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1. 멈추거나 막을수 없는 십자가

(십자가 사건의 반복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십자가 증폭 사건)

본문 : 행 22:1-30


지난 시간에 특정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을 발칵 뒤집는 소동 난동 쿠테타 난리를 벌리고 있는 바울에 대해서 살펴 봤습니다.

요즘 시골에서 어떤 사람이 데모를 일으키고 난동을 벌리고 쿠테타를 일으킨다고 한다면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홈이 페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슈가 될려면 사람들의 공포와 연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공포는 공동분모인 욕망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욕망에 따라 정치로 욕망의 차이성을 없애는 분배의 공평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대로 거룩합니다.
그런 인간의 정치에 실족토록 하는 거룩으로 차이성을 극대화 시킵니다.
적극적인 개입은커녕 아예 철저하게 소외 시켜버립니다.

정치가 아닌 거룩은 무슨 일을 할까요?
인간의 욕망을 곧 우상을 적으로 삼는 거룩입니다.

적이 없다면 거룩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적이 있다면 거룩을 보게 됩니다. 거룩이란 곧 구별, 차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사와 더 나은 제사 라는 말 자체는 차이가 난다는 뜻일테니깐요

그러나 인간의 거룩은 그 차이성을 없애버릴려고 합니다.
인간의 거룩 곧 자랑은 항상 정치적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자랑을 추구하는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치란 왕의 자리요 신의 자리요 힘과 권력과 에너지의 자리입니다.
마귀의 3가지 시험은 이를 반영합니다.

이 왕의 자리에 인간 곧 부정한 자가 소외는커녕 적극적인 개입으로
사랑을 이웃사랑을 외치면서 자리에 앉아버린 겁니다.

바로 이 응축된 점에 상대적인 하나님의 거룩인 하나님의 어리석은 십자가가 그 반대편에서 응축점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반대편에 서서 그 응축된 점으로 응답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거룩인 왕의 자리인 정치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거룩은 예수님의 거룩을 정치적으로 몰아버립니다.
인간의 왕 됨은 예수님이 왕 됨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거룩인 자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자랑을 거부합니다.

두 왕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감추어진 껍데기를 벗기는 것이 원수의 성문을 어리석게도 열어버리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이런 왕이 된 인간의, 신이 된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을 실족케 하는 겁니다.

서로 서로가 실족케 하는 서로의 소욕을 거스리는 걸림돌입니다.
서로 서로 부딧끼는 거친 돌입니다. 성령은 또는 은사는 바로 서로 부딧끼도록 합니다.
서로의 뿌리, 근원, 처음자리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십자가는 바로 이런 인간의 지혜(거룩, 정치)를 집결 시켜버립니다.
힘도 결집시켜 버립니다.
정치력도 결집시켜버립니다.
모든 인간의 신앙도 결집시켜버립니다.
믿음도 거룩도 사랑도 결집시켜 버립니다.
모든 인간의 행함도 결집시켜버립니다.
모든 인간이 믿는 하나님도 결집시켜 버립니다.
모든 인간의 거룩 곧 선함도 결집시켜 버립니다.

그렇게 결집시켜 버리지 못하는 십자가는 가짜입니다.

이것이 인간 속에 들어있는 악마 이고
십자가는 바로 그 악마를 들추어내는 유일한 새언약입니다.

결국 언약이란 죄를 겨냥한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의 욕망을 겨냥한 겁니다.

인간의 거룩인 정치가 아무리 이런 십자가를 막아서는 주체가 되어도 소용없습니다.
복음이 주체이기 때문에 적이 있는 이상 늘 공격하고 소외시켜버립니다.
복음이 홈을 페이게 함으로써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정치패가 나누어 졌다는 것은 적이 생겼다는 겁니다.

아군과 적군이 뒤썩여 있다는 뜻이겠지요.

주님 또한 알곡과 가라지 둘 다 교회에 심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내부의 갈등은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아무리 한 가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그릇과 진노를 드러내는 그릇으로 나누어 져야만 하기에 반드시 그 그릇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진리가 진리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거짓진리 거짓선지자를 활용하는 겁니다. 천상회의에서 악신을 보내시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자 지난 시간에 바울을 하나의 칼이나 돌칼 또는 가위? 또는 면도칼 도끼 등등으로 활용하셔서 예루살렘을 난도질 합니다.

마치 예루살렘을 하나의 의인화 하여서 돌칼로 할례를 하듯이 말이죠.

할례를 하게 되면 육의 단절성을 격게 됩니다. 일종의 남성의 성기를 짤라버린다는 것은 이제 육체의 통로를 차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거세입니다.

또한 할례는 육의 껍데기를 홀라당 다 벗겨버리는 벌거벗은 형상 만들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달아 죽여버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렇다고 금욕주의나 종교에서 말하는 도 딱는 신처럼 되고 타락한 생활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바로 그런 금욕주의가 악마짖이고 신처럼 행동하고 타락한 생활을 버리는 것이 악마의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가능한 짖입니다.

불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방금 말한 그런 가능한 짖을 바리새인들이 이미 완벽하게 갖춘자들입니다. 그중에 누가 대빵입니까?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것이 아니다 라고 나온 것이 로마서에서 육(행함)과 믿음 차이입니다.

육에서 나오는 것은 모조리 다 행함입니다.

그렇다면 발가벗겨지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무엇입니까?
행하지 말라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

행하세요

행하시고 그 행함이 내가 스스로 그 행함을 거부하는게 아니라
나는 나의 행함을 추호도 거부하거나 부정하거나 부인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는데
외부에서 도끼가 날라와 찍혀 버려 난도질 당함으로써 찢어진 그 형상이 바로 할례당함
곧 발가벗겨진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십자가의 형상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이상한 표현 썼다고 이단시 하겠지만 이미 이단인데 뭐? ㅋㅋㅋ

인간들이 하나님 형상 운동이나 그리스도의 형상 운동이나 또 그런 회복 운동을 펼치는 꼬락서니를 보면 한결같이 고정화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열이 생깁니다. 자기들 끼리 만든 기준에 좀 더 가까이 간 형상 조금 덜 떨어진 형상 이런식으로 계급이 생기게 되면 인간들의 정치성이 곧 욕망성이 그대로 표출되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복음의 거룩 곧 복음이 홈페이도록 그어버리는 차이성만 남도록 되어 있는 마당이지

인간이 자기가 자기 스스로 정치(인간의 거룩)를 차이를 내도록 허락된 공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예수님의 몸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정치 마당입니다. 전쟁 마당입니다.

바로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을 그어버리면서 바울이라는 도끼가 복음에 의해 사로잡혀서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껏 난도질 하는가?

천만의 말씀

인간들이 할례 당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쟁을 벌릴때에

이스라엘 본인들이 할례를 당하고
그 할례 전쟁을 이제 가나안 족속들에게 펼칩니다.

가만히 당하던가요? 바보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만히 믿었던가요?
육체의 적극적인 거부반응으로 필사적으로 방어를 했듯이 동일합니다.

모든 육체의 마침이 되는 할례전쟁을 벌릴때에
가나안 족속들은 오늘날 우리와 같이 자신들의 고정화 된 요지부동의 성을 사수하고자 모든 것을 동원해서 막았습니다.

그 할례전쟁을 펼치는 이스라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할례 받는데 순순히 받던가요?
십자가 지는데 순순히 지던가요?

연한 순 같은 분은 어린양 예수님 뿐이였지
우리는 염소처럼 발버둥 치고 난리였습니다. 각기 제 갈길로 가는 양같은 자들이 우리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우리 꼬라지를 어깨에 매고 여리고성을 빙빙 돌면
(할례 전쟁)

저들은 십자가를 왜 지냐고 비아냥 거립니다.

사실상 저들도 우리와 똑같이 십자가를 져야만 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기 싫어서
지게 될까봐 겁이 나서 십자가가 공포로 다가오기 때문에 어깨에 지지 않을려고
적극적인 반항으로 버티고 끝까지 그 자기들이 성을 지키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다고 십자가가 멈추어 지겠습니까?
막는다고 십자가가 막아집디까?

성령을 임의로 부는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된 자유 앞에 도리어 철저하게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 진리를 본 자입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을 잡을 수 없습니다. 막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포착 불가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든 성령이든 예수님이든 성경지식이든 자꾸 포착 시킬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 보다 더 악한 자들이 어디있겠습니까? 독사의 자식이 맞지요. 예수님은 제대로 보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또한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입니다.
뭔가를 손에 잡으면 그것으로 자기를 위한 고정화 작업에 나서게 됩니다.
성경지식을 알게 되면 꼭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입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안그럴려고 해도 어쩔수 없는 육에 갇혀 버린 몸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런 육의 자랑에 빠진 우리를 십자가가 난도질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난도질 곧 심판 멸망 시켜버린다는 뜻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예수님 혼자 법궤를 어깨에 맨 여리고성을 13바퀴 도는 하나님의 군대요 우리는 여리고성을 우찌하던간에 지킬려고 하고 십자가 지게 될까 싶어서 교회에 숨어서 교회를 우상화 고정화 하면서 여리고성처럼 사수하면서 십자가를 비아냥 거리는 모습과 같은 겁니다. 그런다고 안 무너질까요?

(롬 2:17, 개역)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롬 2:18, 개역)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롬 2:19, 개역)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롬 2:20, 개역)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 2:21, 개역)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롬 2:22, 개역)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롬 2:23, 개역)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 2:24, 개역)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5, 개역)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롬 2:26, 개역)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롬 2:27, 개역)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롬 2:28, 개역)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롬 2:29, 개역)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3, 개역)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 3:27, 개역)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15:17,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잠시 자랑이라는 단어로 검색한 구절을 뽑아 봤습니다. 자랑과 상대적인 표현은 범한다는 단어로 여기서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결국 행함을 자랑이라는 표현으로 달리 적었다고 보시면 되구요 결국 행함이란 반드시 자랑으로 나오게 됨과 동시에 그 자랑은 강퍅과 완악함의 고정화 됨으로 구축이 됩니다. 결국 율법을 행하고 그 행함으로 자랑함으로써 동시에 범하게 된다는 겁니다. 동시에 범하게 된다. 참 재미있지요? 말씀을 지키고 행하고 다들 주장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고 행하게 되면 육이라는 저금통장에 메모리처럼 기억저장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든든하게 안정감을 과시하는 자랑이 됩니다. 자기 새끼를 자기 몸으로 낳았기 때문에 그 새끼가 학교에서 백점 맞으면 그렇게 자랑스러울수가 없습니다. 남의 자식이 백점 맞으면 아무 자랑 꺼리가 안 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식이 백점 맞으면 입이 건지러워서 못 삽니다. 자랑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범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자 마자 말씀을 지켰다고 우리는 자랑하게 되고 그 말씀을 지킨 육체는 그 육체를 자랑하게 됨으로써 동시에 남을 기죽이게 됩니다. 동시성입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럼 우짜란 말인가?

그래서 예수님의 자랑을 우리는 차이성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엉뚱한 것을 자랑 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비로소 찾아낸 잉태물은 못난이 우리를 자랑 합니다.

이것은 도저히 공감대가 형성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에서 잉태하여 낳은 핏덩어리기 때문에 예수님 혼자만 신이 났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전혀 안 기쁩니다.

왜냐하면 우리 꼬라지가 그야말로 핏덩어리라 냄새만 날 뿐입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자랑할만한 꺼리가 전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이란 우리는 전혀 자랑할 것이 없는데 예수님은 바로 우리가 전혀 자랑할 꺼리가 없는 그것으로 자랑하십니다.

마치 우리는 전혀 믿을수가 없고 믿을려고 하지 않았고 믿을수가 없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믿으시고 믿고자 하셨고 믿을 수밖에 없는 순종을 하신 겁니다.

마치 우리는 전자에 놓인 아브라함과 같고 예수님은 후자에 놓은 이삭과 같음으로써
이삭이 아브라함을 살리듯이
죽어야 하는 제물이 된 이삭이 도리어 믿음 없는 자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죽음으로써 믿음의 조상 만드는 원리와 같은 겁니다.

미래가 덮쳐서 완료가 덮쳐서 하늘에서 난 자가 덮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는 분이 덮쳐서 우리에게 믿음이 된 겁니다.

믿읍시다가 아니라 아니 믿을수가 없는 겁니다.
종교가 아니라 (행함이 아니라) 실상입니다. 완료입니다.

바로 그것을 누가 당했습니까? 바울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써 당했기 때문에
바리새인을 버리고 십자가만 자랑 하는 겁니다.

자랑?

나머지는 반대로 똥으로 취급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심지어 바울 자신 마저도.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로 인해 잉태 당하여 태어났듯이

이제 거꾸로 예루살렘을 향해서 십자가로 난도질 하는 겁니다.

어제 아니 그저께 수요 설교에
토기장이와 그릇의 차이는
토기장이는 변함이 없고 그릇은 변함없는 토기장이에게 늘 변화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어서 예수님은 우리는 난도질 함으로써 변화 시켜버리고 변질 시켜버리고
우리는 반대로 예수님은 주물떡 거리는 토기장이처럼 요지부동의 끄떡도 하지 않는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을 십자가가 까발리는 겁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손에 잡혀 이제 예루살렘에게 까지 난도질 합니다.

마치 바울은 여리고성을 법궤를 메고 돌고 있는 이스라엘과 같고
예루살렘은 여리고성으로써 법궤를 메고 돌고 있는 이스라엘을 비웃는 자들과 같습니다.

바울도 예루살렘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법궤(빈자리) 였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재성 곧 십자가의 영인 임의로 부는 바람인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 주인공입니다.

이제 마치 재반복하듯이 예수님이 당했던과 똑같이 바울이 오늘 본문에 재판을 당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껍데기를 벗기고 또 벗기고 또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
곧 할례 전쟁 , 십자가 전쟁을 혼자 펼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장을 보면은

흔히 바울의 회심고백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자신들의 회심을 말하곤 합니다.
아닙니다.

바울의 회심과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자기의 회심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간증이나 회심을 말하는 것을 보면 의심해 봐야 합니다.

바울이 과거를 말하고 또 자신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고 또 그 완료된 새언약이 자신이 어떻게 이끌고 가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회심이 아니고 뭐냐 라고 하겠지만

과거를 말한다고 회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그 살아계심으로인해 차이가나는 과거의 모든 것은 똥 곧 죽은것으로써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곧 주의 주 되심 앞에 차이나는 것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랑이 될 수가 없지요.

도리어 그런 수치 덩어리와 자랑 거리의 대비로써 드러내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수치꺼리를 차이성으로써 동원한 겁니다.

그런데 참 재미 있는 것은 우리가 보통 간증이라는 것을 회심의 사건으로써 들어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처음 믿는 자들은 그야말로 수치스러워서 과거의 것을 끄집어 내는데 있어서 주의 주 되심을 차이로써 증거하는데 성령의 간섭을 보게 되는데

소위 좀 오래 다녔다거나 직분자이거나 저를 포함해서 좀 안다고 하는 자들의 회심을 들어보면 거의 자랑입니다. 과거는 모조리 다 자랑이 되는 겁니다. 수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데 있어서 은근히 한발짝을 걸치면서 배설물을 십자가의 자랑에 올려놓듯이 한다리 걸치는 식인 겁니다. 그렇게 되니 사람을 좋게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육의 자랑이고 그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의 반응에 좌우되는 식이 되는 겁니다.

아니 그런 회심고백 자체가 사람의 반응을 기대한다는 것이니까요?

정작 바울처럼 저렇게 과거를 수치로써 증거하게 되면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된 것이 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면 반드시 인간들의 방어기제가 알수 없이 이유없이 적극거부로써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간증이야 누가 거부합니까? 사람을 화나게 합니까? 안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면 사람이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주의 주 되심을 나타내고 십자가를 자랑하면
사람 속에 있는 주인이 반응을 나타냅니다. 곧 마귀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겁니다. 사람 속에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을 복음을 겨냥하는 겁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하나의 응축된 점으로써 원수의 성문이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바울이 투입이 된 이유는 뭡니까?

그렇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있어서 다들 성령충만으로써 반대하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바울이 투입이 된 겁니까?

바로 성문 열기입니다. 곧 껍데기 벗기기입니다. 육의 문을 열어 재끼기입니다.
예루살렘의 실체를 홀라당 벗기기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십자가만을 자랑함으로써 가능한 겁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화를 낼겁니다. 왜냐하면 그 예루살렘 조차도 자신의 주인인 마귀가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껑을 열어 재끼는 겁니다.

십자가가 하나의 응축된 점으로써 등장하게 되면
반대편에 있는 예루살렘은 또 하나의 응축된 점으로써 그 등장에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로서 사랑(율법의 완성)을 받아야 하는 그 사랑의 대상으로써 응답을 해야하고 찬양을 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곧 예루살렘이 엉뚱하게 주인인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반응을 응답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기에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십자가에 반응을 나타내는 응축된 점으로 새로 멸망의 자리에서 응답케 하도록 두껑을 껍데기를 홀라당 벗겨버리는 겁니다.

자신들의 실체인 멸망의 자리인줄 모르고 있기에 엉뚱한 주인인 마귀로 인해 마귀가 화낼 일을 따라서 화내고 있는 겁니다.

많이도 필요 없습니다.

딱 한 사람 뜨인 돌로 인해 건축자들이 버린 돌 과 같은 돌삐 하나로 인해
여리고성 무너지듯이 예루살렘이 발가벗겨짐을 당하는 겁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심판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토기장이에 의해 깍임을 당하고 변화무쌍하게 손댐을 당했을때에
예루살렘은 자신을 손댄 십자가를 외치게 될 겁니다. 찬양하게 됩니다.
마치 누구처럼? 바울처럼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자랑꾼이 된다는 겁니다.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결국 예루살렘은 화냄을 통해서 그들의 자랑이 나타납니다. 십자가 곧 새창조의 기준을 자랑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자랑합니다. 마귀가 장악한 것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화내고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을 하나의 거점으로 삼아서 응축된 점으로써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점으로 새로 삼아버린 겁니다. 그것이 바로 원수의 성문을 여는 겁니다.

저들이 성공한 예수님을 죽여버리고 자신들이 요지부동한 토기장이 자리를 차지한 그 우상의 자리가(응축된 점, 거점)

도리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료를 외치는 출발지가 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야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뒷 부분에 보면 약을 올립니다.

회심으로 시작했으면 자기는 예수 믿는다 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 회심이 아니라 주의 주 되심 앞에 과거의 자랑꺼리는 배설물이요 차이성이라고 했고 십자가만을 자랑해야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자랑꺼리가 될 수 없다는 반대의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주 되심과
그 주의 주 되심이 놀랍게도 예루살렘을 방금 바울이 회심하듯이 회심 회개 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약을 바짝 올리게 해서 예루살렘이 핍박의 거점이 됨과 동시에 그 예루살렘의 밑둥치를 파제낌으로 인해 바울은 예루살렘을 이동해야 한다는 식으로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동에 예루살렘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약올리고 있습니다.

(행 22:17, 개역)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22:18, 개역)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행 22:19, 개역)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행 22:20, 개역)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행 22:21, 개역)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행 22:22, 개역)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 하여』
(행 22:23, 개역)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자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의문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약을 왜 올리는냐?
좋게 좋게 해야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
둥글게 해야지 그렇게 모나게 하면 될 일도 안될 것 아니냐 하고 말이죠.

사람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어리석은 짖은 절대로 하지 않는 법입니다.

맞습니다. 눈치를 채셨군요.

양쪽다 이익이 되는 방향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자폭행위인 겁니다.
약을 올리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자랑이란
상대방 자랑을 들어주면서 하는데 아닙니다.
상대방의 자랑을 들추어 내면서 그 상대방의 자랑을 묵사발 내면서 외쳐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외쳤으면 그 자랑이 세워져야 하는데
상대방 자랑도 묵사발 내고 자신의 자랑도 세워지지 않은채로 될 것 같으면 둘 다 손해이지 않느냐 라는 식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건 우리 생각이고요.

십자가 자랑은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자랑 자체가 우리가 추호도 자랑하고 싶지도 않은 십자가 자랑을
그것도 우리의 수치를 앞장 세워 가면서 외쳐지기에
당장 눈에는 상대방만 묵사발 시키는 것이 목적처럼 보일 듯 하나
그것도 목적이 아니고
또 내 수치를 앞장세워 가면서 십자가 자랑을 세우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이나
그것 또한 우리 손에 허용 된 적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십자가 스스로의 자랑입니다.


놀랍게도 십자가는 십자가 스스로 십자가를 치면서 스스로 증거 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목격자일 뿐입니다.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내 주께 의 방식입니다.

주님이 주님 스스로를 치시면서 증거 되는 완성된 창조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해 버리면 인간은 믿을 꺼리가 날라가 버립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왜 십자가를 개혁주의나 성화론자들이 싫어할까요?

마치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는 자들을 허용하는 카톨릭 사제와 같습니다.

믿을 꺼리가 없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저 십자가는 믿을꺼리로써 제공해 주고자 하겠다는 인간의 계산된 악마성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내 주께  의 방식은 뭡니까?

십자가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불가능성으로 매일 매일 놓이게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십자가 스스로 십자가를 치면서 증거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야 십자가만을 자랑함이 성립이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함으로써 그런 기특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기자신은 자랑꺼리가 될 수밖에 없기에

십자가는 그것 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의 응축된 점으로써의 대상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밟아버리는 겁니다. 무조건 이유없이 밟아버리는 겁니다.

응축된 점은 우리가 스스로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스스로 개입해야만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찢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찢는 것을 허용한적 없습니다.
마치 요나가 삐져서 자살 할려는 그 충동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아무리 선지자가 시키는대로 했다고 해서 그 뜻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소외입니다.
그 소외 때문에 삐져서 자살 할려고 해도
동참 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소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계속 소외 시킵니다. 손을 못 대도록 하십니다.

토기장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손 대임을 당하는 겁니다.
그것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거하는 그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이동당하는 겁니다.

마귀에 의해서 찢겨짐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소외입니다. 소외 당한 증거입니다.

발가벗겨진 증거입니다.

그래서 원치 않는 길로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불가능한 길로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할례를 우리 손으로 직접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할례를 마음판에 할 수 없듯이
마음을 우리가 우리 스스로 짤라낼수도 없듯이
짤라내고자 잡을 수도 없듯이

오히려 그것은 할례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지켜짐을 당하는 할례가 없고
인간에게 지킴을 당하는 말씀이 없듯이 (안식도 마찬가지 산상수훈도 마찬가지)

도리어 할례가 우리를 도려내고
안식이 우리를 멸망시키고
산상수훈이 우리를 가두어버리고 소외시켜버리고 (산상수훈은 해방 곧 자유를 의미함)
말씀 스스로가 우리를 휘감아서
할례 안식 모든 율법을 이미 완료된채로 휘감아서 우리는 그것을 맛볼 뿐입니다.

전혀 그 맛에 안 기쁩니다. 그러나 기쁘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합니다.
마치 광야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십자가만을 자랑하거나
스스로 회심 고백이나 회개한 내용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을 놀리고자 함입니다.

주께서 주 되심 앞에 너희들은 소외 당했다는 것과
그 소외 당한 증거로서

이런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스스로 증거하는 십자가를 거부하는데
조상들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십자가를 막았다고 성공했고
십자가의 행진을 멈추게 했다고 성공했다고 착각함과
자신들이 예루살렘을 사수했다고 착각하는

그런 인간의 모든 지혜의 결집을 도리어 어리석게 만듬이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라는 겁니다.

저들은 괜히 십자가의 공격에 괜히 막았던 겁니다.

괜히 막았어 괜히 막았어 괜히 개입했어
빠질걸 빠져야 하는데 빠져야 하는데

뾰로룡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가 옳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자랑이 된 이상
십자가에 말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십자가를 자랑하는데 동원이 되는 두 그릇으로 나타납니다.

한쪽 긍휼의 그릇은 바울처럼 중간에 낑겨진 미끼처럼
저쪽의 개입성을 유발케 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그 간음자체가 바리새인의 개입을 유발케 하듯이
동시에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찢어버리고자 요지부동의 법의 자리에 앉아버리듯이
그저 이 둘의 고래 싸움에 철저한 소외당함으로써 놓이게 됩니다.

또 한 쪽 진노의 그릇은 그 긍휼을 어리석다 라고 자신이 구축한 지혜로 긍휼을 펼칩니다.
자랑을 펼칩니다. 곧 행함이요 완악함입니다.
도리어 그 소외를 견디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개입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개입하는 것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을 철저하게 소외시켜버리고 찢어버립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를 소외 시켜버립니다.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된 십자가를 소외 시키지 않고

그 어리석은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백번만번 맞아 죽을 짖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땅의 주인을 염두하고서

주께서 내 주께 의 방식인 십자가만을 외치는 증인을

성령님께서 세우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동원된 미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에 놓이길 싫어 합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은 십자가를 자랑하기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멈추거나 막을 수 없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듯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심지어 예루살렘도 무너뜨리는 그 전쟁을 목격한 자에게서만 십자가가 날 살리는 유일한 구원임을

십자가의 멸망과 심판만이 나의 자랑이 됨을 알게 됩니다.

이 불가능한 자랑인 십자가를 거두지 말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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