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5 겉으로는 옳게 보이고, 속으로는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5-28)

십일조와 부자는 삼키고 가난한자는 걸러내는 교회지도자들 (마 23,23-24)
마태복음 2018 2020. 12. 13. 10:31
18-114 십일조의 의미와 부자는 삼키고 가난한자는 걸러내는 교회지도자들 (마 23,23-24)

〈마태복음 23:25-28, 개역한글, 신약성경 40쪽, 찬송가 515장 뜻없이 무릎 꿇는〉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5,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마 23:26, 새번역) 『눈 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안을 깨끗이 하여라. 그리하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마 23:27,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마 23:28, 새번역)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예수님 곧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 오셨다 라는 말은
이 땅은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그 내막들이 다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이 영화를 보셨다면 좋았겠다 싶은데
멜랑꼴리아 Melancholia 2011 라는 영화인데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작품 (백치들,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안티크라이스트)

예수님 곧 하나님이 인간 세계 속에 섞여짐으로 인해
이제 인간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닌
멀쩡히 지금 살아있는 가운데서 천국이 인간 세계에 쳐들어와서
그 내막을 하나 하나 들추어내시는 방식으로써 충돌 하시듯이 심판하시고 있다 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이 나 버린 이상
인간이 이끌어 가는 인생 따위는 이제 없게 되는 거죠
그저 이 심판만이 옳았습니다 라고 해야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여기에 죽어 마땅한 심판을 못 보는 자는
그저 불 앞에서 곧 들이닥칠 심판 앞에서
나는 이거 할 줄 아는데 너는 이것 못하지 라는 자랑거리를 나열하는 인생 자체가
얼마나 부질 없는 짓인줄 모르고
그것이 큰 것인냥 큰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내막을 드러내더라 말이죠
그것 조차도 심판 받아야 할 죄 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멜랑꼴리아 라는 영화를 보면
평상시에 정상인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자기 보다 못한 비정상인을 제대로 살아라 라는 의미로써
인도해주고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고쳐주고 꾸짖고 했는데

정작 멜랑꼴리아 라는 지구 보다 몇배나 된 큰 행성이 들이닥치게 되니까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자는 멀쩡해 지고
오히려 그 동안 정상인이라고 자부했던 지식인 과학자 등등은
자살을 한다든지 겁에 질려 두려움에 떤다든지
오히려 반대의 모습을 아까 비정상인 취급 받았던 자와 반대로 행하더라 말이죠

결국 그 비정상인이였던 자는 멜랑꼴리아 라는 행성의 증상물이였던 거죠
일반인 정상인 이라고 우겼던 자들은 지구의 증상물이고

천국이 지구와 충돌해서 심판해서 불질러 버리니까
누가 비정상인으로 드러나느냐
그 동안 정상인이라고 자부했던 자들이 막 자살하고
두려워 떨고 하더라 말이죠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지극히 정상인 이야 라고 우기고 있는데
여기에 지구인들은 다 인정하고 자신들도 그것이 정상인의 삶이다 싶어서
다들 따라하고 같은 길을 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거 엉터리야 라고 나오신다 말이죠
여기서 잠깐
그냥 예수님이 그냥 지나치시면 안될까요?

누구 말 마따나 누구긴 누구 이겠습니까?

주여 그 칸다고 해서 저들에게 찔림이 될 줄 아십니까 라고 했던 제자 말 마따나 말이죠

(마 15:12, 새번역)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마 15:12, 공동) 『그 때에 제자들이 와서 예수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금 하신 말씀을 듣고 비위가 상한 것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마 15:7, 개역)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마 15:8, 개역)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9, 개역)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10, 개역)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마 15:11, 개역)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2, 개역)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마 15: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 15:14, 개역)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 15:15, 개역)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제자들 마저도 왜 저 사람들 건드리냐 우리도 위태롭게 되잖아 라고 말이죠
도대체 누구 편이냐 말이죠
아무리 예수님의 편에 설려고 해도
예수님이 그것을 피해 가는 식입니다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런데 안 건드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없게 되는 겁니다.

질투의 사랑이 아니면 우상이 드러나질 않습니다

반드시 한 세트가 되어서
이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니깐요
애굽군사와 애굽 왕을 통해서 말이죠

그래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왜 저들 마귀와 다른지
왜 저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와 다른지를
그 차이를 통해서
구분 구별
거룩을 비로소
하나님의 의를 비로소 보게 되는 겁니다
내가 행하는 성화 라는 거룩한 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즉 예수님은 마치 다 이루었다라는 십자가의 증상물처럼
미리 이 십자가와 충돌해야 할 자들을 미리 앞당겨서 미리 충돌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십자가가 곧 천국
침략하는 천국처럼이
누구와 차이가 나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미리 적군을 규정하듯이 말이죠

마치 아브라함이 앞으로 애굽과 싸우는 약속의 전쟁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듯이
아 이래서 이 놈들이 앞으로 이스라엘과 싸워야 할 자들임을 말이죠

또 마치 빼앗긴 법궤 혼자서 우상들의 손모가지 발모가지 모가지 라는 모가지들은 다 짤리도록 하시듯이
빼앗긴 법궤가 말이죠
잃어버린 법궤가 혼자서 말이죠

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 하라꼬 말이죠
적군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조차도 항복 하라 라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다른 이름을 부여 받아서 구원받아라 라는 겁니다
새 이름 곧 새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새 언약의 완성으로 인해 부여받는
십자가에서 새로 태어난 자로써 말이죠

아 그런데 이방인은 새 이름을 부여 받아서 구원받는데
오히려 이스라엘이 기존의 이름으로 구원받겠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서
깨작 깨작 겉으로만 옳다고 여기는 거룩한 것 모든 거룩이라는 것은
다 끌어모아서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겨우 남을 7번 용서하는 겁니다

아이고 그것도 용서가 라고 주님께서
7에 70번 용서가 용서 아니냐 라고
큰 것을 구해야지 겨우 그거 실천했다 라고
서로 서로가 도진개진 키재기 하면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약탈하고 신원하지 않느냐 라는 겁니다.

왜 종말의 용서 곧 죽은자를 살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하지 않고
자기 개인 구원의 마일리지 쌓는 짓만 하느냐
그 껍데기 확 벗겨버리겠다 라고 충돌 곧 천국이 지구에 사는 인간들과 부딧히고자
멜랑꼴리아 행성의 증상물로써 예수님이 인간과 충돌하시고
그 예수님의 노선을 따라 참선지자가 이스라엘과 충돌하시고
사도들 그리고 그 사도의 피 선지자의 피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가
인간들과 충돌하는 증상물 멜랑꼴리아 행성의 증상물로써
인간의 되도않는 깔짝깔짝 대는 거룩을 성화를 행함을 믿음을
종교오락 게임을 다 깨부수시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겠다 라는 것은
즉 깨작 깨작 장난치겠다 라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염두한 겁니다
만약 남을 7에 70번 용서하겠다 라고 나오게 되면
너무 튀는 자로써 도리어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 미움을 받기 위해서 7에 70번 용서 하는 것은 안 구합니다
남을 너무 기 죽여서도 안된다는 또 자기멋대로의 선악, 옳고 그름을 또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남도 그렇게 만들어내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 어디까지나 이 인간 사회를 염두하고서
인간 사회가 깨어지지 않는 방향으로써의 적당량 남 7번 용서를 하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인간이 애지중지하는 그 사회를 깨뜨리고자
종말의 용서를 확 끌어오시는 겁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인간사회에서는 위협이 되고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는 겁니다
한 예로 장례사업이 다 그렇게 망하게 되면
누가 이들의 생계를 유지해 줄수 있겠냐 라는 결국 생존의 문제로 귀결 될 테니 말이죠

아무리 미국의 젊은이들이 총기를 없애자 라고 해도
자신들의 역사로 집결된 총기문화를 못 없애는 겁니다
자기 가족이 죽어도 못 없앨 정도면 이미 귀착이 된 거죠
그러니 최선의 선택이 총기문화가 없는 한국으로 왔다 라는 미국인이 많더라 말이죠
아무리 친구가 총에 맞아 죽어도 안 바뀐다 라는 것을 아는 거죠

바로 그겁니다
떠나야 할 입장이다는 거죠

주님은 이렇게 충돌을 통해서
남을 7번 용서하겠다 라는 겉모양은
사실은 속의 것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충돌하시는 겁니다.
즉 때려죽어도 남을 7에 70번 용서하는 오바, 초과잉은 싫타 라는 겁니다.
적당량만 하겠다 라는 겁니다
즉 종말 곧 역사를 뒤 엎어버리는 사랑을 싫고
질투의 사랑은 싫고
울리는 꽹과리만 적당량의 무기로 남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고
나도 남을 공격하지 않겠다 라는
마치 북한이 핵무기를 소유함으로써 자주국방을 하겠다는 식으로써
용서를 하겠다 라는 심뽀를
그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는

종말의 용서인 7에 70번 용서와
남을 7번 용서 하기와 충돌을 벌리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속내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인간의 겉은 무덤으로 회칠한 모습이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롬 7:18, 공동)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롬 7:14, 개역)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 7:15, 개역)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 7:16,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 7:17, 개역)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할 능력(공동번역)이 없다고 합니다

능력 그까짖꺼 돈도 벌었겠따 권력 그까찢꺼 돈 주고 사면 되지
능력이 이렇게 많은데 라고
이런 속내가 한국교회는 다 드러난 겁니다

그러나 능력은 성령을 두고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다 라고 했잖아요
성령의 소욕은 바로 인간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이 도리어 경건의 능력을 부정하는 모습이다 라는 것을
성령 곧 종말의 영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인데
경건의 모양은 남을 도리어 죽이는 겁니다
자신의 남을 7번 용서라는 의를 쌓기 위해서
남을 7번 죽이고 있다 라는 거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없다 라는 티를 팍팍 낸 것임을 말이죠

그러니 금식을 하지 않나
그러니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음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킨
죽은 자의 하나님을 도리어 티를 내면서 드러낸 것이였다 말이죠
바로 그런 종교오락 666을 소통하고 매매하면서
남으로부터 인정 받고자 했던 겁니다.

정녕 선할 행할 능력이 있다면
죽은 자를 살려야 할 꺼 아니겠습니까

전재산을 다 바쳐서 라도 가난한 자를 살려야 할 꺼 아니겠습니까?
도망치죠 근심하고 돌아서 등돌리고 가는 겁니다.
능력이 없어서
속에 선함이 없기에
다윗의 고백처럼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기에

도리어 전재산을 도로 받아야 할 판국인 부자청년이어야 하는 겁니다
본인이 얼마나 가난한 자 였으면 죽은자 였으면
주여 죽어주옵소서 라고 해야 할 판국이였다는 거죠

다윗은 부자도 아닌 왕으로써 비로소
비로소 드디어 구하게 되는데 말이죠

정직한 영
성령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
성령의 소욕도 없는 주제에

고로 마땅한 죽어 마땅한 무덤인 주제에
그 무덤을 깨끗하게 회칠하고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는 겉모양을 아무리 띄어도
울리는 꽹과리를 아무리 울려도
사랑이 없기는 매 마찬가지
죽음 보다 강한 죽은자를 살리는 질투의 사랑 시기의 사랑이 없기는 매 마찬가지인

죽은 자요 무덤임을 대 놓고 보여주는 것이
회칠한 무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겠다라는 것 자체가 불법을 대 놓고 저지르겠다 라는 심뽀인 거죠

베드로의 누구든지 반발하지 않는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 라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울리는 꽹과리에 다들 속아 넘어가도
예수님은 안 넘어가십니다
사탕아 썩 물러가라
어쭈 날 넘어뜨릴려고 날 이겨먹을려고? 어쭈 어쭈 다리걸어 태클을 걸어 어쭈

내가 너를 다리 걸어 넘어뜨리는 질투의 사랑을 보여주마 라고 말이죠
밤새도록 얍복강가에서 예수님과 씨름을 하는

복 안 주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
안 그러면 난 에서 형한테서 죽는다
그래서 힘을 짜르는 환도뼈를 부서뜨려서
그 부서진 틈 사이에서 새로 태어나
즉 십자가에서 너를 새로 태어나게 해서
진짜 제대로 된 복
큰 복

바로 새 이름
다른 이름인 새 이름인 새신랑이 붙여준 새신부라는 새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겠다 라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누가 독을 달라고 해서 독 주는 부모 어디 있으며
전갈을 달라고 해서 전갈을 주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고엘이 어디있느냐

기업을 물려 주겠다

날 주겠다 날

의를 주겠다

너의 속을 선함이 없는 속을 겉으로 드러내어서
발가벗겨서 심판하시고
다시 너의 속에 없는 선함
정직한 영
경건의 능력인
종말의 성령을 주어서
하나님의 의에 십자가에 복종케 하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예수님의 마음을 주시겠다
이것이 속
진짜 있어야 할 속, 은혜, 불쌍히 여겨주심
종말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주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사도바울 또한 종교오락에 빠져 중독이 되어서
어떻게 해서든 이겨 먹겠다 라는
인생이라는 허구를 추구했다 말이죠

다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을 부러워함에 있어서
그 부러함의 위치에 앉은 인생을 자기의 승리를 목적으로 함에 있어서
예수님과 꽝 하고 부딧힘으로써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없는 선함을
예수님이 대신 자신의 의로움으로 채워넣기 이십니다

그 십자가의 피 용서 앞에서
나의 종교오락은 다 무너져야 하고
도리어 진짜로 큰 거
큰 사랑
질투의 사랑으로 인해
울리는 꽹과리 소음 배설물을 치워버리게 되는 겁니다.

나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남을 7번 용서하기로 채워넣는
육의 소욕을 추구하고 (멋들어진 구원, 배불러 터진 구원, 목마르지 않는 구원)

성령의 소욕은
나를 실패자로 만들기 위해 도리어 7에 70번 용서받기로 꽉꽉 채워넣는
모욕적인 구원을 추구하시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의 구원)

그러니 기존의 이름을 갈아엎지 않으면
내가 왜 죄인으로써
환자로써 구원받아야 할
의사를 외치라고

의사를 말하기 위한
의사를 구원하시는 성경말씀을 모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이 왜 의인으로써 구원받고자 하냐 하면
나는 나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었다 라는 육의 자랑을 추구하고픈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육의 자랑을 거부하고
아무 육체도 자랑치 못하도록
십자가로써만 구원하시는
모욕적인 구원을 일괄적으로 펼치십니다
안 그러면 천국에 가서도 데모할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안 믿습니다
사탄의 가시를 찔러서
안 구하고는 못배기도록 끝까지 모욕적인 구원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 모욕이 싫어서
쪽팔린다 라고 가시를 빼 달라고 했지만 세 번 씩이나 말이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약할때에 강한 젖먹이 장수를 구하도록
임마누엘을 구하도록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안 그러면 또 애굽왕을 구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아무리 사도바울이라고 해도 말이죠
주님 인간 안 믿습니다 아무리 사도바울이라고 해도 말이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 하면서도 애굽왕과 손 잡는 것이
이미 아하스 왕을 통해서 그 속내가 겉으로 다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기능입니다.

(사 7:12, 쉬운) 『아하스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표적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사 7:10, 개역)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 7:11, 개역)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사 7:12, 개역)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사 7:13, 개역)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사 7:14, 개역)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5, 개역)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사 7:16, 개역)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즉 이 아이가 우리 속에 있는 악을 못 버리는
선함이 없는 모습을

선으로 채워주기 위해서 나타난 표적이다는 겁니다

마치 너희 속에는 선함이 없단다
거봐 거봐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실은 그 하나님이 자기자신이였던 겁니다
날 괴롭게 하지 말라 라고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그럼 임마누엘은 네 맞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겁니다
나를 나오미라 하고 말라 나를 마라라 하라 전능자 하나님께
즉 질투의 사랑이 나를 괴롭게 했다 라는 겁니다

어떤 괴로움
내 속에 선함이 없다는 것을 까발라는
그 심판 속에서 의를 선함을 입히시는
이 임마누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야는 발가벗고 3년 동안 돌아다니는 겁니다
즉 너희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
너희는 발가벗었다
왜 발가벗은 애굽과 손 잡느냐 라는 그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동일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 라는 겁니다
그 저주를 제대로 보라 라는 겁니다
왜 저주를 받았는지
아 저 모세의 자리에 앉은 겉모양만 회칠한 무덤으로 채운 자들의 영향 때문이며
그 환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8장에서는
갑자기 분명 7장 끝에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사망의 몸 임을 인정하게 되니까
뭘 해도 죄 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니까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예수님이 이 십자가로 다 이루신
진리의 하나님
아멘의 하나님
미쁘신 믿음을 선물로 값없이 주심으로써
이 크나큰 약속을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라는 질투의 사랑을 퍼부어 채워주심으로 인해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고
무시험 합격을
편파 해석을 해 버리시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용해서 라도
이 종교 게임
나를 승리자로 만들고자
(남을 이겨야 한다는 내 인생 내가 지킨다 내 구원 내가 이룬다 라고 짐승 666 함량미달의 밑빠진 장독대 물 붓기를)이 의문의 반복을 멈출수 없음에 있어서
주님은 꽝 하고 박치기를 하심으로써
이 의문의 멈출수 없는 손떼기를 하게 하심으로써

이 십자가의 피 용서로만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이 새 이름을 부여받은 자로써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는
평화 곧 전쟁의 마침이 되는 겁니다. 의문의 마침

(눅 2:14, 개역)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안그러면 또 속사람과 겉사람의 팽팽한 싸움이 멈추질 않습니다

그냥 겉 사람은 날로 날로 후패 실패 졌뿌라 말이죠
속 사람이 날로 날로 이미 벌써 아멘 뭐든지 예만 있지 아니오 함이 없기에
날로 새로운 겁니다.

나를 승리자로 내가 만들게 아니라
예수님만이 승리자 이시다 라는 아들을 위해 태어난 나 이다 라는 것을
주님의 승리인 십자가의 영광 십자가의 승리만을 외치라고
그 승리의 증상물이

이 죄인 중의 괴수인 나도 용서하시는
너끈히 용서하시는 주님의 피 용서라는 것을 외치라고
태어난 것임을 말이죠

내 승리는커녕
죽이시기로 작정이 된
미말의 찌기 쓰레기로 취급 받는 것을
영광인줄 알아라 라고
주도 그렇게 우리를 건지시고자
큰 사랑 
질투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우리 속내를 꽉꽉 십자가의 피 용서로만 가득채워 버리시겠다
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케 만드시겠다 라는 주님의 믿음 덕분에
주님의 기도 덕분에

베드로는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드디어 울리는 꽹과리가 아닌

비로소 제대로 큰 것
제대로 된 좋은 것을 구하는

그 질투의 사랑 덕분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우리의 속내를 선함이 없는 속을
심판해 버리시고
새 이름으로 채우시는
주님의 의로움 곧 십자가로 꽉꽉 우리 속을 채우시고자 

이렇게 꽝 하고 자꾸 머리박기를 박치기 김일 선수처럼 죽도록 하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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