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특이성

[악마를 보았다]와 [성도의 특이성]

2010년 8월 12일 목요일 오후 8:32:33  김대식




악마를 보았다를 보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악마가 보이지 않았다.
악마를 보았다고 하길래 디기 궁금했었는데!

오히려 천사 될려고 발버둥치는 어설픈 악마되기를 시도하는 사람만 보였다.

도대체 악마는 어디있을까?
악마는 어떻게 생겼으며 어떨 때 볼수 있을까?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악마 일까? 악마가 하는 일은 뭔가?
무엇을 근거로 악마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너무 억지로 이 영화의 부족한 점을 혼자 다 카바할려는 무리함이 보였다. 아니면 이 배우한테만 그 짐을 짊어지울려는  ...  그래서 일까? 아무도 악마를 본 자가 없었다.)

과연 악마를 본 자들이 있을까?

문제는 악마 조차도 해석불가이다.
악마는 해석불가이다.

악마를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이 땅의 인간 중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이유는 뭘까?

지가 악마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악마로부터 해석 당하는 인간 외에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악마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김모모 의 설교를 듣고 거지 나사로의 상대적인 부자와 또 그가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기존의 한국교회가 이런 식이다 라고 하는 그 바리새인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거지 나사로의 상대적인 의미로써 악마를 해석했다. 고로 거지 나사로는 죄인으로써 구원받을자 라고 했다.

문제는 그럼 예수님이 말하는 악마는 구지 규정 될 필요 없이
바로 그런 해석으로도 충분히 악마와 구원받을자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도 충분히 과연 악마를 규정할 수 있을까 하는가 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악마를 성경을 통해서 규정해 본들
나에게 악마라고 규정 당할 그런 멍청한 악마는 없을 것이다.
(사실 깜짝 놀랬던 것이 이끼와 레위기 라는 글을 올릴려고 했을적에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신나게 올렸다. 그런데 막상 딱 올리자 마자, 글을 등록하자마자 아뿔사 김모 목사의 주장과 똑같다 라는 생각이 갑자기 업습했다.

뭐야 똑같잖아 ! ?  글을 내려버려? 그러나 이런 글도 올려 봄으로써 나름대로 평가도 받아봄이 좋을 듯 싶다 생각 되어 그냥 내버려 뒀다.
아무도 비판 하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이 목사 외에는)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어제 강이아빠랑 대화를 하는 중에
이스라엘의 특이성 또는 성도의 특이성에 대화를 했고 오늘 이 영화를 보고 둘을 대조해 봤다.
(사실 박윤진씨 글에 사랑과 계명 지키기에 이 특이성을 주제로 댓글 달고 싶었는데 키보드 고장으로 못했다. 마침 오늘 본 영화와 연관해도 되겠다 싶어서 적어본다.)

그런 와중에 우발적으로 아가서 내용이 갑자기 생각이 되어짐을 당해서
쭈욱 설명을 했다.

처음 듣는다고 했다.

아니다 저번에 우리교회 여름수련회때 아가서 다루었다 거기에서 나온 내용을 언급한 것이다.

하긴 나도 그 때 처음 듣는 내용들이였으니까 말이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솔로몬 왕의 마음을 뒤 흔들어 버린 여인이 바로 특이성이라는 것이다.

뭐가 특이성인데? 뭐가 매력인데? 뭐가 왕의 마음을 그렇게 애달케 만들었는데?

참말로 말로 들으면 기가막힐 일이다.

특이성인데

19 금 빨강 동그라미 인데


아무리 봐도 특이성이 없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특이성이다.

참 희한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도대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구원이
아무리 봐도 구원 받을 조건성이나 그 어떤 구원성이 없다 라는 것이다.

아무리 들다 봐도 왜 내가 구원 받아야 하는지 그 구원 받는 당사자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불가능성이라고 한다.

또는 주의 이름이 담겨진 그릇(기능))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모모 목사는 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써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니까 그 원하심에 우리는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옥 갈 자도 왜 지옥에 가는지 그 해석은 불가능이다.
천국 갈 자도 왜 천국 가야만 하는지 그 해석은 불가 하다.
어떤 근거도 어떤 조건도 어떤 이유도 없다. 만약 그 이유를 말하고 천국 간 조건
또는 이래서 지옥 갔다 라는 그 이유를 댄다면 그것은 아주 아주 의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을 강이아빠에게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이 특이성은 없애버린채
도리어 보편성을 갖추어버렸다 라고 설명하면서 아가서를 이야기 했다.

그 보편성에 바리새인이 아주 당당하게 그 보편성을 자랑하고 예수님에게 까지 당당하게 그것을 앞장세웠으니 예수님에게서는 그것이 바로 악마인데 독사의 자식다움인데
그것을 지적해 버리니 악마로 몰아 버린 것이다.
맞다 악마를 본 자들이 졸지에 생겨버렸다.

악마는 예수님이였다.

즉 악마는 예수님 외에는 규정할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예수님을 악마라고 규정하는 인간들이 생겨남으로써
악마라고 규정되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악마 취급 당하는 가운데에 자신만의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새롭게 창조해 낸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은 바로 이스라엘의 특이성이다.

곧 잃어버린 자 이다.
(곧 되찾는 예수님의 특이성을 염두한 것이다. 잃어버림과 되찾음을 해석할 길이 없다.)

(요 9:7, 개역)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막 7:24-30)

그 특이성을 혈통 유대인은 도리어 발로 차버렸고(부끄러운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도리어 보편성으로 갖추었다.

사실상 그 특이성은 주의 주 되심인데 도리어 반대로 해석한 것이
다른 개같은 이방인보다의 차이성 곧 특이성을 그들만의 보편성으로 갖춘 것이다.
(놀랍게도 잃어버림이란 예수님만의 특이성인데 누가 그 잃어버린 마음에 부합이 되는가?
다들 하나씩 하나님을 지숨 지숨 소유하고 허리에 차고 있는 마당에?)

자 그렇다고 보편성으로 갖추고 특이성을 발로 차버렸다면 인간 쪽에서 구색을 갖춘 것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보편성 특이성이 인간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의해 좌우되면서
유발케 된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자작극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쳐서 특이성을 갖춘다 까지는 김모모 씨 까지 다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옥 갈자도 예수님을 거쳐서 보편성을 갖춘다 라고 한다면 김모모 씨는 그 부분에서는 모르겠다 라고 빼야 자신의 주장이 옳게 된다는 식이다.

만약 지옥 갈 자도 아무 이유 없이
예수님에 의해 좌우 되어서
예수님 때문에 지옥 가게 된다고 하면
졸지에 예수님이 지옥 보내는 주체자가 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예수님이랑 맞지 않게 되니
거기에 대해 묵묵부답이 될 수 밖에 없다.

만약 그것이 맞다 라고 주장해 버리면
앞의 주장이 틀리게 된다.

지옥 갈 조건은 예수님에게만 좌우되는, 이유 없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미움이다. 이 얼마나 특이한가?
즉 불가능 성 이다. 특이성이다.

그런데 그 목사의 주장은 이 특이성을 자꾸 인간에게 주어진 숙제인냥
또는 그 특이성을 자꾸 보편적으로 바꿔 치기 하는
그야 말로 독사의 자식들이 한 짖꺼리와 같게 된 것이다.


강이아빠에게 아가서 내용에서의 특이성을 이렇게 말했다.

19금 이다.

술람미 여인을 솔로몬 왕이 사랑하는데
정작 술람미 여인을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나 가족은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이다.
전혀 특이성이 없다 라는 것이다.

사랑 받을 이유나 조건 그 어떤 것도 없는데
어떤 사내의 마음을 불 질렀다고 하니 다들 특이하게 느낄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자로써의 여자 다움이 일체 없다 라는 뜻이니 사랑 받을 이유가 없다 라는 것이다.
얼굴은 섬머슴아 같은 남자 같고
피부는 태양 빛에 거슬려 새까맣고
손을 너무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남자같이 굳은살 배인 딱딱한 손이다.
부드러움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손 잡을 때 그 감미로움맛은 없다.
쇳덩어리 만지니 차가운 냉기를 누가 좋아라고 만지겠는가?
손이야 말로 모든 자신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인데?
손만져보면 정이 딱 떨어진다.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큰 신체성이 바로 가슴 유방인데

이 여성은
가슴이 가슴이 가슴이 ~~~ 절벽이다.

뒤로 돌아서도 앞으로 돌아서도 같다.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알수 없다. 이거 성희롱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라.

아이를 낳아서 생명을 잘 키우고 건강하게 키울 조건 조차도 없다 라는 것이다.

또 여성의 신체 특히 아름다운 유방과 에스라인의 엉덩이는
다산의 여왕을 상징하는 어떤 생명의 풍요로움을 표출한다.
그것이 진선미 이다. 참됨, 착함, 아름다움 -은  아이(생명) 때문이다.

그런데 진선미가 아예 없다.

도리어 절망이다.

남자가 봐도 고개 돌릴 여자, 추녀이다.
여자가 봐도 넌 시집 가기 걸렀다 라는 여자이다.

다들, 어떤 누구가 과연 추녀가 될려고 몸부림 칠수 있을까?

도리어 성형수술의 건젹이 엄청나게 나오든 말든 미인이 될려고 몸부림 만부림 하지

누가? 추녀 되게 성형수술해 주세요 라고 할 자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했다. 미 라는 아름다움을 불 속에 죽음 속에서 집어 넣어서 바닥을 치는 미와 죽음 뒤의 지혜를 요청한다. 아름다운 미와 왕의 여자가 된 것은 바닥치라고 준 것이란다. 전쟁이다.)

또 이렇게 말하니까 추녀 될려고 성형수술하자 라는 식이 바로 김 모 목사다.

구원이 된 다면 무슨 짖이든 못할까?

거지 되자 란다. !!!

말이 되나?  누가복음에서 한 과부요 한 문둥병자 다 라고 한다. 많은 과부 많은 문둥병자가 아니다.
이 말은 불가능성인데 특이성인데

이것을 특이성을 발로 차버리고 보편성으로 말해 버리니
가능성으로 보이게 사기를 치는 것이다.

그 특이성이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신약의 해석으로 증거 된다.
(로마서 4장=행함의 반대적인 의미로 믿음을 언급)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믿음이 하셨다 라는 것이다.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창녀 세리 강도를 앞장세워서
들이대신다.

바리새인 앞에서는 전혀 특이성이 될 수 없다.
자신들이 보편성을 갖춘 입장에서 오히려 그들은 정죄깜이 된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악마 곧 독사의 자식으로 그 순간 맹글어 버리는 근거가 되어버린다.

예수님은 악마를 새로 만들어 낸다.

그러니 이 전에 또는 이 후에 악마를 봤다 라고 할 자는 아무도 없다.

가룟유다가 악마인줄 그것은 예수님만의 해석이다.
아무도 설마 설마 아무도 몰랐다.

베드로가 사탄이였지만 가룟유다를 보는 베드로의 시선은 보편성일 뿐이다.
그러나 베드로 본인이 사탄 됨을 거쳐서 새롭게 특이성을 창조함을 당하게 되니
비로소 왜 가룟유다가 마귀인지 알게 된다.

예수님이 새롭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가지고서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예수님이 본인이 증거하니까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특이성(약속) 거부가 나타난다. 비로소 말이다.

마치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장자권을 빼앗을려는 집요성을 부어버리고
반대로 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장자권이 뭐 대수냐? 일단 배불리면 도리어 찾으면 되지 라는 식으로

장자권(언약)의 특이성을 소홀히 여겼다는 의미를
여호와 하나님이 마치 알리바이 잡았다고 좋아라 하신다.
누가 봐도 함정수사인데
그 큰 하나님이 조그마한 개미처럼 작은 인간에게 유치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시는 것이다.

특이성에 대한 양보 못하겠다는 점에서 이다.
무슨 수로 이 특이성을 인간이 해석해 내겠는가?

그런데 사실상 그 특이성은 술람미 여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솔로몬이 그 여인에게 심은바 라는 것이다.

자기 이미지를 자기가 심고 자기가 도리어 찾아내는 식이다.
자기의 특이한 사랑(약속)을 자신이 심고서는 자기가 찾는 식이다.

이것이 죄인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아닌
예수님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차이인 것이다.

주의 주 되심이란
말씀이 말씀 스스로 증거하는 바이지
인간이 말씀을 세워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비켜 가신다.
불가능으로 말이다.
그 불가능이 주의 주 되심인데
말씀을 세우시고 그 말씀은 말씀이 부서버리고서 다시 말씀을 이루시는 방식이다.

여기에 참 선지자들은 도저히 개입을 할수 없어서 자살요청을 한다.
시키는대로 했는데 부셔버리니
차라리 날 죽이라 라고 삐지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변론 이라고 한다.

변론 하자

(욥 40:2, 개역)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사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사 3:13, 개역)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사 41:1, 개역)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하여 서로 변론하자』

(미 6:2, 개역)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함 따지고 따져볼래? 라는 뜻이다.

또는 같은 의미로 다리미질로써 평탄케 한다는 성령의 부정적인 집단보편성이라고 한다. 즉 종말의 심판이다.

삐치고 자살을 요청하고 차라리 날 죽였버리세요 라고 나올때에
비로소 완료가 덮친다.
불가능이 덮친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렇게 불만을 토하던 변론하던 자들이
갑자기 평탄케 되는 입이 찌져진 자처럼 입이 튀어나온 그 굴곡들이 평지가 된다.

욥은 머리를 쳐 박고 아까말 취소 취소 제가 감히 누구이신줄 감히 몰라보고 헛소리 했습니다 라고 외친다.

즉 하나님이 자기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니였다는 것이다.

도리어 그런 하나님을 치는 하나님이였다.

맞다

하라고 시켜서 했던 그 말씀을

말씀 본인이 그 말씀을 뿌셔버리고서 새롭게 세워지는 말씀이다.
그 말씀을 만나니 자신이 전에 알던 말씀이 아니고 처음 보는 말씀 앞에서
머리를 쳐 박고 감이 입을 띠지 못한다.

입을 틀어막는다.

이것이 술람미 여인에게 심은 술람미 여인의 특이성이 아니라
솔로몬 자신의 특이성이였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울부짖음에 욥은 보고 입을 틀어막는다.
자신의 고통을 외쳤고
몸이 건지러워서 밤잠도 못잔 그 지친 몸에서 겨우 겨우 나온 나온 목소리
제발 좀 날 좀 봐주세요 고쳐 주세요 라고 외치는 그 외침 보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진짜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버리니
구원은커녕
심판이 아닌가? (종말의 종말)

하나님도 심판 받는데
하나님도 심판 받는 판국에 나의 구원이고 뭐고
그 하나님의 울부짖음 앞에서 자신의 외침을 감히 새어 나갈수가 없다.
도리어 틀어 막아야 한다.

이것이 특이성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 특이성을 가지고서
유대인의 하나님을 쳐 버린다.

그리고 진짜 이스라엘에게만 보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특이성인

잃어버림을 찾는다. 99마리가 아닌 한 마리 찾는다.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그리스도의 특이성

예수님의 형상(특이성)은 잃어버림의 형상이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이 특이성을 보편성으로 갖추고
도리어 이 특이성을 발로 차버린다.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거부한다.
또 예수님의 특이성으로 지은바 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곧 특이성인
실로암 소경을 그들은 거부한다.

스스로 약속(장자권)을 소홀히 여기는 알리바이를 유치하게 확보하는 특이성처럼
지독한 미움을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보인다.

마치 어리석은 인간이 유치하게 예수님에게 악마다 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크신 사랑의 예수님이 유치하게 인간에게 보복하는냥 똑같이 퍼붓는 식이니?

누가 알겠는가?

너무 너무 특이하다.

천국에 갈 이유가 아무리 찾아도 없다.
지옥에 가는 이유 조차도 아무리 찾아도 없다.

오로지 예수님의 마음대로 이다.

이 특이성을 담는 그릇은 그야말로 특이하기 짝이 없다.
그 그릇에 담겨지는 특이한 희소가치의 보물 때문이다.

긍휼을 담아서 긍휼의 그릇을 드러내는 참 특이한 그릇이고
(자신이 왜 긍휼을 담고 왜 긍휼의 그릇이 되어야 하는지를 해석할 길이 없다.
해석 불가이다.)
진노를 담아서 진노의 그릇을 드러내는 참 특이한 그릇인 것이다.
(자신이 왜 원치도 않는 진노를 담고 왜 진노의 그릇이 되어야 하는지를 해석할 길이 없다.
해석 불가이다.)

토기장이는 그릇에게 해석 당하지 않는다. 긍휼도 해석불가요? 진노도 해석불가일진데?
토기장이는 오죽하랴?

악마도 해석 못하는 주제에? 예수 그리스도를 무슨 수로?


(롬 9:9, 개역)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롬 9:10,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개역)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그릇은 기능성이다. 이스라엘은 기능성일 뿐이다. 특이성은 결국 보물 때문이다. 보물이 자신을 자신 스스로 드러내는데 있어서 기능으로 이스라엘을 그릇으로 삼았을 뿐인데 그것이 솔로몬이 심은 자신의 특이성인데

술람미를 흉내내는 자들은 그 특이성을 엉뚱하게도 보편성으로 해석하고서는 그것을 조건인냥 갖춘다.

보물도 해석 될리가 없듯이 그 보물을 담은 특이성인 그릇 조차도 해석할길이 없는 불가능성이다. 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해석하는 자는 의심해 보는 것은 당연하다.)


 

[선지자의 자살요청] 소동과 vs [누구십니까?]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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