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7. 이미 완료된 예언 (창세전 예정)

창세전 예정 증식 (십자가 사랑)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오후 8:52:23   김대식


본문 : 행 28장

(행 28:23, 개역)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 28:24, 개역)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행 28:25, 개역)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개역)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사도행전 27장에서 특이한 것은 바울을 죄수로 삼아 로마로 이동하는데 있어서 누가 생고생으로 힘들어 하는고 하니 바로 죄수관리자 백부장이 힘들어 합니다.

어느 정도로 힘든고 하니 바울 때문에 별에 별 일들이 벌어지는데 있어서 바울을 반드시 로마에 넣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방인 왕 고레스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또 이 부분에서 누가 생각이 나는고 하니 요나 선지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고레스를 여호와 하나님이 메시아로 삼아서 성전을 짖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도록 하십니다. 물론 그렇게 세운 성전 조차도 다 부셔뜨립니다. 왜 부서질 성전을 고레스(여호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나라 왕을 메시아로 삼아서)를 통해서 지을까요? 어차피 부서뜨릴 것인데?

성전이란 부서지라고 부셔져도 상관이 없다고 짖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죽어도 상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참 몸 참 성전이 이미 완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완료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하는 것과
어차피 부서질 것 할 것 없네 라는 식은 두 사고방식을 말해 주는 겁니다.

인간의 노동이란 댓가성을 바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완료된 것을 보여주는 식이라면 그 완료에서 두 패로 나누어지는 패가름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행함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패가름이라는 걸림돌을 원치 않아서 본인이 그 걸림돌 곧 실족케 하는 방식을 빼 버립니다.

왜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서 그것을 몽땅 남이라는 타인 곧 이웃에게 주지 못합니까?
만약에 그거 가지고 있으면 소용 없는 겁니다.
남을 위해서만 의미가 있고 자신이 소유하면 의미 없고
사랑이 그러합니다.

또 사랑은 미움과 편애의 가름길이 됩니다. 둘 다 똑같이 공평하게 하면 별 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쪽을 섬기고 사랑하면 저쪽은 저절로 싫어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두 주인을 못 섬기고 못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함 곧 노동이란 정치이기 때문에 공평성의 분배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루신 행함 곧 창세전의 예정 성취는 철저하게 불공평합니다.
나누어짐이 벌어집니다. 창조입니다. 갈라짐이 벌어집니다.
두 패로 나누어집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라는 예정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렇기에 가는 곳 마다 사건이 발생합니다. 곧 창조가 발생합니다.
갈라진 그 틈에서 창세전의 예언의 성취를 확인케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창조 곧 창세전에 예정된 말씀의 성취가 땅에서 두 갈래의 패거리로 나누어짐으로써 벌어지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바울은 바로 그런 역할로써 예언이 여기까지 성취 되었다는 하나의 푯대깃발처럼 작용이 되는 겁니다.

바울이 깃발꼿이처럼 땅에 박히듯 말입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땅은 일종의 점령당하는 지역으로 나타납니다.
로마가 사도행전의 점령지로써 마무리가 되지만 사실상 이런 식으로 점령 당한다 라는 식이지 끝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래 이래 당한다 라는 선전포고입니다.

바로 그런 로마를 향해 가면서도 폭풍을 만나서 배가 파산하고 요나처럼 이 일이 하나님이 벌리신 자작극인줄 알고 바울은 배의 흐름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파도의 흐름에 따라 이동 당합니다. 그리고 어느 토속 부족마을에서 독사에게 물렸음에도 불구하고 안죽으니까 토인부족인들이 바울을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타인들이 보기에 신이라고 여기는 사건이 발생할까요?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바울은 또 그 섬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 라는 사람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있기에 기도와 안수로써 병을 고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그 섬을 지나던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서 로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이사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그것으로써 마무리를 빨리 급하게 짖듯이 마무리가 됩니다.

법정에 섰으면 그 내용이 구구창창하게 길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예언대로
성취 되었다 끝

이런 식입니다.

마치 하나의 정점을 찍고 후다닥 물러가는 식입니다.
바울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을려는 의도처럼 말입니다.

분명 폭풍이 불어서 여차 여차 하여서 바울의 이동을 세밀하게 기록하고서 또 그 와중에도 어느 토속부족마을에서 신이라 불리우고 병까지 고치면서 그런 세밀한 상황까지 다 기록하였는데 로마에서 가이사 앞에 서는 그 부분 부터는 급작스럽게 마무리가 됩니다.

말씀 성취가 중요하지 그것에 바울은 하나의 장기알처럼 이동 당하여서 정점을 찍고 뒤로 물러 빠지는 식이지

바울이 또는 인간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바울 조차도 자신이 그렇게 많은 능력으로 신으로 까지 불리울 정도면 많은 능력으로 성과를 이룬 그 상황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허무하게 듣는자 듣고 안 듣는자 안 듣는 이사야 예언이 맞구나 라는 것을 바울 조차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짐으로써 말씀이 옳았다 하고 자신은 바로 이렇게 두 패로 나누는 말씀을 앞장세우고 바울 자신은 말씀 뒤로 빠지는 식입니다.

왜 이런 식이며
왜 이런 것이 중요하냐 하면

예정을 인간이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길수가 없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예정론을 언급할때의 특징이 항상 자기 사적으로 예정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정론자의 예정론은 다 엉터리입니다.

결국 기존의 기독교이든 어떤 종교이든 구원론은 다 엉터리 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구원론에서 나온 성령론도 결국 사적인 구원을 위한 성령론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이 사도행전의 마무리 부분에서 놀라는 것은
바울 자신이 창조함을 당하는데 있어서 자신 자신이 두 패로 찢겨진다 라는 점입니다.
바울 자신이 창조함을 당함으로써 매일 매일 둘 로 나누어짐을 당하는 속에서
말씀이 비집고 들어옴으로써 이동 당하기에
바울이 자신의 구원을 바란다는 그런 사적인 생각은 일체 할 수 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그에 비해 인간은 성경만 펴면 자기 구원 챙기는데 있어서 항상 고상하게 거룩하게 예정을 언급합니다. 물론 자기에게 불리한 예정은 아예 쳐다보지를 않고 적극적인 거부감만 가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듯이 바울을 보십시오
불리한 예정 뿐입니다.

곧 징계입니다.

창조란 아들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아들은 징계받는 아들입니다.

왜죠? 말씀 성취 때문입니다.
이미 완료된 말씀 때문에 자신은 찢겨져도 상관없음을 완료 때문에 격게 됩니다.
완료는 완료인데 나를 찢지 않는 완료 곧 예정은 싫타 라는 것이
모든 예정론자의 시선입니다.

그 대표성이 바로 유대인 선민 의식입니다.

그들은 맞더라도 억지로 참아서라도 아들 됨으로써 징계 받음으로써 에정을 이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 독생자의 징계는 거부했습니다.

인간은 독합니다. 예정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징계까지 감수하겠다고 나섭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딴 사람은 몰라도 나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런 선민의 사고방식을 예수님께서 하찮은 닭으로 세 번 부인케 하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자신이 이룬 성취물로써 자신을 창조할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이룰것입니다.
이런 짖을 오늘날 우리가 밥먹듯이 합니다. 성화론자 개혁주의가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안되도록 주님쪽에서 다가가는 방식인 십자가의 부정의 불륜으로써
베드로 방식에서는 도저히 넘을수 없는 부정함으로써 심판으로써
예수님만이 받는 징계로써 이룬 아들되심 곧 내어주심으로써 베드로에게 다가옵니다.

자 사도행전 마무리 부분의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이룬 업적을 기술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바울을 어떻게 창조했는가를 그 창조성을 두 패로 나누시는 방식으로써
바울에게 이렇게 창조했듯이 이 땅에 하나의 증표로써 남기시는 겁니다.

그럼 바울은 대표성으로써 창조되는 식입니다.

자꾸 제가 창조 창조 라고 하니까
이미 바울이 있는데 또 뭘 창조해 라는 사고가 생길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없습니다. 사건만 있을 뿐입니다. 곧 창조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때 마다 바울은 매일 매일 새롭게 발생이 됩니다.
창조때 마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말씀 성취입니다.
기록된 대로 예언된 대로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라는 식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기존에 있는 바울을 가져다가
개선을 시켜서 창조가 아닌 부족한 점 채워 보수 하는 식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인간이 구상해 내는 예정론 창조론 구원론 성령론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화론이 맞게 되는 식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없습니다.

참 이것이 어려운데 마침 어제 설교에 이것이 나왔습니다.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71강-렘20장10-13(쌍방복수)-jer100714.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71강-렘20장10-13(쌍방복수)-jer100714.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71강-렘20장10-13(쌍방복수)-jer100714.hwp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71강-렘20장10-13(쌍방복수)-jer100714.pdf

http://crosslamb.tistory.com/928

말로써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것을 잘 설명이 되었기에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없는데 정말 없는데
이것을 말로 우찌 표현할 수도 없고
참 없는데

그런데 상대방은 예레미야를 있다 라고 여기니까 맞고소를 하겠다는 식입니다.

자 여기서 법이란 인간이 유일하게 최종적으로 쥐는 겁니다.

솔로몬의 재판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인간의 악마성은 곧 법 앞에까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까지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겁니다.
결국 그런 것에 제일 법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누가 되겠습니까?

당연히 율법을 많이 지키고 말씀을 많이 남들보다 우월하게 많이 지키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법은
즉 법을 지키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법 자체의 시선은
양쪽을 창녀로 볼 뿐입니다.

창녀란 너무 너무 부정해서 그져 그져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용서해 주지 않으면
억수로 억수로 봐주지 않으면
허물을 덮어주지 않으면

당장 돌삐 맞아 개죽음 당해도 마땅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것이 법의 시선입니다.

그런데 괜히 법을 지키게 되니까
창녀 아닌 줄 착각하는 겁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영광을 이스라엘 중에 만났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중에 가운데서 그 중앙에서 만났을까요?
이스라엘은 창녀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뭐 구별되고 거룩한 족속이고 제사장 나라이니까 다른 민족과 다른가?
천만의 말씀이다 라는 겁니다.

구별 되고 거룩으로 쳐 주었고 제사장 나라 삼아 주는 것은
어디까지 여호와가 당장 밟아 죽여도 시원찮을 판국에 많이 봐 줬다 라는 겁니다.

가장 미약한 나라요 가장 소수인 민족을 일부러 택한 겁니다.
율법 지킬 것 아예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 아에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가장 더러운 민족 중에 가장 더러운 자를
마치 구스 여인을 모세가 긍휼로써 신부로 삼아 주었듯이
그져 그져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그런데 어줍짢게 한 가닥 안다고
모세 누나 미리암이 구스 여인을 취하는 것에 반대 하는
그 사고방식
나도 구원 좀 안다
나도 여호와 좀 안다
나도 거룩 좀 안다
나도 율법 좀 지킨다. 말씀 좀 지킨다.
바로 그런 의식 때문에
문둥병이 걸리는 겁니다.

문둥병이란 마땅히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미리암의 처음자리입니다.
우리의 처음자리입니다.
왜 요단강에서 다시 출발하자 라고 물 속에 참수 시킵니까?
우리의 처음자리가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 물 속에서 건짐을 받은
심판 속에서 건짐을 받은 그져 그져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 때문에 건짐받은자입니다.

그런데 어줍잖게 예정론 구원론 창조론 성령론 좀 안다고
처음자리 곧 죽어마땅한 심판의 자리를 발로 차버리고
그러다 보니 이웃을 멸시하는 자리에 서버리게 되는 겁니다.

곧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없습니다.
긍휼만이 그때 그때 있게 한 겁니다.

그런데 없는 예레미야
없는 바울
없는 이사야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를

자꾸 있다고 여기니까 없는자를 있다고 여기니 타인이 곧 지옥이 되고
그 타인은 나를 괴롭히는 자가 되니까?
법을 찾는 겁니다.

없는 자를 법에 고소해서 뭐하게요?

그런데 인간은 우찌하던간에 법을 찾는 겁니다. 상대방이 생겨버렸고
그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법이라는 최고의 힘을 자기 쪽으로 끌여들이는 겁니다.

저도 이런 의식 때문에 나중에 아차 하고 이게 아니였구나 라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끼인간은 인간이 법을 쥐는 그 입장까지 가기 위한 맞고소 유발케 하는 그야말로 광야인간으로써 또는 박한식물인간으로써 우리 앞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법정에서 세워 죽였듯이
또 다윗이 율법으로 4배나 갚아야 한다는 그 사고방식으로써 자신의 죄악을 율법에 감추었듯이

또 지금 바울을 가이사의 법정에 까지 인간들이 세우는 그 모든 의식은

바로 신과 같이 된 선악을 아는 인간의 법 찾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우리가 법을 쥐어도
법에 저촉받지 않는 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는 겁니다.

천사가 교통법에 걸립니까? 해당 사항이 되지 않습니다.
곧 교통법은 죄인에게만 해당 됩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자신을 고소하는 식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찢어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없습니다. 가인은 아벨이 아닌 자기 자신을 정죄한 겁니다.

법으로써 말입니다.

그래서 죄의 소원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법 안 쥐면 되는데

더더욱 법을 더 찾습니다. 심지어 하늘의 법 하나님의 예정까지 자신의 신체에 두루 두루 감아버립니다. 이마표가 그런 식입니다.

성화론자들이 바로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법적인 구원의 알리바이를 정당화 하겠다 라는 겁니다.

믿을 구석은 자기 행함이지
예수님의 행함은 나중에 딴소리 할 줄 모르니까 못 믿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믿음이 중요하지 예수님의 믿음은 그저 예수님의 믿음일 뿐이지 그 예수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될 수 없다 라는 따로 따로 국밥이요 하나의 대상물로써 모범으로 그렇게 따라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 믿음을 말이죠. 그러니 행함이지요.

예수님의 믿음을 진짜로 본 사람은 자기 믿음은 그 믿음 앞에서 날라가 버려야 함을 마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이 법을 찾는 이유는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최고의 힘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 나 여기 있다 떳떳하게 누가 나를 감히 건드려 라는 의식입니다.

문제는 그래 너 있다 라는 것을 너는 법으로 증명할려고 하지만

예레미야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없습니다.
바울도 없는 겁니다.

그럼 뭐만 있습니까?

말씀만 앞장 세우고 예수님도 예레미야도 바울도 다 뒤로 빠지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말씀을 상대로 법적인 투쟁을 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말씀 조차도 없습니다.

그 말씀은 창세전의 예정 만 있습니다.

곧 인간이 법을 쥐기 전
그리고 인간이 다 사라지는 먼 미래

이 창세전 과 미래 완료가 다 이루워 창조하는 마당에
인간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상대로 겨우 최종적인 할 짓은
자기가 자기를 잡는 법 쥐기 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도 없는 상대방을 맞고소 하면서 말이죠.

법에 저촉이 될려면 상대방이 있어야 죠

그런데 법을 쥔 인간만 있을 뿐
상대방을 고소한 그 상대방은 없는 겁니다.

너무 너무 놀라운 것은 졸지에 창세전의 예정을 결국 고소한 셈이 되는 겁니다.

바울은 없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창조함을 당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최후의 보루에서 법을 쥐고 바울을 고소를 할 때
바울은 정작 없고

바울은 비켜가고 인간은 고소는 창세전을 향하여 예정을 고소하게 된 셈이니
결국 자신의 처음자리를 자기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식이 된 겁니다.

자기가 태어난 원천을 발로 차버림으로써 자동적으로 사생아 임을 자기 스스로 증명하게 된 셈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법을 쥐고 찾는 인간 곧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입니다.

도리어 그 바울은 그 상대방의 저런 본색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도리어 얄밉게 그 창세전의 예정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 됩니다.
없는데서 있게 됩니다.
무에서 유로 창조가 됩니다.

그러니 바울의 고백은 딱 하나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그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응하여 짐을
그 말씀이 지금 나 바울을 창조함을 창조당하면서 보게 됩니다. 나누어지고 분리 됨으로써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예정론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일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을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길 문제가 아닙니다.

도리어 죽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결국 마땅히 죽어야 함을 아는 자는 주님이 찾아 헤메이는 양이고
예정 따지고 구원 따지고 믿음 따지는 자는 주님이 버렸기 때문에 그딴거를 따지는 겁니다.

자신이 있다고 여기니까

예정을 안 쳐다보고
불쌍히 여기심을 안 쳐다보고

자기 있음을 더더욱 견고하게 하고
정당화 해주는 것을 뽑아내는 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식으로 너희도 창조함을 당한다 라고 찢겨지고 두패로 쪼개지고
사건 곧 창조 앞에서 홈페임 당함으로써 우리에게 맛배기 샘플인간으로써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소욕을 철저하게 육의 소욕과의 대조로써 사도행전에서 보여줍니다.

인간은 법을 쥐고 없는 바울을 법에 고소하지만
바울은 빈자리에서 처음자리를 주장합니다.

그 원천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창조당함입니다.

이것만이 예정 된 겁니다.

너희가 죽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라는 겁니다.

이 외침에 성령은 일체 양보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가짜 믿음이 구원을 예정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도

십자가 라는 창조 곧 창세전의 예정인 십자가 앞에서는
허용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로써 사도행전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성령께서 다루시는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일하심이 너무 너무 놀랐습니다.
우리가 싫어하고 치워버리는 그 걸림돌인 십자가를

성령은 이 십자가 라는 예정을 앞장세우고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이룬 사랑을 일체 양보없이 또한 한치 오차 없이
말씀 그대로 이루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힘 찾고 법 찾고 그 앞에서 허물어질 것만 찾고 있으니
모든 것이 허물어 지는 모래 위에 짖는 허상만 찾게 됨을 봅니다.

우리의 반석은 바로 심판 속에서도 견고한 주님의 약속이오니

그 약속만 옳았음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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