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선악과는 어디에 있나?

2010년 7월 6일 화요일 오전 10:31:20 김대식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니 어머니와 형이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이라기 보다 우리 어머니의 특유의 귀가 잘 안들려서 늘 거꾸로 듣는 일로 인해서 자주 벌어지는 일상이였다. 늘 어머니는 뉴스를 듣고 이래저래 간섭을 잘 하신다.

뉴스에 목사가 자기 아내를 살해하여 토막을 내어서 이리 저리 감추고 그것을 1년 동안 비밀로 하다가 결국은 자수를 했다 라는 뉴스보도에 어머니는 형에게 묻는다. 목사 아내가 그랬단 말인가? 아니면 목사가 그랬단 말인가?

목사가요!

아마 여기서 또 종교적인 충돌이 일어났나 보다.

어머니는 가만히 있는데 형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지 하나님이 있으면 저런 일이 어떻게 벌어지겠는가?

어머니는 예수는 하나님 믿는 자에게 죽었다.

예수야 사람이니까 그 시대 로마 사람들이 죽였지

이 대화를 듣고 사사기에서 레위인이 자기애인이 겁탈을 당해 죽으니까 그 시체를 12토막 내어서 각 지파로 보낸 사건이 떠올랐다.

이 얼마나 주님의 살아계심을 제대로 보여주는가?

흔히 인간은 신이란 하나님이란 선을 추구하라고 악을 행하지 말라고 있는 존재로써
결국 인간은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신과 하나님을 거론한다.

그 반대다
그것은 인간들이 조작해 낸 신이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낸 이유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상대적으로 얼마나 악한 가를 드러내는데 동원이 된다.

완전 거꾸로 하나님을 거론한다.


그러다가 선악과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이 글의 제목으로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하고자 글을 적어본다.

과연 오늘날 선악과는 어디에 있는가?


분명 하나님은 우샤 하고 성공했어 라는 식으로 생명나무를 부랴 부랴 치워버린다.
즉 눈에 가시화로써 등장되는 방식으로는 이제는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생명나무는 그렇다 치자.

문제는 선악과는 어디에 있는가?

나무 개념은 항상 열매 개념까지 동원이 되어야 한다.
나무란 원천의 의미요 그 원천에서 나온 결과물에 열매이다.

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어디 있는가?

인간들이 신을 언급할때에 주님이 제시한 방식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건너뛰기해서 바로 신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칙이다.

성경은 이 두 나무를 거쳐서 언급한다.
이 두 나무는 곧 갈라디아서에서 두 여자 비유에서도 설명되어진다.
즉 언약이다.

언약을 건너뛰고 하나님을 운운할 수가 없다.

자 그럼 선악과는 어디로 갔는가?
분명 생명나무는 부랴 부랴 치웠다고 했다. 그럼 치운자가 생명나무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기에 생명나무는 어디에 있다 라고 비록 눈으로는 볼수 없지만 말로는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성령을 통해서 생명나무의 단절을 거쳐서 말이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치워버린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뜻이고
(생명나무는 적극적인 챙겨버리기, 반대로 선악과 나무를 적극적인 내버려두기 - 버려두사)
선악과의 열매를 먹은 자는 아담과 하와이다.
열매를 먹었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를 먹지는 않았다. 그 열매를 먹었지

그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인간이 시간이라는 의미를 개입 시키면 아마도 몇 년 또는 몇 십년 몇백년 지나는 나무는 죽어버린다 라는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의미로 두 나무를 언급한게 아니다.

나무란 출처 곧 처음자리 원천을 말하는 의미로 언급된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나무란 영생을 하게 하는 나무이니
나무 자체가 일반나무처럼 늙어죽는 개념이 다 동일하게 적용이 되지 않는다.

생명나무가 늙어 죽는마당에 무슨 영생을 주겠는가?

그리고 영생이란 죽음이 닥쳐지고 죽음이 이해 될 때 영생의 의미가 다가온다.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심각하겠는가?
결핍성이 생기지 않는데 영생의 의미가 뭐가 아쉽다고 다가오겠는가?

주님은 생명나무의 가치성을 선악과를 통해서 증거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나무임을 자신의 피를 먹고 자신의 살을 먹으라는 의미로 알려주신다.
그런데 이미 인간에게 자기의 피가 있고 자신의 살이 있는데 구지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가? 여기에 법이라는 중간에 막힌 담이 있기에 넘어설수가 없다.

그럼 법은 누구에게는 먹혀 들지 않는가? 그 법이 적용되는 사회에 추방당했거나 가치가 없다거나 그 사회(집단)와 연관이 없는 자에게만 먹혀 들것이다. 예로 천사라든지 말이다.
천사란 어떤 인간의 사회에서든 그 사회의 법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

결국 딴 세계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사도 아니면서 법의 적용이 안되는 자가 있다.
놀랍게도 죽은 자 이다.
죽었는데 무슨 법을 적용하는가? 없는데?
그런데 이 없는 자가 이 땅에 살아있는냥 걸어다닌다면 골치 아프다.
법의 적용도 안 먹혀 들고
사회 질서도 안 먹혀 들테니
포착이 안된다.
세상이 감당을 못한다.

그것을 성경은 이웃 이라고 한다.

곧 법의 적용이 되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좀비 같이 죽은자 취급당하는 시체와 같은 자 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자는 과연 누구일까? (생명나무를 먹으면 나무 자체가 몽땅 먹힌다는 것인가? 그렇다)
자신의 살과 피가 있는데 뭐가 결핍이 생겨서 먹을 수 있겠는가?
설사 먹는다 손 치더라도 사회법질서에서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을 어지럽힌다가 우선이 되어서 거부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괴물과 같은 좀비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니까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법이야 말로 자신들의 유일하게 방어할수 있고 감출수 있는 무화과나뭇잎이다.(성전-교회, 율법, 하나님, 에수님, 성령님, 십자가, 구원 등등도 바로 이런 무화과나뭇잎으로 동원이 된다. 이것을 인간의 대표성으로 보여주는 자들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이런 이유로 뽑혔다. 가룟유다를 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뽑았는지 의아해 한다. 이런 이유다.)

자신의 피와(곧 생명) 자신의 살(곧 몸)이 문제 있다고 여기는 환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
자신의 피(목숨)은 피(목숨)도 아니다 가짜 목숨이다.
자신의 살(몸)은 살(몸)도 아니다 가짜 몸이다
라는 자에게라야

예수님의 몸이 의미가 있다.

그런 자에게만
이웃에게 찾아온 예수님이 의미가 있다.
결국 자신이 예수님의 이웃이 되는 좀비요 원수요 살인마 임을 아는 죄인에게만
예수님이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선악과 나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도저히 알수 없다.
눈에 가시화 되지도 않을테니
포착도 불가능 하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예수님이 알려주신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 전에
전쟁 선포를 하신다.

무슨 뚱딴지 같은 전쟁 선포 인가?
그것도 딸랑 혼자서 말이다.

어린양 전쟁은 어떤 누구도 개입할 수가 없다. 일단 단절성이다. 성령의 일은 단절성이다.
그 단절성을 거쳐서 단절임에도 불구하고 문지방 구멍을 뚫어주셔서(처소마련=세례=연합) 그 전쟁의 실제상황을 카메라(성령)로 찍으셔서 후방에 있는 우리들에게 영화상영해 주신다.

지금 현재의 전쟁 상황이 이러 이러 하다고 말이다.

전쟁 선포가 참으로 희한하다.

유대인이 이미 마귀에 다 장악당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란 없다.(놀랍게도 유대인은 마귀자식이다. 그런데 그들만이 하나님의 자식이다 라는 의식이 팽배해져야만 예수님의 하신 일이 의미가 있다. 누가 유대인을 마귀자식이라고 보겠는가? 그것은 예수님만의 시각이다. 아무도 그 완벽하기 짝이 없는 무화과나뭇잎을 가린자를 제대로 볼수가 없다. 유대인 뿐이랴? 유대인은 모든 인간을 대표로 한다.)

어제 대구강의 듣고 옹심이식당에 가는 길에 조권사님이 질문한다. 목사님 설교중에 출애굽할 때 할례를 행했기에 나올수 있지 않았냐 라고 뭔가 행하지 않으면 즉 지시를 했기에 그것을 하지 않으면 빠져 나오지 못하지 않으냐 라는 질문이였다.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0705피p105진보적인시간관.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0705피p105진보적인시간관.avi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0705피p105진보적인시간관.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0705피p105진보적인시간관.pdf

어제 대구강의에서도 나왔지만
왜 이 세상을 자본주의로 몰아가시는가 하면 종교보다 실제적인 돈의 힘 앞에서 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자들이 없다. 반드시 액션(행함) 할 수 밖에 없다.
움직이고 행해야 뭐가 생기는 고 하니 상대적인 못 따라가는 자가 발생한다.
그것을 잉여 곧 찌끄레기 라고 한다.
99%으로 잉여인간이 될것인가? 아니면 1%의 인간이 될것인가 라는 유명한 박경철 강의도 있듯이
잉여인간이란 자본주의에서는 퇴출대상이다. 그래서 [나머지인간]은 1%의 인간에 지배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만 1%의 인간이 자비성과 배푸는 인간미와 인품을 가져서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이끌어갈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또 사기를 친다. 이것이 성화론인데 권력은 집중력을 추구하면서 여기에 언어는 사기처세로 동원이 된다. 모든 언어는 사기일 뿐이다. 결국 행함 외에는 믿을게 없다. 믿음은 도저히 안 믿겨진다. 그래서 사기술(종교언어)는 그 믿음을 행함화 시키는 믿음을 취사선택해서 믿겨지는 것만 믿기로 하는 행함을 추구한다. 가능만 것만 끌어모아 쌓고 쌓기를 한다. 그러다가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허물어뜨림을 당하니까 등돌리고 간다. 예수에게 짤리기 전제 자기가 예수를 짤라버린다. 나무를 열매가 짤라버린다.

그래서 식사 중에 목사님께 물어봤다. 강의 중에 서양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결국은 서양이란 구약 이스라엘의 재판이요 확장이네요, 구약 이스라엘 개념이 이제는 사라졌기에, 그런 역할을 이제는 서양이, 최근에는 자본주의(행함)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네요. 그래서 반드시 오늘날 교회(가짜교회)는 반드시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네요 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예수님이 전쟁 선포를 딸랑 혼자서 선포 하시면서 유대 사회를 장악한 곧 모든 인간을 장악한 나무에게 외친다.

드디어 선악과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예수님이 알려주신다.

유대인을 장악했다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 그리고 교회까지 다 장악한 마귀를 겨냥한 것이다.

선악과 나무가 어디에 있을까?

그 나무의 열매를 보면 알수 있다.

선악의 열매 외에는 낼 줄 모르는 인간이 곧 선악과 나무의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깨고 깨고 깨면
선악만 대따 나온다.

참 재미있게도 안그렇다 우리들 만큼은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 라고 우기는
성화론자와 개혁주의자들 그리고 새생명의 삶을 산다는 자들을
깨고 깨고 깨면
생명나무는커녕 선악만 대따 완악하게 나온다.
바리새인들의 재판이요 확대요 확장이다.

그럼 그때서야 저들이 따진다. 그럼 너는 너는?

물론 나도 선악 외에는 나오는게 없다.

그래서 소개 한다.

예수님을 깨면 깰수록 선악이 아닌
아니 선악이 나오셔도 되는데(솔로몬 재판관이 왕으로써 재판장으로써 선악으로 우리는 심판하셔도 되는데 마땅히 지옥 보내셔도 되는데)
선악으로 하시지 않고 그 아이의 죽음에 뛰어드는 불쌍히 여기심으로 나오셨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나온다.

바로 이런 차이를 예수님은 선악나무를 동원해서 선악과를 거쳐서 생명나무와의 차이성을 드러내신다.

그렇다면 선악과 나무가 등장해야 하는데 다들 안그런척 척 척 한다.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당신같은 거룩하고 깨끗하고 생명되신 분이
저 같은 더러운 죄인과 다니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적합한 선악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안 옮겨주셔도 되는데 생명나무로 옮겨주신다.

즉 이웃으로 삼으신 것이다.

자신의 환자로 삼으셨다. 자신의 의사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말이다.

자 선악과는 어디 있는가?

우리다

병들고 죽고 이미 시체가 된 더러운 우리가 선악이다.
우리의 원천은 선악이다.

깨고 깨면 깰수록 선악만 대따 나오지
때려죽어도 생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선악의 잉여물을

예수님은 자신의 나무에 접붙임 하신다.
죽은 가지를 세상에나 원가지 짤라내고
접붙임 하셔서 나무를 교체하신다.

이제 우리는
깨지고 깨지고 깨질수록
생명이라는 열매만 낼 수밖에 없는 뻔뻔스러운 피의 열매가 되었다.
그것도 단번에 말이다.

반복적인 것 없다.

단번이다.

또 단번이라고 하니 오해하기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길게 아니라
주님이 단번이다.

이 단번 이라는 단회성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맨날 깨지고 깨지고 깨져야 한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잉여(은혜)와 감사만 나온다.

억지로 감사할려고 해야지가 아니라.
감사 아니하고는 못배긴다는 뜻이다.
그 말은 외부에서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다.

누가 너무 너무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면 입이 쩍 벌어지고
기쁨과 환희가 넘치며
손을 저절로 박수치지 않을 수 없도록 감격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단회적으로 노래를 기가막히게 잘 불렀다는 뜻이다.

더 나은 노래를 예수님이 피리를 불었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이유는
이미 자신의 열매가 선악으로써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데
뭐가 아쉬워서 남의 노래 듣고 감격하겠는가?

기생라합은 거짓말로써 그 노래에 감격 하고 뿅가서 (그것도 40년 전에)
세상에 그 분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니
가족이고 민족이고 민족의 신이고 뭐고 다 날려버린다.
더 나은 의가 외부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노래에
단번에 뿅 가버렸다.

그래서 나라 팔아 넘겼다.
어차피 부도난 나라 인데

그런데 부도 나지 않았다 라고 버틴놈은 아무리 거짓말 안해도 다 죽었고

맞습이다. 저 부도 맞아도 쌉니다 라는 자는 그 거짓말 때문에 살았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도 동일하다. 성령을 받은 자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부도 났음을 인정했다 자기부인이다.

자기 부정의 토대위에 생명나무인 예수님의 피와 살이 의미가 있다.
부도 맞지 않은 몸에는 예수님의 몸이 의미가 없다.

예수님은 비로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마리아의 찬양(전쟁선포)처럼 한나의 기도처럼
부도 맞은 자리에
비로소 선악과나무원천과 생명나무 원천의 전쟁을 벌려주신다.
하늘의 전쟁이요
그 하늘의 전쟁을 땅에서 별치신다.
성령에 의해 부도난 자만이 그 하늘의 전쟁이 땅에서 펼치시는 가시화를 보여준다.
이 전쟁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기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는
뭐가 아쉬워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할만큼탐스러운 지혜를 포기를 하고
그 따위 전쟁을 보느냐 라는
그 거부성을 배경으로 깔고 등장하신다.

선악과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못 보는 자는
선악의 열매이기에 자신의 모습을 못 보는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몽땅 가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악과는 어디에 있나?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니 어머니와 형이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이라기 보다 우리 어머니의 특유의 귀가 잘 안들려서 늘 거꾸로 듣는 일로 인해서 자주 벌어지는 일상이였다. 늘 어머니는 뉴스를 듣고 이래저래 간섭을 잘 하신다.

뉴스에 목사가 자기 아내를 살해하여 토막을 내어서 이리 저리 감추고 그것을 1년 동안 비밀로 하다가 결국은 자수를 했다 라는 뉴스보도에 어머니는 형에게 묻는다. 목사 아내가 그랬단 말인가? 아니면 목사가 그랬단 말인가?

목사가요!

아마 여기서 또 종교적인 충돌이 일어났나 보다.

어머니는 가만히 있는데 형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지 하나님이 있으면 저런 일이 어떻게 벌어지겠는가?

어머니는 예수는 하나님 믿는 자에게 죽었다.

예수야 사람이니까 그 시대 로마 사람들이 죽였지

이 대화를 듣고 사사기에서 레위인이 자기애인이 겁탈을 당해 죽으니까 그 시체를 12토막 내어서 각 지파로 보낸 사건이 떠올랐다.

이 얼마나 주님의 살아계심을 제대로 보여주는가?

흔히 인간은 신이란 하나님이란 선을 추구하라고 악을 행하지 말라고 있는 존재로써
결국 인간은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신과 하나님을 거론한다.

그 반대다
그것은 인간들이 조작해 낸 신이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낸 이유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상대적으로 얼마나 악한 가를 드러내는데 동원이 된다.

완전 거꾸로 하나님을 거론한다.


그러다가 선악과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이 글의 제목으로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하고자 글을 적어본다.

과연 오늘날 선악과는 어디에 있는가?


분명 하나님은 우샤 하고 성공했어 라는 식으로 생명나무를 부랴 부랴 치워버린다.
즉 눈에 가시화로써 등장되는 방식으로는 이제는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생명나무는 그렇다 치자.

문제는 선악과는 어디에 있는가?

나무 개념은 항상 열매 개념까지 동원이 되어야 한다.
나무란 원천의 의미요 그 원천에서 나온 결과물에 열매이다.

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어디 있는가?

인간들이 신을 언급할때에 주님이 제시한 방식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건너뛰기해서 바로 신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칙이다.

성경은 이 두 나무를 거쳐서 언급한다.
이 두 나무는 곧 갈라디아서에서 두 여자 비유에서도 설명되어진다.
즉 언약이다.

언약을 건너뛰고 하나님을 운운할 수가 없다.

자 그럼 선악과는 어디로 갔는가?
분명 생명나무는 부랴 부랴 치웠다고 했다. 그럼 치운자가 생명나무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기에 생명나무는 어디에 있다 라고 비록 눈으로는 볼수 없지만 말로는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성령을 통해서 생명나무의 단절을 거쳐서 말이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치워버린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뜻이고
선악과의 열매를 먹은 자는 아담과 하와이다.
열매를 먹었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를 먹지는 않았다. 그 열매를 먹었지

그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인간이 시간이라는 의미를 개입 시키면 아마도 몇 년 또는 몇 십년 몇백년 지나는 나무는 죽어버린다 라는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의미로 두 나무를 언급한게 아니다.

나무란 출처 곧 처음자리 원천을 말하는 의미로 언급된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나무란 영생을 하게 하는 나무이니
나무 자체가 일반나무처럼 늙어죽는 개념이 다 동일하게 적용이 되지 않는다.

생명나무가 늙어 죽는마당에 무슨 영생을 주겠는가?

그리고 영생이란 죽음이 닥쳐지고 죽음이 이해 될 때 영생의 의미가 다가온다.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심각하겠는가?
결핍성이 생기지 않는데 영생의 의미가 뭐가 아쉽다고 다가오겠는가?

주님은 생명나무의 가치성을 선악과를 통해서 증거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나무임을 자신의 피를 먹고 자신의 살을 먹으라는 의미로 알려주신다.
그런데 이미 인간에게 자기의 피가 있고 자신의 살이 있는데 구지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가? 여기에 법이라는 중간에 막힌 담이 있기에 넘어설수가 없다.

그럼 법은 누구에게는 먹혀 들지 않는가? 그 법이 적용되는 사회에 추방당했거나 가치가 없다거나 그 사회(집단)와 연관이 없는 자에게만 먹혀 들것이다. 예로 천사라든지 말이다.
천사란 어떤 인간의 사회에서든 그 사회의 법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

결국 딴 세계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사도 아니면서 법의 적용이 안되는 자가 있다.
놀랍게도 죽은 자 이다.
죽었는데 무슨 법을 적용하는가? 없는데?
그런데 이 없는 자가 이 땅에 살아있는냥 걸어다닌다면 골치 아프다.
법의 적용도 안 먹혀 들고
사회 질서도 안 먹혀 들테니
포착이 안된다.
세상이 감당을 못한다.

그것을 성경은 이웃 이라고 한다.

곧 법의 적용이 되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좀비 같이 죽은자 취급당하는 시체와 같은 자 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자는 과연 누구일까?
자신의 살과 피가 있는데 뭐가 결핍이 생겨서 먹을 수 있겠는가?
설사 먹는다 손 치더라도 사회법질서에서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을 어지럽힌다가 우선이 되어서 거부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괴물과 같은 좀비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니까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법이야 말로 자신들의 유일하게 방어할수 있고 감출수 있는 무화과나뭇잎이다.(성전-교회, 율법, 하나님, 에수님, 성령님, 십자가, 구원 등등도 바로 이런 무화과나뭇잎으로 동원이 된다. 이것을 인간의 대표성으로 보여주는 자들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이런 이유로 뽑혔다. 가룟유다를 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뽑았는지 의아해 한다. 이런 이유다.)

자신의 피와(곧 생명) 자신의 살(곧 몸)이 문제 있다고 여기는 환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
자신의 피(목숨)은 피(목숨)도 아니다 가짜 목숨이다.
자신의 살(몸)은 살(몸)도 아니다 가짜 몸이다
라는 자에게라야

예수님의 몸이 의미가 있다.

그런 자에게만
이웃에게 찾아온 예수님이 의미가 있다.
결국 자신이 예수님의 이웃이 되는 좀비요 원수요 살인마 임을 아는 죄인에게만
예수님이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선악과 나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도저히 알수 없다.
눈에 가시화 되지도 않을테니
포착도 불가능 하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예수님이 알려주신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 전에
전쟁 선포를 하신다.

무슨 뚱딴지 같은 전쟁 선포 인가?
그것도 딸랑 혼자서 말이다.

어린양 전쟁은 어떤 누구도 개입할 수가 없다. 일단 단절성이다. 성령의 일은 단절성이다.
그 단절성을 거쳐서 단절임에도 불구하고 문지방 구멍을 뚫어주셔서(처소마련=세례=연합) 그 전쟁의 실제상황을 카메라(성령)로 찍으셔서 후방에 있는 우리들에게 영화상영해 주신다.

지금 현재의 전쟁 상황이 이러 이러 하다고 말이다.

전쟁 선포가 참으로 희한하다.

유대인이 이미 마귀에 다 장악당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란 없다.(놀랍게도 유대인은 마귀자식이다. 그런데 그들만이 하나님의 자식이다 라는 의식이 팽배해져야만 예수님의 하신 일이 의미가 있다. 누가 유대인을 마귀자식이라고 보겠는가? 그것은 예수님만의 시각이다. 아무도 그 완벽하기 짝이 없는 무화과나뭇잎을 가린자를 제대로 볼수가 없다. 유대인 뿐이랴? 유대인은 모든 인간을 대표로 한다.)

어제 대구강의 듣고 옹심이식당에 가는 길에 조권사님이 질문한다. 목사님 설교중에 출애굽할 때 할례를 행했기에 나올수 있지 않았냐 라고 뭔가 행하지 않으면 즉 지시를 했기에 그것을 하지 않으면 빠져 나오지 못하지 않으냐 라는 질문이였다.

어제 대구강의에서도 나왔지만
왜 이 세상을 자본주의로 몰아가시는가 하면 종교보다 실제적인 돈의 힘 앞에서 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자들이 없다. 반드시 액션(행함) 할 수 밖에 없다.
움직이고 행해야 뭐가 생기는 고 하니 상대적인 못 따라가는 자가 발생한다.
그것을 잉여 곧 찌끄레기 라고 한다.
99%으로 잉여인간이 될것인가? 아니면 1%의 인간이 될것인가 라는 유명한 박경철 강의도 있듯이
잉여인간이란 자본주의에서는 퇴출대상이다. 그래서 [나머지인간]은 1%의 인간에 지배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만 1%의 인간이 자비성과 배푸는 인간미와 인품을 가져서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이끌어갈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또 사기를 친다. 이것이 성화론인데 권력은 집중력을 추구하면서 여기에 언어는 사기처세로 동원이 된다. 모든 언어는 사기일 뿐이다. 결국 행함 외에는 믿을게 없다. 믿음은 도저히 안 믿겨진다. 그래서 사기술(종교언어)는 그 믿음을 행함화 시키는 믿음을 취사선택해서 믿겨지는 것만 믿기로 하는 행함을 추구한다. 가능만 것만 끌어모아 쌓고 쌓기를 한다. 그러다가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허물어뜨림을 당하니까 등돌리고 간다. 예수에게 짤리기 전제 자기가 예수를 짤라버린다. 나무를 열매가 짤라버린다.

그래서 식사 중에 목사님께 물어봤다. 강의 중에 서양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결국은 서양이란 구약 이스라엘의 재판이요 확장이네요, 구약 이스라엘 개념이 이제는 사라졌기에, 그런 역할을 이제는 서양이, 최근에는 자본주의(행함)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네요. 그래서 반드시 오늘날 교회(가짜교회)는 반드시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네요 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예수님이 전쟁 선포를 딸랑 혼자서 선포 하시면서 유대 사회를 장악한 곧 모든 인간을 장악한 나무에게 외친다.

드디어 선악과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예수님이 알려주신다.

유대인을 장악했다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 그리고 교회까지 다 장악한 마귀를 겨냥한 것이다.

선악과 나무가 어디에 있을까?

그 나무의 열매를 보면 알수 있다.

선악의 열매 외에는 낼 줄 모르는 인간이 곧 선악과 나무의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깨고 깨고 깨면
선악만 대따 나온다.

참 재미있게도 안그렇다 우리들 만큼은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 라고 우기는
성화론자와 개혁주의자들 그리고 새생명의 삶을 산다는 자들을
깨고 깨고 깨면
생명나무는커녕 선악만 대따 완악하게 나온다.
바리새인들의 재판이요 확대요 확장이다.

그럼 그때서야 저들이 따진다. 그럼 너는 너는?

물론 나도 선악 외에는 나오는게 없다.

그래서 소개 한다.

예수님을 깨면 깰수록 선악이 아닌
아니 선악이 나오셔도 되는데(솔로몬 재판관이 왕으로써 재판장으로써 선악으로 우리는 심판하셔도 되는데 마땅히 지옥 보내셔도 되는데)
선악으로 하시지 않고 그 아이의 죽음에 뛰어드는 불쌍히 여기심으로 나오셨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나온다.

바로 이런 차이를 예수님은 선악나무를 동원해서 선악과를 거쳐서 생명나무와의 차이성을 드러내신다.

그렇다면 선악과 나무가 등장해야 하는데 다들 안그런척 척 척 한다.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당신같은 거룩하고 깨끗하고 생명되신 분이
저 같은 더러운 죄인과 다니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적합한 선악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안 옮겨주셔도 되는데 생명나무로 옮겨주신다.

즉 이웃으로 삼으신 것이다.

자신의 환자로 삼으셨다. 자신의 의사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말이다.

자 선악과는 어디 있는가?

우리다

병들고 죽고 이미 시체가 된 더러운 우리가 선악이다.
우리의 원천은 선악이다.

깨고 깨면 깰수록 선악만 대따 나오지
때려죽어도 생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선악의 잉여물을

예수님은 자신의 나무에 접붙임 하신다.
죽은 가지를 세상에나 원가지 짤라내고
접붙임 하셔서 나무를 교체하신다.

이제 우리는
깨지고 깨지고 깨질수록
생명이라는 열매만 낼 수밖에 없는 뻔뻔스러운 피의 열매가 되었다.
그것도 단번에 말이다.

반복적인 것 없다.

단번이다.

또 단번이라고 하니 오해하기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길게 아니라
주님이 단번이다.

이 단번 이라는 단회성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맨날 깨지고 깨지고 깨져야 한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잉여(은혜)와 감사만 나온다.

억지로 감사할려고 해야지가 아니라.
감사 아니하고는 못배긴다는 뜻이다.
그 말은 외부에서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다.

누가 너무 너무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면 입이 쩍 벌어지고
기쁨과 환희가 넘치며
손을 저절로 박수치지 않을 수 없도록 감격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단회적으로 노래를 기가막히게 잘 불렀다는 뜻이다.

더 나은 노래를 예수님이 피리를 불었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이유는
이미 자신의 열매가 선악으로써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데
뭐가 아쉬워서 남의 노래 듣고 감격하겠는가?

기생라합은 거짓말로써 그 노래에 감격 하고 뿅가서 (그것도 40년 전에)
세상에 그 분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니
가족이고 민족이고 민족의 신이고 뭐고 다 날려버린다.
더 나은 의가 외부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노래에
단번에 뿅 가버렸다.

그래서 나라 팔아 넘겼다.
어차피 부도난 나라 인데. 부도날 나라인데 미리 앞당겨 버린다. 선지자 시선이다.

그런데 부도 나지 않았다 라고 버틴놈은 아무리 거짓말 안해도 다 죽었고

맞습이다. 저 부도 맞아도 쌉니다 라는 자는 그 거짓말 때문에 살았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도 동일하다. 성령을 받은 자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부도 났음을 인정했다 자기부인이다.

자기 부정의 토대위에 생명나무인 예수님의 피와 살이 의미가 있다.
부도 맞지 않은 몸에는 예수님의 몸이 의미가 없다.

예수님은 비로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마리아의 찬양(전쟁선포)처럼 한나의 기도처럼
부도 맞은 자리에
비로소 선악과나무원천과 생명나무 원천의 전쟁을 벌려주신다.
하늘의 전쟁이요
그 하늘의 전쟁을 땅에서 별치신다.
성령에 의해 부도난 자만이 그 하늘의 전쟁이 땅에서 펼치시는 가시화를 보여준다.
이 전쟁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기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는
뭐가 아쉬워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할만큼탐스러운 지혜를 포기를 하고
그 따위 전쟁을 보느냐 라는
그 거부성을 배경으로 깔고 등장하신다.

선악과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못 보는 자는
선악의 열매이기에 자신의 모습을 못 보는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몽땅 가렸기 때문이다.

(신학 무화과나뭇잎, 교회 무화과나뭇잎, 십자가 예수 무화과나뭇잎, 좀더 정통, 좀 더 개혁, 좀더 지혜로운 그런 무화과 나뭇잎으로 옮겨타기를 [존 말코비치] 되기 영화 에서처럼 라는 식으로 진화 하기 바쁘다. 망한자가 없는 자들만이 오는 곳이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런 것 하지 말자가 아니라 그런것 하다가 다 졸지에 망했습니다 라고 마라 (나오미)처럼, 그래서 접붙임 당하는 나오미가 세상에 아들을 낳았데? 라고 족보가 바뀌는 것 역전을 저런 배경을 깔고 등장하신다.) 

이미 망했으니 마음껏 주를 위해 돈 벌고 (돈 벌 필요 없이 이미 부유함을 알기 위해 부지런히 돈 벌고 - 불의한 청지기)
이미 망했으니 마음껏 주를 위해 즐기라 ( * )
이미 망했으니 마음껏 주를 위해 죽고 ( * )
이미 망했으니 마음껏 주를 위해 외치고 ( * )
이미 망했으니 마음껏 주를 위해 자유하고 ( * )
이미 망했으니 마음껏 주를 위해 감사하고 ( * )
이미 망했으니 마음껏 주를 위해 사랑하면 된다. ( * )

어차피 총알받이 이기 때문이다.

선악이란 뻥뻥뻥 뚫혀질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함께 망하는 것을 체감하는 것이다.

(고전 15:25, 개역)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고전 15:26, 개역)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7, 개역)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고전 15:28, 개역)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29, 개역)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고전 15:30, 개역)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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