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3. 거듭되는 고소와 두 부활 논쟁 : 나사렛 이단 괴수 바울

흡집내는 사건으로 엮어져서 증거되는 부활(거부당하는 싫어버린바된 부활)

본문 : 행 24:1-27


지난 시간에
(행 23:3, 개역)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제목을

회칠한 무덤 두껑을 여는 십자가
회칠한 문 두껑을 여는 불편하고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십자가
회칠한 담을 역어서 증거되는 십자가와 깨어져야만 하는 바울

등으로 표현 했습니다. 제목을 여러개 하는 이유는 제목이 중요하지 않고 그러면서 동시에 제목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며 한번 이 본문을 본인 자신들이 직접 내용을 느낀바를 써보세요 라는 심정에서 공감하지 않는가? 라는 저만의 표현입니다.

정말 정말 저는 이렇게 봤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느껴집니다. 어떻게 공감하시나요? 이 보다 더 현실적일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재주로 문학적인 하나의 설교문을 작성할라손 친다면 그거 언어술 일 뿐입니다.

왜 지난 시간에 회칠한 무덤을 바울이 느닷없이 언급했을까요?
상대적인 원수의 문을 여는 부활과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죽음 문을 여시고 부활하시는 것은 상대적인 인간들의 회칠한 무덤을 때려죽어도 허물지 않겠다는 겁니다. 거기에 갇혀 살았뿌라 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간은 인간에게 감탄하며 삽니다.
유들 유들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평생 보람으로 삼고 삽니다.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게 할 것인가?
사람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 것인가? 이것이 인간의 인생 목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실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좋게 하실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 예수의 영을 받은 사도바울은 갑자기 바꿔졌습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겠노라 라고

(갈 1:6, 개역)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 1:7, 개역)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 1:8, 개역)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개역)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갈 1:12, 개역)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살전 2:4, 개역)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은 없다는 겁니다.

결국 사람과 하나님은 결부가 될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종교는 항상 결부시키는 식입니다. 유독 고집스럽게 성경말씀만이 사람이라는 육과 하나님이라는 영을 철저하게 단절 분리 차단 구별 짖습니다. 그 차이성을 극대화 시킵니다. 그리고서는 충돌로만 일관 합니다.
서로의 소욕을 달성치 못하도록 싸움의 관계에 놓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과 복음의 차이는 바로 사람의 성취감인가? 하나님을 좋게 하는가 라는 점입니다.

사람의 성취감은 언어술에 달려 있습니다. 즉 성화론이요 곧 행함이요 곧 우상입니다.
우상이라는 짐승의 특징은 집중력에 있다고 이번 대구강의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언어와 언어로 인한 집중력은 적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죄의 소원에 의한 것인데 바로 죽음 덮어버리기입니다.

죽음 덮어버리기의 반대는 그럼 뭘까요? 살아 있음을 활짝 만개 시키기입니다.
수 많은 언어들이 허공에 안개처럼 떠돕니다. 그 언어 하나 하나를 결집시켜보면 진리에 대한 한다리 걸쳐서 나도 진리 알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벨탑 건립한 겁니다. 국가를 세운 겁니다.

언어도 하나요 구음도 하나였다 라고 합니다.

(창 11:1, 현대어) 『[바벨탑] 처음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쓰는 말이 하나였다. 똑같은 말을 썼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창 11:1, 현대인) 『처음에 온 세상은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창 11:1, 한글킹) 『온 땅에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만 있더라.』
(창 11:1, 킹흠정)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창 11:1, 쉬운) 『<언어가 뒤섞이다>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창 11:1, 가톨릭)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창 11:1, 공동)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창 11:1, 우리말) 『당시 온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였으며 같은 말을 썼습니다.』
(창 11:1, 새번역)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창 11:1, 개역)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여러분 세상이 시대가 지나가면서 과학이 발전했다 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물론 과학이 생긴지 얼마 안되었기에 그 시점에서 보면 그렇겠지만요
정작 퇴보함으로 인해서 겨우 제자리로 돌아갈려는 몸부림침에 따라붙은 겁니다.

구음 즉 소리도 하나요 언어낱말도 하나면 거의 유비쿼터입니다.

공간과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제한이 무제한인 광속도 이해 광접속 설득 광속의 접속 네트워크입니다.

에러가 잘 나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어를 흩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언어를 발산하는 언어저장공장이 흩어짐으로 말미암아 지역이 생기고, 지역마다 생산하는 생산물이 틀리고, 지역마다 생산물이 틀림으로 말미암아 가로막히는 장애물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제가 아는 의사분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 인데
사람이 어디를 다치면 그 신경조직이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그 신경들이 혼선을 가지게 된답니다.
그래서 교통정리하듯 똑같습니다. 교통정리를 다시 처음부터 하여서 흩어진 신경망을 회복시켜야 정상가동이 된답니다.
그래서 물리치료를 계속 반복적인 훈련을 함으로 말미암아
잊어버린 그 기억력을 회복시켜서 예를들어 팔을 굽히는 훈련을 계속 반복하여서
팔을 굽히지 못하는 신경조직의 혼선을 회복시켜 원상복귀 시킨다는 거죠.

자 이렇듯이 과학이 발전한게 아니라
교통사고 오지기 박아서 온 몸의 신경조직이 손상이 되어서 모든 세포가 흩어져서
전에는 팔도 잘 구부렸는데 이제는 그 메모리 저장 기억력이 흩어져서 어떻게 팔을 굽혀서 숟가락을 퍼서 떠먹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데 그것을 수천년 동안 훈련하여서 회복시켜서 그 손상된 네트워크전산망을 겨우 복구 시점에 와 있다 라는 것이 과학발전인 겁니다.

그러니 복구 해도 문제입니다. 제가 최근 서버옮기는 문제로 에러가 한번 생기니까 계속 생기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데 복구 하면 뭐합니까? 에러의 소지는 여전히 있듯이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이 마치 물침대처럼 여기 땡빵하여서 겨우 복구 시켜놓으면 저기 뻥하여 터져버리고 여기 물새는 것 겨우 막으면 저기 터지는 식입니다. 한번 바이러스 걸린 컴은 쓰기 힘듭니다 그래서 아예 새거로 교체 시켜버리는 것이 맘고생 덜하는 편이다 라는 것이 컴유저들의 공동된 생각입니다. 백신 보다 훨씬 빠르고 편하거든요.


지난 시간에 인간의 정치성이 거룩을 표방하면서 언어가 구사된다고 했습니다.

즉 언어가 통한다는 것은 하나라는 결속력이 동반되는 겁니다.
이해 했다. 설득했다. 설명했다. 납득이 되었다 라는 것은 곧 결속된 겁니다.

그러나 이해 안된다. 설득 납득이 안된다 라는 것은 분산이요 흩어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동원되는 것이 바로 역청과 벽돌입니다.

(창 11:3, 개역)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개역)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언어로 어떤 결속력을 추구하는고 하니
말로써 흩어짐을 면하자 라는 겁니다.
즉 언어라는 말이
무엇을 의식해서 말하는고 하니 노아홍수 사건을 염두하고 하는 말입니다.

노아 언약이라는 그 진리에 자신들이 소외 당하니까 몰살당한 조상들 꼴을 다시 격을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연의 방지를 예방을 하자 라는 겁니다. 설사 그 일이 벌어지더라도 멍청하게 당하지 말고 우리끼리라도 그 언약의 소외에 떳떳하게 맛서자 라는 겁니다.

언약은 이렇게 인간의 죄 성을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라 푹 푹 수심으로써
노아홍수심판 이전의 인간 보다 더욱더 영악하게 만들어 전에 당한 물컹한 인간보다
점점점 딴딴한 회칠한 무덤으로 만들어서 언약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걍퍅케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식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인간은 뒤에서 날라올 심판 보다 앞에서 벌어진 노아홍수만을 의식하니
거기에서 흘린 정보인 역청 본드를 가지고서
잇고 잇고 이어서
딴딴하게 힘을 결집시킵니다. 전에는 힘이 없어서 당했지만 이제는 힘 있으면 안 당할 것이다 라는 멍청한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언약은 헌정보를 흘려서 새정보로 조져 버리는 겁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라는 식입니다.

자신의 신체인 육체가 마땅히 언약에 의해 심판받아야 함을 모르는 누락의 성전인줄도 모르고
성전 보다 센 국가, 국가 보다 센 짐승, 이런 식으로 더더욱 본드로 붙여서 M&A 합병을 하면 할수록 커진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 결합과 타협과 화해가 신과 자신이 그렇게 결부 될 수 있다 라고 소외 안당하기가 가능하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만큼 그 시대에 역청과 벽돌이 쓰여졌다 라는 것은 그 만큼 한층 한층 높일때마다 단순히 높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최신과학의 눈부신 발절과 성장처럼 인간의 지혜와 언어와 지혜와 힘이 결속력이 본드처럼 벽돌처럼 튼튼하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결속력이 역청 본드로 붙였고 벽돌로 쌓고 하늘끝까지 다달으게 하는 회칠한 무덤이다 라는 겁니다. 철통요새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꿈을 물어보면 딱 하나입니다.

아무리 수천만 수억만에게 물어봐도 공동된 답변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의 네트워크망의 난공불락의 철통요새 소유입니다. 이것을 유토피아? 또는 천국입니다.
(유토피아를 검색해 보니 그 뜻이 재미 있네요, 그런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꿈꾸는 것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1815a)

그런데 문제는 그 유토피아의 뜻처럼 진리에 아무리 개입하고 싶어도 소외 되었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가로막힌 그 에덴동산의 화염검을 들고 두루도는 천사 보디가드처럼
점점더 멀어져 가는 그 단절성, 도저히 본드로 붙일수 없는 소외성
그야말로 부활은 꿈꿀수도 없는 도리어 부활은커녕 회칠한 무덤인 그 딱딱한 죽음 그 자체임을 느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끝까지 찾고 찾고 찾아서 진리에 개입하고 감놔라 대추놔라 라는 식으로 간섭하고자 하는 겁니다.

실제로 이번 수요설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우상에 매료 되었을때에 정작 이방나라처럼 신을 주물럭합니다. 신께 드리는 제사처럼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모습으로 적극적인 개입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야 이방나라신처럼 신을 다룰수가 있는 겁니다. 결국 진리에 개입하겠다 라는 뜻은 멍청한 신으로 주물럭 거리겠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좀처럼 여호와 라는 신은 그 틈이 보이질 않습니다. 꼭 바울처럼 냉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을 좋게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하고 좋게 했으면 신을 주물럭 거렷겠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인간을 아주 주물럭 거립니다. 이방제사처럼 이스라엘을 몰살시켜 버립니다. 이스라엘조차 신을 멍청하게 인간 손에 주물럭 거리는 그 이방을 부러워 하듯이 도리어 이스라엘이 주물럭 거림을 당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물럭 거리듯이 우상제사가 행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을 죽이기 위해 40명의 특별기도특공대를 세우는 겁니다.
이것이 그 당시 유대인의 제사요 오늘도 똑같은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전형적인 우상숭배자들이요 신을 주물럭 거리고 싶어하는 탐심이 가득한 다른복음을 쫏는자들입니다.

(골 3:1,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개역)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개역)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4, 개역)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5, 개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6, 개역)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왜 탐심이 우상숭배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편에 앉았음으로 밝혀진 겁니다.

우편에 앉지 않았다면 알수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듯이 너희도 마땅히 지옥에서 내버려둠을 당해도 마땅하나 건져주심으로 함께 다시 살아났다면 더 이상 땅에서 가치있다는 것을 찾지 말라는 겁니다.

(골 2:8, 개역)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 2:9, 개역)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10, 개역)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 2:11, 개역)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개역)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3, 개역)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개역)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개역)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8, 개역)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 2:19, 개역)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골 2:20, 개역)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 2:21, 개역)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 2:22, 개역)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골 2:23, 개역)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다 허구요 안개요 누락될 것이요 의문의 것 즉 진리로부터 소외 당한 것 뿐이다 라는 겁니다.

진리로부터 인정 받은 것은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진리로부터 소외 당한 것인줄로 모르고 그것들이 자족이나 신과 억지로 결부시켜 이방제사처럼 우상에게 자기분신인 자기자식을 제물로 바치듯이 그래서 복 받고 인정받는 소외 안당하는 존재가 될려고 했듯이

그런식으로 의문의 증서에 적힌 율법을 지키고 초등학문과  철학과 헛된 속임수(언어결집력)에 특히 할례 지키고 그로인해 신의 거룩한 법을 지킴으로써 진리에 참예되었다 라는 의식

이런 것들이 사람을 좋게 하고 기쁨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사수하고 구축한 딱딱한 회칠한 무덤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회칠한 무덤으로 규정하는
물렁 물렁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로써 사도바울은
회칠한 무덤과 대비 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회칠한 무덤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대조적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으로써 말이죠.

난 회칠한 무덤 아니야 나도 예수님의 부활처럼 될래 라고 예수님 편에 설려고 할게 아니라
철저하게 소외 된 입장에서 회칠한 무덤이 되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봅시다.

그리고 비교합시다.

나의 피부와 나의 언어술과 나의 사고방식과 내 행함과 내 믿음 내 꿈 나의 천국은 모조리 딱딱하기 짝이 없는(거칠기 짝이 없는 딱딱한 나의 돌피부-마이다스의 손) 나만이 소유 해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수님의 부활은 물컹한 물처럼 어디에도 스며들고 어디에도 통과하고 어디든 주의 목전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딱딱한 율법 지킴으로써 겨우 하는 것이라고는 자기가 자기를 변호하는 겁니다.
법적으로 4배 갚으라 라고 하는 언어 속에 속임수가 있는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것을 못 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불륜의 3종세트 증거물이 덮쳐지게 되자
다윗은 비로소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어머니 뱃속에서 사산(유산) 당했어야 마땅한
태어나지도 말았어야할 죄인임을 비로소 그 불륜의 3종세트 때문에 알게 됩니다.
그 눈 뜨게 하실려고
언어의 속임수를 벗기게 하실려고 3종 세트가 죽어나가야 했던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던 겁니다.
왜 우편에 서게 하실려고
주님이 우편에 서면 비로소 우리는 딱딱한 율법으로 우리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편에 변호사가 천국 국선변호사로써 섰기 때문입니다.

이 우편에 선 자가 있기 때문에 땅의 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라는 겁니다.
이 우편에 선 자가 없는 자는 자기가 자기를 변호 해야 하기 때문에
진리에 개입할려고 하는 겁니다.

철학을 찾고
헛된 속임수인 성화론(행함)을 찾고
의문의 증서를 찾고
할례 행했다 라는 것만 쥐고 있으니
이것이 다른 복음 곧 탐심 곧 우상숭배 곧 사람을 기쁘게 좋게 하는
사람이 찾아서 투자하고 투자하고 잇고 본드 바르고 역청 바르고 응집시키는 벽돌로써 힘을 하늘에까지 닿게 하여 자기의 이름이 지가 지 스스로 지워지지 않게 소외 당하지 않게 생명책에 기록하자 라고 흩어짐을 면하는 결집력을 추구하는 겁니다.

여기에 돌맹이 하나가 그 건축물에 뜨인돌로써 투입이 됩니다.
자폭하듯이 터집니다.
그 신상이 무너짐으로써  모든 곳이 모든 장소와 시간이 두 소욕의 응축점으로 대비가 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유대교가 사실상 우상숭배자들임이 드러났습니다.

오늘은 짧게 결론을 내려보면
유대인의 우상숭배 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의 우상숭배성도 같이 드러냅니다.

행24장1절에 대제사장 아니니아 가 어떤 장로와 몇 사람과 더둘로 라는 법률가를 데리고 바울을 총독에게 고소합니다.

(행 24:2, 개역)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행 24:3, 개역)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행 24:4, 개역)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행 24:5, 개역)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행 24:6, 개역)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행 24:7, 개역)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행 24:8, 개역)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벨릭스 라는 총독에게
바울은 유대인의 질서를 흩어버리는 소요케 하는 나사렛 이단 괴수 괴물 라는 겁니다.

괴물 맞지요 괴물

화평 곧 평화 기쁨을 얼마나 주지 않았으면 괴물 괴수 라고 할까요?

예수님을 바알세불로 언급할 정도면 제대로 낚였다는 겁니다.
그들이 평화가 얼마나 어설프면 그런 방어기제로 나서는지 그 말 자체도 타인의 결집력을 의식해서 나오는 말입니다. 언어로 속이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주인을 결박하고 세간을 늑탈해야 겠다 것에 양보없다는 겁니다.

바울은 괴수가 되어서라도 괴물이 되어서라도 마귀가 되어서라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염병이 되어서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신 것
또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을 증거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리새인의 부활관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부활논쟁을 유발케 하셔서 쌩뚱맞은 부활을 증거합니다.

인간을 좋게 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따위의 부활은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먼저 마22장에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벌린 임금과 같다 라고
뭐뭐와 같다 라고 시작되면서 그 기쁨이 사실상 심판으로써 전쟁의 종식인 평화의 잔치 기쁨을 증식케 하는 천국이다는 겁니다.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즉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벌리는 혼인잔치에 택함을 받은 자는 적음으로
개나 소나 지나 개나 다 오는 곳이 아닌 단절된 곳이다 라는 겁니다.

혼인잔치의 희소가치성을 극대화 시키는 겁니다.

이러므로 얼마나 희소가치성이 높으면 바리새인이 올무를 걸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함으로써 저 천국 비유를 역어서 질문 안하고는 안되도록 질문합니다.

천국 비유가 얼마나 비밀로써 제대로 걸렸고 저들에게 실족으로써 그 의미성이 제대로 드러났다 라는 겁니다.

(마 22:15, 개역)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마 22:16, 개역)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마 22:17, 개역)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마 22:18, 개역)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마 22:19, 개역)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마 22:20, 개역)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마 22:21, 개역)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 22:22,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외모 형상 문제입니다. 사실상 오늘 본문이 다음 25장과도 연결이 되는데 벨릭스가 바울이 증거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 ,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심판주가 되심의 바울의 증거에 관심이 없고 그저 정치적인 상황에 유리한 점과 그리고 같은 양상의 돈의 힘에만 관심을 두고서 바울을 이용합니다.

관심사가 정치적인 힘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있어서 이방의 힘을 빌리는 원리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같은 우상성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우상이기에 결집력을 그런 힘에서 찾는 겁니다. 바벨탑이죠. 우리 이름을 내자

그래서 가이사의 형상이 세겨진 동전으로 하나님과 대비한 우상숭배 문제로 걸면서 동시에
가이사의 법에 겁니다. 어차피 둘 다 걸면 둘 중에 하나는 걸리니까요.

또 사두개인이 부활이 없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하여 그 대답에 놀라워 하니 바리새인들이 그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을 끌어들입니다.

(마 22:34, 개역)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 22:35, 개역)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개역)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개역)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개역)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개역)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1, 개역)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마치 지난번 사도행전 공부의 바울이 부활논쟁을 벌리는 사건의 원조가 바로 이 사건입니다.
왜 사두개인의 부활논쟁에서 갑자기 바리새인이 끼여들어서 부활논쟁에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성령에 감동하여서 표현했는지?

왜 다윗의 자손에게 다윗이 주 라고 했고 그 자손에게 주라고 표현했는지?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는가 라고 되묻는 겁니다.

여기에 답할 자가 없습니다. 즉 부활을 모른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부활 소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에서 소외 당함을 거쳐서 다시 그 부활을 안믿었는데 믿게 된 자가 있습니다.
그 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소외당함이 뭡니까?
부활은커녕 지옥에 떨어져야할 지옥자식임을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지옥의 자리에 뛰어든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 자가 기업이 되고 후사가 되고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겁니다. 죄 값을 치르는 고엘이 되는 겁니다.

알고보니 그 분이 내 스스로 나를 변호할 수 없는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고, 흑암의 지옥에 주저앉은바 되고, 개같은 이방인 즉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기쁜소식이 되는
우편에 앉은자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방식은 (인자방식)
주님께서 주님 자신을 치시면서 다가오는 찢겨짐 사이에서 그 틈사이에서 피어난 잉여로써 다가오는데 그것이 모조리 주의 목전이 된다는 겁니다.
(그 틈 사이 그 찢겨짐에서 나온 원천인 잉여로만 죽음 곧 음부 속에서 나온 음부의 권세를 이긴 유일한 부활 완료 덩어리이다. 다른 부활은 없다. 다른 후사는 없다. 그래서 그 이전 것과 이전 것이 지나감으로써 새것이 된 그 사이의 간격을 더욱더 벌리심으로 그 차이성을 극대화 시킬때에 십자가라는 응축점에 대조된 자리에서의 화답하는 부활이라는 십자가의 열매로써의 응축점인 것이다.)

그 목전에서 범죄 한줄도 모르고 도리어 율법지켰다고 우기고 있으니
도리어 발 아래 두어짐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비로소 뻔뻔스럽게 먹고 마시고 잔치와 노래와 춤을 춘다.
자신이 자신을 변호코자 마련한 후사요 기업이요 구원이요 부활이
도리어 시험꺼리였을 뿐인 자기를 위한 우상꺼리였고
주의 목전에서 범죄꺼리인 뿐이였고

정작 원수의 성문을 열어째끼는 즉 나의 회칠한 무덤, 죽음의 저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인 미움의 두껑을 열어재낌으로써 그 홈페인 구멍뚫힌 홈 속에서 나온 주님의 피가 유일한 생명수로써 죽은 자를 살리는 젖줄임을 구멍뚫히는 원천 파재끼기를 통해서 다윗은 기뻐한 겁니다. 즉 창조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방식이 주님이 주님 자신을 치시면서 낸 그 상처 사이로 더욱더 찢으시고 다시는 봉합하지 않음으로써 그 꺽으신 뼈로 즐거워 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 틈사이에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창조하소서 라고 합니다. 순전한 영을 달라고 합니다.

(시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개역)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개역)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 51:15, 개역)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것을 다윗은 보았고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 분이 주 라고 그것을 후사 곧 자손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인간의 부활 곧 후사는 지금것의 유지 보수 사수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윗의 자손에게서 짤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인 꺾으신 뼈로 인해서 다윗은 즐거워하는 건짐을 받았습니다.
유일하게 그 꺽여진 뼈가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나온 유일한 사망과 심판의 주 이기 때문임을 죽음 속에서 물 속에서 음부 속에서 다윗은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공부인 베드로가 물 속에서 도저히 자력으로 빠져나올수 없는 죄의 송사 속에서 베드로는 사랑을 본 겁니다. 그리고 뻔뻔스럽게 화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이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뻔뻔스럽기 없는 대답을 말이죠.
왕이여 어떻게 그렇게 뻔뻔스럽게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합니까 아까전만 해도 우셨잖아요.

지금 바울 또한 다메섹에서 바울이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스데반까지 죽인 자였습니다. 그리고 만난 후 스데반의 바톤을 이어받아 나사렛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바울 다윗 베드로가 대단한 존재가 되어서가 아니라
바울과 다윗과 베드로에게서 천국이 덮쳐져서 그 천국의 국선변호사가 졸지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음부의 권세가 드러나고
그것이 찢겨지고
그 찢겨진 틈 사이로
홈페인 그 두 패 사이로 믿음의 횃불이 쪼개진 고깃사이로 오락가락 지나가는 겁니다.
언약이 낳은 언약덩어리가 된 겁니다.

이제 율법 지켰다. 말씀 많이 행했다.
따위를 증거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쪼개신 분이 내 조깨진 육 고깃사이로 불로써 지나가셨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마치 주께서 주님 자신을 치시고 그 사이로 언약을 세우셔서
그 언약에서 잉태된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해 잉태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 뻔뻔스러운 잉여물이
동네 방네 돌아다니면서 인간의 부활을 찢어버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을 활짝 활짤 무덤 문을 열어재끼는 겁니다.

선지자가 뒤에 오실 태풍 토네이도를 증거할때에
먼저 자신이 토네이도에게 난도질 당한채로 그 심판 받은 찢겨진 몸을 증거했듯이
믿으라고 증거한게 아니라 도저히 안 믿겨지도록 더더욱 찢겨진 몸을 보면 더 신뢰감을 가지 않도록 했듯이
그로 인해 즐거워했고 전혀 믿음직 스럽지 않은 미쁘심으로써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하는 겁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인간의 반응은 인간의 후사 곧 부활 곧 기업을 잇는
정치적인 힘 모으기 곧 바벨탑 (죄의 소원 : 진리로부터 소외 안당하기: 정치적 개입)모습인
우상으로 일관 합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의 유익을 찾고 찾는 자기 챙기기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통해서 자기 유익성을 찾는 정치성(속임수)로 일관 합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우상성 40인 기도특공대 세워 자신들의 부활관을 사수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것들은 들쑥 들쑥 수시면서 돌아다닙니다.
마치 법궤가 바퀴도 없이 이방나라의 우상을 팔모가지 발목아지 짤라가면서 돌아다녔듯이
이제는 인간의 악마성 우상성을 바울이 법궤처럼 돌아다니면서 그 허상들을 들추어냅니다.

실상은 그 허상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면서 증거합니다.
보이는 것들의 허망함을 들추어내면서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항상 회칠한 무덤처럼 딱딱하기 짝이 없는 자기 이름만 내기를 원하는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님의 언약을 스스로 깨뜨리시고 다시 새언약을 세우심으로써 완성하신
그 십자가의 심판이 유일한 구원임을 그 구원 앞에서 늘 목전에서 벌어지는 예수님의 피만이 현실임을 날마다 알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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