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이는 꿈, 젊은이는 환상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010년 6월 26일 토요일 오후 3:09:49  김대식

늙은이는 꿈
젊은이는 환상

(행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욜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3, 개역)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욜 2:24, 개역)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욜 2:25, 개역)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욜 2:26, 개역)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욜 2:27, 개역)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욜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개역)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30, 개역)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욜 2:31, 개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욜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꿈과 환상

이라는 의미는 상대적인 것으로 그 차이성을 드러낸다.

젊은이는 환상에 대비된 비환상인 역사라는 미혹, 유혹에 빠진다.
눈에 보이는 물증들을 향하여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던지면서 소진 시킨다.
여기서 환상은 역사라는 현실 권력에 비현실로 취급당하는 미래묵시를 말한다.

미래완료를 말하는 젊은이 보다 가장 늙어보이는 것이 없다.
현실에 충실하지 않고 미래만을 외친다는 것은 현실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미래만이 살길이라고 현실은 죽음 뿐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이 자녀들이 외치는 예언이다. 예언이란 종결된 사항을 선언하는 것이다.

또 늙은이가 꿈을 꾼다는 것은 완료를 본다는 것이다.
늙은이에게 꿈에 반대되는 현실은 자신을 실족케 하고 넘어뜨리는 시험꺼리요 미혹이다.
늙은 사람이 무슨 꿈을 꾸는가? 미래가 이미 암울한 죽음 뿐인데?
그런데 그 죽음 속에서 꿈을 꾼다. 소망한다.
이해하기 가장 쉬운 예가 바로 100세를 넘긴 아브라함이다. 이미 죽은 태에서 열매를 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은 안된단다. 꼭 불임여성인 죽은태 여인인 사라에게서 낳은 자식만이 꿈이다 약속이다 라고 한다. 이것이 영의 일이다.

늙어버린 자신에게서 더 이상 꿈과 희망 곧 약속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 땅의 역사요 그것이 현실이다. 약속성취 따위란 없는 세상이 이 땅이 우상의 나라 이다는 증거이다.

꿈이란 그런점에서 비현실적이다.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인 꿈이 늙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오고
그 아브라함의 꿈인 자식이 그들의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애굽나라를 치면서 등장한다.

결국 환상이나 꿈이란 소유될수 있는 포착꺼리인 대상이 아니라.
하나 됨으로써 동행의 함께함이다.

그래서 처소를 마련하겠다는 취지이다. 곧 성령을 약속하셨다.

결국 상대적인 동행과 함께함의 연결고리를 끊고 쳐들어 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희년이다.
또 그런 점에서 이사야 카면 무조건 임마누엘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 된다.

희년과 그리고 너희 하나님과 다른 나의 하나님 완료

곧 예수님이다. 꿈과 환상이란 아브라함이 그렇게 봤던 예수님이다.


참고로 어느 정도로 완성인고 하니

여호와의 신이 강림하면 모든 차별 구별 차이성들이 이 하나 때문에 한 묶음화 된다.
그것이 바로 머리되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새몸이다.

그 차이성을 이사야 11장에 나타낸다.

이 땅의 나라와의 차이성
이 딸의 나라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돈나. 먹고 먹히는 관계가 천국의 완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어떤 선악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의 희년이다.

젖먹이가 독사 굴에 장난치고 다치거나 해를 당하지 않는 나라이다.

결국 선악 조차도 먹고 먹히는 모든 것 조차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도구로써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이 땅에서 작용했던 것이다.

성령이라는 하나됨의 동행의 처소가 완료 되는 날은

이런 법적인 것이 사라진다.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영광이 되는 나라 뿐이다.



ps 지금 보니 늦은비 이른비 개념도 결국 차별성이 없다 라는 의미인데 이것가지고 또 사기를 치는 자들이 많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그들의 해석이 웃기는 엉터리인가? 그런데 많이들 속는다. 많이 속는 것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철저하게 단절 시키시는 주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치밀하신지 한치 양보도 없으시다.

(욜 2:23, 개역)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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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지시의 은사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부산/부산100601a침멀리07구약신학-지도와지시의은사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부산/부산100601b침멀리07구약신학-지도와지시의은사b.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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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부산/부산100601b침멀리07구약신학-지도와지시의은사b.hwp

은사의 의미란

첫째로 은사란 회수용이다.

회수 할 때 나타나는 반응을 통해 진위를 앎

(마  25장 종말의 3가지 비유 - 회수, 소멸용, 소모 소비품)

자기에게로 회수 되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 아닌것만 회수 됨
자기를 위한 복음 이 아닐 때 단단히 화가 날 수 밖에 나는 복음이 됨

꿈과 환상이 자기 것이 안되면 자기가 회수 할려고 함

예수님의 처참한 시체를 아무도 회수 할려고 하지 않음
도리어 화를 냄 절래 절래 손 저으며 다시는 그런 것과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식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 것이 사랑인데
시체를 끌어 앉는 것이 사랑

죽음
심판을 끓어 앉는 것임


종말이야 말로 사랑의 하이라이트


뚤째로 은사란 하나로 묶는 것이다.
수많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을 때에 사적인 영역은 없다.

왜 하나로 묶는가? 같은 운명이다.

하나로 묶으면 그 속에서 머리가 나온다. 예수님이다.

하나로 묶을때에 사적인 개개인 것이 상실 당할때에 화를 낸다.
아간의 범죄가 이런 식이다.
그 상실이 심판성으로 다가올때에 오히려 기쁘다.
죄가 많으니 은혜가 큰 것이다.

반납이 아닌 회수가 되어버리면
착한 일을 증명해 보일려고
착한 나를 찾을려고
착한 나를 확인할려고 한다.

자기 회수를 고집하지
반납을 묶음을 머리를 거부한다.
동행이 아닌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셋째로 회수한 그 소모품 미끼를 증거물로 삼아 알리바이를 형성
악한 세상을 만든 그 증거로 미끼 소모품으로 삼은 그 죽은 시체 쓰레기를
심판 근거로 삼음

증거물로 삼음

증거물로 알리바이를 형성해야 저들을 심판 할 수 있음


사사는 불연속성
2초 3초 다

상대적인 악이 관영해야
악령이 배경으로 제대로 깔려야
그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 빛이 등장

은사란 죄를 악마를 겨냥한 것임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을 찾는 방식도 불연속성이다.
그러나 몸은 연속성이다. 그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연속성적인 하나님을 찾는 방식이다. 그래서 은사란 소욕의 대립이다. 충돌이다, 전쟁이다.

결국 사사기의 주제는 두 주체의 싸움인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이다.
은사를 자기소욕으로 싸움의 아이템으로 이용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도구 아이템으로써 회수 당하는가?
생존의 의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것이다.

12토막 사건은 정의가 아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답게 하겠다가 실패 함으로써

바로 이스라엘은 인간의 손으로 다듬어 질 수가 없는 식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은사 라는 선물이 동원된다.

결국 은사가 그렇듯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괜찮은 교회를 주장하고 원하고 그런 교회 될려고 한다는 것은 연속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불연속성인 이스라엘 곧 은사 곧 선물은
항상 발생론적이다. 회수용이요 우발성이요 1초 2초다,

흐름은 고정이 되지 않고 포착이 되지 않는다. 항상 임의로 부는 바람이다.

그래서 없음이 있음을 배경으로 깔고 보이지 않는 믿음을 모든 혈통을 배경으로 깔고서 증거 된다.

인간은 믿음 마저도 대상이지만
동행의 믿음은 예수님 밖에 없다.

삼손은
결국 미끼로써 소모품으로써
항상 신과 신을 싸움 붙이는 보호자 싸움에 동원되는 미끼이다.
(율법 성취는 인간의 연속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홀현히 돌연히)

은사란 악령과 성령을 싸움 붙이는데 동원하고자 하는 미끼용이다.

이 미끼 됨에 대한 거부성이 사사들과 선지자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결국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우리를 대상으로 삼는 전쟁이다.

은사를 준다 라는 것은 나를 전쟁의 대상으로 삼아서 미끼용으로
적의 진지에 적이 낚으라고 던지는 소모품이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여호와의 전쟁에 관심이 없고 그 적도 관심이 없다.

우리야 장군을 미끼로 삼아서
다윗을 빼앗아 온다.

또 다윗을 미끼로 삼아서 남은자를 빼앗아 온다.

그 남은자 예수님을 미끼로 삼아서 교회를 빼앗아 온다. 전리품이다.

또 다시 교회를 미끼로 적진에 던져서 낚을자 끝까지 낚아서
목베인 영혼을 알리바이로 삼아 심판의 근거물 증거물로 삼는다.

여기에 악마와의 전쟁에 예수님은 에누리 없이 우리 조차도 적으로 삼고 전쟁하신다.

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 곧 십자가의 전쟁은 예수님 홀로 이루신다.

베드로 조차도 적진에서 뽑아내시는 방식이 십자가 뿐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영이다. 십자가를 보여주고자만 하는 은사 뿐이다.

예수님의 시체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

인간의 탐욕 우상성 자기의 믿는자 되기 라는 마약성 때문에

그 반대의 길인 저주의 길로 가신

그 피를 보여주는데만 동원이 되는 가장 이질적인 선물이 바로 은사다.


그 다음 왕과 나실인

나실인 구별 된자

거룩이 두 가지 임
하나는 분리해 놓고 정화 시킴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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