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의 말만 들어라 (유일한 심판주는 인자 뿐이기에)

(마 17:5, 개정)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막 9:7, 개정)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눅 9:35, 개정)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목사 말에 무조건 반대로만 하면 구원된다.

한국 기독교(개혁주의, 건전신학, 성화론 등등) 말에 무조건 반대로만 하면 된다.

종교꾼들의 거룩 기준에 반대인 부정하다 라는 짖만 골라 하는 성령의 일에 입힌자들



예수님을 안 믿는 구원장사를 하는 교회 곧 개혁주의와 성화론자들이 하지 말아야 한다 라는 조항들이 있는데 정작 그렇게 하지 말라는 짖만 골라 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예를들어 주일성수를 해야한다. 라는 특정날을 박살내어서 모든 날을 주의 날임을 지키면 된다. 물론 자칭 수준 높은 성화론자들은 모든 날이 주의 날이기 때문에 주일성수란 없다 라는 주장 때문에 이단시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저들의 주일 안식일 개념이 과연 맞을까? 그들의 안식 개념 조차도 결국은 거룩하게 안식됨을 누리고 지킨다는 개념은 여전히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이란 부정한 짖을 하면 안된다 라는 점은 저들 수준높은 성화론자들 조차도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식 개념이 없다 라는 것을 성령은 증거한다. 안식일이 심판날이 되지 않는 자에게는 안식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칭 수준높은 성화론자들에게서는 받아들일수 없는 개념이 된다.

a: 자 그럼 그렇게 말하는 너는 그럼 안식일을 제대로 아느냐?
b: 물론 모른다. 제대로 알 리가 없다.

a: 그렇다면 너도 틀렸지 않으냐?
b: 아니 왜 내가 맞아야 하는데?

a: 맞지도 않으면서 왜 남이 하는 안식은 틀렸다고 하느냐?
b: 틀렸으니까 틀렸지?

a: 그럼 너는?
b: 나도 틀렸지?

a: 거봐 거봐 틀렸으니까 너의 틀렸다 라는 주장은 틀렸지 않으냐?
b: 왜 나를 두고 맞냐 틀렸냐 하느냐? 틀렸다 라는 주장을 나에게 따지지 말라 나는 책임없다.

a: 왜 책임도지지 않는 말을 하느냐?
b: 왜 내가 책임 져야 하는데?

a: 왜 자꾸 그런 궤변을 늘어놓느냐?
b: 우편 배달부가 사형선고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니 우편배달부 멱살 잡고 따지니 답답해서 그칸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 책임져야 할 문제인데 자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보고 따지니 웃기지 않은가?
결국 이 말은 너거들이 그렇게 안식 개념을 엉터리로 말한다는 증거이며 그것을 감추고자 하기에 우편배달부를 죽이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하는 그 자체도 너거들이 그카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달에게 책임이 있다. 달이 너희에게 심어서 너희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심은대로 말하는 것이다. 마귀를 심었기 때문이다. 나도 너거들처럼 마귀가 심겨져야 마땅한데 너거들이 싫어하는 것이 심겨졌으니 왜 나에게 따지냐?


예를든 이야기가 너무 어려웠는가?
안식 개념에 다른 개념을 집어 넣어도 동일하다.
성전, 교회, 믿음, 충성, 봉사, 순종, 행함, 명령어, 십자가, 피, 구원, 그 어떤 것을 집어 넣어도 동일하다.
안식 개념을 인간 쪽에서 잡는다는 자체가 마귀적이다는 뜻이다.
(안식이라는 창조를 인간이 지키겠다는 발상이 악마적이다. 창조는 인간에게 다루어지질 않는다. 지켜지질 않는다 도리어 창조가 덮칠 뿐이니 안식에 당할 뿐이다. 안식일의 주인에게 안 당해본 것들이 꼭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빈터를 덥석 앉아버리고, 덥석 문 것이다.)

십자가 개념도 인간 쪽에서 잡겠다는 것 조차 마귀적이다.
왜? 그림자인데 뭘 그림자가 실체가 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은 기껏 모으는 것이 그림자 이다.
그렇다면 성령입은 자는 바로 그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보게 된다.

이 차이이다.

실컷 종교꾼들은 지키고 행하고 해도 그림자에서 더 이상 실체를 보지 못하도록 막혀버림을 당했다.

그러나 바로 그 종교꾼들의 고마운 힌트를 통해서 그림자를 통해서 더더욱 실체를 보게 되는 감사를 누리게 된다.

그래서 종교꾼들의 반대로 행하면 무조건 정답이다.

자 이렇게 되면 종교꾼들이 가만히 있질 못한다. 다시 그들은 급수정해서 다시 반대로 행한다. 그렇게 되면 정답이 된다고 또 고착화 시킨다.

그러면 그 고착화 시킨 것을 또 뒤짚어 엎어버리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다 그래”를 뒤집어라 올레이??)

근원 자리가 이미 정해 졌는데 백날 처세술을 부려서 그때 그때 달라요처럼 상황을 눈치보면서 억지로 맞춘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천부께서 심지 않는 것은 다 뽑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정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아예 창세전의 예정을 들이대니 예정론자들도 기겁하면서 등돌리고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자기 사적인 자유가 아니다.
상대적인 자유다. 저들이 눈치 보면서 동 하면 서 하면 되는 것이 자유다.
다시 서 하면 동 하는 자유다.

한쪽은 법과 규칙으로 고정화 시킬려는 반면에(그래서 동 했다가 서 했다가 상대방 자유를 흉내 낼려는데 바쁘다. 상대방의 자유 조차도 법과 규칙으로, 믿음을 행함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생존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실상을 우상으로 해석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쩔수 없다.)

법과 규칙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오로지 사랑만 적용이 되기에 반대하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결국은 인간의 관심사 는 자기들끼리 만든 기독교 집단에 눈치 보기 이다.

예수님의 눈치를 보는 자는 없다.

자기들이 만들어 자기들끼리 눈치 볼 뿐이다.

예수님은 한국 기독교를 만든적 없다.
관심도 없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피 뿐이다.
그 피 발린자를 찾을 뿐이다.

자기 사람 끝까지 사랑한다는 그 확정을
자기 사람 끝까지 미워한다는 그 차이성으로

모든 그림자(한국기독교,한국교회 등등)는 사라져야만 하고
실상만 남기시는 자유의 진리만을 남기신다.

그림자들이 빨리 사라져라

실상인 예수님의 십자가만 예정 되었을 뿐이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언 놈이 꼬시더냐?

십자가가 실상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흐릿하게 하는 (목사, 한국기독교, 개혁주의, 성화론 기타 등등은 그림자로만 활동을 부지런히 해 주어야만 한다.) 것들은 사라져야만 한다는 이유로 발버둥치는 몸부림을 우리는 반드시 볼 수밖에 없다.

아 십자가가 실상이고 현실인 것이 맞구나 라는
하루 하루 확인하는 신나는 일만 누릴 뿐이다.

목사 말에 반대만 해도 성령의 일과 육의 소욕의 차이를 보게 된다.

믿음의 주를 안 쳐다 보는 자들, 목사가 그 시선을 자기에게 돌리는 자들은 마귀다.
허다한 주님의 증인은 세상이 감당 못하는 세상에 저촉받지 않는 자들이다.

(히 11:32, 개정)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 11:33, 개정)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 11:34, 개정)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 11:35, 개정)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히 11:36, 개정)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히 11:37, 개정)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개정)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9, 개정)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40, 개정)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 12:1, 개정)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2, 개정)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3, 개정)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 12:4, 개정)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 12:5, 개정)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6, 개정)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히 12:7, 개정)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개정)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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