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6. 가이사 앞에 서야만 하는 바울

예수님의 숙제 (바울 숙제가 단절된)

2010년 7월 8일 목요일 오후 10:43:16   김대식


본문 : 행 27장

(행 27:18, 개역)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행 27:19, 개역)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행 27:20, 개역)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행 27:21, 개역)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행 27:22, 개역)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행 27:23, 개역)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행 27:24, 개역)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행 27:25, 개역)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이 가는 곳은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고난의 연속성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난 속에 있음을 의도적으로 더 부각시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랑곳 없습니다. 무슨 무쇠철인 로봇 팔 로케트 주먹을 가진냥 착각하겠지만 정작 세밀하게 따져 보면 바울의 신체에는 가시에 가시에 온 몸에 가시가 박혀 있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선지자 라고 합니다. 선지자란 성령이라는 좋은 것을 받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철회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에 예수님의 고난을 무한증식시키는 성령에 의해 잠식 당한 자입니다.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갈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래서 선지자란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전쟁구조를 이 땅에 가시화 시키는데 선지자가 가는 곳 마다 땅이 두 패거리로 나누어집니다. 그것을 거룩한 전쟁이요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이란 깨끗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 되고 구별되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창조성입니다. 잉여요 나누어짐 입니다.)

이쪽과 저쪽이 나누어 져서 이쪽은 저쪽으로 넘어올수 없고
저쪽은 이쪽을 넘어설수 없는
그 이전까지는 전혀 문제 없던 서로 왕래의 세계가
거룩의 등장으로 인해서 졸지에 서로의 왕래가 단절 된 상태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즉 분리 기준이 생겼다 라는 겁니다.
거룩(예수님)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두 패로 쭉 갈려지는 겁니다.
(거룩은 내 숙제가 아닙니다. 도리어 거룩에 의해 잠식 당해야 하는 겁니다. 거룩의 숙제 입니다.)

(벧전 1:13, 개역)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벧전 1:14, 개역)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벧전 1:15, 개역)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개역)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7, 개역)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8, 개역)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개역)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20, 개역)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 1:21, 개역)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 1:22, 개역)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 1:23, 개역)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4, 개역)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개역)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결국 창세전의 뜻이 실현이 되어서 명확한 분리가 벌어졌기에 이 쪽 세계와 저 쪽 세계가 갈라졌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몰랐죠. 모르니 비거룩입니다.

그러나 거룩의 실현으로 창세전의 뜻이 명료해 진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 거룩의 분리작업의 의미로 기도해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기도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 기도는 성경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기도는 도리어 누구의 이름을 개입 시키는 겁니다.
이름을 개입 시킨다는 것은 한 쪽의 이름은 삭제 되는 분리작업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이름은 삭제 당했기에 나타난 것이 기도입니다 라는 분리된 완료성입니다.

만약 이루어질 줄 알고 믿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농담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도는 대부분 도박입니다. 그냥 한 번 툭 던져 보고
이루어지면 좋고 안 이루어지면 그저 울분에 찬 속앓이를 할 바에 배설하듯이 토해내는 식으로 하는 것이 인간의 기도 인간의 이름이 개입된 기도입니다. 다 자기 이름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사건이 닥치면 누구든지 기도의 본능에 몰두 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숙제로서 개입된 예수님 이름의 기도입니다.

자 예로 바울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였던 그가 기도의 달인 아닙니까?
그러나 아무리 기도의 달인이여도 그 기도 소용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개입이 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은 바울 본인이 기도로써 핍박했던 겁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바울이 새로운 기도를 합니다.
그 이전에 단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기도입니다.
예수님 이름의 개입의 기도입니다.

그 이름의 기도 때문에 지금 이런 사태가 벌어졌고 그 기도대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바로 붙이심의 전쟁 의미입니다.

물론 이 붙이심의 전쟁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펼친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 개념이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더 구체화 되어서 영적인 전쟁으로써 예수님 이름의 전쟁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전쟁이라면 상대적으로 인간의 이름이 가장 번성하고 그런 이름을 찬양하는 그 태풍의 한 복판에 가야만 그 차이성이 드러나죠 곧 거룩이라는 분리와 구별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참 희한한 일이 생깁니다.

(행 26:32, 현대어) 『아그립바도 베스도에게 `그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지만 않았더라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 걸 그랬소' 하고 말하였다.』

아그립바 2세 왕이 베스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무조를 입증할려고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벌써 자유로울텐데
괜히 상소해서 미결(결정이 미완료상태)임으로 여전히 구속 상태다 라는 겁니다.

괜히 상소 했어 괜히 상소 했어 어떻게 어떻게 라고
바울이 걱정하는게 아니라 남이 걱정합니다.
그것도 바울을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를 이익이든 정치력이든 힘이든 어떻게든 자기들의 입지를 넓혀볼려고 그렇게 이용해 먹던 자들이 도리어 바울을 걱정합니다.

그것은 사실은 걱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자유라고 보고 있고
바울은 구속되어 있으니 자신들이 훨씬 편리하게 살고 있다 라는 차이성을 드러낸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의 생각입니다.
도리어 저들이 구속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바울이 분명 구속 되어 있으면서 자신은 자유롭다 라는 겁니다.
어느정도로 자유로운가? 철저하게 말씀에 인도함을 받는데
그것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육체의 편리는커녕 모든 편리가 반대로 육체의 불편을 오히려 벌고 벌고 버는 듯이
고생 고생 생고생은 바울 신체에 다 담겨서 완전 반대의 길로 가는 것을 자유라고 바울은 보고 있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생각이지요.

이것의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라는 무거운 나무를 어깨에 매고 질질 끌고 가시면서 때론 넘어지고 때론 너무 힘에 부쳐서 멈칫 멈칫 할 때

뒤에 졸졸졸 따라다니던 아낙네들이 조잘 조잘 한 소리를 합니다.

아이구 청년 안타깝네
괜히 권력에 대들다가 아까운 청춘 다 날렸네 그려
좋은일 많이 했지 싶은데 돌아오는 것은 개죽음이네 그려 라고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남생각 해준다는 것이 도리어 입방아 올려서 재잘 재잘 거리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자들의 본능이니 어쩔수 없습니다.

제가 버스를 타고 다니면 여자들은 비밀이 없기 때문에 자기 집 가정부터 남의 집 까지 모조리 다 줄줄줄 새는 바가지처럼 별에 별 온갖 것들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볼모로 잡혀서 남을 협박하는데 좋은 미끼가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속성이 교회입니다. 신부입니다. 여자입니다.

바울은 천기누설을 합니다.

(행 26:22, 개역)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행 26:23, 개역)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구약에서 유대인들 조차도 몰랐던, 그 속에 바울 본인 당사자가 그 유대 속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이 유대인 이면서 유대인들이 몰랐던 그 하나님의 비밀을 세상에 세상에나 바울이 알아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 유대인들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 또 할말 있죠. 바울 본인이 핍박자 당사자입니다.

그러니 모순에 모순에 말도 안되는 말도 안되는 길을 골라 골라
안믿겨지고 안믿겨지는 것만 골라 골라 바울에게 덮쳤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천기누설인 예수님입니다.

자 그럼 바울은 비밀을 다 말하고 다닐 수밖에 없지요.

미끼가 되는 겁니다.

참 옆으로 빠졌네요

예수님이 그래서 재잘 재잘 거리는 여인네들에게 짠 하고 뒤돌아서 한마디 합니다.

날 위해 울지 말고 너 자신과 너거 자식을 위해 울라 라고 말입니다.

지금 남 걱정 할 때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8명 죽으니 다들 안죽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반증으로
죽은자를 저주와 연계시켜서 왈가 왈가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내일은 너 차례인데 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듯이
예수님은 지금 종말을 완성하러 신나게 가시는데
종말이 덮치는데서 아예 관심없는 여인네들이 내일 떨어질 불 보다
예수님 걱정하고 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눅 23:26, 개역)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눅 23:27, 개역)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눅 23:31, 개역)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구절을 찾다 보니 오늘 본문과 딱 일치하는 내용임을 다시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의 자유성을 저들은 비자유성으로 보고 있고
반대로 바울은 저들에게 닥칠 종말을 바울은 미리 앞당겨 보고 그 완료를 외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완료 속에 들어가는 것을 거꾸로 보고 있는 여인네들의 시선을 도리어 걱정하시는 겁니다. 정말로 울어야 할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말을 곧 완료를 곧 거룩을 곧 분리됨을 못 보는 그 안타까움을 예수님께서 우시는 심정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가 글에서 한번 언급했지 싶은데요 이번주 대구강의 월요일에
조권사님이 할례 이야기를 하시면서
저는 권사님이 알고자 하는 행함의 차원이 아니라
그런 의미에 동의를 하지 않고
그 반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거룩이 분리 개념이지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한 행함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는 곧 세례가 되고
세례란 분리 개념입니다. 곧 거룩 개념입니다.

선지자에 해당되는 세례요한은 이름까지 세례 라는 의미를 붙이면서 그가 하는 작업은 바로 분리 작업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의 할례를 행한 이스라엘을 철폐 시키고 다시 이스라엘을 새롭게 출발하자 라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풉니다. 곧 기존 이스라엘과의 단절성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존 기독교 정통이니 뭐니 개혁주의니 뭐니 하는 것과의 단절성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이면 백 이단이 되는 셈이지요.

왜냐하면 이단이란 결국 어디든 소속되기 마련인데 역사적 시간적 개념으로 볼 때
누가 봐도 이단적인 속성이 가득한 곳에 소속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여기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단절이 되어서 딴 집단에 소속이 되어 이단이 아니라
그 딴 집단 자체도 기존의 집단과 같은 집단이기에
단절 된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구약 이스라엘은 단 한번도 할례 행한 적이 없습니다.
즉 단절 된적이 없습니다.
즉 구별 분리 된 적 없는 거룩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한 번이라도 1초라도 된 적이 있다면 구지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이란 구별 분리란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밝혀지고 아 저것이 진짜 거룩의 의미이구나 라고 예수님이 이룬 십자가를 통해서 거룩의 의미를 알게 되어 있지

그 이전에는 거룩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도리어 거룩의 반대인 완악함의 결정체로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 발휘 할 수 밖에 없도록
율법 아래에 갇히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갇혀야 예수님이 열쇠 가지고 풀수 있지요.

그래서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으러 왔는데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어라 아무도 없네요?

자 아무도 없음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반응을 못하게 되었으니 예수님이 별수 없이 실패 했네? 아이구 꼬소 하구나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비아냥 거릴수 있습니다.

또는 반대로 과거에 선배들이 그랬지만 우리는 그러지 말자 반응을 나타내자 라고 나오는 무리들이 성화론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실패 했다라는 이미지가 안되도록 우리 쪽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자 라는 그런 무리들이 생깁니다.

이것도 웃끼는 집단들이지요.

예수님을 뭐로 알고 이런 사기를 펼치는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예수님 본인이 아무도 없음을 입증했습니다. 이것 조차도 예수님의 성공입니다.

그래서 실패가 아니라 성공임을 예수님 본인이 창조주로써 아예 돌덩어리를 아브라함 자손 만들 듯이

창녀 세리 강도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 합니다. 새이스라엘이 안 생기고는 못 배깁니다.
창조주의 호출에 의해서 잃어버린 양들이 모입니다.

그 자가 바로 뿌스래기 잉여 남은자입니다.
그렇게 되니 팔을 어긋맞게 되듯

기존의 이스라엘이 가짜가 되고
개같은 이방여자 뿌쓰래기 여인은 잃어버린 양이 되는 겁니다.

임신치 못한 자가 남편도 없는 과부임에도 불구하고
남편 있다는 그 여인 보다 자식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고

남은자의 반대 개념인 빼앗기는 자도 예수님 자신의 숙제로 충실히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잃어버린 자기 양을 새롭게 만드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버리움을 당하는 자도 새롭게 만드심에 충실하다 라는 겁니다.

실패는커녕 더욱더 명료하게 선이 시원하게 그어지는 겁니다.

바로 이런 선을 그어서 분리시키는 명료하고 명확한 완료 이미 성공 이미 넉넉하게 이긴 그 완료성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 바울이라는 미끼입니다.

천기누설을 하는 미끼요.
저들을 자극 시키는 볼모요
구약으로 치면 붙이심의 전쟁이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이름 전쟁이요
하나님 나라 전쟁이요
영적 전쟁입니다.

예수님 이름만 딸랑 있으면 안됩니다.
상대방을 설정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이름입니다.

그 인간 이름을 설정하는 것 또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에 자기 이름 쭐떡 미끄러지듯이 보기좋게 삭제 당한 그 당사자
바울을 그 미끼로 삼아서 천기누설을 하는 겁니다.

비밀을 말해 버리면 반드시 그것이 약점인줄 알고 바보같이 넙죽 잡아버리는 놈들이 생기는 겁니다.

마치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를
뱀이 어떻게 소개를 하는 고 하니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으면 너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 라는 식으로
천기누설을 한다는 겁니다.

아니
천기누설을 한다고 천기누설이 된다면
그것은 천기 곧 하늘의 비밀이 아니라
인간들이 조작해 낸 땅의 비밀인 셈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먹음직의 반대인 안먹음직 침뱉음
보암직의 반대인 안보암직 고개돌림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의 반대인 안풍채 안아름다움 싫어버린바 되는 모습으로써

예수님이 등장하시는 겁니다.

천기누설에 귀를 쫑긋세우는 인간의 탐심을 배경으로 깔고
천기누설된다고 해도 천기누설 되지도 않는 그 하늘의 비밀이지만
인간의 세계 땅의 세계 육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무슨 비밀이 된다고 착각하도록
더욱더 예수님께서 유발케 하면서 비밀을 깔고 등장 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생이라고는 죽을 고생을 아예 지금 이 순간에 몇수십년치를 한꺼번에 다 받는냥 남들의 시선에 보이도록 하고 그런 시선과 인식과 가시적인 판단을 깔고서 이끌림을 받는 겁니다. 그래놓고 비밀이다 라는 식입니다.

그럼 이 비밀을 모르면 끝장나는 겁니다.

거기에 바울은 놀려먹듯이 나는 알지롱 그 비밀
그러니까 너거들이 갇혀 있고
너거들이 구속되었다고 보고 있는 나 바울이야 말로 진짜 자유롭다 라는 식입니다.

자 그럼 자유롭다면
자유가 나타나야지요?

날 위해 울지말라 너와 너 가족을 위해 울어라 라고 했으면
예수님은 울지 않는 일이 벌어져야 겠지요?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비밀이기에 풀수가 없는 겁니다.

날 위해 울지말라 했으면 울지 않는 일이 벌어져야 하는데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벌어지니
여인네들의 걱정이 맞지 않나요? 울어줌이 맞지 않나요?

바울이 오늘 27장에 저들 걱정처럼 상소만 안했어도 자유롭게 될텐데 이 기회를 놓치게 되었으니 안됐구나 라는 안타까움이 틀렸고
바울이 더 자유롭다면 자유로운 현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어랍쇼? 더 풍랑을 만나고 더 죽을 고비 고생을 더 많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라는 자들에게서는 자신들의 생각이 맞다고 여겨질 것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저들의 시선에서 더더욱 격차를 벌리고 있다 라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더 쩍쩍 벌려서 극과 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도저히 썩이지 못하도록
물과 기름처럼 딴세계로 이쪽과 저쪽 세계가 서로의 소통과 이동이 불가능하도록
단절에 단절
엎친데 덮친격으로 단절의 단절, 분리에 분리, 간격 벌리기에 더 벌리기를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선지자는 곧 성령을 받은 자는
그렇지 않은 곧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의 판단에서
더더욱 어떠한 일치성이 없도록
교차점이 없도록
이해 소통이 없도록
간격을 더더욱 벌리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 곧 성령이 주체가 된 일이다 라는 겁니다.

은사가 바로 이런 식입니다. 은사는 반대로 인간들의 육의 결속력에 상대적으로 나타납니다.

육의 결속력 집단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성화론자들인데
그 성화론의 이론을 배워보면 완전히 은사와 정반대임을 보게 됩니다.
그 예로 가장 쉬운 예가 바로 선물이란 우발적입니다. 그렇기에 포착불가입니다.
할례를 행할수 있다 라는 착각이 어디서 올까요? 육의 생각에서 오는 겁니다.
결국 마귀가 심었다는 겁니다. 죄가 인간을 다루지 인간이 죄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알려주는 방식인데
인간은 반대로 율법을 다룰려고 합니다.
율법이 알려주는 그 소리를 들을 려고 하지 않고
율법 지킬려고 포착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이 알려주는 죄가 뭔지 모르는 겁니다.
율법은 죄는 너를 장악할꺼야 라고 알려주는데 말이죠.
그래서 양심과 율법 때문에 죄를 더 죄 되게 하고 죄 아래 다 두어짐을 당하는 겁니다.

그것이 기쁜 소식입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의미이니까요?

그런데도 아니야 나는 율법을 지킬꺼야
남들은 다 안지켜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안 버릴꺼야 라고 율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느니
율법에 장악당한 것 맞잖아요?

마치 불뱀에게 다 물리도록 불뱀을 푸니까
죽게 되는 비거룩한 자임을 알게 되듯이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완악하면 불뱀에 물려도 때려죽어도 자신은 환자 아니다.
죄인 아니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니 장대 높이 달린 주님의 약속을 쳐다볼 이유가 없지요.

뱀에게 물렸는데 뱀 쳐다 보라고 하니
그저 모순으로 보이는 겁니다.

맞습니다. 일부러 모순적으로 부정적으로 불륜적으로 하시는 겁니다.

왜? 안 쳐다 볼 것이다 라는 것을 아니까요

지금 바울은 남들이 걱정하는 비자유성을 도리어 자신이야 말로 제대로 자유 누린다 라고
불뱀에 물려 쳐다봄을 누리는데

도리어 바울이 보기에 저들이 불뱀에게 물려 놓고도 환자 아니다 죄인 아니다 라고 하니
장대높이 달린 구리 놋뱀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 필요 없음에 저들이 도리어 동원이 되었다 라고

구별된 생각을 성령으로부터 받아서 하게 되는 겁니다.
거룩한 생각을 성령으로부터 받아서 하게 되는 겁니다.
단절된 생각을 (이 쪽 세계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이 저 쪽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식으로가 아닌 도리어 그 반대로 아예 단절에 단절으로써 쭉쭉 사이를 벌리는 극과 극으로 치닫게 하는 생각을) 성령으로부터 받아서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매를 더 맞음을 도리어 기쁘게 여기는 겁니다.
왜?
자녀이다 곧 간섭하는 잔소리꾼 아버지가 있다 라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저들은 잔소리꾼이 없기에 사생아 라는 겁니다.

매를 대심으로써 자녀임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생각할때마다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이 늘 생각 납니다.

아니 세상에 아이가 분명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부모가 없습니다.
부모가 있어도 아이는 자기가 자기인생을 챙기는 그 딱딱한 사랑챙기기에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 그야말로 무거운 짐진자 로써 아이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매 맞는 징계의 자리에 있는 자녀는 부모가 있기에
매를 맞아도 괜찮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는 아버지가 있는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니
비로소 인간들이 생각한 아들 개념 신개념 하나님 개념이 다 들통나면서 다 깨어지는 겁니다.

인간들은 매 맞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무에 달려 저주 받는 모습을 통해서
비로소 아들이 아니다 라는 그 판단을 하게 됨으로써 인간 속에 가짜 하나님이 있음이 밝혀집니다.

십자가 는 그런 취지입니다.

너 마귀 씌였어 라고 알려주시는 유일한 천기누설입니다.

율법도 이런 취지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 완성이듯이
너 마귀 씌였어 라고 말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율법 지키기 바쁘니까
율법이 말하는 소리를 못 알아먹는 겁니다.

이번주와 지난주 내내 어머니와의 대화가 이겁니다.
자기 기도 하기 바쁘니까 예수님의 기도를 못 듣는 겁니다.

그러니 웃끼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기도하면서 주시옵소서 뭔지 몰라도 그저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
그 기도 하기 바빠서 성령의 탄식과 예수님의 기도를 못듣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기도 내용이 뭔가를 대신 알려 줬습니다.

어머니가 기도하면서 주시옵소서 라고 자기 기도 채우기에 몰두해 있을때에
성령은 바로 옆에서 이렇게 탄식 하십니다.
주시지 마옵소서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다 땅의 것입니다. 하늘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가막힌 표현이 이겁니다.
자식이 그래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 주는 부모 어디있냐 라는 겁니다.
아무리 악해도 좋은 것을 주는 것이 부모 아니냐 라고

달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라는 이 말을 또 오해하고 그거 하면 된다고 보는데
그 말이 아니라 관계성을 말하는 겁니다. 부모자녀의 관계는 거례 관계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모르기에 성령을 주신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놀랍게도 지금 오늘 본문처럼
반대의 달라고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를 성령받으면 그것이 자유가 아니라 속박 당한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전에는 그렇게 안 보였는데 말이죠.

또 반대로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속박이 바울에게서는 자유로 느껴집니다.

어쩜 그리 반대 인지?

바로 이런 성령은 일하지 않음으로써 받게 되는 겁니다.

만약 일해서 받은 성령이라면 거래일 뿐입니다. 거래 충족해서 얻은 당연한 일한 댓가요 자신의 일한 잉여물이 성령이지, 선물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선물이 바울을 가지고 놉니다.
우발성이 곧 포착불가인 바람 이 바울을 가지고 놀지

바울이 바람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소유 안됩니다.
이것이 저는 정말 매일 매일 까먹으면서도 매일 매일 놀랍게도 알게 됩니다.
뭔고하니 성화론자들을 보면 매일 매일 잡을려고 합니다.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정당성으로 말들려고 하고 필연성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물론 저도 그 버릇 어딜 가지 않습니다.

그런 갇혀있는 저인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막상 받으면 그 필연성이 날라가버립니다. 그 당연성이 날라가 버립니다.

도리어 주여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나오지
저는 의인이기에 당연히 성령 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구원 받아야 합니다 라는 소리가 안 나옵니다.

도리어 심판 받아 지옥 가야 망해야 함이 아무리 봐도 백부당 천부당함을
성령을 받아서 비로소 나오게 되는 고백이지
성령 받지 않으면 즉 성령이 나를 소욕하지 않으면 곧잘 내가 성령을 소욕해서
구원의 정당성 그런 정당성에 의한 신학과 교리와 성경지식을 펼치는 성화론자들과 다를바 없이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소욕이 나의 소욕과 매일 매일 싸워서 성령의 소욕이 이김으로써

후패함을 당함으로써 알게 되지
두 소욕이 멀쩡하게 어떤 충돌도 없이 지내는 법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 취지로써 두 소욕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인 겁니다.

한 쪽 세계의 소욕은 자유롭지 못한 바울을 측은지심으로 여깁니다.
그 기준은 매 맞지 않는 징계 없는 사생아 같은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은 다른 한 쪽 세게의 소욕 때문에
신나게 매 맞고 징계 받고 더 죽음과 맞딱드리는 죽음이 떨어지지 않는 죽음 속을 걷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아들 됨이라는 아버지의 손길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아들에게 소욕 당하지 않는 아버지의 손길입니다.

이것이 세례 곧 연합 하나됨입니다.
하나 됨이란 한 쪽이 삭제 당함으로써 매맞음으로써 징계받음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겁니다.

왜 종말을 완료하셔야만 하는가
왜 우리를 심판으로
바울을 고난으로
몰고가셔야만 하는가?

라는 그 아버지의 마음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운명에 하나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이래 이야기 하면 그래 내가 십자가의 길 가겠어 라고 또 자기가 십자가의 길 가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길을 자기가 설정한다면 헛걸음질 하는 겁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 못 갑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또 매일 매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것 쳐다 보니 저절로 가게 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그 십자가의 길 가신 예수님을 안 보니까
즉 안 본다는 것은
자기가 설정한 십자가의 길 가는데 정신 팔려 있다 보니까
자기가 자기 꾀에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숙제가 아니고 내 숙제란 일체 없습니다.
예수님의 숙제 뿐입니다.

보십시오 그러니까 목표가 결국 다르다 라는 것이 나옵니다.

내가 내 스스로 설정한 십자가의 길
기도
찬양의 삶
성도의 삶
이런 것들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합니다.

결국 자기 챙기기를 한 겁니다.

스스로 시험 듭니다.

그 예가 모세가 지 스스로 불당겨서 다 타버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따지는 겁니다.
바로 그런 모세의 비언약성을 깔고서 일부러 매맞는 자녀 삼고자
가시떨기나무를 앞장세워 등장하시는 겁니다.
반드시 그 가시떨기나무를 통해서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이지요.
꼬끼오 세 번에 넘어간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세 번 반대로 사랑하제? 맞제? 맞다카이? 라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쳐들어 오는 식으로 베드로를 다루시는 겁니다.
왜죠? 베드로가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 장담하다 쭐떡 미끄러진 그 꼬끼오 세 번 사건을 삭제 단절 지우기 하는 식으로 와야만
연합 세례 하나 됨을 주님이 주도권 숙제로써 이루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바울은 자기 목표가 아니라
자기 숙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숙제에 동원이 되어
어떻게 예수님이 자신의 숙제를 이루어 가시는지
내가 못 넘어서는 그 단절성
곧 숙제 못함 못성취를 가지고서 보기좋게 이루시는 겁니다.

자 27장의 예수님의 숙제는 뭡니까? 가이사에게 바울을 보내는 겁니다.
바울은 그 숙제를 어떻게 예수님이 넉넉히 이루시는지
바울 자신이 예수님의 숙제 과제 도구물이 되어서 (방학숙제를 하면 공작숙제가 있는데 그 재료로써 만들어지듯이) 나를 어떻게 뚝닥 뚝닥 만드시는지? 어떤 작품으로 만드시는지 그 솜씨를 보고자 우리의 시선은 나를 향할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할례 하는 내 손에 시선을 둘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으로 지으심에 압도 당해서 인간 손으로 짖지 않는 진짜 교회
진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원수의 성문을 너끈하게 여는 그 교회 완성
신부완성을
어떻게 신랑이 자기 사랑으로 이루시는지

그것을 바울은 그저 누릴 뿐입니다.

매 맞음으로써 아버지가 간섭하시는 아들 됨을 누리듯이 그것이 하나이듯이
어떻게 신랑과 각시가 하나가 되는지
신랑에게 전적으로 맏겨짐으로써
신부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내가 사랑할게 전혀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다음 시간에 가이사에게 보내어져야만 하는 주님의 숙제를 바울이라는 숙제용지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랑해 주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자꾸 흉내낼려고 어설프게 소유할려고 합니다.

죄가 있어야 하고 화목제가 있어야 하고 아들 곧 매맞는 자 징계받는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하나님 자신의 숙제를 무시하고
나의 숙제로 만들어서

죄도 엉터리로 만들고 화목제도 엉터리로 만들고
가장 결정적인 매맞는 징계받는 아들이 아닌
엉터리 아들을 설정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선악으로 삼아서 흉내내면서 남을 사랑을 커녕 남을 속일려고 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의 과거의 성화론 개혁주의 때의 모습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주님이 왜 징계 받으셨는지?

왜 화목제물이 되셔야만 하는지?

주님이 주님의 숙제로써 알려주시는

그 십자가의 비밀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이 땅에서 조금이나마 알수 있으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매를 대시는 그 사랑을 보도록 우리의 눈을 새롭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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