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자살] 소동과 [누구십니까?]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오전 10:12:37   김대식


지혜란 바닥을 침으로써 드러난다. (그 바닥은 원천자리 처음자리 뿌리요 모태 창조자리이다.)

그러나 이 바닥을 드러내는 지혜 앞에서
인간의 지혜는 자꾸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한가닥 합류를 했다 라는 의식으로 접근한다.
[하나] 되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 됨은 갈기 갈기 찢겨 버리움을 당하는 모습이고, [하나]가 아닌 [대상]으로 본 것은 멀쩡하게 자신의 행함에 만족한다.

여기서 두 지혜가 대립 된다.

한 지혜는 어리석음이요
또 다른 한 지혜는 자신의 행함과 합류에 자랑스러운 명예이다.


구약 선지자들 몇몇 중에서 한가지 공통점이 뭔고 하니 바로 자살 요청이다.
그것도 거짓선지자가 아닌 참 선지자로 분류 되는 자들 중에서 몇몇 말이다.

욥, 엘리야, 예레미야, 요나, 등등

왜 그들은 자살 요청 소동을 벌리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대표성으로써 뭔가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물위에서 만나는 것을 단절 시키고
예수님에 의해 물속에 빠져짐을 당함으로써

보기 좋게 철퍼덕? 홀라당? 밀커덕? 발라당? 꽈당?
적당한 표현이 안 떠오르는데 굴욕적으로 모멸감을 느낄정도로
쭈욱 미끄러졌을 때

선지자들은 그야말로 쪽팔려서

나 안할래
나 안할래
이런 계획에 날 합류 시켰어?
나는 속았다. 이럴쭐 몰랐다.
나의 계획이란 전혀 안 맞잖아.
하나님의 뜻이 이런거 였어?
그 거룩한 뜻이?

시킨대로 했는데
하라캐서 그대로 했는데?
하라는대로 해 놓았는데 짤라요?

차라리 날 죽이세요.
뭡니까 이 쪽팔리는 상황은?
날 완전히 물먹이는 고약한 심뽀를 드러낸 샘 아닌지요?


라고 선지자들은 항변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물속에 바진 상태가 바로 축복이다.
원천의 자리를 교체하는 맛배기인 샘플인 것이다.

베드로에게 닭이 3번 울어주지 않으면
베드로는 바닥을 치는 원천자리를 교체 당할 수가 없다.
다윗도 그러했고 욥도 그러하며 다 그렇다.

모태 라는 그 근본뿌리를 교체 시킴 당하는 것이
철퍼덩 굴욕적으로 미끄러짐을 당하는 것이다.

자신이 당당하게 믿고 있는 그 믿음이 허사 임을 당하는 굴욕이다.

사실은 선지자의 자살 요청 소동은 구체적인 자살이 그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성도라면 전부 다 해당 된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이 임한자] 또는 [신이라 불리우는 사나이]이다.
즉 복의 기준이 되었다 라는 아브라함에게 붙여짐을 당하는 의미의 표현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실상 그들은 죽을 판국이다.
복의 기준이 된 아브라함은 자신이 생각한 신의 개념 곧 우상 개념이
외부에서 덮쳐지는 약속 때문에 짤려짐을 당하는 것이다.

그 짤려짐이 일종의 단절, 차단, 소외, 철저한 버림당함, 무시, 등등
이것이 바로 자살로써 몇몇에게 표출 된 것이지 사실상 짤렸다 라는 의미이다.
할례 라는 의미로 어제 글을 올렸다.

결국 단순히 자살 개념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목숨을 끊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교체 당하는 개념이다. 목숨과 연관된 의미로써 목숨의 주인이 교체당하는 것이다.

지혜란 이것 까지 파고든다. 목숨의 주인을 교체 시키면서 건드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 건드리는 일은 필수사항이다.

이것을 요나의 표적 이라고 한다.

요나가 자신의 뜻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일치성을 보이지 않고
분명히 자신이 순종으로써 합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제를 당했을 때
버림을 받고 철저하게 소외 당하고
심지어 굴욕을 당했을때에
자살에 대한 정당성으로써
차라리 죽여달라는 요청을 한다.

아브라함이 우상 조각가로써 우상 대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대하다가
왕짱 짤림을 당한다. 그것이 복의 기준이다. 요나의 표적이다.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전혀 지혜롭지 않은 반대의 지혜인 철저한 어리석음과 미련함으로 일관하겠다는 뜻이다.

그 일관성은 아주 아주 간단하다. 너무 너무 잉여적이여서 안 믿겨질 뿐이다.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시고 그 외에는 배제 소외, 차단, 단절인 비밀 패쓰워드를 걸어버리신다. 즉 숨겨버린다.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8:2, 개역)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개역)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5, 개역)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어린아이는 천국이 쉬운데, 어른에게는 천국이 어려운 식이요 아예 단절된 식이다.
물론 요즘 어린아이 말고.

결국 일관성이란 인간의 지혜에 반대로만 하면 되는 식이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이다.
곧 십자가다.

십자가란 인간의 지혜에 반대로만 행할 뿐이다.
그래서 항상 빗금 치듯 내려치면 졸지에 홈이 움푹 파이게 된다.
마치 도끼맨 세례요한이 도끼로 찍어서 나무에 상처를 내듯이 말이다.

상처가 나면 두 패, 곧 한 쪽과 또 다른 쪽으로써 상처난 그 중심으로 인해서
쭉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두 사이가 벌어진 상태이며 그 차이성이 사이의 간격으로 인해 벌어진다.

요나의 표적이란
마치 아브람을 약속이라는 도끼로 상처를 내어서(도끼 라는 이미지 자체가 부정적임. 왜? 아무리 긍정적으로 볼려고 해도 도끼 맞은 자는 피가 나도록 되어 있음. 상처가 됨 곧 목숨의 위기를 맞이함, 누구든지 목숨 건드리면 뭐든지 부정성이 드러남)

아브람과 아브라함으로 둘로 쪼개진다.

그러나 이것까지는 다들 눈치 챈다. 또 인간의 지혜도 스폰지처럼 흡수 빨아드려서 흉내낸다.

그러나 정작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을 철저하게 버림으로써 요나의 표적을 완성하신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도끼(십자가)로 상처를 내어서 두 패로 갈라져 그 둘 사이에서 잉여가 피어나도록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아브람을 버리는 줄 알겠지만 아니다.
아브라함을 버린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다.

아브라함 이라는 약속 덩어리 곧 복의 기준을 짤라서 피를 내어서
그 피로 아브람이라는 부정적인 자를 살리는 노아성결제사의 방식이다.

마치 아브람(아담)을 거쳐서 예수님이라는 마지막 아담을 화목제물로 삼아서
예수님이 흘린 피로써 부정한자를 씻기시는 방식이다.

문제는 아브람과 같은 육에 속한 자는 그 피 마저도 거부하고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쳐다봄으로써 자신 또한 그 피가 아니면 안된다는 식이다.

그래서 아브람과 아브라함 그 사이에 예수님을 들어서 중간에 올리면
들리움 받음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한 쪽 강도 다른 한쪽 강도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
같은 강도이지만 예수님의 죽음 곧 피 때문에 차이가 난 셈이다.

피 흘림 이전에는 차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피가 피 스스로의 영광을 높이고자
두 강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두 강도가 졸지에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나버렸다.

완전 딴판의 인간이 중간에 들림 받은 피 때문에 새로 형성이 된 것이다.


요나든 엘리야든 욥이든
그리고 다윗이 율법을 지켜 4배로 갚는 왕이든
베드로가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제자다움을 표출하든
엘리야가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다고 외치든

뭐를 하든

중간에서 피를 들어 올리면

피를 중심으로 해서
두 요나가 갈라지고
두 엘리야
두 욥
두 예레미야
두 선지자
두 다윗
두 베드로
두 바울이

차이성으로 드러난다.

한 쪽은 항상 뭘 해도 자신의 뜻을 삽입시킨 하나님을 표출하고
곧 우상이고, 가짜 메시야, 가짜 여호와, 가짜 하나님, 가짜 예수님이고

또 한 쪽은 항상 뭘 해도 단절 당하는 도리어 십자가 요나의 표적에 의해
버림받아 마땅함이 도리어 복으로 기쁨으로써 다가오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방식이다.
결국 성령의 마음이 영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육의 철저한 배제 당함으로 보여준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이 철저한 소외와 배제당함 버리움 받음을 거침으로써

인간 속에 마귀가 심은 하나님을 찢고
그 하나님을 찢은 그 현장에서 십자가라는 푯대를 꼿고 최종적인 목표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 가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아담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어리석은 십자가 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자살 요청 소동을 벌리는 것이다.

엉터리 하나님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자기랑 안 맞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서는 자살을 요청한다.

차라리 날 쥑이라 죽잇삐라

그러나 그런 자살 요청을 벌리는 선지자들이 얼마나 엉터리 하나님을 그동안 따랐는지에 대해서 밀끄덩 미끄러지는 채널돌리기 사건이 벌어진다.

전혀 심각한게 없다 라는 것이다.

엘리야에게서는 나만 남았습니다. 차라리 날 죽였브셔

너만 남은게 아니거든 7천명 남은자 잉여가 있거든?

이것은 엘리야의 가짜 하나님은 창세전의 예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자기만 남았다고 마치 독립투사의 영웅이 된 영웅에게 항상 따르는 고난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전혀 고난이 아니다.
고난 근처도 안 갔다.

혼자 울고 불고 하고 있는데
혼자 남았다고 탄식하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나만 남았는데

그래서 죽여 주시옵소서 라고 외치고 있는데
그런 하나님으로 봤는데


개그 콘서트처럼 밀그덩 미끄러져서
7천명이 갑자기 쏟아져서 엘리야에게 보인다면
엘리야는 입이 쑥 들어가 버리게 된다.

바로 이런 굴욕성을 거침으로써
두 여호와 하나님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요나의 표적인 것이다.

십자가란 바로 이 두 하나님의 출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으로 두 지혜의 충돌이 반드시 나타나야만 한다.

비로소

묻는다.

주여 누구십니까?

바울은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과 전혀 딴판의 주를 만났다.


바울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왜 하필이면 나사렛 예수일까?
예루살렘을 겨냥한 의미이다.

메시야가 등장할 예루살렘에서 만나야할 메시야를
천박스러운 나사렛 더러운 나사렛 메시야를 만난 것이다.

빗나갔다.
전혀 예상 못한 나사렛 메시야 이다.

사도행전의 또 하나의 특징이

사람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 메시야가 아닌
나사렛 메시야를 사도들이 외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메시야다 라는 의미이다.
즉 요나의 표적으로써 메시야 이다.

인간들의 지혜를 흡집내는
바울 자신이 만난
바울 자신이 핍박하고 죽였던 그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서 외친다.

결국 바울 자신이 가짜 하나님 가짜 메시야를 따랐다는 내용물을 담고서
그 내용을 포함해서 증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도리어 웃싸꺼리로써 증거하는 셈이다.

아니 생각해 보라

너 바울이 예수를 죽였다면서?
그런데 너가 살인한 그 예수가 너의 구원자 라고?
너가 죽였는데 너의 손에 죽은 구원자는 어디 있는가?
라는 사람들의 놀려댐을 아예 처음부터 유발케 하면서 증거하는

어리석은 요나의 표적인 셈이다.

십자가는 이런 지헤이다.

아니 십자가를 빼버린 예루살렘의 메시야
나사렛을 빼버린 기적을 베푸는 메시야를 증거하면

전혀 문제 될 것 없고 쌍방간에 좋고 좋은 식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증거하면 증거한 본인 조차도
그 모순을 풀 방법이 없이
상대방에게도 민폐를 끼치면서
숨겨진 비밀을 풀어라 라고
못 풀면 죽는다 라는
말도 안되는 식으로 덤벼든다.

그래 놓고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낯선 복 개념을 들고 온다.

선지자 자신이 짤리는 자살을 통해서
그 자살이 그 고통이 내 고통이 아닌 예수님의 고통이였다 라고
이 비밀을 못 풀면 이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넌 이미 죽은자야 라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일방적인 이 자기 멋대로 하는 방식

이것이 요나의 표적 이다.

모조리 다 예수님의 자살인 십자가로 몰아가버리고서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
둘 만이 아는 비밀의 이야기를
십자가에서 발설해 버리는 것이다.

그 창세전의 예정의 비밀을 외쳐본들
누가 알아먹겠는가?

누구는 엘리야를 부르는 것 아닌가? 라고

아무도 그 울부짖는 기도를 알아먹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을 찢으심으로써
두 쪽으로 나누어진 그 틈사이에서
처소를 마련하고
그 모태로 교체시킴으로써
거기서 태어난
피 자식만이

비로소 묻는다.

누구십니까?

즉 나의 전의 부모가 아니네요 라는 뜻이다.
나의 전의 남편이 아니네요

나의 전의 하나님이
나의 전의 메시야가

아니네요?

누구시죠?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만나이다.

예수님 자신이 만나로써
아무도 그 만나를 해석할 자격이 없음을
해석 당하는 만나는 없음을 보여주신다.

해석 당하는 만나(생명)
지킴 당하는 만나(생명)
먹힘 당하는 만나(생명)

에서 [( )괄호 안에 무엇을 넣어도 됨, 하나님, 메시야, 율법, 사랑, 언약, 믿음 등등]

요나의 표적이 되는 만나 곧
해석 안당하는 불가 만나(생명)
지킴 안당하는 불가 만나(생명)
먹힘 안당하는 불가 만나(생명)

이 두 양쪽 과정을 거침으로써 예수님을 비로소 누구십니까 라고 묻게 된다.

그러나 답변이 참 야속하다. 전혀 친근감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수 없다.

너가 죽인 나사렛 예수 다

자신을 뻔뻔스럽게 전의 남편, 전의 메시야, 전 하나님과의 차이성을 드러낸다.

(롬 7: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2, 개역)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 7:3, 개역)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너의 전의 하나님, 전 남편, 전 메시야는 죽었다 라고 외친다.
뻔뻔스러운 나사렛 예수가 말이다.

그리고 너의 전 주인을 내가 갈기 갈기 찢어 죽임으로써 너도 죽었다.
그리고 너를 그 죽음에서 빼내에서 내가 너의 주인이 되었다 왜 꼽냐?

주인 싸움 보호자 싸움에 너는 전리품으로써
전쟁 승리의 증거물이 되었다 라는 점에서 영광 스럽다 라는 것이다.

내 영광 일체 다 단절된 못때빠진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영광만을 드러내는
창세전의 예정의 잉여(은혜)만을 드러내는 요나의 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자살할 만도 하다.

그러나 영광을 미리 봐 버리면
입이 쑥 들어간다.

채널이 갑자기 확 바뀌어버린다.

좀 전의 그 심각한 죽고사니 하는 그 심각성도

문제 없어 문제 없어 문제 없어

아무런 문제 꺼리가 되지 않는다.


그저 그 영광만을 본 그 자체만으로

감사 감사 감사 뿐이다.

누가 날 위해 죽으러 갈래?


저요 저요 저요

제가 죽으러 가겠습니다.

너의 죽음 필요 없다.

네네 압니다. 나의 죽음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을 이 땅에 쏟아 부어버리겠습니다.

그 죽음이 옳았습니다.

그 피를 쏟아 붓겠습니다.

그 피가 옳았습니다.

인간의 살아 있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저요 저요 그 피를 쏟아 붓겠습니다.(인간은 못한다. 철저한 소외요 배제 당함이다. 총알받이만 한다.)

(사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피를 쏟아 붓는 것이 성령행전이다.

피를 보고서
얼마나 어리석으면
얼마나 미련하였으면
얼마나 요나의 표적이면 

도통 알수 없는 비밀인지를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모르고

도저히 고침받지 못하도록 (단절=희년)

피를 쏟아 붓겠습니다.

이것이 선지자 자신의 자살 소동에서
예수님의 자살로 옮기움을 당하는

피로 교체된 상황이다.

매일 매일 그 피 때문에

낯선 분을 만나서 나오는 (우발)
매일 매일 새로운 피가 묻은 나사렛 예수를 만나면서 말이다.

당신 누구야?

(행 9:3, 개역)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개역)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개역)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22:8, 개역)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6:15, 개역)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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