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사면과 일만달란트 탕감한 임금 


(마태복음 18장 21-35절)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방금 9시 뉴스 오늘 2009년 12월 29일 이명박 대통령이 온갖 비난을 뻔히 알면서도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을 특별사면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쁠까요?

일만달란트 탕감해준 임금 비유가 생각 났습니다.

저는 조금 의외의 의문이 이전부터 쭈욱 계속적으로 해결되지 않은채로 남아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일만 달란트 탕감해준 임금 비유야 말로 누가복음의 용서와 가장 잘 부합이 된다고 여겼는데 왜 하필이면 마태복음인가 라는 의문입니다.

이 임금 비유를 저는 이중(엽기,불공평한,부정함)적인 임금이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곤 했는데
그래도 늘 누가복음으로 들어가시지 왜 마태복음에 남아 계신가 라는 점입니다.

뭐 제가 신학자도 아니니 그냥 의미 없는 의문인줄 뻔히 알지만 괜히 한번 그런 생각이 아주 잠깐 드니까 그냥 찝찝한 채로 아주 짧게 나마 여운으로 남아서 그냥 넘겨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비유로써 임금비유를 증거했습니다.

천국이 이러 이러 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대상이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이 대상이라면 정작 천국이야 말로 가장 유대인과 부합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부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비유라는 겁니다.

오히려 천국 비유로써가 아니라 용서 비유로써 누가복음에서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다면 아주 잘 부합이 되고 도리어 천국비유로써는 이방인과 전혀 일치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창기와 세리가 먼저 천국 가는 긍휼의 의미에서는 잘 맞지 않느냐 라는

저 나름대로의 짧은 소견에 의해서 그런 여운이 남았나 봅니다.

아무튼 천국 곧 선민사상으로써 천국백성이라고 당연시 여기는 유대인들(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동일한 구원관)에게 전혀 그들의 천국과 일치성이 없는 차이성으로써의 천국이기 때문에

임금비유야 말로 저들의 천국을 깨뜨리는 식입니다. 천국이 깨진다는 말은 저들의 구원관 선택과 예정관 심지어 메시아관 율법관 성전관 가장 예민한 성전관이 (특히 용서관)깨진다는 겁니다.

마치 요한복음처럼 너거들 성전 깨라 내가 3일만에 짖겠다 라는 무모한 도전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너거들 천국 깨라 내가 3일만에 천국 만들마 라는 식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들의 모든 신앙이 천국과 연관 되어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그 천국을 깨뜨리겠다는(건드리겠다는) 취지는

자칫하면 이런 천국백성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전형적인 마귀와 같다는 겁니다.

오히려 천국백성들에게서 마귀적인 것은 없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깨작 깨작 건드리니 마귀 삼기에 딱입니다. 천국백성이니 그럴 권리를 조심스럽게 마음껏 실행한다해도

누가 뭐라고 할 자들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아마 그것을 노리고 더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마귀를 잘 키운 것입니다.

전형적인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믿는 제대로 된 우상민족 말입니다. 육적인 민족인 유대인 말입니다.

그렇다고 히틀러처럼 예수님을 죽인 자라고 정의감으로 심판하는 정당성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뒤로는 유대인과 똑같은 더러운 짖을 감추고자 정의성(거룩성)을 더더욱 압장세우는 식은 모든 인간은 동일할테니 말입니다.

결국 누구든지 또는 히틀러처럼 정의감을 적극적으로 나서든지 소극적으로 나서든지 이래저래 예수님의 빛 되심 앞에서는 천국증거 앞에서는 항상 적극적인 재료꺼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중(엽기)적인 임금님은 누구든지 정의감에서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그 일만 달란트 빚진자를 탕감해 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소위 교회라는 집단이 천국가기 위한 집단으로써 형성 되었다면
그들의 행함에서가 아닌
오로지
특별사면 뿐으로써만 들어가는 나라가 하나님나라임을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빚 갚기가 불가능한 자 곧 용서를 도저히 할 수 없는 죄인에게
불가능한 용서를 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성경부분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예수님 자신이 그런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다는 의미로써 용서를 하면 반드시 반발 세력이 예상치도 못한 자들이 불쑥 튀어나옴으로써 우리는 그들이 악마였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항상 반발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사면 자체가 반발을 예상했고 유발을 합니다. 저들의 정의감 조차도 결국은 사적인 정치술임을 들추어내는 방식이 아닌 특별사면은 구지 특별하다고 볼 수 없겠지요. 상대세력의 반발을 의식하고 유발, 더더욱 자극한 것이니까요)
어떤 반발? 아무 댓가도 없고 심지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용서요
모든 허물 곧 과거 현재 미래의 허물까지도 다 덮는 식입니다.

여기에 마귀는 미치고 팔짝 뜁니다.

그래서 교묘하게 더허거나 빼는 방식이 뭔가하면 과거는 다 덮어줘도 적어도 앞으로는 우리가 그 은혜에 보답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느냐 라는 것을 삽입 시킵니다.

이 부분을 박영선 목사는 성화를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 하자 라고 당당히 외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웃기는 것은 목사 그 당사자만을 위한 사적인 자존심 챙겨주기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적인 당당함이 결국 인간이 성전에 기여이 손 대고파 하는 취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때려죽어도 폼나게 살고 싶지 쪽팔리게 살고 싶지 않다는 그 자존심 때문에 동원되는 사적인 성화로 보았으니 결국 교회 또한 인간들의 사적인 조직이 되고 만 것입니다.

목회자의 탐욕이 그렇게 부른 결과가 된 겁니다. 결국은 돈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특히하게도 이 이중(엽기)적인 일만달란트 탕감하는 임금비유를 통해서
정작 탕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탕감 자체를 사적인 용서와 사적인 긍휼로써 자기유익으로만 삼아버린 자를 통해서 스스로 발로 그 용서를 차버리는

정작 용서 때문에 심판을 불러들인 결과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완료를
반드시 원인 있는 결과로 자기쪽으로 땡기는 바람에 오히려 용서를 무시하면 인간의 한계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즉 인간의 역사가 다 이러한 결과 뿐이다는 겁니다.

역사든 교회든 성전이든 항상 자기 손을 대고 싶어하는 입장에서 항상 결과는 이러하다는 겁니다.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결과 말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손을 대고 싶어하는 그 욕망을 어찌할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항상 더 집착적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할 수 밖에 없을테니깐요.

오즉하면 천국을 손대고 싶어하니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지 않겠습니까?

용서도 쪽팔리는 용서가 아닌 정정당당한 용서를 받자 라는 것이니 말이죠.

그러나 특별사면 자체가 용서받는 자를 위한 입장이 아닌
임금의 천국 전체 숲을 위한 겁니다.

그렇기에 방금 용서 해 놓고서
다시 처참하게 버려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용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이중(엽기)적인 임금 비유를 접할 때 마다 인간들은 저런 이중성 앞에서 혀를 내두릅니다.

도대체 뭐냐 라는 겁니다. 차라리 용서를 하지 말던가 말이죠. (마치 차라리 선악나무를 동산중앙에 왜 괜히 만들어서 가장 잘보이도록 했고, 또 따먹지 못하도록 막지도 않았으니 그게 무슨 하나님이냐 라고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라면 안그랬다는 선악따먹은 티를 낼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것이 선악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방식이 일만달란트 탕감입니다. 사실은 성경 전체 어떤 구석구석이든 성경전체가 다 이렇게 맞물려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도 그 짤린 인간처럼 인간이라는 동질성이 있기에 자신에게도 해당된다고 본 겁니다.(선악의 눈이 확 밝아질 수밖에 없지요 졸지에 선악과를 먹은 티를 안 내고는 못배기도록 한 겁니다. 오히려 이런 숨겨진 선악의식을 지적받는 것이 치료받을수 있는 기회죠.)

만약 동질성이 일체 없다면 해당되지도 않을테니 신경 쓰지도 않을텐데
신경 쓸 수밖에 없도록 인간이라는 한 아담안에 이미 원치 않아도 역여진 문제입니다.

즉 첫 번째 가지도 아낌없이 짤라버렸는데 (롬 11장)

(롬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두 번째 아니 아예 죽은 가지였음이 확실한 자들을 접붙였다면
죽은 가지 주제에 뭘 따질수가 있단 말이냐 말이죠.

결국 과거 이스라엘 조차도 원래는 죽은가지로써(고아 과부 나그네로써) 나무에서 공급해준 그 은혜로만 살았는 주제에

단독적으로 자기 사적인 영역을 확보하겠다고 원 가지 스스로 뚝 떨어져서 따로국밥 챙기겠다는 발상 자체가 천국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도리어 천국을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천국을 소유성으로만 보겠다는 고집인 것을

더 고집적이고 이중(엽기)적인 임금의 천국관에 걸려들게 된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인간들의 상상조차도 개입할 수 없는 천국을 일체 양보 못하겠다는 취지로써 인간의 사적인 감정 사적인 정의감으로 가득한 천국과 이웃사랑을 모조리 거부하겠다는 취지입니다. 어딜 감히 그런 쓰레기 따위를 (자아와 일체시키는 인간들의 성화) 천국에 집어넣을려고 하느냐 라고 도리어 실시하지도 않았는데 너는 그런 것을 실시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다고 미래적으로 미리 쳐박고 공격하고 박살내면서 다가옵니다.

아직 하기도 전인데 이미 그런 계획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다는 이유로
아예 박살을 내면서 말이죠.
(넌 이런 행동을 앞으로 하니까 미리 때리겠다고 하니 얼마나 엉뚱하게 느껴질까요? 그러나 실제상황 맞습니다. 가룟유다보고 너가 해야할 일을 어서 해야지 안하고 뭐하노 라고 부추기니까요.)

마태복음의 천국비유의 취지는 다 이런식입니다. 너 짤렸어 라는 취지입니다.

짤린 당사자는 디기 억울할 겁니다.

그러나 그런 사적인 억울한 생각이 집단적인 성령의 구조에 의하면 전혀 억울한게 아닙니다.

도리어 천국 스스로가 천국 스스로를 증거하는데 아주 요긴한 재료가 되는 땔감으로써 그 값을 톡톡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만의 사적인 집단을 옹호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지었듯이
그 반발하는 역할 곧 완악함과 진노의 그릇 다운 그 진면목을 유감없이 펼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다고 토기장이가 손해 보는 전혀 없습니다.

괜히 선악을 알게된 정의감을 불태우는 본인만 손해일 뿐인거죠. 돌을 아무리 주먹을 쳐도 지 손만 아프니까요 아니 이젠 돌이 스스로 찾아옵니다.

차라리 너 짤렸어 라는 재료를 삼아 천국 자체가 주체가 되는 그 선포 앞에서
맞습니다. 주여 전 백번 만번 짤려도 마땅합니다. 그런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고백

바로 이 고백을 도리어 첫 번째 가지인 이스라엘이 서슴없이 나와야 하는 것이
그들 말대로 성전과 율법과 먼저 맡은자의 모습이거늘

전혀 나오는 기색은 없이

도리어 자신들에게서 나와야 할 것이 이방인에게 나오니까 더더욱 시기심만 부리는
진짜 본심이 이방인 때문에 나오게 되는 그 악마성을 자신도 모르게 보게 되니 부랴부랴 덮을려고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달아 뻥뻥 터지는 욕심이 잉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그래서 결국 모든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새롭게 일으킨 스데반 집사와 새이스라엘을 제거하는 일에 전념할 수 밖에 없도록 뭔가가 씌여버리게 됩니다.

용서? 절대로 사적으로 챙길수 없습니다. 성화론자들이 그런 우려를 주장하면서 결국 뒤로는 사적인 구원챙기기에 사적인 직분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했지 결국 여전히 사적으로 챙기는 본성을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늘 말도 안되는 용서가 하루 하루 제공될 뿐이며 그 용서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의 문제입니다. 이 구조가 덮쳐진 자에게는 아무리 죽은 가지 일지라도, 창녀이고 세리이고, 심지어 날때부터 소경된자 라 할지라도. 심지어 이미 죽어서 무덤에 놓여서 다시는 죽은자가 못 돌아다니도록 돌무덤 입구를 큰 바위돌로 막아놓아도

용서는 다 뚫어버리고 능히 천국 스스로가 천국 다움을 펼칩니다. 죽음도 무기력하게 그 천국 앞에서 무릎 꿇건만

오히려 수천년의 하나님의 역사를 지녔다는 유대인들이 심지어 더 많은 역사를 가진 기독교 만이 죽어도 무릎 꿇지 않는 그 이유는

누락되고 사라질 교회 마저도 자신과 일치하여서 끝까지 영원히 붙잡겠다는 것은
결국 사라질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보는 이용꺼리(재료소스)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주체로 삼아버려서 도리어 실상을 무시하는 그 고집성을 지적하는 겁니다.

우리가 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적하신다는 자체가 결국 주체는 예수님이요 천국입니다.

그 천국이 가만히 있지 않고 늘 우리를 깨뜨리고 허물어 버리시러 오신다는 사실 앞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가 오히려 그런 선악을 알게 함으로써 인간이 선악을 따먹은 것이 아니라
선악이 인간을 따먹었다는 그것으로 이제 알았다 라고 외칠수가 있는 겁니다.

오직 생명나무에 의해 먹힘 당한자들이 비로소 보게 되는 교회 뒤에 있는 실상에 의해서 보게 되는 실상 말입니다.

이 이중(엽기)적인 임금의 비유는 일만달란트에 따먹혀버린 인간을 도리어 용서에 의해 먹힘당한 구조를 역으로 증거하는 방식이 절대로 용서 없는 용서의 세계를 증거하는 심판이 곧 용서임을 증거합니다.

절대로 용서 없는 심판만이 유일하게 용서받는 불가능한 용서가 주체가 되는 세계입니다. 이 땅에는 없는 세계입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용서다 라는 그 용서만 받은자만 가는 세계.

남을 용서할 생각 추호도 하지 맙시다.
도리어 용서는 커녕 용서의 대상이 되었다고 그 용서의 주체가 나 아니요 예수님 뿐이였다고 그 피흘리신 분을 소개할 뿐입니다.

올해 한 해는 이 용서 스스로가 주체가 된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이거 하나 건졌습니다.
내년에 또 건질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매일 하루 하루 늘 영원히 이 용서가 스스로 주체되심에 일체 양보 없다는 사건들이 벌어져서 그 용서 앞에 무조건 엎드릴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지길 원할 뿐입니다.

교회가 가장 먼저 엎드리라고 준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지 말고 또 교회 아닌자가 먼저 엎드렸다고 그것 때문에 본격적으로 시기심을 드러내는 그 십자가가 벌리는 불륜(엽기)의 사건 앞에서 또 이런 것 까지 지적해주시는 그 사랑 앞에서 감격하는 내년이 되기를 바라며 ...
(벌써부터 그런 사건의 조짐이 이미 벌어지는 듯 하니 기쁩니다. 멈출 수 없는 사건이기에)

특별사면? 인간은 매일 매일의 특별사면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삽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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