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이란 무엇일까 (긍휼 vs 원수 갚음 )

2010년 7월 27일 화요일 오후 11:02:21 김대식


오늘 동이 마지막 회 인가? 긍휼이란 무엇일까?

왠지 마지막회 분위기인듯

왕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장면을 보고

마귀가 원하는 메시아(왕:구원자:긍휼 용서 베푸는자)) 모습을 인간에게 심은 내용을 보게 되었다.

긍휼히 여기는 모습, 불쌍히 여기는 모습이 무엇일까?

그것은 도리어 찢어 마땅함을 아는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를 아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바뀌어질 인간은 없다.

주의 장막의 지성소를 주님께서 규정하시고
다시 그 지성소를 주님 자신이 찢으시는 것이 긍휼이다.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인자의 방식이다.

(히 9:1, 개역)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히 9:2, 개역)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히 9:3, 개역)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 9:4, 개역)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 9:5, 개역)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히 9:6, 개역)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히 9:7, 개역)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히 9:8, 개역)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 9:9, 개역)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히 9:10, 개역)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주님께서 세우시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시 치심으로써 이루시는 방식이다.

(히 9:11, 개역)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 9:12, 개역)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3, 개역)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 9:14, 개역)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5, 개역)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9:16, 개역)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 9:17, 개역)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것이 긍휼이다.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처소의 지성소의 막힌 담을 헐어벌이시고

자신의 제물 되심, 자신이 친히 자신을 찢으심으로써 그 찢어진 그 처소에서 우리를 새로 지으심으로써 이전 것은 지나가게 했다.

모태가 교체 당했다.

행함이라는 처소를 찢어버리고
믿음 이라는 처소로 새로 지으셨다.

긍휼의 자리가 교체 당하는 것이 긍휼이다.

마귀가 가짜 메시아 상으로써 임금이 백성에게 베푸는 긍휼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메시아 이다.
병을 해결하는 메시아 다.
저주를 해결하는 메시아 다.
백성으로 부터 존경받는 정치 잘하는 메시아 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지성소 라는 처소가 찢겨지기 전의 모습으로써
규정시키는 그림자 모형의 메시아  곧 우상이다. 마귀의 역할은 이런 메시아로 몰아가도록 한다. 이 모습이 왜 우상일까?

모든 인간이 자기 투사로 만든 자기가 곧 하나님이 되는 메시아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율법이 가입 된 것은 우리가 꽁꽁꽁 숨겨버리고 가리우개로 가려버린 그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을 알게 된 모습을

적극적으로 언약이 개입하여서
그 가짜 메시아 우상을 끄집어 내는 것이 바로 모형이다. 그림자다.

행함이 곧 선악을 아는 모습에서는 행함 외에는 나올 것이 없다.
그 행함에서 나오는 거룩의 하나님이 조작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엘로힘 형상을 여호와 형상이 찢음으로써 다가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엘로힘 형상으로써 찢겨져야 한다.

그 언약이 바로

십자가다.

너희들은 이렇게 찢겨져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 찢겨진 틈에서 나온 새언약 만이 참 처소가 된다.

왜 지성소가 찢겨져야 할까?

너희의 행함으로써 구축한 거룩한 성전의 구축이 바로 자기투시로써 구축한 가인의 성과 같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의 손으로 도저히 지음이 불가능한 성전을 짖는다.

인간 자체가 성전이 된 그 지성소를 찢고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 된 그 처소에서 태어난 새창조의 모태로
긍휼로써 태어난 자가 십자가 자녀이다.

긍휼의 자녀이다.

이스라엘 중에 있으면서도 여호와 영광을 봐버림으로써 이사야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외친다.

이스라엘 중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것은 긍휼의 자리가 될 수 없고
도리어 심판의 자리였음을 영광을 보게 됨을 당함으로써 알게 된다.

죄를 몰랐던 것이다.

이스라엘 중에 있다는 것이 죄인줄 몰랐던 것이다.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죄인 줄 몰랐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것이 죄인줄 몰랐던 것이다.

도리어 심판의 대상이다.

그래서 긍휼히 여김을 새롭게 당해야만 한다.

그것은 영광 이 덧입혀져야 한다.

그 영광이란 지성소를 찢으심이다.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심이다.

아무도 못 오도록 접근차단한 막힌 담을 주님이 찢으신적이 없는데
인간은 이미 자신들의 구원을 행함으로 확보했다는 식으로
메시아를 규정해 버렸다. 여호와 구원자를 규정했다.
그 규정이 올무에 갇혀 버렸다.

이제 행함(육:인간, 또는 인간의 손)이 아닌 믿음이 옴으로써
첫번째를 허물어 버리신다. 첫째것을 허무심은 더 좋은 두번째것을
더 나은 온전한 것을 세우시고 이루시기 위함이다.

이 이루심에 모든 첫번째것은 방해자로 나서게 된다. 행함의 대립으로써 믿음이 떳기에 그 믿음을 시기해 버린다.

마치 첫째아들 가인이 둘째 아들 아벨을 이유도 없이 시기 하듯이
그 두 아들의 상황을 두 언약으로써

언약을 말하고자 사건 자체를 인간화 시켜서 증거하셨다.

(히 9:18, 개역)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 9:19, 개역)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히 9:20, 개역)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히 9:21, 개역)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히 9:22, 개역)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3, 개역)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히 9:24, 개역)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5, 개역)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 9:26, 개역)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7, 개역)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8, 개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10:1, 개역)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3, 개역)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히 10:4, 개역)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개역)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개역)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히 10:8, 개역)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개역)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째것은 폐하심으로 규정한 이상 가인은 끝까지 자신의 행함으로써 죄의 소원을 넘어서여만 하는 완악성을 펼치게 되어 있도록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첫번째것을 폐하심은 두번째 것을 세우시기 위함인데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더 낫지 못한 제사 곧 가인의 제사의 한계점인
그리스도를 하나님 우편에 앉히게 못하고
또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리스도의 발등상이 되게 못한다.

아벨의 제사는 약속의 제사이다. 언약이 개입된 믿음의 제사이다.
믿음의 제사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힌다?
왜일까? 그것은 적 때문이다.
하나님의 적이지 인간의 적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발등상이 되게 하는 믿음의 제사이다.

그래서 아벨은 이 언약이 이 언약이 펼쳐짐에 있어서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미끼가 된다.

마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바리새인들에게 현장에서 잡혀야만

비로소 예수님이 우편에 앉게 된다.

그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법 곧 제사라는 가인의 제사 행함의 제사라는 기준에 의해서
그 제사 법을 손아귀에 쥐고서 여인을 잡아야만

그 여인이 잡힘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이 곧 주 되심이 펼쳐진다.

어떻게? 믿음으로 말이다.

곧 그 믿음이란 일방적인 불쌍히 여기심이다.
왜 불쌍히 긍휼히 여기실까?

자신이 단번에 드리는 제사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시는 제사
십자가의 피흘리심

단 번에 드리는 더 나은 제사 때문이다.

이 더 나은 제사 때문에
더 낫지 못하는 제사를 들고 나타나는 바리새인들이 있어야 하고
그 더 낫지 못하는 제사에 의해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발생되어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더 나은 제사는 우편에 판결을 뒤짚어 엎어버린다. 교체 시킨다.

거룩의 모태가 바리새인이 쥔 거룩이 아니였고
더 나은 모태는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단번에 드리는 피흘림의 십자가 모태가 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난 방식이
불쌍히 여기심이다.

바리새인은 가인처럼 괜히 더 나은 제사를 쳐다보지 않고
더 낫지 못하는 제사를 기준으로 앞장세웠다는 데 있어서

일방적으로 악마로 규정이 된다.

그런 바리새인의 눈에는 도리어 예수가 악마다.

율법을 완전 자기멋대로 해버리기 때문에
질서를 어지럽히는 식이 되기 때문이다.

조직이 있고 전통이 있고 규율이 있는 법인데
예수 식으로 해 버리면
엉망이 되어버리고

잇고 잇고 이어나갈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부활 문제에도 부딧히게 된다.

기업 문제도 부딧히게 된다.

도통 지킬것이 없게 되고
도통 행할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더 나은 제사는 곤란하다.
더 낫지 못하는 제사만이 이 그림자를 운영해 나갈수가 있다.
실체가 와 버리면 이 눈에 보이는 허상들은 개판이 된다.

허상이 개판이 될까봐?
허구가 방종이 될까봐?

도통 믿겨지지 않기에
행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육의 한계이다.

적이 없고 그저 자신의 거룩함만 마일리지로 채우겠다는 식이다.
그러나

주의 주 되심은 바로 우편에 앉으심이다.
그리고 원수를 주의 발등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옛언약의 기준이 아닌 새언약의 단번에 피흘리심의 십자가 로써
창 3장 15절의 완료로써 십자가의 승리로써언약의 완료로써
예수님의 숙제를 이루시고 그 전리품으로 챙기는 것이 바로 긍휼이다.즉 긍휼이란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는 것이다.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참 발등상이라는 뜻은
전쟁의 종식이 되는 평화가 되는 것이다.
그 평화를 보기 위해 화평이 아닌 불화로써 즉 전쟁을 치르심으로써
원수를 규정하고 그 원수를 이기시는 것이다.

그 원수란 예수님의 원수다.
십자가의 피를 무용지물케 하는 것이 원수의 실체이다.

그러나 인간의 원수는 아니다.
인간의 원수란 더 나은 제사 십자가가 아닌
더 낫지 못하는 제사를 기준으로 해서
행함의 기준인 육의 자랑에 방해가 되는 것이 원수가 된다.
결국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원수가 되고
그런 원수를 감싸고 도는 예수가 원수가 된다.

이런 육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과 대립이 된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물과 기름이 되듯 말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원수를 발등상에 두기 위함에 있어서 반드시 십자가 전쟁의 전리품인데

도리어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유대인 곧 바리새인은 그 전리품의 자리를 박차고
전리품이 된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는 방식이
바로 바리새인의 원수가 예수님이 되는 이유이다.

예수님의 원수는 바로 이런 원수 곧 마귀의 사고방식이 가득한 바리새인이 마귀를 대변하는 모습이다. 차라리 바리새인이 하나님을 몰랐다면, 제사를 아예 안드렸다면, 말씀을 지킨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면, 거룩한 행함을 단 한 개도 한 적이 없었다면 문제가 전혀 없는데 괜히 말씀지켜서 괜히 말씀을 안다고 하니, 괜히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혈통을 안 주장하고는 못 배기는 조상 잘못 만나서, 괜히 모태가 있는 바람에, 괜히 태어난 바람에, 괜히 인간으로 태어난 바람에, 모태에서 차라리 죽지 않는 바람에

괜히 태어나는 바람에
괜히 인간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원수인줄도 모르고 원수 아닌줄로 알다가
그것도 더더욱 거룩한 선민인줄 알다가
예수님에게 딱 걸려들어서

실족케 되었다.

(히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1, 개역)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 10:12, 개역)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0:13, 개역)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 10:14, 개역)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 10:15, 개역)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히 10:16,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 10:17, 개역)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개역)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 10:19,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개역)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 10:21, 개역)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히 10:22, 개역)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23, 개역)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히 10:24, 개역)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0:25, 개역)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6, 개역)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 10:27, 개역)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 10:28, 개역)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히 10:29, 개역)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 10:31, 개역)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2, 개역)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히 10:33, 개역)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히 10:34, 개역)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 10:35, 개역)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히 10:36, 개역)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7, 개역)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 10:38, 개역)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9, 개역)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더 나은 제사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림자를. 모형을,

실체인냥 내세웠다는 것이
전부인냥,
완료인냥 내세웠다는 그 자체가

죄의 소원도 못 넘어서면서 죄를 이겼다는 착각에서 나온 완악함이였다.

차라리 못 이깁니다. 하면 전리품이 되는 누가 이기는자인가를 쳐다볼것인데
전리품(미끼, 구경꺼리, 미말에 둔 조롱꺼리) 될려는 영광을
거리낀다고, 어리석다고, 걸림돌이 된다고(거룩쌓기에 철저한 걸림돌)도저히 나아만 장군처럼 꾸중물에 들어갈수 없고 7번 씻을수가 없기에
실족이 되어서
도저히 불뱀에게 물렸는데 구리놋뱀을 쳐다보라니? 말도 안되기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히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1, 개역)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 10:12, 개역)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0:13, 개역)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 10:14, 개역)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 10:15, 개역)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히 10:16,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 10:17, 개역)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개역)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구약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마귀에게 고소를 당한다.
대제사장의 옷인 곧 거룩한 옷을 더럽혔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우편에 선 사단의 고소를 이끌어 내는 그 부정함, 그 더러움 곧 불륜의 십자가로써 이스라엘 곧 신부된 비밀을 건드림으로써 일방적인 편애 곧 피흘림의 긍휼히 여김에 도전케 만드신다. 예수님은 혈통 이스라엘에게 관심 없다. 육인 인간에게 관심 없다.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로 하신다. 그 마귀에게서 마귀의 위상까지 높여가면서 고소케 함으로써 나온 긍휼 곧 십자가의 피흘리시는 사랑을 창세전의 예정된 모태로써 삼으신 것이다.

(슥 3:1, 개역)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슥 3:2,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 3:3, 개역)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 3:4,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 3:5, 개역)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슥 3:6, 개역)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슥 3:7, 개역)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슥 3:8, 개역)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슥 3:9,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슥 3:10,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순이 그 모태가 된다.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모태가 되고자
친히 처소가 되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더 나은 제사의 모태로써
이 죽은태에서 나지 아니한 자는 새사람이 아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사망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태이기 때문이다.
죄의 소원이 이기지 못하는 태이다.

처소요 처음자리요. 첫사랑이다. 곧 긍휼이다.

(히 10:19,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개역)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 10:21, 개역)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히 10:22, 개역)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23, 개역)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히 10:24, 개역)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0:25, 개역)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6, 개역)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 10:27, 개역)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 10:28, 개역)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히 10:29, 개역)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 10:31, 개역)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2, 개역)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히 10:33, 개역)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히 10:34, 개역)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 10:35, 개역)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히 10:36, 개역)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7, 개역)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 10:38, 개역)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9, 개역)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개역)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긍휼은 오로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히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긍휼이 아니면 담대하게 나아갈수가 없다.

타 죽게 된다.

그 긍휼이 어느정도로 미쁘신고(믿음직 스럽고 안정감이 있는고) 하니
불 속에 들어가도
죽음 속에 들어가도
저주 속에 들어가도
지독한 미움 속에 들어가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도

미쁘시다.

그러나 긍휼이 아니면 시험들게 된다. 미쁘심의 반대말이 시험이다.
어느 정도로 시험 들었는고 하니
믿을 구석이 너무 없기에
행한 것들 외에는 내세울것이 없다.
그 행한 것이 배설물인줄 꿈에도 모르고
화로도 나의 행한 것은 망해야 할 것이구나
라는 것도 모르고
그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그래서 시험이 든다.

자기자신 외에는 쳐다보여지는 것이 없다.


그런 자들에게는 도저히 불뱀 곧 마귀에게 물려서
마귀가 고소한 법정에 서게 됨에 있어서

마귀에게 죽임을 당하는 예수님이 전혀 미쁠수가 없다.
도리어 어리석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부터도 버림을 받는 예수님이 전혀 미쁠수가 없다.
도저히 믿음직 스럽지 않는 도리어 믿으면 큰일 나는 걸림돌이 된다.

세상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마귀에게 죽임 당하는 신화가 어떻게 지혜로운 신화 곧
출처가 될수 있느냐 라는 것이 이방인의 지혜이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어떻게 구원자가 구원은커녕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자가 구원자임의 증거가 되는가 라는 그런 믿음은 믿음일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걸림돌이다.
반드시 자신들 유대인들의 손에 버림을 받는 식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불륜의 증거물이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라는 점이다.(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로부터의 불륜의 증거물 3가지로써 개같은 부정한 이방여자가 유대전통의 약속의 사람 언약의 사람 믿음의 사람을 잇는다는 방식은 철처한 걸림돌이 아니고 무엇이랴? 평생 전리품 비웃음꺼리가 되게? 그러나 그 비웃음이 웃음이 되는 믿음의 조상이 드린 이삭이라는 희생제사의 방식이다. 이 방식 외에는 구원이란 없다.)긍휼이란

우리가 선악의 의식으로
자기 따나 자신의 방식으로 말씀을 안다 라는 반드시 그 기준에서

상대적인 걸림돌
상대적인 선에 대립된 악함

더럽다고 규정한
그 더러운 자리
저주의 자리
심판의 자리

를 역으로
모순 되게

우리의 처음자리 모태로써 삼으로써 나온 것이다.

우리의 그 기준인 마귀라는 주인이 심은 그 기준이 틀렸다 라는 것을
반드시 과정으로 거쳐서

그 불뱀으로부터 마땅히 물려 죽어도 장대높이 달려야 했음이 마땅한 자신임을 아는 자가
바로 긍휼을 쳐다보는 자이다.

이것보다 더 외면하고픈 것이 없는데
도리어
이것보다 더 자랑하고픈 것이 없도록 하시는 것이다.

나를 도리어 시험하고 넘어뜨리는 것이 내가 불뱀인 모습인데
내가 마귀요 내가 원수인 모습인데

도리어 이것보다 더 미쁘고 명료하고 완료 완전 온전한 명확하고 확실한 사랑은 없다.
내가 가장 부끄러워 하는 그 수치를 도리어 자랑으로 삼으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 자랑이다.

이것보다 더 긍휼 곧 사랑이 없고
이것보다 더 나은 미쁘심 곧 자랑은 없다.

그 버림받은 저주와 심판의 자리를 나의 첫사랑의 자리로
나의 모태요 처음자리로 삼으신 그 피 외에는

다른 불쌍히 여기심은 없다.

동이 라는 드라마에서 나온 임금이 백성의 배고픔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그 모습이야 말로 가장 악마적인 마귀가 우리에게 심은 메시야 모습이다.

가짜 긍휼이다.

도리어 진짜 임금은 배고프게 함으로써 우리의 처음자리를 파고 들어온다.
밑바닥을 치게 한다.

과연 너는 배부를 자격이 있는 자인가?

그러나 마귀는 돌을 떡 되게 해서 가난한자를 구원하라고 한다.

이것이 시험이다.

(마 4: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2, 개역)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3, 개역)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5, 개역)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7,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개역)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가룟유다는 법적으로 향유를 깨뜨린 여인을 화를 내면서 호통을 친다.
그 아까운 비싼 향유를 차라리 가난한자를 위해서 쓰면 옳치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더 나은 제사로 연결시키신다.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기념한다고 말이다.

가룟유다가 보기에는 도저히 그 부정적인 행동이 긍휼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시험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이야 말로 미쁘다 라고 하신다.
자신의 죽음에 일방적으로 연결해 버리는 해석을 해버리신다.

가인이 보기에는 아벨의 제사가 전혀 미쁘지 않다.
자기 제사만 미쁘다. 아벨의 제사는 죽어야만 하는 시험드는 제사이다.
결국 자기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는 걸림돌 제사이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죽음으로써 증거한다.

왜 하필이면 죽음인가?

그것은 바로 단번에 해당 되는 완료를 말하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의 단번의 피흘리심으로 이룬 완료이다.

이것이 온전이요 미쁘심이요 믿음이다.

그러나 행함이란 단번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또 드려야 한다.
완료가 아닌 계속 적인 미완료 상태이다.

그러니 단번에 드림이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죄의 소원이란 결국 단번을 못 넘는 것이다.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죽음 뿐이랴?
징계이다.

(히 12:1, 개역)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 12:2, 개역)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3, 개역)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 12:4, 개역)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히 12:5, 개역)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6, 개역)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 12:7, 개역)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개역)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9, 개역)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10, 개역)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히 12:11, 개역)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2, 개역)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 12:13, 개역)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4, 개역)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사생아가 아닌 자녀인 증거는
징계를 받기 때문이다.

징계란 매를 대시는 아버지가 있다는 뜻이다.
징계가 없다는 것은 아버지가 없다는 뜻이다.

또 그 징계란 대신 매 맞음이다. 이것이 우편에 앉으심이다.
대신 허물을 갚는 것이다.

대신 매 맞음이다.

마귀와의 차이가 대신 매 맞음이 없다.

그 대신 매맞는 징계 받는 버림받는 아들을 보고
미쁘신 사랑을 본다.

거룩을 본다.
거룩에 참예 된다.

그러나 대신 매맞음을 못 보는 자는
도리어 시험 든다.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 징계를 처소로 삼으신 아버지를 거부한다.

믿음의 조상이란 미쁘시고 온전케 하시는 우편에 앉은 대신 징계받는 아들의 죽음을 보고 기뻐한 자를 말한다.

그 완료 외에는 다른 완료 안 쳐다보기로 한 자가 믿음의 조상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픔을 보게 된다.
울음을 보게 된다.

자신이 이삭 때문에 흘린 눈물처럼
하나님의 눈물을 보게 된다.

그 눈물 보다 더한 거룩이 어디 있으랴?
지켜서 나온 거룩?

에라이

없다.

깡그리 없다.

도리어 배설물이다.

예수님이 흘린 그 피는 하나님의 눈물이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찢어서 원수들에게 내어놓는 독생자 아들의 죽음을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자랑하는 눈물이다.

마귀는 비웃는다. 우리 인간도 비웃는다. 그런 어리석고 미련함이 무슨 힘이 되고 구원이 되냐고?

그러나 이 긍휼이 아니면
이 불쌍히 여기심(자기 아들을 내어주심)이 아니면

어떤 누구도 죄의 소원에서 벗어날자가 없음을 말이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를 덮썩 잡고자 더더욱 죄를 찾는
죄만 구걸하는
죄만 먹기를 바라는


주의 주 되심 곧 주께서 자신을 치셔서 지성소를 찢고 첫 번째 것을 깨뜨리시고
두 번째 것을 세우심으로써 더 나은 제사인 십자가 라는 불륜만이 선하게 하신

그 선하심을 도저히 맛볼수 없도록

단절 시키셨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 일만달란트를 용서해 주었건만
그 피흘리심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그 수치를 자랑이 아닌 부끄럽게 여김으로써
자신만의 당당한 믿을 구석꺼리를 따로 마련함으로써
징계보다
매 보다
대신 저주 받으심 보다

더 나은 제사가 못 되는 것만 모아서
자신에게 빚진자를 용서 못하는 죄의 소원에 빠짐으로써

자신의 성전을 지음으로써
우편에 서신 주를 못 보는 제사
도리어 자신이 우편에 서 버리는 제사

또 원수가 발등상에 서지 못하는 제사
도리어 자신이 발등상에 서 버리는 제사

그 죄의 소원에 걸려들어서

우편에서 긍휼히 여겨 줄 자도 없이

자신이 자신을 변호해야만 하는
믿을 구석은 자신 밖에 없는 자기 챙기기의 시험에 빠져서

미쁘신 주가 없는 사생아로 판별이 되는 것이다.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긍휼이란

너무 너무 무능해서 끄집어 내어 줄 자가 없기에
탕감해 주는

대신 매 맞음으로써 죄 값을 치르심이다.

스데반은 우편에 선 자를 보고
너무 너무 미뻐서

저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라고 외친다.

자신이 받은 용서가 너무 크기에
원수 갚지 말라고 한다.

너무 너무 미쁘기에 챙길 원수갚음이 없다.

그러나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는 자기 빚을 반드시 받을려고 한다.

미쁜 것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쪽팔렸던 것이다.


임금은 백성의 배고픔을 보고 쪽팔렸다.
그래서 배고픔을 채울려고 한다.

가룟유다는 향유를 부은 여인이 쪽팔렸다.
선을 행하기는커녕 도리어 땅에 다 쏟아 버리니 너무 너무 아깝다.

차라리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면 조금이라도 배고픔을 잠시
아주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을텐데

그래서 너무 너무 화가났다.

정의의 이름으로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 다시는 그런 더러운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가장 긍휼히 여기지 않는

원수 갚음이다.

대신 갚을자가 없기에
자기가 직접 갚는 것이다.

기업무를 고엘(아버지)

갚다

[동사] 1 남에게 빌리거나 꾼 것을 도로 돌려주다.
2 남에게 진 신세나 품게 된 원한 따위에 대하여 그에 상당하게 돌려주다.

그래서 누가 대신 갚았다는 것 보다 걸림돌이 없고
자신을 어리석고 미련하게 만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긍휼은 하필이면 이것을 자랑할수 있겠는가 라고 다가온다.
도저히 자랑 할 수 없는 걸림돌

불륜의 스캔들 3가지 부정한 증거물을

동네방네 외치면서

조롱꺼리 될 껀데
쓰레기 취급 받을것이 뻔한데
본격적인 미움의 대상이 그 3가지 물증(십자가:요나의 표적)이 될 텐데 말이다.

긍휼은

도지히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긍휼이라는 처소야 말로
해석 불가이다.

오로지 성령이 친히 만드는 처음자리요
처소요

모태로 삼아버리신다.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남 용서
남 긍휼히 여길 시건방진 생각 말자

7번 용서는커녕
도리어 490번 용서 받아야 마땅한

그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고 무엇이랴?

주여 저는 용서 받을 자격 조차 없는 마귀일 뿐입니다.

(눅 5:8, 개역)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주를 만난 자의 외침이다.

긍휼을 만난 자의 소리이다.


아무리 봐도

아무리 봐도

용서 받을 가치가 아예 없다.

무시
천시
저주
심판
지옥행
당장 죽여도 할 말 없는

입이 백 개라도 항변할 자격이 없는

그래서 긍휼이

나를 원수로 삼아 발등상에 두고서
내가 나를 변호하는 우편에 내려 앉히는 밀끄덩 미끄러진 그 웃사스러운 자리에 자빠뜨리고
대신 피 흘린 징계받은 자를 우편에 세우신다.

나를 원수의 성문 삼아 나를 열어재끼는
나 라는 허구를 지성소 찢어버리듯 찢는 자가

복된 분이다.

그 복된 분을 만난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이다.

평화다.

더러운 옷이 비로소 벗겨짐으로써 아름다운 옷으로 입히시는 분이다.

새 옷,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긍휼의 옷

피 옷


(엡 2:1, 개역)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개역)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3, 개역)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4, 개역)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개역)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6, 개역)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7,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엡 2:8, 개역)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개역)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10, 개역)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1, 개역)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엡 2:12, 개역)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9, 개역)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20, 개역)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개역)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개역)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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