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2. 회칠한 문 두껑을 여는 불편하고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십자가

회칠한 담을 역어서 증거되는 십자가와 깨어져야만 하는 바울

본문 : 행 23:1-35

(행 23:3, 개역)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지난 시간에 불가능한 자랑꺼리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왜 십자가의 증거가 불가능할까요?

소위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외치듯이
일반 성도들에게 주변사람들에게 전도하라 또는 선교하라 라는 식으로 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는데 뭐가 어려워서 못증거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뭐가 불가능합니까? 다 가능한데?

지난 시간에 인간의 정치성이 거룩을 표방하면서 언어가 구사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제가 방금한 이 말도 다 정치적이다는 겁니다.

정치성 구사하지 말자 비정치적으로 하자 라고 말해도 비정치적으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인간이 이미 선악을 안 이상 즉 죄의 소원이 덮쳐진 이상 모든 언어들은 정치적입니다.

차라리 전 정치적인 언어만 하는 자입니다 라고 전 소경입니다 라고 하면 됩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또 다른 시선이 보입니다. 비로소 소경의 자리에 앉게 됨으로써 소경 아니다 라고 우기는 세력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소경이라고 고백한 나를 공격하는 위치에 서 있어도 나는 저들을 소경이라고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리석은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중간에 낑겨 버리니까요

바울이 왜 중간에 낑겨버린 겁니까?

바울도 마음껏 저들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을까요?
당대의 의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인데?

그런데 바리새인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를 못합니다.
도리어 자신이 속했던 바리새인으로부터 공격 받아야 만 하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위치 자리가 구원의 자리이다 라는 조건이 아니라
다른 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시선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 자신이나 저들이나 뭔가 갇혔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작용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항상 내부에 있는 것들을 배설하기 바쁩니다.
그것도 깨끗하다는 거룩을 내뱉지 않으면 똑같이 공격 당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그동안 고이 고이 모아놓은 공격받지 않을 것을 내뱉어야만 합니다.

왜 인간이 성화를 할려고 할까요?
착해서? 선해서? 의를 추구할려고? 아닙니다.
악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시선을 예수님에게 다 빼앗기기 싫은 겁니다.)

그 악을 감추고자 고이 고이 눌러놓은 것을
나 이렇게 눌러 놓았는데 왜 너는 칠칠맞게 눌러 놓지 못하느냐? 내가 너 보다 한 수 위다.
라는 주장을, 언어를 구사하고파서 눌러놓는 겁니다.
결국 선해서가 아니라 또는 의를 갈망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악하기 때문에 참고 참고 인내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자비 양선 했던 겁니다.

오히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추구하겠는다는 발상 자체가 악마적이였던 겁니다.

차라리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뿌리 자체가 악마입니다.
이것 고쳐 달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자기의 부정함을 담고서 그 더러운 수치를 함께 담아서 용서와 결부시켜 증거해야 하기 때문에 약점 잡히는 짖을 자기 입으로 누설하는 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거둬쳐 버리고
긍정적인 것을 모아서 증거하는 겁니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쉽습니다.

너무 너무 쉽습니다.

남들에게 약점을 잡히기는커녕 도리어 칭찬 받습니다.

(갈 1:8, 개역)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개역)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런데 바울은 그 반대입니다.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 골라 합니다.
마귀가 듣기 싫은 소리가 십자가의 부정성입니다.
그런데 인간도 유일하게 듣기 싫은 소리가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왜 예수님의 시선에서 봐야하고
그 시선을 보자 마자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듯이
왜 스데반도 죽임을 당했는가를 알수 있는 겁니다.
스데반을 죽인 바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시선에 놓여지기 위해서 철저하게 이용물로 당해야 합니다.

저주가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의 대상이다는 겁니다.

바울은 그 저주를 제거하고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 저주의 대상임을 알고 부랴 부랴 다급하게 외치는 겁니다.

안믿을줄 압니다. 아예 호응과 반응은 기대할 필요성 조차도 없습니다.
그저 저주의 대상에 놓였기 때문에 자신은 외치는 겁니다.
불쌓히 여겨 달라는 겁니다.

그럼 성화론자들이 비웃습니다.
아이고 아직도 십자가 붙드느냐? 그것은 처음 믿을때만 그렇지 이제는 성화 되어야 하고 새생명의 삶을 살아야지 이미 지난 과거를 왜 붙드느냐 라고 말이죠?

결국 이들의 시선은 새생명의 삶과 성화를 최종적인 완료요 종착점으로 본 것입니다.

바보들입니다.

성경은 정작 십자가의 저주가 종착점입니다.

십자가가 완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십자가는 이미 과거일 뿐이다 라고 보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해석이 틀려서입니다.

맞습니다. 십자가를 해석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해석하니 저런 결론이 나왔기에
새생명의 삶도 성화도 그런 해석의 시선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십자가는 해석 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해석 당하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십자가를 해석하는 것을 보면 항상 긍정적입니다.
기껏 부정적으로 해석해 본들 잠시입니다.

전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정적으로 보면 되겠네? 뭐 어렵겠냐 ?
라고 하겠지만 인간 자체를 부정해 놓고 시작하는 십자가 이기에
자신이 제거 당한 상태에서 십자가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든 긍정적으로 해석하든
소용이 없는 겁니다. 결국 어디까지나 자기가 받아들이는 자유성을 근거로 하겠다는 고집인 겁니다. 제자리를 맴돌 뿐입니다.

십자가에 의해서 해석 당한 자가 외부에서 나타나야만 하는 겁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저들 성화론자들 말처럼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통과 했으니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통과한 십자가만을 들이대고서는 십자가의 저주를 퍼부어야 하는 겁니다.

바울이 하는 일은 이제 이것 뿐입니다.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모든 인간을 십자가에 응답해야할 답변의 자리인 하나의 응축됨 점으로 모으는 일에 동원이 된 겁니다.

우리는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질문에 대답 응답을 해야 합니다.
요나처럼 아무리 도망쳐도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것 시간과 공간이 주의 목전입니다.

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를 왜 죽였느냐 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마치 가인에게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창 4:9, 개역)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모든 인간은 답을 해야 합니다.

(마 3:17,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1:11,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 9:7, 개역)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눅 3:22, 개역)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가 어디있느냐 라는 물음에 우리는 답을 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어디를 가지 않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나중에 예수님에 의해 다시 재 해석 되어 보니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외치고 있는 것은 결국 십자가 사건의 재판 3판 4판 계속 증식입니다.

이 사건의 증폭을 놀랍게도 구약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오늘날 교회가 똑같이 막아버리는 겁니다.

아니 막는다고 막혀 집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고 죽여질까요?

십자가를 치워 버린다고 치워짐을 당하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창조인데 창조를 인정안하고 무시해 버리고 제거해 버린다고 창조가 취소 제거 되질 않습니다.

그 따위 생각을 한다는 자체도 창조 속에 놓여져서 생각하기 때문에
내부 결정이 아니라 이미 외부 결정에 끝난 문제인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외부의 작용에 의해서 미끼로 놓여지는 겁니다.
또 반복케 하는 성령에 의해서 말입니다.

성령은 지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이다 라는 것을
인간이 취소 시켜버렸는데 취소는커녕 생생하게 살아 있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죄의 소원이 이런 식으로 가인에게 덮쳤듯이
이제는 반대로 아들의 소원이 이렇게 덮쳐지는 겁니다.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외 당했습니다. 그저 외부에서 결정난 사항으로 덮쳐지는 겁니다.

이것을 놀랍게도 우발이라고 합니다. 필연이 아닙니다.
필연이면 또 고착화 시켜 또 내 쪽으로 땡겨 사적으로 이용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발적인 사건으로써 십자가 이기 때문에
창조는 인간의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창조 당한 인간에게 해석 당하는 창조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놀랍게도 스데반을 죽인 바울을 통해서 생생하게 증거되는 것입니다. 불가능입니다. 우발적입니다. 부정적입니다. 역설적 모순적입니다. 그 부정이 날 살리는 겁니다.

도리어 성령은 너희들이 죽여 버리고 취소 시켜 버린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주춧돌 모퉁이 돌 이 되었다는

주가 되셨다는 겁니다.

주란 단순히 주가 아닙니다.

주가 생기면 그져 종 되면 되지 뭐 그런 식이 아닙니다.

내가 주가 되고자 해서 죽여버린 종으로 삼은 그 종의 죽음을
반대로 내가 주의 자리에서 종이 졸지에 되어 버렸고
내가 종으로 죽여버린 그 자를 주로 삼아버렸기 때문에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그 자를 주로 외친다는 역설과 모순을 말하는 겁니다.

또 주님 자신이 주로써 주를 스스로 주 되심을 버리고 스스로 치셔서 이룬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입니다.
이것을 인자 라고 합니다.

인자란 인자로 오신 분이 심판받아버린 인자가 됨으로써 도리어 심판주로써 오는 인자로 형상을 이루는 겁니다.

형상이란 흔적입니다. 사건입니다. 토기장이가 이렇게 손 대었다는 손댄 흔적
창조주의 손으로 빗어낸 빗어진 내용물입니다. 그 내용물이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손 댄 흔적인 십자가 흔적 조차 없으면서 유대인들이 선민이라고 우겼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 내용물은 싫어하면서 창조주를 믿는 창조물이라고 우기는 식입니다.

즉 그 십자가는 인간이 죽음에 갇혀진 그 내용물(선악)을 하나 하나 뚫어버린 그 비언약과 언약의 대립된 내용물을 담고서 창조하는 겁니다. 분명 애굽의 장자 죽음에서 구원받아 놓고서도 그런 구원자를 원망하는 그 내용물을 법궤에 담고자 상상했던 우상이 된 내가 박살이 나버린 상상도 못한 피조물이 십자가가 잉태한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니 우리가 살펴본 사도행전 21장부터 좀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신기하다고 표현했지만
여전히 신기한 것이 여운으로 남아있는데 뭔고 하니

계속 찝찝하게 남아 있는데 그렇다고 속시원하게 해결한 것도 아니지만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분명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을 가기위해 거치는 곳에서의 성도들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될 것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제 말은 예언자든 어떻게 해서든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어떻게 될 것에 대해 성령으로 알게 된 것이지 성령이 막으라 라는 지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성령 때문에 알게 된 것으로 인해 바울을 적극적으로 막게 됩니다.

저라도 말리겠습니다.

문제는 성령이 이 상황을 뻔히 알것인데 왜 알려줬느냐 라는 겁니다.

막으라는 것도 아니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막혀진다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여기에 그 어떤 반응으로도 일이 변하는 사항도 아니요
어차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면
구지 이 표현들을 넣을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왜?

기록 되어 있을까요?

마치 저는 이 부분이 성경 전체에서 동일하게 사건 마다 다 들어있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저는 임의로 인자의 방식 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이 인자의 방식에 다른 인자는 다 소외 입장입니다.

우리는 행20장 21장에서 [주 되심]의 방식에

바울은 소모품이 되고 21장 공부 부분에서 소모품이 된 것이 주 되심을 더하거나 취소시키는 감하는 것에 무능함과 불가능함을 보게 됩니다.

주 되심은 어디까지나 바울이 아닌 주께서 직접 주 되심을 치시면서 주 되심을 증거합니다.

여기에 인간은 철저한 소외와 배제성 부재성에 놓이게 됩니다. 여기에 아주 적극적인 배제당함이 바로 바울입니다.

아주 역설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일 겁니다. 오히려 바울이 배제는커녕 적극적인 개입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저는 이상하게 적극적인 소외로 보입니다.

그것을 바울을 가지고서 증거합니다.

바울이 통하지 않고 증거하면 말이 되는데 바울을 가지고서 바울을 소외 시키면서 주 되심을 증거한다? 지금 논리가 맞나요?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이 항상 이런식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룬 믿음은 사실상 여호와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유발케 해놓고
실컷 이룬 약속을 버려버리고서는 그거 아니고 이거다 라고
이스마엘 아니고 이삭이다 라고 불가능한 것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믿음이 쳐서 나오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인간 믿음의 열매인 이스마엘을 쳐서 그 믿음의 균열(아브라함의 찢겨짐)에서 나온 이삭이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나오지 않는 이삭인 믿음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해가능한 믿음이라면
사도행전 20장 21장은 성령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어떤 일을 당함에 있어서
성도들은 바울을 막고 또 바울 또한 성령으로 인해서 막힘을 당하는
이런 일관성이 나타나야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중성이 나타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싹 빠져버립니다.

그저 바울의 증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버리겠다 라는 생뚱맞은 결과입니다.

이것 또한 바울의 개인적인 사적인 신앙 자랑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증언이다는 겁니다.

도리어 모순이 아니라 바울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에 바울은 일관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소외입니다.

이 소외에 성도들은 만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외에 바울만이 기뻐하고 양보없이 증거합니다.

(행 20:20, 개역)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 20:21, 개역)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 20:22, 개역)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 20:23, 개역)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 20:24, 개역)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거리낌 없는 주의 주 되심에 주 자신도 주를 치시면서 다가옴 앞에
바울 자신이 여기에 끼일수가 없다는 겁니다. 개입은커녕 소외입니다.
주님도 주님 자신을 소외 부정 단절 부인 하면서 증거하심이 바로 주 되심입니다.

결국 고정화 되는 주 란 주가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이 인간 속에 선악을 아는 하나님을 심어놓고
그 가짜 하나님을 치시면서 진짜 하나님을 증거하니
인간이 믿는 믿음이 가능한 하나님 또는 주님은 다 가짜로 판명케 하는 주 이심을 증거합니다.

누가? 바울이 바울 자신이 소외 당함으로써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소외 당함이 바울에게서 나타납니다만 여기에 상대적으로 버티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칠한 무덤으로써 성경은 고발합니다.

오늘 본문에 회칠한 담이 나옵니다.

회칠한 담이 뭘까요? 바리새인을 지적할 때 여러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누룩입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항상 대립적인 흑백논리로써 등장합니다. 누룩은 썩게 만든다는 뜻이고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썩게 만드는 것에 확산

그렇다면 누룩의 반대는 뭡니까?

(마 16: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16:11, 개역)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12, 개역)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막 8:15, 개역)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눅 12:1, 개역)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누룩이 효소의 역할로써 부풀게 퍼지게 한다는 확산의 증폭역할로써 하나님 나라 비유에도 나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누룩의 의미는 성경에서 찾아봐야 합니다.

(마 16:1, 개역)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마 16: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마 16:3, 개역)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 16:4, 개역)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바로 기적입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이다는 겁니다.
결국 뭡니까? 저들의 말씀 해석이다는 겁니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말씀해석 외에는 다 가짜교훈이다는 겁니다.

철저한 소외입니다.

그렇다면 누룩 아닌 것은 뭡니까? 바로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고 거기에 응하는 바리새인의 교훈의 반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사람들이 요구에 응하고 기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전혀 기적스럽지 않고 반대로 싫어버린바 된
요나의 표적이 유일한 누룩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칠한 담은 뭘까요?
회칠한 무덤이 뭘까요?

이것도 말뜻 단어 풀이로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곧 예수님의 해석으로만 봐야 합니다.
도덕적 비판은 소용없습니다. 저들이 그것도 모를 리가 없거든요.

(겔 8:8, 개역)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겔 13:10, 개역)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겔 13:11, 개역)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겔 13:14, 개역)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3:15, 개역)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마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행 23:3, 개역)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회칠은 겹겹이 쌓는다는 보강의 보강을 의미합니다. (평강 평강 평강)
부족한 것을 채워 채워 보수작업에 겹겹이 반복한 것을 말합니다.

이 상대적인 의미가 바로 무너뜨림, 훼파, 허물어 뜨리기, 망함, 멸망을 의미합니다.
(검, 칼, 전쟁 = 심판)

결국 망할 자리, 심판의 자리, 멸망의 자리, 무너뜨림 앞에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을 회칠했다 라는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에스겔에 나타난 성전의 의미는 바로 성전파괴 성전무너짐에 해당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성전 되심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성전 허물기로 일관 합니다.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바로 여기에 인간들 특히 모든 인간의 대표성인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담 회칠한 무덤으로 일관하고 사수하더라 라는 겁니다.

무덤을 파 제끼는 것이 구원인데(죽음이 날라가 버리는 것인데)
무덤을 못 건드리도록 겹겹이 회칠을 하여 철갑문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사상을 퍼트렸고 확산 시켰다는 겁니다.
뭐가 생각납니까? 맞습니다. 바벨탑 그렇다면 바벨탑의 원조는 가인 성입니다.

그것은 사수가 아니라 도리어 갇혀버린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는 성에 보호는커녕 도리어 삼키움을 당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손에서 보호받는 분이 아닙니다.
그 보호를 훼파해버립니다. 회칠한 무덤을 허물어 뜨려버립니다.
그러자 밝혀지는 사실이 인간의 성전이 곧 인간의 몸이 회칠한 무덤이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바로 이 원수의 성문을 예수님은 마음껏 열어 재낍니다.

인간이 너무 너무 감추고자 해서 도리어 자기도 갇혀버린 그 수치의 맨홀두껑 회칠한 두껑을 예수님은 마음껏 열어재껴버립니다.

여기에 바울이 동원된 겁니다. 참여가 아니라 소외로써의 동원입니다.

회칠한 아무도 못 열도록한 죽음의 두껑을 바울이 예수님이 열었듯이 여는데 넌 예외 시켜줄께가 아니라 바울이 여는데 있어서 죽음 당함으로써 소외 당함으로써 여는 겁니다.

지옥 두껑을 여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도리어 죽음을 약올립니다. 죽는 주제에?

교회란 뭡니까?
구약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게 되니
나중에는 도리어 죽음의 두껑을 못열도록 다 막아버리는 역할로 변질 됩니다.

그렇다고 막아집디까?
(구약 선지서 시대에 가면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치는 방식입니다. 한쪽은 방어하고 한 쪽은 공격하고, 한 쪽은 죽음의 두껑을 사수하고, 한 쪽은 죽음의 두껑을 열어재끼고)

구약 이스라엘은 실패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손해 본 것 없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그래도 죽음의 두껑을 활짝 활짝 열어재낍니다.

이제는 그런 여호와를 이스라엘이 싫어합니다.
열어재낄 때 마다 인간들에게 밉상 받기 때문입니다.

좀 평화 롭게 살아볼려고 이방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랄라손 치더라면 그 평강을 여지없이 깨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심심하면 죽음을 맨홀두껑을 열어버립니다.

마치 전쟁에 중독된 신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얼마나 실물이 났을까요?

처음에야 애굽장자를 죽이고 나오는 그 기적들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 안 믿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어버리니 안믿을수가 없었고 또 그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그 많던 기적 다 사라지고 도리어 애굽10가지 재앙이 반드시 10번의 원망으로 되어서 이스라엘이 법궤에 담겨져야 하니 이것 뭐 자신이 상상한 믿음 상상한 하나님 모든 것이 우상이 되어버리고 날라가버리는 겁니다. 모든 것이 척박한 음료요 척박한 식물입니다. 자기를 위한 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를 외치는 겁니다. 애굽의 보호하는 신이 없어도 내가 나를 보호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도리어 결핍인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난도질(자기부인) 당하니 도저히 견뎌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도통 이해 못하는 약속으로만 채워지는 겁니다.

이제는 그런 언약이 몇 수십 백년으로 채워지니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이 싫어지는 겁니다.
아니 좋아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소외 당한 겁니다.
그러니 소외 당할 빠에 소외 시켜 버리는 겁니다.
비로소 속에 있던 것들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가?
교회란 바로 회칠한 무덤을 여는 자입니다.
원수의 성문을 얻은자입니다.
타인의 죽음의 저주 두껑을 열어재끼는 자입니다.
(무덤이 없는 자인데 왜 죽음의 두껑을 사수해야만 합니까? 다들 여호와의 전쟁인 죽음의 두껑을 여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단 사람의 죄악 때문에 전쟁에 실패 합니다. 아간의 범죄 입니다. 아간은 자신의 죽음의 두껑을 새로 만들어 버립니다. 두껑이 없는 무덤이 없는 자들 속에 무덤이 있는 자가 생겨버려서 자신의 저장 창고에 전리품을 따로 챙겨버릴수 밖에 없는 무덤이 졸지에 생겨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은사요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같은 회칠한 무덤들은 도리어 그 문을 두껑 닫도록 비밀금고자물쇠를 채워주고 돈을 챙겨버립니다.
(죄의 소원에 갇혀버림, 600만명 장정 중에 청함을 받은자 많으나 택함을 받은자 1명 적으니라 ,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혀야 함)

오늘날 교회가 이런 장사를 합니다. (성전에서 비둘기 팔고 그래서 채찍을 든 사건)

그래서 십자가가 싫은 이유인 겁니다. (그래서 맞바꾸자, 너거 성전 내 성전 허물어 버리기 내기하자 누가 사흘만에 다시 일어나는지.)

바울이 십자가로써 회칠한 무덤, 꽁꽁꽁 잠겨진 꽁꽁꽁 감추워 놓았던 죽음의 문을 열어재끼니까 모든 인간들이 만류하고 못 열도록 막게 됩니다.

과거 구약 때는 이방나라가 막고 비웃고 전쟁으로 방어 했습니다.

이제는 영적 전쟁입니다.

시간 장소가 유비쿼터(무소부재: 아니 없는 곳이 없다)가 되었습니다. 즉 부재성입니다.

(딤후 4:2, 개역)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성도가 있는 자리가 곧 죽음의 두껑을 여는 응축점이 된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십자가의 잉태가 있는 창조의 예정의 응축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는 겁니다.
(사적인 죄 사적인 은혜란 없습니다.) 응축점으로써 상대방(왕노릇)을 보라는 취지입니다.
결국 사적인 은사란 없다는 뜻입니다. 아래 본문 참조

(롬 5:12, 개역)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3, 개역)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4, 개역)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5, 개역)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 5:16, 개역)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롬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개역)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개역)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개역)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 성령이 친히 벌리시는 십자가 전쟁에 꼬챙이로 바울이 아무것도 지뿔도 없는 무카드처럼 무 로써 동원이 될 때에 지팡이(무)로 동원이 될 때에

인간들의 반응들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사도행전 23장 12부터 보면

기도특공대가 세워지는데 바울이 죽기전 까지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 라는

새벽기도특공대 40명이 세워집니다.

바로 이것은 하늘도 하나님도 여기에 동의 하라 라는 고집입니다.

이 얼마나 잘 된 일입니까?

제대로 건드렸다 라는 뜻이지요. 낚인 겁니다.

죽음의 두껑을 제대로 툭툭 건드렸다는 뜻입니다.
그 반응이 저러합니다.

가인에게 덮쳐진 죄의 소원을 제대로 건드린 겁니다.

여기에 바울이 지팡이로써 무카드 로써 동원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바울(부재성)을 죽이고자 40명의 가장 믿음이 좋은 자들이 세워지는 겁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입니다. 자발적이어야 믿음 답지요.

이 얼마나 주님이 일을 제대로 하신 결과 아닙니까?

자 그런데 또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공부한 예수님과 빌라도의 사건 내용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빼돌리는데 실패 합니다. 보호는커녕 그 보호를 마다하고 도리어 빌라도를 소외 시킵니다.

그렇다면 바울도 비슷한 내용으로 가야 맞겠지요?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역시 성경말씀은 우리의 예상을 비켜갑니다. 천부장이 암살자 40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리어 바울을 보호하고자 군사를 배치시킵니다. 그리고 빼돌립니다.
(여기에 바울이 아까 20장에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겠노라 라는 비장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꼽만도 찾아볼래야 찾아볼수 없고 로마시민권 있다는 것에 그 천부장이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에 같이 장단맞추면서 빼돌려짐 당합니다. 이거 장난아닌가요? 그래서 학자들이 이 뿐만 아니라 바울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안 맞다 라는 것을 많이 발견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을 빼 버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어 그러면 우리가 20장부터 살펴본 예루살렘에서 결국 안죽잖아?

그렇죠 안 죽지요.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가 생각하는 죽는 시점을 전제로 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지요 죽으러 왔다 라고 하면
깨작 깨작 놀려먹으면서 사람들을 자극시켰을때에 죽임 당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전 바깥 주변 낭떠러지 궁지에 몰리시면서까지 사람들을 자극시켜 놓고서는
다들 흥분해서 돌삐 까지 다 들어놓고서는
유유하게 그 중앙을 가로질러서 빠져나가십니다.

참 희한합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 말이지요.

그래놓고 성경은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기록하고 외칩니다.

[때가 안 되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때 시간 장소 이 모든 것이 인간은 박탈당했다는 겁니다. 소외입니다.
여기에 인간들의 공격은 성경은 이중적이다 와 오히려 적극적인 개입성이 갑자기 생겨버립니다. 그 모순을 견디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낚일려고? ㅋㅋㅋ

바울이 그럼 지금 안 죽게 되면 산 겁니까?
아닙니다 곧 죽게 됩니다. 때 곧 시간을 바울은 소유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시간에 장악당했습니다. 소외로써 말이죠.

문제는 사적인 죽음이 없습니다. 사적인 시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삻도 살아있음도 죽음도 어떤 권한도 없습니다.

말씀을 응하기 위한 긍휼의 그릇으로써의 죽음 진노의 그릇으로써의 죽음 뿐입니다.
삶도 살아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적인 살아 있음이란 없습니다.

긍휼의 그릇으로써의 살아 있음, 진노의 그릇으로써의 살아 있음 뿐입니다.


자 결론을 맺겠습니다.

그럼 사도바울은 안 죽는거네?
아닙니다.

죽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입니다.

결국 로마가 또 남아 있기에 죽을수가 없는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았다고 덩실덩실 춤출 일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했듯이 이제 로마로 가면서 그 거쳐가는 그 지역 또한 시비를 다 겁니다.
무엇으로 시비를 겁니까?
십자가로 시비를 다 겁니다.

왜죠?

죽음의 두껑을 열기 위해서입니다.

(행 23:11, 개역)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 꼬챙이로써 예루살렘의 두껑을 여는데 있어서 충분했고 이제 다시 로마에 가서도 뚜껑을 열어재끼는 일에 또 지팡이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바울 자신도 포함당해서 매일 매일 두껑이 열려져야함을 당하는 채로써 말입니다.

그래서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잇고
죽음에서 죽음으로 잇게 됩니다.

아벨의 족보처럼 죽었더라 죽었더라 로 잇는 족보입니다.

부활하신 주 되심 (반대로 인간의 부활 곧 형상을 다 깨뜨리는 방식이 인자의 방식)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을
단순히 말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임을 당하면서 소외 당하면서 바울 자신이 무가치함을 당하면서
철저한 단절 부재성으로써 증거하는 그 현장에 바울 자신도 전도당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십자가가 스스로 증거하는 일에 목격자로써

바울 자신이 회칠한 무덤이였는데 뚜껑열림 당한자로써 말입니다.

이것이 원수의 성문을 얻게 된 복받은 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고난의 쓴잔을 마실수 있는자는 아무도 없음을
이 영적 전쟁에 놓여진 실제상황의 긴박감 속에서 알게 됩니다.

왜 그 쓴잔을 주님께서 마셨는지
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셔야만 했는지?

십자가가 아니면 왜 죄를 못보는 소경인지

그 부재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자리에서 우리가 소경임을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의 어두운 눈을 고쳐 주시옵소서.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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