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인간으로 만드는 [여성성의 특이성] 과 [주께서 내 주께]

2011년 4월 11일 월요일 오전 10:49:56  김대식


Bicentennial Man.1999

영화를 봤다 한 두 번 스쳐지나가면서 봤던 영화였는데 찔끔찔끔 보던 것을 쭈우욱 처음부터 끝까지 단번에 보게 되었다.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주의 주 되심이라는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의미도 스쳐갔고

왜 여자란 늘 기존의 것에 탈주를 시도하는 상상도 못할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남자도 남성의 세계 곧 폭력성의 정치에 밀리면 예술가와 같은 편집증같은 망상에 빠진다. 초월적인 잉여의 세계에 자기를 투사 시켜 그것과 자신을 일치 시킬려는 증세를 보인다. 패배의식에 대한 보상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다. 신찾기이다. 그 속에서 마저도 바로 그런 남자 곧 바리새인에게서 밀려 버리는 여자가 있다. 여기서 약자보호법같은 이웃 개념이 등장한다. 밀려버린 인간들 모임 속에서 마저도 밀려버리는 여인, 구스여인, 멍멍 개 다)

개는 생명이라도 있지만 로봇이야 말로 그야말로 물질 물건이다.
그런데 4차원 같은 여자들은 어릴적부터 장난감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 다루듯이 다루고 먹지도 잠자지도 숨도 쉬지도 못하는 장난감에게
이상하게도 그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듯이 생명을 부여한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그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죽은 시체요
마귀 들려서 아무런 가치도 없고
가망성 제로인 물질이 되어버린 육체덩어리에

여자는 말도 안되는 것을 요구 한다.

생명 이다.

품어 달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한다.

(마 15:2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생명도 아닌데 품어 본들 소용없다는 예수님의 핀잔에
생명 바깥에 버려진 무생명도 예수님 창조주가 생명을 품듯
무생명도 품지 않았습니까?

이 얼마나 도발적인 겁대가리를 상실한 발언인가?

만약 왕정체제에서의 발언이면 당장 모가지 짤릴 소리다.

이와 비슷한 소리를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소리를 에스더가 했다.

마침 자세히는 못보고 에스더 라는 영화를 봤는데 처음부터 못봤고 마침 이 글 때문인지 몰라도 그 부분만 봤는데 에스더가 감히 신하들과 왕만이 토론하는 그 자리에 감히 왕비 배제시키는 그 어떤 여자도 들어오거나 또는 발언할 수 없는 그 곳에서 출연하는 그 자체로써

다들 깜짝 놀라고 왕도 놀란다. 분위기 얼어붙었다.

당장 죽여야 한다는 그 장면이 인상적이였다. 물론 그 뒤의 장면은 성경 이야기를 펼치는 식이다. 영화 제목이 왕과의 하룻밤 이였던가? 아무튼 그렇다. One Night with the King 2006

왜 여자들은 왜 그럴까?
도통 알수 없는 동물되기 이다. 감각되기 이다.

여성성은 그 자체로써 사건이 된다. 빠이트 파이트? 발음 맞나? 충돌 그 자체다.


바이센테니얼 맨 에 나오는 여성은 이 쇳덩어리 죽은 물체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자유도 준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 생명에게만 있는 죽음도 부여한다.

죽고자 하는 로봇?

자기 죽음은 죽음도 아니다. 오로지 여성이 부여한 그 죽음을 같이 누리고파 하는 자유까지 손을 아니 고철덩어리를 펼친다.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죽음의 요구 이다.

아니 생명의 요구 아닌가? 아니다. 이방여자의 외침은 죽음의 요구이다.

창조주가 없는 세상은 죽음 뿐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유대 잃어버린 자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는 그 창조주 예수님은

창조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심은 하나님을 잘 믿고 사는 그 땅에서 생명이 아닌
죽음을 깔아 버린다.

그 죽음에 이 개같은 이방여자가 동참(세례) 연합한다.
짤린 채로 그 짤림을 더더욱 짤리는 방식으로써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했다. 이 믿음이 왜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에게는 없다고 지적하신다.

떡은 자녀를 위한 것이다. 개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치 않다.

마 15장, 막 7장

정작 자녀는 이 생명의 떡인 십자가의 피 언약을 원치 않는다.
그런 자녀에게서 정죄 받고 예수님에게까지 조차 정죄 받는 개같은 이방인여자 그것도 재수 더럽게 없게도 딸이 귀신들려 있는 그 수느보네 여인에게는

이 언약을 목숨과 즉 죽음과 결부 시킨다.

아무도 자기 목숨과 결부 시키지도 않는 판국이 대세를 이루는데
막상 그렇게 해도 당장 누가 죽었다는 어떤 징벌 조차도 없는
창조주가 허깨비가 된 시대인데

그 여인은 귀신 들인 딸 때문에 결부 시킨다. 그 귀신들린 정신병들린 딸이
그 어미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죽음 맞 바꾸기 라는 건방스럽기 짝이 없는 흉찍한 짖을 한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치셔서

곧 자기 목숨을 자기 목을 쳐서 그 자리에 피를 흘려 그 피 흐르는 자리에
우리를 앉히신다.

우리 또한 목이 댕캉 날라가면서 그 날라가는 목을 보고
가짜 하나님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아 주님이 이것을 치실려고 했구나

어느날 아주 질 떨어지는 홍콩영화를 봤는데
남자가 남자의 거시기 남근 모양의 인형을 뒤짚어 쓰고 나오는 장면을 보고

우와 저거다 라고 진리를 발견했다. ㅋㅋㅋ   

인간 자체가 할례받지 못한 남근이다. 그래서 그 목을 그 모가지를 짤라버리고
꺽어버리고자 광야속에 집어 넣는다.

놀랍게도 소위 총 모양은 다 남근의 모양이다. 미사일 총알 건총 소총 탱크 모두다 이다.
심지어 교회도 건축물도 바벨탑도 다 남근상이다.

결국 십자가가 할례라는 의미로써 다가온다는 것은

그런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형상을 쳐 버리는
십자가에 못 밖는 할례

그런 가짜 하나님을 예수님의 신체 박스에 담아서 짤라버리고
고자로 만드시는 방식이 바로 십자가 이다.

그럼 여자가 되라는 말인가?

여성성 되기 이다.

이 말귀를 못 알아먹은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거듭난다는 말이 그렇다고 할례하면 과연 우상성(남근적인 선악 법사상)이 사라질까?
할례민족도 짤린 판국에?

스스로 짤라도 소용없다. 여전히 그 행동이 또 법이 되고 기념비가 되기에 자기자랑이 된다.

태어남으로써 알수 있다.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남이다.
결국 모태의 숙제이지 내가 다시 태어나고파서 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 만도 못한 자를 무슨 수로 태어나게 하는가?

피 흘림이다.

곧 죽음이다.

내 죽음은 소용없다.

하나님의 죽음이다.

내가 잘 믿고자 하는 그 하나님을 짤라버리는 것이

예수님의 숙제 이다.

주께서 내 주께

주가 주를 치심 밖에 없다.

그 목 짤린 그 빈자리에 우리를 덧붙이기 하신다.

그리고 모든 우상의 목을 짜르는 일에 동원이 된다.

두선지자가 뺨 때리기로 왕에게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우는 식으로

모든 법을 파하는 피의 기능을

피의 가치를 보여준다.

그 죽음의 가치에

이 여인은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 죽음에 저를 접붙여 주십시오.

이 부조리 이 모순
이 철저한 부정성을 무슨 수로 믿으랴?

반칙 만이 살 길이다.

그[여자의 후손]의 죽음 만이 살 길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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