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라합의 행함이 있는 믿음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의미]


어제 버스 타고 가면서 메모했던 내용이다.

기생라합이 여호와 전쟁으로 애굽이 무너짐의 소식만으로 간담이 녹게 됨으로써 40년 동안 그 소식 하나에 목숨을 걸어 버렸다.

(수 2:8, 개정)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수 2:9, 개정)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수 2:10, 개정)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수 2:11, 개정)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수 2:12, 개정)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수 2:13, 개정)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수 2:14, 개정)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수 2:15, 개정)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수 2:16, 개정)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수 2:17, 개정)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수 2:18, 개정)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수 2:19, 개정)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수 2:20, 개정)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수 2:21, 개정)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수 2:22, 개정)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미련한 다섯 처녀가 아직 오지도 않은 신랑을 기다린답시고 마음이 다 녹아버려 늘 기름과 등불을 준비하고 예비해 두었다.

오히려 합리적으로 슬기롭고 똑똑한 다섯 처녀는 그 때 신랑이 올 쯤에 준비해도 전혀 지장이 없도록 행동을 했다.

그런데 이것이 종말 때에는 팔을 어긋맞듯 교체된다.

미련스럽게 40년 동안 간담이 녹듯 마음이 녹아서 주 예수를 자기 목숨과 맞바꿔치기한 미련한 기생라합은 종말의 묵시의 족보에 오르게 되고

합리적으로 똑똑한 다섯처녀는 종말을 사적인 기준에서 대비할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니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불시에 종말 곧 신랑이 올줄 몰랐기에 대비 할수 있다는 착각이 들추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목숨과 맞바꿔치기할 정도까지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흔히 기다리면 된다는 뜻으로 기다릴수 있다는 가능성의 실천 문제가 아니다.
기다려도 소용없다 이미 지나서 떠났는데 기다림이 무슨 소용 있으랴?

종말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거꾸로 산다는 십자가의 단절성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무조건 역사가 동 하면 묵시는 서 하도록 되어 있고
역사가 북 하면 묵시는 남 하도록 되어 있는 서로의 소유성의 차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역사와 행함의 실천을 잇고 잇고 잇는게 아니라.

자신의 부정(죽음)을 잇고 잇는 뚝뚝 끊어짐으로써 (그것을 십자가의 사건이라고 함)
역사를 거꾸로 뒤로 소급해서 살아가는 역사를 심판하는 구심점 중심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그 믿음의 가시화가 바로 기생라합이라는 묵시 덩어리 이다는 것이다.

기생라합은 묵시 덩어리로써 내용물을 펼치는데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치기 하는 성령의 일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내용물을 펼친다. 십자가 이다.

바로 이런 기생라합의 행함이 있는 믿음 곧 거짓말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 부정성) 모습이 인자와 결부가 되고
그것이 종말이라는 역사를 심판하는
심판주인 인자가 덮쳤다는 의미로써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믿음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 믿음이 사적인 행동의 인위적인 실천력과는 전혀 무관하다.
자기 부정인데 자기 부인인 십자가 인데

자기 긍정이라는 자신을 반드시 포함 시켜서 발생시키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결국 인자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령의 소욕은 육을 거부하고 육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부한다.

심판주 되신 인자만을 드러내는 목적에 모든 것이 소모품이 되는데 동원되는데
인간만이 자신의 사적인 믿음의 영역 따위나 구원의 영역을 확보할려고 한다.

결국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인자의 심판의 영역을 증식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에 나그네 같은 시므온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의 흥함과 패함의 기준인 왕이 생기고
여기에 과부인 안나 선지자에게 새남편이 졸지에 생기고
여기에 고아처럼 잃어버린 어린 예수님에게 기업인 아버지가 함께 있음이

육의 생각과 땅의 생각 뿐인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모든 육을 뚫어버리고 폐하게 하는 기쁜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의 전하는 소리로써

그 바람 같은 소리의 흐름에 기생라합은 흐름을 융탄자처럼 타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조차도 이해 못하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정작 이스라엘은 가치 없다고 여긴 것을

기생라합은 자기 목숨과 맞바꿔치기 했다. 이것이 영의 일 곧 믿음이다,

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은 창녀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기념했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제대로 본 것이다.

정작 거룩한 모양새만 가득 갖춘 그때의 위선자나 오늘날 기독교는 거룩한 전쟁을 가장 무가치하게 보았듯이 도리어 이 여인을 거짓말 쟁이라고 취급하고 아까운 향유를 가난한 자를 위해 썻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라고 여전히 자신의 사적인 정의로움만 펼칠 뿐이지 도리어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이 자신들의 그런 허울뿐인 정의감과 경건의 모양을 골수 쪼개듯 다가오는 칼로써 여기질 못했다. 차라리 나는 칼 맞아도 당연합니다 라고 심판주를 제대로 본 그 기생라합과 향유를 깨뜨린 여인과 짝꿍이 되어서

인자되신 예수님은 어떤 누구에게도 자신의 하나님의 일하심을 포착당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완료하고 홀연히 떠나버리신다.

이제 인자 에게 이 땅에서 미리 심판 받지 않은 자는 다 지옥이다.

인자에게 이 땅에서 미리 심판 받은 자만이 천국이다.

이것을 기생라합이라는 인자의 짝꿍을 통해서
인자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신 것이다.

(사 65:1, 개정)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욜 2:32, 개정)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행 2:21, 개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롬 10:13, 개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행 16:31, 개정)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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