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6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29-33)

회칠한 무덤 ; 겉으로는 옳게 보이고, 속으로는 불법이 가득한 자들 (마 23,25-28)
마태복음 2018 2020. 12. 19. 21:59
18-115 겉으로는 옳게 보이고, 속으로는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5-28)

〈마태복음 23:29-33, 개역한글, 신약성경 40쪽, 찬송가 421장 나는 갈길 모르니〉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29,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마 23:30, 새번역)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마 23:31, 새번역) 『이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마 23:32, 새번역)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워라.』
(마 23:33, 새번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무엇이 진리이냐 라는 겁니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었잖아요
빌라도는 진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었던 것은
아무리 봐도 너 예수는 진리가 아니냐 라고 단정짖는 겁니다

이것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고로 모든 인간은 독사의 새끼입니다
땅땅땅 판결 나 버렸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독사의 새끼입니다

그저 예수님 마저 이용해서
자기 배를 채우고자 임금 삼고자 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이냐 라고 빌라도가 물었던 겁니다

이 땅에 속한 사람 치고 안 그러는 자가 없으니
톡까놓고 말해 보라 너가 유대인 왕 맞기는 맞냐
그런데 유대인은 왜 너를 고소하느냐 왕을 고소하는 백성인데

빌라도는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결하는게 아닙니다
이 의미 없는 짓에 말려들기 싫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노림수가 도리어 더 말려들고 있는 겁니다
진리에 대해서 물었기에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무릎 꿇지 않고 도리어 내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닌걸 알면서도 들었으면서도 말이죠

자기 따나 최선의 길을 찾은 겁니다
최악에 말려 들지 않고자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도리어 최악에 말려든 겁니다

예수 에게도 안 말려들었다 나는 손 씻는다
유대인 에게도 안 말려들었다 나는 손 씻었다
중간에 빠지는 겁니다

이런 모습은 내가 빌라도 입장이라도 그렇게 하겠다 라고 다들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마귀에게 모든 인간이 장악당한 모습입니다
진리? 말만 진리를 운운하지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진리는 자기자신 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만이 진리요 천국이고

타인은 지옥이기 때문에
타인과 얽혀진 것은 어서 끊어버려야 하는 겁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 아합왕을 언급했는데

아합왕이 우리의 모습을 다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좋은 것들은 내 옆에 내 신체에 장착하고 싶은 겁니다.
그 소유로 인해서 더더욱 나 자신은 선하고 아름답고 의로움이 되도록
그것이 하나님이 내 편이다 라는 의식이다는 거죠

그런데 선지자는 하나님은 너 편이 아니라
임마누엘 아기 편이다 라고 합니다
그 아기는 상한 얼굴 
저주 받은 얼굴
벌 받아서 몰골이 싫어버린바 된 얼굴로써

남이 아닌 내 때문에 저주 받은 모습으로 온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이 참된 메시아의 모습을

우리는 엉터리로 상상한 것이 다 무너짐으로써
상처난 메시아의 모습을 따라가는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새롭게 새이름을 부여받는 것은
이삭의 죽음으로 인한 겁니다

(창 17:5, 개역)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19,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 이삭의 희생 제물 됨 때문에 아브라함이 태어났어야 새이름으로 부여받아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새 이름을 부여받지 않은 자들은
상처난 예수님의 얼굴을 싫어버려서

무엇으로 대신 채우는고 하니
바로 오늘 본문

(마 23:29, 쉬운)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위선자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의 묘비를 꾸미면서』
(마 23:30, 쉬운) 『‘만일 우리가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때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예언자의 피를 흘리는 데 함께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어서 예쁘게 단장을 하고 의인이라고 묘비로 새기면서
우리가 만약 우리 조상때에 살았더라면 절대로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동참치 않았을 것이다 라고 
선생들이 박물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듯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시해 놓고서
우리가 만약 그때에 있었더라면
절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말이죠


이것은 곧 인간은 자기자신을 판단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가 늘 자기자신을 판단하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갸릇하고 기특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아니냐 말이죠
늘 올바른 길로 가고 싶어 하지
잘못된 길로 가기를 원치 않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자기자신을 판단하는 그 기특하고 갸릇한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는 겁니다 진리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기자신을 판단하는 모습이
진리의 길로 이끌던가요?
그렇다고들 착각하지요
그런데 보세요 앞의 글 에스겔에서
아합왕의 모습을 보세요
우리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떤 한 선지자 친구 선지자의 무턱대고 날 상처내 달라고 요청하는 그 친구를 때릴수 없는 우정 깊은 모습에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라는 사실 이 진리를 무슨 수로 해석, 이해 하겠습니까?

동료 선지자를 상처내지 않았다 라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그 선지자를 죽여버렸다 말이죠

한 마디로 말해서 선지자는 공무원인데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죽여버린 것과 같다 말이죠

단지 그 공무원은 친구 공무원을 때려서 상처내라 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한 이유로 말이죠
공무원 아니면 상관 없는데 공무원이라서 말이죠

이해가 되냐 말이죠
그 정도로 진리에 관심이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진리 아닌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라는 겁니다
공무원 주제에 

진리의 공무원이 진리를 거부했으니 말이죠

그럼 진리 아닌 것이 뭡니까
바로 선악으로 채워버리더라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판단하기에 옳은 선을 택하고자
내가 그때로 돌아갔다면 절대로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거다 라고 한다 말이죠

자 그럼 다시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 당시의 그 십자가의 사건 때에 우리가 돌아갔다 칩시다
2020년 전으로 돌아갔다

과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치지 않을꺼다 라고

자기자신을 판단할수 있을까요
아무리 아무리 선으로 포장하고
무덤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이 선지자는 의인입니다 라고 자녀들에게 교육하며 가르친다 라고 해도

그 교육이
그 참 교육이
하나님 앞에서
진리 앞에서 통할까요?

진리도 아니면서 진리라고 우길수 있을까요?

아무리 독일이 나치에 대한 교육을 시켜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자 라고 교육하고
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위안부피해여성의 편에 서서 운동을 한다고 해서
우리는 과연 베트남에서 저질렀던 그 만행을 사과할려고 배상 할려고 할까요?

그것이 진리 앞에서 통하겠냐 말이죠

십자가 라는 진리는 
어딜 감히 속이려 드느냐 라고 이미 모든 것을 까발려 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에게서는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아무리 선함을 추구해도
십자가는 어딜 사기치느냐 라고 따라다니면서
태클 걸어요
다리걸어 넘어뜨려요

때리는 시어머니 
저 로마 
저 애굽
저 바벨론 보다 더 미운 것이

말리는 시누이
예수님이
십자가가
진리가 더 미워요

더 미워

안통하거든요
아무리 속일려고 해도 안 통해요

이런 모든 인간들 속에서
예수님은 겁도 없이 진리의 나라를 소개하시는 겁니다
이 땅에 속하지 않는 나라

그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그 나라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어지는 새 이름을 달라고 말이죠

그 진리의 나라에서 주는 이름을 새 이름을 받으라 라고
기존의 이름으로는 지옥 간단다

애들 봐라
선악을 맨날 판단하는 애들 
뱀들
독사의 자식들

너희들이 이들을 보고 선한줄 알고 부러워 하는 이들
애굽을 부러워 했듯이
이들이 앉은 모세의 자리 부러워 하고 있는 이들처럼

지옥 간단다 애들아 라고

진리를 외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진리란 뭡니까
사도바울이 이 진리의 나라에 의해 박살이 나고 난 뒤에
자신이 왜 무조건 이유없이 틀렸는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나의 선함을 쌓기 위해서 도리어 의인의 피를 흘리게 되더라 라는 것을 말이죠
이단을 말살하겠다 라는 정의를 세우는 것이 도리어 예수님을 죽인 결과가 되었듯이 말이죠

그럼 진리는 뭡니까 바로 그런 이유로
그 자기 의를 쌓는 것을 깨뜨리고자
매맞는 모습으로 왔다 진리가 왔다 라는 겁니다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즉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힘써 복종치 않는 모습이다 라는 것을
몰랐다 라는 겁니다
이런 지식을 몰랐다 라는 겁니다

그저 단순하게 나는 하나님께만 열심만 내면 된다 라고 본 것이
도리어 지식을 거부하는 모습이였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라는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뭘해도
앞의 글 아합왕처럼
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갇혔다 라는 겁니다.

아합왕 뿐이겠습니까
친구 선지자를 때리지 않아서 상처를 내지 못한 것 또한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죽임을 당할정도로

진리에 맞지 않는 모습을 추구하더라 말이죠

그럼 뭐냐

그저 친구의 우정에 배신하지 않겠다 라는 자기 의로움을 쌓았지
자기 선함만을 쌓았지

그 선함을 쌓고자
하나님의 의를 힘써 거부하고 심지어 죽이고자 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으로 인해 죄 아래 갇힌 실제 현실인데
이 현실을 다들 외면하고

율법을 지킬려고 하니
그러면 그럴수록
선지자의 무덤을 더 쌓는다 더 안쌓는다?
더 쌓는 겁니다

선지자는 인간이 스스로 판단해서 의를 세우고자 하는 그 의에 동참해 주지 않거든요

오히려 그 의를 거부하는

하나님의 의를
새하늘과 새 땅을 증거하거든요

서로 원수지간처럼
육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을 육의 소욕을 거스린다 말이죠

여기서 제가 그 동안 교회에서 배운 것이 뭔고 하니
교회에서 이렇게 가르친 것을 그 동안 배워왔다 말이죠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와
육의 열매를

거꾸로 교회가 가르치고 있었다 라는 겁니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5, 개역)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6, 개역)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육체의 일은

(갈 5:18, 개역)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9, 개역)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개역)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개역)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성령의 열매와 육의 일을 우리는 반대로 배워왔던 겁니다
오늘 본문처럼
의인의 비석을 만들어서 우리가 이때였다면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안 죽였을꺼다 라고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이
바로 지옥 갈 자의 모습이다

곧 육의 일이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성령의 열매라고 가르치고 있더라 말이죠


(갈 5:18, 개역)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9, 개역)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분명 육체의 일을 언급하면서
단서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다
왜? 성령의 인도를 받기에 말이죠

이 단서가 붙어있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육체의 일을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 언급을 하게 되니

음행인줄도 모르고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써달라고 했다 말이죠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써 달라는 자체가 음행이다 말이죠

왜? 율법 지킬려고
음행한 아내를 끊고자 더한 음행을 저지르겠다 라는 정당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뭘 해도 음행인줄 모른다는 자체가 음행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여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
즉 사형깜이다 라는 겁니다
율법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것이니
하나만 어겨도 사형깜인줄도 모르고 지키겠다 라고 하니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복종치 않는

상처난 예수님을 거부하는
여전히 아름다운 포도원을 이유 없이 나는 가져야 해
왜? 나는 선민이니까 나는 유대인이니까 
하나님은 유대인 편이니까 이스라엘 편이니까
그 대신 이스라엘은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니까

이것이 음행이다 라는 겁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갈 5:19, 개역)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그것이 바로 더러운 것이다 말이죠

손을 깨끗이 씻지 않고 먹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줄 모르는 것이 더러운 거다 말이죠
왜? 아름다운 말을 한다는 자체가 더러운 거다 말이죠
아름답다 라는 판단을 누가 내렸냐 말이죠
선하다 
옳다
진리이다 라는 판단 말이죠

그런데 정작 진리는 그것을 인정한다 안한다
안하는 겁니다

다윗은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다 라는 진리를 알아버렸다 말이죠

내 속에 진리가 없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없다 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말이죠

누구 덕분에 저 꺽으신 뼈 덕분에

그러니 새롭게 공급 받아야 할 판국에 놓여졌는데

정작 그 동안 교회에서 가르치기를
새롭게 공급받아야 함에 있어서
없다 라는 것에 직시해야 하는데

오히려 기존의 것에 쪼매 부족하니까 보충하는 식이 되니까
헌 술에 새술을 담는 식이 되니 찢어지는 겁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가 된디는 것은 뭡니까
뭐든지 예가 된다
아멘이 된다
뭐든지 진리가 옳았다 라는 겁니다

그럼 정작 우리는 나는 진리 아니요 저 분이 진리입니다 라고
도리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어라 목사까지 가세해 가면서
사랑 경쟁 붙이기
희락 화평 싸움 붙이기
누가 충성 양선 하느냐
누가 오래 참느냐 대결을 붙여요 글쎄

그러니 성령의 열매는 맺는다는 것이 도리어
육체의 일을 하더라 라는 겁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9, 개역)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개역)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개역)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에 말이죠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요
자기 구원을 자기가 막아요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는 말이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찌르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는 겁니다

이미 물에 빠졌는데 뭘 물에 안 빠지고자
실패하지 않고자
또 자기자신을 판단하냐 말이죠
주님도 판단 하시지 않는데

주님 우리 상대 안합니다
성령이 곧 불로 우리를 다루십니다

불이 우리 착하냐 악하냐 라는 그 판단에 안 놀아납니다
일단 불 태워 죽여 놓고 시작해요
매일 매일 죽이시는 겁니다

또 좋은 예가 있습니다
그 동안 마태복음에서
왜냐하면 유대인을 향한 복음이거든요
그러니 그들의 선생인 바리새인과의 충돌을 통해서 살펴봤듯이

바리새인은 항상 선의 자리에 자신을 놓았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예수님을 늘 악의 자리에 놓았다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에게는
선의 자리에 아무리 앉아도
진리의 하나님 되신 예수님에 의해서
곧 진리에게는 안 통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금식을 한다는 이유로

인자 되신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 죄인 강도의 친구 라고 별명을 붙이더라 말이죠
그런식으로 자기자신도 판단할꺼 아닙니까 예수님을 판단했듯이 자기는 그런 것 피했으니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는 옳다 함을 받는다 라고 하셨다 말이죠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바보야 그것을 너희들은 악이라고 판단하는데 있어서
정작 그것이 옳은 진리이란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분면 욕했는데 별명까지 지으면서 욕했는데
도리어 칭찬을 한 거야 바보야 라는 겁니다

이 말을 그들은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세리 와 죄인들을 예수님에게 주선해 주고 있다는 거죠

자기들은 정작 빠지고 말이죠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서
정작 진리에 관심 없어서 빠지듯이 말이죠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자하는데
모세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데 
과연
음행을 하겠냐 말이죠
안하겠죠
도리어 음행을 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자를 가지고
예수님은 어떻게 판단 하는가
판단

시험하잖아요
바로 이게 음행 아닙니까

육체의 일을 하더라 말이죠

상대적으로 시험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은 오히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참음
뭐든지 예가 되더라 말이죠

아니 분명히 누가 봐도 아니오 라는 인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자
아니오를 들이댔는데
도리어 예가 되더라 말이죠 예 아멘 아멘이 되더라
진리의 하나님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그런데 사실은 이 상황이 구약때에 이스라엘을 앞장세워서 우상의 나라와 전쟁을 벌리시던 모습 아닙니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이렇게 된 것일까요?

또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좋은 의도로써 식사대접하겠다고 초청을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의도
선한 의도
그 어떤 시험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초대했다 말이죠
아 그런데 어디서 걸려 넘어지는고 하니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기뻐서
창녀가 예수님을 껴 앉고 발에 뽀뽀하고 영접을 하더라 말이죠
여기서 그만 바리새인은 선악의 판단이 나와버린 겁니다

만약 예수가 선지자 라면 저 여자가 몸을 파는 더러운 창녀라는 것을 알텐데 라는 판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 마음을 들추어내시더라 말이죠


(눅 7:36, 개역)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4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님은 가는 곳 마다 화평이 되는데 평화 샬롬이 되는데
바리새인은 도리오 이렇게 맺어진 한 몸의 관계를 어떻게 해서든 더럽다 라고
분쟁으로 몰아가더라 말이죠
이 용서의 관계에 시기와 분냄과 당 짓기를 하면서 말이죠
탕자를 용서한 사랑한 것에 대한 맏아들은 시기와 분냄을 아버지께 표출하듯이 말이죠

(갈 5:20, 개역)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즉 이렇게 사람은 늘 자기자신을 판단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자신이 옳기를 바라지만

진리는 그런 인간의 선악에 따라주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함에 진리가 따라주길 바라는 것이 인간이다 말이죠
포기 안 해요

이미 물에 빠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빠질려고 하듯이 말이죠 실패하면 안된다 라고 말이죠
무조건 자신은 승리 성공한 자리에 놓고 싶어하듯이
진리도 그런 자신의 판단에 따라주길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진리되신 예수님은 택도 없습니다
가감없이 짤라버리십니다
마치 베드로를 즉각적으로 물에 빠뜨려 버리듯이 말이죠

그리고 진리를 알아라 라고 물 속에
심판 속에서 생명을 보라 라고
길을 보라 라고

누가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인지를

너 베드로냐
나 예수냐

너 베드로의 판단이냐
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느냐 말이죠

늘 진리를 위배하면서도 불구하고 옳았기를 바라고 있다 라는 겁니다.
진리를 거부하면서도 말이죠 진리에 대해 열심인 자신을 옳게 여길려고 말이죠
진리는 정작 모든 인간은 틀렸다 라고 알려주는데 말이죠

인간이 선을 안다고 해서 선을 행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데
그 착각에서 비롯해서
선지자의 업적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때 조상때에 있었다면 절대로 선지자를 안 죽였을 것이다 라고
또 역시나 교육으로 가르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악마들 곧 지옥의 자식들의 사고방식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나쁜 길에서 벗어나서
옳은 길로 진로를 방향을 틀수 있을 것이다 라고 여기고 있다 라는 거죠
경건의 모양을 그래서 갖추는 겁니다
그런데 경건의 능력까지 있다 라고 여긴다는 자체가 바로 악마들이다 라는 거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래서 예수님이 이전 것을 지나게 하시는 새 일을 다 이루신 겁니다
이 새일의 기준으로 해서

기존의 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주장
올바른 교육만이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왜 달리셔야 했냐 말이죠
즉 이 말은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십자가는 하등 필요가 없는
불필요한 짓을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주장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정반대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경건의 모양을 갖추어도
경건의 능력 자체가 나올수 없기에
그 경건의 모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그 자체도 악마의 짓으로 규정을 하심은

바로 이 십자가
곧 상처 입은 얼굴로써 메시아가 왔다는 이 진리에 안 맞기에

이 상처 입으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분만이
새 이름을 주신다 라는 겁니다
이 새 이름을 받지 못한 자는 다 지옥깜인데

여전히 지옥깜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고 교육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치겠다 라고
그때 있었으면 안 죽였을텐데 라고 나오는 겁니다

마치 지옥간 부자가
지옥 오지 않도록 선지자를 보내달라고

이 얼마나 바른 주장 아닙니까

그러나 여전히 진리에 관심이 없다 라는 겁니다.

선지자를 보내길 뭘 보내요
이미 있는 선지자도 여전히 죽이고 있는 판국인데

왜 진리를 거부하는지

지금 방금 지옥에 오지 않는 길은 선지자의 말을 듣는거다 라고 부자가
지옥간 부자가 주장하잖아요
맞잖아요
바른 생각을 전달해야 할 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이
이미 있는 선지자를 여전히 무시하고서
선지자를 보내달라는 식이니
도대체 어떤 선지자를 보내달라는 것일까요

네 맞아요
자기를 위한 선지자 구원자인 결국 우상인 거죠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의로움을 쌓는
이것이 지옥 갈 자
지옥에 간 자
지옥에 간 부자의 주장이였다는 겁니다

그럼 지금 이땅에서도 지옥에 갈 독사의 자식들의 특징은
얼마나 바른 소리 하는 자들이 아니고 뭐겠냐 말이죠
정의를 부르짖고 말이고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이 정의를 거부하는 자들이거든요

그 되도 않는 정의의 모양을 갖추고자
얼마나 정의를 짖밟았겠냐 말이죠

윤땡렬이든 조땡이든 진중땡이든 심상땡이든
하여튼 모두다 정의를 밟으면서
정의 누가 누가 더 정의롭냐 라는 게임을 벌려요

바른 소리 하는 자 치고
천국 가는 자 단 한 놈도 없어요

차라리 초상집에 가라 말이죠
심판의 현실을 보여주거든요
뭘해도 죄 뿐임을 다 부질없음을 보여주는 실상이거든요

진짜 현실은 정직한 영이 없으면
그냥 죽음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을 바래야 용서를 바래야 할 판국인데
여전히 누가 옳냐 누가 틀리냐 라는 판단 때문에
그 조상의 길을 가지 않겠노라 하면서도
모양을 껍데기는 아무리 그런 마음을 갖추어도
능력이 없기에
성령이 없기에

그 조상의 값을 또 채우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자가 없어요
진리를 여전히 판단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도리어 진리로부터 판단 당하는 입장이다면
사도바울처럼 비로소 내 속에 원함은 있으나 정작 누구를 쫓는다 육을 쫓더라 라고 말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어라 그런데 갑자기 원인 없는 결과로써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가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고

사망의 법에서 해방 되었다 라고
뭘 해도 예가 된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3, 개역)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개역)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알고 보니 반칙을 벌렸다 라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을 이룬 
창녀 세리 강도 이런 더러운 자들이
육신이 연약하여서 할 수 없는 그것을
진리는 하심으로써 율법의 요구인 남을 사랑하는
원수를 사랑하심으로써 다 이루어 버렸다 라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다 이루시고서 그 완료를 우리에게 입혀버렸다 라는 겁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도 이렇게 하면 될꺼 아니겠냐 말이죠

그런데 왜 못할까요?

바르게 가르치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거든요
즉 선지자를 또 죽일 수밖에 없는 자리에 놓여져야 하거든요

아무나 그 자리에 못 앉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남에게 가르치는 자리
그래서 선을 추구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리에 앉고자 하지

누가 내가 선지자를 죽인 죄인입니다 라는 자리에 앉고자 하겠냐 말이죠

다윗도 안되었고
베드로도
모세도 아무도 안 되었어요
그들 또한 사울왕과 다를바 없었고
가룟유다와 다를바 없었고
애굽왕 바로왕과 다를바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가만히 내어버려 두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경건의 모양만 갖추어서 악마짖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질투의 사랑으로써 그 베드로에게 자신을 주시고자 하셨다 말이죠
자신의 살과 피를 때려 죽어도 안 먹을려는 베드로를
죽여서라도
죽인 다음에 수혈하듯이
살과 피를 먹여서 다시 살리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방식이 아니면
아무도 수치를 가려움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자기가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말만 하지 그렇게 갈 수 있는 능력은 아무도 없어요
정직한 영이 없어요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율법 외에 한 의는 외부에서 온 겁니다
이 의에 복종하는 자는

의를 쌓을수 없다 라고 인정하는 자 곧
상한 마음 뿐입니다

성령은 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왜 정직한 영이 없는지

왜 나 다윗은 아무리 해도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아이를 살릴수 없는지

바로 육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전에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는 그 마음이
사실은 악마의 마음이였다 라는 것이
선지자 나단 선지자로부터 들통나 버렸다 아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단선지자는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했다 라고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 등등을 외치더라 말이죠

이제야 내가 내 스스로를 끌고 가보겠다 라는 심뽀를
손 떼게 하시는 그 사랑에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버리는 겁니다
내 인생 실패하지 않고자 내가 끌고가는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주님이 대신 짊어지시겠다 라고 하시는

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케 만드시는 겁니다
왜? 너희들은 율법 못 이룬단다
그럴 능력이 없기에

그런 새 마음이 없기에
그런 성령이 없기에

십자가의 영 만이
대신 매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도록 하시는 능력은
죄가 되신 예수님 밖에 없기에 

야들아 손 떼라 내가 하마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의에 복종함으로써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용서를 받는

이 용서만을 외치지

또 남에게 한 수 가르치겠다 라꼬
바른 길로 가야 한다는 둥
우리가 그 때 있었으면 절대로 선지자를 안 죽였을꺼다
절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치지 않았을꺼다 

이거 다 거짓말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백날 천날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절대로 못 바꿉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칠 수밖에 없음을
베드로 지금 다시 돌아가도 세 번 부인 합니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탁 막혀 걸려넘어지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로 인해 마귀의 깊은 것을 알게 됨으로써
마귀에게 포로 잡힌 것이
도리어 진리의 하나님
뭐든지 예가 되는
아멘의 하나님과 만나는 주선 노릇 덕분에

이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먼저 있었고
이 십자가의 피 용서의 사랑의 열매

증상물로써 우리는 십자가를 취소해야 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이 십자가가 옳았다 라고 외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기뻐노래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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