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하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십자가에 달리시는 분을 응시하라! (마 3: 1-12)
이 심판을 주목하라!! 이 가까이 온 천국을 주목하라!!
(요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새번역)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 ㉬'제거하는' 또는 '치워 없애는'으로 번역할 수도 있음』
(마 3:1, 개역)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마 3:2, 개역)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마 3:3, 개역)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마 3:4, 개역)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 3:5, 개역)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마 3:6, 개역)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마 3:7, 개역)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9, 개역)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 3:10, 개역)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마 3:11, 개역)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마 3:12, 개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 3:1, 새번역)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 ㉠또는 '침례자'』
(마 3:2, 새번역)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마 3:3, 새번역)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 ㉡사 40:3(칠십인역)』
(마 3:4, 새번역)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마 3:5, 새번역)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마 3:6, 새번역)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 ㉢또는 '침례'』
(마 3:7, 새번역)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 ㉣또는 '침례'』
(마 3:8, 새번역)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마 3:9, 새번역)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마 3:10, 새번역)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마 3:11, 새번역)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 ㉤또는 '침례'』
(마 3:12, 새번역)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선지자의 등장은 역사를 이어나가는
연결이나 연합, 개방을 외치는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단절인 종말
곧 끝을 확 미리 땡겨오는 기능입니다.
그러니 역사 곧 시간과 공간은 선지자의 눈에서는 거짓이 되는 거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거짓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자꾸 보여줄려고 한다 말이죠
곧 끝입니다.
즉 선지자는 앞으로 이런 일들을 여러분들은 해야합니다 라고 행실을 고쳐라 라고 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이미 확정된 끝장이 난 게임 오바를 선언 선포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 하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회개하라를 반대로 외치는 것이 거짓선지자인거죠
이러 이러한 잘못을 고쳐서 바르게 행동하라 라고 하는 것은 모든 종교가 외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끝을 당겨라 라는 겁니다.
너의 끝을! 너의 종말을! 너의 죽음을 땅겨라 라는 겁니다.
물론 죽음을 당겨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말라꼬 끝을 죽음을 종말을 땅기라고 하느냐
너의 죽음 조차도 가짜인데 너의 종말도 가짜인데
그 죽음 위에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당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짜 죽음인 나의 죽음은 심각한게 아니라
저분의 죽음은 진짜로써의 죽음으로 다가온다는 거죠
그래서 산 자의 하나님을 믿지! 죽은자의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거죠
산 자 곧 예수님의 하나님을 믿지
죽은자 곧 너의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이 산 자를 말하기 위해서
너는 오히려 죽은자가 되는 과부!!
과부와 부활의 의미를 말했지요
곧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만 외쳐지는 희년이 복음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도끼로 찍어버리겠다는 식이고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분을 보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내 열심이 특심인데 나만 남았다고 자기의 죽음이 심각했는데
주님은 세밀한 음성으로써 오심으로써! 곧 안보이는 음성, 안 들리는 모양으로 말이죠
엘리야 자신의 죽음 따위는 더 이상 심각해지지가 않고
저분의 죽음이 심각해지는 겁니다.
보이는 죽음은 가짜고
안보이는 죽음이 진짜로 덮쳐지더라 말이죠
곧 세상 죄 지고 가는 저 분이 심각해졌다는 겁니다.
그 죽음 앞에 나의 죽음은 택도 없는
죽음 축에도 못 끼이는
뻔데기 앞에서의 주름잡기 였다는 거죠
내 죽음은 죽음도 아니였고
저분의 죽음이 옳았다 진짜 죽음이다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종말의 주인을 외치더라 말이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례요한과 같은 안목을 지니게 될까요?
마치 소유하듯이 또는 공부하듯이 지식 습득하듯이 될까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인간 쪽에서 갖추는 의로움은 다 거짓이라고
방금 세례요한이 그렇게 외치고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물세례를 베푸는 겁니다.
흔히 교회에서 세례는 연합이라고 다들 배웠잖아요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연결 연합이 아니라 단절이라고 했잖아요
즉 연합은 연합인데 뜻이 틀린게 아니라 맞아요 단어의 뜻은 맞아요
그런데 빠뜨렸어요 그래서 틀렸다 말이죠
먼저 선행이 되는 것이 바로 단절 속에서의 연합 입니다.
그러니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단절 되었는데 하나가 된 겁니다.
이 물 세례는 바로 우리를 눈에 보이는 우리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연합 시키고자
눈에 보이는 나를 죽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분 곧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살아계심에
접붙이고자
물로 세례를 곧 물로 죽이는 겁니다.
물에 빠뜨려 죽인다는 거죠
곧 심판입니다.
오늘 제목이 바로
폐허를 응시하라 라고 제목을 섰는데
어느 책 제목인데
십자가의 죽음을 응시하라
왜? 진짜 생명이기에
아니 정작 죽음인데 어떻게 역설적이게도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냥 생명도 아닙니다.
만개하면서 꽃이 만발한 봄 날에 피는 무수한 생명이 흘러 흘러 넘치는 허벌난 생명이다 말이죠
그것도 사막에서 샘 솟는 생명수 말이죠
(사 35:6, 개역)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35:6, 새번역)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허드러지개 만개하여 꽃피는 꽃동산 말이죠
그러니 그냥 장미가 아니라
황무지 속에서 말입니다.
이게 기이하고 기묘라 모사라 이다는 거죠
사막에 생명을 꽃 피울수 있는 것은
의 정의 공의 거룩 밖에 없다는 겁니다.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의 방식
그러니 율법이라는 거룩은 시온에서 나오는 거죠 모조리 다 초토화! 다리질 해서 평탄케 합니다.
그리고 말씀 곧 사랑 그냥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인 울리는 꽹과리와 대조해서 나오는 사랑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겁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마치 예루살렘 자체가 의인화 되어서
스가랴 서의 여호수아처럼 새까맣게 탄 에봇 제사장 옷을 더럽힌 자 처럼
즉 패역한 딸에게서
죽은 예루살렘에서 나온다는 거죠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복음이 희년이 나와요
(물론 상대적인 마귀도 비로소 나옵니다. 이 미끼를 물어야 하니까 말이죠)
이게 관계이거든요! 시스템이 아니라?
박하 회향 운향 근채의 십일조가 아니라
대신 매 맞으심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는 거다 말이죠 나사렛 이름으로 일어나라 말이죠
나실인은 유일하게 사람의 머리카락을 넣어서 제물을 바치는
내 죽을께 너 살아라 라는 관계이거든요
그러니 누가 이 사랑에서 끊을자 있겠냐 말이죠
곧 과부 예루살렘을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곧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말이죠
단 한 명의 과부인 사렙다 과부
단 한 명의 문둥병자인 나아만 장군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겁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4, 새번역)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6, 새번역)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 / ㉧그,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 떼에게로'』
(마 10:6, 공동)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마 10:6, 현대어) 『오직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가라.』
그러니 회개란
회개의 달인들인 바리새인처럼 구원의 조건을 갖추는 행함 또는 실천 곧 역사가 아니라
그 반대로 주여 저는 회개 할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하는
관계 이다 말이죠
관계로써 다 이루었다를 땡겨버리는 종말을 땡기는
나의 죽음은 가짜입니다.
진짜 죽음은 당신 뿐입니다 라고
자신의 죽음과 주님의 죽음을 땡기는 종말을 더 이상의 행함이나 역사가 아닌
다 이루었다는 확 땡겨버리는 것이 종말로써의 회개인데
기도인데
자꾸 시스템으로써 회개를 땅기니까
성전에서 두 사람의 기도중 회개의 달인인 기도가 오히려 엉터리로 드러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기도인데 회개인데 그게 가짜라고 밝혀지는 거죠
오히려 세리의 기도 매국노의 기도가 옳았다고
아니 그게 무슨 기도입니까?. 세리가 무슨 기도냐 말이죠
바리새인처럼 팔짝 팔짝 뛸 수 밖에 없죠
저게 무슨 기도냐 말이죠 엉터리지
아니 그런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편파 해석을 해 버립니다 반칙 중의 반칙이지요 부정의 부정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입니다가 이게 뭐가 회개기도냐 말이죠
회개했다면 고쳤던 것
틀린 행동들을 고쳤던 것을 바르게해서 내놓아야 회개 아니냐 말이죠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의 기도이고
자기 숙제 했다는 겁니다.
숙제 안 하면 박목사 말처럼 쪽팔리니까
곧 뒤의 글 이사야서에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겠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들을 나열하는 식이 바리새인의 기도이고
반대로 세리의 기도는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조금 밖에 없다가 아니라
아예 없습니다.
오로지 심판 밖에 없는 거죠
숙제를 아예 하지 않은 아니 아예 할 수 조차도 없는 흑암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 개같은 이방인인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오직 외칠 것은 심판주가 떳다는 이유로
무조건 이유없이 심판 받아 마땅한 죽을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심판의 주를 보고 외쳤다는 거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께
대하여가 아니라 (숙제 대상이 이니라 연구 대상 믿을 대상 자꾸 대상으로 여기는게 아니라)
께 (거꾸로 예수님이 숙제하시고자 나를 대상물로 삼는 예수님의 숙제를 보는 것)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외치기를 원했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만 전하겠다는 겁니다.
회개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게 아니라 니느웨 백성도 자신이 기르시고 먹이신다고
관계를 외치십니다.
욥기서 처럼 왜 광야에 비를 뿌리는지 아느냐??
아니 이스라엘의 회개가 지금 급해 죽겠는데
왜! 이 어차피 멸망해서 죽어 마땅한 개같은 이방인 나라 니느웨 백성을 회개 시켜 뭐할려고요
맞습니다 맞고요
헛되다 라는 것을 주님이 요나 보다 모를 리가 없잖아요
헛된 짓을 왜 하냐 말이죠
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왜 시간 아깝게 구시냐 말이죠
어쩔수 없이 하루에 한 바뀌식 돌라는 것을
급해 죽겠으니까
하루만에 다 돌아버리고써 심판이 오기를 기다렸다 말이죠 (시공간이 졸지에 습관 시스템 울리는 꽹과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께서는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말이죠 의를 산자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외치시는 숙제를 다 이루었다고 보여주시는 겁니다.)
아 그런데 빨리 망했뿌라 라고 니느웨 백성이 심판 받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회개를 해 버리니까
심판이 퍼부어지지를 않는 겁니다.
어 배신 당했다
때리는 시어마이 보다, 저 개같은 이방인 니느웨 백성 보다, 세리 매국노 토색하는 세리 보다, 저 탕자 보다
말리는 시누이, 여호와가 더 밉다 말이죠
그래서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외친다 말이죠
이러기요 하나님! 이렇게 날 배신 때리기요!
당신 시키는대로 다 했는데 왜 배신하냐 라고?
그런데 먼저 앞서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왓다 말이죠
그리고 구원은 여호와 께로
께로 께로 라고 했다 말이죠
즉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라는 거죠
주는 그리스도 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라고 베드로가 고백했다 말이죠
아 그런데 바로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 안됩니다 라고 하다가
사단아 썩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려 하는 구나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라고 했다 말이죠
즉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외쳤던 살아계신 하나님을 외칠려면
육이라는 습관에 곧 역사인 시 공간에 담아서 외쳐지는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외쳐지는데
이 오순절처럼 성령이, 약속하신 성령이 부어지면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이 되더라 말이죠
그 단절에 죽음에 연합이 되는 겁니다.
나의 죽음 따위는 죽음도 안 쳐주는 진짜 죽음에 연합되게 하는 성령을 부어주신다 말이죠
여기에 육이라는 습관! 시스템! 시간과 공간 이라는 역사! 곧 역사는 습관이지요
이런 것들이 다 울리는 꽹과리로 들통이 나고
죽은자로써 외치는데 있어서
잃어버린 자로써 외치는데 있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와의 관계를 성령이 맺어주는 겁니다.
그러니 잃어버리게 하시는 거죠 그리고 되 찾죠
이것이 의 곧 율법 외에 한 의 이다 말이죠
선지자는 곧 성령 받은 자는 죽은자에게만 보내심을 받는다 말이죠
그게 니느웨 백성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죽은자의 하나님을 믿지
산 자의 하나님을 안 믿으니까
자꾸 자신의 살아있음을 내세우더라 라는 거죠
나 의롭다고
의로움을 실천한 것들을 가득 모아서 내세우는 겁니다.
십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바리새인)
회개 금식 눈물 기도 4종 세트 드릴줄 알고(다윗)
물 위를 세 번 걸을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을때까지 따라가고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따고 장 지지겠다고(베드로)
큰 계명 두 계명을 다 지켰다고(율법사)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부자청년)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고(맏아들)
다 이런 나는 살았다고 의롭다고 울리는 꽹과리인 배설물들만 잔뜩 가지고 오더라 말이죠
누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오라 했냐 말이죠
내 마당만 밟는다 말이죠
왜 나에게 보이러만 오느냐 라고 말이죠
아니 주님이 율법 지키라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너희들은 율법의 껍떼기만 완벽하게 지켰지
딱 하나 알맹이는 없잖아
그거 없으면 껍데기 완벽해서 뭐하게?
율법 지키라고 했으면서???
그럼 알맹이 가져오라니깐!!!
할 말 있냐?
없다 말이죠
유구무언입니다.
자 그래서 아예 이제 더 이상 역사에 기대하지 않고
문서선지자인 이사야 때 부터는, 문서선지자,
기록된 대로만 응한다는 거죠 동결이 된 겁니다.
이 기록된 것만이 곧 말씀만이 이루어지는데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나오는데 있어서
다른 것 일체 안 본다는 겁니다.
이것만 응시하라는 겁니다.
그 기록된 것이 뭔데?
바로 끝을 종말을 당기는 것인 바로 회개가 뭔고 하니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만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삼았다 말이죠
우리 숙제가 아닌 예수님의 숙제 곧 화목제물 되심만 응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 분을 보니 입이 있어도 입이 떡 벌어지듯이 잠잠케 되는
입을 막고
머리가 있어도 머리를 쳐 박고
잿더미를 뿌리고
생일이 있어도 생일을 저주하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진짜 죽음을 보고 나의 죽음은 심각 조차도! 입을 뗄수가 없구나!
이게 회개다 말이죠
진짜 의로움을 보고 자신의 의로움이 모조리 다 가짜임을 보게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모조리 다 날라가 버림을 당하는 겁니다.
네네 회개는 주님의 숙제였던 거죠 탕자를 오기를 기다리시고자 맨발에 멀찍이 나가 기다렸던
아버지의 사랑이 옳았다는 겁니다.
(눅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새번역)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물과 불과 성령으로 세례 곧 죽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진짜 죽음
내 죽음! 가짜 죽음에 속하는게 아니라
진짜 죽음에 속해서 연합하는 것이 회개다 말이죠
자 이렇게 되면 역사 곧 경험이나 등등이 깨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하나님의 의 로움을 보라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릴수도 없고
죽은 과부를 살려낼수도 없는
너의 가짜 의로움은 배설물로 여기고
진짜 의로움 앞에서 입이 떡 벌어져서
머리를 쳐 박고
잿더미 재를 뿌리면서
우는 겁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얼마나 미워했는지를 비로소 보게 되는 겁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갇혀서 빠져나올수 없음을
십자가에 달린 장대 높이 달린 인자 때문에 비로소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가짜 의로움에 도끼 곧 단절로써
회개로써
모조리 다 죽음 곧 심판 속에 광야 속에 집어넣습니다.
황무지에서 피는 장미 꽃을 보라고
벌써 이미 피었다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라꼬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꼬
광야로 몰아가는 겁니다.
마치 불뱀에게 물려 다 죽게 하듯이 말이죠
모세가 자꾸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원망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곳으로 인도한다 말이죠
아니 죽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맞고요
주님의 의가 먼저 떳기 때문에
불뱀에게 물린 자신의 정체를 들추임 당하라 라는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 평생을 종노릇하는 가짜죽음을 들통당하라꼬
가짜죽음 때문에 회개 눈물 금식 기도의 달인들이 다 되었다 말이죠
목사 시키는대로 하다가 말이죠
거짓선지자의 말을 듣고 말이죠
요나도 니느웨 백성 그 사건 아니였으면
어차피 가짜선지자입니다.
이사야도
베드로도
다윗도 다 가짜다 말이죠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누가 보기에는 완벽한 판결이였지만
누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제대로 판결한 자신이 의롭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저주 저 폐허 저 심판 받으신 분이 의롭습니까
이스라엘 왕은 그럼 과연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의사를 건강한 자가 외칠수 있던 가요?
의사는 환자만이 외치는 겁니다.
기능으로써의 관계성인데
존재로써 존재 존재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그런 존재는
개인 대 개인의 만남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치켜세워줄뿐
아버지의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맏아들은
아니 아버지의 존재를 치켜세워줬으면
아버지도 이 맏아들의 존재를 인정해줘서 치켜세워줘야지
저 망나니 탕자를 인정해 버리면 이거 배 배 배신 아닙니까 배 배 배신
십자가가 비밀인 이유가 바로 탕자를 존재로 본다는 거죠
개인으로 본다는 겁니다.
저 개인은 개인구원 주면서 나는 왜 개인구원 안주냐 라꼬 따지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이 이스라엘의 구원인 12 지파와 약속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약속한
이 약속을 무시하면서
자꾸 이브라함 자손이라고 우기니
저 돌 같은 개같은 이방인을 이스라엘 만드니까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이게 마귀다 말이죠
돌 같은 개같은 이방인도 12지파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유대인들은 때려죽어도 관계 안 맺겠다는 겁니다.
그럼 뭘 우기느냐
사라질 모세의 수건의 영광
그 수건이 글쎄 별명이 완악한 수건이래요
실상이 왔는데 실상은 안 믿고
실상의 그림자만을 믿겠다고 실상을 버리겠데요
모든 것을 갖추는 자기 개인이 좋지
12지파는 때려죽어도 싫데요
10지파는 저거들 개인이 잘못해서 없어졌는데
왜 나 보고 따지느냐 라는 거죠
사두개인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7형제의 맏형수에 대한 시형제결혼법은
율법 껍데기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인 알맹이 사랑으로써
죽은자를 살리는 것인데
이것이 부활인데
여성의 입장이 아니라
머슴아 입장에서 보니
더럽기가 짝이 없어
마태복음 족보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더럽기가 짝이 없이
나사렛 동네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 말이죠
이 시스템의 습관을 페허로 만들어 심판 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력이 넘치는 거다 말이죠폐허 심판하라 생명력이 넘치리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육의 습관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육 자체가 습관 즉 시,공간만 찾아요
생명은 시공간이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온다 말이죠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죄인에게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가 온다 말이죠
심판 속으로 광야 속으로 집어넣을 때 마다
홍해를 건널 때 고분 고분 건너온게 아니였듯이
온갖 원망을 다 쏟아내면서 건너 왔고 온갖 원망을 광야에서 다 쏟아냅니다.
원망한 것을 꺽는게
목이 곧은 백성을 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때려 죽어도 나는 주님을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을 꺽는 것이
목이 곧은 백성을 꺽는 겁니다.
죄인을 만들어야
환자로 만들어야 의사를 부르짖을꺼 아니겠습니까?
히스기야의 기도가 잘못 되었다고
제대로 기도 하라고 시계를 10도 기울이니까
15년을 연장한다 말이죠
시공간을 주는게 아닙니다 시공간을 줘봤자 육 자체가 습관이라서
의문의 반복 뿐이다 말이죠
그 반대로 15년 전으로 빠꾸 시키는 겁니다.
체육시간 또는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저 축구 꼴 때 집고 선착순 5명 하면
갑자기 우르르 달려가서 돌아서 도착순서대로 선다 말이죠
5명 뒤로 다시 빠꾸 시킨다 말이죠
히스기야에게 준 15년은 빠꾸입니다.
기도 다시 하라는 겁니다.
자신의 기도로 구원 받은게 아니라
그건 하나님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많이 안다는 것을 나열하는 것이
인간의 기도
이방인의 기도처럼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말이죠
분명 히스기야의 기도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앗수르를 물리치십니다.
말도 안되게 갑자기 말이죠
말만 주문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습관적으로 외쳤지만
또 살려주긴 했습니다만
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께
이 의미를 다시 알아라 라고 빠꾸 시키고자
왜? 주님의 이름을 문자만 맞고 단어만 맞고
속 알맹이는 엉터리라서
일단 살려서 앗수르를 물리쳤다 말이죠
그리고 죽이십니다.
아니 죽이실꺼면 말라꼬 앗수르로부터 구원했냐 말이죠 전쟁 승리하게 했냐 말이죠
그러니깐요
개인 구원 따위가 없다니깐요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건진거지
히스기야 기 세워줄려고 살린게 아닙니다.
그러니 죽이시는 겁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십일조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도 생명이라는 앙꼬가 없으면 그게 무슨 소용있냐 말이죠
(마 16:26,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막 8:36,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눅 9:25,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래서 다시 빠꾸 시켜서 다시 기도 하라고 하신다 말이죠
하나님에 대해서 나열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한다 말이죠
즉 죽은자로써 기도하는 겁니다. 이게 회개다 말이죠
너의 죽음 조차도 주님의 죽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니
15년 늘려준들 어차피 죽어요
아무 의미 없어요
15년 늘려주는게 아니라
15년 빠꾸 시켜서 다시 기도하라는 겁니다.
아까전에는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저 세리와 같지 않다는 둥 저 랍사게와 같지 않다는 둥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는 둥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하지 않겠다는 둥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들을 마구 마구 나열하는 기도를 했는데
이제는 15년 빠꾸 당해서 다시 기도하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물위를 걷게 해 달라가 아니라 물 속에 빠져서 주여 도대체 당신 누구십니까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천국에 가야 가는게 아니라
천국이 이렇게 가까이 오게 되니 물 위를 걷는자가 아닌 물 속에 빠진자로써
주의 이름을 외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환자만이 주여 고쳐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더라 말이죠
마귀의 목적이 이 관계를 끊는 겁니다.
환자와 의사라는 기능의 관계를 끊고자
자꾸 의인이 되라고
의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자 답다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 만들려고 하는 것이 마귀다 말이죠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롬 7:6, 개역)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니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율법인 말씀을 지키다가 꼬이는
뫼비우스 띠처럼 꼬이는 일이 없기를
그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거죠
곧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태가 없기를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말이죠
그런데 환자의 기도인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주님은
물과 불과 성령으로 구원사건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 물과 불과 성령의 세례는
심판 속에서의 연합이다 말이죠
교회학교에서 얼마나 고상하게 가르쳤냐 말이죠 세례를 연합이라고
그런데 그냥 연합이 아니라
하나 빠뜨렸다 말이죠 정작 중요한 알맹이
의를 빠뜨린 겁니다. 의
인과 자비를 빠뜨렸다 말이죠
심판 속에 죽음 속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게 하시는
이것이 세례이기 때문에
함께 춤추고 먹고 마시는 다니엘의 세친구처럼 불 속에서 함께 춤추는 연합 말이죠
일종의 목사나 또는 세례요한이나
사도들이나 우리에게 눈에 보이듯이 펼치는 그런 세례
뭐 세례든 침례든 결국 맛배기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주인이 아니니까요
누가? 그들이 말이죠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즉 실제로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자는 아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 조차도 의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죄인입니다. 환자입니다.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누구처럼? 모세가 홍해를 건너라고 인도했듯이 말이죠
구원자는 저 분이다 라고 외쳤듯이 말이죠
선지자는 죄인으로써 의사한테서 고침을 받은 환자로써
먼저 고침을 받아 이 기쁜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입장에서
저 분이 의사입니다 저 의사한테서 저도 환자로써 고침을 받았다고
환자로써 저 의사를 소개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저분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분은 저 분이다는 겁니다.
율법으로는 안되제? 율법 외에 한 의가 왔어
맞어 반칙이야
난 절대로 막살지 않아 반칙하지 않는다는 것이 틀렸고
저 반칙이 저 율법 외에 한 의가 아니면
우리는 벌써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다 말이죠
이 반칙이 나 보다 옳았다는 것이 의를 입은
기뻐하심을 입은 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망 안 할꺼야를 회개 하는
불로써 세례 베푸시고
즉 피로 덮는다 말이죠
허다한 허물을 말이죠
(요일 5:6, 개역)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요일 5:7, 개역)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일 5:8, 개역)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일 5:1, 개역)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2, 개역)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5:3, 개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4, 개역)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5, 개역)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일 5:6, 개역)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요일 5:7, 개역)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일 5:8, 개역)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일 5:9, 개역)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요일 5:10, 개역)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요일 5:11, 개역)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일 5:12, 개역)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3, 개역)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4, 개역)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5, 개역)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자 그런 입장에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싫어하는 거짓선지자와의 차이가 생기는 겁니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의 시선에서 볼때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은 종교시설의 종사자들이 왜 독사의 새끼들인지를 말이죠
그들은 이 종말을 외칠수가 없습니다.
종말의 단체가 교회라고 외치면서도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말이죠
여전히 역사에 기대를 걸고 즉 존재에게 개인에게 기대를 건다 말이죠
이미 다 끝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못 외치고
교회가 교회 다워야 한다 라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교회를 미련두고서
교회를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할 것인가?
성화 시킬것인가에 기대를 여전히 걸더라 말이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으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못 봅니다.
즉 사랑의 관계로써만 보게 되어 있지
울리는 꽹과리를 아무리 지켜본들
얼굴을 서로 서로 가릴려고 하니
언제 뻔뻔스럽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너무 너무 잘 아십니다 라고 할수 있겠냐 말이죠
탕자는 하는데 왜 맏아들은 때려죽어도 못 할까요?
광채나는 자신의 얼굴을 왜 가릴려구 할까요?
이 말은 곧 사람의 일만 하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죽임으로써
사람의 일로만 가득 채운다는 거죠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사람의 일은 율법의 세세한 것 까지 완벽하게 다 지키는데
그 꼼꼼함이 정작 껍데기의 완벽함이였지
알맹이 곧 딱 하나, 단 하나가 빠졌다는 거죠
바로 의 입니다.
이 의에 대한 해석이 틀립니다.
의란 저들이 주장하기를 오늘날 개혁주의나 성화론자들이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의란 안식일 지키기 하듯이
말씀을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씀을 지켜도 오직 단 하나 곧 사랑이 없다는 것에서
상한심령이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
사망의 몸인줄 모르고 의를 지키고 실천했으니 의의 몸인줄 착각하고 있더라 말이죠
죽음의 몸 곧 죽음에 갇혀있는 줄 모른다는 겁니다.
회개의 달인일수록 더더욱 회개를 못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다들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제는 죽음의 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살게 된 몸입니다 믿으세요 라고 말이죠
다들 이렇게 외쳐요 믿음이 부족하다고 가르쳐 들려고 한다 말이죠
즉 앞에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했듯이
기도 내용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내용들을 잔뜩 모아서
마치 조건 갖추듯이 구원의 조건들을 잔뜩 모아서 실천 완벽하게 실천하듯이
성경에 대해서 아는 내용들을 나열해서 기도하는 식입니다.
성전에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십의 일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세리처럼 토색치 않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도한다 말이죠
마치 박하 회향 운향 근채의 십일조를 너무 너무 사소한 것까지 세세하게 십일조를 내듯이
껍데기를 완벽하게 지키더라 말이죠
그런데 정작 이런 울리는 꽹과리를 잔뜩 모았지
사랑은 없더라 말이죠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앙꼬 없는 찐빵을 말라고 먹냐 말이죠
앙꼬 먹을려고 진빵 만드는 건데
아니 주님 때문에 살게 된 몸이라면
아무것도 없어도 앙꼬만 외치면 되지
왜 말라꼬 껍데기를 외치냐 말이죠
이것이 거짓선지자와 세례요한의 차이입니다.
거짓선지자는 개인에게 숙제를 잔뜩 남깁니다.
그리고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고
숙제하기 바쁜데 막살수 있겠냐 라는 거죠
그런데 세례요한은 뭘 해도 막 살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응시하라 폐허 심판 받는 저 분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주목하라 라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고자
단절로써 도끼로써
심판을 주목하라는 겁니다.
재난이 나면 일반인들은 다 도망쳐야 합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성령을 받은 선지자는
공적인 자유를 외치는 공무원이 갑자기 되어서
마치 어중이 떠중이 사사들처럼 말이죠
공적인 자유인 진리를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남들은 다 도망쳐도
물론 그들도 도망치는데 성령의 은사가 덮쳐지게 되니까
재난으로부터 도망치는게 아니라 도리어 재난 속으로 들어가서
무엇이 또렷한 실상인가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사명이 있는 겁니다.
메르스 사태때 의사들은 병균과 접촉하러 병균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일반인들은 감염 되기전에 도망쳐야 하는 반대의 길을 가듯이 말이죠
오늘날 목사들은 성화하라고 가르치는 삯꾼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죄 악 속으로 못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자 곧 피 흘리는 곧 시체가 되는 부정한 몸을 못 만지듯이 말이죠
이 심판 속으로
재난 속으로
죽음 속으로 밀어넣는 세례요한은
저 분이 너의 죄악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분이라고
저 분을 보라고 외치는 자로써
첩경을 평탄케 다름질 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뭐 뭐 말씀 지키고
십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성화 지키고
정신 없이 바쁜데
세상 죄 지고 가는 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게 되니
모든 것을 손 놓고서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진짜 실상을 보게 되니
이 모든 것이 배설물이였구나 라고
완악한 수건을 벗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뻔뻔스럽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외치는 자로써
찬양자로 태어나게 만드신 것이
밝히 보이는 십자가였지
내 믿음이라는 인간의 속임수가 아니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를 15년 빠꾸 시켜서
기도 다시 하라꼬
물 위를 걷게 해 달라는 기도를
이제는
주여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누구시기에 이 사망의 권세인 풍랑도 잠잠케 하십니까 라고
예수님께
살아계신 주님께
산 자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기도하는 자로 태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이 관계를 마귀 보란 듯이
마귀가 견디질 못하고 격동케 하는
울리는 꽹과리가 아닌
바로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보라고
목숨도 아깝지 않고 신나게 세계요한은 외칩니다.
저 분이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이라고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다 들으심이라
이미 다 이루신 이 십자가의 사랑 외에는 구할 것이 없습니다.
(요일 5:14, 개역)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쓰러져가는 자에게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는 소망을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가득 채워주시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예수는 우릴 인도하는 참길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진리
고통 중에 위로가 되시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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