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의 통곡,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 2:12-23)

인간의 하나님과 간극을 벌리시는 초라한 하나님의 공의

 

( 2:12, 개역)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 2:13, 개역)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 2:14, 개역)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 2:15, 개역)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 2:16, 개역)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 2:17, 개역)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 2:18, 개역)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 2:19, 개역)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 2:20, 개역)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 2:21, 개역)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 2:22, 개역)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 2:23, 개역)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2:12, 새번역) 그리고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 2:13, 새번역)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 또는 '점성가들'. , '마고스'

( 2:14, 새번역)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 2:15, 새번역)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  11:1
(호 11:1, 개역)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 2:16, 새번역)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 또는 '점성가들'. , '마고스'

( 2:17, 새번역)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2:18, 새번역)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  31:15

( 2:19, 새번역) 헤롯이 죽은 뒤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 2:20, 새번역) 말하였다.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 2:21, 새번역)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 2:22, 새번역)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그 아버지 헤롯을 이어서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물러가서,

( 2:23, 새번역)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성경말씀은 인간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천사들의 활동과 꿈, 환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태복음 뿐만 아니라 성령행전이라는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볼수 있습니다.

즉 성경 전체는 인간의 활동을 배제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여기서 꿈도 천사들이 나타나서 지시하거나 주님이 나타나 지시하는 식이지

 

인간의 꿈이 아니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성경세계는 성령의 활동으로서만 이루어지고

그 반면에

악한 세계인 이 세계는 인간의 꿈에 의해서 펼쳐지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이 두 꿈의 세계의 충돌로 인해서

오늘 두 살 밑으로의 아기들이 죽어나간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 2:16, 개역)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왜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며

왜 이 세상을 멸망시켜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 알고 라고 나옵니다.

즉 헤롯이 정작 박사를 속일려고는 하지 않았나요?

성경은 왜 거꾸로 적을까요?
물론 의미상으로는 다 알지만 정작 문자적으로는 거꾸로인냥 적습니다.

 

한번은 재미있는 경험을 했는데

두 살 밑으로 왜 아기를 죽도록 내버려 뒀냐 라고 저에게 따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억수로 많았다 말이죠

 

억수로 그 두 살 밑으로의 아기들이 불쌍해서

그 불쌍한 마음에 두 주먹 불끈 쥐고 패 죽일려고 하듯이

살기가 넘치게 묻고 또 묻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더 웃끼는 것은

그렇게 정의 곧 불의를 못 참는 정의를, 의로움을 펼치는 듯이 보였지만

정작 그 모습이 신뢰감을 주기는커녕 속일려고 하는 속임수로 보이더라 말이죠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았다는 그 속았음에 대한 분풀이로 인해

두 살 밑으로 죽이는 것이 정당할까요?

 

아 나는 속았다 그래서 그로 인한 정당성으로 인해

두 살 밑으로 죽일 거야 라는 것이 누가 봐도 정당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헤롯의 악함을 아무도 이 세상은 안 따지고 들지만

왜 예수는 두 살 밑으로 아이가 죽도록 내버려 뒀나요 라고 따지는 것은 마치 당연한 줄 알더라 말이죠

 

이것이 아기 예수님을 못 죽여서 난리였던 헤롯이나

33년 뒤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한 우리의 모습이나 뭐가 다를까요?

결국 예수님은 죽으러 왔지만 그래서 당연하지만

두 살 밑으로는 아니다는 겁니다. 당연한 죽음이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 예수 때문에 죽었으니 책임지라고

 

이 아우성을 안 믿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자들이
자꾸 자기가 예수 안 믿는 것, 또는 안 믿고픈 것에 대한 정당성으로써 나오지
(젊은이들이 교회에 더 이상 안나오는 것에 교회들이 투덜대는데 오히려 잘 된 겁니다.
합리적으로 따져보면 당연한데 정작 인간이 똑똑한 것 같지만 무지 덩어리 그 자체인 허무 입니다.)

두 살 밑으로가 정말로 불쌍해서, 사랑해서가 아니였다는 거죠
이런 정의 롭지 못한 하나님을 왜 믿냐 라는 정당성을 하나 찾아낸 겁니다.

결국 선악과 나무의 결실을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경쟁자인 예수에게 추궁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런 모든 인간의 선악성을 성경말씀은 놓치지 않고 언약과 대립시킵니다.

이 언약은 오로지 성령의 활동으로만 이루지

인간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기에

오히려 인간은 정반대편에 놓여져서

이 언약의 방해꾼 노릇인 원수의 자리에서만 놓여지도록 하신다 말이죠

 

결국 인간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도 다 이루어지는 이 언약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약에 혜택을 준다는것만이

바로 공의

정의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외치는 의 정의 라는 것은 순 거짓말이다는 거죠

 

즉 나는 예수 당신 안 믿을 거야 라는 핑계와 정당성을 자꾸 저런 식으로 속일려고 들더라 말이죠

 

최근 방송(다스뵈땡땡, 용민이 출현)에서
김어준이가 어릴적에 교회환경에서 자라서 우수한 성경학교학생이였는데

지금은 안믿는다는 정당성을

바리새인이나 가룟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의리가 없음을 따지고 들더라 라는 거죠

 

그냥 믿기 싫고 귀찮다 라고 하면 될 것을

그 정당성을 엉뚱한 데서 대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자가 되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자가 되겠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이 하는 행동들 자체가 악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거죠

그들이 생각하는 선악에서의 악은 박그네 이명박 이명박그네이겠지만

그래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의 모습이 이명박그네와 무처 닮아가고 있다는 거죠

평생을 그 의문의 반복에서 벗어날수가 없다는 겁니다.

 

뭐 이런 모습은 뭐 한 둘이가 아니기 때문에

왜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고 있는 가룟유다를 버리는 의리 없는 짓을 하느냐 라고 말이죠

그런데 정작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버린 것은 안 따진다 말이죠

주로 종교를 포기하는 자들은

신과의 동일성이 밑도 끝도 없는 짖이다는 것을 알고 빨리 포기하겠지만

대신 그 빈자리를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채우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안 그러면 할짖이 없어서 자살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노땡찬이가 더 이상 할짖이 없어져서 자살했다 말이죠

죄 지으면서 사는 인생인데

더 이상 죄 지을 것도 없다고 여기니까 포기해 버리는 겁니다.

 

자 그렇게 종교를 포기한자들은

신과의 동일성을 포기한 대신에

그 빈자리를 인간과의 동일성으로 채우도록 되어 있기에

이 공동체 운동에 목숨 걸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국가 라는 것도 공동체 이니까

하나 밖에 없으니

저 악마같은 딴나라당들 놈들에게 빼앗길수가 없다고

탈환 전쟁을 벌리는데

이것이 글쎄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 말이죠

탈환해도 허무하고

빼앗겨도 허무해요

 

공동체가 우상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가룟유다를 그렇게 변론하고픈 어준이가

이 공동체라는 것이 얼마나 우상이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

교회도 우상이다 말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이미 다 완성 되어서 인간이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또렷한데

인간의 손으로 짓는 성전은 그 속에서 별에별 정치싸움이 서로 벌어지도록 되어 있는

우상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시스템이다 말이죠

 

인간의 꿈은 결국 시스템이고

 

성경은 모조리 다 비밀인데 이 비밀은 바로 관계이다 말이죠

그러니 성령으로만 천사들로만 영으로만 관계맺기를 하니까

 

이 시스템(하나님과 같이 된 국가 곧 인간들의 꿈들이 모인 국가 또는 공동체)

이 아기 예수님이 떳다는 것 자체가 소동이고 지진이 일어날 일이라서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두 하나님이 있으면 안되니까

하늘에 태양이 두 개면
부활의 첫 열매인 의인(믿음으로 다시 살리라)은 예수님이 처음이지 인간의 의는 아니니까

한 나라에 두 명의 왕이 있을 수 없으니까 말이죠

 

그러니 동방박사의 헤롯을 만난 것은

너는 더 이상 유대인의 왕이 아니야 라는

암행어사 출도요 라고 변사또에게 통보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이만 군사를 끌고 왔으면

일만 군사를 지녔다면 무릎 꿇어야 할 것 아니겠냐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영의 일이기 때문에

절대로 무릎을 못 꿇는 육의 대표자로써 반응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성령이 소욕에 반드시 반대되는 육의 소욕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성령의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 14: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14:25, 개역)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 14:26, 개역)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 14:27, 개역)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14:28, 개역)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 14:29, 개역)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 14:30,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 14:32, 개역)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 14:33, 개역)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14:34, 개역)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 14:35, 개역)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 14:24,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 14:25, 새번역) 많은 무리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14:26, 새번역)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14:27, 새번역)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14:28, 새번역)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 14:29, 새번역)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며,

( 14:30, 새번역)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 14:31, 새번역)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서 자기에게로 쳐들어오는 그를 자기가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 14:32, 새번역) 당해 낼 수 없겠으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할 것이다.

( 14:33, 새번역)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14:34, 새번역)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 또는 '무엇으로 그 짠 맛을 회복하겠느냐?' 또는 '무엇으로 짠 맛을 나게 하겠느냐?'

( 14:35, 새번역) 그것은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가 없어서 밖에 내버린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여기서도 나오지만

인간의 역사 곧 시공간은 마치 이룰수 없는 미완료인 챗바퀴 속에 갇혀진 모습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일과 반대되는 주님의 일하심은 아예 처음부터

끝을 땡겨와서

다 이루었다를 땡겨와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항복해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완성되는 구체적 보편적 진리로써의 완성이니까 말입니다.

 

( 14:30,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 14:30, 새번역)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가룟유다도 노땡찬도 자살하지 말고

이스라엘 독립운동을 끝까지 펼쳐 보라 말이죠
과연 이루어지는지?

예수님 때문에 나 안할래 저 양반에게 기대했는데 안 도와줘서

의리없이 행동해서 그만 실망해서 그만 둘래 라고 핑계대지 말고

끝까지 해 보라 말이죠

 

그런데 알았다 말이죠 눈치챘어요 본인들도 말이죠

깨달았다고 했잖아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꿈은 거짓이듯이
인간의 깨달음 곧 종교죠 모조리 거짓입니다.
깨닫게 하시는 성령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은
스스로 깨달으니까 자살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깨닫지 마세요 뉘우치지 마세요 깨달으면 자살하도록 되어 있어요

안된다는 것을

막살지 않는 것이 안된다는 것을 깨닫자

자살해요 막자살해요 글쎄

(마 27:3, 개역)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 27:3, 새번역) 『그 때에, 예수를 넘겨준 유다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그 은돈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고,』
(마 27:3, 공동) 『그 때에 배반자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 그래서 은전 서른 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며』
(마 27:3, 쉬운)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은 삼십 개를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마 27:3, 현대인) 『그때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는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가 내린 것을 보고 뉘우쳐 은화 30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 주며』
(마 27:3, 현대어) 『[유다의 죽음;행1:18-19] 그때 예수를 배신한 유다는 예수께서 사형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깊이 뉘우쳤다. 그래서 그 은전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돌려주며』

 

이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은 아예 처음부터 끝을 땅겨와서 다 이루었다를 땅겨와서 시작하시기 때문에

중간에 건물짖기가 멈추어지는 법이 없다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12지파에 대한 완성을 포기한 적이 없이

다 이루십니다만

인간은 겨우 한 지파 유다지파 남았다고 까불거리면서
구원신학으로 구원교리로 천국가길 바라고 있으니

아니 나머지 11지파는 냅뚜고 구원받을려고?

그런 구원이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모든 종교가 다 그런 구원인데

이스라엘 12지파도 완성 되지도 않은채

 

 

( 14:28, 개역)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 14:29, 개역)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 14:30,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도 못하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 누가 그 건물에 들어가서 쉬고 잠자고 안식을 취할수 있겠냐 말이죠

오히려 비웃꺼다 말이죠

 

인간의 공동체가 다 이런식이다는 겁니다.

 

이런 가운데서 유대인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찰나에

또는 이런 가운데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찰나에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두 유대인의 왕이 태양 아래에 있을 수 없고

 

두 이스라엘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주 할수 있으면 안되기 때문에

 

드디어 본색이 드러나서 예수님을 헤롯과 예루살렘은 죽일려고 소동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이들의 손에 백날 맡겨본들 어차피 완성되지도 않는 이스라엘 건물이고

반면에 주님은 아무리 버림받아본들

오히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어서 완성되는 건물로써

이미 다 이룬채로 완성된채로 아기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기 때문에

 

이런 살인극이

 

나 저 아기 예수 싫다 싫어 라고

계시록에서 아기 예수님을 놓친것에 대한 분풀이가

바로 두 살 밑으로의 아기가 죽어나가는

이 악한 세상의 본색이 드디어 숨어 있다가 펼쳐지는 식이다 라고

계시록은 이미 벌어진 상황

이미 완성된 입장에서 펼쳐지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써 흐릿하고 모호하게 벌어지는게 아니다 말이죠

 

자 그러니 다 죽이니까

 

두 살 밑으로 다 죽은 그 아기들의 어미들이

위로 받을수 있을까요? 아니면 위로 받기를 거절할까요?

 

( 2:18, 새번역)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  31:15

 

( 31:15,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 31:15, 새번역)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세월호 아이들이 빠져 죽었는데 아무리 대통령까지 감옥에 보내고

연관된 자들 즉 살인자들이겠죠

모조리 다 물에 빠뜨려 참수형 시켜본들

아이가 살아오거나

아니면 속이라도 후련해 지기라도 할까요?

 

조금이나마 양심상 돕겠다고 세월호 영화 만들어주고

모금활동 벌여도 안됩니다.

 

이것은

언약을 말하기 위해서 벌어진 사건이다 말이죠

즉 세상이 악하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악하냐

 

흠모할 모양이 없을 정도로

딴 하나님을 바라고 있는데

 

막상 그렇게 알고 믿어왔던 하나님이

볼 품 없게 초라한 모습에 얼굴이 새카맣게 탄 구두약을 온 몸에 바른양 하고 나타나니까

그 실망감에 죽여버리고 싶은 정당성을 갖추는 식이

바로 악한 세상이였다는 또렷하게 밝히는 식으로써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일려고 했는데

계시록에서 말했듯이 쏙 빠져 나가버렸다 말이죠

광야에 숨어버린 겁니다.

거기서 삼일의 간극

 3년 반 동안 이라고 하지 않고

구지 풀어서 천이백60일 동안 피했다 말이죠

 

( 11:3, 개역)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 12:6, 개역)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즉 행함이 있는 믿음 곧 공적인 자유를 외치는 공무원 기능을 펼치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구체적 보편적 진리이다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마귀는 그 화풀이로

성도들을 죽였듯이

 

아기 예수님에 대한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그 분풀이로 두 살 밑으로 다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악한 행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왜 나를 동방박사를 통해서 속였냐고 의리가 없다고

나는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을 알려줬는데

의리를 지켰는데 왜 날 속였냐고

 

의 의 의 정의롭지 않다고 우기더라 말이죠

(진짜 의로움은 3년 반 이라는 간극을 벌리면

모든 인간들이 이 아기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살인마로 들통나도록 만드는 것이 의

꼬기오 고끼오 꼬끼오 였다는 겁니다.

너가 살인마야)

 

그런데 이 모습이 어준이의 모습과 같아요

 

왜 바리새인과 가룟유다를 배신하냐고 의리 없게 시리

의 의 의 정의를 외쳐요 글쎄

그러니 자신도 결국 배신 당하고 의리 아무리 지켜본들 저쪽이 의리 안 지킬것이 뻔하니까

그 반작용으로써 자신들이 지금 의리를 지키는 일에 종사한다고

결국 예수님에 대해 속았다고 나오는 것이 인간들의 역사 라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공동체 운동에서 벌어지는 것이다는 거죠

 

모든 공동체의 운동은 바로 예수님에 대해 속았다고 그 반발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말이죠

 

그러나 그런 인간들의 그 잘난 의로움이

사실상 사기 라는 것

 

살인의지였다는 겁니다.

이것을 밝히는 것이 진짜 의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겁니다.

 

진짜 의로움은 바로

진짜 아름다움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말이죠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달려드는데 발악을 하는 살인자였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 죄악을 무슨 수로 씻을수 있냐 말이죠

죽이고파서 안달인데

아무도 안죽여요 같은 편이니까 그런데 예수는 꼭 죽이고 싶어해

무슨 수를 써서 라도

그 착한 아빠가

그 정의롭던 형님이 오빠가

그 수줍어 하는 누나가 언니가

그 인자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곧 임종하실 증조부모도

있는 힘껏 다해서 어떻게 해서든

이 땅에 예수라는 인물은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절대로 못 밟겠다고

모든 인간들이 살기를 펼치더라 말이죠

 

이것이 피해자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진짜 하니님이다는 겁니다.

선악의 과실을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에게서는 절대로 나올수 없는 하나님이거든요.

그래서 절대로 희생자의 모습은 싫은거다 말이죠

자신이 투사한 하나님이 곧 자기의 모습이지요

다 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가 이방인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지혜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인 겁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숭고함

영광이다 말이죠

 

이게 무슨 아름다움으로 보이겠냐 말이죠

죽었다가 다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무슨 의로움이냐 말이죠?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말이죠

 

말이 되는 소리

즉 인간 역사에서 반복이라도 할 수 있는 가능한 소리를 해야지

이건 아예 불가능한 단절의 소리를 하고 있으니

누가 믿으리요?

 

바로 그겁니다.

제발 믿지 말라 말이죠 종교화, 교리화, 성경무오화, 하지 마세요

제발 동일시 하지 말라 말이죠

믿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믿음 조차도 행할려고 덤벼드는 인간의 본능을자극하는 소리이기에 그런 사기에 넘어가지 말고

어차피 안된다는 겁니다.

 

이 안되는 것에 기뻐하라 말이죠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 말이죠

안되니까 기뻐해야죠

 

? 만약 믿는 것이 가능해져 버리면 이것을 또 자랑한다 말이죠

믿는 자신을 말이죠

말도 안되는 것은 끝까지 말도 안되기에

끝까지 아무도 모르게 품고 가라 말이죠

 

( 13:44, 개역)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 13:45, 개역)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 13:46, 개역)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치 자기 전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살 정도로

자기 목숨 다 걸어도 모자랄 정도로 아낌없이 다 올인 배팅을 걸 정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자청년은 못하죠? 예루살렘에 그럼 왜 살았냐 말이죠

왜 율법을 어릴적부터 말라꼬 지켰냐 말이죠

 

( 19:20, 개역)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 19: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 19:22, 개역)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 19:23,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19:24, 개역)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 19:25, 개역)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 19:26,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19:27, 개역)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 19: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19:29, 개역)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 19:30,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부자가 천국에 갈수 없는 그 불가능성을

낙타가 바늘귀를 못 통과하는 것처럼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낙타]가 점 하나가 찍혀서 [밧줄]인데 낙타로 잘못 해석이 되었다고 한들

그 의미가 달라지냐 말이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엉터리로 해석하는 자들 핑계대고

정작 성경 본체를 거부하는데 정당성을 추구하니

누가 더 악하냐 말이죠

 

성경무오하고도 아무상관 없다 말이죠

성경 무오를 외치는 즉 성경을 교리화 시켜 성경무오설

뭐뭐 설로 만드는 그 악한 놈 핑계대고

자신의 악을 정당화 하니

 

유대인들이 마치 로마라는 악한놈들 핑계대고 자신들을 정당화 하는것과 같다 말이죠

저 세리(매국노, 로마 앞잡이, 친일파, 친로파)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그 하나님이 과연 진짜 하나님 맞냐 말이죠

 

그 정도로 자신의 기대치가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이 되어버렸고

일치감치 눈치챈 얍삽이들은 그 기대치를 아예 포기해 버림으로써

아예 적개심으로써 꼬투리 잡아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니(역시나 선악을 못 벗어나요 오죽 하면 선물 성령이 아니면 안되요 안된다는 뜻에서 성령인데 이제는 성령까정 소유를 해 버리니 원)

 

그런 자들이 위로 랍시고 세월호 라는 트라우마를 치료한다 랍시고

시작은 잘도 일 벌려 놓지만

끝은 절대로 마무리 못해요

 

세월호 보다 더 큰게 나타나면 그때 묻힌다 말이죠

내 아픔은 아픔도 아니였구나 라고

 

인간은 절대로 건물을 완성할수 없는

시공간이라는 역사에 이미 갇혀버린 상태이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그 육체를 깨뜨릴려고

그 의문의 반복을 깨뜨릴려고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는 겁니다.

곧 의가 나와요

정의가 나와요

모조리 다 첩경을 평탄케 하는

모조리 다 심판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선지자란 바로 이 아름다운 소식 곧 의에 정의에 동원이 되는 공무원입니다.

3년 동안 발가벗고 돌아다니면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꼬

3년 반동안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세 번 닭이 대신 울고 하듯이 말이죠

 

오죽 하면 위로 받기 거절 할 정도로

심판 속에 죽음 속에 불 속에 다 집어넣는다 말이죠

 

모조리 다 불 뱀에게 물려 죽게 한 뒤에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게 한다 말이죠

 

이게 아름다움인데

즉 심판 속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곧 말씀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말씀 곧 예수님 말이죠

그러니 하늘의 예루살렘을 완성하심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이 예루살렘을 깨뜨려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공간 시간

곧 우리 몸을 깨뜨리시면 약송이라는 보배가 나온다 말이죠

 

어 분명 우리가 아름답지 않다고 흠모할 모양이 없다고

고개를 돌렸던 그 분 아니냐 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라 라고 외쳤는데 바로 그 분 아니냐 라고

 

그런데 불속에서 보니 유일한 거룩이더라 말이죠

심판주 이더라 말이죠

 

백날 십만 군대 이십만 군대 가져본들

저 분의 군대 앞에서 쨉도 안되는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다는 것을 안다면

 

저 의를 쳐다봐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그때 찬양하는 자가 바로 남은자이다는 겁니다 찬양자

저 분 아니였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거라고 노래하는 자 말이죠

 

그런데

난 안 볼래 내 손으로 죽였는데

의리도 없는 내가 왜 쳐다봐?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한 자이지만

그렇다고 저 양반을 쳐다본다고 해서 낫는것도 아니니까

나는 내 소신을 끝까지 지킬 거야

 

또는 종교라는 죄책감에서(맞아요 종교는 죄책감만 심어요 믿지마세요 죄책감이 거꾸로 되면 살기가 넘치게 되요 막 자살하거나 살인을 한다 말이죠 대제사장 보세요 옷을 찢잖아요 참람한 말을 들었다고 웃끼게도 자기 귀가 무슨 거룩한 귀인냥, 성전을 헐라 라는 소리가 진짜 공무원이 외치는 소리이어야 하는데???)

내가 못 박아 죽은 자를 내가 쳐다 본다는 것은 말도 안돼 라고

 

하나는 다른 한 쪽은 강도와 같고

밑의 종교라는 깨달고 자살한 죄책감의 가룟유다와 같다 말이죠

 

끝까지 자아 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니

 

이 모든 역사가 언약 중심, 십자가의 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포기 못하는

이 인간의 꿈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을 펼치는 이 인간의 꿈과

 

성령 곧 천사들과 같은 영들로써만 일하심에 있어서

인간은 그저 배치되는 장기알처럼 동원이 되는 식입니다.

 

아참 이거 마태복음이지요

바로 다음 글

이사야에서는

 

바로 이런 인간이 원하는 하나님상 그래서 동일시 할려고 따라하고 흉내내고 말씀 지킬려고 하는 것에 대비된

 

정작 가까이 직접 오신 하나님상은 흠모할 모양이 없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말이죠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는

귀히 여기지도 않는 판국인데

누가 믿었을리요?

아무도 안 믿는다 즉 적극적으로 안 믿을테야 라고 선언을 팍팍 자신감 있게 내뱉을 정도로

무능하고 약한

 

바로 희생자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아니 내가 믿는 하나님이 그저 허무하게 희생당하는 모습이였단 말인가?

 

 

이것을 누가 아름답게

귀하게

정의롭게

 

의롬다고

 

거룩하다고 보겠냐 말이죠

 

그래서 다들

사람의 특징이 항상 강한자에게 달라 붙어요

 

즉 사랑이 아니라

사랑은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울리는 꽹과리

이 울리는 꽹과리는 너무 너무 눈에 확 들어와요

무기 이거든요

강해요

 

그래서 두 살 밑으로 죽인 헤롯에게 달라 붙어서

왜 예수 당신은 두 살 밑으로 죽은 아기들의 죽음을 뻔히 보고도 가만히 있었냐 라고

 

헤롯에게 달라 붙어서

 

희생자의 편에 서서가 아니라

정작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다구치는 겁니다.

 

바로 이 모습을 들통낼려고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 화목제물이라는 것을

두 살 밑으로 아기들이 죽으면서

이 언약을 보여주고 있다 말이죠

다 이룬채로 말이죠

 

자 그러니 그게 무슨 말이 되는 소리냐 라고

그래서 오냐 이 참에 너도 죽어봐라 라고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이것이 그때 그 사건 2천년 전에 벌어진 사건으로 끝난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벌어지도록 하셨다 말이죠

 

이미 완료된 채로 말이죠

 

자 두 살 밑으로 아기들은

마치 성도 곧 계시록의 목베인 영혼처럼

이 세상의 실상을 밝히고 죽는

두 증인처럼

굵은 배옷을 입은 두 증인처럼

이 세상을 껍데기를 확 벗기는 기능

곧 공적인 자유인 진리를 외치는 공무원의 기능을 하고 죽지만

 

그 두 살 밑으로 죽은 아기들의 공무원기능을 못 보는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자는

그저 예수 당신 때문에 죽었잖아 라고

자꾸 핑계를 대는 모습이

유대인 곧 바리새인도 역시나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공동체 운동을 벌리는 자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종교(음녀)와 국가(짐승)가 합쳐진 666의 모습이다 말이죠

 

항상 상대적인 숫자이다고 했지요

 

이런 모습을 들추어내시면서

144천의 12지파 이스라엘을 봐라 벌썽 완성했잖아 라고 대조하시면서

언약의 성취자임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구원은 바로 이런 666으로 부터의 탈출입니다.

왜 탈출해야 합니까?

두 살 밑으로 죽일 정도로 악한 세상이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까지도 죽이는 세상 말이죠

 

맞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모세의 등장으로 두 살 밑으로 다 죽임을 당했듯이

애굽와 바로왕을 더더욱 강퍅케 하기 위해서 벌어진 구원사건입니다.

 

안그러면 부르짖지를 말던가? 구원해 달라면서요?

그래서 벌어진 구원사건입니다.

물론 부르짖는 인간도 없을 정도로 악한 세상이기에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길 정도로

세상 왕을 강퍅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위로 받기를 거절할 정도로 악한 세상이다는 것을 낱낱이 밝히시는 겁니다.

기술이 발달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살기 좋은 나라가 될줄 알았는데

바로 그 국가가 유지 될려면

성도의 피로써 잔치를 벌려 잉여를 생산하고

그 생산된 에너지로 국가를 유지하는 그 내막을 껍데기 벗겨져서 보게 될 때에

 

불뱀에게 물리고서야 비로소

부르짖게 됨으로써

인자를 쳐다보게 되니

그 처참한 구두약으로 새까맣게 된 태양빛에 그을려

고개를 돌려 싫어버린바 된 희생당한 자에게마저

제발 살려달라고 할 정도이면

더 처참하게 짖밟히는 이 악한 세상임을 눈치챈 성도라면

 

오히려 감추어진 비밀로써의 언약

천국 되신 예수님을 봄으로써

전 재산이 뭡니까

목숨 수천개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맞바꿀정도로 기쁘고 기쁜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 아니겠냐 말이죠

 

자 그러니 세상이 요동하고 격동하는 겁니다.

진짜 지혜는 천하디 천한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 원수를

신부의 자리 12지파의 완성된 이스라엘이라는 신부의 자리 왕비의 자리에 놓는데 있어서

악한 세상은 견디질 못하고 격동케 됨에 있어서

지혜는 옳다 여김을 받는다 말이죠

 

그런데 역사상에서는 시공간에서는 이것이 반대로 보입니다.

정작 세상은 강하디 강한 모습이고

실상은 허울인데 울리는 꽹과리 허상 꿈 환상인데

예수님의 모습은 처참한 희생자의 모습이기에

아무도 못 보는 겁니다.

 

그 실상은 도리어 다시 거꾸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계시록이였듯이

 

보이는대로 믿지 말고

안 보이는 것을 또렷하게 보는

무엇이 실상인지를 말이죠

 

그것을 보라꼬

 

주님은 이 마태복음 즉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을 통해서

얼마나 유대인들이 마귀의 대변자인냥

엉터리 허상인 가짜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 그 대표성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 말이죠

그 대립으로써 예수님의 또렷한 활동으로 어떻게

허구 허상이 들통이 나는지를 낱낱이 들추어지는 것을 보고

나 또한 들통남을 당하면서

우리도 마찬가지이구나

그래서 이런 죄도 들통내 주시는 구나를 누리면서

 

주님의 일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 믿음은 믿을 필요나 가치도 없다는 것을 기뻐하면서 말이죠

 

저 미쁘신 분이 얼마나 든든하게 일하시는지를

오늘도 내일도 매일 매일 즐기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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