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0. 보이지 않는 적을 드러내는 홈 페이는 사건과 상처 (전쟁)

예루살렘 온 성을 소동케 하는 바울


(행 21: 17-40)

성경은 한 특이한 인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것도 오늘 본문처럼 바울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도행전의 주제 : 예수님의 주 되심)
그 초점을 맞추라는 식으로 바울이 지금 동원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인간의 악마성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 이시다 이기는커녕 죽은 시체일 뿐입니다

그런데 왠 뚱딴지 같이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외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 이시다 라는 주장에 살아 있는 인간이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더욱더 웃기는 것은 안믿겨지는 소리만 한다는 겁니다. 믿겨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안 믿겨지는 불가능한 소리만 나열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바울이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자로써 등장함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소위 회심이라는 표현으로 종교꾼들이 자신도 바울처럼 핍박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바뀌었다고 사기치면서 믿음을 유발케하는 간증 같은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의 주 되심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주의 주 되심은 바로 핍박자 바울이 도리어 예수님에게 목숨을 걸었다는 겁니다.
그 실상이 말로만이 아니라 어느정도로 목숨을 걸었는가?

원수의 성문을 열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이 과거에 속한 그 예루살렘 체제를 다 뒤흔들어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우리는 애굽과 같은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라는 식으로 구원이고 회심이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서 우리가 주의 주 되심을 보고자 한다면

바로 공격성입니다. 공격이란 곧 전쟁입니다.
전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었다는 겁니다.

제가 어제 강이아빠와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가는 중에 어 갑자기 가만히 보니 구약의 여호와 전쟁 개념이
사건이라는 홈페임이였구나 라는 것과

이번 수요 설교를 통해서 잉여란 잃어버림과 연관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방식이 바로 잉여 곧 창조와 연관됨으로써 그 주께서 내 주께 방식에 모든 인간은 소외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소외 당했으면 당한채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잃어버림인데 되찾겠다는 외부의 찾아오심을 기다리면 될텐데 사랑을 조작해 내고 구원을 조작해 내고 믿음을 조작해 내니까 소외는커녕 도리어 소외시켜 버리는 겁니다. 이미 소유한 것이 있기에 그 소유한 것에 소유 당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서는 그 우상에 소유 당한 겁니다. 유대인의 하나님 또는 여호와 조차도 우상인 이유가 그런 이유입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은 우상 예수를 조작해 내는데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주 중에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왜 여성이 병주고 약주는 식으로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어 놓고서는 따지기는 아담에게 따져서 왜 그 아담은 창조주와 여자의 중간에 낑겨서 말려들었는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여자 하와로 인해 범죄해 놓고서는 다시 역으로 하와로 인해 생명을 보게 되는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여러분들과의 대화와 다 연관이 되면서 저에게 다가옵니다.

분명 지난 시간에 몇 번씩이나 또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환경에서도 한결같이 바울에 대한 걱정을 동일하게 표출 합니다. 그것은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을 지난시간에 저는 분명 처음 글에는 올라가지 않는 것이 옳다 라는 식으로 전개를 했는데 다시 살펴보니 그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생각을 바꾸어서 그 다음날 다시 글을 반대로 적어서 올렸습니다.

그리고서는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성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단아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다 라는 내용으로써 그 차이를 연관지어서 설명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분명 저들이 성령에 감동을 얻어서 바울을 막은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자체로 성령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성령을 받고서도 동일한 생각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충돌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대번에 누구는 틀렸고 누구는 옳았다 라는 식으로 생각이 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성령이 스스로 치시고 성령이 스스로 세우는 식이라면 우리의 그런 생각이 틀린 겁니다.

이런 방식이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입니다.

자기 부인이란

질질 짜고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호되게 째찍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다고 잉여 곧 새로움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이란 구약에서 목이 부러짐과 마음과 귀가 할례 받는 것과 연관이 됩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전쟁의 형식으로써 펼쳐진 겁니다.

제가 강이아빠랑 대화한게 이겁니다.

주님께서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니까
개같은 이방인 여자가 맞습니다. 저 개입니다.
주여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찌끄래기 곧 잉여물을 먹고 살지 않습니까 라는 말에

예수님께서 찾는 이스라엘이 바로 너 구나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은 이런 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믿음도 없는데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이 된 것일까요?

이스라엘이란 곧은 목이 부러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음과 귀가 할례 당한 자들입니다.

목이 부러졌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목이 빳빳이 곧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스로 그 목을 자해해서 부러뜨린 것이 아니라 누가 뿌르뜨렸다는 겁니다.
누가 건드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뿌르뜨린 그 분을 찬양하는 자가 바로 유다 곧 찬송자입니다.

그것을 혼자 중얼 중얼 노래 부르는게 아니라 이방과 온 우주에 까지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는 항상 할례를 반드시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 유명한 사건인 모세를 보고 아내 십보라가 당신은 어쩔수 없는 피남편이군요 라고 자식들 양피를 급히 베어서 모세의 발에 던져서 십보라 눈에만 보이는 모세를 죽일려고 달려든 천사가 물러가는 패쓰 pass 넘어간 것을 피남편이라는 표현에 축약이 된 겁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노래 형식만이 아니라 고백이고 허걱 이라는 우발적인 터져 나오는 감탄사 그냥 내뱉어지는 소리입니다.

바로 이런 할례는 이런 의식으로 매일 매일 베어버리겠다는 겁니다.
베어버리겠다는 것은 베어버리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 의식을 가질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문제시 삼는 겁니다.

그런데 베어버리니까 그 더러움과 수치가 홀라당 다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비로소 문제시 되었다고 그 더러움이 드러난 것에 감추고자 하는데
여호와는 그 반대입니다. 이제 문제시 안하겠다는 겁니다.

왜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기 전에는 항상 할례를 할까요?
거룩한 전쟁입니다. 그 거룩한 전쟁에 그 거룩에 더러움을 까발리겠다는 겁니다.

그 더러움을 가지고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반대로 그 더러움이 발라당 까발려지지 않은 자들은
발라당 까발려진 자들을 보고 비웃게 됩니다.
왜냐하면 깨끗하다는 의식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런 더러운 자를 통해서 깨끗하다 라고 의식하는 자들을 다 꺽어버리는 전쟁을 펼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미련한 자를 들어서 지혜롭다는 자들을 넘어뜨리는 식이다는 겁니다.

결국 마음과 귀의 할례란 자력으로 인간들이 자신들이 생각한 지혜와 선함과 옳다 라는 것들을 무조건 무너뜨리고 넘어뜨리는데 있어서
그 반대인 더러운 자를 사용해서 무너뜨렸을때에

십자가의 지혜에 어떤 누구도 개입할 수 없었다 라는
오로지 여호와 홀로 스스로 펼치시는 전쟁임을 알게 되고
그 창조주의 전쟁에 우리는 그저 전리품 찌끄래기 잉여품으로써 점령 당해서 나타난 새피조물임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결국 적이 있다는 뜻이고 그 적의 손에서 빼앗았다는 뜻에서 전리품입니다.

이런 전리품을 이웃사랑한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웃환대법 약자보호법은 바로 너희가 이전에는 애굽의 종 곧 마귀의 종이였는데
그 마귀의 종에서 빼앗은 전리품이요 그 노예와 같은 종을 사랑으로써 이제는 노예가 아닌 신부의 자리에 앉혔다 라는 취지가 율법입니다.

남을 사랑한 것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이 법을 활용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특히 목사들이 교인들을 율법이나 산상수훈을 통해서 어떻게 사기를 치는고 하니
상대방을 부려먹을 이유로 법을 이용한다는 겁니다. 말씀과 율법을 말이죠.

주님은 정작 신부로써 삼으시는데
목사들은 교회 종으로 교회 노예로 부려먹는 겁니다.

설사 예수님의 종으로 부려먹고 예수님의 노예로 부려먹으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했다간 목사 자신도 그렇게 되어야 하니까 싫은 겁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종 예수님의 노예가 나타날까봐 교회 되도않는 조직체의 권력을 이용해서 경계를 하고 수비자세를 취하는 겁니다.

이것이 모세 이후에 나타난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쟁은 이제 내부를 쳐 버리는 식이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완료를 외칩니다. 거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집착이 이스라엘은 이유도 없이 표출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이 주 께서 내 주께의 방식입니다.

주님이 언약을 세우셨고 그 세우신 언약을 다시 주님 스스로가 치셔서 새언약을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자 그렇다면 자기 부인이란 곧 잉여란 곧 잃어버림이란

주님이 잃어버림의 자작극을 펼쳐놓고 다시 그 잃어버림을 치셔서
다시 되찾으심으로써 자기 부인을 이룰 때 잉여가 곧 은혜 곧 영광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결국 주님 자신도 육의 방식인 가능성에서 가능성의 창조를 이루지 않겠다는 취지입니다.
유에서 유의 창조를 이루지 않겠다는 겁니다.
기존의 고착화 된 것에서 고착화된 것을 다시 만들어내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이다는 겁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했는데 생뚱맞게도 들이닥친 것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은혜 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발적인 것을 예정한 것을 십자가만을 창세전에 예정했고
반대로 인간의 예정은 항상 자기자신을 개입시켜서 필연적인 것을 예정화 시켜 조작해 냅니다. 곧 인간 구원입니다. 선민사상입니다. 그 선민사상이 우상이요 그것에 걸려 넘어지게 되고 다시 십자가라는 걸림돌에 또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인간 구원을 예정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우발적인 예정이 공격성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전쟁입니다.

즉 전쟁이란 적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적이란 알고보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항상 친숙한 자신들의 과거의 세계입니다.
물론 원해서 빠져나온 과거의 세계가 아니였기에 항상 친숙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친숙한줄 뻔히 알면서 눈앞에서 보는데 앞에서 자기 스스로 그 친숙한 과거의 지나간 것들을(물론 저들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현실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만 지나간 겁니다.) 자기 손으로 공격해 보라는 겁니다.

만약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에서 빼내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애굽에서 빼내어 놓고서는 광야 속에서 그 애굽을 공격하라는 겁니다.
이미 끝난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에 공격해도 상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웬걸 이스라엘에게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써 자리잡혀 있었던 겁니다.
자기를 공격하지 못하기 때문에 광야에서 물없는 곳 양식 없는곳만 골라서 돌아다니도록 하시고

또 하필이면 광야에서 이웃사랑하지 못한 자신들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이웃사랑을 위한 율법을 세우는 겁니다.

광야에서 눈에 보였던 애굽이라는 적 보다 더 강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만난겁니다.

바로 자기자신입니다. 애굽이 만들어낸 우상이 만들어낸 자아를 보라고
마음과 귀를 말씀에 의해서 홀라당 발가벗김 당하는 할례를 받으라는 겁니다.

곧 이웃사랑을 실제로 보여준 그 말씀에 지적당하라는 겁니다.

우와 내가 저 지옥에서 빠져나왔군요
친숙했던 그 모든 것들이 지옥의 소유성들이였군요 라고 지적 받으라는 겁니다.

그 지적이 바로 목이 곧은 나를 목이 부러뜨려지는 것을 당하는 겁니다.

왜?

말씀이 덮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인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방식이요
잉여요 자기부인이요 바로 여호와의 전쟁 곧 사건을 통해서 적을 향한 공격성으로 인해
그 홈페인 그 상처에서 피어나오는 자기껍질을 깨고 나온 것이 잉여물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부활이요 그것이 바로 여성성에 해당되는 생명을 잉태해서 탄생케 하는 원리입니다.

죽은 태에서 생명이라고는 전혀 있어 보이질 않는 그 부정함 속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 조차도 사람의 손에 의해서 구원의 문으로 조작된 형태로 된 그 우상성을 깨뜨리는

도리어 구원의 문이 아니라 원수의 문을 여는 자로써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마치 죽은 예수님이 유훈정치 하는 듯한 느낌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부활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니 예루살렘에서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 평화의 도시가 한 순간에 바울 곧 예수님을 핍박하던 괴수가 도리어 예수님의 주 되심을 외치는 증인이 등장하니 그 예루살렘 평화의 도시가 전쟁의 터전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상대 안하면 됩니다.
그러면 적이 생기질 않으면 싸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적으로 삼아버렸듯이

바울이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 적으로 삼고 공격한다는 겁니다.

갑자기 절대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던 그 조용한 도시가
보이지 악마의 맹렬한 손길이 예루살렘을 꽉 주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이

딸랑 굴러들어온 뜨인돌삐 무시할만해도 충분한 심지어 예수님을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는 선동자였던 그 바울이 굴러들어와서 예루살렘의 실상을 까발립니다.


바울이 전처럼 과거의 모습이 아닙니다. 죄인의 괴수된 모습입니다.
목이 부러졌습니다. 아니 상상을 해 보세요 목이 부러지면 목이 너덜너덜 덜렁 더렁 거리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역겹나요?

또 마음과 귀가 할례를 당했습니다. 귀가 너덜 너덜 짤렸습니다. 마음판은 가위와 칼로 난도질 당한 판대기처럼 너덜 너덜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처음자리 곧 잉여자리인 소경과 창녀와 세리 강도 또 문둥병자를 동원해서 증거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는 말씀,
그런 불가능 말씀을 그야말로 인간말쫑들 불가능한 자들만 개같은 뿌쓰래기들만 모아서 증거하시고 그 반대인 바리새인(의인)을 향해 전쟁을 펼치시는 겁니다.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너덜 너덜한 못보는 눈알을 가졌더라면 고쳐줄텐데
멀쩡하게 잘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라고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마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행 28:25, 개역)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개역)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창세전의 예정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원수를 사랑한 죄인을 용서한 피흘림만 예정된 겁니다.
그렇다면 죄인이야 말로 잉여 곧 처음의 자리입니다.

처음이란 아무것도 내 쪽에서 나올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 무능한 자리에서 사랑이 덮쳤다는 겁니다. 그것도 폭력적인 전쟁으로써 말입니다.
도장을 홈페이듯이 꽝하고 상처로써 꽝 찍어버렸기 때문에
그 도장에 의해 홈페인 자국들이 문신처럼 남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장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도장에 어떤 상황에 가장 부각이 되는고 하니
소경 창녀 세리 강도 부정한 문둥병자 죄인 중의 괴수 1급살인마
에게 가장 잘 부각이 되는 겁니다.

저는 1급 살인마에게 친구가 생긴 내용을 다룬 영화를 보고서 아 친구의 의미가 이거구나 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친구란 도저히 형성 될 수 없는 상황이 전제되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바라보는 그 시선 앞에서 의도적으로
세리와 죄인과 강도의 친구로써 예수님은 등장합니다.

이제 바울은 바리새인의 이전 자리에서 빼내임을 당하고
처음자리인 세리와 죄인과 강도인 죄인 중의 괴수를 친구 삼아주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외칩니다.

그리심산(축복산)에서가 아니라 에발산(저주산)에서 예수님을 외칩니다.

내용이 딴판입니다.

예루살렘이 신학으로 포장하고 율법으로 포장하고 말씀으로 거룩으로 성전으로 교회로 거룩으로 믿음으로 아무리 겹겹이 포장하여도

마치 애굽의 10가지 신으로 아무리 겹겹이 포장되어도

바울의 등장으로 모조리 홀라당 다 벗겨집니다. 수치가 그 더러움이 드러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마치 원수의 성문처럼 한 응축점으로써
바울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그 원수의 성문을 여는 죽음의 문을 열고 그 더러움의 문을 여는 자로써 등장할때에
왼편 오른편으로 나누어지는 분류작업 곧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으로 영광이 나타나는 겁니다.

거룩이란 분류입니다. 두 패로 나누기입니다.
아무리 예루살렘에서 제사로 수많은 구약의 제사를 문자 그대로 실행을 해도

예수님이 오셔서 단번에 피 흘리는 십자가의 제사 곧 화목제를 이루지 않으면
아무 쓰잘대기 없는 그림자 놀이에 해당 될 뿐입니다.

또 다시 바울의 등장으로 이제 십자가의 거룩 제사 곧 두 패로 나누기가 증식이 됩니다.

이제 공간 시간을 초월해서 거룩한 전쟁인 십자가는 어떤 장소든 어떤 시간이든
때를 얻든 못 얻든지 상관없이 복음이 가는 곳에 성도가 가는 곳에 응축점으로써 악마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격게 되는 사건들입니다.

이것이 동일하게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취소는커녕 증식되어 땅끝까지 멈춰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예루살렘에 있는 권력자들의 모습들이 아무리 바울을 없애버릴려고 삭제하듯이 지우개로 지우듯이 아무리 지워도 바울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저들은 더 당황 합니다. 마치 지난주에 빌라도처럼 더욱더 그 완악성이 더욱더 드러나는 속내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바울은 복음을 외칩니다.

아주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복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기준으로 믿는 자들의 그 믿음의 기반들을 다 흔들어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복음을 외칩니다.

오히려 격렬하게 그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저들의 종교성이 이방인과 다를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교리 신학 믿음체제 등으로 조작해서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그 내막들이 십자가 복음 앞에서 드러나게 되니

홀라당 발가벗겨지게 되니

바울을 어떻게 해서든 처리하고 싶어서 예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랑곳 없이 바울은 전쟁으로써 사건으로써 십자가의 지혜로

저들의 예루살렘에 큰 상처를 긋듯이 난도질 합니다.

너덜너덜한 걸레처럼 되는 예루살렘을 그들은 도저히 용납하질 못합니다.

그러나 그 공격성이 아니면 그 폭력성이 아니면 저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지적을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처음자리를 이미 잊어버린 자들이 어떻게 소경의 자리 죄인의 자리 원수의 자리에서
이웃사랑으로 다가온 그 사랑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세례요한이 그래서 다시 물에 빠뜨리는 겁니다. 처음자리에서 다시 출발하자고

흑암의 백성

개같은 이방나그네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죽은자 시체 앉은뱅이

이런 자를 이웃 삼는 것이 복음을 바울이 이제 바톤을 이어 받아서 마귀가 장악한 그 예루살렘을 향해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반드시 체포되고 갇혀야되고 범죄인 취급당해야만 합니다. 복음 때문에 벌어지는 자작극 때문입니다.


(마 4:12, 개역)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마 4:13, 개역)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마 4:18, 개역)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마 4:19, 개역)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20, 개역)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4:21, 개역)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마 4:22, 개역)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4:23, 개역)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4, 개역)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다음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체포 당하고 위협을 당하고 범죄인 취급 당하고 우겨삼을 당하는 와중에도 아랑곳 없이 바울이 어떤 내용으로 복음을 증거하는지 2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복음은 참으로 희한합니다.

우리가 더러움이 아닌 사람들이 신뢰가 가는 것을 갖추어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죄인 중의 괴수인 죄수복을 입은 상태이고
범죄인 취급당하고
체포당하고
흑암의 백성 상태이고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앉은뱅이가 된 죽은시체가 되고
개같은 찌끄래기가 되고
너덜 너덜 목이 부서지고 마음과 귀가 난도질 당한
그런 입장에서 복음이 복음 스스로 증거하는 현장을 보고 믿게 되는지

너무 너무 신기합니다. 우리 입을 왜 불로 지져버리셔서 아니외치고서는 못배기도록 하시는지? 왜 멀쩡한 입술 건강한 입술로써는 왜 안되는지?

바울 자체가 불로 지져진 망한 상태로써 복음 스스로가 증거하는 그 현장에 목격자로써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에게도 멈추지 않고 그 현장으로 인도하심을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자기부인의 방식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잉여의 방식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의 방식을

이렇게 허락해주시고

보고 즐거워 하고 기뻐하게 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십자가의 긍휼을 용서를 거두지 마시고 그 매일 매일 벌어지는
홈페이는 상처를 남기는 그 사건의 현장에

이미 넉넉히 승리한 그 완료를
나를 우리를 적으로 삼아 모든 것을 빼앗는 그 죽음보다 강한 사랑 앞에

녹아져 버릴수 있도록

그 사랑을 누릴수 있도록

목을 부러뜨려 주시고 마음과 귀를 난도질 하여 주시옵소서

늘 십자가로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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