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십자가)을 거두지 마옵소서

동물-되기 (전쟁기계 되기) 블랙 십자가 : 블랙스완 2010

2011년 3월 9일 수요일 오전 9:53:07  김대식




시놉시스 : 당신의 심장을 할퀴는 사이코 섹슈얼 스릴러 흑조를 탐한 백조의 핏빛 도발!
뉴욕 발레단의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연약하지만, 순수하고 우아한 '백조' 연기로는 단연 최고로 꼽히는 발레리나. 새롭게 각색한 '백조의 호수' 공연을 앞두고, 감독 토마스(뱅상 카셀)는 니나를 '백조'와 '흑조'라는 1인 2역의 주역으로 발탁한다. 하지만, 완벽한 '백조' 연기와 달리 도발적인 '흑조'를 연기하는 데에는 어딘지 불안하다. 게다가 새로 입단한 릴리(밀라 쿠니스)는. 니나처럼 정교한 테크닉을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관능적인 매력은 뿜어내, 은근히 그녀와 비교된다. 점차 스타덤에 대한 압박과 이 세상의 모두가 자신을 파괴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니나. 급기야 그녀의 성공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던 엄마마저 위협적인 존재로 돌변한 상황에서 그녀는 내면에 감춰진 어두운 면을 서서히 표출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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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Swan 2010


간만에 흡입력이 뛰어난 영화를 봤다.

블랙스완 흑조

일종의 돌연변이 괴물이다.
곧 균열된 자아 이다 (영화포스터 흘러내린-가로지른 머리카락은 홈페임 균열이다)

백조 라는 말 자체가 하얗데
그 하얗을 가로질러서 차이가 나는 흑조가 등장했다는 것은
백조의 세계를 뒤짚어 엎어버리는 탈주의 임계점이 되는 것이다.
흑조가 백조의 악마성을 뚜껑여는 원수의 성문을 여는 특이점이 된다.

즉 뚜껑열었다는 것은 악마의 성문을 활짝 열어서 그 블랙홀에 기존의 고정된 것은 빨려들어가 진공청소기에 흡입이 되어 삭제 차단 단절 시키겠다는 것이다.

다시 블랙혹(십자가)에서 탄생(잉태)한 그것으로 재배치를 이루겠다 라는 것이 바로
사건 자체가 되는 블랙 스완이다.

이것을 동물 되기로 표현한다. 죄인으로 오심이다. 주의 주 되기 라는 기능이다.

일종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아브라함이 가는 곳 마다 두 패가 나누어져서 복과 저주가 갈려진다.

믿음의 등장으로 육, 땅(공간), 역사(시간), 묵시(계시)는 재편성 재배치가 된다.

약속의 등장은 마치 동물 되기처럼 부정적인 십자가의 저주로 인해
복과 저주 곧 천국과 지옥을 가른다.

이 땅에서의 가시화가 바로 사건의 주체가 되는
차이나는 상대적인 블랙 십자가 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학생회 설교가 생각 났다.
죽음 보다 더 독한 것이 바로 여자다 라고
즉 여자를 밝히면 망한다 라는 뜻으로 전도서에 언급되는 말이다.

(전 7:20, 개역)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전 7:21, 개역)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전 7:22, 개역)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전 7:23, 개역)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전 7:24, 개역)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전 7:25, 개역)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 7:26, 개역)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전 7:27, 개역)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전 7:28, 개역)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毬じ?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전 7:29, 개역)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그러나 여자를 밝히다가 구원받은자도 있다. ㅋㅋㅋ
그렇다고 성경말씀 문자를 내 쪽으로 끌어당겨 지킬수 있는 문제가 안된다.
동시에 이 지혜는 인간의 많은 꾀를 유발케 한다. 잔머리 굴려도 소용없다. 도리어 걸려드는 올무의 말씀이 된다.
성경말씀 전체는 올무다. 지킬 것이 없다.
오로지 마귀를 겨냥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여자를 밝히다가 약속을 알게 된 자가 바로 시아버지 유다이다.

그러나 정작 유다는 괴로움을 당한다. 평생을 그 씻을수 없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비록 그럴지라도 자신의 그 부정적인 수치 곧 죄인 됨이 언제 써먹게 되는고 하니?
바로 요셉이 아비의 죽음과 아이의 죽음을 같이 결탁 시킬 때 그 때 3초 써먹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여자는 남자를 가로지르는 사건유발자로 동원이 된다.
물론 여자도 두 여자이다. 두 언약 때문이다.
선지자도 반드시 두 선지자이듯이 말이다.
메시아도 두 메시아 이고, 하나님도 반드시 두 하나님이다.
우상이냐 여호와냐? 거짓선지자냐 참선지자냐? 백조냐 흑조냐?

여기에 인간이 끼여들 입장이 못 되고 그저 자신에게 덮쳐진 신을 내 뱉을 수 밖에 없는 어쩔수 없는 존재이다.
이미 유대인에게 메시아로써 마귀가 장악한 판국에
예수님이라는 메시아를 구지 믿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 마당을 깔고서 새로운 메시아를 증거 하니
제자도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마귀라는 메시아의 제자인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새로 뽑은 어중이 떠중이 각기 제길로 가는 양같은 제자들을 뽑는 것이다. 항상 상대적이다. 그러니

위의 충돌은 곧 하급의 배치물 까지도 충돌 곧 전쟁으로 이어진다.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백조의 호수 라는 음악이 악보라는 구조가 이미 구축되어서
매번 공연으로 펼쳐진다.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이제 이 잉여의 세계에 새로운 배치물들이
도구 곧 배우역할로써 배치가 된다.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중요한 것은(주인공은) 인간도 배우도 음악연주자도 무대설치 무대도 아니다.

주체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블랙홀, 이 블랙홀을 들을려고 사람들은 비싼 돈을 주고
비싼 인생을 바쳐가면서 배우자로 연주자로 그 무대라는 구조에 서게 된다.

그러나 블랙홀은 소모성이다. 선지자다. 모조리 다 삭제하고 또 언제그랬냐는둥 다시 재배치 시켜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니 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 불멸성에 사람들은 중독되어 몰입하게 된다.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것에 모든 것은 배치 된다.

주체는 잉여라는 블랙홀인 음악의 악보다. 이것이 주체다.
불로 태워도 그 음율은 다시 살아나 인간의 갈증을 유발케 되어 다시 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살을 붙여서 스토리를 만들고
그 스토리는 인간의 신체성(스토리텔링)에 가장 적합하게 재해석 재구성이라는 카피?
원본은 눈에 안 보이고 사본들이 재창작 된다.

이 용어를 뭐라고 했는데 까먹었다.
미학과 철학에서 쓰는 용어인데 사본이 원본이 되어버리는 시뮬라시옹? 아! 이거 아닌데
아 용어가 생각이 안 나네

들뢰즈 말처럼 사본은 원본을 전제로 모방하는데, 거꾸로 원본은 사본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쌍둥이 방법 이것을 인자의 주 되심이라고 자주 언급 했는데 아무튼 넘어가고

바리새인이 말하는 그 가짜 복음을 가지고서 (재료로 삼아)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그 차이로 증거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반대를 위한 반대)
그래서 반드시 마귀의 성경해석이 나와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심이
가짜가 진짜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래 니 진짜 해라 나 가짜 하마 라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가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이 진짜 인간이라고 우기는 인간 보다 더 참인간 되심

인자-되기 를 완성하심이 주의 주 되심이다.

그 정점이 바로 십자가 상에서 인간의 숨겨진 악마성이 드러난다.
인자-되기 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인간의 악마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인자 되신 예수님은 인간들로부터 악마취급 할 수밖에 없는
완료를 십자가가 영원히 규정해 버렸다.

이 저주를 풀자 아무도 없다.

어릴적 동화가 그러하다 거지왕자? 맞나 제목도 다 까먹었는데
[거지와 왕자 The Prince and the Pauper] 라는 마크 트웨인 Mark Twain 의 동화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거지와 왕자의 이야기로써 팔을 어긋맞게 하는 탈주의 이탈이
도리어 기존의 구축한 지혜보다 더 지혜로움으로써 등장하는 이야기 이듯(헨리 8세)

백조 보다 더 백조 같은
하얗 백조의 이단아(불의한) 블랙 백조가 더 아름답게 (더 나은 제사: 십자가)

인간 보다 동물이 더 인간 답고 (선지자기능)
남자 보다 독한 여자가 더 남자 답고 즉 선지자 답고
현실 보다 보이지도 않는 말씀의 세계가 더 또렷이 더 현실다움이

바로 가로지르는 탈주, 이탈, 출애굽 만이

우리의 속의 허구(죄)를 끄집어 내는 참 된 사랑이다. 곧 다 이루심의 십자가이다.

거룩으로 포장한 교회로부터 핍박받고 저주받지 않는다면
바른 신학, 선한 믿음, 완벽한 십자가 신학으로 갖춘자들로부터 지독한 미움을 받지 못한다면

도리어 가해자로써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이다.

그것 조차도 거짓이기에
참 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거짓에게 죽임당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요 19:30, 개역)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주여 이 십자가의 저주를 거두지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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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11-04-03 23:26 

동물 되기(어린아이 되기, 여성 되기, 삑사리 되기, 마이너 선언) 라는 의미를
이 설교를 참고로 했습니다

067강-눅 11장14-21(실재적인 나라)-luk110306-(이 근호목사) 

2011-03-08 17:13:04   녹취 : 오용익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11장 14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12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1:14-21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쫒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은 것은 성령이라고 지난시간에 했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떤 차이가 나느냐,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날 겁니다. 이 말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보는 세상 관과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보는 세상관이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세상관은 어떻고 성령을 받게 되면 받게 된 사람의 세상을 보는 관점은 어떤 것인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바라볼 때에 귀신이 지배하는, 또는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보이고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역할이 뭐냐, 예수님존재의 의미가 뭐냐? 예수님께서는 이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시면서 자기백성을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가, 거기에 관점이 있겠지요.

쉽게 말해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뭐로 보느냐, 귀신이 지배하고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본다 그 말입니다. 귀신이 지배하고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라볼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존재라는 것이 뚜렷하게 윤곽이 되고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 예수님을 봐버리면 예수님은 뭐냐, 그렇게 그런 단순한 보통 사람이죠.

그냥 보통 사람에 불과한 겁니다.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냐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고 있는 이 점에 대해서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나를 정상으로 보고 있는데 내가 어느 정도 정상이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훌륭한 분이라고 간주할 만큼 나는 나를 정상적이다, 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주고 예수님을 사랑해주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다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 출발이 뭐냐, ‘나는 정상이야. 정상적인 인간이 정상적인 예수를 믿고 정상적인 기도를 하고, 정상적인 존재가 정상적인 존재인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래서 이 정상적인 존재는 죽어서 천국 간다.’ 그것이 바로 육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생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령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예수님 빼놓고는 정상인 분이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빼놓고는 모두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고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그런 상태이기에 뭔가 뽑혀 나온다는 것,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가 알아서 저 동네에 있는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가 교회 가서 구원받아야지.’라는 생각자체도 빠져나와야 될 마귀의 생각이고 귀신의 생각이 되는 겁니다.

이게 보통 문제 아니에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육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출발점이 ‘나는 항상 정상이다.’라는 데서 출발해요. ‘나는 하자 없다, 나는 오류 없다, 나의 판단은 항상 정확하다, 이 정확한 내가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정확하게 믿으면 하늘나라에 정확하게 들어간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는 비정상이야. 내가 예수 믿는 것도 비정상이고 내 기도하는 것도 비정상이고 내가 교회 가서 구원받겠다는 욕구와 기대와 소망도 정상이 아니고 잘못된 거야.’라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치고 육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못해요.

그러나 성령을 받게 되면 ‘아하, 내가 기도하고 헌금하는 이것이 정상이 아니고 예배드리는 이것도 옳지 않구나. 예배드려도 옳지 않고 안 드려도 옳지 않고 교회 나가도 옳지 않고 집구석에 있어도 옳지 않고, 설교해도 아무것도 아니며 나 자체가 이미 마귀에 뒤집어 씌여서 자꾸 자신을 옳다고 여기고 자신을 정당하다고 여기고 내가 하는 결정과 판단은 항상 하나님 보시기에도 동의해 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버릇을 내가 갖고 있으니 이런 것이 현재 악마에 속한 증거가 아니고 뭐냐.’ 그 말입니다.

방금 한 이 이야기는 뭘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까? 성령을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성령이라는 것이 성경에 누구의 영으로 되어 있느냐, 성령은 내 영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투입된 영입니다. 그 외부인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영이 바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이 바로 올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영이라는 것은 사전에 정지작업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정지작업이냐, 예수님께서 바로 와서 ‘성령주마.’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다음에 오순절에 우리에게 성령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진짜로 하나님보시기에 정상적인 사람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뿐이고 그분만이 마귀를 이겼으며 그 분만이 세상의 환상 속에서 벗어났으며 그 분의 힘과 그 분의 십자가의 피로만 우리가 구원된다는 사실, 그게 성령 안에 내용물로 담겨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오게 되면 크나큰 차이가 등장하는데 그게 뭐냐, 정상적인 내가 정상적인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판단해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 믿어서 구원 받겠다 하는 그것을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극구 떠미시고……, 오늘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 나왔습니다. 떠민다는 것.

그런 식으로는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는 하늘나라가 예수의 나라가 아니고 네 나라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 나라가 된다고요. 내 나라 말고 잘난 예수님 나라 되기 위해서는 떠미는 과정이 필요해요. 떠미시고 당기시고 떠미시고 당기시고, 우리 힘으로 뭔가 해보려고 하면 밀쳐내시고, 아! 안되겠네, 하면 다시 잡아당기시고, 그렇게 잡아당길 때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 잡아당기기 때문에 그 안에는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만이 백 프로 담겨 있기에 오직 그 효과만이 잡아당기는 힘으로서 작용하기에 그 힘으로만 끌려가지요.

백 프로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만 용서받아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뭘 로 바꾸느냐, 그걸 알게 된 나는 얼마나 정상적이냐고 또다시 자기를 정상적으로 환원을 시켜 놓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다시 찾아와서 ‘내 이야기가 그 소리가 그 소리가 아니야. 예수 믿어주는 그 정도를 가지고 정상적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거야.’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또 우깁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으니 나는 이제 정상적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또 ‘그게 아니야.’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어주는 내 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힘으로 구원받는다니까.’ 그 차이점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교회 30년 50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오늘 본문 이야기는 세상천지를 마귀 나라로, 악마의 나라로 완전히 까발린 겁니다.

악마의 나라가 전제로 있을 때 비로소 본문 20절에 나오는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없는데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생각했던 극락이라든지 우리가 생각했던 하늘나라, 그 하늘나라가 아니에요.

그 하늘나라는 누가 만들었나, 악마가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소망케 했던 나라입니다. 육적인 인간이 자신을 정상적으로 봐서 ‘그렇지. 나 같은 인간이 들어가지 누가 들어가겠어.’라고 짐작했던 그 나라가 소위 하나님나라라고 신학 책마다 교회마다 외치고 있는데 그게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라니까요. 사람의 모든 것이 다 지옥이에요. 사람이 뭔가 손대면 다 지옥 되는 겁니다.

마이더스의 손이라 해서 만지면 다 금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뭔가 만지면 다 지옥 되고 스치기만 하면 다 지옥 화 되는 거예요. ‘목사님, 그러면 누가 구원받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똑같은 소리를 또 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내가 구원되는데 있어서 우리가 내 힘을 거기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이 육적인 것, 평생을 그런 식으로 작용하겠다고 시도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은 애초부터 이미 뭔가를 상실한 존재에요. 그걸 잃어버린 존재라, 상실한 존재라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처음부터 뭘 상실했느냐 하면, 인간의 기원, 원래 인간을 상실했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순간부터 선악과 안 따먹은 인간상이 이미 없어져버렸어요. 선악과 안 따먹던 그 시절을 우리는 우리 힘으로 되찾을 수도 없고 회복할 수도 없습니다. 또 회복해 봤자 소용없어요.

회복해 봤자 돌아서면 또 따먹을 것인데요. 제가 지난 금요일에 울산강의에서 했어요. 속죄론을 다시 써야 되는데, 속죄가 되려면 뭔가 죄가 나와야 죄가 속해질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교회 와서 죄용서 받을 생각을 안 하고 죄 없는 사람 되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죄 없는 사람 되기를 원하니까 속죄론이 형성이 안 되는 거예요.

‘나 예수 믿고 죄 없다. 끝!’ 더 이상 속죄가 있을 이유도 없어요. 속죄론은 지옥과 무관한 이론이 되어버렸습니다. 속죄가 필요 없어요. 이미 새사람 되어버렸는데 새삼 무슨 속죄가 필요해요. 이런 식으로 나가요. 이런 문제들, 말도 안 되고 황당한 이런 문제들이 바로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의 육적인 사람을 억지로 천국에 넣어주려고 그렇게 자칭 천국중개사들이 사기를 쳐서 그래요.

그것을 복음이라고 자꾸 사기를 쳐서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이 혼신의 힘을 다한다고요. 성경대로 가면 본문대로 가면 간단합니다. ‘귀신들린 자 귀신 안 뽑아내면 천국 못 간다.’ 간단한 문제에요. ‘귀신 다 들려 있는데 귀신 뽑아내는 그 전문가는 예수님만 할 수 있고 예수님이 귀신 뽑아주면 그때서야 그 사람은 귀신이 없이 성령 받은 상태가 되어서 천국 간다.’

그것이 20절에 보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가 하늘나라 가려고 하는 그것은 사실 지옥가려고 하는 노력이고요, 진짜 천국은 우리 손에 잡히지를 않고 우리가 못 해요.

그런데 어느 날 ‘나 같은 정상적인 인간이 정상적인 예수를 정상적으로 믿어서 천국 가겠다.’라는 이 육적인 생각, 이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어떤 힘이 도달되면 그것이 바로 그동안 악마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의 조직신학,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내가 정상적인 교회 나와서 정상적으로 예수 믿고 정상적으로 천당 간다.’라는 이 악마적인 생각이 ‘과연 악마적인 생각이구나.’라고 깨닫는 그 순간부터 나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거예요.

하늘나라가 내가 찾아가고 다가가는 하늘나라가 아니고 나에게 덮쳐버린, 나에게 찾아오신, 내가 그 하늘나라에 삼킴을 당한 그런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속에서 뭐가 생산되느냐, 나, 나, 나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생산되지요. 생산, 생산, produce, 생산된다는 말이지요. 발생된다 그 말입니다.

그 예가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예수님이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생산된 거예요. ‘보인다 보여!’ ‘뭐가?’ ‘예수님이 보이는구나.’ ‘어디에?’ ‘지금 보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반기려고 서 계시는구나.’ 하고 스데반집사에게서 마구 예수님이 생산됩니다. 공장에서 제품 나오듯이 생산하는 거예요.

‘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용서해주옵소서.’ 이 모든 것이 예수님 생산이에요. 예수님이 생산된다는 것은 사도행전 7장에 보니까 성령에 충만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감히 기도하면서 ‘주여, 성령이 충만케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셨습니까? 이 사실을 알면 아마 그 생각이 싹 가실수도 있는데요.

‘주여,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제 안에 계셔서 제 모든 행함과 삶을 통해서 마구마구 뿜어져 나옵소서.’ 그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옆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네 자존심은? 네 자식새끼는? 네 직장은? 네 자존심은 어떻게 할래? 주님만 자꾸 빠져나오면 네 자존심은 언제 채우고 네 집에 있는 소는 누가 키울 건데? 너를 기대하는 많은 네 주변의 가족들과 친구들과 동창생들과 교인들의 기대상은 어디서 내놓을 것인데?’라고 얼마나 조언의 멘트를 날리겠습니까? 정신 차리라고 하는 거지요.

성경에서 세상이 귀신들렸다는 전제를 깔 때만 하나님나라가 나온다는 그 말은 철저하게 인간을 인간취급하지 않고 무시한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동물이기’와 ‘동물되기’가 달라요. ‘성도이기’와 ‘성도되기’가 달라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흙이 아닙니다. ‘흙 되기’에요.

‘흙으로 돌아간다.’는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와르르 무너져서 흙이 되지 않고 살다보면 나중에 죽어서 흙이 되는 겁니다. ‘나는 흙이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돼요. ‘흙으로 되어가는 과정’이죠.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성도가 ‘성도이기’라고 할 수가 없어요. ‘성도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성도다워라.’라고 한다면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나는 성도다.’가 돼요. ‘……성도다’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그 앞의 ‘나’라는 것이 그게 누구냐, 그 말입니다. 앞에 ‘나’가 없어야 돼요. ‘성도되기’라고 할 때 그 앞에 붙는 것이 있어야 돼요. ‘나는 성도다.’가 아니고 ‘주께서 나를 성도되게 하신다.’ 주님이 앞에 달려야 된다는 말이지요. 주님이 주인공이 되고 주체가 되는 거예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 있잖아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함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서울 가락교회 강의 전에 김 중우 집사님과 2시간 가까이 대화를 했는데 그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앞엣것은 뒤엣것을 위해서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을 했어요.

그래서 적어왔어요. 선악과는 선악과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를 위해서 있는데 그 중에 인간이 개입한 거예요. 선악과는 생명나무를 위해서 있는 것인데 악마는 뭐라고 조작하느냐하면, ‘인간들아 네가 선악과 따먹으면 네가 신이 된다.’ 선악과는 주님을 위해서 있는 나무인데 마귀는 거기에 뭘 집어넣었느냐하면, ‘너는 왜 가만있어.’하고 인간을 그 속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인간을 그 코스에 집어넣어버리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신이 된다는 거예요.

앞엣것은 뒤엣것, 다시 말해서 첫 번째 아담은 뒤에 오실 마지막 아담, 진짜 인간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첫 번째가 두 번째. 나중 오실 분을 놓쳐버리고 그냥 ‘나는 나다.’가 돼버려요. ‘나는 판사다, 나는 목사다, 나는 ○○다.’ 하다가 결국 그 빈칸에 ‘나는 역시 나다.’ 합니다. ‘나는 나다’가 무슨 뜻이냐, ‘천상천하유아독존’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불교사상이에요.

그런데 ‘나는 나다.’라는 그 말을 누가 먼저 사용하셨느냐하면……, 누가 먼저 사용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먼저 사용하신 거예요. ‘나는 나 스스로 있다. 나는 나 외에 나라고 이야기 할 존재가 따로 없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요? 우리 인간은요?’ ‘인간들은 나를 위해 섬겨야 되고 그것을 수긍해야 되고 동의해야 되고 거기에 종속되어야 된다.’ 그 말이지요.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진 나의 근원이고 원천입니다. 원천이 박탈되고 원천이 없어져버리면 계속해서 뭔가 생산되는 것이 없어요. 바알세불이라는 것은 귀신의 대왕이라는 뜻인데 바알세불이야기, 귀신이야기, 성령이 와서 그것을 쫓아낸다는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을 명시해서 분명히 한 겁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위해서 있다는 그 말은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분명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15절에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계셨다, 그 말이죠. 그러니까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세례요한보고 뭐라고 시비를 걸었느냐 하면 ‘너 누구야? 정체를 밝혀. 너 뭐냐? 선지자냐? 제사장이냐? 너 대체 뭐야?’라고 할 때에 ‘누구는 선지자냐, 누구는 왕이냐, 누구는 제사장이냐’ 할 때 그 빈칸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자기보다 먼저 오신 분을 거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나는 오실분의 외치는 소리(스피커)라는 말이죠. 여러분, 스피커는 전자음향기기의 보조 부분입니다. 본체 부분이 따로 있고 스피커의 소리를 내는 몸은 따로 있어요. ‘나는 스피커다. 나는 소리에 불과하다.’라고 한 것은 스피커 가지고 시비 좀 걸지 말라는 말이에요. 스피커에 이런 저런 장식을 하고 꽃을 달고 ……, 피자 판에 장식하듯이 스피커에 온갖 것을 장식해 봤자 본체하고 선이 끊어진 스피커라면 그것은 본체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고 자기 소리밖에 안 나온다는 이야기에요.

자기소리, ‘나는 나다.’ 그 소리밖에 안 나와요. 이미 귀신에게 눌려있는, 마귀의 종이 된 자기밖에 안 나옵니다. 그 외에는 안 나오기에 사도바울의 로마서에 보면, 제가 늘 한 이야기고 조용하게 이야기합니다만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전도하는 행함, 예수 믿어주는 행함, 기도하는 행함, 헌금하는 행함, 설교하는 행함, 강의하는 행함, 행함이에요.

이 행함을 들으면 사람이 그렇게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본체에서 떨어진 스피커는 스피커 자신의 위신과 명예를 위해서 평생을 살기에 다 같이 본체가 떨어진 스피커 끼리 이야기하면 그렇게 잘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요. 그걸 시뮬라크르, 환상이라 합니다. 본체는 없는데 허상들만 난무한 거예요. 허상들만 난무한 이 세상에서 어떤 구멍이 뚫렸어요.

콧물이 나면 콧물이 나온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뭐라고 하느냐하면, 감기 들렸네요, 라고 하지요. 콧물을 가지고 증상이라, 징후라고 합니다. 감기의 증상 혹은 징후는 콧물 나고 기침 나고 열나는 거지요. 예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을 영적으로 보기에 이 세상이 행함만 주장하는 것은 이 세상 전부가 감기 들렸고 병들었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말해서 바알세불 곧 귀신의 대장 악마가 세상을 통치하고 있던 증상이고 징후가 되는 겁니다.

거기에 침투해서 구멍을 내겠다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거기에 구멍을 내는 거예요. 19절에 보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여기에 쫓아낸다는 말이 두 번씩이나 연달아 나오지요. 쫓아낸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어느 집에 단단하게 어떤 힘으로 묶여 있는 결속관계에서, 그 묶여 있는 입장에서는 본인이 아무리 몸부림치면서 이 죄에서 또는 지옥에서 또는 악마에서 또는 내 잘남의 생각에서 혹은 오직 내 행함만을 염두에 두고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24시간 내 행함의 옳고 그름만 생각하는 이 우울증, 이 스트레스 속에서 인간은 못 빠져나옵니다.

모든 우울증 환자의 특징이 뭐예요? 세상 걱정합니까? 기름 값 고민하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정신병은 하나밖에 없어요. ‘잘했을까, 못했을까’ 맨 날 그것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집착증이지요. 편집증이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다 정신병자라고 단정하는 사람이 있어요. 라캉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을 다 편집증으로 봐요. 다 자기 행함밖에는 모르니까.

그런데 그것조차 안 되는 사람은 분열증입니다. ‘나는 나폴레옹이다. 나는 대통령이다.’ 이것은 완전히 미친 인간입니다. 둘 중의 어느 하나에요. 자기가 누군지를 한곳에 잡아서 정박을 해야 되는데 그 주체를 정박하지 않는 분열증 환자이든지 아니면 매일 같이 ‘내가 누굴까, 내가 어느 정도 가지면 될까, 어느 정도 누려야 내가 나답게 되는 걸까, 내가 어느 정도 솜씨를 발휘해야 가장 나다움에 가까울까.’ 노상 자기 행함의 옳고 그름만 생각하는 이 두 종류밖에 없어요.

바로 그런 것을 상실했다, 진짜 잊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셨는가?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길기 때문에 제가 그냥 쉽게 할게요.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자 메시아 맞습니까?’

세례요한이 그렇게 물으니까 마태복음 11장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아무 문제 없어요. 그 다음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이 어렵습니다.

‘예수님 또라이 아니야? 그거 돈 인간 아니야?’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은 공자나 맹자나 부처처럼 좋은 이야기 하는 사람, ‘여러분, 서로 사랑하세요.’ 그러면 예수님은 또라이거나 미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인간무시에 들어갑니다. 완전히 무시합니다.

‘너는 인간도 아니고 동물이야, 너는 흙덩이야. 너는 그냥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거야. 네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너는 원체 지옥을 좋아하고 마귀 말을 좋아하게 되어 있어.’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사람 자체를 무시하는 방법은 욕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지독하고 극단적인 사람무시는 뭐냐, ‘네가 아무리 구원받고자 해도 천국에서 너를 오지 말래. 제발 가세요. 당신은 오시면 안 됩니다. 당신이 와도 우리가 밀어 낼테니 그냥 교회나 다니다가 지옥에 가세요.’

구원받지 말라고 계속 밀어낸다는 이야기를 할 때 사람은 누구든지 격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격분을 누가 조작하느냐하면, 예수님 쪽에서 조작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 말에 격분할 수밖에 없는 덩어리가 우리를 괴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덩어리가 뭡니까? 악마의 졸개들인 귀신 덩어리가 우리 속에 가득하니까 귀신은 귀신 값을 해야 되고 마귀는 마귀 값을 해 줘야 돼요.

마귀 값 하는 방법은 뭐냐, 극렬한 인간무시입니다. 만약에 이 ○령 교수가 은혜 받았다고 간증하고 돌아다니면 주께서 ‘오지 마세요. 천국에.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구원한 적이 없습니다.’ 이러면 그 사람이 얼마나 격분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격분을 표명해야 돼요. 그 격분을 드러내야 된다니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이야기를 했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모독하지 않습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서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데 성경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네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을 주시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말씀만 가득해요.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문자해독력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장부터 단 한글자도 없어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글자가 성경에는 하나도 안 나옵니다. 백독, 천 독, 만 독을 해도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성경 천 독 해서 구원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천국 갈사람 특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천 독을 했는데도 안 되더라!’ 그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날 무시하는데, 와! 성질나대!’ 그거 예요.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할 때 ‘소경이 눈을 뜨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가 평소에 원했던 바입니까? 그런데 그 뒤에 딱 붙는 것이 뭐냐, ‘나로 인해서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누구나 실족할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할 테니까,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능히 수용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 중에 혹시나 누가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실족하지 않는다면 하늘의 복을 받았기에 나오는 현상이지 인간성이 좋아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많은 유대인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조롱하고 모독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실족한 거지요. ‘네가 뭔데?’ 했어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하면, 이상스럽게 인간은 그 집단성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어요. 집단성이라는 말은 떼거지로 설치게 되어 있어요.

혼자 있을 때는 이상스럽게 자신의 자존심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그 분위기에 의해서 자기를 잊어버리면서 집단이 움직이는 대로 와르르 움직여요. 예를 들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떡을 줬습니다. 떡을 주니까 요한복음 5장 14절 15절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라고 했고 그 다음에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떼로 몰려들었어요. 임금 삼겠다고 떼로 몰려들었다가 예수님이 한 마디 하니까 떼로 썰물 빠져나가듯이 다 빠져나간 겁니다. 그 집단성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마태복음 7장 이야기를 먼저 하면 제 이야기가 이해 될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반석위에 집을 지을 사람하고 모래위에 지은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뒤에는 홍수이야기지요. 그런데 우리는 모래위에 지은 사람, 반석위에 지은 사람, 그 둘만 생각하는데 성경을 보는 마귀 들린 우리 입장에서는 한 가지 더 있어요. 우산 쓰고 홍수 나는 강가에 서서 누가 떠내려가는지 어느 집이 반석위에 지은 집인지를 구경하는 구경꾼 관찰자 입장입니다. 관찰자 입장에서 홍수 나서 떠내려가는 것을 신나게 보고 있는데 그 보고 있는 와중에 자기 두 발이 모래톱에 빠져가고 있다면 관찰하는 그것이 아무 소용없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저 사람, 저 사람이 아니고 너보고 이야기 한 거야. 바로 너보고!’ 그 속에 집단속에서 형성된 의식을 갖고 있는 우리, 예수님 빼놓고 모두 다 너, ‘저는 예수님 편입니다.’ 하고 손들고 나와도 그것도 예수님하고 상관없는 너희들 편일뿐이에요. 다시 오병이어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의 떡을 먹으로 온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참 어려워요. 떡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 듣고 천국 가려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떡을 주신 것은 예수님이 자기아이디어였어요. 쉽게 말해서 군중들이 ‘아, 슬슬 배고픈데 예수님이 이쯤 되어서 뭔가 이벤트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기대한적 없어요.

‘나는 설교에는 관심 없고 사실은 2부 순서, 점심때의 놀라운 기적을 보려고 왔다.’ 그런 사람 없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말씀 들으려고 오다 보니 그렇게 모였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기도해서 떡을 줄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그들은 난데없는 기적을 받았습니다. 기적을 받았지요. 표적을 받은 것이 아니고 기적을 받았어요.

이 말도 어려워요. 갑자기 기적을 받았는데 설교를 듣고 판단을 한 것이 아니고 떡을 먹고 판단을 내린 겁니다. ‘이분은 메시아다. 왕이다. 우리가 기다렸던 그 분이다.’ 하고 자기 육적인 본성대로 죽 왔지요.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나에게 온 것은 나 자체가 중요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나한테 얻어먹은 것, 나한테서 나온 떡을 원해서 나왔잖아.’ 하시면서 ‘그렇다면 정작 너희들은 나를 가질 수 없고 나를 가지려면 내 피나 나의 뜯겨진 살을 가지면 비로소 너희는 여생을 얻을 것이다.’

이 세상에 교회 처음 나오면서 예수님의 살 뜯어먹고 예수님의 피 마시려고 오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교회 오면서 피 마시기 위해서 살점 뜯어먹기 위해서 칼과 쟁반 준비해서 오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행여 나에게 이익이 있고 또 교회가 나를 천국 보내준다고 소문나 있기에 천국 가려고 왔잖아요. 왔는데 결국은 이게 뭐냐?

‘나’가 죽지 않고 ‘나’가 생생하게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그 나에다 예수님을 추가적으로 더 보탤 수 있는 정보, 지식확보 차원에서 온 겁니다.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쉽게 말해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생각합니다.’ 주님 쪽에서는 ‘나는 너를 생각한적 없거든.’ ‘주는 나의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잘못 들었나?’ 나는 너 같은 백성을 둔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주님의 백성은, 우리가 주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설득해서 일방적으로 그냥 건져내고 덮쳐지는 것뿐이에요. 덮쳐질 때 특징이 뭐냐, 예수님은 소중한 분이고 나는 안 중요하다는 현상이 하나의 증상처럼 일어나야 돼요.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가 뭐냐하면 ‘예수님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리 속에는 아예 내장되어 있습니다.’라는 겁니다. ‘예수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예수는!’

심지어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왜? 더 중요한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예수는 결코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 말을 하면 실례지만 만약 여러분이 전부 다 예수님이 소중하다면, 여러분 자신보다 더 소중하다면 오직 예수님만 생산하는 것에 대해서 반감이나 불쾌함이 없어야 돼요.

예수님만 이야기하고 복음만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내가 다 아는 소리야.’ 이런 이야기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이럴 수가 없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만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흙이에요. 이 찻잔 같아요. 이 찻잔이 흙으로 만들어졌거든요. 찻잔 자체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런 찻잔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여기에 담아버리면 찻잔은 귀히 쓰는 그릇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릇이 됩니다.

그런데 이 찻잔이 뭘 담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가락교회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 보낼 자격도 있고 천국 보낼 자격도 있는데 예수님에게 자격이 있다는 말은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주께서 분명히 다짐에 다짐을 하시면서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내가 찾아 갈 테니 네 입에서 두 번 다시, 내가 내 인생 알아서 책임지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라는 소리는 두 번 다시 나오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론 이렇습니다. 이런 귀신과 악마를 누가 만들었는가? 바로 우리 주님이 만들었고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왜냐? 이 세상에 천국 올 자격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무도 천국 올 자격이 없는데 구원받으면 자격이 생기는가? 구원 받아도 자격이 없어요. 구원받으면 본격적으로 ‘아, 나는 자격 없어도 구원받았구나.’라는 고백을 할 뿐입니다.

구원받은 상태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새삼스럽게 다시 분명하게 ‘나는 구원받을 수 없었구나.’라는 것을 새롭게, 새롭게 발견하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든지 강요가 아니라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마귀도 주님이 만들었고 지옥도 주님이 만들었고 천국 가는 사람은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건져주는 사람만 해당된다고 한다면 그동안 자기가 천국가기 위해서 공들이고 애썼던 그 사람은 결국은 이런 조로 나갑니다.

‘그런 천국 같으면 나는 가고 싶지 않네요.’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성공!(박수치면서)’ 성공한 거예요. 기어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기어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셔서 구원시켜주는 자격은 오직 구원받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일방적으로 주어져 있음을 감격하고 정말 다행스럽게 여기고……, 왜?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으면 우리에 의해서 또 탈락하기에, 자기 맘대로 놔두면 우리는 몇 초 안가서 또 휘청 넘어져요, 일방적으로 주께서 구원시킬 자격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동의하고 감사하지요.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라는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코 예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라는 생각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고귀한 선물을 받았어요. ‘예수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 이유가 뭔지는 살아가면서 아는 거예요.

아, 진짜 중요한 것은 나를 신으로 만들어주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이 더 끌리게 되어 있고 나를 신으로 대우해주는 그 어두운……, 성경에는 없다 하지만 내게는 활짝 밝은 아름다운 소식이죠, 돌이 떡이 되게 하고 세상의 인기를 얻고, 세상 권력을 갖는 것, 이것이 아무리 교회를 나와도 그쪽으로 맘이 더 가 있고 당겨지고 쏠리게 되어 있고 그러면서 우리는 말하기를 ‘예수는 결코, 결코! 중요하지 않고 나에게 중요한 것은 뭔가 있어. 그것을 나는 못 놔. 놓을 수가 없어.’라는 것이 우리 모습인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 능력이 임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귀신들의 세상인 것을 우리가 성경이 아니면 어디서 듣겠습니까? 다시 우리의 가상적인 현실을 포기하고 성경현실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신 분이며 오직 예수님만이 중요한 것을 일깨워주신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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