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짓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오전 11:20:22   김대식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더럽고, 썩은 냄새가 나고, 부정스러운 불륜의 음행이며,
불의하며, 가식적이며, 위선적이며, 위법하며, 악한 짓.

꿈과 잠 그리고 죽음


방금 Sarah Brightman - Eden - 10 - Nella Fantasia  이라는 음악을 들었다.

잉여의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다.

잉여를 나름대로 흉내내는 세계 곧 그림자 세계도, 그 영광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실상의 세계는 오죽하랴?

그러나 막상 이 음악을 듣다가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그 인간은 과연 아름다운가 하는 점이다.
노래를 부르는 자는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지만 과연 아름다울까?
이 아름다운 곡을 작곡한 자는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만들지만 그 인간 자체는 아름다울까?

미술이든 음악이든 상관없이 모두 다 말이다.

물론 우리는 안다. 모두다 전혀 아름답지 않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래서 전혀 아름답지 않다 라는 의미로 글을 적어 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전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아름다움이다 라는 의미로 적고자 한다.

즉 더럽다.

아름답지가 않음을 본인들이 너무나 알기에 그것을 추구하다 보니 나온 것이
바로 창작품들이다. 그것도 아름답게 ...

결국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사실상 더러운 곳을 이리저리 헤매였다는 뜻이다.

얼마나 더러운 짖과 썩고 어둡고 캄캄한 곳을 헤매였으면 저런 아름다움이 나올까?

넘버3 라는 영화에서 백조가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것은
사실은 밑바닥에서는 볼쌍사납도록 발길질을 해대야 나오는 폼이라는 것이다.

상대적인 우발적 잉여품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입에 단내가 나고
입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썩은내가 날 정도로 반복에 반복
반복에 반복 계속 연습에 연습을 했으면

저 한번의, 저 단번의 우발성이 영광의 극치를 이룬다.

물론 또 다른 우발자가 또 나타나서

그 보다 더 반복에 반복, 연습에 연습,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입이 부풀어 오르는 썩은냄새가 더 심하게 날 정도로
연습했다면 그 이전의 잉여 보다 더 나은 잉여로써 또 영광스럽게 빛날 것이다.

잉여는 흐름을 만들지 고정적이지 않다.

그 흐름만 타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빨리 한계에 부딧쳐라 라는 것이다.

빨리 한계에 부딧히는 오늘 또는 잠 또는 꿈 또는 죽음 이다.

만나(묵시, 사고, 충돌, 은사, 수고)가 오늘의 잉여물로써 끝이다.
내일까지 이어지질 않는다.

당연히, 내일까지 이을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내일의 잉여는 내일 또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아주 우발적으로 말이다.(마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그래서 오늘 말하고자 하는 잠 또는 꿈 또는 죽음이란

바로 오늘 하루의 정점을 찍어주는 감사물 곧 잉여물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하고자 하는 주제 더러움 곧 한계이다.

(눅 17: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벧후 3:8, 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라는 찬양을 떠올릴때마다.

(사 11:9, 개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합 2:14, 개역)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큰 세수대아의 물이 온천하의 물을 덮고도 남는 식이 여호와의 지식이 펼치시는 묵시의 방식이다. (여기서 큰 세수대아라고 했지만 성전에서의 물두멍을 말한다. 그 물두멍의 별명을 바다라고 했고 그 물두멍에 물을 채우면 바다를 덮는, 채우는 물인 셈이다. 결국 바다라는 죽음 곧 밑바닥을 채우는 것은 여호와의 심판인 물 곧 긍휼이다. 즉 성령을 부으시겠다는 것이다.)

전우주의 묵시는 단 하루의 역사를 깨고자 쳐들어 올 때
그 단 하루는 잠시 단 하루를 살아도 전우주의 묵시 전체를 다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잠이요 꿈이요 죽음이다.

하루의 한계를 빨리 알아라 라는 것이다.

잠과 꿈과 죽음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 한계점을 도달했을때에
자신의 영역 바깥을 볼때에 인간은 무한한 한 점에 지나지 않는 그저 티끌뿐인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다.
(결국 바다 곧 물두멍은 육체처럼 그릇으로써, 뭔가 쓸데없는 것 가득차있는 것을 비워버리고 다시 새로 뭔가를 채우겠다는 것이다. 성령이다. 육체를 그릇 삼아. 과연 그 육체는 육을 자랑할 수 있을까? 성령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감당이 불감당이다. 본인 부터가 죽어난다  죽어나. 이것이 인자의 방식이다. 이전 것을 치시면서 줘 놓고 빼앗아서 다시 새로운 것을 세우시는 방식. 주께서 내 주께 의 방식. 십자가 표적이다.)

(행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그것이 바로 다윗의 밧세바사건이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닭 울음 3번 사건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열심히 나사렛 예수를 핍박하는 다메섹 사건이다.

이 자신의 한계를 빨리 빨리 또 격고 또 격어서 매일 매일 한계에 부딧치는 것이

바로 잠이요 꿈이요 죽음이다. (육이 퍼뜩 퍼뜩 후패함에 부딧힌다는 것은,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움에 감당할 길이 없어 좋다고 죽어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

빨리 한계에 부딧히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 한계점이 바로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할 모태점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더러운 자임을 아는 정점이다.

그 한계에 부딧힌 정점인 응축점에 상대적인 응축점이 다가온다.
지성소를 찢고서 말이다.

그리고 모태점을 교체한다.

욥에게서 엘로힘 하나님은 더러운 것으로 규정 된다. 썩은 것으로 규정된다.
분명 좋은데 그 영광도 감당할 길이 없는데 그 다음날이 되면 썩었다.
그 다음날이 되기 전까지는 알수가 없다. 썩은 것인줄?

그래서 미래 완료의 시선으로써 미래가 쳐들어 와서 그 미래의 시선에서 보니
욥은 자신이 더러운 자임을 알게 된다.

모태의 태 중에 벌써 죽었어야 마땅한 더러운 자임을

그것도 모르고 고통이라는 둥 아픔이라는 둥
함부로 입을 놀렸으니

고통과 아픔이 외부에서 욥을 아프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욥 자신이 음부 곧 원수의 성문임을, 자기 안이 더러움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

(마 15:1, 개역)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마 15:2, 개역)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마 15:3,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마 15:4, 개역)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마 15:5, 개역)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마 15:6, 개역)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마 15:7, 개역)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마 15:8, 개역)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9, 개역)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10, 개역)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마 15:11, 개역)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2, 개역)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마 15: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 15:14, 개역)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 15:15, 개역)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마 15:1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마 15:17, 개역)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마 15:18, 개역)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9, 개역)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마 15:20, 개역)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더러움은 안에 있었다.
외부적인 바깥 환경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밖의 환경이 너가 더럽다고 그동안 내 입속으로 들어와서 고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음부인줄 지옥인줄 모르고 그것을 넙쭉넙쭉 받아먹었으니
그들은 내 입속에서 지옥 속에서 고통스러워 했던 것이다.

(마 15:11, 개역)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렘 17:9, 개역)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우리 인간은 자신의 입이 지옥인줄 모른다.
자신이 모든 원인의 원천지 모태인줄 모르고
바깥 환경 때문이라고 더러운 마음에서 더러운 입으로 외친다.

(마 15:18, 개역)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9, 개역)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마 15:20, 개역)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이제 입을 막고 머리를 엎드린다. 아플 자격 조차도 없음을 알았다.
아픔을 느낄 권리도 없음을 안다. 그저 입을 틀어막을 뿐이다.

(약 3:6, 개역)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아픔도 죽음도 괴로움도 고통도 모조리 한계에 부딧혀 버렸기 때문이다.
벽이 생겼다. 그 벽에 부딧히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고통을

영광을 봐버렸다. 그 영광에 진작 타죽지 않은 것이 도리어 신기할 뿐이다.
그래서 오늘의 한계
오늘의 아픔은 아픔이 될수 없다. 모두다 변명일 뿐이다.
처음부터 더러웠고
처음부터 마땅히 아파해야만 했고
처음부터 고통스러워야만 했었던 것을
한계라는 벽에 부딧힘으로써 알게 된다.

정점을 찍어버리는 소멸하는 불로써의 형상

그 형상을 쳐다봐버렸다.
인자의 형상이다.

그 벽으로써 나타난 인자의 형상이 오히려 고맙다.
꽈당 하고 그 벽에 부딧혀야 한다.

인자에 걸려 자빠져야 한다. 홀라당 밀끄덩 미끄려져서 굴욕의 굴욕을
종말의 종말을
한계에 한계를
걸림돌에 걸림돌로

깨져 산산조각이 나야 한다.

아픈 나도 날라가고
모조리 공중분해 되는 것이
차라리 감사한 것이다.

지옥이 박살나듯
무덤이 박살나듯
사망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다.


(막 7:15, 개역)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막 7:16, 개역)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 7:23, 개역)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모든 밖의 배치물은 바깥을 교체함이 아닌 [속의 안]을 교체하기 위해서 동원된다.
심지어 욥기에서 하나님은 마귀까지 동원해서 마귀를 약올려서 내기 장기를 두듯이
외부의 모든 환경을 욥에게 속의 가짜 하나님 엘로힘형상을 교체하기 위해 동원시킨다.

주님이 주신 형상인데 주신이 주신 언약인데 그 언약을 세우시고 다시 허물어 뜨려 버리신다. 선악과형상은 마귀를 잡기 위한 미끼였다.

왜 그런 쓸데 없는 형상에 빠져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흡한 거룩은 다 깨뜨리시고
미래의 완료 형상만을 추출해 내신다.

그 과정에서

왜 선악의 형상, 또는 엘로힘 형상, 또는 죄인이 아는 그리스도
또는 미흡한 형상, 또는 미온존, 미완전, 미완료, 미거룩,

즉 한계점에 부딧히지 않은 형상,
한계점에 부딧히지 않은 거룩,

등등이 진짜 미래완료가 와서 뒤에서 꽈당하고 박아서 쓰레기 과거 차량을 삼켜버리고
새로운 빨간 신차가 등장하듯이 (어떤 CF 광고처럼)
그 과거의 것이 짤리는 과정, 그것을 징계 라고 했다.

철썩같이 믿고 따랐던 그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이고 그 가짜하나님으로부터
배신 배반 버림당함 짤림 소외 저주 차단 단절 심판 받았을때에
그 한계점의 정점을 찍었을때에

자신이 더러운 지옥문이요 원수의 성문임을 비로소 아는 것이다.

죄인이라고 성령으로 인해 고백한다. 성령 곧 십자가의 영 이라는 새차에 꽈당 박은 것이다.

꽈당 박지 아니하면 계속 그 더러운 짓을 한계점 없이 계속 해 댄다.

기도
믿음
찬양
예배
봉사
순교
신학
교회
직분
은사
충성
금식
회개
구제
헌금
십일조
주일성수
성화
기타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더러운 줄도 꿈에도 모르고써 말이다.

오죽 하면 한계점으로써 꽈당하고 박아줘야
벽으로써 와야

비로소 멈춘다.
(이스라엘 중에 있었으면서도 더러운줄 몰랐습니다. 화로다 나는 망할자 더러운 입술 뿐입니다.
제단 숯불로 그 더러운 입술을 지져버린다.)

욥에게 닥친 그리스도는 예수님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형상을 보고
자신이 그동안 알아 왔던 하나님은
자신이 상상해 온 우상임을 알게 된다.

온전함을 만나면 죽는다.
긍휼을 만나면 죽는다.
거룩을 만나면 살아갈 자격
구원받을 자격조차도 없음을 안다.

(마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완전을 히브리서에서는 온전 이라는 의미로 표현 되었다.

(히 7:19, 개역)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 7:25, 개역)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8, 개역)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히 9:9, 개역)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히 10:1, 개역)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14, 개역)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 10:22, 개역)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1:40, 개역)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12:2, 개역)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화요일에 말했듯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있는 그 분을 보면

비로소 남이 아닌 나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창녀임을 보게 된다.

오죽 하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야 할 정도로
그리고 두 개의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검을 주러 왔다.

검이란 짤려야 함을, 찔려야 함을 마땅하다는 증명한다.
죽음은 당연한 것이다.

칼 앞에서 비로소 더러움이 밝혀진다.

칼이 나타나 줘야 한계점을 찍는다.

칼이 고맙다.

참 가볍지요잉?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칼을 든 분이 살짝 미소를 치면서 시퍼렇게 칼을 갈면서


내게 온나 오라카이

말라고 멋땜시 무거운 짐(엘로힘 형상)을 그렇게 힘들게 어깨에 짊어지노?

내가 짤라주마 ! 봐래이? 이 칼 죽이제? 십자가 절대로 안무디데이!
뭐든지 기가막히게 잘 짤라버린데이. 맞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다.

그저 그 칼을 만나기 전에는 안더러운줄 알았다.

칼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더러운 짖임을

나 라는 입과 마음 그 원천의 자리가 더러움 뿐이였음을

입을 막으면서 외친다.

퍼뜩 짤라 주이소마 !

(요 4:28, 개역)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개역)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매일 매일 죽노라, 매일 매일 한계점의 정점을 찍는 자는 긍휼을 만난 자 이다.)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2, 개역)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 15:33, 개역)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 15:34, 개역)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 15:35, 개역)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 15:36, 개역)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 15:37, 개역)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고전 15:38, 개역)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 15:39, 개역)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 15:40, 개역)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 15:41, 개역)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42, 개역)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3, 개역)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4, 개역)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1,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개역)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8, 개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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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두멍

※ 에스겔의 새 성전의 구조(97 목회자 수련회, 이근호)

에스겔은 44장부터 47장까지 새 성전이 나타나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한 논문은 거의 전무한데, 그만큼 학자들이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새 성전의 크기는, 한쪽이 250M이고 다른 한쪽도 250M로서, 가로세로와 높이가 250M인 정방형이다. 성막에는 동쪽으로 문이 하나밖에 없는데, 새 성전에는 문이 3개가 있고 계단이 7개이고, 그리고 방이 6개가 있는데, 이 방이 문지기 방인데, 다윗이 말한, 내가 주의 성전에 문지기라도 좋다고 한, 바로 그 문지기 방 말이다.
이 계단을 올라서면 뜰이 나오는데, 돌로서 막아놓았다. 이 뜰을 '바깥뜰'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다시 올라가면 이번에는 계단이 8개가 나오는데, 남쪽과 북쪽과 동쪽에 계단이 8개가 다 있다. 여기에도 뜰이 나오는데, 이것을 '안뜰' 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각각 방들이 있는데, 5개씩 있다. 이것이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방은 각 층에 30개씩 해서 총 90개가 있다.
바깥뜰에 올라가면 제단이 있는데, 4층으로 되어있는데, 그런데 이 제단의 모습은 성막에서 모습과는 다른데, 성막의 제단은 단층으로 되어있다. 그 직경이 약 5M로서 꽤 큰 다락이 큰데, 이것을 '물두멍' 이라고 하는데, 크기에 별명이 '바다'이다. 이 물두멍의 기능에 대해서는 손을 씻는다든지 여러 주장들이 있는데, 아마 다양하게 쓰였을 것 같고, 그리고 이 물두멍을 동서남북으로 4마리의 황소가 받치고 있다. 그런데 그 앞에 보면, 떠받치는 놋 기둥이 2개 있는데, 그 높이가 60M 정도로 아파트 20층 높인데, 그기둥의 이름이 '야긴'과 '보아스'이다. 이 두 기둥을 지나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가 있다. 제단, 물두멍을 통과하면 지성소가 나오는데, 이렇게 성소와 지성소를 연결하는 것을 가지고 '문지방' 이라고 한다. 
나중에 에스겔 47장을 보면, 이 문지방에서 신기하게도 물이 흘러나오는데, 발목, 무릎 순으로 차고 넘치는데, 그런데 이 물이 어디를 겨냥하는고 하니까, 왕이 제공한 땅을 생명력으로 채운다. 그 옆에 방이 각 층마다 10개씩 30개가 있는데, 이것이 3층으로 90개가 있는데, 이 방은 제사장들이 옷을 벗어놓거나 제물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에스겔의 새 성전은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보여준다는 점인데, 이렇게 측량한 데로 지은 성전이 있었는데, 그것을 '헤롯성전' 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 있는 성전은 그 유사한 것이 있지 실제의 그 성전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새 성전에 동쪽으로 문이 있는데 닫혀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3장 24절의 생명나무 동쪽으로 가는 길을 천사를 동원해서 막아놓았음을 연상하게 한다. 왜 지키는가? 못 들어오도록 지키는데, 그러면 어떤 자가 지키는가?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못 들어오도록 지킨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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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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