는 일을 하는 자 이다. 그것 때문에 새피조물이 된 것이다. 즉 기능이다.

잃어버림이라는 특이성의 기능은 마귀를 열받게 하는 지독한 편애를
지상에서는 지독한 미움으로써 당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몸 때문에 지독한 미움을 받지 못하는 몸은

다른 몸을 구지 쳐다볼려고 하지 않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도움을 구하는 기도 만이

마귀 죽음 원수

라는 뚜껑을 활짝 열어재낀다.

인간의 육의 몸이 펼치는 믿음이라는 명분으로 진행되는 자작극인 장난은
예수님이라는 다른 몸이 펼치는 자작극으로 인해

그 악마성이 활짝 열려 죄의 소원으로 안색이 변하게 된다.

바로 이렇게 성경은 마귀만을 겨냥한 것이지

인간들 지키라고 말씀이 없다.

마귀만이 지킬려고 달려든다.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말씀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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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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