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7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4-36)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29-33)
마태복음 2018 2021. 1. 3. 10:29
18-116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29-33)
〈마태복음 23:34-36, 개역한글, 신약성경 40쪽, 찬송가 421장 나는 갈길 모르니〉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4, 새번역) 『그러므로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마 23:35, 새번역)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마 23:36, 새번역)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일의 책임은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갈 것이다."』
성경말씀은 이 땅을 의인의 피로써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의인들이 흘린 피로써 이 땅은 저주의 대상이며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자들은 무조건 저주의 대상이다는 겁니다
의인들의 피를 흘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주 받은 땅에 사는 인간들은 이런 성경의 규정을 피하기 위해서
의인의 삶을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유통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 또한 의인들이 흘리는 피로써 살다 죽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곧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로써
의인이 되어서 죽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인이 되고자 의를 쌓고 선을 쌓던 자들이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죽여버렸습니다
어떤 예수님
지난 주에
우리가 다시 조상 때로 돌아갔다면 절대로 선지자를 죽이지 않을꺼다 라는 그런 교육을 가르치는 이스라엘 선생 바리새인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규정하신 예수님을 죽여버렸다 라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아무리 그들이 예수님을 좋게 좋게 볼려고 해도 예수님은 자신들을 악마로 규정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참선지자는 의를 쌓을려고 하는 자에게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할려는 자에게 악마라고 규정하는데 있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를 보는 시선이 다르다 라는 겁니다
마치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듯이
오늘날도 교회 사람들이 성경 속으로 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세상사람들이 보듯이 예수님을 본다는 겁니다
아 그럼 성경 공부하면 되겠네요
그런데 그 성경 공부 교육이라는 것이
역시나 마찬가지로 조상 때로 돌아가면 죽이지 않을 것이다 라는 사고방식으로만 가르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교회가 도리어 사단의 회처럼
독사의 자식들을 양성하는 곳이 되어버린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이 다 이렇거든요
세상이 다 이렇다는 겁니다
이것이 쉽고 편한 우상이거든요
세상은 선악으로만 움직이는 겁니다
악은 선을 이길수 없다 라고 촛불집회에서 어린아이까지 앞장세워가면서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완전 다릅니다
그런 선악으로 세상을 규정하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피 로만 세상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 규정을 피하고 거부할려고 해도
피는 오로지 이 십자가의 피로써 인간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엉뚱한 동앗줄로 기준을 삼아본들
피는 손해 보는 것 없습니다
자 그럼 왜 피 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무리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해도
그것은 기준이 못 됩니다 곧 사람의 일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은
심판의 기준이 못 됩니다 곧 구원이 못 됩니다
성경은 오히려 그 선악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예수님의 피를 기준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곧 심판하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즉 인간이 예수님을 죽이는 이유는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피를 흘리는 이유는
죄의 소원인 선악을 기준으로 사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심판하는 기준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자
아들의 소원인
십자가의 피입니다
자기가 왜 심판 받아 마땅한 자 곧 죄인인가를 모르고 죽는 자 보다
저주 받은 자가 없는 겁니다
아 나는 마땅히 심판 받아 마땅한 자 이구나를 이 십자가의 피를 보고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자 이런 자는 독사의 자식들처럼 선악을 가르칠까요?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고자
우리가 조상 때로 돌아갔다면 절대로 선지자를 안 죽일 것이다 라고 가르쳐야 할까요?
아니면 뭘 해도 우리는 선지자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를 가르쳐야 할까요
누구 말 마따나
어떤 목사 말 마따나 죄 죄 죄
제발 죄 죄 죄 그만 캐라 라고
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그만 캐라 라고 할까요
현대인에게는 돈이 안되는 것은 악이 됩니다
아니 죄 죄 죄 카면 교회에 돈이 안 들어오게 되는데
얼마나 악으로 봤으면 그만 카라 라고 했을까요
돈 되는 것이 선이 되거든요
즉 선 악이란
인간 신체 중심이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 몸이니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거죠
역사도 그렇게 선과 악의 싸움이라나 뭐라나
그러니 신 다움을 펼치고자 선으로 악을 이기겠다 라고 나올꺼 아니겠냐 말이죠
앞의 글 에스겔에서 앗수르를 영광스럽게 한 이유는
바로 이런 선악성을
하나님과 같이 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함이다는 거죠
솔로몬의 영광을 취할려고 하지
누가 죽고자 하겠냐 말이죠
누가 저 아벨의 피가 되고
누가 저 사가랴의 피가 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되고자 하겠냐 말이죠
또 몰라 개인적인 구원이라면
개인이 구원이 된다면 뭔들 못하겠냐 라고 순교하듯이
예수님의 죽음처럼 되고자 해도
그것은 임마누엘을 구하는게 아니라
또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겠다 라는 선악을 주장하는
자기가 데우스 되었다 라는 티를 낼려는 거다 말이죠
선악 때문에 신이 되었다
곧 자아가 되었기 때문에
이 자아에 대한 집념은 말릴수가 없습니다
곧 이런 자아 라는 우상을 지키고자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있어서
오히려 자아를 감추는 조상때의 버릇을 그대로 물려받은 겁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다 말이죠
남자는 평생을 자기는 이유 없이 성공해야 한다 라는 것을 감추면서 살아가고
여자는 평생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희숙대리(히스테리)를 감추면서 말이죠
그 부끄러움을 아무리 가릴려고 해도
도리어 가리고자 하는 것이 도리어 더 드러나는 겁니다
그것이 선악이다 라는 거죠
죄의 소원 말이죠
가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대한 실패 판정에 화풀이를 아벨에게 펼쳐버립니다
곧 하나님에 대한 살인입니다
지지난 주 이사야 였던 가요
그 전 주 이였던 가요 말씀을 나누다가 언뜻 스쳐지나가는 것이 뭔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은 그 사건 현장에서 한 발짝도 인간은 벗어나지 못했다 라는 겁니다
애굽왕 천 삼백년(예수님 당시 곧 마귀죠) 만에 다시 소환하고 천년(에스겔 기준)
앗수르 왕을 영광케 만드는 것 조차도
심지어 십자가 사건도 말이죠
인간은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솔로몬의 영광을 원하지
곧 선악만이 세상에 통용이 되지
누가 십자가 라는 피 흘리심을 원하겠냐 말이죠
아무도 임마누엘 곧 처녀가 낳은 아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즉 이 말은 저는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그저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은
십일조 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
절대로 조상때로 돌아가면 선지자를 죽이지 않겠다 라는 것만 통용이 되는 겁니다
그게 말이 되지
말도 안되는 저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무슨 수로 구하겠냐 말이죠
아무도 기도 하지 않습니다 구하지 않아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아요
다들 자기 의를 구할 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주소서 라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아요
도리어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거부감을 교회에서 통용시키는 겁니다
아무리 성화 성화 라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수준높은 성화론을 주장하는 교회에서도
십자가의 피 흘리심은 거리끼는 걸림돌 꺼리 밖에 안되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딴데 가서 십자가 이야기 하라 라는 겁니다
의인들이 있는 자기 교회에서는 고만 캐라 라고 말이죠
자기들이 쌓아 올린 이 의로움을 너 같은 놈 때문에 망칠수가 없다 라고 말이죠
바로 이런 자기 것 곧 의로움 선함에 대한 집착 때문에
정작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를 무시하게 되는 겁니다
곧 상처 입은 주님의 얼굴입니다
다들 고개를 돌려버려서
싫어버린 바 된 잃어버림입니다
곧 7에 70번 용서입니다
왜 인간은 7에 70번 용서가 싫은 것일까요?
없는 자아를 자기가 그 자아를 사수하고 싶은데
7에 70번 용서받아야 할 정도로 나쁜 자아는 싫다 라는 겁니다
멋들어진 솔로몬의 영광과 같은 자아를 지키고 싶은데
바로 그렇게 자기 것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 때문에
정작 예수님은 잃어버림의 모습으로 반대로 오셨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조상인 첫아담의 속성대로 살아있다 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인간은 이미 잃어버린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감추고자 아무리 발가벗은 몸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려도
수치를 가릴수가 없습니다
즉 자기 구원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겠다
자기 수치를 자기 스스로 해결하겠다 라고
벗은 몸을 가리우는 가면을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죽은 모습을 감추고자
시체를 감추고자
회칠한 무덤
무덤을 아름답게 말이죠
그래놓고서는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은 선지자를 안 죽였을 것이다 라고
또 가면을 쓰겠다 라고
가면 교육을 가르치는 겁니다
(마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 정도로 가면을
(마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아름답게 해야
그 안에 시체와 더러움을 가릴수가 있다고 말이죠
그런데 선지자가 왜 피를 흘렸는고 하니
바로 그 가면을 벗겨주니까
무화과 나뭇잎을 벗겨버리니까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를 자꾸 자꾸 찢어버리시는 겁니다
가면을
자아를
선악을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겠다 라는 이 사람의 일을 찢으시고
다시 가죽옷으로 가려주시고자
그 가죽옷이 바로 피를 흘림으로써 수치가 제대로 가려지거든요
그러니 선지자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도록 했는데
안 그러겠다 라고 하니
끝까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겁니다
삼일의 간극 그 사이에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처음사랑인 아무조건 없이 용서하신 피흘리심이 있습니다
그 처음사랑을 찾으시고자
누가복음 15장에 세가지 잃어버림이 나옵니다
마치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증거함으로써 종말의 단체인 이스라엘이 뭔가를 말하고자
종말의 3종 세트 비유를 증거하듯이
(마태복음 25장 종말의 세가지 비유,
곧 열 처녀 비유 즉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비유 와
소위 달란트 비유 즉 악한 종과 충성된 종 비유
그리고 세 번째 비유인 양과 염소 비유)
누가복음은 잃어버림의 3종 비유를 증거하십니다(종말과 잃어버림 곧 성령의 소욕인 하나님의 일이란 상대적인 사람의 일과 대립해서 나오는 겁니다 즉 마태복음의 종말은 선악이라는 사람의 일에 반대 되는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식이 종말이고 누가복음의 잃어버림은 유대인의 처음자리인 첫사랑의 자리인
삼일의 간극 곧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주시는 그 모순된 앞뒤 간극의 원인 없는 결과를 잃어버림이라는 성령의 소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렸으나 다시 되찾은 원인 없는 결과
마치 이사야 65장에 나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던 민족에게 부르신바 되고 찾지 않은 자들에게 찾으신바 되도록 하겠다 처럼 말이죠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증거하는 복음이다 보니 처음자리를 이 잃어버린 자리를 이방인이 앉고 정작 유대인은 종말로써 이스라엘 됨을 증거하도록 말이죠)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삼일의 간극 이다는 거죠
그 사이에 하나님의 긍휼인 피흘리심 대신 매 맞으심 긍휼이 있다 라는 겁니다
이 긍휼에 맞는
의사에 맞는 환자를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겁니다
그 3종 비유가 (누가복음 15장)
안 잃어버린 99마리 양과 한 마리 잃어버린 양 비유
(눅 15:4, 새번역)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
(눅 15:8, 새번역)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처럼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함』
세 번째가 바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탕자 비유
(눅 15:22, 새번역)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눅 15:23, 새번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새번역)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즉 자아 곧 선악을 아는 자아를 즉 자기 것을 잃어버리지 않겠다 라는 맏아들과 상대적으로 대조되는 탕자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없는 탈탈탈 털려버린 상황에서
긍휼을 바라는 겁니다
누가 기업 무를 자가 되시는지
그 기업 무를 자를 말하기 위해서 잃어버림을 곧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찢겨짐을 말이죠
다시 싸매어 주시는 분이 누군가를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마치 아버지가 먼저 태어나고 아들이 태어나는게 아니라
아들을 말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누구를 말하고자
아들
곧 처녀가 낳은 아들을 말하고자 말이죠
그 아들이 바로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잃어버림을 경험케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 곧 이름
기존의 이름을 갈아엎고 새 이름으로 구원 받는 새 이름을 주시는 자의 운명으로 교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 라고 주께서 내 주께 라고 표현한 겁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자기를 잃어버림을 당해야 하듯이
요나는 주의 이름을 말하고자
생명 주시는 살려주시는 마지막 아담을 말하고자 주의 이름을 말하고자
자신의 이름의 운명인 기존의 운명을 종말을 고해야 하는 겁니다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가면을 벗기고
인간이 수치를 가리고자 스스로 만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것을 벗겨버리시고
잃어버린 처음 자리 처음사랑으로 피 흘려 가죽 옷으로 수치를 가려줘야
심판에서도 불 타지 않는 옷으로 입혀야
심판 속에서도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시는 겁니다
부자는 맏아들처럼
마치 애굽의 10가지 신들이 장자 라는 자아의 부활을 수호하는 방패막이
도리어 자기를 보호하고자 자기 것을 스스로 가리고자 했던 그 보디가드 애굽의 10가지 신이
도리어 10가지 재앙으로써 장자를 치는 겁니다
육체로 낳은 자녀를 친다 말이죠
마치 앗수르를 부러워 하다가 그 부러워 하는 앗수르로부터 멸망당하듯이
애굽의 10가지 재앙이 장자의 죽음으로 몰고가는 겁니다
그 죽음 속에서 문설주에 바른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만 패쓰 넘어가지
안그러면 안 넘어가는 겁니다
수치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가려주지 않고 말이죠
그러니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말하고자 이스라엘은 태어난 겁니다
물 속에서 홍해 속에서 사막 속에서 다시 살아난 겁니다
이 세례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연합이 된 한 몸이 된 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 속에 있는 자만이 상처 입은 주의 얼굴을 마주 보는 자입니다
환자는 의사를 말하기 위해서 있듯이
죄인은 구원자를 말하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이 없는 자는 구원자를 말하고자 태어난 자가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기 것으로 찾고자
자기 자신을 끝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회개와 반성으로 자기 자신을 유지할려고 하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것은 늘 반성과 회개를 할 만반의 준비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자기가 구원하는데 손 놓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을 수 없는 질문인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는 부자청년의 질문은
죽은 자가 아니라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를 주장하듯이 말이죠
주님의 숙제 곧 되 찾으시는 분
의사의 숙제에 기대를 거는게 아니라 여전히 환자인 자신에게서 자신의 병을 고치겠다 라는 식입니다)
바로 그런 남정네들 속에서 살았던 나오미가
전능자 하나님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
자기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잃어버림을 보고서
구원자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라고 말도 안되는 며느리가 바로 룻입니다
룻기는 이렇게 따로 꼬불쳐 놓은 남자 없이 태어난 처녀가 낳은 아들의 계보를 형성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은 시작하는 겁니다
다섯 여자 에게서 말이죠
잃어버림 속에서 말이죠
다시 되찾는 심판하셨다가 잃어버리게 하셨다가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간극에서 태어난 자가 바로
주님의 자녀이거든요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구원은
다른 태어나는 길은 없다 라는 겁니다
새 이름이 없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은 조상때에 있었더면 안 죽였을 것이다 라고
남들은 다 악행을 저질러도
나 만큼은 절대로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다
나 만큼은 절대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저런 행동을 하지 않겠노라 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고방식으로 인헤
선악으로 인해
예수님은 잃어버림의 얼굴로써 저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는
하나님의 의가 피로 죽음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오늘 마태복음이 바로 다음글 이사야 글에 딱 맞습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것이 복 된 자녀 라고
우는 자가 복 되도다 라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이 잃어버림 곧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주시는 기업 무를자를 말하기 위해서
실로암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지킬려고 바리새인은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
신학의 죄론 장난질을 칩니다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박사 논문을 쓸려고 해요 글쎄
이런 선악의 장난질에
주의 이름은 우리를 자기자신을 잃어버리게 하시고자 찢으셨다가
다시 예수 안에서 새로 창조한 새 이름 새 이스라엘 새 노래꾼으로
예수 안에서 창조하시는 겁니다 다시 되찾으시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을 거쳐서 보니
선악이 만들어내는 자아와
은혜가 만들어낸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나 곧 새 창조물 즉 그리스도의 몸과의 충돌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충돌입니다
바리새인은 선악이 만들어낸 자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우상을 거쳐서
요나의 표적으로 낳은 창조주가 누구인줄 아느냐 라는 주의 이름으로 낳은 자와의 충돌을 미리 보여주면서
옹고집전 ? 자아를 잃어버린 자 (자기를 도둑맞은 사람)
도플갱어 쌍둥이 인자
인자로 오신 분이다 라는 겁니다
선지자 라는 인자는 바로
자기 자신을 안 잃어버릴려고 하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쌍둥이로 도플갱어로 오는 겁니다
곧 인자입니다
종말의 인간
나의 끝을 당기는 인간
곧 심판의 주를 당기는 인간 말이죠
결국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가면을 모두다 발가벗겨지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없는 허구를 안개를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 자아를 안 잃어버릴려고 아등바등하는 자아를 모두 십자가에 못 박고자
허구를 허상을 못 박고자 말이죠
되찾는다고 하니 나를 되찾는게 아닙니다
다시 나를 살려내 본들 달라지는 것 하나 없어요
다 늙어 빠져 죽어가는 자아를 살려내서 뭐하게요
또 남을 7번 용서하는 자아일 뿐이다는 겁니다
겨우 7번 용서하는 자아를 살려내본들 볼품 없어요
적어도 헤헤헤헤 우리 연변에서는 7에 70번 용서하는 더 큰 것을 구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성전에 바친 금으로 구하는 겨우 쪼매한 것 구하는게 아니라
더 큰 성전으로 구하는 일만달란트 말이죠
자기를 잃어버림 당해봐야 일만달란트가 크게 보이지
안그러면 아무리 작아도 자기 것만 크게 볼 뿐이다 말이죠
(마 23:16, 개역)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17, 개역)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 23:18, 개역)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19, 개역)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 23:20, 개역)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마 23:21, 개역)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마 23:22, 개역)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자기 것이 따로 있고 자기 소유 말이죠
그 자기 소유를 확대 확장 시키는 결국 자기의 확장인 거죠
우상의 확대
그런데 성전은 바로 그런 죄 마저도 거룩하게 만들 정도로 모든 허물을 다 덮는다는 겁니다
왜 더 큰 것을 구하지 않냐 말이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더 큰 것을 구하지 않냐 말이죠
그저 자기 자신의 것을 안 잃어버릴려고
작은 것만 구하더라 라는 겁니다
개인 구원이 없는데
없는 것을 왜 구하고
정작 큰 것은 안 구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곧 7에 70번은 왜 안 구하고
개인구원 사적구원이라는 없는 구원에 조건 갖추겠다 라고
원인 없는 결과인데
기여이 원인 있는 결과 만들어서 겨우 딸랑 남 7번 용서해서 구원조건 갖출려는 심뽀
선을 취하고 남 7번 취하고 악은 버리고 곧 선지자는 안 죽이겠다 라고 하는
이 멋들어진 구원이 바로 뱀의 자식들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교육이 다 이래요
자기 의를 쌓고자 하나님의 의에 복종 안하겠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란 찢으셨다가 다시 싸매어 주시는 간극 벌리기
즉 모순 만들기
원인 없는 결과 만들기
불륜의 사랑 곧 스캔들인 질투의 사랑이거든요
반칙 편파사랑 불법적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무슨 수로 전남편 율법과 이혼하겠냐 말이죠
제가 수 많은 교회의 장로들과 대화를 해 보면 꼰대 중에서도 이런 꼰대들이 없어요
완악한 수건을 안 벗고자 대 놓고서 사단의 회 임을 자인하듯이 행동해요 글쎄
목사들은 바로 그런 장로들을 원해요
사실은 목사가 법을 쥐게 되면 금방 티가 나게 되는데
고맙게도 장로가 법을 쥐어주니까
법 강조를 목사가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법도 은혜도 둘 다 양다리를 목사는 걸칠수가 있어요
그러나 장로는 법 말고는 말할게 없어요
그러니 심심하면 율법 폐기론자로 몰아가요
율법 자체가 잘못된게 아니라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 함으로써 권력을 쥘려는
모세의 자리에 앉을려는
솔로몬의 영광을 취할려는 자들이 바로 독사의 자식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장로들은 바리새인처럼 악을 제거하는데 열심입니다
자기가 악마인데 말이죠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게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말이죠
그 말을 장로들도 해요
그러니까 율법 폐기론자로 막 몰아요
이단으로 막 몰아요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심으로써 의문의 증서를 찢으셨다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의 피 흘리심인 7에 70번 용서의 완성 다 이루셨다입니다
자 이것을 장로들이 왜 싫어하는 고 하니
바리새인도 왜 싫어하는고 하니
그 법 곧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 했는데
완성해 버려서 의문의 증서를 찢어버렸다 말이죠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8, 개역)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 2:9, 개역)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10, 개역)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 2:11, 개역)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개역)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3, 개역)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개역)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즉 율법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하게 할려는 것을 막는 거다 말이죠
왜냐하면 출발 자체가 인간 쪽에서 해야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럼 실패해야 하는데
다들 성공했다 라고 하니 그 속임수에 놀아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율법 외에 한 의로 곧 인간 쪽의 출발인 율법 지키기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넘어오신 하나님의 의를 입히심 곧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주시는 앞 뒤 모순이 되는
죽었는데 산 자요
망한자 같은데 성공한 자로 만드신 일방적인 편파사랑 불법적인 사랑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정의 부정
곧 선을 쥐고 있는 마귀에게 반드시 불법적인 부정성으로만 보여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사단의 깊은 것을 거쳐서 오시는 하나님의 의 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찢으실 때 곧 오늘 본문을 통해서 누가복음 15장의 세가지 잃어버림을 펼치실때에
지금 에스겔을 살펴 보고 있는데 이스라엘을 자꾸 실패케 만드시잖아요
반대로 앗수르는 영광케 만들어서 몽둥이로 사용하시고
이스라엘은 자꾸 들에 핀 백합화로 만들어서 저 솔로몬의 영광 보다 더 나은 7에 70번의 영광을 피를 의를 입히신다 말이죠
(롬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자 그렇게 찢으셨을 때 실패하고 쫄딱 망했을때에
누가 달려들겠습니까?
솔로몬의 판결이 옳았습니다 라고 박수치면서 한 쪽 기생이 저도 가지지 말고 이도 가지지 않게끔 아기를 갈라라 라고 하잖아요(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실패하니까 누가 베드로를 붙잡아서 고소 고발 합니까, 누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제사장 옷 에봇을 다 불에태워 새까맣게 그을려 타 버렸을때에
누가 여호수아를 고소 고발 합니까? 숨어 있던 마귀 아니냐 말이죠)
이 아기로 인해서 즉 죽어야 하는 자 이죠 이 아기를 통해서
도저히 풀수 없는 재판을
아무도 풀수 없는 사건을 풀게 되는 겁니다
이 죽음 속에 놓여진 아기를 구하라 말이죠
임마누엘을 구하라 말이죠
인간은 자기자신을 이 죽음 속에 놓여진 아기를 통해서
아 잃어버렸음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자기자신을 지키고 붙잡고 사수하는 애굽의 장자의 모습이
이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 앞에서는
다 헛된 허구 안개 허상 붙잡기 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왜 이 죽음 속에 놓여진 아기를 통해서 나 라는 자아를 잃어버림 당해야 함을 비로소 보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육체는 이미 못 박힌 겁니다
없어요
자아란 없어요
나를 붙잡고자
자기자신을 지킬려고 가면을 쓰고 산 그 우상의 버릇 때문에
가면을 벗기고
예수님의 얼굴과 얼굴로 마주보도록 하시고자
십자가의 죽음으로 오신 겁니다
이 의가 아니면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모든 허물을 덮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거부하는 겁니다
또 여전히 되도않는 자기가 율법을 지켜서 자기 의를 쌓아서 수치를 가려보겠노라 라고 나오는 거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자 숨기고자 하는 것은
자기 죄를 자기 스스로 가리고자 하는 것은
마치 마귀가 늘 속이고 숨기고 가면을 써서 감추듯이 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 라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정작 등장 인물 중에 강도는 없어요 숨어버렸어요
다윗이 손님 대접 할려고 가난한 자의 딸 같이 여기는 딱 한 마리 어린양을 부자가 빼앗아서 손님 대접했다 말이죠 그 손님도 정작 숨어버린 상황입니다)
그럼 마귀의 가면으로써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아 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한 뒤에 마귀는 다시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 잠시 떠난 마귀가 인간에게 붙어서 등장하는데
그 마귀의 가면이 바로 바리새인으로써 나타났을 뿐이지
이 바리새인은 모든 인간의 대표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의 가면은 인간 자아 이다는 거죠
없는 자아를 있다고 여기니까
그 자아를 사수할려고 마귀의 가면 노릇이나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정체는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사단의 깊은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모든 육체는 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말이죠
아무리 좋은 가면
솔로몬의 영광 가면
모세의 자리 가면을 써도
종말 앞에서는 다 벗겨지는 겁니다
미리 벗겨진 참선지자들을 가면히 둘 인간들이 없어요 다 달려들어서
이 잃어버림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찢으셨다고 자신들도 찢겠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자 라고 공격을 해야
상대적으로 자신은 복 받은 자 라는 가면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참선지자는 발가벗고
우리의 가면을 벗기면서 아무리 좋은 가면을 써도
발가벗겨졌다 라고 하는데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으니
도리어 우리가 발가벗은게 아니라
왜? 나 자신을 지켜야 하니까
너 이사야가 발가벗었꾸나 라고
마치 자아에게
마귀의 가면에게 죽고자 미친 듯이 달려드는 모습에
아무리 살려줄려고 애를 써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줄일 수밖에 없듯이
참선지자도 죽일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가면을 유지할려면 말이죠
이것이 세상에 통용되기에
가면 벗으면 매매를 할수 없어서
죽게 되거든요
그 죽음이 두려워서 종노릇 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죠
그런데 고맙게도
우리가 종노룻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포로 되었고
갇혔고
억눌렸는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자유케 하심은
율법을 마귀의 가면인 인간 자아가 지켜서가 아니라
주님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다 말이죠
그러니 이 잃어버림을 찬양 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하나님의 의
간극 벌리기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심 말이죠
이것을 바로 다음 글 이사야서에서 복된 자와 그 의 자손 이라고
우는 자가 복 되도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니 누가 봐도 실패인데
잃어버렸는데
그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의사 때문에
나음을 되찾음을 받게 됨으로써
복 되신 예수님 안에 속하게 되더다 말이죠
내 자체의 복됨을 따로 각자 구성하는 복은 없구요
예수님이라는 복음 기쁜소식에 접붙여짐으로써만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그 사랑에 저는 접붙임 당했기에
저가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거하는
한 몸으로써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비로소 믿음의 표현을 합니다
믿음의 언어는
세상에서는 안 통하는 방언과 같아요
왜냐하면 반대를 위한 반대의 언어이거든요
그러니 종교심으로 아무리 흉내내어도
그 자체가 이미 한 몸은커녕 뚝 떨어져 거리두기처럼 갈라지더라 말이죠
마치 새 노래처럼 누가 알려주는 자도 없고
배울수도 없는 노래처럼
배울수가 없는 것이 믿음 이다는 겁니다
누가 7에 70번 용서를 받고자 구하는 자 있겠냐 말이죠
임마누엘을 구하는 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을 구하는 자는 없어요
주님이 직접 사랑하시는 자에게만 구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남들은 안 구해도 나는 구하겠습니다 라고 나 라는 것을 따로 설정한다는 자체가
이미 잃어버림을 즉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겁니다
누가 이 잃어버림을 흉내냅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십자가를 속이냐 말이죠
십자가 자체가 잃어버림 인데
이 십자가에 접붙이시고자 이 잃어버림에 접붙이시고자
이 하나님의 의에 접붙이시고자
자기 의
마귀의 가면을
사단의 깊은 것을
자기자신의 한계를 거쳐오라는 겁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을
정직한 영 곧 십자가의 영인 성령을 달라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성령을 주시지 않겠냐 말이죠
종말을 주시지 않겠냐 말이죠
잃어버림을 주시지 않겠냐 말이죠
자아를 안 잃어버릴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완전 정반대를 구하라 라고
솔로몬의 영광이 아닌
들에 핀 백합화를 구하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
이스라엘의 처음 자리
첫사랑의 자리에서
사랑을
내 사랑 낭군을
기업 무를 자를
나를 책임져줄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살려주는 마지막 아담을 구하는 겁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다 책임을 뒤 짚어 씌우고
처음 아담은 자기 혼자 살려고 저 여자 때문에 따먹게 되었다 라고
책임전가만 할 뿐이지
현장에서 간음 하다 잡힌 여인에게
남자들은 남자를 때려죽어도 잡을 생각은 안하고
여자만 잡거든요 이게 율법을 쥔 뱀의 자식들입니다
알고보니 공범이였다는 거죠
범인과 형사가
범죄자와 재판관이 다 짜고치는 고스톱이 바로 선악의 세상입니다
정의 정의를 외치면서 정의가 없는
평강 평강을 외치면서 평강이 없는
책임 지는 마지막 아담이 없는
그러니 이 세상의 내막은 마치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모두다 가면을 쓰고 있었음을
처음 아담이 그렇게 하다 보니 우리도 다 따라하는
조상과 다를바 없다 말이죠
이미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달리 다른 생각을 한 적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말이죠
그것을 십자가의 피가 깨뜨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자기 의 쌓기에 미쳐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의로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심으로써
이 십자가의 피로 인해 가면을 벗겨주시는 겁니다
오호라 나여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화로다 화로다 나여
이 부정한 백성 이스라엘 속에 거하면서
거룩하다고 착각했었네
이미 벌써 망했었었었어야 했는데
가면을 벗기시는 겁니다
발가벗겨지는 겁니다
잃어버림을 당하는 겁니다
이제 나 자신을 챙길수 있는 것도 다 탈탈탈 털리게 되었습니다
바닥을 쳤다 말이죠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어요
인간은 그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나를 더더욱 나 답게 만들어주는 기적을 달라고 합니다
모세의 자리
솔로몬의 영광의 자리
그런데 이것이 독을 달라고 하는 것인줄 모르는 거죠
마귀의 깊은 것을 그래서 거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거 다 마귀가 구하는 것들이다 라고
이방인이 구하는 것들이다 라고 말이죠
마치 가인은 성전에 바친 금으로 제사를 드리고자 했고
아벨은 더 나은 성전으로 구했다 말이죠
이 더 나은 더 큰 것으로 구하는 것에는 피 흘림을 보여주고 있다 말이죠
(히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흔히 중고등부와 청년들에게 무지 무지 강조하는 성경지식과 성경공부가 뭔고 하니
아벨은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라고
더 나은 것을 더 좋은 것으로 해석해서
좋은 것으로 제사 곧 예배 드려야 한다 라고 청년부 대학부를 세뇌 시키는데
오히려 그것이 가인의 제사였다 말이져
다들 남을 7번 용서해야 한다는 더 나은 제사로 가르치지
7에 70번 용서 받기 라는 피 흘리심을 더 나은 제사로 안 가르치거든요
그러니 조상의 양을 채우고자 하는 독사의 자식들의 교육과 똑같더라 라는 겁니다
7에 70번 용서를 가르치는 교회는 단 한 군데도 없구요
가르쳤다 가는 교회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큰일날 소리 이다는 거죠
교회 무너진다 라고 망한다 라고
또 사가랴의 죽음은
(대하 24:15, 개역)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일백삼십 세라』
(대하 24:16, 개역) 『무리가 다윗 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대하 24:17, 개역)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대하 24:18, 개역)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대하 24:19, 개역)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대하 24:20, 개역)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대하 24:21, 개역)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대하 24:22, 개역)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역대하 24장에 나옵니다 스가랴의 죽음입니다
요아스 왕이 가인처럼 자기 따나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는 선악의 사고방식 때문에
(대하 24:18, 개역)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여호와의 전으로 맹세하는 것을 버리고
우상을 쫓아서 섬겼다 말이죠
우상을 왜 쫓을까요
바벨론 여자들이 우상을 섬긴 이유가 나오지요
이사야 47 팔
(사 47:8, 개역)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쌓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잃어버리지 않을려고
고아 과부 나그네 안 되고자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며느리 룻은 고아 과부 나그네로
잃어버린자로 만드시는 전능자 하나님이 어머니를 괴롭히는
고아 과부 나그네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라고
이 잃어버림에
더 나은 제사에
7에 70번 용서에
그 피 흘리심에 접붙임 당했다 말이죠
요시아 왕이
왕이란 최고의 권력의 자리인 힘의 정점 이다 말이죠
그러니 국가와 백성 토지 특히 왕 제도에서는 백성들의 딸이 누구 소유가 되어버리느냐
왕의 소유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왕 됨을 요시아도 예외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껏 누립니다
즉 솔로몬의 영광이다 말이죠
모세의 자리를 누리더라 말이죠 높은 자리
즉 자기의 소유물로 말이죠
자아라는 것이 없는데 자아의 소유물이 되었다 라는 것은
마귀의 소유물이 된 거죠
그러니 더 크게 더 넓게 더 높게 할려고 시온산에 산당을 더더욱 비밀스럽게 높이 크게 넓게 짖듯이 부자가 소유의 넉넉함으로 내 영혼아 편히 쉬자 라고 할때에
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 라고 오늘밤 니 영혼 취하면 그 소유가 누구 것이 되겠니 라고
성령의 소욕을 주장하시더라 말이죠
육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을 거스린다 말이죠
자 이래 말하니까 또 성령을 육의 소욕처럼 자꾸 소유할려고 해요
이런 속임수로 사기치는 집단이 순땡음 집단 조땡기 이단 아닙니까
성령의 소욕은 그 반대 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잃어버림 곧 사가랴 즉 스가랴의 죽음 곧 피흘림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마치 스데반 집사의 죽는 상황과 똑같아요
자 이런데도 우리는 조상때에 있었더면 요시아 때에 있었다면은
사가랴의 피를 흘리지 않았을꺼다 라고
여전히 나는 그런 나쁜짖 하지 않는 자가 될 거야 라는
자기자신을 소유할려고 하더라 말이죠
여전히 잃어버림을 거부해요
그 당시 요시아 왕을 거부할 재간이 있을까요?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잃어버린자 되지 않고자 우상을 섬기는 그 분위기를 거부하겠냐 말이죠
바로 죽음인데 곧 죽음인데
사가랴처럼 말이죠
여전히 나는 선지자를 안 죽였을꺼다 라는 그런 자아를 소유하겠다 라는 발상 자체가
선악 자체가
바로 잃어버림 이라는 성령의 소욕을 거부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인데 인간이 왕 자리에 앉다 보면
자기가 이스라엘을 자꾸 소유하여서 이끌어 갈려고 해요
그래서 성전에 바친 금으로 맹세하듯이 우상을 섬겨요
고아 과부 나그네 안되기 위해서
잃어버린 자 되지 않기 위해서
정작 성령의 소욕은 그 반대인데
종말을 확 끌어와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다 이루었다를 끌고와요
잃어버림을 끌고와요
하나님의 의 말이죠
이사야 이오 팔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의 곧 질투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의는
인간의 율법 지키기는 사망을 멸할줄 몰라요
또 눈물을 흘리지 않고자 자기 의를 쌓아요 자기자신을 지키고 자기자신을 소유해요
눈물 흘리는 자기자신은 싫어해요
자기자신을 잃어버릴까봐 말이죠
이사야 이오팔이 바로 우상과 차이나는 하나님의 의 곧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수치를
눈물을
가려주시는
씻겨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는 자가 복 되도다
잃어버린 자가 복 되도다 라는 겁니다
이 성령의 소욕을 밀어 붙이시는 겁니다
내가 나를 소유하는게 아니라 나는 이끌고 가는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소유하시는데 있어서
더 나은
남 7번 용서 보다 더 나은
더 큰 것을 구하는 7에 70번의 용서로써
왜?
의사를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자 이렇게 주님은 세상을 피 흘리심으로 창조했습니다
피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말이죠
7에 70번의 피 흘리심 이라는 피 중심으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겁니다
여기에 마귀는 발악 합니다
인간을 자기의 소유물이라고
요시아 왕처럼
또한 오늘날 왕이라고 호모 데우스 라고 주장하는
신이 된 인간처럼
나는 나의 소유물 이라고
여기에 주님은 피 흘려 값주고 산 것이라고
십자가의 소유성을 따지시는 겁니다
반드시 성도를 피로써 이끌고 가겠다고 소유권을 주장하시면서
매일 매일 7에 70번의 피흘리심으로만 이끌고 나가시는 겁니다
이 질투의 사랑이 더 큰 것인지
남을 7번 용서했다 라는 자기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손 놓지 않았다 포기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남을 7번 용서 할수 있다 가 더 큰 것인지
더 나은 제사를 누가 하는지를 대 놓고서 충돌로 박치기
김일 선수의 박치기로
구원의 뿔이 우리와 충돌 하시는 겁니다
시온에서 나온 율법으로 우리를 찢으셨고
다시 예루살렘에서 나온 말씀으로 우리는 싸매어 주시면서 말이죠
이 하나님의 의로 뒤짚어 씌우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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