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과 광야에서 외치는 자 ( 2:19- 3: 3)

 

( 2:19, 개역)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 2:20, 개역)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 2:21, 개역)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 2:22, 개역)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 2:23, 개역)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3:1, 개역)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 3:2, 개역)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 3:3, 개역)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 2:19, 새번역) 헤롯이 죽은 뒤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 2:20, 새번역) 말하였다.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 2:21, 새번역)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 2:22, 새번역)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그 아버지 헤롯을 이어서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물러가서,

( 2:23, 새번역)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2:23, 공동) 나자렛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판관 13:5, 7 참조.

( 3:1, 새번역)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 또는 '침례자'

( 3:2, 새번역)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 3:3, 새번역)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  40:3(칠십인역)

 

( 1:3, 새번역)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  40:3(칠십인역)

( 3:4, 새번역)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  40:3-5(칠십인역)

( 1:23, 새번역)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  40:3(칠십인역)

( 1:2, 공동)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이제 내가 일꾼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놓으리라." 하였고, / 말라 3:1(칠십인역 이사 40:3).

( 1:76, 공동) 아가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 되어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 이사 40:3; 말라 3:1.

( 3:4, 공동)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책에 기록된 말씀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 칠십인역 이사 40:3-5.

( 1:23, 공동) 요한은 그제야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하고 대답하였다. / 이사 40:3.

 

( 40:1, 개역)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40:2, 개역)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 40:3, 개역)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 40:4, 개역)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40:5, 개역)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 13:5, 개역)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 13:6, 개역)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 13:7, 개역)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 2:23, 개역)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4:13, 개역)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 21:11, 개역)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 26:71, 개역)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 1:9,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 1:24, 개역)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10:47, 개역)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14:67, 개역)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 16:6, 개역)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 1:26, 개역)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 2:4, 개역)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 2:39, 개역)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 2:51, 개역)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 4:34, 개역)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18:37, 개역)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 24:19, 개역)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 1:45, 개역)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1:46, 개역)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 18:5, 개역)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 18:7, 개역)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 19:19, 개역)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 2:22, 개역)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 3:6,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 4:10, 개역)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 6:14, 개역)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 10:38, 개역)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 22:8, 개역)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 24:5, 개역)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 26:9, 개역)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먼저 성경을 대충 보게 되면 말이 되도록 되어 있지만

정작 성경을 자세히 보게 되면 말이 안되는 불가능한 것만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마태복음이기에

얼마나 유대인들이 대충 봤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너희들 유대인들이 대충 본 그 내용을 가지고서 불편하게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마치 가장 잘 아는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내용을 가지고서

도저히 무슨 소리인줄 모르게 만드시는 씨뿌리는 비유처럼 그런 식이다는 거죠

 

나사렛 사람이다는 것이 구약에 예언이 되어 있다고 했는데

막상 없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신학계에서 논란이 되었었다고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딱 맞는 단어가 아니다 보니 그렇게 나온다는 거죠

즉 말이 되어야 하는데

딱 맞는 문자가 안되면 말이 안된다는 식이다는 거죠

 

그러니 그 당시 유대인이나

오늘날 현대의 사람들이나

말씀을 대충 본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죠

물론 유대인 보다 완벽한 자들이 어디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날 양자컴퓨터가 발달한 시대에

빅데이터에다가 모든 지식들이 나열된 입장에서 뭐가 아쉬워서

가능한 [말이 되는 것]을 쫏도록 되어 있지

[말이 안되는] 비논리를 누가 과연 쫏겠냐 말이죠

 

결국 나사렛 이라는 단어의 개념 보다

이 뉘앙스가 사실은 요즘 식으로 하면

또는 대한민국 식으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물론 나사렛은 나실인 나자르 사람들 이라는

삼손과 연관된 입장에서 나실인 곧 구별된자 라는 거죠

 

그런데 막상 삼손이라는 어중이 떠중이 기생오라비가

구원자가 되는 것에 사람들은 싫어버린바 되었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의 특징 아닙니까?

 

다들 한결같이 사사들에게서 구원받기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과

유대인이 말하는 구원 곧 오늘날 모든 인간들의 대표성 이기도한 유대인이기에

모든 인간의 말하는 구원은 완전히 정반대임을 사사기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나실인 이라고 구별 구분 바쳐진자라고 아무리 좋은 의미를 붙여도

정작 사람들은 나실인으로써 삼손 곧 기생오라비죠 뭐

입다는 산적 두목이지요

또 누구 있죠? 드보라는 여자 이구요 즉 부정하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말이죠

여자혐오가 아니라 여자가 구원자로 나설 정도면 그 동네는 그 정도로 개판인

남자의 구실을 얼마나 못하기에 여자가 구원자로 나오냐 라는 식입니다.

또 왼손잡이 누구죠? 왼손도 부정의 의미입니다. 에훗 이네요

또 우리가 잘 아는 기드온

완전 겁쟁이죠

그런데 용사라고 합니다.

 

마치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을 택해서 강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구체적 보편적 진리를 펼치듯이 말이죠

 

자 이런 부정적인 자로써의 사사가 바로 너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았다면

과연 감사합니다 라고 나올까요 아니면 고개를 다들 돌려서 싫어버린바 될까요?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때려죽어도 나 너 싫어

라고 다들 고개를 돌리는 식으로싸의 메시아이다는 거죠

 

즉 이미 마귀가 유대인을 다 장악한 입장에서

가짜 메시아를 기다리는데

그 구원자의 모습과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마귀가 장악한 유대인은

그저 유대인만 구원해 주는 메시아이길 바란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으로 오신다고 기록이 되었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자

곧 나사렛 사람으로 오신다는 거죠

 

마치 요즘 최근에 대구를 고담시라고 따로 독립하라는 식으로 비아냥 거리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듯이

대구사람으로 오신다는 식이다 말이죠

 

마치 가장 안 좋은 부정적인 동네 라는 식이지요

 

그래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태어나겠냐 라고 했다 말이죠

나사렛에서 무슨 구원자가 나겠냐 라는 거죠

고담시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 라고

 

( 1:46, 개역)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 1:46, 새번역)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삼손 시대인 사사기의 내용이 바로 이런식의 내용인 겁니다.

부정한 자들이 무슨 수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

정결한 자도 못 하는 판국에 라는 거죠

 

사실은 정결하다는 의인들은 아예 나서지도 않는 판국이니

실상은 의인이 아니였던 거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이름 불러지게 됩니다.

베들레헴 예수가 아니라

그것은 문자적으로 딱 맞게 예언이 되어 있으니까

헤롯도 제사장 불러서 찾아낼 정도였지만

나사렛 사람이 될 줄은 모른다는 거죠

그런 헤롯처럼 또 헤롯이 죽자 그 아들 아켈라오도 역시 모르고

오늘날 우리도 모르는 식이다 말이죠

문자 단어가 안 맞으니까 말이죠

 

사사기 전체가 내용상의 의미로써 또 이사야서도 마찬가지 다 알려줘도

모르는 겁니다.

 

나사렛 사람으로 올 줄 말이죠

 

결국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부정한 동네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별명인 겁니다.

이름이 말이죠

 

예수 라는 동명이 많은데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사람 이예요 예수

제주에서 태어난 제주사람 예수

자 이렇게 누구 라는 이름에서 지역 자란 곳을 붙임으로써 좁혀지고 또렷해지는 거죠

그런데 나사렛에서 출신 예수 라는 이름은 이미 그 말 자체로써 말이 안된다 말이죠

 

예수 라는 뜻이 구원자인데

부정한 동네에서 태어난 자가 어떻게 구원자가 되냐 라는 식인 거죠
심지어 나사렛 이단 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먼저 왜 부정한 동네가 되었냐 나사렛이?

아니 나실인 사람들이면 좋은 의미 아닙니까 긍정적인

그런데 왜 부정하냐

 

물론 삼손 자체도 사람들이 못 마땅했지만

이사야서 또는 열왕기서에도 나옵니다만

 

앗수르가 몽둥이 역할로써 등장해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북이스라엘을 다 장악해 버린다 말이죠

그때 앗수르 사람들이 북이스라엘 땅에 썩여 살고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포로처럼 앗수르 땅에 썩여 살도록 하는 민족 말살 정책을 펼치다 보니

 

혈통이 깨끗해야 하는데

아예 썩어버려서 혼혈이 되어버린다 말이죠

 

앗수르가 일부러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말라 그러면 살려줄게 라는 식인 거죠

 

자 이렇게 되면 율법에 예민한 남유다가

얼마나 순수혈통이라는 것을 무지 무지 따질 것 아니겠냐 말이죠

 

이런 와중에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피신해서 자라게 되니까

졸지에 베들레헴 사람이 아니라

나사렛에서 자라게 되니 나사렛 사람이 되는데
(간따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다 = 큰 동네가 아닌
나사렛 까정
온갖 부정적인 의미를 붙이기에 딱 좋다 말이죠, 약점을 아예 대놓고 자랑하는냥
약점을 잡으라고 안 잡고는 못 배기도록 만드는 그 정도로 악한세대가 미끼를 확 물도록)

 

이것은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이시고자 함이다는 겁니다.

 

(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 4:11, 개역)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4:12, 개역)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 4:13, 개역)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 4:10,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  6:13(칠십인역)

( 4:11, 새번역) 이 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 4:12, 새번역)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 4:13, 새번역)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 4:14, 새번역)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 4:15, 새번역)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  9:1;2

( 4:16, 새번역)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 4:17, 새번역)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스블론 땅에 나사렛과 베들레헴 예루살렘이 표시된 지도를 찾음 단 지파 이동 경로는 다음 아래의 지도) 

 

주님의 약속은 12지파에게 해당됩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미 11지파는 사라진 겁니다.

회복 불능입니다.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유다지파에게 책임을 물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죽은 자로 취급해 버렸기에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자의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홀로 된 유대지파 자신들의 손에서 떠난 문제이기에

유대인은 어떻게 해결할 길은 없다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율법사 부자청년 등등 모조리 어떻게 하면 무슨 행함 실천을 하면 구원을 얻느냐 라고만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12지파를 구원하러 왔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라는 말에

 

현실감 없는 소리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라는 이름은

이미 죽어버린 12지파를 구원하시겠다는 나사렛이다는 겁니다.


 

이미 지옥 백성 흑암백성

흑암의 도시 나사렛에서 자라십니다.평생을 따라다니는 출생지 성장터

그 사람을 구분짖는 이름이 되어버립니다.

 

(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 9:2, 개역)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단지파 삼손(나실인) 동네가 이동을 해서 새로운 정착지로써 가장 북쪽 위에 새롭게 있게 되고

그 밑에 스블론 땅 납달이 땅

사망의 그늘의 도시를 염두하신 거다 말이죠

그런데 그 어두운 동네에 빛이 비추였다는 의미에서

나사렛 예수 라는 이름이 되는 겁니다.

 

강남 예수가 아니라

아오지 탄광 예수 가 되는 거죠

사막에서 샘쏫는 생명수이다는 겁니다.
이 나사렛 예수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였다는 거죠
이것을 유대인들이 안 받아들이는 겁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먹보에 술꾼에 죄인의 친구 라고 별명을 붙이듯

온갖 부정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붙여 비아냥 거리며 무시해버렸지만

정작 예수님이 말씀 스스로가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붙여버립니다.

나사렛 예수 라고

범죄자들의 도시인 어두운 동네 사람 예수 라고 말이죠

 

자 이렇게 잔뜩 사사처럼 부정적인 자로 취급받는 예수님이

구원자 라고 하면 과연 누가 믿겠습니까?

맞습니다 못 믿도록 하기 위한

부정적인 조치였던 거죠

 

더군다나 마귀가 유대인을 장악해서

온갖 거룩하고 의롭고 정결한 온간 껍데기는 하얀 백로처럼 추구하도록 만든 입장에서

예수님은 까만 까마귀의 모습으로 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뭐라고 한다 라고 했지요?

 

네 맞습니다 의입니다 의 정의 거룩 의롭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외치는 의는 완전 정반대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라고 외치지 못하고

오늘날 교회들은 정반대로

강남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라고 사기를 치는 겁니다.

그것을 의로 본 겁니다.

오늘날도 이런 성향은 동일합니다.

 

나사렛 예수를 외치면 다들 싫어합니다.

고담시 예수를 말이죠

그럼 뭐로? 로스엔젤레스 예수

파라다이스 예수를 외쳐야 좋아하는데

 

바로 그런 성향의 유대인에게 마태복음은 나사렛 사람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거 뭐 완전 대 충돌 아니 되고는 못 배기죠

완전 정반대의 극과 극의 충돌이 되니까 말이죠

 

우리는 이 충돌 덕분에 이 둘의 차이를 보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차이를 못 볼 정도로 동일시 해버리니까

역시나 유대인들과 똑같아요 글쎄

 

충돌로 인한 사건을 보는 말씀이 벌리시는 사건을 보는게 아니라

바르게 살기 똑바로 살기 제대로 말씀 지키기 라는 식의

유대인과 동일한 입장에서

마태복음 곧 유대인에게 증거하는 복음으로서

나사렛 이라는 이름 은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즉 싫어버린바 되는

충돌로써

구원의 뿔로써 우리의 마음을 그 기대치를 빵구멍 뻥뻥 뚫어버리듯이 다가오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게 복음을 증거하는 구원자인데

 

아니 이 예언 구약에 기록된 대로 예언이 성취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예언 성취를 얼마나 유대인들이 바랬고 기다려왔지 않았냐 말이죠

그런데 가장 반발하는 이 역설????)

 

나사렛 사람과

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왜 도시에서 안 외칠까요?

도시란 소위 시장 마켓이다 말이죠

활력이 넘치는 곳 아닙니까?

생명력이 활활 타오르는

새벽부터 시장의 열기가 얼마나 후끈 달아 오를정도로

활력이 넘치냐 말이죠

 

그런데 광야는 바로 정반대의 죽음의 땅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부정한 곳에서 외치는 소리라면

들으라는 소리입니까 못듣도록 하겠다는 소리입니까?

 

누가 이것을 기쁜소식인 복음이라고 여기겠냐 말이죠

오히려 죽음의 땅 나사렛

죽음의 사막 광야

둘 다 부정적인 죽음의 장소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샘물이 넘친다고요?

 

바로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의 의 소식입니다.

거룩한 소식

 

여기서 유대인들은 반발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다른 구원자

다른 복음

다른 구원을 이미 바라는 가운데

그런 구원을 깨뜨리면서

그런 우상을 탐심을 깨뜨리면서 다가오는 복음이어야 진짜 복음이다 말이죠

선명한 차이점으로써

 

십자가와 속임수의 대립

누가 꾀냐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우리는 밝히 보이는 십자가라는 또렷한 죽음 보다

흐릿멍텅한 모호한 구원을 탐심으로써 우상화 하고 있으니

 

똑똑히 보여주겠다고

나사렛 예수 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복음입니다.

 

얼마나 또렷했으면

사울이라는 청년 곧 사도바울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써

모든 것에서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자를 완벽하게 꺽어버려서

그 모든 것들이 흐릿멍텅한 배설물이였음을

십자가 앞에서 또렷하게 밝혀졌음을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로써

구체적 보편적 진리를 도리어 외치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써

흑암의 백성으로써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자였던 사도바울에게

빛이 비추였다고 이것 보다 또렷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고

이 사막에서 샘 솟는 의를 제대로 보게 되는 겁니다.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우상을 이기는 복음이 아니면

삼일의 간극을 벌리는 십자가가 아니면

 

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우리는 부정하다고 취급하고 또 긍정을 막상 찾을려고 하는데

도리어 이 부정한 나사렛 이름이

사망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을 정도로 또렷함을

우리인 당사자 우리

곧 이 나사렛 예수를 핍박했던 가해자인 우리가 당사자로써

이 복음을 외치게 되는 영광을

오늘 본문 세례요한처럼

 

신나게 광야에서 아무도 안 듣는 그 죽음의 장소에서

샘을 생명수가 이미 터졌음을 누리기에

그 먼저 있었던 생명되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그 증상으로써 신나게 죽음 속에서 외치게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신나게 이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 떳다고

신나게 막 죽어나가듯이 도끼맨으로써 도끼를 마음껏 휘두르는

광야의 소리로써 첩경을 막 깍아버리는 겁니다.

잘난놈 못난놈 모조리 다 주의 심판 속에 다 집어넣는

 

? 주의 의를, 주님의 도를 배우라고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꼬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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