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8.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육의 태와 반대되는 성령이라는 태 (십자가 자리) (육의 방식(손할례)의 반대인 마음의 할례자)

2010년 7월 22일 목요일 오후 11:24:22  김대식


(행 13:25, 개역)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행 13:26, 개역)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행 13:27, 개역)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행 13:28, 개역)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행 13:29, 개역)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행 13:30, 개역)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행 13:31, 개역)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행 13:32, 개역)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행 13:33, 개역)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행 13:34, 개역)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행 13:35, 개역)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 땅끝-죽음에 까지 이르러 (십자가라는 할례=세례=죽음= 짤라내어 두 패로 나누는 새 창조)
사도행전 2. 증인 만들기 = 빈터 만들기 (머리를 보여주는 목이 날라간 한 몸)
사도행전 3. 종말의 영을 부으심 (성령이 아니고서는 소통 안 되는 시대와 교회)
사도행전 4. 머리가 날라간(빈터) 주의 주 되심을 보여주는 희년의 완성품인 종말(묵시)집단인 교회
사도행전 5. 예정된 십자가의 운명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해석불가의 비밀)
사도행전 6. 체포해도 소용 없는 막을 수 없는 십자가 증인
사도행전 7. 종말 (선지자의 말과 담대함)
사도행전 8. 자기 유익의 소유를 구하지 않는 양보없는 성령의 전 (광야교회)
사도행전 9. 주의 이름이 벌리시는 양보없는 전쟁 (인간 이름 vs 주의 이름 = 이름전쟁)
사도행전 10. 환도뼈가 깨어진 그 틈 사이로 나오는 영의 세계 (신이 임한 자)
사도행전 11.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없음 (스데반의 죽음)
사도행전 12. 완료된 피의 판대기
사도행전 13. 가해자 원수와 피해자 사랑의 만남으로 결정난 완료의 이름
사도행전 14. 바울을 의심하다 (의심 받을 수록 더 또렷하게 들어나는 성령의 전 : 원수의 성문 건드리기)
뻔뻔스러운 걸레 바울과 순한 어린양
사도행전 15. 베드로의 의심 1
사도행전 16. 베드로와의 충돌 2

2009 사도행전
2010 사도행전

사도행전 17. 기록 된 대로만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하심)
사도행전 18. 썩음을 당치 않게 하는 약속 (맞바꿔치기=미쁘심)
사도행전 19. 주가 심으신 약속 찾기 (도끼로 찍은 흔적 = 표적)
사도행전 20. 복음이 주는 담대함이란 (약하게 만들기) 힘 빼기
사도행전 21. 바울에게 주목받은 앉은뱅이 와 빈터(십자가 흔적)
사도행전 22. 십자가의 불륜(스캔달:부정)을 거두지 마소서
사도행전 23. 행함이 아니요 은혜(꺽으신 뼈)로만 구원
사도행전 24. 나를 짖밟고 막고 죽여서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 (나 보다 주의 살아계심이 더 중요)
사도행전 25.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말씀의 현실(운동력)
사도행전 26.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위험한(소동,소요케 하는) 복음
사도행전 27. 죽음으로 증거 되는 살아있는 말씀
사도행전 28. 기다리고 있는 환난
사도행전 29. 사랑의 확증 (십자가에 달려 죽고자 하는 이유)
사도행전 30. 바울과 예루살렘 소동
사도행전 31. 불가능한 자랑꺼리 십자가
사도행전 32. 회칠한 무덤 두껑을 여는 십자가
사도행전 33. 사람을 기쁘게, 좋게 하지 않는 나사렛 이단 부활 (우편에 앉으심)
사도행전 34. [대상 vs 하나]의 차이와 그리고 바울의 변명
사도행전 35. 아름다운 빛을 선전하는 나(선지자)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도행전 36. 가이사 앞에 서야만 함을 당해야만 하는 바울
사도행전 37. 이미 완료된 예언 (창세전 예정)



오늘로 사도행전의 총정리를 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사도행전의 공부 제목들을 쭉 나열해 봤습니다.

나열해 보니 중요한 몇가지를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할례 개념입니다.

즉 할례 라는 의미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 의미를 알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 특징 인물입니다.

베드로는 할례를 행하는 행함의 문제로 봤지 믿음의 문제로 불수 없었습니다.

그레서 행함의 할례에서 도저히 넘어갈수 없는 문제에 베드로가 부딧혀 버립니다. 즉 한계점을 맞딱드리게 됩니다. 바로 처음자리입니다. 원천자리 곧 예정입니다. 이것을 창조 또는 잉여 또는 은혜 또는 육의 반대인 영의 자리입니다.

그 영은 바로 무시할만한 모습으로 옵니다.

베드로는 천박하고 비천한 무가치한 존재인 닭의 울음소리를 넘지 못합니다.

자기 쪽에서 주를 사랑하겠노라고 또는 말씀을 지키겠노라고 다가간 그 모든 단절이 바로
그동안 자신이 무시하고 무가치하고 누가 봐도 없어 보이는 그 없는 존재와 같은 그 닭 앞에서, 자신의 가치와 대조해 보면 부정적인 가치적 존재인 그 닭 앞에서

실족하여 넘어집니다.

그 넘어진 그 자리가 베드로의 처음자리가 됩니다.
부정적이다고 꾸중물이다 라고 여겨지는 그 십자가의 자리에서
새로운 베드로가 태어나는 겁니다.

예수님 쪽에서 다가가심으로써 영의 출발이 시작 됩니다.

곧 마음의 할례가 행한 것이 예수님이 다가감 곧 예수님 자체가 할례인간으로써 다가가니
마음 판의 할례가 저절로 이루어 진 겁니다.

마음이라는 부분은 예수님만이 행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간은 그저 손 할례로 거룩이다 라고 우길 뿐이지
마음의 할례는 도저히 손 댈 수 없는 입장에서 거룩이다 라고 우기니
마음이 비웃는 겁니다. 아이고 이 위선자야 또 너와 남을 속이냐?
모든 곳이 주의 목전이요 주 앞인데 어딜 속이냐 라고 지적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장소 개념은
거룩한 곳 따로
은밀한 범죄의 장소 따로입니다.

그래서 적응하는 육에 길들여져서 그 육에 지배 받고 있습니다.

거룩한 곳에서는 거룩한 척 적응해야 하고
비거룩한 곳에서는 비거룩한 척 적응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육에서 나온 믿음이란
닭 울음 소리 조차도 못 넘어서는
그야말로 거짓이요 부정한 더러운 믿음인데도 불구하고
그 믿음 가져 볼려고 소유해 볼려고
그런 인간들끼리 끼리 끼리 모여서 믿음의 서열로
거룩한 장소에 모여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니

정작 주님께서는 귀를 막고 눈을 막고 고개를 돌리면서
나의 마당만 밟는다고 괴로워 하시는데
인간은 도리어 그 더러운 믿음을 가지고서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마당을 밟는다는 겁니다. 즉 즐거워 하고 있다는 거죠.

그 일 때문에 한 쪽은 괴로워 하고
그 일 때문에 다른 한 쪽은 즐거워 하더라 말입니다.

그 일이 뭔데요? 손 할례 라는 거룩 지키기 말입니다.

자 그럼 손 할례 뿐만 아니라 ( ) 괄호로 만들어서 아무것이나 다 넣어보세요.
찬양, 믿음, 예배, 기도, 큐티, 충성, 봉사, 사랑실천, 이웃사랑, 헌금, 구제, 장애인 돕기,
행함, 말씀실천, 새생명의 삶 살기, 성화 된 삶 살기 및 실천하기, 등등등

그 어떤 것을 넣어도 바로 그것 때문데 예수님은 괴로워 한다 라는 사실은
우리는 때려죽어도 모르는 겁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것을 하면 할수록 즐겁습니다.
자부심이 생깁니다. 해 보니 되니까 더욱더 자신감이 붙게 됩니다.
안해서 문제이지 하면 할수록 더욱더더 많이 하고픈 생각이 들어서 자아만족 뿐 아니라 남들도 너무 좋아 하니 한번 불 붙은 이 열정이 계속 이어지길 소망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일이 설마 누가 괴로워 한다 라는 생각은 마음에 추호도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그리고 괴롭힘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즐거워 했던 그 일로 도리어 괴롭힘을 당하면서
예수님의 괴로움에 한 번 집어 넣어 봅니다.

그 일의 전담반이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괴로움에 집어 넣어보니

완전 거꾸로 보입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행했다고 자부했던 그 모든 것이 배설물이요
살인이였지 이웃 사랑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여전히 모르고 아직도 감도 못 잡을 정도로
무슨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헷갈려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약속한 성령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니까
항상 사도행전의 특징이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항상 마음을 짤라내듯이 찔림을 당하는 것이 바로

너희가 죽인 예수

너희가 죽인 예수

너희가 살인해 버린 그 예수가

주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주 란 나의 살인이 가미가 됨으로써 성립된 주 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이 싫은 겁니다.

주 라는 의미를 그냥 나의 구원자로 모셔버릴려고 하는데

정작

그런 구원자 주 그리스도는 인간이 조작해 낸 것이고

반드시 베드로처럼

처음자리를 거쳐서 사랑을 따지는 예수님을 보도록 합니다.

내가 닭 울기 3번 전에 내가 버려버린 예수

가 주인으로써 새롭게 다가온 예수 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행하시는 할례요
예수님이 베드로로부터 이루신 할례입니다.

자 그렇다면 베드로의 할례 개념은 무조건 비언약적인 할례로서 등장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반대로 무조건 언약적인 할례로써 베드로에게 행해야 합니다.

왜 이 두 차이가 생기는 겁니까?

그것은 베드로는 자신이 바로 예수님을 상대할 수 있다라는 언약을 거치지 않고 창세전의 예정을 거치지 않고 지금 눈에 보이니까 그 육체의 눈에 보이는 그 예수님을 그대로 상대한 겁니다. 왜 자신에게 충분히 상대할 능력이 있다고 본 겁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입니다. 아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는 창세전의 예정을 거쳐서 즉 약속을 거쳐서 베드로를 상대 합니다.

그렇게 되면 베드로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상대한 겁니다. 결국 아담만을 상대함으로써 나오는 것이 바로 마지막 아담 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담을 거쳐서 마지막 아담의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 바로 행함입니다. 즉 행함 조차도 창세전의 예정인 약속에서 나온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 곧 베드로는 이런 거치는 것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예수님을 지킬 수 있고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여기서 인간의 믿음이 한계점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만난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이 베드로는 만남으로써 붙들어 주심으로써 베드로의 믿음이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덮치지 않으면 베드로는 여전히 자기 믿음으로 버틸려고 할 겁니다.

결국 베드로나 가룟유다나 차이점은 없습니다.
인간이 바로 이것을 거부합니다.
차이나게 할려고 자기 쪽에서 믿음이든 거룩이든 행하고 실천한 것인데
아무리 봐도 차이점이 없다면 인간은 대뜸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차라리 죽여달라 라는 자살을 운운하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차이점이 없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 보십시오 차이점이 없습니다.
사울 왕은 그것을 거부 했고
다윗은 차이점 없음을 인정한 겁니까 그럼?

아닙니다. 여전히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럼 다윗은 어떻게 구원 받은 겁니까?

창세전을 거친 겁니다.

그 창세전을 거치는 방식이 3가지 증거물을 덮치게 하는 겁니다.
그 부정한 3가지 물증이 뭡니까?

사람 자체가 할례 인간 이라는 표현을 제가 자주 썻듯이
사람 자체가 물증인간, 또는 담보물인간? 또는 볼모 인간? 또는 대신맨 대신하는인간?
으로써

우리야 장군의 죽음, 밧세바(우리야 장군의 아내) 남의 아내, 그리고 이름 없는 아이의 죽음(솔로몬의 형)

이 3명 자체가 증거물이 되어서 다윗이 현재의 시각을 끊고(짤라내고: 단절) 창세전의 실상을 쳐다보도록 하여서

자기 쪽에서 더 이상

과거에 거룩이 나온적도 없고
현재도 거룩을 행할 수 없고
앞으로도 거룩은 나올수 없다 라는 것을

그 3가지 희생안타로써 비로소 눈 뜨게 됩니다.

자 이렇게 말하니까

에이 그럼 아무것도 안해도 되겠네 야 신난다 마음대로 살고 죄도 마음껏 짖자

죄송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다윗은 그 시점에서 비로소 율법 지키는 나에서 벗어나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십자가 처음자리로 꼬라박아야 하는 자유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성령이라는 분이 그 언약의 자리로 다윗을 몰아갑니다.
비로소 다윗 왕은 본격적인 예수님의 아픔에 몰리는 바닥을 치는 인생만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의 자리, 부정적인 자리, 십자가의 자리를 성령에 의해 떠밀림당하지 않으면
다윗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모태의 자리는 이제 끝났습니다.
자신의 원천의 자리는 사라 졌습니다.

새로운 태가 다윗의 처음자리로써 덮쳐져야 합니다.
그 새로운 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다윗을 잉태하여서 낳지 않으면 다윗은 지옥간 목숨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다윗을 낳기 때문에 죽은태와 같은 그 부정적인 태에 의해서 다윗은 새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 태를 마련하는 증거물인간이 잉여물인간이 성령받은인간이 바로 3가지 물증 3가지 인증표 도장으로써 다윗을 넌 당첨 이라고 이마에 도장 찍고 물러가고
또 넌 당첨 이라고 이마에 도장 찍고 누락되고
또 넌 당첨 이라고 이마에 도장 찍고 물러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전에 예정된 약속으로써
창세전을 거쳐서 약속을 가시화 시키는 겁니다.

마치 3번의 닭 울음이

다윗을 홀라당 발가벗기게 하는 부정적인 불륜의 스캔들 3가지 물증이
베드로를 쪽팔리게 완전 사람들 앞에서 웃사꺼기로 평생 지을수 없는 그 부정적인
미천한 무가치한 닭의 3번의 울음 소리가 베드로를 도리어 살리는 겁니다.

창녀의 자리가 세리의 자리가
강도의 자리가 문둥병자의 자리가
사마리아 자리가
개같은 이방인의 자리가
흑암의 백성 자리가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않은 자리가


구원의 자리가 되는 창세전의 예정을 거친 자리가 되는 겁니다. 원천자리 이다 첫사랑의 자리이다 라는 겁니다.

문제는 그럼 우리가 거기로 가자? 에헤이 우리는 안된다니깐요?

예수님이 첫사랑의 자리로써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의 그 꾸중물에 뛰어드심으로써 이룬 자리이기에 창세전이지
우리가 아무리 뛰어가 본들 창세전이 되지 않고 베드로처럼 또 자기 숙제로 보는 겁니다.

우리는 원천적으로 창세전을 거칠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거치기에 예수님은 뭐든지 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인간이 선악적으로 생각하는데서 못 벗어남에 있어서

일부러
부정적이고
더럽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비천하고
무가치 무시 받는
싫어버린바 되는 일만 골라 골라서
얄밉게 이루시는 겁니다.

왜?
창세전 예정을 또 인간은 자꾸 건드리고파 하기에
예수님의 믿음은 바로 그런 인간의 시선에 반대로만 행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뭐든지 예수님은 믿음이시고 (약속이고=완료)
인간은 뭐든지 행함이 되는 겁니다. (비언약=미완료)

결국 주님 쪽에서 불쌍히 여겨주심 밖에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심이란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겁니다.
얼마나 가망이 없으면 불쌍히 여겨 주어야만 일어나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린아이는 일으켜 주길 바라는 의존성이 강합니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이 남이 일으켜 주지 않으면 안되는 앉은뱅이라면
그 사람은 그 사회에서 부정한자 취급 받게 됩니다.

아니 그 부정한 불의한 자의 모습에 예수님이 뛰어드심으로써
도리어 거룩하고 의로운 자들이 졸지에 부정한 자가 되고
부정하고 불의한 자들이 도리어 거룩하고 의로운 백성이 되는
부럽기 짝이 없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창조 솜씨입니다.

아가서의 노래는 부럽다 부럽다 사랑받는자여
너가 우찌 사랑받게 되었는고?
너가 우찌 긍휼을 입어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어여삐 여김을 받게 되었는고

라고 동네 여자들이 부러워 부러워 미칠 정도로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이것이 천사들의 찬양입니다.
곧 성령의 찬양입니다.

창녀와 세리가 너희 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약올리는 것이지

그러나 천사 곧 영의 찬양은 인간의 찬양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찬양은 실적 쌓기입니다.
일한 댓가와 노동한 댓가로써 정당한 기쁨을 추구해서 기뻐하는 감사요 기도요 찬양입니다만

천사의 찬양은 너는 아무리 봐도 어여삐 여김을 받을 자격 조차도 없는데
사랑은 바로 죽음 보다 강해서 죽은자와 방불한 너를 사랑했구나
용서 했구나 불쌍히 여겨 주셨구나
부러워라 부러워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어여삐 여김을 받은 자여
미쁘신 자가 너를 도장 찍었구나  찜 했구나

이것이 영의 찬양입니다. 천사의 액션입니다.

자 문제는 찬양이 먼저 만방에 외쳐지고
그 실상은 찬양을 구체화 시키는 방식으로써 벌어집니다.

전쟁이 그런 식이였지요.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은 희한한 전쟁입니다.
나팔을 먼저 불어서 이미 이겼다 라고 외치고
승리 했으니 승리를 확인하는 입장에서 왜 승리했는지 목격자로 들어가는 겁니다.
전쟁도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사도행전은 바로 이 천사들의 찬양 곧 승리의 노래를
이미 불러 놓고
그 사랑의 결과물, 완료의 결과물인 불쌍히 여기심을 받은 자를 전리품으로써
수확하듯이 쭈우욱 밀어붙인다 라는 겁니다.

마치 농사짓는 농부가 농기계를 쭈욱 밀어붙이니까
한 쪽은 찌기로 한 쪽은 알곡으로 두 패로 나누듯이 나누어져서
벌어지는 상황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의 예정이 맞네요 맞군요
어쩜 그리 기록된 말씀이 옳았는지
참 신기합니다 놀랍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노래 부르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온 몸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너무 너무 신기하게도 딱 맞아 떨어지니까
온 몸이 전율을 일으키듯이 소스라치는 희열을 누리는 겁니다.

그 천사 곧 성령이 농부로써
바울이나 베드로를 농기계로 삼아서 쭉 밀어붙이니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방식 곧 십자가의 방식으로 밀어붙이니
희한하게 창세전의 예정 된 대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두 패로 나누어지는 그 창세전의 예정이 실현화 됨에
두렵고 떨림으로써 기겁할 정도로
너무 너무 정확하고
명료하고 깔끔하고
한 치 오차 없는 초정밀의 말씀 성취에
그 완료를 목격함에 영광 스러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목숨 따위에 연연한 이유가 없습니다.

약속이 옳았군요
또 옳았군요
어쩜 그리 정확한지요

그 약속이

남이 아닌 자신의 육체를 뻥뻥 뚫으면서
그 약속으로부터 뚫힘을 당함으로써

복음에 의해 매일 매일 누락 당하고
짤림 당하는 할례인간이 됨으로써
더더욱 새로운 낯선 미래완료를 미리 앞당겨 누리는 겁니다.

비록 육체는 후패하지만
겉사람은 너덜너덜한 걸레처럼 변하겠지만

속사람은 그 낯선 미래 완료를 누리는 기쁨에
매일 매일 희열을 누리는 겁니다.

그 복음에 난도질 당하면서
불 속에서 완료를 누리는 겁니다.
물 속에서 완료를 누리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 구원을 누리는 겁니다.
십자가 속에서 구원을 누리는 겁니다.
저주 속에서 8 복을 누리는 겁니다.
죽음 속에서 생명을 누리는 겁니다.
지독한 미움 속에서 지독한 편애를 누리는 겁니다.

창세전 예정인 고난을 거쳐서 미래 완료인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인간은 여기서 철저하게 소외됨만을 누림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처소를 허락하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인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그 비밀을 누리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우상을 찢어버리는 그 십자가의 능력 속에서만

피 흘리신 사랑을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주 께서 내 주께의 방식

주님 자신이 주님 자신을 치심으로써 그 홈페인 그 틈사이에서 나타는 잉여물 창조물로써만 자신의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믿음으로만 이룬 창세전의 예정인 십자가를 헛되이 않고자

그 십자가로 모든 육체를 무릎 꿇게 하시는

예수님의 주 되심을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로만
무가치한 3번 닭울음으로만
부정적인 3가지 물증으로써만

이룬 사랑만을 창세전 예정을 실현화 시키는 예수님의 믿음만 펼치시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의 믿음은 왜 거짓인지 반드시 동원이 되어서
그 차이성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너무 너무 낯설어서
인간의 사랑이 너무 너무 더러움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 사랑이 옳았음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거짓됨을
다윗의 율법지킴의 행함이 얼마나 어설픈가를 발가벗겨버리시고
아브라함의 믿음 실행이 얼머나 어설픈가를
모세의 거룩한 길 인도함이 얼마나 완악한가를
선지자들의 주의 뜻 예비함이 얼마나 신들메 풀기도 감당이 안되는가를
퍼뜩하면 자살로써 항의하고 왜 태어나게 했느냐고 항의하는 그 어설픔
그리고 베드로의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 라는 그 철통같은 다짐도 닭 울음 3번 앞에서 무용지물인 거짓사랑임을

우리는 그런 거짓을 거쳐서
예수님의 참 사랑의 차이성으로써

십자가가 옳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성령을 통해 외치도록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십자가를 거두지 마시고
우리의 처음자리 모태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가
우리가 태어나는
우리는 십자가라는 죽음이 낳은
피 자녀임을

남들이 싫어하는 그 부정적인 자리
어리석은 자리
미련한 자리
꾸중물의 자리
그 저주의 자리
심판의 자리

그 자리만이 사랑의 자리임을
원천인 태의 자리임을

그 속에서 그 죽은 태에서 새롭게 창조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