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을 바친 삭개오

왜 인자로 오셔야만 하는가?

(눅 19:8, 개역)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눅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 두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토색이다.

(눅 19:8, 쉬운) 『삭개오가 서서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얻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즉 사기쳐서 얻은 이윤이다.

도적이란 이윤을 빼앗아 자기의 것 즉 소유로 삼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똑바로 살아라?

아니다 구약의 여호와 전쟁이 생각 난다. 구약의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소유에는 일체 양보없는 전쟁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전능하심이다. 오죽 하면 어느 정도로 전능한고 하니 일체 자기의 것에는 양보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에 대한 양보가 없는가? 거룩 곧 약속이다.

그 약속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친히 창녀가 되어서라도 가장 더럽고 추잡하고 부정한 자리에 내려가서라도 그 약속에 일체 양보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 오죽하면 도둑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언급하신다.

(마 12:29, 개정)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마 24:43, 개정)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즉 상대적인 개념이다는 것이다. 도둑에게는 주인이 상대적인 의미이다.
마 12장에서 언급한 그 주인은 지금 바리새인과 유대인을 장악한 주인인 마귀를 의미한다.
마 24장에서의 도둑의 상대적인 의미의 주인은 이 땅 이 세상의 주인을 말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가막히게 상대적인 표현이 도둑이다.

예수님 자신이 도둑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둑에 의해 빼앗김을 당해야 할 입장에 놓인 세간 물건 가구 등등이 성도이다. 그리고 주인은 마귀이다.

바로 이런 소유성에 있어서 기가막힌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 영의 일 곧 성령의 일이다.
성령의 소욕은 육의 소욕이 상대적으로 깔린 배경 아래에서 벌어진다.
그런 배경이 깔리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도둑이 있을 수 없다. 소유성에 관한 문제이다.
자기 물건을 자기가 빼앗고 훔쳤다고 도둑이라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남의 소유요 남의 물건이어야만 도둑이라는 의미와 빼앗는다는 의미와 훔쳤다는 것이 성립이 된다.

그러므로 은사란 상대적인 육의 소유성이 활동하는 곳에서만 드러난다.

여기 삭개오 라는 유대민족에게 있어서의 도둑놈인 매국노 세리의 집에
예수님이 방문하신다.

사기꾼 토색자와 예수님의 결합이 눈에 선명하게 확 드러났다. 어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명백한 알리바이 이다.

그리고 자칭 법의 수호자 경찰노릇하는 자들인 바리새인들이 드디어 물증을 잡고서 삭개오가 아니라 예수님을 공격한다. 그래서 삭개오가 자신들의 물증 노릇을 하는데 있어서 미끼로 삼은 것에 대해서 속이 시원할 정도로 고마울 것이다.

왜 예수 당신은 죄인의 집에서 죄인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가?

(눅 5:17, 개정)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눅 5:18, 개정)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눅 5:19, 개정)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눅 5:20, 개정)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5:21, 개정)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눅 5:22, 개정)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눅 5:23, 개정)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눅 5:24, 개정)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눅 5:25, 개정)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눅 5:26, 개정)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눅 5:27, 개정)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5:28, 개정)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9, 개정)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눅 5:30, 개정)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눅 5:31,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눅 5:32, 개정)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33, 개정)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눅 5:34, 개정)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눅 5:35, 개정)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눅 5:36, 개정)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눅 5:37, 개정)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눅 5:38, 개정)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 5:39, 개정)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마 11:19, 개정)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 24:38, 개정)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49, 개정)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눅 5:30, 개정)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눅 5:33, 개정)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눅 7:34, 개정)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 10:7, 개정)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눅 12:19, 개정)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45, 개정)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눅 17:8, 개정)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눅 17:27, 개정)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 17:28, 개정)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눅 22:30, 개정)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쉽게 말해서 인간들이 노아 방주에 대한 반발성이 저런 얽매인 삶에 대한 자유선언이 먹고마심이다. 그리고 노아 홍수로 싹쓸이 해도 여전히 그 반발성은 더욱더 뚜렷하게 바벨탑으로써 그 먹고 마심의 거짖안식과 거짓 평안을 고수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인자는 바로 그런 인간의 바벨탑 쌓기의 의식을 먹고 마심의 네트워크를 이제 예수님이 친히 형성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먹고 싶어하고 우리가 마시고 싶어하는 방식이 아닌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의 네트워크이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금욕주의와 금주로써 철저하게 무장한 자들에게 의도적으로 그들의 눈과 코앞에서 노골적으로 먹고 마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 곧 토색하는 자들과 창기 곧 몸을 파는 자와 죄인 곧 거룩하지 못한 더러운 자들과 친구라는 정확하고 명확하고 한치 오차 없는 밀까부듯 초정밀 과학수사대의 조사망에 제대로 된 조사결과에 빠져나갈수가 없게 되었다.

문제는 그 조사 백날해도 백날 제대로 정확하게 법적인 알리바이를 잡아도
예수님에게는 그 법을 적용하고자 법을 들이대어도 그 법이 타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총알이 (가장 쎈 힘) 예수님에게 박혀도 예수님이 죽지 않는다며는 총알은 무용지물이요 가장 센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센 놈이 바로 도둑이다 라는 것이다. 법이 아니요 도둑이다는 것이다.
주인이 아니요 도둑이다는 것이다.

도둑이 더 쎄다 라는 것이다.

거기에 그 쎄다 라는 전리품에 가구는 불가항력적인 저항으로써 늑탈될 뿐이다.

늑탈? 참 기분 더럽기 짝이 없다.
맞다 기분 더러워라고 늑탈이라는 표현을 성경이 일부러 적었다.

늑탈 될 뿐인 주제에 인간은 마치 자기 소유권이 있는냥 까불어 댄다.

믿음도 소유요 교회도 사적집단으로 소유요 심지어 성령 조차도 소유 곧 유익으로 다들 해석하는 판국에

도리어 믿음에 늑탈 당하고
성령에 늑탕 당할 뿐이고
새이스라엘에게 쪼개짐을 당해야 할 입장에 놓였을 때

그야말로 도둑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함이 마땅하다.

그래서 과연 누가 토색자인지 예수님에 의해서 재해석 된다.

사기쳐서 남의 이윤을 빼앗는자인지 그 진위를 법 아래에 있는 자의 해석과
법 위에 있는 도둑 예수님에 의해서 해석되는 그 차이성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 두 해석의 차이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 삭개오 세리이다.
천만다행으로 바리새인도 예수님보다 먼저 앞서서 삭개오를 그들의 증인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미끼로 삼은 것을 보고 또 다시 삭개오를 증거물로 삼았다.
마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하늘이 도운냥 바리새인들이 증거물로 잡자
예수님 또한 그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으로 인해 새언약을 증거하신다.
짝이 맞은 것이다. 새언약 증거에 옛언약을 쥐고 있는 자들의 사고를 배경으로 깔면서 그 차이성을 증거하는데 아주 아주 바리새인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도운 셈이다.

(삭개오, 고아,과부,나그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새이스라엘, 등등 모두다 주님의 피조물인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미끼로 삼았으니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

보통 전 재산을 바친 삭개오 설교를 하는 목사들의 관심사가 이미 삭개오가 바쳐진 자임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 삭개오의 소유물 이동에만 관심을 둔다.

삭개오의 소유물이 예수님에게 이동했으니
교인들의 소유물도 교회로 이동하듯 계좌이체를 늘 염두한다.

그러나 정작 삭개오 이야기는 정반대이다.

바로 그 따위 사고방식이 있는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삭개오는 자신들의 유익과 소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반면에

정작 큰 돈을 예수님에게 바치고 있으니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피리를 못 불었으면 춤을 추지 않았는지를 예수님을 밝히고 계시는 것이다.

자 그럼 예수님이 돈에 관심이 있고 돈의 이동을 말하고 있는것인가?

천만의 말씀

바로 잃어버린자를 찾는다는 예수님의 것에 대한 소유성에 일체 양보함이 없음을
바리새인들의 육의 소욕을 가지고서 증거하는 것이다.

이미 삭개오 자체가 주님의 소유물이다.

그런 주님의 선택에는 반드시 반발성이 있어서 그 선택이 부각이 된다.
마치 욥에 대한 선택을 부각하는데 있어서 마귀의 반발성을 끌어들임과 같다.

삭개오가 어떤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창세전부터 예수님의 소유물임을
반드시 그런 성령의 소유물에 있어서 그 차이성을 육의 소유성 마귀의 소유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서 그 차이성을 증거함에 있어서 그 기가막힌 기묘한 지혜에 더 이상 마귀 조차도 송사 못하도록 마귀의 가장 최종적은 무기 아이템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마귀가 소유한 무기 아이템 조차도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활동된다는 것은 우리가 구약의 에스더와 하만의 이야기에서 늘 보아왔다.

삭개오 자체가 주님의 보물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주님의 마음이 있다.

그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육의 소욕으로 가득찬 자는 반드시 긍휼의 그릇을 드러내는 토기장이의 지혜에 적극적으로 동원되는 진노의 그릇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애굽의 바로 왕이 바보 같이 걸려들었다.

이스라엘이라는 하늘이 직접 빚은 토기그릇의 우수함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애굽나라는 적극적으로 활용이 된다.

(롬 9:16, 개정)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3, 개정)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정)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정)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정)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정)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롬 9:18, 개정)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원치 안아도 주님의 긍휼을 드러내기 위해서 완악해야만 한다.

결국 긍휼도 소유성으로 생각하는 자는 여전히 말귀를 못알아먹는 셈이다.
완악 자체도 소유의 반대인 배제와 거부를 적극적으로 행한다면 행해질수 있다고 여긴다.

긍휼도 완악도 우리 소관이 될 수 없다. 이미 우리 손에서 떠난 문제이다.

누기 긍휼이 여김을 받았다는 말은 반드시 누구는 완악케 되었다는 주님의 솜씨가 펼쳐졌다는 것이다.

왜 완악케 했다는 주님의 솜씨를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는 거부를 할까?
물론 가짜이기 때문이다.

어두움도 창조하신 분이 주님이다. 왜 어둠을 창조했냐고 토기장이에게 힐문할 자격이 있는 자는 없다. 힐문하겠다는 취지가 벌써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고 더 이상 피조물의 위치가 아닌 자리에서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주님 좋으라고 주님의 긍휼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완악함을 발휘해야만 할 것이다.

파라오 왕이 기가막힌 소리를 한다. 여호와가 누군데?

ㅋㅋㅋ 올치 올치 여호와가 누군데 라는 발언을 괜히 하는 바람에 주님이 과연 누구인지 파라오에게 제대로 보여주신다. 시게 짖밟히고 자신들의 수호신들이 도리어 자신들을 공격하고 최종적인 육의 통로까지 단절시키는 장자의 죽음까지 가야 비로소 파라오는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즉 심판주다.

자신들의 수호신 보다 가장 센 분이다.

도리어 자신들의 수호신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는데 이용당하는 무용지물의 신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우상과 악마까지도 다루시는 신이다.

절대로 장자 죽음 전 까지 9번째 재앙 전까지 여호와가 누구인지 이제야 알았다고 고백할 수 없다.

반드시 10번째 인간이 죽어야 장자가 죽어야 육의 최종적인 소유물까지 죽어야
비로소 시인하게 되는 여호와이다.

결국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파라오 왕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게 된다.
완악함을 절대로 애굽왕 파라오 스스로가 느슨하게 풀고 유들유들하게 부드럽게 할 수가 없다.

왜 이런 구차한 설명을 하는가?

실제상황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바리새인과 유대인의 완악함은 절대로 중간에 멈춰질수가 없다.

끝까지 그들의 완악함을 적극적으로 주님이 심으셔서 영광 받으신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노골적인 이단이든, 개혁주의에 숨은 이단이든, 성화론에 숨은 악마이든, 심지어 십자가를 외치는 교회에 숨은 이단이든,

주님의 영광성에 한치 오차 없이 증거되는데 있어서 육의 소욕의 완악함의 배경은 성령의 소욕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활용이 된다.

다말이 되도않는 인간 시아버지 유다에게 창녀가 되어서라도 유다 속에 있는 약속에 뛰어든 것은 바로 약속 보다 가장 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말은 심판주 곧 가장 센 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인 하는 행동을 해서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올인 된 채로 태어났기에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그 올인 앞에 유다는 무릎 꿇게 된다. 그 다말이 바로 예수님이다. 다말이 예수님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말은 예수님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인자의 모습이다.

가장 싫어버린바 되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부정적인 창녀이고 가장 더러운 여자의 모습으로써 그 약속에만 뛰어든 것은 곧 예수님이 심으신 십자가에서 자신이 행하심을 미리 선취로 보여준 것이다.

전 재산을 바칠 필요 없다. 이미 다 바쳐진 채로 태어났다.

이것이 안 믿겨지니까 구지 재산을 바치는 행위를 함으로써 확인할려고 한다. 그것을 유도하는 깨작깨작 거리는 바람잡이들을 주님이 깔아 놓으셨다.

꼭 우리는 다 빼앗겨야 비로소 처음부터 바쳐진 채로 태어난 자임을 알게 된다.

소유성을 자기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과거도 미래도 모두 주님의 것이면 이동할 필요가 없다.

이동을 유발하는 놈이 무슨 의도인지를 파악하는 재미만 누리면 된다.

욥의 세 친구는 그저 소유의 이동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욥은 외친다.

그런 소유의 이동에 관심 있는 너희를 위해 정결한 분의 죽음을 외치는 사랑이 누구인가를 말이다.

소유에 이동이 있는 자들은 그 사랑 조차도 자기에게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랑을 발휘하는 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사랑의 대상이 되어 본적이 없는 피조물이 된 적이 없는 인간이기에
바로 그런 악마성인 하나님형상관을 깨뜨리는 것이 욥이 당하게 되는 애매한 고난이다.

바리새인의 삭개오를 정죄하는 그 악마성인 하나님형상관을 대표성으로 삼아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그런 하나님형상관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오셨다.

심판주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하나님 형상관에서 절대로 믿을수 없는 인자의 모습으로 와서
욥의 세친구에게 당하는 욥처럼
시아버지 유다에게 당하는 다말처럼
이스라엘의 왕을 원하는 백성과 그들의 왕 사울 왕에게 당하는 다윗의 모습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싫어하는 모습만 골라 골라 모아서 집결한

고난의 종으로 와서 모든 육의 걸림돌이 되도록 다 역어버리셨다.

이 십자가만 창세전에 예정 되었다. 육은 모조리 못 박히는 창조만이
비창조성이 다 못 박히는 창조만이
오로지 영으로만 영의 소욕으로만(육의 소유의 차이성으로)
예수님의 절대 양보 못하겠다는 자기소유욕망만인 영으로만

교통되는 것이 예수님의 나라임을 도리어 철저한 단절성(거룩한 전쟁)으로 증거하신다.

예수님 자신의 증거만이 참 증거임을 말이다.
 
(마 17:5, 개정)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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