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여 (마 23,37-39)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4-36)
마태복음 2018 2021. 1. 16. 09:43
18-117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4-36)

〈마태복음 23:37-39, 개역한글, 신약성경 40쪽, 찬송가 378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 23:37, 새번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마 23:38, 새번역) 『보아라, 너희 집은 버림을 받아서, 황폐하게 될 것이다.』
(마 23:39,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시 118:26』

(마 23:37, 공동)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마 23:38, 공동)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 / ㉠예레 22:5.』
(마 23:39, 공동)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 입으로 찬양할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 ㉠시편 118:26.』

(렘 22:5, 개역)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2:5, 새번역) 『그러나 내가 스스로 맹세하지만, 너희가 이 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바로 이 왕궁은 폐허가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렘 22: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서 이를 선언하여』
(렘 22:2, 개역)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렘 22:3,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박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렘 22:4, 개역)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마는』
(렘 22:5, 개역)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마 23:39, 공동)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 입으로 찬양할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 ㉠시편 118:26.』
(눅 13:35, 공동)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 ㉠예레 22:5. ㉡시편 118:26.』

(시 118:26, 개역)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6, 새번역)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
(마 21:9, 새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 ㉣시 118:26 ㉤'구하여 주십시오!'를 뜻하는 히브리어였으나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눅 19:38, 새번역)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 ㉡시 118:26』

(시 118:8, 개역)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시 118:9, 개역)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시 118:10, 개역)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 118:11, 개역)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 118:12, 개역)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 118:13, 개역)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시 118:14, 개역)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시 118:15, 개역)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시 118:16, 개역)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시 118:17, 개역)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시 118:18, 개역)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시 118:19, 개역)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 118:20, 개역)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시 118:21, 개역)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 118:22, 개역)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시 118:23, 개역)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 118:24, 개역)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25, 개역)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시 118:26, 개역)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7, 개역)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시 118:28, 개역)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시 118:29,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마 21:9, 새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 ㉣시 118:26 ㉤'구하여 주십시오!'를 뜻하는 히브리어였으나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마 21:42,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 ㉬시 118:22;23』

(막 11:9, 새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 ㉠시 118:25; 26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여기에는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막 12:10, 새번역)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 ㉠시 118:22; 23 ㉡또는 '모퉁이 돌'』

(눅 20:17,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시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고 기록된 말은 무슨 뜻이냐? / ㉢시 118:22 ㉣또는 '모퉁이 돌'』
(요 12:13, 새번역)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 ㉢'구원하여 주십시오!' 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찬양에서 쓰임 ㉣시 118:25; 26』
(행 4:11, 새번역)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 ㉢시 118:22』
(히 13:6, 새번역)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 ㉢시 118:6; 7』
(벧전 2:7, 새번역)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 ㉡시 118:22(칠십인역)』


모든 인간은 성전 짖기에 평생 미쳐서 집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꼭 성전이라는 종교시설이 아니라
국가요
사회요
가족이요
교회요
절간이요
성당이요
동아리요
심지어 만사가 다 귀찮은 귀차느니즘 조차도 
자신의 신체를 지키고자 하는데 있어서 
평생 집착하는 삶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인간은 성전 짖기에 집착할까요?
자신의 신체성을 투사시킨 하나님과 동일시 된 것이거든요
신도 결국 자기자신을 투사 시켰듯이
모든 공간 모든 시간 속에 인간은 자기자신을 심어넣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좀더 더 좋은 더 선한 더 높은 것들을 심어넣기를 바라지
누가 더럽고 악한 것으로 그 공간과 시간을 채울려고 하겠습니까
자신의 신체와 같은 동일시 된 것인데 말이죠

그러니 이런 자아를 투사 시킨 성전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누구를 죽인다?

주를 삼키는 겁니다

아니 왜 주의 성전을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을 더 높이게 되지
왜 주님을 삼키게 될까요?

주를 사랑한다 라는 조건을 갖추면 갖출수록
그 원인에 맞는 결과가 아닌
그 원인에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날까요?

아 그럼 반대로 바꾸어 보죠
주님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해 봅시다
그럼 우리는 살인하지 않게 되는 나를 만들 수 있겠군요
어라 그래도 안되는 군요 왜 이렇죠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절대로 선지자를 안 줄일줄 알았는데
어라 또 죽이네요
또 죽이네요
또 또 또 죽이네요
도대체 왜 이렇죠

인간은 모든 상황을 자아에 맞출려고 합니다
그 자아라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성품만 있으면 된다고 본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을 구성한 겁니다

자 이렇게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는 인간의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을 삼키더라 말이죠
결과는 안 바뀌어요
백날 원인을 이래도 해 보고 저래도 해 봐도 안 됩니다
타임머신 백날 타고 가 봐도 안되요

즉 원인을 바꾸면 결과도 달라진다고 본 거죠
그 원인이 바로 나 라는 원인
그 나를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식으로 나를 구성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안 바뀝니다
또 선지자 죽이고
또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다 말이죠

이것은 앞의 글 에스겔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자꾸 인간의 조건을 만들겠다 라는 식이고 거기에 주님이 응해 달라는 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창조주 인줄 알려주겠다 라고 하시는 말씀과 반대 되는 겁니다
어무이 말 마따나 이스라엘이 창조주를 모를턱이 있나
네 몰라요
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백날 천날 다녀도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듯이 말이죠
놀랍게도 목사는 그럼 좀 알겠지 라고 싶었는데
목사도 아는 놈 단 한놈도 없더라 말이죠
제가 만난 소위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도 박사 학위가 있는 놈도 그래요
그럼 정식 직업군이 아닌
비정규직인 장로들은 그럼 아는가
아예 이 놈들은
목사를 자기 수하에 두느냐 안 두느냐 에만 목숨 걸고 있지

예수님도 하나님도 아예 몰라요

그저 정치 밖에 몰라요
그러니 목사는 사람을 좋게 하는 짓만 할 수 밖에 없어요
돈 줄이 장로에게 달렸으니 말이죠
사람도 아닌 장로에게만 좋게 하는

그러니 무식한 장로들과 자꾸 싸울 수 밖에 없어요
이런 놈들을 방패막이로 삼는 목사는
장로 선에서 끝나길 바리지
목사까지 기어 올라오기를 바라지 않더라 말이죠

장로 선에서 처리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 여자들이 다 목사 편이기 때문에
교회 여자들이 저를 안 싫어하는 여자들이 없어요

마치 애굽의 장자를 보호하기 위한 10개의 우상처럼
보디 가드로써 장로들이 우상처럼 포진해 있는 겁니다
그 겹겹이 쳐져 있는 벽들이 인간 장자를 우상화 하기 때문이거든요

네 맞아요 10개의 우상 신의 우상이 바로 인간입니다
마귀가 인간을 신처럼 섬기고 있어요
우상이 인간을 우상으로 섬겨요
인간이 우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우상 파괴 할 수 있는 인간이 못 되도록
세상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앗수르가 교만하기 싫어도 아무리 겸손하고 싶어 해도
주님이 막아버렸다 말이죠

그것을 거쳐서 천국을 증거하시니까 말이죠
지옥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야
그 길과 반대 되는
요나의 표적을 만드시는 겁니다

자 그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이집트 라는 성전 구조이듯이(괜히 1300년 만에 죽은 이집트 왕을 쓰레기 통에서 다시 소환한게 아니다 말이죠
이전 것이 지나가야 그래서 이전 것이 삭제 될 것이 구체화 되어야
그 차이로써 새 것을 증거하신다 말이죠)
인간의 신체 구조도 그래요
과거 조선의 왕궁 건축도가 인간의 내장 기관의 구조로 짜여졌다 라고 하잖아요

성경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머리는 예수님이고 그 나머지는 그리스도의 몸 이다
더 이상 세세하게 나누지 않아요
누가 발이 될는지 다시 손이 될는지
다시 더럽고 냄새나고 땀나는 발가락이 될는지
다시 아무것도 안하고 숨만 쉬는 심장이 될는지
머리 앞에서 모든 것은 평준화 곧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고
이리가 양과 함께 식사를 하는 평준화 이다 말이죠

과거 중세의 교회 모습을 보면
바깥에서 교회를 보면 마치 남근처럼 고추를 세운 것처럼 바벨탑처럼 말이죠
남근으로 봤구요
제가 한 말이 아니라 ㅋㅋㅋ 건축가들이 인문학 강의에서 자주 언급합니다
그리고 교회 속 내부는 평안하고 포근한 여성의 자궁처럼 안락함을 주도록 설계했다 라는 겁니다
어디 성전만 그랬겠습니까 모든 건축물 특히 집 찾기 프로그램을 보면 더 그렇거든요
더 이상 집이 아니라 집이라는 공간은 자신의 삶이 된다 라는 표어도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보기도 했다 말이죠
코로나 시대에 집콕을 하다 보니 삶의 공간으로 만들지 않으면 미쳐버리니까 말이죠
자아의 신체성과 동일시 된 집인데 어딜 감히 소홀히 내팽개칠 수가 있겠냐 말이죠

그래서 집을 성전을 어떻게 하면 더 화려하게 더 편안한 시설로 개조하면서
부자처럼 잘 살고 잘 먹고 잘 자는 공간으로 만드느냐
곧 자신의 신체성과 같기 때문에 말이죠

항상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눈치보면서 자기 집
자기 공간
자기 성전 꾸미기에 나서는 겁니다

그런데 깡통으로 판자로 만든 초라한 성전이 되니까 다들 웁니다

왜? 너무 너무 초라해서
솔로몬의 영광 다 사라지고
황금 성전 다 사라지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싫어버린 바 된 성전이 되니 울더라 말이죠

이것이 인간이 구상한 조건이 안 맞거든요
즉 존재에게 안 맞아요

존재란 겨우 일곱 번 용서로 구원을 꿈꾸는 망상을 지는 신체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이래요
이것이 유혹입니다
즉 인간의 조건을 주님은 구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세상의 조건을 구상했습니다
이미 그 구조로 짜여졌습니다
어떤 세상의 조건
넓은 길로 가는 지옥으로 향하는 세상을 구상했다 말이죠

그러나 비존재인 바로 저런 세상의 조건에 하나도 맞는 게 없는
그 어떤 것도 연결점이 없는 접촉점이 없는 단절이 된
낯설기 짝이 없는 겁니다

저런 세상의 조건을 구상하고 그것에 다 빠지도록 해서
다른 낯설기 짝이 없는 천국을 구상했다 말이죠

아니 먼저 전혀 다른 신체요 몸인 예수님을
낯설기 짝이 없는 예수님을 제시한 겁니다
그 예수님이 몰고온 천국과 함께 말이죠

그러니 저런 세상의 조건인 지옥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 예수님이 몰고온 천국을 알길이 없다 라는 겁니다
(결국 지옥이 또는 악이 또는 악마가 세상의 조건을 구상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구상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익숙하게 여겼던 성전이
왜 가증한 물건으로 가득차게 될까요

(렘 32:34, 개역)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자기들의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서 그 집을 더럽게 하며』

(마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 24:15, 새번역)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 ㉣단 9:27; 11:31; 12:11』
(단 9:27, 개역)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단 11:31, 개역)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단 12:11, 개역)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막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계 17:5, 개역)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 17:4, 새번역) 『이 여자는 자주색과 빨간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가증한 것들과 자기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계 17:5, 새번역) 『그리고 이마에는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큰 바빌론'이라는 비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번에 에스겔서 8장에서 에스겔의 머리채를 잡아서 과거 6년 전? 으로 돌아가서
왜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야 하는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성전 벽에 구멍이 뚫려 있는게 그 구멍난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태양신 담무스신 등등 온갖 우상을 섬기는 제사 곧 무당 굿판을 벌리더라 말이죠

계시록 17장의 음녀의 특징은 곧 음녀란 레위기에 의하면 거룩한 제사장의 딸이다 말이죠
예루살렘 딸은 항상 그 결핍성을 남자의 힘 
곧 국가 라는 짐승의 666을 동경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곧 우상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서 9장에 언급된 우상은 그리스신 제우스의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짐으로써
다니엘의 예언대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뒤 200년 만에 예수님께서 말씀 하심으로서 33년을 빼면 기원전 167년에 벌어진 사건이다 말이죠

결국 우상이 구체화 됨으로써 그 차이로써 예수님의 잃어버림 곧 절대저주인 십자가를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상은 악마들이 또는 인간이 구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언제든지 우상을 파괴 할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게 선악이다는 거죠

제우스신의 제단을 세우는 것도 예언대로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충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발등상에서 들추어져야할 원수성이 이렇게 드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개인구원도 없듯이 개인멸망도 없어요
개인지옥이 왜 있습니까
인간은 세상의 조건에 짜여진 대로 휩쓸려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죄악이 저들만의 죄악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이기도 합니다
같은 공통 분모인 첫아담에게 속했기 때문에 말이죠

바로 그런 절대저주인 십자가와 절대선함 곧 절대거룩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심판 받는 것이 아닌 절대저주 곧 완벽한 심판과 곧 잃어버림이지요
그리고 완벽한 거룩인 절대 선인 십자가 곧 하나님의 지혜 지식(아는 지식 곧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는

바로 이 하나님의 의 곧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긍휼 때문에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이 먼저 심판 속에 놓여짐으로써 산소망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 심판 속에서
큰 물고기 바다 깊은 그 스올 무저갱 지옥 속에서
생명과 길과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반대로 인간은 넓은 길 곧 앗수르처럼 키가 크고 높은 나무처럼 그 솔로몬의 영광을 바랬거든요
그런데 그 물넘치고 온갖 새들이 큰가지에 뻗어있는 모습에 다들 모여들고
빌어붙어서 생명을 유지할 줄 알았는데
어라 키가 제일 높다 라고 더 이상 내 보다 키 큰 놈 있으면 나와보라 라고 교만하게 되니까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생명이 있는 줄 알았는데 생명이 없고

반대로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에서는 죽음속에 놓여진 심판 절대저주 속에 놓여지게 되니까
오히려 그 속에서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날줄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고
감람 나무 열매 그치고 논 밭에 식물이 없고
없고 없고
이 절대 저주인 십자가 속에서 예수님이라는 생명나무를 만난줄
산 소망 되신 예수님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성전이 판자떼기로 지어진 초라한 성전이라고 울고 있고
반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황금성전처럼 화려하게 짖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습에
정작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보시고 우시는 겁니다

인간의 울음과 반대로 울어요

결국 예루살렘이
마치 시드기야의 사고방식처럼
선악으로 도배가 되듯이
금으로 바쳐서 맹세하고 기도하고 구하고 지키고 하는 모습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전의 기능은 죄를 거룩하게 하는 기능으로써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말이죠
그랬던 성전이 더 이상 그 기능을 안 쳐다 보고 인간의 손으로 조작이 되니까
성전을 아예 불태워 버려서 없애 버리고
성전의 기능을 십자가로써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대신 감당하시고자
절대저주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십자가가 보여준다 말이죠
내 죽을께 너 살아라 라꼬
대신 매 맞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를 가지고 와야 십자가라는 기능이
환자로써 나와야 의사의 기능에 맞을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들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오고
환자가 아닌 건강한 자로써 예루살렘에 나오니까
이 성전 자체가 우상화 되는 겁니다

성전의 기능은 없고 말이죠

교회 자체가 우상화 되었다 라는 말은
개인 구원이라는 탐심을(탐심이 곧 우상 숭배이기에) 교회가 자꾸 불러 일으킨다 라는 겁니다

없는 자아를 자꾸 부추겨 가지고 말이죠
너만 낙오가 될 수 없잖아 너도 복받은 조건들을 나열하라꼬

그래서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 맹세하고 있는 겁니다
겨우 딸랑 남 7번 용서 했다 라는 것을
그 무지 무지 하게 작은 것을 자랑할려고

아무도 큰 것을 자랑 안해요
그래서 자랑케 만드시고자

마치 호세아의 자녀 이름을 김멸망 최저주 이심판 박부정 정망함 송종말 이라는 이름으로 짖듯이 말이죠

심판 속에서만 산 소망을 갖도록
더 큰 것을 구하도록
즉 이 말은 내가 구할수 있다는게 아닙니다
때려죽어도 안 구해요
그런데 성령으로 안 구하고는 못배기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비로소 7에 70번 용서를 구하게 되는
비로소 큰 것을 구해요

겨우 딸랑 7번 용서 구하는게 아니라

그 정도로 심판 속에서만 원수로 드러나는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나야지만

매일 매일 구상권 청구에 시달리는 빚진자에게 매일 매일 대신 빚을 벌금을 대신 내시는 겁니다 바로 이 절대 선하심 곧 완벽한 거룩으로 입히시겠다 라고

이 완벽한 거룩이 먼저 있었고 그 증상으로 우리는
김멸망 최저주 이심판 박종말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멸망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바로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주지 않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새이름 싫다 라고
기존의 이름으로
기존의 운명대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으로
곧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이름으로 말이죠

부자와 같은 악은 버리고 선한 이름으로 자기 이름을 부자처럼 엘리멜렉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고 했는데 어라
부자처럼 아무리 좋은 옷 좋은 이름으로 했는데
심판을 불 붙이니까 홀라당 다 타버리더라 말이죠

그래서 나오미 라는 기쁜자 라는 이름을 바꾸어서
하나님이 괴롭혔다 전능자 깨서 나를 괴롭게 했다 라고
기쁜자 복된자 라는 이름이
졸지에

마라라
괴롭힘 당했다
왕따 당했다

쓰디쓴 고난의 잔을 먹게 되었다 라고 하니까

오히려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라고
복된 여자 라고 하더라 말이죠

아니 마라 라니깐 나오미가 아니라
기쁜자가 아니라 우는 자 라니깐

그래 우는자 인데 그 우는 자가 복되도다 라는 예언이 남들에게는 없는데
너 한테는 이루어 졌잖아 라고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데 라고
복된 여자다 라고 하는 겁니다

남자를 통한 임신이 복이 아니라
남자 없이 임신한 태가 절대거룩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모든 육체의 기쁨을 다 단절시키는 절대저주 속에 넣었던 거죠

자 그럼 예루살렘을 인간 쪽에서 이루는 방식과(사람의 손으로 성전 짖는 것과)
그 반대로 예수님 쪽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을 완성하시는 절대저주인 십자가와(하나님의 저주) 절대거룩인 십자가 라는 이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주시는 이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는 예루살렘 성전과의 차이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인간의 성전 짖기는 개인 구원용입니다
없는 개인을 자아를 어떻게 해서든 안 잃어버릴려고
반드시 자기를 자기가 챙기고자 말이죠

그런 탐심이 곧 우상이 예루살렘 성전으로써 징후로 나타남에 있어서
선지자를 보낼 때 마다 죽였고
암탉이 자기 새끼를 모을려고 할 때 마다 못하게 방해 했다 라는 겁니다

훼방하지 않고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유대인의 사고방식은 도리어 훼방하고 
도리어 핑계로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이다 훼방꾼이다 라고 십자가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여전히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
여전히 개인 구원을 염두하고서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교회를 통해서 펼치고 있다 라는 거죠

패역한 예루살렘 딸이 안 되고자 하는 율법지키기가 구원받을 조건 갖추기가
자기 의를 쌓고자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과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음에 하나님께 감사하기가 도리어

폐역한 음녀 예루살렘 이였다 라고
언제까지 짐승 666 국가와 손 잡고 선지자를 죽일래 파송된자를 돌로 칠래 라고 하시고

반대로 주여 저는 패역한 음녀 예루살렘입니다 라고
김멸망 최저주 박심판 이종말 이라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다윗처럼 왕 자리에서 비로소 내려와
죄인의 자리에서
원수의 자리에서
정직한 영이 없다 라고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는 마음으로
절대저주인 꺽으신 뼈로
다윗 속에 때려죽어도 없는 더 나은 제사인 십자가를 쳐다봄으로
다윗에게 때려 죽어도 없는 인애와 자비인 십자가의 권고를 쳐다봄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는 이 기쁜소식을 노래한다 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준비하신 의(거룩)인 꺽으신 뼈로만 기뻐하는 겁니다
완벽한 거룩이요 절대 선하심이거든요

번제? 제사? 그런 것 원하셨다면 벌써 드리고도 남았다 말이죠
그런데 안 원하신다 라는 겁니다
새 일이란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하셨다 라는 겁니다

사도들도
그들이 흘린 피 위에 교회를 세우듯
그들이 대신 매 맞음으로써 용서를 받는 식으로만 새 일을 펼치시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라고 하시는 이유는
오히려 인간들이 생각하는 우상을 섬겼기에
우상을 안 섬기면 될꺼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입니다
우상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서

대신 매 맞는 예수님을 쳐다보라는 것인데
인간은 개인구원 때문에 예루살렘에
앗수르 나무란은 큰 영광에 빌어붙어서 새처럼 다들 모여들어서
거기서 개인 구원을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어설픈 인간의 의로움과 선함에
남을 7번 용서하는 선악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거 없애버리고 십자가의 피 용서를 쳐다보라는 선지자를 죽였다 말이죠

인자의 나라는
어설픈 인간의 의로움 곧 남을 겨우 7번 용서하는 그런 선함을 갖추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다 말이죠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는데 있어서 겨우 7번 용서한 것을 자랑하고자
그런 자신 보다 못한 자를 정죄함으로써 도리어
개인의 구원 조건 갖추기를 정당화 하는 것에

십자가는 훼방꺼리로 거리끼는 걸림돌로 다리 걸어 넘어뜨리는 것으로
아이고 그것도 용서가 라고 용서를 모아놓은 그릇을 다 깨뜨리는 겁니다
깨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게 아니라
도로가 차를 굴려서 도로가 도로법 위반하도록 불법을 저지르게 만들어서
마치 요번에 강남에서 갑자기 폭설이 내려서 다른 지역은 미리 대비했는데
대비 못한 강남에 눈을 억수로 뿌리게 되니
차가 눈 위를 주행하는게 아니라
눈이 차를 가지고 노니까 꽝 하고 부딧히게 하고
다치기도 하고
자꾸 돈이 들도록 만드는
마치 벌금을 내라 라는 식으로 말이죠
아무리 법규를 지켜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미끄러지고 거꾸로 가고 빙글빙글 돌 듯이 말이죠

그 속에서 미리 대신 벌금 대납을 해 주시는 십자가를 준비했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건강하여도
십자가가 먼저 떳기에
우리는 다쳐야만 하고
김종말이 되어야 하고
환자가 되고
죄인이 되어서

이 십자가를 외치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일에
인간은 
사람의 일로써 끝까지 자기자신을 죄인 안 만들고자 의인이 될려고
예루살렘을 사수하고
교회를 사수하고
끝까지 환자 안되고자 건강한 자 되고자
예루살렘을 사수해서
절대성전이신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을 안 쳐다 볼려고 
약바를려고 하더라 말이죠
그게 불뱀에게 물린 증거인데

원수 아니다 라고 하니 말이죠

일만달란트 용서 안 받고자
백데나리온 돈 띠먹고 도망친 친구를 잡아서 감옥에 쳐 넣는
정의사회실천을 하고 있더라 라는 겁니다

이 모습이 예루살렘에 집결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런 인간의 선악 추구가 곧 십자가의 피 용서 절대로 안 쳐다보겠다 라는 그 완악한 마음의 징후로써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고 탄식하시는 겁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십자가를 통해서
곧 하나님의 절대저주인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또한 본 자가
주여 내 죽음은 죽음 축에도 못 듭니다
내가 마땅히 당해야 하는 심판은 심판 축에도 못 듭니다
진짜 하나님의 심판 곧 절대심판 절대저주인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새 일입니다

그래서 향유를 부은 창녀가 김창녀 박음녀 최창기가
예수님의 죽음 곧 절대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미리 장사를 치른다 말이죠

어서 제발 죽어주소서 라고 모세가 1300년 만에 나타나서 외치고 사라졌듯이

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달라고
그리고 그 새 일에 새 언약에
사도들이 내 죽을께 너 살아라 라고
내 저주 받을께 너희 복 받으라 라고
이 십자가를 매일 매일 반복하는 겁니다

다른 의로움은 없기에 말이죠

그러니 참성전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안 쳐다 보고

예루살렘에서 또 호작질
십의 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번제와 제사 드리고

모조리 다 개인구원을 향한 우상숭배라는 종교를
인간은 멈추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음에
언제까지 그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느냐 라고

마침이 되고자 단번에 제사를 드린 겁니다

이 순종에 
이 하나님의 의에 곧 십자가에 복종하는 것이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라는
순종은 인간 쪽에는 없어요
순종은 예수님 쪽에서 넘어옴으로써

비로소 제사가 아니요
순종이 옳았다 가 되는 겁니다

더 나은 제사를 아벨이 드린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었고

그 피 흘리심에 아벨이 드린 피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뜻을 펼치실려고 했다 말이죠

자 여기서 독자적인 아벨이 드린 제사는 더 나은 제사가 아닙니다
일반 제사와 같아요 가인의 제사와 같아요

더 낫다 라는 것은 뭐뭐 보다 뭐뭐가 낫다 라는
비교대상이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제사인 인애와 자비인 십자가가 더 낫다 라는 이유로
거꾸로 시간을 돌려서 아벨의 피 흘림이라는 것에 자신의 뜻을 넣을려고 했는데
그만 죽여 버렸다 말이죠

자 그럼 죽여 버리니까
더 낫다 라는 비교 대상이 이제 없어져 버렸잖아요

그것이 인간의 선악이 노리는 것 아닙니까 비교 대상을 없애버렸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것이 십자가가 먼저 있었다는 그 증상으로써 나타난 겁니다
그러니 아벨이 드린 양의 피가 더 나은 제사 라고
알고보면 그런 식으로 내용을 채운 해석은 결국 가인의 제사였구요

남을 7번 용서 하기 제사 였구요

그런 겨우 작은 제사에 더 나은 더 큰 7에 70번 용서의 더 나은 제사가
아벨이 드린 양의 피 제사가 아니라
아벨 자체가 양처럼 죽임을 당함으로써
왜? 예수님이 그 아벨의 죽음 계통 죽음 노선 피 흘림의 노선으로 오시겠다고 하시니까
즉 양의 피 제사냐 농삿물 곡식 제사냐가 아니라
아벨 자체의 죽음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살았다 라고 하는 자의 가인의 제사 보다
죽었다 라고 하는 아벨 자체의 죽음이 오히려 산자의 하나님 속에 들어와 있고
왜? 바로 그 죽음도 대신 살리고자 대신 죽었기에
바로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여전히 무관한 가인은
오히려 살아 있어 본들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죄의 소원이 따라다니는 그래서
더더욱 성을 쌓고 쌓고 쌓고
영웅이 되고 되고 되고

이 선악의 세계에 더더욱 힘을 구축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게에는 영웅이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의 달인이 필요가 없어요
바리새인이 필요가 없어요

영웅이 필요할 정도면 그 정도로 악한 세상이다 라는 겁니다
즉 구원자가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구원자들이 너무 너무 많다 보니까
개인 구원이 유행을 하는 겁니다
성화론이 유행을 해요 글쎄

그럼 구원자들이 나타날 수 밖에요
그러면 성전에 가증한 물건이 설 수 밖에요

바로 그런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원하라 라는 말을
구원자로 나서는 자들이 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이였던가요?
성전은 바로 그렇게 인간의 개인 구원용으로만 작용이 되도록
마귀가 장악해 버린 겁니다

바로 그런 사람의 일로 인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이루시는데 있어서
안 됩니다 라고 십자가 지시면 안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베드로를 사탄아 
사탄에게 빠져 있는 베드로를 건질 방법은
안 돼요  돼요  돼요  돼요  돼요  돼요 

네 맞습니다 되게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안된다고 하는 그 십자가를
다 이루시는 겁니다

고로 의문의 제사는 마침이 되는 겁니다

선지자 안 죽이겠다 라고 했는데 또 죽일 수밖에 없는
선악으로 채워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아예 깨뜨려서

주님 자신이 참성전으로써 인애와 자비를 완성하시는 겁니다
그 인애에 그 자비에

원수로써 김저주 최심판 이종말로써
그 7에 70번의 말도 안되는 크나큰 사랑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아니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딸랑 7번 용서는 또 의문의 반복으로 되돌아가겠지만
일만 달란트의 용서는
매일 매일 퍼부어지는
원금 일만달란트 탕감에다가
매일 매일 20% 보호비인 보혜사 선물을 매일 매일 이 십자가의 영을
주시는 겁니다

누가 저 남을 7번 용서라는 저 의문으로 다시 되돌아 가고자 할까요?

이 십자가가 무한 영광임을 찬양하도록 만드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일을 누가 훼방하겠습니까
성령을 훼방할수 있겠냐 말이죠

이 사랑의 빚으로만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다행힌지 받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입니다
즉 인간 쪽에서 출발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예루살렘 성전의 방식은 다 찢어졌습니다
의문의 증서를 도말한 것처럼
성전을 불태워 버렸다 말이죠

지금 교회들이 또 그런 짖하는데 그게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세우는 거죠

이제 십자가의 피 흘리심만을 통해서 우리는 인애와 자비만을 쳐다보고 가는 겁니다

인간이 세운 교회는 번제와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닦달냅니다
돈 내라 라는 소리 밖에 없어요
돈 없으면 몸으로 때우라 라꼬
정신병자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피 용서만을 주시는
7에 70번 용서만을 매일 매일 퍼붓는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자의 나라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