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4. [대상 vs 하나(=동행)]의 차이와 그리고 바울의 변명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오후 5:54:26  김대식


본문 : 행 25-26장

지난 시간에 벨릭스 라는 총독에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에 대한 고소로 인해서 바울은 벨릭스와 대면하게 됩니다. 나사렛 이단 괴수 라는 죄목입니다.

유대인인 대제사장 아니니아는 거룩이라는 문제로 종교적으로 접근하지만
즉 거룩한 질서를 깨는 자에 대한 이단성으로 법을 끌어당기지만
(법도 대상, 마귀가 율법을 쥐는 이유. 결국 법을 대상으로 이용하는 취지도 자기를 위한 것일 뿐, 믿을 구석은 자기 뿐 = 우상))

정작 정치꾼들은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돈입니다. 힘입니다. 대중에 대한 인기입니다. 종교가 거룩하든 말든 그저 거룩도 돈 되면 이용해 먹겠다입니다.
(그렇게 법적 고소를 해도 정치꾼 조차도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진지함이란 없음. 결국 돈이란 모든 것을 대상으로 보도록 하는 참 좋은 부정적인 도구,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수 없는 두 주인이란 없다는 의미)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유대인(종교인)이든 헬라인(비종교인 일반인)이든 항상 예수님과 복음을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겁니다.
어떤 유익이 되느냐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느냐 그렇지 않고 배격하느냐?

그러나 십자가는 미련함과 어리석음으로 하나 된 모습인 심판받은 모습으로 일관 합니다.
바울은 저런 유대인과 헬라인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도리어 유대인과 헬라인의 장난감으로 구경꺼리로 조롱꺼리 미끼로써 취급당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역사처럼 하나님과 동행 때문에 말이죠.)

즉 십자가는 반드시 이 양쪽 두 패거리의 속성을 배경으로 깔고 등장합니다. 저런 배경을 깔지 않고서는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한 쪽은 종교적으로 기적 따위를 구하는데 있어서 거치는 실족케 하는 걸림돌로써 또 한쪽은 지혜를 찾는데 있어서 미련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써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주 되심은 곧 하나 됨 곧 십자가는 마귀의 3가지 시험의 상황을 배경으로 카페트로 깔고서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3가지 시험을 받을 때 마지막 시험이 바로 정치 문제입니다.
임금 삼아 줄테니 대중이 베푸는 그 인기성에 절하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대중의 권력을 하나에 집중 시켜 주겠다 라는 겁니다.

특히 서양의 임금 제도의 특징은 인기도에 의해 왕의 수명이 좌우 됩니다.
대중으로부터 인기 없는 임금은 쥐도새도 모르게 밤에 목을 짤라버립니다.

그래서 마귀의 3가지 시험 중에서 정치란 곧 인기요 유행이요 힘입니다.

자본주의가 각자 하나 하나가 왕 자리를 앉아버렸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노예 곧 종 개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사 가 충돌하여 문제가 발생해도 서로 서로의 왕 자리 확보에 있지(누가 누가 많이 영역확보하나?)
노예 자리 서로 확보 할려는 의도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 개념입니다. 너 따로 나 따로, 결국 너 왕의 영역 침범불가, 나 왕의 영역 침범불가, 선을 긋는 겁니다.
그 상태에서 사랑실천이든, 믿음과 행함 충성 봉사든 교회 다니기 기도 찬양 금식 회개든 하자 라는 식입니다.
왜?  기도든 사랑이든 믿음이든 모든게 대상이니까 말이죠. 곧 그말은 자기는 따로 따로다 라는 겁니다.

(이것의 반대가 바로 하나 또는 동행 인데 곧 섬김 개념의 종 개념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 입니다. 서로 서로 종 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자아를 없애라. 자아 없애면 불교처럼 무 사상인가요? 아닙니다. 자아를 없애면 곧 자기를 부인하면 동행이 보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이 보입니다. 결국 주인과 종 의 섬김관계란 주인의 그림자로써 종이다 라는 겁니다. 그 종은 누락사상의 총화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써는 불가능 하기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성령은 심판이라는 부정성 곧 자기부정케 하심으로 인해 하나로 묶어 버립니다. 사적인 영역이란 있을 수 없도록 말이죠.)


마침 오늘 건희아빠랑 저랑 강이아빠랑 만나서 점심식사는 냉명으로 맛있게 먹은 후에
고맙게도 건희아빠가 어제 설교에 대해서 너무 어렵다고 질문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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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과 [하나=동행]의 차이성 이였습니다.

대상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하나 개념을 모르겠다 라는 겁니다.

정작 어제 수요예배를 마친 후에 우리 유재성 집사님이 차를 태워주시면서 오늘 설교 너무 너무 쉽고 이해하기 너무 좋다 라면서 방송 듣는 것 보다 실감이 나서 너무 기뻣다고 했습니다.

이래 저래 이야기 하면서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빛의 아들들은 정작 주인을 대상으로 봤지만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마음과 하나 였습니다.

(눅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그래서 건희 아빠에게도 설명을 했지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8명이 죽었는데 다들 저 죽은 8명 보고 하늘로부터 저주 받았다 라는 의식을 가질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고방식에 홈을 파헤쳐버립니다.

그런 해석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 죽은 자 8명 따로 이고, 또 따로 그렇지 않은 저주 받지 않아 산 자는 다수 따로 이고, 라는 식으로 저들 죽은 자를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따로 따로 선을 그어서 저쪽 죽은 무리, 이쪽 안죽은 무리로 본다는 그 시선 자체에

예수님은 반대로 해석 합니다. 하나로 묶어 버립니다.
선지자의 의식은 바로 이겁니다.
심판으로 하나 되게 묶어 버립니다.

순서상 실로암망대 무너져 죽은 8명 저들이 먼저일 뿐이지, 그 다음 차례가 너 다 라는 겁니다. 한시간 뒤 하루 뒤 한달 뒤?
결국 저주 아래에 있기는 마찬가지 이다는 겁니다. 심판 성으로 하나로 묶는 것이 성령의 사고방식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실때에 아낙네들이 졸졸 뒤따라 다니면서 안됐다 안됐다 라고 우시는 것을 보고
날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으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 지러 곧 심판으로 하나로 묶어버리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결국 울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대상으로 볼게 아니라. 차라리 너와 하나 곧 동행하는 너희 가족을 위해 울어라 라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심판에 놓인줄도 모르고 예수님을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꺼꾸로 울더라 라는 겁니다. 곧 자식, 아버지와 아들 개념은 하나로 묶는 겁니다.)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래서 어제 였던가요? 그런 글을 올렸지요.
상한갈대를 꺽지 않는다는 개념과
또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오늘 귀히 귀히 입히시는 이유
여기에 더 첨가하여 베드로가 왜 물에 빠져서 예수님을 봐야 하는지?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왜 안 되는지
이것이 곧 요한복음의 총정리로써 총알받이 완성 또는 잃어버린자 완성
죄인 완성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심판 속에서 주님과 만나자 라는 겁니다. 이게 임마누엘이지요.
너 하나님과 나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겁니다.

그럼 너 하나님은 [대상]으로 [나 따로] [하나님 따로] 그래서 내가 잘 하면 하나님도 친화적이고
내가 못하면 하나님도 적대적인 전형적인 행함론 곧 성화론과 같은 우상의 하나님이지요.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내 하나님은 너희 하나님과 다르다 라는 소리를 이스라엘 속에서 하신 그 하나님은 바로 심판을 완료한 심판으로만 일관하는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곧 저주와 심판 속에서만 자신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차이가 나는 하나님인 겁니다.

왜 선지자의 하나님이 다른고 하니 심판 으로 부정으로 일관하는데
그 심판은 이미 완료 되었기에 기존의 모든 것을 헌 것으로 규정하는데 있는 겁니다.

헌 것으로 규정했다는 말은 새 것이 완료 되었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항상 심판만 외칩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에게 말입니다.

이미 하늘의 이스라엘은 완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종말과 심판 속에 들어가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가짜 이스라엘이 반발을 하는 겁니다.

이것을 건희 아빠에게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하나=후사=동행=부활=기업)

아브라함이 자기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보고 약속을 지켜서 낳은 자식은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스마엘을 놓고 난 뒤에 그것이 아니다 라고 그 차이로 더 나은 방식으로써 나은 자식을 주십니다. 그것이 이삭입니다.

이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해서 약속을 지켜서 낳은 자식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아브라함을 찢어서(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듯이) 그 아브라함의 깨어진 그 자리에서 낳은 자식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동행 해 주셔서 낳은 자식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삭은 죽음이 묻지 않고 심판도 묻지 않는 하늘에서 난 약속의 자식인 겁니다.

그래서 과연 죽음이 묻지 않는지? 심판도 묻지 않는지? 죽음과 심판 속으로 집어 넣어보면 아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즉 부활존재 또는 종말인간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약속 인간입니다. 약속을 대상으로 보는게 아니라 약속 자체가 아브라함을 깨뜨리고 약속의 사람으로 만든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겁니다. 믿음의 사람이다는 것이지 믿기를 도사처럼 잘 믿는 종교꾼이 아니다는 겁니다. 곧 믿기 도사인 아브람이 깨져서 믿음의 사람이 된 겁니다.

동행의 역사입니다. 곧 깨진 흔적이 있다는 겁니다.

분명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바리새인 유대인들 앞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 다 라고 했습니다.

(요 10:30, 개역)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 10:31, 개역)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요 10:3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요 10:33, 개역)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 10: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 10:35, 개역)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 10:36, 개역)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요 10:37, 개역)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요 10:38, 개역)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요 10:39, 개역)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아니 우리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 되기 전 아브람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하나 될려고 노력하고 행하고 실천에 열심히 해도 하나 되기 힘들어서
늘 고심하는 중에

정작 내가 낳은 결과 물인 이스마엘은 거부 당하고
하나님 쪽에서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이삭만이 인정받을때에

그것이 과연 이해가 될까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바리새인들이 비록 이스라엘 과거의 조상의 잘못이 있지만
그 잘못 된 것을 다시는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도 노력해도 늘 부족해서
하나 되는데 너무 너무 힘들어 하는 판국에

아주 천연덕 스럽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 다 라고 해버리면

그거 신성모독죄요 참람죄요 유대인 전체 사회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아벨 제사만 받고 가인의 제사는 아무리 바치고 들여도 소용없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과 달랐던 겁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은 바리새인을 대표성으로 해서 밝혀졌습니다. 그저 대상입니다.
그러니 우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대상이 아니기에 따로 따로 따로 국밥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써 하나입니다.

이 하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처소입니다. 약속한 성령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마지막 정리의 하이라이트가 베드로가 대상으로 따르고 섬기고 죽기까지
다른 제자들 보다 더 가까이 갈려고 했어도 대상은 어디까지나 우상일 뿐입니다.
우상이란 자기투사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사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투자 했다는 식이 바로 대상으로 본 겁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를 물 속에 빠뜨려서 새로 보라고 대상이 아닌 하나 로 보라고
그런 베드로에게 포착되지 않도록 꼬끼오 3번에 무너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뻔뻔스럽게 대상이 아닌 하나로
주님 쪽에서 십자가를  곧 심판을 앞장세워서 다가오는 주님 앞에

너가 나를 다른 사람 보다 더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에 네 그러 하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심판 속에 곧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알게 된 겁니다.

이것을 다시 강이아빠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건희아빠가 그렇게 보라고 추천해 주던 만화가 있는데
그것이 블랙잭 이였던가? 하여튼 그런 제목의 만화를 몇 년전에 봤는데

그 블랙잭이라는 의사가 오직 불치병만을 24시간 생각하는 거의 병만 생각하는 의사입니다.
환자를 보는 시각도 병만을 상대로 하지 인간 자체를 상대로 하지 않는 겁니다.
병고치는데만 미쳐있는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불치병에 걸린 자가 다급하게 와서 병고쳐 달라고 했을때에
이 블랙잭 의사가 말도 안되는 수술비용을 요구 합니다. 한 몇십년을 벌어도 못 벌 돈을 요구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두 패로 나누어 집니다.
뭐 저런 부패성이 강한 돈 밖에 모르는 의사가 어디 있냐고?
나쁜 의사 이다 라고 한 사람이 선동하니까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정작 병에 걸린 당사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 블랙잭 의사 한테만 고침받기를 간청했습니다. 돈은 비록 없어도 이 병을 고칠 유일한 의사는 블랙잭 의사 한 사람 뿐이다 라는 의식이였습니다.

한쪽은 돈 밖에 모르는 불의한 의사 이다 라는 공격과
또 한쪽은 나는 병자입니다. 당신 만이 유일한 나의 병을 고칠 의사입니다 라는 시선

이 두 시선이 임마누엘처럼 두 하나님이 졸지에 생기듯이 두 의사 로 시선이 갈려졌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지시대로 더럽기 짝이 없는 꾸중물에 7번 씻으라는 말에 순종을 합니다.

그 부정적인 물
그 심판의 저주의 물에 몸을 담그라는 겁니다.

나아만 장군은 그 꾸중물이 곧 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하나 된 믿음입니다. 정작 그 더러운 저주의 꾸중물이 저주의 십자가가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 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저 꾸중물이요 심판받아 마땅하고 저주 받아 지옥갈 자입니다.

하나 됨이라는 처소를 예수님이 마련하셨는데 그 처소가 곧 성령인데
성령이 임한 자에게서 도저히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예상치못한 고백이 나옵니다.

맞습니다 저 개입니다. 그러나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뿌스러기를 먹습니다. 긍휼을 베푸십시오 저 환자입니다. 환자인 자에게만 의사가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 입니다.

사랑을 만나면 졸지에 자신이 작아 집니다. 비로소 사랑 때문에 원수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원수와 하나 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의사는 환자만 찾습니다. 구원자는 죄인만 찾습니다. 하나 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사랑을 대상으로 보게 되면
원수의 자리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할려는 나름대로의 어줍짢은 것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꾸중물의 자리가 아니라 나름대로 나도 한 깨끗 하다 라는 그런 자리를 찾는 겁니다.

그런자에게는 하나의 음성이 안 들립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조차도 안들리고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는 고백 조차도 안 나옵니다.

그런 뻔뻔스러운 답변을 못한다는 거죠.
예수님을 버려버린 원수짓을 했으니까 그런 모순적인 답변은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 안믿겨지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 인데 말이죠. 사랑합니다 라는 하나?

그런 사랑은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도 한 가닥 사랑 실천한 꺼리를 모아서 내밀겠다는 겁니다. 원수 짖 안한 꺼리를 모아서 들이 내밀겠다는 심뽀입니다. 자기가 원했던 사랑만 끌어모아 가능한 사랑으로 사랑했다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 다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
비로소 유대인과 바리새인이 본격적인 본심이 드러납니다.

졸지에 예수님은 아벨처럼 되고
모든 유대인은 가인처럼 됩니다.

너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라꼬? 웃끼고 있네
우리가 보기 좋게 하나가 아님을
너야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제대로 저주 받았음을 보여주마 라고
그 본심들이 들어난 것이 십자가 처형에 기필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실행 합니다.

하나 되지 않음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하나님 동원이 도리어
그들의 가짜 하나님을 드러낸 식이였고
동시에 하나 되지 않게 떨어뜨리겠다는 심뽀가 도리어 본드로 하나가 딱 맞음을 보여주는 어리석은 지혜 였음이 드러났습니다.

마치 솔로몬 재판처럼 대상과 하나를 아이를 심판이라는 죽음 속으로 몰아 넣으니
한 쪽 기생은 아이구 참 잘 되었네요 도끼로 두 동강 내어서 저도 가지고 나도 가지고
정말 좋으신 판결이십니다. 뛰어난 법 집행자입니다. 라고 법을 대상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법의 취지인 사랑은 비로소 하나 됨에서 그 하이라이트가 드러납니다.

그 법의 심판 속에 뛰어든 마땅히 죽어야 하는 그 죽음과 하나 되는 그 기생을 통해서
아이의 참 어미가 밝혀지는 겁니다.

왜 선지자는 우리를 종말로 심판으로 몰고갈까요?
왜 엘리사는 깨끗한 물 그 흔한 깨끗한 물 냅뚜고
더럽기 짝이 없는 꾸중물 똥물에 몸을 그것도 7번 씩이나 담갔다 번거롭게 또 담그라고 했나요? 문둥병이면 그야 말로 깨끗한 물로도 해도 고칠까 말까인데?

그것은 그 저주의 자리 그 원수의 자리 그 심판의 자리에 누가 뛰어드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 로써 다가오는 분이요 대상으로써 남는 분이 아니다는 겁니다.

왜 오늘 본문 들어가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오늘 본문이 그런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벨릭스 라는 로마 총독이 바울을 통해서 자기 이윤을 뽑아내고자 하는데 실패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인 보복이 들어 옵니다만 마침 총독 후임자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 됩니다.

베스도 라는 사람이 후임으로 총독이 됩니다. 그러나 이 정치인 또한 관심사가 정치를 잘해서 인기를 끌고 그 대중의 인기로 인해 임금의 심리인 좋은 임금이 되겠다는 심뽀입니다.

여기에 마침 맞게 바울이 걸려들어서
종교인과 일반인으로부터 인기를 끌려는 새로운 개혁을 시도할때에
바울을 미끼로 삼습니다.

참 좋은 미끼로 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의 공동적인 숙제인 메시아 3번 숙제 문제 풀기에
바울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구약의 참선지자 노릇처럼
선지자는 말씀과 동행함으로써 선지자의 고향이든 예루살렘이든 상관없이 모조리 다 심판 속으로 하나 되게 묶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주를 나는 만났다 라는 증거입니다.

인자란 즉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방식은 곧 심판의 완성이요 죄인의 완성이요 이것이 미래완료이다 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 완성입니다. 부활의 완성이 아니라? 십자가를 완성 했다는 말은 미래완료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무에 달린 저 인자를 쳐다보지 않는자는 다 심판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뱀에게 물린 자리에서 인자를 봐야 제대로 보입니다.

환자의 자리에서 봐야
죄인의 자리에서 봐야
원수의 자리에서 봐야
심판의 자리에서 봐야

의사가 누구인지 구원자가 누구인지 사랑인 누구인지 제대로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 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대상이란 따로 따로 이기 때문에
원수의 자리 저주의 자리 심판의 자리에서 때려죽어도 못갑니다. 볼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그리심산 자리 축복의 자리에서 또 다른 따로 국밥처럼 또 하나의 축복인 하나님을 상대할려고 합니다.

사랑의 자리에 간 나와 사랑이신 하나님이 만나서 사랑의 극대화를 이루자 라는 식이 성화론입니다. 행함론입니다.

그들은 원수의 자리에서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 자체를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못 믿습니다.

바울이 고소 당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하나로 묶는 역할을 선지자처럼 똑같이 사도는 심판의 자리로 묶어 버립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쳐다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심판주를 만나게 된 과정을 법정에서 알려주고 이것이 나와 예수님과 하나 된 사건이였다 라고 십자가를 뻔뻔스럽게 외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저들의 반응은 정치성으로 일관합니다. 대상으로 삼아서 저런 고백 조차도 나에게 어떤 유익이 오는가 라는 계산을 따지는 겁니다.

아무도 그 심판의 자리에서 주를 쳐다보는 자는 없습니다.

바울 본인만 신났습니다.

나 같은 원수를 주님이 사랑했다.

여러분도 이 원수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라 라고

그러나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바울을 보는 시선은 그저 선악적일 뿐입니다.
저 사람을 어떻게 이용해서 유익을 챙기느냐?
또는 저 사람이 유대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배격해야 한다
라는 식으로 그저 지금 현재의 것을 사수하거나 더 확장 보존 부흥 시키는데 선악 선악 계산기를 뚜드리는 겁니다.

정작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바울 또한 이 땅 자체를 심판 종말로 몰아가기 위해서
심판주를 증거하고 십자가에 달린 사랑이 원수를 찾고 죄인을 찾는 구원자 환자를 찾는 의사임을 증거하는데 말이죠.

관심사가 사람구원이 아니라 병 만 생각하는 블랙잭 의사처럼
사랑의 관심사는 원수 중에 원수를 찾는 겁니다.

사고방식과 시선이 우리와 정반대입니다.

원수 중에 원수를 찾아 그 원수를 아무댓가 없이 용서하면 그 사랑을 극대화 시키기 때문에
사랑은 오로지 자기 사랑의 영광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진짜 의사는 아무도 못 고치는 병을 만나면 기쁜 겁니다.
자신 만이 고치겠다고 병에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죄를 만나면 구원자는 기쁩니다.

인간들이 웃기는 것이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지만 자기가 설정한 이웃과 원수입니다.
정작 자기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죽인 원수는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차라리 사랑할게 아니라 그런 원수가 바로 접니다 라고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을 내가 죽였습니다. 라고 그 십자가의 저주 자리는 내 자리입니다 라는 것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와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하나로 만드십니다.

이 일을 거부하는 것이 인자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입니다.
먹을 수도 없습니다.

왜 바울이 이 고백 하나 때문에
이리 잡히고 저리 끌려가고
연속되는 고소와 고소 속에서
이 사람 찝쩍 저 사랑 찝쩍
벨릭스 정치꾼 손대고
베스도 정치꾼 손대고

모로지 한 가닥씩 바울을 손대면서 이리 저리 농락하면서
어떻게 하면 자기 정치와 인기를 확장 시키느냐에 바울을 선으로 활용하고 또는 악으로 활용하는데 있어서

바울은 완전히 미말에 둔 구경꺼리가 조롱꺼리가 발가벗겨진 찌기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주님이 너무 하시는 것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바울이 지나가는 흔적은 곧 심판의 알리바이를 형성하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복의 기준으로써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곳 마다 복과 저주가 갈라지는 두 패로 나누어지는 기준이 되듯이

바울이 지나가는 곳 마다 복과 저주로 나누어지는 심판기준이 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아무도 바울과 같이 하나 되어 그 하나 된 고백에 동참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저 바울을 타인처럼 대상으로 보고 저 사람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에만 신경씁니다. 특히 정치꾼들의 성향은 더욱더 심합니다. 조그마한 꼬뚜리가 있으면 정치적인 계산을 두드리기에 바쁩니다. 유대인은 반대로 자신들에게 해가 될까봐 계산기 두드립니다. 양쪽다 대상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처럼 심판주를 만났습니다 라는 같은 고백을 할자
여여 모여라 숨박꼭질 할 사람 여여 모여라 라는 식으로 증거 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실패한 겁니까? 아니죠

심판과 종말이 이래서 딱 맞다 라는 겁니다.

아 그렇다고 아무도 없으면 딱 맞는거네? 아니죠.
심판 받아 마땅한 저는 개같은 자입니다 라고 나타나면 그 사람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동행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람의 반응에 따라 파악한다는 자체가 또 대상입니다.

이미 완료이기에 사람의 반응과 상관 없이 넉넉한 승리요 완료요
넉넉히 이긴 겁니다.

바울은 이미 미래가 확정된 것을 본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정치적인 모욕을 당하는 그 수뇌부에 더 깊숙이 주님께서 투입시키는 겁니다.

얼마나 하나가 못 되고 그저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우상성을 까발리는 겁니다.

선지자처럼 선지자 등에 심판을 토네이도를 몰고 자신이 찟겨진 것처럼 너희도 찢기는 것이 마땅함을 아는 것에

바울 혼자만 이 현실을 보는 것에
안타까워 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그런 감정이 아니라

바울 자신도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미래 완료 때문에
더더욱 이 심판성을 거부하는 것 조차도
그저 그저 감사로 느껴지는 겁니다.

맞군요 말씀이 옳았군요 라고 말이죠.
그것을 믿어야할 판국인 겁니다.

사람들이 정치적인 수완으로 올라가는 그 중심의 자리에
그들은 자신들의 공적과 수고와 노력으로 그 높은 자리에 자랑으로 앉지만

반대로 바울은 죄인이 되어서 그 중심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심판주입니다 라고 동행을 하나됨을 외칩니다.

포로된 주제에? 죄인되어 사로잡힌 주제에? 심판받아 죽어야할 사형깜인 주제로 말이죠?

마치 삼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바울을 기준으로 해서 그 인간들의 중심자리를 심판자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바울은 그런 의도로 심판 자리로 하나로 묶는 역할로써 마치 노끈 밧줄 하나로 묶는 꽁꽁꽁 묶는 포승줄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자리에 꿀처럼 단 사랑이 증거되고 피어납니다.

인간들이 조롱하고 거부하고 싫어하는 그 저주의 자리에서 심판의 자리에서
힘센 사자의 시체 속에서 꿀처럼 단 사랑이 피어나는 겁니다.

머리카락의 힘은 그저 대상일 뿐입니다.
정작 삼손이 찢겨진 그 몸에서 단 꿀인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심판이 아니면 우리는 그 꿀을 맛 못봅니다.

우리를 심판의 자리로 몰아가는 선지자는
미래 완료를 외치기 위해서

기존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져야 마땅함을 외치는데 일관합니다.

그야말로 종말인간만 찾겠다는 겁니다.

바울이 그래서 그 당시 인간들의 가장 중심부로 두 조각 내면서 흔적처럼 지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들은 특히 벨릭스 총독 베스도 총독 그리고 아그립바 왕

그저 대상으로만 상대하는 그들의 우상성이 다 드러납니다.


왜 변명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바울의 변명 변호

변명의 반대말이 고소 고발입니다.

즉 임마누엘과 같은 의미입니다. 사건 상황에서
너거들은 나를 고소 고발 했지만

나는 이것을 변명 변호 증명 목격담 발언한다? 뭔데?

심판주를 증거한다 라는 겁니다.

실제로 내가 직접 만난 심판주 나사렛 예수 이단 괴수의 주인인 내 주가 나의 심판주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그들이 관심이라고 가질가요? 아닙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못 본다 라는 것을

오히려 눈뜰까봐 걱정하고 보게 될까봐 근심하는 말씀과 동행치 않았는데 그런 일이 발생될 수가 없다는 오로지 심판으로 부정으로 하나 로 묶는 그 종말을 바울만 누리는 겁니다.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막 4: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 4:9, 개역)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막 4:10, 개역)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를 묻자오니』
(막 4:11, 개역)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막 4:13, 개역)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막 4:14, 개역)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결국 비유란 차단과 막고자 하는 걸림돌이 목적이다. 말귀 못 알아먹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지 말귀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특히 씨뿌리는 비유)

(행 28:16, 개역)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행 28:17, 개역)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행 28:18, 개역)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행 28:19, 개역)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행 28:20, 개역)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행 28:21, 개역)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행 28:22, 개역)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행 28:23, 개역)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 28:24, 개역)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행 28:25, 개역)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개역)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행 28:29, 개역) 『(없음)』
(행 28:30, 개역)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 28:31, 개역)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울은 한 쪽은 긍휼의 그릇 한 쪽은 진노의 그릇으로 나누는 두 패로 나누는 종말의 말씀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바울 자신도 심판의 대상에 놓여서 믿게 된다. 항상 말씀과 동행당하는자는 심판 예외가 아닌 본인 조차도 심판 대상에 놓여서 또 새로운 말씀을 또 믿게 된다. 그래서 심판의 기준이 되는 식이다. 복의 기준인 아브라함처럼, 자신에게 조차 포착되지 않는 말씀이기에,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늘 새롭게 본인이 포착 당하는, 새롭게 용서 당하는, 늘 새로운 사랑 곧 하나 임을 마치 임의로 부는 성령 새영 정직한 영처럼 말이다.)


바울 본인이 도리어 기쁘게 믿어야 할 판국으로써 동행 곧 하나됨을 본인만 누릴 뿐입니다.

선지자는 그저 미래의 확정된 완료만을 밀어붙일 뿐이지 이 땅의 반응따위에는 연연하지 않습니다. 고향이든 예루살렘이든 미래확정인 십자가의 피로만 밀어 붙이는 겁니다.

이것이 피만 외치는 선지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꾸중물 몸 담그라 라는 일관된 선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바울이 그렇게 우여곡절의 수많은 난관 속에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갔건만 정작 심판주만 외치는 뭔가 눈에 효과적인 하나 없이 그 심판 주 외치는 것으로 허무하게 뭐 하나 남기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동행이요 하나 임을

유일하게 우상의 하나님이 아닌

실제적인 너희가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부활 주가 우리의 심판주임을 증거하는 유일한 사랑임을 증거 했습니다.

이것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있겠습니까?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보여도 이 확정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이거 하나만 밀어붙이는 일에 바울이든 우리든 미끼로 삼아서 조롱꺼리 구경꺼리 미말에 둔 찌기로 삼으셨다는 자체가

완료임을 그것이 하나 됨 임을

도저히 그것이 무슨 하나 됨이냐 어리석음이지 라는 반발을 유발하면서 증거 되는
하나 됨 동행임을

바울과 동행하신 나사렛 이단 예수님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 동행으로만 일관되는 사랑을 우리의 어두운 눈이 뜨여져서 보도록

우리 눈을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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