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특이성2

마귀 보란 듯이

2010년 8월 14일 토요일 오후 12:40:37 김대식


아 이제야 변환잭이 택배로 도착해서 마음껏 쓸수 있게 되었다.
조금만 불편해도 얼마나 답답한가?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을 위한 장난감일 뿐인데.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하나님이 장난치는 농락하심에서 드러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반드시 악마 마귀를 끌여들여서 그 충돌에서만 이스라엘의 특이성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마귀에게서 하나님 자신이 자랑하고픈데서 비롯된다.
보란 듯이 자랑하고 놀려먹는 그래야 시기가 나타나지 않는가?
(소송이 무용지물이 되는 그 소송의 바닥을 치게 말이다. 마치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마귀의 충돌케 함은
동일하게 일부러 죽은자와 방불한(특이성) 현장에서 간음하다 자힌 여인과 vs 법을 쥔(보편성) 바리새인의 만남을 유발케 함으로써 예수님의 개입만이 주체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방식 외에는, 이 어리석은 방식 외에는 지혜란 없다) 


마귀와의 충돌이 아니고서는 그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그 진가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 특이성이란 결국 마귀가 어쩔수 없는 것이다. 곧 피다.

악마는 더 이상 더 나은 제사 곧 특이성 곧 십자가 라는 약속 완료 만큼은 손댈수가 없다.
그래서 깨고 깨고 깨는 갱신은 주님 스스로가 펼치신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심은 자신의 특이성을 마귀에게 자랑하고픈 것이다.

곧 언약이다.
(깨도 깨도 이상 깨어지지 않는 최종 갱신의 언약 바로 십자가 긍휼의 피 언약이다.)

이 피와 충돌 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약속이라는 특이성이,
이 원치도 않은 특이성이, 주님에 의해서 자작극으로 농락꺼리로 심겨진바 인데,
이 이스라엘은 착각을 해서 자신의 숙제로 (선악으로 언약을 해석)
마귀를 이길려고 하니 마귀를 이길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그렇게 말려든다. 마귀는 이길수 없다. 이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괜히 말려들었어 괜히 말려들었어. 이 영화의 최종적인 승리는 결국 죄책감이 양쪽 모두를 이겨 버린다.
쓸데 없는 죄책감만 불려버린다. 화인침 받은 것이다. 더욱더 딴딴해져 버린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숙제로 이길려고 달려들다 보니
(그 농락에 왜 말려드나? 괜히 선악과 따먹은 것이다. 괜히 하나님이 되어 회칠한 딱딱한 돌삐 우상이 된다.)

주님께서 심은 그 특이성이 도리어 보편성으로 회칠한 무덤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그 보편성을 거쳐서(단절) 최종적인 갱신의 언약으로써
그 단절을 깨고 언약을 다 이루심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잃어버렸기에 예수님 자신이 찾는다.

우리가 잃은 것은 없다. 잃어버린 당사자는 예수님이기에 찾는 분도 잃어버린 당사자가 찾는 것이다.
마귀에게 자랑하고픈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여기서 보편성과 특이성을 대조 시켰는데
보편성은 가능성이며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즉 제사다.

그러나 특이성은 더 나은 제사이다. 더 낫다 라는 기준이 우리에게서 날 수 없다 라는 뜻이다. 결국 인간에게 아무리 특이성을 줘 봤자 인간의 손에만 닿으면 보편성으로 변해 버린다. 인간에게 준 성전이 그렇다. 너가 나의 사랑덩어리다 라고 아무리 그 특이성을 말해도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거쳐서 사랑덩어리이다 라고 보편화 시킨다. 영화 스플라이스처럼 사랑을 자기가 소유하고파서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다. 즉 출애굽한자는 많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즉 특이성이다.

출애굽한 자 속에서 다시 남은자는 택함받은 자는 즉 특이성 창세전의 계획을 찾아내겠다는 것이다. 결국 청함 받은자는 중간에 낑겨버린 농락꺼리 밖에 되지 않는다. 북이스라엘처럼 말이다. 그러나 똑같이 택함을 받은 그 소수의 작은자도 결국은 똑같이 망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말이다. 되찾겠다고 잃어버린자 취급해 버린다. 청함 받은자 말고 택함받은자 말이다. 제사 드리는자 말고 더 나은 제사를 예수님 본인이 드려서 의미를 부여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미래완료로써 뒤에서 소급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잃어버린게 아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렸기에 예수님만이 애달는다.
그렇기에 어떻게 찾아내시는지 그것을 기다릴 뿐이다.

예수님 자신이 잃어버렸고 다시 예수님 자신이 찾아내는 그 특이성
여기에 우리는 철저하게 농락 당한다.

그러나 마귀가 이 특이성을 시기함으로써
우리는 왜 예수님이 자신이 심은 특이성인 잃어버린 양을 찾는 방식을 알게 된다.

(지난 주에 어머니와 함께 말씀을 나누다가 나도 깜짝 놀래버린 것이
다윗과 나단의 대화를 통해서
아 예수님이 이 땅에서 충돌을 빗여낼 때 꼭 이 장면 다윗과 나단의 과정을 거치는 식으로
예수님도 똑같이 거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우리 성도는 다윗과 똑같이 나단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
너가 바로 그 도둑놈이다 라고 반드시 지적을 받음을 거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보게 되지
그냥 공짜로 거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즉 이런 도식이다.

다윗은 반드시 법으로 카바 한다.
그러나 반드시 나단선지자는 바로 그렇게 다윗이 해석하 율법의 한계를
그 한계점을 찍어서 더 나아가 더 뒤에 있는 지혜를 보여줌으로써
다윗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소진케 만들고 바닥치게 만든다.

마치 이것은 여성이 월경처럼 또는 남성이 몽정처럼 생명을 위해서 고인것들을 쏟아내기 위한 갱신과 같다.

어제에 알고 있던 예수
소용 없다.

오늘 갱신 된 생명을 위해 모든 우주 만상이 움직인다.
어제에 고여 있는 생명수를 위함이 아니라
오늘 새로 피어나는 생명을 위함이다.

이것이 관계 이다. 하나 됨이다.

이 관계를 대상으로 봐 버리면 고여버린 것이다.

보편화 되는 것이지 특이성이 아니다.

약속이란 특이성이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피 라는 생명은 특이하다.
이것만을 시기하는 것이 마귀다.

그 모태가 바로 십자가다.

모든 인간의 모태를 바닥치게 만들어 버리고
그 모태를 교체 시킴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법은 없다. 사랑 뿐이다.
십자가 라는 모태 뿐이다.


바로 이 방식 다윗이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소진 시켜 버리는
바닥치게 하는 방식

그래서 고인 물인지 아니면
바닥을 치면서 한계점이 드러났지만 계속 해서 끊임없이 공급하는

관계성

바로 이 방식을 악마는 자신을 정체를 비로소 드러내면서 죽으라고 싫어라 한다.

이 방식으로써 예수님과의 논쟁으로써 사람들은 충돌하게 되어있다.)

(삼하 12:1, 개역)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삼하 12:2, 개역)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삼하 12:3, 개역)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삼하 12:4, 개역)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삼하 12:5, 개역)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삼하 12:6, 개역)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삼하 12:7, 개역)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삼하 12:8, 개역)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삼하 12:9, 개역)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삼하 12:10, 개역)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삼하 12:11, 개역)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삼하 12:12, 개역)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삼하 12:13, 개역)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삼하 12:14, 개역)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삼하 12:15, 개역)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삼하 12:16, 개역)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삼하 12:17, 개역)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삼하 12:18, 개역)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복들이 아이의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의 죽은 것을 고할 수 있으랴 왕이 훼상하시리로다』
(삼하 12:19, 개역) 『다윗이 그 신복들의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삼하 12:20, 개역)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삼하 12:21, 개역)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삼하 12:22, 개역)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삼하 12:23, 개역)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4, 개역)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삼하 12:25, 개역)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더 이상 매 댈 것이 없다. 깰 것이 없다. 여디디야
최종 갱신은 사랑이다.

사랑이란 바닥을 쳐서
바닥을 뜯어내어서 뜯겨도 뜯겨도 더 이상 뜯기지 않는 사랑을 보게 된
약속을 심은 그 약속을 비로소 찾게된

아 너의 모태는 사랑이 창세전부터 담보로서 있었구나 라고
얄밉게 온 바닥을 다 뜯고서 확인하는 것이였다.

우리가 보통 확인한다고 했는데 사실상 주님이 확인하는 작업 뿐이다.
우리가 건방지게 우찌 확인하랴?
확인 당할 판국에 놓여진 질도 모르고 말이다.

계속 계속 바닥을 뜯어내는 확인 작업을 당하는
그것이 사생아가 아닌
약속이 담겨진
특이성의 이스라엘이다.

(시 5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개역)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개역)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 51:15, 개역)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개역)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 51:19, 개역)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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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김대식 2010/08/14 14:08   


방금 이 글에서는 특이성을

[더 나은 제사] 개념으로써 보편성인 마귀도 가능한 [제사]와 대립을 시켰고

위의 이스라엘 특이성1 에서는 쌍둥이 야곱과 에서를 대조한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으로 설명했다.

또 생각난 것은 우리가 요한복음을 마치고 조금 후에 사도행전을 공부를 마쳤는데 둘다 마지막 결론이 마치 붕뜬 듯한 느낌으로써 인간 쪽에서의 시원한 결말 같은 것이 일체 없다.

그저 종말의 종말
바닥의 바닥으로 뜯겨져서 미말에 구경꺼리가 되는
그저 발가벗겨진 그것으로만 동일한 결과를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특이한 것은

말씀 대로 되었구나
예언대로 되는게 맞네 라고 아주 아주 특이한 고백을 하고
맡긴바 된다는 점이다.

참 특이하다.

이것은 마치 아벨의 제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더 낫기는 커녕 허무하다.
(뭐가 특이한데? 특이한게 도대체 뭔데
아무런 특이한게 없다.
바로 이것이 특이하다. 특이한게 없다는 것

도리어 가인 제사 쪽에서 특이하다.
곧 열심이다.

그러나 아벨 쪽에서는 특이한 것이 없다는 것이 특이하다.
특이성은 술람미 여인에게서는 없다.
오로지 솔로몬 왕이 그 특이성을 심었다.
솔로몬 왕이 자신의 특이성을 심은 것이다.
지혜를 말이다.

아벨의 특이성은 피다.
피와 기름을 분리시킨 바이다.
이것은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특이한 해석을 아벨에게 붙인바 이다.

아벨 자체에게서의 특이성은 일체 없다.
만약 그렇다면 가인이 훨씬 특이하다 보편성을 들고오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제사 단 둘이가 드리는데 가인 자신이 더 특이하지 않는가?

문제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해석이다. 그냥 해석이 아닌
일방적 해석
즉 특이한 해석
즉 비켜가는 해석이다. 기존의 해석을 유발케 해놓고서는 일부러 비켜가는 해석)

허무하게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족보이다.

허무 하다.

아벨의 이름 뜻대로 허무 이다.

참 특이하다.

그런데 그 허무에
그 종말에
그 바닥에

새로운 카페트가 깔린다.

미래에서 연결점이 붙는다는 점이다.

자 이렇게 되면 더군다나 특이한데
특이함에 특이함이 더 덧 붙여져서 더 특이해 진다.

허무에 종말의 주인이 덧입혀진다. 즉 피다.

허무에 피가 덧입혀진다.

허무에 피의 의미 만을 찾는 여호와가 자신의 전쟁을 친히 펼친다.

마치 미리 계산한냥 달려든다.

농락 당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마귀를 겨냥한 것이였다.

아무도 악마를 본 적 없다.

악마가 어디에 스며들었는가?

인간에게 스며들었는데
인간의 쭉쭉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님 뿐인데 우찌 악마를 보겠는가?

그래서 그 하나님을 치는 방식 외에는 없다.

십자가 방식만이 하나님을 쳐버린다.

참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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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2010/08/14 15:10 
 
마귀 보란 듯이

모든 상황은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상황이다.
마귀 빼면 일이 안된다.

십자가란 마귀 보란 듯이 이루어진 모태이다.

그러나 악마는 그저 육이라는 모태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그래서 약올린다. 농락한다.

선악이라는 모태인가?
십자가(생명나무) 라는 모태인가?

두 나무의 구조 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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