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5. 빛을 선전하는 나(선지자)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모두가 선지자 되기를 원하는 바울

선지자 : 망한자, 부도난 자 곧 심판을 미리 앞당겨 심판을 자신의 신체 담은자. 왜 이미 완료를 봐 버렸기에 이 땅을 부도났다고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을 온 지면에 도장찍는자
완료된 더 나은 제사만 외침

2010년 7월 1일 목요일 오전 9:33:58 김대식


본문 : 행 26장

(행 26:28, 개역)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행 26:29, 개역)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오늘 따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려고 했으나
오늘 공부할 사도행전의 내용과 같은 의미이기에 그냥 여기로 다 적고자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는 제목의 글을 화요일부터 생각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화요일 저녁후에 어머니와 장시간 동안 복음을 나눈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나누다 보다 성경 전체를 한번 쭉 훓다 보니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글로 남겨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고 어제 낮에 건희아빠랑 강이아빠랑 그 내용을 다시 다루었습니다.

건희아빠에게 고마웠던 것은
지난 주 수요일 설교에 대상과 하나의 차이성에 대해서 질문을 해 주어서 이것이 계속 저에게 더 증폭이 되어 1주일 내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대상이라는 의미에 뭔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건희아빠의 질문은 하나 됨에 초점을 두어서 질문을 하다 보니 덕분에 그 하나됨 동행 그리고 함께함 이라는 의미가 계속 저를 말씀을 보는데 깊게 생각게 해주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제도 그런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었고 화요일도 그런 내용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결국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는 의미는 바로 성령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10, 개역)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눅 11:11, 개역)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개역)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눅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왜 이 내용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하는데 어머니가 충격을 느끼셨는고 하니
지금까지 생각했던 기도와 정반대 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반대 다 라는 느낌이 들면 대뜸 우리는 그럼 기도 할 것 없네? 기도 안해도 되겠네 라는 의식이 먼저 듭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니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뭔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모를까요?

그 이유는 간단 합니다.

부도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건희아빠랑 헤어진 후 이 부도남에 대해서 다시 강이아빠랑 대화를 했습니다.

더 나은 제사가 의미가 있을려면 자신이 드린 제사가 부도 나야 됩니다.
그래야 완료를 쳐다 봅니다.
그래야 하나됨 동행 함께함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세례(연합) 할례(단절)의 의미입니다.

곧 연합이라는 하나 됨 함께함이 의미가 될려면 상대적으로 단절된 것이 있어야 합니다.
단절된 것이 없는데 무슨 하나 됨이 됩니까?

그것은 하나 됨이 아니라 [대상]으로 여겨서 일치성을 추구할려는 처세술이요 정치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특징입니다. 마약의 특징은 뭔가 하나에 꽃히고자 인위적인 것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 인위성이 상대방 하나 되고자 일치하고자 하는 그 하나됨에 전부를 걸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 상대방을 철저하게 자신의 소욕으로 삼고자 자기를 위하여 이용하기 위한 겁니다. 그 대표적인 자들이 바리새인이요 오늘날 성화론자들입니다.
마약에 뿅 가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마약이 그들을 선택했기에 어쩔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라고 저들과 더 나은 것 단 한 개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 됨이란 두 개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한쪽은 사라지는 겁니다. 철저하게 단절이 되어서 하나에 흡수당해 버리는 겁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라는 말을 오해하기를 제사 보다 순종을 추구하면 가능하다는 식으로 또 순종을 제사의 사고방식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행함주의자들에게는 뭐든지 가능하지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믿음이 사기입니다.

언어란 모조리 사기입니다.
그 언어를 배경으로깔고 말씀은 등장합니다.

같은 단어를 써도 말씀이 배경으로 깔린것과
인간의 언어술(바벨성)이 깔린것과의 차이는 천지차이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도입니다.

기도란 즉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란
지금 있는 기존의 것에서 구하면 더해지고
찾으라 덧입혀지고
두드리면 더 첨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식으로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어머니가 나빠서가 아니라 육체 라는 한 아담에게서 난 육체 때문입니다.
육체의 한계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이런 식입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래서 그 차이성을 말씀을 통해서 새로 교체당해야 합니다. 내가 교체하고 싶어도 안됩니다. 말씀이 허락해야 합니다. 그 이전 까지는 우리도 오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항상 기도할 준비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구지 성경말씀이 없어도 말입니다.
육체의 본능 자체가 뭔가 결핍이 생기면 그것에 대한 채워지기를 바라는 기도의 본능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육체이고 늘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라는 하나님과 일치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에 가득찬 육체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의 본능에 가득찬 육체에 계시의 말씀이 주어지면 교체를 당합니다.

구약계시에서의 기도는 부르짖음입니다.
부르짖음 이란 죽음과 지옥과 심판 속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그 죽음과 지옥과 심판 등등이 누가 깔아 놓았는가? 라는 겁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어떻게요?

애굽을 강퍅케 해서 그 애굽을 통해서 죽음과 지옥과 심판을 깔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나중에는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마음대로 원망하는게 아니라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자 원망 안하고는 못배기도록 합니다.)
부르짖게 됩니다.

참 희한합니다. 그 부르짖음이 바로 신약에서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자기 사랑하는 신부에게서 늘 이 기도와 찬양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아름답거든요?

참 희한합니다. 죽어가고 비참하고 처참하고 처절하고 역겨울 정도로 상황이 절박한데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게 어디 있냐 라는 겁니다.

별 희한한 취향이지요잉? 에스더 서가 그렇지 않습니까?
아름다움 의 의미를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보여줍니다. 누가 죽음을 아름답게 보는자 어디있습니까? 바로 그런 사람들의 외면한 시선을 하나님은 포착합니다.

정작 인간이 포착한 것은 다 비켜가고 인간이 외면한 것은 하나님이 포착합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모든 인간이 포착합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의 영광도 들에 피는 백합화의 하루살이 영광 보다도 못하다 라고 꼭 대조를 시켜도 얄밉게 대조시키는 겁니다.

그런 얄미운 대조가 아니면 우리에게 홈이 페이지 않고 사건이 되지 않고 단절이 되지 않고 자극이 되지 않고 쪼개짐의 분리가 없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그런 일상의 쪼개짐을 실지로 전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한 두 번 전쟁을 해야죠? 결국 이스라엘 조차도 전쟁을 포기해 버립니다.
전쟁에 달인이라는 것에 실물이 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 조차도 의미가 없게 되는 거죠.
이스라엘 이름 보다 자신의 육체가 더 소중하니까요.

쪼개는 전쟁 보다 타협의 정치술이 더 육체에 편하거든요.
소멸 보다 확장이 더 편하거든요.
전쟁 보다 화평이 더 편합니다.
심판 보다 구원이 훨씬 더 편리 합니다.

눈 뜬 눈 건강한 자 보다 소경이 훨씬 더 불편합니다.
율법지킨 바리새인 보다 현장에서 잡힌 간은함 여인이 훨씬 더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결국 뭐뭐 보다 뭐뭐가 낫다 또는 반대로 낫지 않다 불편하다 라는 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다 라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적으로 추궁하는데 있는 반면에

인간은 반대로 선악과를 따먹어 놓고도 싹 다 잊어버리고
그러면서도 늘 하나님과의 일치성에 평생을 목 달아버렸다는 것에서
인간 육체는 선악을 발산하는 원천뿌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인간을 무시할 수 밖에 없지요
너 선악과 따먹었지 라고 묻는데
인간은 아니요 라고 하면서 늘 선악만 발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주님은 인간을 다루지 않고 또는 상대조차도 하지 않고
왜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키보드 이기 때문에 어떤 문자를 쳐도 항상 그 문자와 언어와 사고방식은 항상 선악적이기에 키보드를 박살낼 필요가 없고 바이러스만을 상대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 선악과 먹었지 라고 묻는 이유도 그러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네 먹었습니다 라고 고백케 되면 백이면 백 인간은 그 선악을 먹은 육체가 허물어 질까 겁이 나는 겁니다.

맞습니다 겁납니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래서 인정 조차도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인정하게 되고 인정하면 그 육체는 멸망당해야 함을 승인하게 됩니다.

그러니 성령 받지 않는 사람은 이것에 대한 조치가 못마땅한 겁니다.

그러나 그 육체가 멸망당하는 것이 왜 기쁜고 하니 더 나은 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흔히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고 우기는데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는
인간의 손 곧 선악의 육체가 짓는 교회이기에
이미 바이러스 걸린 인간의 손이 교회를 지으면 그 바이러스 없는거다 라고 저거들끼리 아무리 공론화 시켜도 소용없는 겁니다. 바로 그런 역할을 보여준 것이 구약 이스라엘입니다.

여기에 예수님 때 까지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더더욱 그런 자신들의 이스라엘 다움을 예수님에게 까지 드리내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바이러스 걸렸거든?
음부의 권세를 너희는 이기지 못하거든? 해도, 알려줘도?

그 가짜 이스라엘 가짜 교회를 진짜 라고 자꾸 우기는 겁니다.
여기에 가짜 이스라엘이 가짜 교회가 이방인까지 동원해서 자신들의 진짜 됨을 정치화 합니다.

남은 다 속아 넘어가는데
예수님 혼자 만 안 넘어갑니다. 그래서 그 혼자만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성공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죽임이 더 확장시키는 석유를 때려부은 결과가 된 겁니다. 복음 확장요? 그것 조차도 우리가 하는게 아닙니다. 마귀가 합니다. 마귀 도움 없이는 되는게 없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인간들이 싫어하는 불륜과 모순과 언발란스를 이용해서 증거합니다. 그래야 인간들이 그렇게 좋아라 하는 선악적 주장이 웃사꺼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두 동강 내버려서 저도 가지지 말고 나도 가지지 말도록 해라 라는 그 역할이 너무 너무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선악의 법을 배경으로 깔고 사랑의 법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악은 뭔 짓을 해도 사랑만 더 잘되도록 돕는 법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그것을 알기에 얼마나 하기 싫은 일을 어쩔수 없이 하지 않고서는 안되는 겁니다. 결국 일은 실컷 해 놓고 감사만은 없고 일을 그렇게 많이 해 놓고서는 지옥 가야 하는 거지요. 일만 대따 행함만 완벽하게 대따 하고서는 말입니다.

광명한 천사처럼 미소 실컷 지어놓고 인공의 인위적인 빛만 대따 많이 놓아놓고 지옥가야 하는 거죠. 말씀 실컷 누구보다더 더 많이 지켜놓고 실천해 놓고 남을 자기 몸처럼 대따 많이 사랑해 놓고 지옥 가야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미리 다 아시니 비웃고
가룟유다에게 하듯이 어서 너가 해야 할 일 해야지 라고
왜 태어났니 라고 하시는 겁니다.

자 결국 기도란 구약에서 부르짖음인데, 이스라엘만, 곧 계시받은 자만
약속 받은 자만, 성령 받은 자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어린양에 참여입니다. 어떻게 참여 합니까?
그래서 여호와가 신나신 겁니다. 한 쪽은 강퍅케 하고 또 한 쪽은 부르짖게 하는데
그 부르짖음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참여입니다.

곧 찢겨짐입니다.

그런데 이것 마저도 인간의 손에 포착 당합니다.
그만큼 익숙해 지고 그 자극성이 감격은커녕 시큰둥하게 매번 반복함으로써 적응케 되니
그 적응 곧 일치성이 졸지에 [대상]으로만 남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하나 됨이 아니라 따로 따로 따로국밥이 되는 겁니다.

적어도 하나 됨이란 곧 동행 , 함께함 이란 단절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단절성은 한 쪽은 버리고 한 쪽에 이동당하는 겁니다. 자기 발걸음으로 이동은 이동이 아니라 위치만 달라졌을 뿐이지 여전히 이동처는 대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푯대가 꼿힌 곳에 다달으지(도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푯대(목표지점)를 향하여 라는 표현은 그 단절성이 먼저이다는 겁니다.
그 단절성이 이루어지면 이미 푯대에 도착한 겁니다.

(빌 3:14, 쉬운) 『나는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 상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려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친히 내리신 것입니다.』
(빌 3:14, 현대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나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 3:14, 개역)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것을 쉽게 하는 것이 바로 가수 이름 갑자기 까먹었는데?
수희 ? 아무든 애모 라는 노래 대중가요 인데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작아 지는데?

즉 상대방이 커지면 상대적으로 자신은 작아지는 겁니다.

자신이 없어지고 더 이상 쳐다볼 대상이 아니게 되면 저절로 상대방이 커져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부르짖음 곧 기도란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옷을 찢음 곧 할례 가 부르짖음이였는데
이것이 익숙해 지니까 옷 좀 그만 찢으라고 여호와께서 인간 보다 옷을 더 걱정합니다.

그 위선과 익숙함과 포착했음에 여호와께서 안놀아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옷 찢지 말고 마음 곧 육체를 찢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언급할때에 반드시 인간에게 익숙한 포착당한 기도를 언급하면서 그 차이로 증거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처럼 인간들의 특히 아그립바 왕의 정치적 최신기술이 작렬하는 곳에
얄밉게도 예수님 나라의 원리를 증거합니다. 왜죠? 그 차이성이 아니면 증거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들의 정치에 예수님 나라의 원리가 개입해야 합니까?
그것은 선악이 작렬하는 곳에 꼭 생맹나무의 원리를 차이로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생명나무를 그런 식으로 증거하기 위해서
선악이 원래 있는데 날라든 돌이 박힌 돌 뽑는 식이 아니라.
생명나무가 창조의 목적(푯대)이기에 선악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빛을 증거하기 위해서 어두움을 미리 깔아 놓은 겁니다.
어두움은 자기들이 먼저 있었다 아무리 주장해도 쫏겨나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또 더 웃기는 것은 날라온 돌삐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주인처럼 원래 자기들 땅이였다 라고 우기고 들어가는 것이 뿌뿌뿌 희년을 선포하고 이미 승리 완료를 선포하고 들어가는 약속의 땅입니다. 가나안 땅 족속들이 쫓겨나는 식입니다. (레멘트 남은자 개념도 상대적인 쫏겨나는 토박이 와의 차이성으로 증거 되어야 합니다. 마치 원가지는 짤리고 도리어 죽은 버린가지가 접붙임 당하는 원리처럼 말이죠.)(또 한 예가 전형적인 의미로 갈라디아서의 쫏겨난 하갈과 하늘의 어머니 사래의 대립입니다.)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자유와 종의 대립이고, 자유자와 계집종의 대립이요. 성령을 따라 와 육체를 따라와의 대립입니다.

이렇듯

기도란 심판을 미리 앞당겨 자신의 육체에 심판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그것이 기쁘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구할 정도로 찾을 정도로 두드릴 정도로

왜? 좋은 것이니까요?
그것이 성령입니다. 종말의 영입니다. 십자가의 영입니다.

기도란 마음을 찢는 것이요. 육체를 찢는 겁니다.
그 단절성이 없으면 분리성이 없으면
거룩 곧 하나 됨, 동행, 함께함 곧 세례 할례 의 의미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미워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동행불가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면 따라가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동행입니다. 너무 너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란 상대적으로

이 땅의 나라와 이 땅의 의와 대립적이고
상대적으로 너는 그와 대립되어 있다는 겁니다.

결국 이 땅 나라와 이 땅 세상의 의와 연합되어 하나되어 동행 함께하는 것이 너 이고

그는 그 반대로 대립되어 있는 상태이다는 겁니다.

이 한 쪽의 심판이 없이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알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쌓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자기도 한다리 걸쳐져 있었기에 열심히였던 겁니다. 여기에 창기와 세리가 먼저 간다 라고 하니
창기와 세리가 갈 나라 같으면 안가겠다 라고 거부성을 드러내도록 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나타난 그의 나라 그의 의 인 그 라는 예수에 대해서는 살펴보고 검증하고 확인해 보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이미 창기와 세리와 강도는 자신들의 기준에서 쫏겨나고 단절되고 탈락 당했다는 겁니다.
어디에? 하늘나라와 하늘 의에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그의 세계는
도리어 쫓겨나고 단절된 자가 먼저 들어갈 것 같으면
적어도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더 이상 바리새인들 자신들이 쫓아내고 단절시킨 그들보다 늦다 라는 겁니다. 먼저가 안되니까요?

그러니 아예 그런 기준 원천 잉여 근본 그런 엉터리 원리 자체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기존의 기준을 내세우면 되는 겁니다.

똑같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 당시 최고의 권력과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지혜들이 모여든 그 장소에서 바울은 생뚱맞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라는 낯선 푯대(목표)를 들이댑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 푯대깃발을 꼿듯이 한 번 꼿고
싹 빠져버립니다. 얍삽하게도 말이죠.

그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바로 악마의 소굴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마치 에어리언이 시고니위버 뱃속에서 피어나듯이

원수의 성문을 얻는 복된 일을 제대로 한 격입니다.

여기에 더 얄밉게 바울이 이렇게 외칩니다.

(행 26:24, 개역)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행 26:25, 개역)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행 26:26, 개역)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행 26:27, 개역)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행 26:28, 개역)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행 26:29, 개역)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이스라엘 유대인이 들어도 될까 말까한 소리에
아그립바왕을 대표성으로 이방인 곧 더더욱 말귀를 못알아먹고 더더욱 돈에 미쳐 바울을 이용한 그 상황이 뻔히 드러났는데 바울은 그런 것 아랑곳 안하고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 되기를 바란다는 모세의 소원이 동일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상대적인 미친 소리다 욕 먹을 만 하죠.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

나처럼 구원 받으라 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나처럼 심판 받으라 라는 소리입니다.
심판의 영을 받으라 라는 겁니다.
(요래 요래 하면 지키면 행하면 구원받는다 라는 소리가 아니라.
이런식의 단절이 성령을 종말의 영을 받은 증거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란 종말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이 땅에서 신나게 심판을 외치는 자입니다. 곧 다리미질입니다. 첩경인 울퉁불퉁의 모든 굴곡을 평평하게 다리미질 하는 겁니다. 얼마나 시원합니까? 예수님만 옳고 모든 인간의 잘남 못남 다 평평하게 다리미질 하는 것. 이것이 선지자요 이것을 아름답다 라고 합니다. 에스더 기억나죠?. 곧 선지자의 영을 받으라 라는 겁니다. 나 곧 바울 나 처럼 말이지요.)

이 말이 좀 어렵죠
마침 어제 설교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감사하게도 말이지요.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69강-렘20장1-4(거짓선지자의행패)-jer100630.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69강-렘20장1-4(거짓선지자의행패)-jer100630.avi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69강-렘20장1-4(거짓선지자의행패)-jer100630.hwp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69강-렘20장1-4(거짓선지자의행패)-jer100630.pdf

여기에 좀 더 앞부분에

(행 26:22, 개역)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행 26:23, 개역)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모세가 바랬던 겁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선지자 되기를

그런데 바울에게서는 그것이 이방인에게 까지 확대 됩니다.
뭘 믿고 맨땅에 해딩하듯이 저렇게 저렇게 무모한 겁니다.

베스도가 맞지요. 미쳤구나 미쳤구나

미친소리에 상대적인 성령받으라 라는 겁니다.

이득은커녕 망하는 소리 이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그 망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 겁니다.

바울은 바로 이 말 한 마디 할려고 그동안 우여곡절로 잡히고 이 재판 저 재판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고
저런 자들에게 농락 당하고 이런 자들에게 농락 당하고
이런 자 찝쩍 저런 자 찝쩍
바울에게서 뭐 나오나 싶어서 툭 건드려 보는자 한둘이가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닌데

모든 것 다 이래 저래 되어도

딱 하나 종말의 영
심판의 영을 나 같이 받는 선지자 되어라 라고 외치고
무대 뒤로 빠집니다.

마치 이것은 예수님이 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는 십자가 지라 라고
그 말 한마디 외치고자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심지어 죄인 보다 더 죄인 같이
낮아지셔서
30년 사시고
3년 동안 그렇게 수고를 많이 하고서는
딸랑 그 십자가를 푯대(목표) 지점으로 정점을 찍고

물러나시는 빠져 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허탈할까요?

그러나 문제는 그 뒤의 사건입니다.

그 정점을 찍은 십자가 라는 자리가

모든 인간의 자리를 삭제하고
심판하고
십자가의 자리가 점점점 점 더 확대가 되어서

모든 구석 구석이

여호와의 목전처럼 (다윗이 고백한 바)
십자가 사건처럼 생생하게

대조가, 대립이
비교가
철저하게 에누리 없이
반드시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모조리 다 동원이 되는

마치 빨가벗겨지는 상황처럼 대조가 되더라 라는 겁니다.

바울은 취지는 이겁니다.

빨리 빨리 먼저 빨가벗겨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니 ?

라는 식입니다.

선지자의 영 곧 성령의 영
곧 심판의 영을 받는 것은

미리 매 맞는 것이 행복하단다 라는 겁니다.

나처럼 빨리 매 맞으라 라는 겁니다.

심판 받으라

그것이 바로 아버지와 하나 된 아들

곧 아들에게만 있는 징계입니다.

심판 곧 징계란 아들에게만 있습니다.

사생아 에게는 징계가 없습니다.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맞는 것은 동행자 함께한자 아버지가 있다 라는 아들만의 행복입니다.

사생자 에게는 함께하는 자가 없기에
간섭하는 자가 없습니다.

매를 대는 자가 없습니다.

사랑을 심판으로 매로 징계로 증거하시는
아버지의 뜻입니다.

어제 강이아빠랑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 집에 이사가는 사람이 기존의 헌 집이 더 살기 좋으면 별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부도 났는데, 헌집이 무너졌는데

새 집을 준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탕자처럼 부도난 자 만이 아버지의 마음에 하나 곧 동행이 됩니다.
그러나 맏아들처럼 부도난 적이 없는 자는 아버지의 마음과 개별화 됩니다.

새 집 곧 그리스도의 몸을 맛본자는
자신의 육체의 장막에서 빨리 벗어나고파 빨리 빨리 빨가벗겨지기를 원할껍니다.

그 새집인 그리스도의 형상은 바로 이 두 여인이 낳은 자식으로써 비유로 증거 됩니다.

비유란 비밀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해 못해도 됩니다.

어머니에게 이런 말 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죽은 제사

드려도 드려도 또 드려야 하는

그런데도 늘 미흡하고 다시 반복하고 또 드리고

그런데 신약의 제사는 단 한번의 제사요 산제사입니다.

즉 내가 드리는 그런 구약의 제사 끝났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드린 제사로 단번에 완료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내가 하는 기도는 늘 되도 않는 기도요
미흡하고 또 기도 하고 또 기도 해야만 하는 기도
그러면서도 찢겨지기는커녕 기도해야만 한다는 이유와 정당성으로 때려 죽어도 안 찢겨지는 기도 이니 백날 드려도 소용없는 겁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단번에 찢겨진 기도
완벽한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늙어도 쇠퇴되는 기도도 아닐것이요
몸 아프면 멈추게 되는 기도도 아닌

범사에 늘 찬송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단번에 완료된 산 기도 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기도로 인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되었으니
이제는 기도 했냐 안했냐 라는 것을 따지는 자가 아니라

내 기도 부도 났어요 라고 기쁘게 외치는
예수님의 기도로 나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기도 도사들이 가득한 그 속에서 외치는 겁니다.

기도의 바벨탑 달인 속에서 말이지요.

모세가 모두가 선지자 되기를 바란 것이 성령으로 인해 고백한 것은
상대적인 율법의 대표자 모세로써
율법에 의해 부도 맞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되기를 바란 겁니다.

율법 지켜서 될 구별될자 거룩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그래서 모순이고 불륜이고 말이 씨알도 안먹혀들 전혀 가망없는 곳에서
점정을 찍고 나옵니다.

바울의 숙제가 아니라 성령의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그 속에서 두 패로 갈려지는 현상에 나타납니다. 후대에 말이죠.

바로 이런 식으로 지구 곳곳이 여호와의 목전처럼
말씀의 무대가 됩니다.

두 패로 나누어지는 말이죠.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선지자의 영 심판의 영 종말의 영을 받은 선지자가 되어서


아름다운 현상 곧 죽었는데 살았고 산자였는데 죽는 두 패의 양상이 드러나는

마치 남편있는 순풍순풍여인이 낳은 자식 보다
남편 잃은 과부가 되어서 남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순풍여자 보다 더 많은 자식을 낳았다 라는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 종말의 상황을 아름답다 라고 증거하는 선전자

홍보맨

광고맨이 되어라 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바울의 눈에는 기록된 말씀 성취가 더 관심사입니다.

개같은 이방인 때려죽어도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그 이방인이 심지어 바울까지 이용해서 어려움에서 빼내주면 자기 입지가 넓어지거나 돈을 받거나 라는 이익으로 모든 것을 따지는 그 와중에도

바울은 저 유대인 곧 남편 있다고 순풍여인이라고 우기는 자와,
방금 이 철딱서니 없는 이방인 곧 남편 없는 과부된 이 여인과 같은 죽은 가지인 이방인에게서

선지자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기록된 약속 성취만을 외치는 겁니다.

도대체 이런 시선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마치 기독교 정통 교회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에게 가서는 너거는 짤렸어 라고 외치고
반대로 끝까지 죄짓는 짖 외에는 관심 없는 불교나? 이단이나? 가장 부패한 집단이나? 정통개신교가 가장 욕하는 가망없는 천주교나? 그 속에서(전부다가 아니라) 한 과부, 한 문둥병자 에게서

선지자의 영 받으세요 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그래야 분이 가득한 반발성이 나타나는 겁니다.

희년이란 반대로 기쁜자가 복된 자가 나타났다는 말은 반대로 망한자 슬픈자가 결정났다는 겁니다.

망년이다는 겁니다.

그 결정사항이 땅에서는 반대로 나타납니다.

땅에서 망한 과부 망한 문둥병자가 하늘에서는 희년자로 결정하서 반대로 비춰졌고
땅에서 흥한 순풍녀 흥한 부요한자가 하늘에서는 망한자로써 결정이 났기에 반대로 비춰지는 겁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죠.

그래서 마리아의 기도 곧 찬양
한나의 기도는 반드시 상대적인 상황이 나타남으로써 그것을 배경 카페트로 깔고 그 반대로써 하늘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부요한 자를 낮추고 비천한 자를 높이는 그 기준이

단번의 제사
더 나은 제사
완료된 기도로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얍삽하게 기도로 두 세계의 싸움을 붙여 놓고 마리아 자신은 빠져 버리는 겁니다.
한나는 이스라엘 속에서 두 세계의 싸움을 붙여 놓고 자신은 빠져 버리는 겁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의 두 세계의 본격적인 싸움이 사무엘 선지자 곧 종말의 영을 받은자로써 나타납니다. 사울과 다윗의 대립처럼 말이죠. 이것이 끝까지 갑니다. 이스라엘 멸망때 까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아름다운 소식 곧

(행 26:23, 개역)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 26:24, 개역)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빛을 선전함으로써 두 세계를 십자가에서 다시 산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싸움 붙여 놓고 자신은 빠져 버립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 길은
아니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왜 이런 전쟁의 취지와 또 그 결과와 목적과 모든 원리는

바로 자신처럼 선지자 되는
선지자의 영
십자가의 영
종말의 영
심판의 영을 받으면 다 알수 있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미쳤다 라고 욕하든 말든

마리아 한나처럼 싸움 붙여놓고 빠져 버립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소식( 싸움 붙이기?)을 전하는

복 된 자

원수의 성문을 활짝 여는 마리아처럼

복된 교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신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주님의 간섭이
주님의 심판이
주님의 징계가  우리를 낫게 하는
우리를 고치게 하는
부도난 우리를 새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옮기는

유일한 연합인 동행인 세례 곧 하나 됨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아들이기에 매를 대시고
사생아 이기에 매를 징계를 하지 않는 그 섭리를

이 십자가의 영 만을 통해서
그 약속하신 새로운 자리 처소를 통해서 알려주십이요.

베드로 자리가 부도가 남으로써
예수님이 친히 마련하신 처소로 베드로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자기자신이 믿음의 조상이 될려는 그 믿음은 부도나서 날라가버리고
베드로처럼 자기가 수제자 답게 행할려는 그 반석이 부도가 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 망한 자리로써

새 자리 새 처소를 예수님이 친히 마련하신 자리로써

반석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신부 되었음을

종말의 영
인간의 자리를 심판하는
날려 버리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도록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스라엘 중에 있으면서 이스라엘 자리 날라가 버리고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도다 여호와께서 친히 마련하신 자리를 보았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요
부정한자요
부도난 자요
망한 자 로다

제단 숯불로써
심판으로써 내 입술을 지져버리시니
내 죄가 홀라당 날라가 버렸도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누가 전하료?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모든 사람이 나처럼 부정한 입술 찌짐 당하기를 원한다는

뻔뻔스럽고 당당한

아들로써의 징계를 외칠수 있도록

우리의 입술을 찌져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