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팔아넘긴 인신매매범이자 자식을 인신제물 삼는 아브라함

(창 12장) (창22장)


우리가 흔히 윤리적인 부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탄없이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정당성과 그 당당함은 결국은 그 사회가 그런 사고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다.

만약 무인도에서 단 둘 뿐인데 왜 당신은 벌거벗고 다니냐라고 나무랜다면 오히려 뻘쭘하다. 한 여름의 무더운 땡볕에서 오히려 가리울 것을 다 가리고 윤리를 갖춘다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불편을 줄 뿐이다.

상대방은 자유로운데 오히려 자신이 맞지도 않는 어색한 법의 옷을 갖추고 윤리랍시고 그 억지성을 상대방에게까지 요구하게 되는 셈이 되니 말이다.

성경에 아주 희한한 일이 또 한 사건으로써 증거 된다.

물론 남자라면 그런 실수를 할 수 있고, 여자라면 믿었던 남자에게서 그런 모습에 실망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전혀 불가능한 사건이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그 뒷 이야기가 희한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거봐 거봐 너거들 약속 잘못 건드려서 비로소 복의 기준이 누구인줄 심판받고 알게 되었지롱 이라고 놀려먹는듯한 뉘앙스로 다가온다.

그렇게 되면 도대체 누구관대? 누구지? 저 사람의 배후는 누구이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분명 이야기의 흐름상 인신매매와 같은 마누라 팔아 먹는 사건이다.

그런데 그렇게 유발해 놓고 결론은 전혀 다른 이야기 이다.

마치 예수님의 천국 비유와 같은 방식이다.

누구든지 눈치 챌만한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도리어 그 보편적인 이야기를 뒤짚어 엎어서 어떤 누구도 무슨 소리인줄 못알아먹도록 하는 것이 천국 비유이다.

묵시란 항상 이런 식이다.

아브라함은 사람이 아니라 묵시 덩어리 이다.
그런데 모습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으니 너도 나도 아브라함을 사람으로 해석한다.

그 아브라함의 짝꿍이 바로 아내 사래다

문제는 이 아내 사래 또한 묵시 덩어리 (예루살렘) 이다.

(갈 4:21, 개정)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정)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갈 4:23, 개정)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정)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갈 4:25, 개정)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정)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정)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정)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정)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말씀 되신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넌 열국의 아버지 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은 무자식의 대표자 이며, 그것도 자기가 낳지도 않는 자식 마저도 일어버림을 당하는 도저히 해석 불가능한 믿음의 조상 곧 묵시 덩어리 이다.

이런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자부하던 자들이 얼마나 그 해석이 엉터리 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믿음의 조상을 억지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김으로써 그 빈터를 괜히 건드리다가 도리어 그물망에 걸려든 실족한자들의 대표성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다.

바로 이거다.

동일하게 묵시 덩어리 곧 열국의 어머니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오히려 불임 여성의 일번 타자로 성경에 등장한다.

불임 여성의 대표인데 무슨 열국의 어머니인가?

그런데 그 불임 여성이 열국의 어머니인 의미가 믿음으로 증거 되기에 그 믿음으로 증거되는 사건을 해석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이해 하라고 벌어지는 것이 아닌 더더욱 못 믿도록
더더욱 안 믿겨지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애굽 족장에게 아브라함으로부터 팔려서 그 부족의 여성 곧 순풍 순풍 아기 잘 놓는 여자들을 모조리 태를 닫아버리게 만드는 그 중심점이 아내 사래로써 비로소 애굽족장이 아브라함을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안삼고 싶어도 삼을 수 밖에 없는 그 정점을 보여주는 이야기 이다.

결국 인신매매범처럼 아내 팔아먹어서 돈 챙긴 나쁜놈이다 라는 해석을 유발케 하는 것은 일종의 미끼이다.

오히려 누가 더 억울하냐 하면 아브라함 자식 없는 아버지 아내 사래 불임여성 이라는 타이틀로 저들의 순풍 잘 놓고 자식을 많이 거닐고 있는 그 실상을 모조리 허상임을 들추어내는 것이 바로 믿음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이 예수님이 인자로 오셨다는 것은
전혀 메시야 답기는커녕 사람들에게 짖밟히는 무시 덩어리 자체로써
인간들의 메시야상을 모조리 실족케 만들고

또 그의 짝인 인자의 짝꿍인 성령의 전이 되는 교회는
마치 미말의 구경꺼리요 미끼요 찌끼요 불임여성 같으나
죽은자 같으나 그 속에 산자의 약속 곧 믿음이 있다 라는 것을

아브라함과 사래가 짝꿍이 되어서 그 애굽 족장 세계를 쪼개버리듯이
오늘날 인자 되신 예수님과 그 인자의 영을 받은 교회가 짝꿍이 되어서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에 넘기우고
우리는 그 죽음에 넘기움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이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서 사로잡힌바 된 묵시를 역사를 배경으로 깔고
역사라는 종이를 두패로 쭈우욱 가위질 하듯이 단절 분리 분별 시키는 일을

마치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는
인자와 아버지는 하나다 라는 짝꿍이다 라는 표현과 같은 취지인 겁니다.

이스라엘과 여호와는 거룩한 전쟁을 그렇게 짝꿍이 되어서 펼치셨듯이
이제 예수님은 인자로써 죽은자와 방불한 불임여성과 같은 교회를 자신의 짝꿍으로 삼아
세상의 가장 순풍 순풍 잘 놓는다고 여겨지는 그 중심점 같지도 않는 가짜 중심점 깊숙한 곳에서

진짜 중심점인 십자가에서의 잉태한 배태물인 교회를 중심점으로 삼아

세상을 가르는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팔을 교체하는 교체의 역전 드라마)

인자(약속)의 짝꿍이라는 이유 만으로 말이죠.

(갈 4:27, 개정)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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