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9. 멈추지 않는 십자가의 사건 (소멸하는 불의 확대번짐)

사랑의 확대 (십자가의 예수 그리고 스데반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바울)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요청하는 성도들과 그것을 거부하는 바울

(행 21: 1 -16)


주님의 뜻은 인간의 뜻과 다릅니다.

사실상 인간이 자신의 뜻을 세운다는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그럴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뜻을 세우지 말라는 말인가 라고 해서 안세우면 되겠네 라는 잔머리를 굴리지만 사실상 안 세우는 사람은 없고 안세우겠다고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미 세우는 식입니다. 또 인간과 인간 끼리에서의 뜻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뜻이라고 취급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미 주님의 뜻이 세워져 있는 이상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뜻 앞에서 왜 제가 그 뜻 때문에 있는겁니까 라고 그 뜻 때문에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뜻을 세우며 산다는 자체가 멋대로 살고 있다는 뜻인 겁니다.

문제는 인간의 뜻은 배제된 주님의 뜻이 드러난 이상 반드시 인간의 뜻은 삭제 무시 당하는 방식입니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무리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고 싶지 않은 뜻을 세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픈 마음을 품어도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아벨을 받기로 한 이상 상대적인 가인의 세력이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전제로 까는고 하니 십자가가 멈추지 않고 재판 되는 이상 인간은 선악과의 창세기 그 사건에서 한발짝도 벗어난적 없고 또 뒤로는 십자가 사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에게만 해당됩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합니다.

아니 바로 그 당사자 사도바울이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는 그 성향이 그러했듯이
이제는 사도바울을 십자가 사건의 리바이벌로 사용하는데 있어서
한치도 벗어남 없이 반복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사도바울의 주변의 사람들입니다.

한결같이 사도바울을 걱정하는 모습에서 제발 제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아가보 선지자를 통해 알려준 그 예언에 의해서 더욱더 확고하게 그 열심들이 부추겨져서 더욱 격렬하게 반대하고 막고자 합니다.

문제는 사도바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죄를 씻지 못하고 라는 찬송가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가겠다는 데 있어서 베드로가 안됩니다 라고 막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뜻을 배제하고 주님의 뜻이 심기워진 사도바울은
인간의 뜻에 따라서가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가야만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심령에 매인바 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바보 같은 일입니다.
죽는 일입니다. 가면 뻔히 이익되는 일이 전혀 없는 손해 보는 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을 위해 고생을 해서 경험치라도 쌓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닌

아무런 경험치도 쌓을 수 없는 어떤 댓가도 있을 수 없는
그저 고난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사도를 이리 저리 정신없이 어떤 고정됨이 없이 이동 시킨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이동 조차도 바울에게는 어떤 유익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이동이 죽음을 향해서 분주히 이동되는 모습입니다.

저는 이런 부랴 부랴 이동시키는 것을 보면 저번에도 그런말 했듯이 움직이는 법궤와(누가 움직이지 않았는데 발이 달린냥?) 또 부랴 부랴 은폐되어 숨어버리는 에덴동산(아무도 모르게 숨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철폐 당함을 억수로 티를 내면서)과

또 오늘 수많은 이동 경로를 보면서 계시록의 7 교회의 움직이는 촛대가 생각 납니다.

이렇게 움직이고 이동 되고 촛대를 옮기는 다아나믹성(고정화 되지 않고 포착화 되지 않는 유동성)의 장점이 뭔고 하니

뒤 돌아 볼 것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즉 미래적입니다.

전에는 미래지향적이다 라는 표현을 자주 써곤 했는데 그래봤자 모든 언어 자체가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표현이 맞지 않다고 생각 되고

미래 완료적이다 라는 표현이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 됩니다.

 
이런 유동성은 포착 불가입니다.

하나님이 포착 불가이듯이 그 하나님에게 움직임을 당하는 성도 곧 교회 조차도 포착불가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교회론을 보면은 유동적이지 않고 인간의 머리에 포착 당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비밀인데 그 신부된 교회 또한 비밀인데 포착 당하는 비밀이 되어 버리니
이게 무슨 신부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교회 또한 예수님처럼 배타성이 강합니다.
교회는 고집이 세고 융통성이 없고 주변상황과 어울리고픈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랑 되신 예수님 때문에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교회된 성도가 가짜 교회의 교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면 항상 이런 반응으로 밉상을 당합니다.

그것을 왜 니만 아는데? 니만 잘 났냐? 나도 말씀 안다.
오히려 너는 독선적이고 부정적으로 성경을 해석 한다 라는 식으로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만큼 불안해서 흔들렸고 그 흔들리는 불안정감 때문에 방어에 나서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란 예수님 때문에 배타적인 겁니다. 교회 자체는 배타적인 면이 나올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배타성이란 똥고집이라는 의미 보다 오히려 더 심한 전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겁니다. 즉 적이 있습니다.

그 적 또한 숨어있기에 그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여 싸우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미친놈으로 볼 수 밖에요.

그래서 말리고 막아서고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에게 주님의 뜻이 바울에게만 꽃혀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 뜻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그 뜻을 알았다 하더라도 당장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초대교인들은 바울이 매우 필요로 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항상 거룩 곧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에 있어서 거룩한 전쟁을 항상 보게 되고 그 거룩함을 지난 시간에는 빈자리 라는 의미로 이야기 했습니다.

자 그렇게 되면 이것은 완전히 반대의 해석이 됩니다.
안그래도 어제 글을 적었는데 제가 반대로 적어서 오늘 다시 적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사도바울이 가게 되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대세력에 대치 되어 있는 성도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난집에 석유 붓게 되는 격이 되는 겁니다.

안그래도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벼루고 벼루고 잡아 죽일려고 하는 판국에 예루살렘에 가 보십시오. 소란 소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격고 있는 그 어려운 힘든 상황에 더욱더 불을 던지는 셈이 되는 격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시니까 다들 메시야가 왔으니 로마에서 해방되기를 바랬을 겁니다. 그런데 웬걸 로마에서 해방되기는커녕 오히려 전통적인 유대를 아예 밑둥치를 짤라버리는 도리어 유대국가를 위협하는 일 순위가 예수 라는 인물이 되고 만 겁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은커녕 로마와 손 잡고 더 급한 위험인물을 제거 하는데 있어서 전국가 국민이 더럽다고 자신들이 거부한 원수요 적군이라고 여긴 그 로마와 손잡고 전체무기를 동원해서 그 딸랑 한 명의 인물을 제거하고자 미친 듯이 결집하고 회의하고 조심에 조심을 행하는 모든 지혜와 모든 권력과 모든 인간과 모든 신앙을 다 총동원 하는 겁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진짜로 빈대 잡을려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식입니다.

십자가는 항상 인간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옵니다.
안말려들고는 못배기도록 합니다.

하물며 인간의 악마성(정의로 포장된)도 저렇게 배타적인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더 강하고 폭력적인줄 모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항상 불의한 부정함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아 8:4, 개역)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아 8:5, 개역)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7, 개역)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자 결국 예루살렘이라는 사랑을 표출해 내는 장소 마당입니다.
단순히 한쪽만의 사랑이 표출이 된다면 그 차이를 알 길이 없습니다.

두 개의 사랑이 표출입니다. 하나는 가짜요 또 하나는 진짜 사랑입니다.
가짜는 솔로몬 재판의 한쪽 기생처럼 행함(가인처럼)과 법을 자꾸 자꾸 동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려든 겁니다. 자기 무덤 파는 격입니다.

진짜는 그 법과 행함을 동원해서 법보다 우위에 있는 사랑
행함 보다 우위에 있는 사랑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부정이요 불의함이요 부정적으로 증거됩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음의 총화입니다. 자기부정의 총화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부정해서 나온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치셔서 그 틈사이에서 나온 피로 희생으로 사랑으로 우리를 아무댓가 없이 덮어주는 겁니다. 솔로몬은 그 사랑이 나올때까지 즉 처음자리인 창세전의 예정이지요. 그것이 바로 진짜 아기 엄마죠. 그 처음자리(뱃속에 잉태한 그 자리)가 나올때까지 아이를 부정적인 의미인 칼로 죽음으로 갈라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는 겁니다. 철저한 법입니다. 이 법이 동원이 되자 얼시구나 좋다. 너도 못 가지고 나도 못 가지는 식이 법이 동원이 되어서 자신의 뜻이 합일이 되는 법도 자신의 편이구나 라고 착각하도록 유발함과 동시에 진짜 아기 엄마는 이런 불합리한 법이 어디있냐고 천지가 무너지는 소망의 단절 삭제 발가벗김당함 찌끄래기 부스래기가 된 절망이요 무능함 앞에서 자기자신을 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는 누구든지 다 아는 겁니다.
가면 죽습니다. 개죽음 당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덩달아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도 더 한층 핍박이 심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다고 했을때에 절대로 안된다 라고 말리는 이유에 우리는 참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처음자리를 가려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창세때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일만 가득하고 사람의 일만 가득 생각 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가야만 하는 겁니다.

창세전의 예정된 계획은 생각지 않고, 아니 생각할수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으로 전부를 파악하고 예수님도 해석할려고 했기에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 이다 라고 욕 먹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어쩔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반응은 반응일 뿐이고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모든 세상을 악하다 라는 증거하는 그 십자가의 사랑이 다시 마른 뼈에서 생기를 불어넣듯
십자가가 창조의 기준이 되어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는 겁니다.

바울이 가는 목적은 딱 하나입니다. 주님의 거룩을 외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을 외치는 겁니다.

거기에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세력들의 아지트 본부가 예루살렘인 겁니다.
도리어 영접해야할 장소가 도리어 원수의 성문이 되고만 겁니다.

신부된 교회는 그 원수의 성문을 열어야 하는 겁니다.
이미 예수님이 열었기에 우리가 열 필요 없이 열어진 그 십자가 사건의 반복에 동원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진 겁니다.

철저한 소모품입니다. 소모품이 된 것을 영광인줄로 알아라 이것들아 라는 식입니다.

(행 20:22, 개역)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 20:23, 개역)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 20:24, 개역)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바울 자신의 목숨이 이 소모품 됨에 있어서 상당히 뻔뻔스럽게도 자랑하면서 기뻐합니다.

남들은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파리 목숨 보다 더 천하게 된 것을 자랑하다뇨? 미쳤어 정말 미쳤어 라는 손담비 노래가 생각 나네요.

즉 모든 육의 인생 길을 거슬려 반대로 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동일합니다.

지난 주부터 장소가 많이 언급 되는데 하나의 정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마치 흩어진 12지파 이스라엘 이라는 야고보서의 표현처럼 그 장소 하나 하나가 원수의 성문이자 동시에 그 속에서 긍휼이 피어나는 성도의 죽음이 펼쳐지는 제사마당이 되는 겁니다.

그 장소 하나 하나에 손 다 대면서 특정 장소인 예루살렘을 통해서 왜 그런 장소에서 복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그런 사건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줍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장소를 언급하고 만났고 또 작별하고 라는 문구가 자주 인용이 됩니다.

고스에 가서 로도에 이르고 다시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 다시 구브로를 바라보고 왼편 수리아로 행하여 드디어 두로 라는 장소에서 짐을 풀게 됩니다.

자 여기 두로에서 아주 특이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해서 감동을 받아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또 두로에서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하니 빌립집사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아가보 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행 21:10, 개역)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행 21:11, 개역)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행 21:12, 개역)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 21:13, 개역)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4, 개역)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격게 될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예언을 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흔들린 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요동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위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바울 이라는 인물의 자세에 대해서 라기 보다,

복음이 바울을 다루는 자세를 생각해 봤습니다.

바로 그 복음이 덮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바울의 태도인 겁니다.

결국 이 부분을 사건의 흐름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베드로 닭울음 배신 사건으로 시작한 그 흐름과 동일하게 벌어지는 겁니다.

지난 공부 구절에서

(행 20:22, 개역)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 20:23, 개역)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 20:24, 개역)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구절과

(행 21:11, 개역)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행 21:12, 개역)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 21:13, 개역)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4, 개역)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오늘 본문 중에 이 구절을 통해서 누가 더 양보함이 없는 그 절박성을 보여주는고 하니
바울이 아니라 그렇다고 “우리”라고 표현된 바울의 동행자들(특히 사도 누가를 포함한)도 아닌

이 사도행전의 주인공인 성령
성령님 당사자가 그 절박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일체 양보함이 없는 급박성입니다.

그 성령님의 다급함이 바울이라는 울림쇠 소리통 또는 스피커로써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바울이 다른이들을 위로하고 다독거려 주는 겁니다.

자 그럼 여기서 저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는 무리나?
그 만류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굽힐수 없는 바울의 성령으로 인한 고백이나?

결국 성령님이 북치고 장구치는 주인공으로써 표현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표현으로써 복음이 증거되는 말씀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라고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묻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 라고 하자

그것을 말한 것은 니가 아니고 성령으로 인한 고백이다 라고 하고서는
그 고백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라고 했습니다.

자 이 창세전의 예정된 계획 곧 사랑이요 거룩을 완료코자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을(누락, 자기부인) 말하지 베드로가 막습니다. 십자가를 질 일이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일을 벌어지도록 하시는 일만 골라서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성령으로 인한 고백으로 성령의 터에 그 자리에 누락의 총화 곧 인간의 사심이 배제당한 교회가 세워지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나 우리나 또 여기 바울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 사도누가를 포함한 “우리” 라고 표현된 바울 동행자나

아무리 말로는 베드로처럼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상 음부의 권세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바로 이점을 사람의 일로써 개입을 유발케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차이성으로 성경말씀을 증거합니다.

즉 사람의 일이 개입해야 합니다. 유발한 겁니다. 동시에 개입 되었지만 철저하게 누락 당하는 그 철저하고도 일체 양보없는 차이성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가짜 교회는 이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명료한 차이성이 없습니다.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일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고 늘 의문스럽습니다.
종교라는 포장은 더더욱 의문케 만듭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함이 개입되면 그렇게 위험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반대로 인간은 자신의 행함이 개입되지 않으면 그렇게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행함으로 나온 자기 의가 누룩으로 표현될 정도로 경계에 또 경계를 강조하시면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인간의 행함이란 결론적으로는 완악함만 나옵니다. 아무리 성경적 행함이니 뭐니 해도 자신이 개입된 이상 완악하고 강퍅함으로 나옵니다.

그럼 또 행하지 말자 라고 하면서 [안행하기]를 또 지키고 행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 덩어리가 선악덩어리인줄 몰라서 그런 겁니다.

비록 완악하고 강퍅하지만 그 반대의 차이가 떳다면 게임오바입니다.

그 차이성을 오히려 더 선명해지게 구별되게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또 은혜를 의도적으로 더할려고 죄를 일부러 지을 수는 없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이 어디까지 자기부인이 아닌 자기변호로 가는지 끝까지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겁니다.

인간의 개입을 유도해 놓고 그 개입이 철저하게 단절되고 소외 당하고 배제되는 식으로
그 반대인 성령의 일이 성령 스스로 성령 자신을 치셔서 나타나는 사건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받아 감동받아서 바울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 저들의 주장 곧 성령받아 나오는 주장 조차도 거부하는 겁니다.

왜냐 본인도 성령 받은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성령받아서 나온 의미라서 막는 것을 동의할텐데 말이죠.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사람의 일을 반드시 들추어내어서 그 차이성을 명확하게 보이고서는 구별짖습니다. 이 자체가 거룩이요 이 자체가 거룩의 전쟁의 방식입니다.

결국 구약때의 전쟁의 방식이
신약때는 구지 칼 싸움 방패 병거의 싸움이 없이

복음 혼자 복음이 벌리는 그 소용돌이 속에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로마든 사도들이든 예수믿든 안 믿든 복음이 벌리는 사건 속에 다 놓여진 겁니다.

복음의 불기둥과 복음의 구름기둥이 서로 서로를 뺨때리듯 충돌로써 부딧기는 스파크가 벌어질 때 그 흠집이 홈페인 그 틈 사이에서 교회 곧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은혜의 새피조물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란 어제 교회는 교회도 아닙니다. 오늘 신랑이 사랑해주는 오늘의 신부만 있을 뿐입니다.

어제 사랑해 주는 신랑의 오늘의 신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움직이는 것이지 고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저들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겁니다.

도리어 걱정 말아라 나는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나는 기쁘다 그리고 신난다 왜 나의 기쁨을 반대로 보느냐 라는 식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아가보 선지자가 아주 구체적인 몸동작으로
이 띠의 임자가 이렇게 묶이고 또 이렇게 당해서 이렇게 됩니다 라고 하니

어쩔수 없이 더더욱 막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 성령이 그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도구요 소품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결론적으로 이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를 착각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나태함이나 부족함으로써 느리게 가거나
또는 우리의 적극적인 증거로써 빠르게 진척되거나 하는 점이 없는

철저한 부재성을

성령이 성령 자신을 치시는 방식으로 증거하는 겁니다.

여기에 바울이 동원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열심에 의해 좌우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증거에 의해 좌우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또 잔머리로 우리가 증거 안해도 십자가가 스스로 알아서 할텐데 라고 해도 소용 없습니다.

인간은 철저한 부재성을 띤 상태로써 증거되는 십자가 라는 겁니다.

아주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바울이라는 겁니다.

제가 들어본 과거의 표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참 적절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또 더 나은 적절한 표현이 나오면 좋겠다 라는 생각도 듭니다.

뭔고 하니

죄수 복을 입고서 외치는 증인 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이상하게도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죄수 복을 왜 입냐? 주님이 의인의 옷을 입어줬으면 이제는 과거는 잊고 의인의 옷만 입어서 증거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안색이 변하면서 달려드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점이 참으로 희한했습니다.

사실상 제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 바로 이런 의미로 싸우고 이런 의미 때문에 결별하는 경우를 직접 격고 또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서 보게 됩니다.

그 순간 가짜 목사 가짜 교회 가짜 성도인 거짓이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왜 죄수 복을 입고서 은혜를 외치는 것에 반대 할까요?

반대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은혜 받기는커녕 듣는 사람 화 돋구게 한다는 점입니다.

캬호 이게 동일한 저들의 반응이였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교인도 소위 행함론자들인 성화론자들 새생명의 삶운동 하나님나라 운동 등의 개혁주의가 그 대표적입니다.

사실상 화 내는 것을 걱정하는 본인들이 화를 내면서 말이죠.

그 감춘 것을 들추어내는 기분 나빠서 와륵 달려드는 겁니다.

놀랍게도 제자들이 예수님이라는 영웅과 같이 어울려 다니니까
자동적으로 슈퍼스타 예수의 후광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선악(후광)의 포장을
아무리 봐도 더럽고 죄악이 가득한
더군다나 자숙하기는커녕 아예 노골적으로 제자들 보는 그 현재 시선에 직접 포착되는 현장에서

비싼 향유를 깨뜨려 허비하는 창녀와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래기 먹지 않습니까 라는 정말 개 같은 이방 여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세리 삭개오
그리고 성전에서 두 사람 중 감히 고개도 못드는 세리
불의한 청지기

이들을 아주 예수님이 당당하게 내밀정도로
어느정도인고 하니 그 당시에 아주 깨끗하고 흠없는
행함의 달인, 무소유의 달인, 말씀 지키기의 달인
봉사의 달인, 율법의 달인, 긍정의 달인, 건강함의 달인,
의인 중에 의인인 의인달인, 등등

앞에서 일부러 아주 일부러 노골적인 반대인 사람인

창기 세리 강도 가 그 깨끗하고도 고귀한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간다 라고
팔을 어긋맞게 해버리시는 것과 동일한 식으로 일부러 죄인의 옷을 입히고서

의인의 옷인 그리스도의 옷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랑하는 겁니다.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수 없고
이해 불가이며
포착 불가이니

그저 무능한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끝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증거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스스로 증거함에 있어서
우리는 진노의 그릇으로든 긍휼의 그릇으로든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그런 하나님의 일에 늘 사람의 일을 지적당하면서

이렇게 지적해주는 그 양보없는 십자가가 스스로 증거하는 그 현장 속에 놓여졌고 늘 우리는 소외 당한다는 그 자체로써 소외 당함을 누리는 감사와 긍휼을 바라보면 되는 겁니다.

바울의 증거는 결국 사람의 일이 아님을 사람의 일을 개입시켜서 차이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일로써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요청을 거부하는 겁니다.

이것 자체가 말씀이 살아 있지
인간은 주체가 될 수 없는 겁니다.

말씀이 살아 있으면 된 겁니다.
그것으로 감사하면 된 겁니다.

매일 매일 이 살아계신 말씀이 거두어지지 않기를 바라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참으로 이상합니다.
주님은 왜 주님이 말씀하셔놓고 주님이 그 말씀을 스스로 치시면서
말씀을 성취 하시는지요

왜 예민하게 인간의 행함과 사람의 일의 개입을 극도로 거부하시는지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너희가 날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방식으로

주님이이 제물 되시고 주님이 그 제물을 받으시는 방식인 십자가로써만 이루신

화목제물로써 나타낸 거룩한 사랑임을 보이시고자 함에 우리는 그저

안식 곧 감사만 누리라고 하신줄 압니다.

그 감사를 죄수복을 입고서 육체의 의문의 장막을 입고서 사랑을 증거하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봐라 나 같은 원수도 주님이 사랑했단다 라고

맞습니다 저 도둑놈이요 강도입니다. 이런 강도요 도둑놈도 용서 하셨습니다.

아무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신 그 용서함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으로 성령에 이르고
주께서 내 주께 이루시는 그 믿음의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를

즐거이 증거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