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품 (줬다가 빼앗음)


(욥 1:21, 개역)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잉여품이란 피조물이다.
나머지, 남은자, 찌기, 잔여품, 전리품 이란

자신이 항상 대상에 놓여져 있고 주체란 나 아니요 딴 분입니다 라는 말을 하기위해서
잉여품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잉여품이 잉여품 자체에서 벗어나 다른 분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고
또 동시에 잉여품이 잉여품 스스로를 증거한다는 것 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 낑겨버린 또 하나의 잉여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그래서 하늘에서 직접 커튼을 열어 제치고 내려온 응축된 점으로써의 인자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버리시고 우리 모양인 둘 사이에 갇혀버린 잉여로써 오셔서
잉여의 본연의 모습(형상)인 피조물의 외침을, 그 응축된 점의 자리인 빈자리 곧 십자가의 자리를 마련하셨다.)

(욥 1:1, 개역)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2, 개역)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욥 1:3, 개역)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욥 1:4, 개역)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욥 1:5, 개역)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6, 개역)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 1:7,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욥 1:8,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9, 개역)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10, 개역)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욥 1:11, 개역)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1:12,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 1:13, 개역)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욥 1:14, 개역)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욥 1:15, 개역)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욥 1:16, 개역)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욥 1:17, 개역)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욥 1:18, 개역)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욥 1:19, 개역)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 1:20, 개역)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욥 1:21, 개역)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성경은 참으로 이상하다.

늘 의도적으로 모순적으로 유발케 해 놓고서는 그 모순에 와르르 달려들도록 올무를 놓고서
(물론 관찰자 까지 다 포함해서 - 가말리엘 교법사 행 5:34)
그 올무에 걸리는가 안걸리는가 라고 바라보는 관찰자를 모조리 올무에 가두는 적극적인 걸림돌의 방식으로만 일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 관찰자가 선악(율법 또는 양심) 이라는 속성 조차도 하나님의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선악을 앎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의 손에 포착이 된 불멸의 하나님을, 창조의 하나님을 인간이 꽉쥐어 잡아버렸기에 절대로 놓치 않을려고 한다.

여기에 욥은 바로 그런 인간의 응축된 점으로써 알수 없는 하나님 곧 인간의 손에 창조가 아닌 소멸되는 하나님인 심판의 주를 만나게 됨을 당하게 된다.

인간들이 포착하여 손아귀에 잡은 하나님의 창조란 소멸이 아닌 영원불멸이다.

그러나 욥에게 덮쳐진 미래에서 온 버림받는 하나님은 철저한 버림받음, 잃어버림, 소멸로써 욥의 신체에 선포 되어진다.

창조란 소멸로써 증거 된다.
소멸로써 증거되지 않으면 수많은 모방으로부터의 창조를 구별할 수 없고
또 그 차이성도 드러나지 않는다.

피조물이란 소모품으로서 증거된다.

참 목자란 삯꾼목자로써 그 차이성을 드러낸다.
삯꾼목자를 풀어버리는 이유도 그러하다. (천상회의에서 파견된 악한 영, 욥1장, 왕상 22장)

주님의 자녀(죄인 중의 괴수)란 의인과의 차이로써 증거된다.
자녀(죄인)란 아버지가 친히 증거하지만(잃어버린 자를 되찾음으로써 증거)
자칭 의인이란 자신이 친히 증거한다.의(거룩)를 자기유익(구원)을 위해 구하기 때문에
신학으로, 교리로, 믿음으로, 신앙으로, 대중의 다수 힘으로 구축하는데 달음박질 한다.

그래서 죄인에게만 구원자가 필요하며
죄인만을 부르러 오셨다. 직접 뛰어드심의 찾아오심이다.

(마 9:9,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10, 개역)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 9:11,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2,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4, 개역)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 9:15,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 9:16, 개역)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 9:17, 개역)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가복음 2장 / 누가복음 5장)

인간이 포착한 신앙, 인간이 포착한 창조, 인간이 포착한 하나님의 세계에서 거부당한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도리어 적극적인 싫어버린바 된 예수님이
직접 뛰어드심으로 창조된 그 잉여의 세계 곧 창조의 세계는

바로 이런 잃어버렸다가 되찾음의 흔적이 있다.
그 흔적 곧 예수님의 손이 탄 표적은 십자가 뿐이며

그 십자가의 흔적에서 (주께서 내 주께 라는,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빼앗는 그 틈사이)
그 제물이 쪼개어진 그 사이에서
그 찢어진 지성소의 장막 사이에서
새피조물인 신부된 교회가 탄생하는 것이다.

(고후 5:14,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개역)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8, 개역)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9, 개역)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렇기에 새피조물인 신부된 교회는 누더기옷을 입고 곧 육체를 입고서 이 둘 사이에 낑겨버린 미끼로써 증거한다. 이 두 세계의 뿌리와 근원을 다 보여주면서 말이다.)


신부된 교회는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 (신랑의 사랑의 흔적이다. 신랑이 마련해준 자리인 침실 사랑방. 곧 십자가라는 처소)
그렇기에 교회된 신부(욥)는 누락의 총화를 바로 인자의 버림받으심을 재현(선취: 미리 앞당겨 보여줌) 한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음을 보여준다. 육의 모든 단절(자식 잃고, 아내로부터 버림받고)은 곧 부활의 단절이다. 족보의 단절이다. 엘로힘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주신자로부터 인해 받았던 모든 것을 다시 빼앗는 여호와로부터 인해 모든 것을 빼앗김 당하는 것이다. 단절은 곧 죄가 된다. 죄인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죄인이 새로운 언약 때문에 새 죄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오로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기준이 되는 죄다. 다른 족보 곧 육체의 마침인 십자가와의 연결 때문이다.)

심판이라는 종말을 증거한다는 뜻이다. (종말이 새언약으로 들어가는 기준이 되었다. 심판 곧 십자가가 기준이다. 유일한 사랑이기 때문에)

잃어버림받음의 결정체임을 보여줘여 하는 미말에 둔 구경꺼리가 된 것이다.
(극적인 시나리오는 예수님의 자작극으로 신부에게 적용이 된다. 그래서 누락의 총화이다. 잃어버림의 결정체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저주받은 자를 친히 거두시고 되찾는 극적인 반전을 빛되신 예수님은 어두움을 들어서 그 차이성을 나누이신다.)

둘 사이에 낑겨버림으로써 예수님이 친히 준비하신 성령의 처소를 보게 되는 것이다.
곧 죽음의 자리, 심판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인 예수님이 직접 손으로 만든 자리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둘 사이에 낑겨서 그 빈자리를 증거케 됨을 당한다.
향유부은 여인이 중간에 낑겨서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를 증거케 됨을 당한다.

그 죽음의 자리인 성령의 처소만이 십자가의 자리 만이
유일한 잉여세계 곧 창조의 세계이다.

이 잉여의 세계에 대해서 강이아빠가 한 말이 생각난다.
강이아빠가 그 잉여가 너무 크기에 흐름을 타서 받아누리는 것이다고
(그러나 그 잉여를 나 라는 주체로 땡길수는 없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기적으로 챙기고자 예수님을 임금 삼을려고 할때에 예수님은 도망치신다. 먹고 배부른 까닭이기 때문이다. 정작 예수님의 살과 피 라는 잉여를 먹으라고 할 때는 그들은 거부한다. 살인자가 될 수 없다는 취지이다. 떡을 먹으면 살인자가 되지 않지만, 말씀을 먹으면 살인자 였음이 비로소 드러난다. 그 지적당함이 사랑이요 우리가 머무를 처소인데, 그 처소 조차도 인간은 자시만의 사적인 천국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요 6장) 만나를 그런 식으로 먹어버렸다는 것이다. 심판의 자리에서 긍휼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자리에서 덧입히는 영원불멸의 축복을 꿈꾼 것이다.(그리심산 에발산) 잉여 자체가 크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체된 잉여가 나를 버릴수도 있다는 것조차도 잉여세계의 흐름 속에 있기에 감사해야할 뿐인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예수 안에는 뭐든지 예가 되기 때문이다.)

(고후 1:18, 개역)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 1:19, 개역)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20, 개역)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21, 개역)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 개역)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그렇다면 잉여(감사) 아닌 것이 없다. 뭐든지 그리스도 안에는 예 뿐이고 아니오 함이 없기 때문이다.

감사 아닌게 없다.

그렇기에 줬다가 빼앗음도 예 가 되는 것이다.

잉여란 주신 이가 그 주심을 깨뜨리고 빼앗고 (언약 하신 분이 그 언약을 깨뜨리시고)
다시 잃어버린 자를 되찾음으로써
(다시 언약을 세우셔서 다 이루시는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

스스로 버리시고 스스로 되찾는 권세로써 (주께서 내 주께)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스스로 버리시는 그 처소를 마련하시고, 그 처소에서 사랑을 다 이루시는 것이다.
모세에게 여호와의 전쟁을 개시해 놓으시고, 그 지시에 도망칠려는 모세가 설복 당하여 이제야 그 언약을 실행할려고 하니, 그 모세를 죽일려고 천사들이 달려들때에 아내 십보라가 아들들의 양피를 베어 그 껍데기를 발에 던지니 비로소 물러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육의 철저한 단절인 영의 일에 육의 개입을 거부하겠다는 취지이다. 아들들의 양피 제거 곧 할례는 육체의 통로의 모든 막힘이다. 그래서 일부러 불임여성을 통해서 육의 족보들을 고발하는 것이다. 십자가란 육의 모든 통로를 막음으로써 이전 것과 새 것의 구분의 나누임을 창조로써 드러낸다. 그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우발적인 잉여품이 생성 되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계획치 않은 선물이기에 기쁨에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뭐든지 예 뿐이다. 여기에 목격자인 십보라는 당신은 어쩔수 없는 피 남편 피 신랑이군요 라고 외친다. 이 외침이 바로 잉여세계에서 나온 고백이다.)

잉여품 곧 피조물(창조당한, 구출당한 전리품)이란
줬다가 빼앗고, 빼앗김 당했다가 모든 것을 얻게 됨을 보여주는 소모품이다.

(요 14:26, 개역)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바로 그 주신 분과 빼앗는 분인 예수님을 다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잉여는 내 쪽으로 끌어당길 입장이 못된다.
잡자 마자 썩어버린다. (마이다스의 손)

그러나 반드시 내 쪽으로 끌어 당겨서 썩어버리는 그 잉여(감사)에 적개심을 품게 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주체가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잉여만이 지적해 준다. 사랑이다. 십자가 만이 그 숨어있던 적개심을 보여주고 내 속에 괴물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감사하다.

감사란 유익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인 지적당함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미쁘심이라고 한다. 얼마나 사랑이 넘치고 넉넉하여 늘 승리 뿐만 아니라 믿음직 스럽고 듬직하여 안정감이 있기에 타인을 위해 죽음의 자리를 마련하러 가는 것이다.

반대로 악인은 늘 시험(자기 챙기기)에 빠져 불안하며 타인의 죄를 통해 자신의 의를 쌓는 비교대상으로 삼는다. 잉여(감사) 조차도 창조 조차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어떻게 하면 자기유익이 되는가에 몰두해 있다. 죽기를 무서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은 죽음으로도 쳐 주질 않는다. 가치가 없기 때문에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죽음이다. 진정한 형벌이다.
내 죄 대신 죄 값을 치르신 형벌이다.

그 십자가 만이 유일한 타인을 사랑한 율법 완성이다.

빈자리처럼 어리석은 지혜는 절대로 어리석지 않게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는다.

십자가(주께서 자신을 치셔서 그 치신 그 틈사이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인 잉여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그 미련함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 중에 지혜인 하나님의 지혜이다.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이 될 수 없는
오직 십자가만를 헛되지 않게끔 도리어 자랑케 하기 위함이다.

(고전 1: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