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8.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환난

(행 20: 13-38)

마음에 매인 바 된 무슨 일? 곧 기다리고 있는 환난


성경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말이 사도행전이지 사도들을 쉴 틈도 없이 이리 이동 저리 이동 시키면서 좀처럼 고정화 되지 않고 정체되지 않도록 부랴 부랴 빠르게 이동시킵니다. 마치 선악과가 퍼진 환경에 생명나무를 부랴 부랴 치워버리듯이 차이성만 부각 시키고 철수 시킵니다. 또 법궤가 인간의 도움없이 스스로 발통이 달린냥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그 당시 우상의 신상들의 발목 손모가지를 짤라버리고자 부랴 부랴 돌아다니는 것처럼 말이죠.

사도가 가는 곳 마다 소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누군가의 실체가 드러나고 우상이 발모가지가 짤렸다 라는 흔적처럼 나누어지는 양산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결국 사도들은 이것을 외쳐야 합니다. 나를 움직이신 분이 성령이라고 !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소개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 누구를 증거하고 소개하느냐? 그 일을 한 눈에 보이는 증거물이 되는 인간을 증거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리가 마련이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성령이 이렇게 하셨다 라고 외치면 그 자리는 항상 비어 있는 빈자리가 됩니다.

어느 자리가 더 안정적으로 보일까요?

바로 이렇게 보이는대로 보는 대상들을 통해 그들의 속성을 드러내는 식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보이지 않는 분이 안정적이다 빈자리가 안정적이다 라고 외치는 자들이 두 패 중에 한 패거리로 나타나고

(보나마나 다 그렇게 한 패만 나타날줄 알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항상 두 패가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또 그 빈자리가 불안해 보여서 눈에 보이는 고착화 된 자리로써 눈에 보이는 자가 앉은 자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치 이스라엘에게 왕을 달라고 외치는 보습과 같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 속에 있는 다른하나님을 끄집어내는 방식은 이 방식 뿐인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 속에 있는 다른하나님을 상대로만 일 하십니다. 곧 악마입니다.)

주변나라에 왕제도가 정착이 되니 너무 너무 부럽기 짝이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로 이어지는 배경이 됩니다.)

(삼상 8:5, 개역)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삼상 8:6, 개역)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개역)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8, 개역)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삿 17:6, 개역)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결국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에 이미 이런 왕을 구하는 모습까지 나올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아니 반드시 인간 자체가 왕이 되어야 하는 모습과 반대로 그런 인간이 왕이 되었고 하나님이 되었다는 그 다른하나님을 들추어내는 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나야함이  마찬가지 이듯이 말입니다.

사도들의 움직임과 보이지 않는 분과 그 빈자리를 드러내는 것은 상대적인 인간의 악마성 곧 다른하나님을 염두해 두고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유두고 라는 청년의 죽음은
바로 이런 잉여로 인해서 다른하나님과 진짜하나님을 나타내는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겁니다.

잉여란 줬다가 빼앗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선물로써 동원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 조차도 악령과의 일하는 것과 차이나는 식입니다.

성령은 좋은 것으로써 주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자리입니다.
즉 빈자리입니다. 십자가의 자리요 잉여의 자리입니다. 처소입니다.

그런데 악령은 그 자리에 반드시 고착화 된 것을 집어 넣습니다.
사람들이 믿을만한 것들을 줘야 고착화 됩니다.
왕을 달라고 외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들처럼 손에 잡히는 것을 믿어야
쪽팔리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 빈자리를 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직 스럽다 라고 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겁니다. 구경꺼리가 되고 웃사꺼리가 되는 놀림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한 드라크마로 인해 동네 잔치를 벌린다고 했습니다.
잔치 벌리는 비용이 더 비쌀텐데 말이죠, 얼마나 어리석나요.

또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기 위해서 99마리 양을 버리겠다는 겁니다. 99마리와 1마리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겠습니까? 누가 더 어리석을까요?

또 탕자와 맏아들 중에 아버지는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할까요?
재산을 탕진한 탕자와 늘 아버지 곁에서 묵묵히 아버지가 시킨 일만 하는 맏아들?
어느 자식이 더 아버지를 더 영광스럽게 하는 자식일까요?

바로 이런 인간의 선악에 무조건 반대인 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어리석은 십자가 지혜입니다. (기쁜 날인 희년이 전혀 은혜의 조건이라고는 일체 없는 어리석음으로만을 모아서 기쁨으로 변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어리석다 라고 보는 선악의 시선을 다 뚫어버리는 구원의 뿔이 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일부러 유발케 해서 말이죠.)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통해 다른하나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병들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다 죄고 뭘 해도 악인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죄와 악을 지적해 주시는 예수님은 뭘 해도 선이고 뭘해도 옳으신 겁니다.

심지어 죄인과 같이 육체의 모습으로 와도 예수님은 무조건 옳은 겁니다.

유두고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죽이시고 살리시는 그 무조건 옳으신 일에 대해 증거하는 겁니다.

반대로 그런 죽였다고 살리시는 유두고의 사건에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악령이 씌인 세대라는 겁니다.

마치 무덤가에 청년 둘이가 귀신이 들렸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돼지떼 속에 집어넣어 몰살케 하십니다.

여기에 돼지 주인 당사자들은 다른 시각이 드러납니다.

만약 제가 그 주인의 입장이라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또한 마귀가 씌여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돼지 주인은 예수님을 그 동네에서 쫏아냄으로써(마귀 쫏아내듯이) 이미 자기자신의 자리가 구축이 된 그 자리에 유익은커녕 손해를 끼치는 존재는 하나님이든 누구든 다 쫏아낼 수 밖에 없는 귀신 씌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진짜 귀신 씌인 자는 바로 그런 아주 정상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자입니다. 자기 자리가 이 땅에 있다는 주장을 한다는 자체가 악마가 씌인 겁니다.

유두고의 죽었다가 살아난 흔적은 예수님이 지나간 흔적입니다.
눈에 보인 순간은 3초 뿐입니다. 그래서 포착이 불가능 합니다. 고착화 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고백만 할 뿐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고백을 믿을 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흔적들이 분주하게 땅에 구체적인 지명과 그 땅의 사람들에게 발자욱을 남기듯이 흔적을 남기는 이유는 지나감으로써 그 흔적으로 인해 홈이 패이고 그 홈패인 그 사이에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고백이 튀어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주 이시다 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들에게 왕을 세워 달라 라는 모든 인간의 주장과 반대되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잉여물에게만 해당 되는 겁니다.

마땅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고 이미 지옥에 빠진 자를
내버려 둬도 상관이 없는데 내버려 두지 않고 지옥에 까지 찾아가서 빼내겠다는
예수님 자신의 의지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말하는 겁니다.

이 아들의 소원에 의한 것이니 인간의 소원과 죄의 소원은 아들의 소원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잉여성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십자가의 흔적 방식으로 인해 두 패가 나누어지는 겁니다. 유두고는 바로 이런 십자가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는 그릇으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다른하나님과의 차이로써 유일하게 십자가 라는 그 자리에서 만남을 하나됨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자리에 유두고는 앉혀져야만 하는 겁니다. 주님이 마련하신 처소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리입니다. 그래서 부재성으로써 유두고는 동원이 되는 겁니다.

(호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야다 : 하나님을 비로소 알다 ]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13절부터 장소가 언급되는 이유는 결국은 특정 장소를 부각하기 위한 겁니다 곧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부재성 곧 누락 되어야 함을 본문에서 증거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급박하게 거쳐온 장소는 바울에게 있어서 정착되고도 남을 장소로도 충분합니다. 오늘날 현대인처럼 말씀을 잘 해석하고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를 만나면 그런 자를 잡고 대접함으로써 자신들의 교회에 자리를 마련하고 앉혀 두고자 할 것입니다. 얼마나 그것이 현대인들의 소원이 아닙니까? 제대로 된 목사만 나타나면 그렇게 할려고 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합니다. 그만큼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이 땅에서는 본향이 될 수 없음을 바울은 압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 예루살렘이라는 장소를 자신의 무덤인냥 여기면서 자신의 목숨조차도 누락시킬 만반의 자세가 되어 있는 겁니다.

왜일까요? 예루살렘이 특정장소라고 하니 그 장소가 거룩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예루살렘을 기준으로해서 세상이 악하다 라는 그 악함을 예루살렘에서 더욱 더 부각 시키기 위한 겁니다. 즉 예루살렘 조차도 부재성에 놓인 겁니다. 그 장소에 바울 자신도 부재성으로 놓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부재 곧 자기부정의 장소 말이죠.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더욱더 바울을 붙잡고 같이 교회의 자리에 앉아서 안전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반대입니다. 세상을 악하다 라고 규정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외침으로써 더욱더 그 악함을 들추어 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도 소모품처럼 미끼로 사용되어야 함을 안 겁니다.
(오늘날 교회의 자리는 세상이 악하다 라는 예수님의 규정에 거부하는 모습으로써
자기자신의 자리를 더욱더 안전빵으로 하기 위한 지혜의 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리가 아닌 겁니다. 여기에 바울은 자기자신의 몸이 부재 당하는 그 자리로써 친히 성령의 전으로써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에 복음을 외칩니다. 결국 교회야 말로 가장 [악함의 자리]를 많이 많이 소유한 부동산의 달인들만 모인 곳입니다. 자기의 영역이 도리어 교회에서 많이 확보하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스님이 무소유 라는 이름으로 소유의 영역을 너무 너무 많이 확보한 것처럼 말이죠.)

마치 유두고가 원치 않아도 떨어져 죽어야만 했고 또 원치 않아도 다시 살아나야만 했듯이
그것은 주인을 드러내기 위한 마땅한 종들의 모습인 겁니다.

종이란 자기의 것이 없습니다. 무소유입니다. 자기 영역도 없고 자기의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철저한 노예입니다.

자기 판단에 안 맞아도 주인이 까라 하면 까야하고 주인이 일어나라 하면 아무리 이미 죽어 시체가 되었다 손 치더라도 무조건 일어나야 합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은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주인의 음성이 지상에 떳는데 누구 말을 들을 겁니까?

바울이 앗소에서 밀레도에 이르고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에 보내면서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데

단순히 말로써 하는 지식전달이라기 보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지막 유언처럼 자기목숨을 걸고 외칩니다. 즉 내일 또 만나서 성경공부 하자 라는 취미생활이 아니라

아예 못 볼 생각을 하고 전부를 걸고서 마지막 만남처럼 외칩니다.

자 이렇게 되면 바울은 대인관계를 아주 아주 못하는 사람 축에 해당됩니다.
사람이 만남을 가질려면 서로 상반간의 예의를 갖추는 식입니다.

바울이 다짜고짜 이런식으로 나오면 상대방은 상당히 거북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초면에 그러면 그럴수록 아예 무시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거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급박합니다.

어느 정도로 급박한고 하니 자기 목숨과 전부를 내 걸어서 한 마디 한마디 말을 전하는 식입니다. 얼마나 일방적이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가요?

상대방 상태를 봐 가면서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런 시선은 성령을 빼 놓으면 어느정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성령에 이끌리는 자는 사람의 눈치를 안 봅니다.

그리고 이미 규정하고 들어갑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 라는 것과 그 악함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악함을 아는 자는 악하다 라고 규정한 자만이 다급한 겁니다.

바로 그 다급함에 사도들이 그 자리에 놓인 겁니다. 성령이 다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초면에 거부감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목숨을 겁니다.

처음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 목숨걸겠다 라고 나온다면 미친놈이라고 할 겁니다.

이런 무모함은 오직 사랑만이 이런 방식입니다. 사랑이 아닌 방식은 이런 방식이 아닙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거침없는 하이킥
거리낌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턱 턱 걸립니다. 공포는 멈칫 멈칫 주저 주저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이상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서 사랑의 넉넉함이 조건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회개에 대해서 거침 없고
사랑 때문에 심령에 매인바 되었고
사랑 때문에 기다리는 환난을 기대하며
사랑 때문에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겁니다.

(행 20:20, 개역)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 20:21, 개역)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 20:22, 개역)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 20:23, 개역)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 20:24, 개역)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자 이렇게 되면 바울의 눈에 또 무엇이 보이게 되는고 하니

이 사랑에 반대되는 세력인 악마의 어두운 공포의 세력이 보이게 됩니다.

참재미있게도 사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또 반드시 거짓선지자도 항상 따라붙게 됩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항상 다른복음도 그 차이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행 20:25, 개역)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행 20:26, 개역)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행 20:27, 개역)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8, 개역)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9, 개역)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 20:30, 개역)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행 20:31,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것 조차도 말씀의 운동력에 의한 배치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에게 늘 부탁하고 권면하던 말씀과 동일한 말씀처럼 똑같은 상황들이 늘 벌어진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그런 상황 만들지 말라 라고 요구할게 아니라
말씀이 말씀 다운 방식으로써 이 차이성을 드러내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라는 겁니다.

저들이 나타나 줘야 말씀대로 응하는 것이고 또 저들로 인해서 우리는 그 차이를 부각케 되며

우리는 늘 부재성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는 겁니다.

기존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특징은 부재성이 아니다는 점입니다.

잃어버린 자 로써 되찾는 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림을 이제는 해결 했으니 우리 또한 잃어버린 자를 찾아 다니는 되찾는자가 되자 라는 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성화론자들의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부재성의 자리에 놓여지질 않기에 그 빈자리를 반드시 채우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찾겠다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육이요 우상이라고 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 바로 이런 선악의 사고인 행함을 심는 자들이 이런 생각들을 사람들에게 심고 다니는 겁니다.

기여이 왕을 달라 왕을 세우겠다 자신의 가치를 세우겠다 자신이 봉사한 그 의미들을 그 빈자리에 남기고야 말겠다는 식입니다. 자기영역 확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양상을 끌여들여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처소인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하나님의 지혜를 남기십니다.

바울은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주었기에 소유한 것이 없다 라고

소유에 대한 의미로써 거짓선지자와의 차이성을 드러냅니다.

즉 너희 소유를 훔치지 않았다
탐하지 않았다

라고 거침없이 외칩니다.

왜일까요? 아무 은과 금과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는 말은 너희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탐하는 소유성을 가진 적이 없고 도리어 그 소유에 더 부요케 하는 약한 자를 돕고자 했다고 합니다.

(행 20:32, 개역)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3, 개역)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행 20:34, 개역)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행 20:35, 개역)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거짓선지자가 교회에서 행함을 외치게 되면 그 행함에 의해서 가치성이 소유에 따라 가치의 척도가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많이 행하면 행할수록 소유가 크게 되고 가치도 거치면서 그 사람의 자기자리도 커지게 되는 겁니다. 자기영역이 커지게 되면 주님이 작게 보입니다.

왜 행함이 거짓복음이 되는고 하니 그 행함에 따른 자기 노동의 댓가를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행함을 외치는 것은 복음 스스로가 아니라 오직 육인 인간만이 외치는 사상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행함에 목숨 거는 자는 목사입니다. 목사 라는 가치성이 커질려면 교인들을 뺑뺑이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목사는 자기의 영역의 자리가 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이 목사와 처음 거래를 할 때 교인들을 몇백 몇천 몇만 명을 뿌루게 하면 우리 장로들은 목사 당신의 후생복지를 책임져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아주 수준 낮은 행함주의나 아주 수준 높은 성화론이나 관심사는 인간 소유의 자기의 영역 확대인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텅빈 광야처럼 빈자리입니다. 그 빈자리에 교회를 세운 겁니다. 그리니 교회야 말로 부재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부재성을 증거했고

또 사도 바울이 지금 이렇게 복음의 내용으로 증거하는 것도 부재성입니다.

제가 요즘 교회에서 격는 일도 부재성입니다. 내 자리 내 영역 모조리 삭제 당하고 짤리고 텅텅빈 처음자리로 되돌리는 주님의 일에 의해 누락 되는 것입니다.

행함은 완고함만 남을 뿐입니다. 소유 때문입니다. 그 완악함이 소유 라는 탐심에서 비롯되었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겁니다.

행하면 행할수록 강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행함의 마일리지를 사수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사수하는 바리새인들 앞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성전 됨을 외칩니다.

그리고 삭제 하자
누락 시키자
부재성 빈자리로 만들자 라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벌쩍 벌쩍 뜁니다.

우상이 튀어나온 겁니다.

예수님이 악마성을 제대로 건드린 겁니다.

바울은 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보내는 장로들에게 청나는 메시지가

다른복음과 차이나는 복음 그리고 다른 하나님과 차이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리낌 없는 회개와 소유에 대한 지적으로써

거짓선지자의 메시지와 차이나는 내용으로써 어떤 소유 어떤 자기자리를 탐하지 않는

미쁘신 담대한 복음을 외치니

그들이 무릎을 꿇고 울고 함께 기도를 합니다.

(행 20:36, 개역)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행 20:37, 개역)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행 20:38, 개역)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그리고 그 자리에 또 정착시켜 편안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또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자기목숨 짤리는 자리만 찾아 골라 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악한 세상에 외치는 빈자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늘 알게 모르게 내 목숨을 편리하게 할 자리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반대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자리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자리에 놓여질때까지 급박하고 다급하게 또 거릴껏이 없이 거침없이 상대방의 눈치도 안 보며 사랑을 외쳤습니다. 그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있는 악마를 들추어내는 유일한 사랑임을

그 사랑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그 십자가 라는 빈자리가 아닌 것은 길도 아니요 진리도 아니요 생명이 아님을

그 차이로써 사도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고 미련한 길인 십자가의 길로 갔습니다.

그 미련한 하나님의 지혜가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인간의 지혜보다 더 나은 더 뛰어난 지혜임을 우리가 그 차이나는 사건 하루 하루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서 알수 있도록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미래에서 벌리는 넉넉히 이긴 완료가 벌리는 그 사건이 덮쳐짐으로써 알게 되는 그 사랑을 넉넉히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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