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도 않은 잃어버린 허풍을 찾아서

사람은 평생을 허풍이라는 안개만을 쫓고 살고 있다.
실상이라는 현실조차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몸부림은 늘 허탕을 치면서 조차도 그 허세를 부러워 하면서 허망한 망상만을 추구한다.

한번은 교회에 장로랍시고 그 장로의 허풍에 다들 무슨 영웅담을 들은냥 우르르 몰려 귀를 쫑긋 세우면서 들을려고 한다.

그 허세 부리는 장로의 열성에 같이 빠져서 몸이 끓어 오르고
그 장로의 분노와 정의감의 외침에 같이 몸을 불살라 버리고픈 마음에 동질화 된다.

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일심동체의 삼위일체가 된 후로는 아니 그렇게 일치 시킬려고 무지 투자한 이후로는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가 괴로우면 나도 괴롭고 그가 기쁘면 나도 기뻐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건만

어느새 훌쩍 떠나 버리고서는 또다시 나만 홀로 남아버렸다.

무능하고 조용한 남편은 비록 허풍일지라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던 허세부리는 영감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남편을 닥달내어서라도 그 허풍을 배우라고 바가지를 긁었건만 그 바가지 조차도 소용없을 정도로 휭 하니 썰렁하게 빈자리의 차가움만 남아버렸다.

아무런 의욕도 없다.

또 다시 우을증이 찾아오는 것 같다. 마음의 감기 ! 늘 감기처럼 지나갈줄 알았는데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상사병걸린 총각처럼 밥알 넘기울 힘조차도 나질 않는다.

이렇게 주저 않을수만 없다. 그래 부활시키면 된다. 어떻게해서든 그 차갑고 냉냉한 그 빈자리를 다시 따스하고 온정이 넘치는 자리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 빈자리를 그대로 냉하니 남겨버리는 것보다 무책임하고 방종한 짖이 어디있단 말인가?
어서 툴툴 털어버리고 빨리 회복해서 다시 일어나 시작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이런 허세가 지나간 자리에는 히스테리 여인들이 비로소 얼굴이 축늘어진다.

이쁘다는 소리에 끔뻑 넘어간 그 허풍을 좋아했었고 이제는 또 다시 푸석푸석한 얼굴만 남아버렸다.

지구촌뉴스였던가? 병든 여성이나 암환자 여성에게 가장 첫 번째 표가 얼굴에 생기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봉사단체에서 아픈 여성에게 화장을 해주어서 증상을 살펴보니 회복 속도가 빨리졌고 심지어 낫게 되는 경우도 발생했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 먹기에 달린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다.

여성에게서의 아름다움이란 그 원천이 되는 셈이다.

나이가 다 늙었던, 아무리 못생긴 추녀이든, 상관없이 이쁘다는 소리에는 끔뻑 넘어간다.

바로 이것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이코패스들이 항상 주변에 여성을 끌어들이는 이유 또한 그러하다. 어쩔수 없는 약점이기에 장점화 시켜주는 것이다.

이쁘다는 소리, 그리고 아름답다 라는 말만으로 화장시켜주고, 더군다나 조그하마고 새심한 배려를 베풀어 준다면 이것보다 더 은혜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일까 긍정적 사고방식이 사기꾼들의 주요 기술이 되고 말았고 대히트를 쳤다. 그만큼 당한 자들이 많아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광면한 천사일까?)

그러나 정작 은사란 오히려 반대의 길로만 간다.

허풍은커녕 너무 너무 사실적이여서 고개를 다 돌려버린다.

그 사실적인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인데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싫어버린바 되고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는 취급으로 일관한다.

천사란 정작 무뚝뚝하다. 왜 내 보고 그러십니까? 따질려면 저에게 이 일을 시킨 분에게 따지쇼 라는 투로 매우 매우 투박하다. 인정머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

너무 너무 사실적이여서 죽음의 실상을 밝혀버린다.
오히려 광명한 천사는 죽음을 절대로 볼수 없는 생명의 길로만 인도하는 반면에 (거짓선지자 평강이다 평강이다 절대로 저주가 안 임한다. 심판은 없다.)

참선지자는 너무 너무 참혹하게 그 사실적인 현실을 절대로 외면조차 못하도록 자신의 신체에 까지 담아서 증거한다. 너희들 나처럼 이렇게 저주 받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이것이 은사다. 성령의 선물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좋은 것을 준다 라는 것이 바로 이 성령이다. 그 성령이 우리를 허세와 허풍과 허상이 만무하는 교회가 아닌,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으로 인도 한다.

성화론자들이 오죽하면 십자가의 죽음은 한번으로 끝났다 이제는 부활이다 라고 할 정도로 사탕발린 말로 자기도 안가고 남도 못가도록 길을 막을 정도인가?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종말의 상황을 허풍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돔의 심판 날에 롯의 사위들이 천사의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는 시대이다.
더군다나 교회가 앞장서서 농담으로 여긴다. 허풍으로 여긴다.

도리어 목사와 장로라는 사이코패스의 말은 진담으로 여길 정도이다.
소돔 종말 조차도 돈으로 바꾸는 기술에 매진한다.

교회 인간들이 왜 허풍을 찾아서 메조키즘 환자들처럼 히스테리를 부리는지 그 현장을 교회 가보면 확인케 된다. 목사와 장로에 매달려서 물 좀 주세요 물 좀 주세요 라고 손벌리는 땅거지들이 수두룩 모여들어 있다.

대동강 물을 팔아 먹는 김선달 같은 사기꾼을 대중은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엘리야는 비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생명수의 단절이다.

생명수는 단절로써 증거 된다. 이것이 영의 일이고
반대로 육은 그 결핍을 채워주겠다고 하는 산타클로스할배와 같다.

오늘도 종교꾼들은 그 있지도 않은 허풍을 찾아서 돌아다니고
사기꾼들은 그 수요에 딱 맞는 공급을 위해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있지도 않는 허구인 자아를 위하여, 없는 자아를 채워줄 허풍을 인간들은 찾아해매인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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