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0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 24, 3- 8)

무너지는 성전! 무너지는 세상! (마 24, 1- 2)
마태복음 2018 2021. 1. 30. 22:19
18-119 무너지는 성전! 무너지는 세상! (마 24, 1- 2)

〈마태복음 24: 3- 8, 개역한글, 신약성경 41쪽, 찬송가 253장 구원으로 인도하는〉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 24:3, 새번역)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마 24:4,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 24:5, 새번역)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이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마 24:6, 새번역) 『또 너희는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당황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마 24:7, 새번역) 『민족이 민족을 거슬러 일어나고, 나라가 나라를 거슬러 일어날 것이며, 여기저기서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
(마 24:8, 새번역)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은 진통의 시작이다."』


놀랍게도 인간은 단 한번도 또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마음과 합쳐진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있다면 다윗이 벌써 했을 거다 라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도 그것도 이스라엘의 왕 조차도
하나님의 마음과 합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수시로 올라오는 우상 곧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 있어서 주님의 계획은 일괄되게 종말을 곧 세상의 끝을 밀어붙이시겠다 라는 겁니다
즉 그 동안 봐줬던 이유도 이 종말이 완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종말만 완성 되면 바로 밀어버리시겠다 라고 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다윗언약을 통해서 새언약을 완성한 후 참선지자의 메시지는 딱 하나 뿐이였습니다
십자가라는 새언약으로 다 밀어버리시겠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계획일진데

여기에 인간은 새언약이 완성이 된 후나
또 새언약이 완성이 되기 전이나
상관없이

그저 하나님의 일 보단
사람의 일만 관심 둘 뿐이지
아예 주님의 계획은 아예 아예 무시해 버렸습니다
즉 오로지 선악만 추구함에 있어서 거짓제사 라는 지난주 말씀 이사야 말씀처럼
오로지 거짓된 우상숭배라는 자아를 위한 자기구원만 추구하였던 겁니다

자 그럼 마지막때에 일어날 징조는 뭡니까
이미 답을 말해 버렸네요
주님의 임하심의 증상물이 뭡니까 

네 맞아요

가짜 예수
거짓 선지자의 등장입니다

에스겔 말씀을 통해서 또 바로 앞의 글 에스겔서를 통해서
큰 악어 애굽과 애굽왕 바로왕을 왜 1000년 전에 죽은 놈을 왜 끌어들이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장대 높이 달린 인자 와의 차이를 말씀하시고자
좁은 길 곧 없는 길을 말씀하시고자

가짜 길인, 가짜 생명인 넓은 길 곧 에덴 동산과 같았더라 라는 애굽을 끌어와서

존재와 비존재의 차이를 증거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노림수를 가지고 종말에 어떤 징조가 벌어지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
심판의 시작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은
즉 이스라엘이 선택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기 위함이였다 라는 거죠

주님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은 급하게 긴급하게 가차이 가까이 급히 이루어진다 라고
이미 다 이루어졌다 라고 선언하고 들어오는 겁니다

이것이 비존재 곧 기능으로써의 이스라엘이거든요

그런데 존재가 되어버린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 보다
자신의 계획을 펼치고 있는 겁니다
이래 이래 하면 구원 받을 것이다 라는 빵깨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더라 말이죠
하나님의 계획에는 관심이 처음부터 없었다 말이죠

왜 다윗이 꺽으신 뼈로 기뻐하고자
회개 눈물 기도 금식 이라는 4종 세트가 안 먹혀든 것을 알았을까요?

만약에 이것이 먹혀들게 되면
또 새언약이 미루어지고
또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 지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게 안 좋은 겁니까
그것이 좋잖아요

그래서 좋은 것은 선
나쁜 것은 악
선을 취하고 악은 버리는 그런 역사를 구성하겠다 라고
인간의 개인의 삶도 똑같이 이렇게 구성을 하겠다 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창세전에 계획이 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계획된 것은 딱 하나
십자가 뿐입니다 곧 꺽으신 뼈로만 기뻐하는 복음입니다
곧 하나님의 죽으심 이라는 하나님의 의만 계획이 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계획 곧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만들겠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는
시드기야와 같은 사고방식 
이 얼마나 선하냐 말이죠
가룟유다 또한 하나님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독립운동투사
이 얼마나 선하냐 말이죠

이 선악에 주님은 안 도와주시겠다 라고
그런 사적인 계획이 아니라

아이고 그것도 독립이가
자유케 하는 것이가

그렇게 독립해 버리면 또 상대적으로 사마리아를 치하게 둘려는
문자적으로 제사장 나라 으뜸 나라 될려고??

그래서 사적인 계획을 종말로써 밀어붙임으로써
시드기야와 차이나는 여고냐라는 어린아이 무능자 죽은자로 만들어서
포로 잡혀가도록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마귀가 본격적으로 본 모습을 드러내는 거죠
그러니 여고냐는 하나의 미끼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마귀에게 포로 잡혀 버린 겁니다

로마에게 포로 잡혔다 라고 독립운동 자유운동을 하자 라는 가룟유다의 선악과 비교도 안되는 포로 됨입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할꺼 아니겠습니까

겨우 일곱 번 용서로 주님의 계획을 거부하겠냐 말이죠
적어도 칠에 칠십번 용서라는 주님의 계획을 이 역사 속에서 밀어붙여야 할꺼 아니겠냐 말이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늘 선악법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다 보니
가룟유다가 더 나쁘다고 보는데
그것이 이미 결과가 나타나서 반박을 못하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베드로가 더 나쁜놈이다 말이죠
가룟유다에 대한 기록에는 장모도 고쳐주고 
물에 빠진 가룟유다를 건져주고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가 주님 시키신대로 다른 쪽으로 그물을 던지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았다는 이런 내용이 단 하나도 없어요
주님과 티격 태격 하는 실수도 하고 또 도움도 받고 하는 그런 모습이 아예 없어요
그저 딱 하나
은 30냥 받고 팔아버렸다 그거 하나 빡에 없다 라는 겁니다

다윗과 사울왕의 대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왕은 그저 자나깨나 애굽왕처럼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면 부국으로 만들고자
강국으로 만들고자 
이것이 백성들이 원하는 바 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백성들이 원하는 왕은 바로 처음부터 이방나라의 왕 제도를 따온 것이다 말이죠
출발 자체가 틀려먹었으니 뭘 해도 사울왕은 미움이요 진노이다는 겁니다

반면에 다윗은 이런 사울왕과 백성들이라는 배경을 깔고서
이스라엘을 밀어버리는 종말을 보여주는 자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물론 다윗은 역시나 사울왕처럼 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면 강국으로 만드느냐에 관심 뿐이다 말이죠
그래서 권고 즉 사생자가 아니다 라는 이유로 매를 맞아가면서
하나님의 계획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 다윗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참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치고 있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다윗이 아닌 말로만 다윗이라고 하지만
사울왕의 사고방식으로써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라고 외쳤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사울왕의 사고방식인 선악이였고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곧 이스라엘의 선생들이 다 그랬고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성화론자든 개혁주의자든 교회주의자든 다 이런 식이였다 라는 겁니다

곧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 라는 이런 사적인 계획을 가미 시켜서
어떻게 해서든 부자 되세요
잘믿고 잘사는 법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창세기 때 부타 일괄되게 어서 어서 이 땅을 부흥케 하소서 즉 멸망케 하소서 라는 계획을 밀어붙이시고 있습니다
이 부흥이라는 단어가 딱 한군데 나오는데 심판이라는 뜻인데 거꾸로 잘되게 해 달라고 말하는 거짓선지자의 주장 때문에
딱 하나 나오는 단어로 얼마나 사기를 치는지

그래 그렇다 치자 말이죠 겨우 부흥 겨우 7번 용서하는 삶이 되고자 부흥을 외쳤냐 말이죠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을 이 땅에 부어달라고 그것이 7에 70번 용서 라는 종말이자
잃어버림을 부어달라고 해야 할 것 아니겠냐 말이죠

곧 꺽으신 뼈로 기뻐해 달라고 더 큰 것을 구해야 할 것 아니겠냐 말이죠

죽어도 이 땅을 탈출 떠날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계획과 단 한번도 맞아떨어진 적이 없어요
주님은 자꾸 끝을 끌어와서

미완료 미흡함 아예 없애버리자 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 미완료라도 이 땅에서 잘 살수만 있으면 그냥 냅뚜자 라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의 인 완벽한 심판이자 완벽한 거룩인 일곱을 미리 앞당겨 누릴 생각 자체가 없어요

끝을 끌어와 당기는 것처럼 재수가 없다 저주가 없다 라는 식이니까

그런 선악 중에 악은 멀리 멀리 떨어뜨리자
그 대신 선은 가차이 가차이 곁에 가까이 둘게 
그카면 되는거 아니냐 라는 식입니다

왜 이 주님의 계획인
왜 이 땅을 멸망하시고자 하는 뜻과 안 맞을까요

네 맞아요 이 땅이 전부인 인간에게서의 발판은 이 땅 뿐이다 말이죠
천국? 하늘 ? 그것은 그냥 보험드는 것이고
이 땅이라는 삶의 터전이 날라가 버리면 발 디딜 곳이 없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 정도로 발 디딜 곳이 없다 라면
이 세상을 멸망해야 함이 마땅한 것 아닙니까

주님의 창조가 겨우 그것 밖에 안되는 겁니까

아니 생각을 해 보세요
인간은 자꾸 자기 신체 라는 몸을 기준으로 하다 보니
역사 곧 시간과 공간을 자기 신체 중심으로 세고 있어요

지금 서기 2021년 이고
그 전의 기원전을 2000년 그래서 대충 서양의 기독교 문화에서는 4천년이다 말이죠
물론 자신의 기능과 연관된 과학분야와 철학분야 등등에서는 다 달라요

그 속에 속해 있으니까 말이죠

자 이렇게 자기 신체 중심에서 시간을 재어보니 어 내가 2021년에 살고 있구나 라고 하겠지만
정작 성경은 처음부터 종말을 끌어와 버립니다
자 이렇게 되면 시간을 재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그저 편리성일 뿐인 형식이지
내용은 없는 겁니다 껍데기이다 말이죠
자 이렇게 몸이라는 공간을 내가 차지하고 있어서 그 공간을 중심으로 공간을 인식할 뿐이지
남극에 일반인이 한번 갈 일이 없는 입장에
우주에 한 번 로케트 타고 갈 일이 없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그 공간은 의미가 없어요
신경 쓸 것은 내 몸이라는 공간과 연관이 된 주변공간만 신경 쓰는 겁니다
코로나 땜에 거리 두기 라는 간극 이라는 공간을 의식하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남극에 가서 거리두기는 의미 없어요
사람이 있어야 뭐 하든지 말든지 하죠
우주에 가서?

자 그렇게 전혀 다른 공간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종말의 몸을 확 끌어와 버리면
시간을 재는 것도 공간을 파악하는 것도 다 무용지물이였고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잠시 활용했을 뿐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라는 예루살렘 땅이라는 공간과
새언약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해야 합니까
조상들이 선지자를 죽였던 그때로 돌아가게 되면 나는 절대로 조상처럼 안 죽일꺼다 라는
나의 선함만을 주장하면서 인식해야 할까요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그 시간대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 라고 주장하는 선악을 주장해야 할까요
아니면 돌아갈 필요가 없이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는

지난 주에

성전을 무너뜨리리라 라고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나의 시간인 삶 또는 역사 나의 추억과 기억들과 역사 등등과
나의 공간인 몸과 그 몸의 확장인 교회조직과 사회조직 더 나아가 국가 라는 신체 등등을
무너졌어야 한다고 외쳐야 할까요

구약의 참선지자 라는 인자의 외침은 곧 우리의 외침이 될 수 밖에 없어요

눈에 보이는 현실들은 가짜로써 지나가고 삭제되고 이전 것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새 것이 진짜로써 이미 떳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아니 새 것이
더 크고 큰 것이
더 나은 제사가 이미 떳는데

왜 옛것과 지나가는 것과 사라질 것과 이전의 것 삭제 될 것에 미련을 두냐 말이죠

예수님 이라는 새로움 몸이 떳다면
이 이전의 처음아담의 몸은 사라질 것으로써 삭제될 것으로써
의미 자체가 없다 말이죠

그런 사라질 몸을 성화해 보겠다 라고 아무리 거룩을 실천해 본들
그 거룩을 지킨다 라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 라고
그것 자체가 살인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아무리 소를 바치고
어린양을 바쳐도
살인이다 말이죠

내 마당만 밟는다 라고 왜 날 괴롭히냐 라고 눈을 가리고 귀를 가리시겠다 라고 하시잖아요
그 더러운 돈을 왜 바치냐 말이죠
주님은 받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인데
자기 목숨을 이미 다 줘 버렸다 말이죠

뭘 더 !!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냐 말이죠

네 맞아요 목사들은 야바이 꾼들 밖에 없어요
안 그렇다 라는 놈 나와보라 말이죠
조목 조목 박살을 내 줄테니 말이죠
거짓선지자 이다는 증거는 차고도 넘쳐요

이 땅에 미련을 둔 다는 자체가
주님의 계획과 안 맞다는 겁니다

다윗 언약을 통해서 새언약이 오고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공중분해가 되어서
하늘의 새이스라엘로 완성이 되어서 이미 끝났어요

완성 끝 빨래 끝

앞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 이렇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이스라엘 보세요
비존재가 아닌 존재
종말이 아닌 혈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움직이는 이스라엘을 보세요
계시는 하나도 없어요
다른 나라 중에 썩여 사는 별반 다를바 없는 나라일 뿐이다 말이죠
그 놈의 제사장 나라는 언제 될려고 아직도 저러고 있냐 말이죠
다들 돈 때문에 아직 성전에 바치는 금이 부족해서 덜 이루어지고 라고 합니다
이들은 영원히 미완료의 상태일 뿐입니다

이미 잃어버림이 된 이스라엘은 하늘에 완성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러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사라져도 상관이 없다 말이죠
왜 이미 주님의 몸 곧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이 되었기에

자 그러면 종말에는 예수님이 자신의 몸이라고 일방적으로 편파 사랑을 함에 있어서
마치 탕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돌아왔다고 버선발로 미리 상거

서로의 거리를 좁혀 버리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권고하심이 떠버리니까

정작 누가 누구를 미워 합니까

이 종말이라는 십자가의 피 용서
7에 70번의 용서를 확 끌어 미리 앞 당겨와 버리니까
누가 이 용서를 거부합니까

미워 하냐 말이죠

탕자 라는 종말의 증상물을
십자가의 피 용서의 증상을 누가 미워하는고 하니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 라는 선을 추구하고
탕자라는 악을 버리는 이 맏아들이
탕자 보다
때리는 놈 보다 말리는 놈이 더 밉다 라고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탕자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아버지의 사랑이 더 밉다 라고

이 기능 이 종말에 나타나야할 비존재라는 기능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먼저 시작이 되어야
즉 잃어버림이 시작이 되어야
왜? 예수님의 일방적인 편파사랑이 바로 잃어버림 이거든요
존재의 잃어버림은 어떤 무식한 장로처럼
자기가 스스로 죄인 되고자
은혜를 더 할려고 죄 짖는 식이고

그것은 독자적인 죄인되기이지 관계성이 아닙니다
의사를 말하기 위한 환자가 아니라

의사랑 무관하게 보험금 타 먹을려고 나일롱 환자가 되는
일부러 차에 부딧쳐서 자해 공갈로 보험금 타는

이게 무슨 의사와 연관이 됩니까
돈이랑 부자됨 높아짐 앗수르의 영광과 연관되어 있는 우상숭배이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를 말하기 위한 죄인이요 환자를 만드시는데
지가 지 스스로 죄인이 되니까

주님을 말하고자 하는 죄인이 아니라
나 죄인 맞제 라는 죄인이 지 잘났다를 말하기 위한 또 선악이라는 우상을 외치는 식이니 말이죠

바로 그런 자들로 인해
주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는 이 종말의 상황을 만들겠다 라는 식입니다

아 미움 받으면 아 종말이구나
내 목숨은 이미 주님의 손에 넘어갔구나
내가 더 이상 나를 챙기는 것은 이미 내 손에서 떠나간 문제이구나

그러니 생명도 목숨도 하나 하나씩 빼앗기는 것을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라는 노래처럼

나를 나에게서 떠나고 헤어지는 식으로 하나 하나씩 탈출하게 되면
더더욱 미움이 더 할꺼 아니겠냐 말이죠
간따나 미워 죽겠는데 아무런 기능도 못하는 무능한 자를
세상에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죽일 듯이 달려들죠

아버지의 탕자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에 대한 극한반발을 표하니까 말이죠

이게 종말입니다
시간도 아니요
공간도 아닙니다
사적인 시공간은 이미 날라가버렸어요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과 그에 대한 미움만이 펼쳐지도록
역사는 종말을 보여주는 무대 배경이요 스테이지일 뿐이고
그 시공간이라는 역사 위에서

계시 묵시 곧 종말은

미움과 사랑만이 펼쳐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정작 미움 받아야 하는 놈이 사랑받는 자를 미워하고 있고
미워할 권리 조차도 없는 주제에 말이죠

또 사랑받는 자는 모든 자들로부터 미움 받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누가 봐도 부자 라는 다들 부러워 하는 자가 상거지 이고
누가 봐도 거지 중에 거지인 다들 싫어하는 자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자 라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팔을 어긋맞게 전도
뒤바꿔치기를 하시는 겁니다
세상의 가치 판단을 뒤 바꾸는 전도 시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확 끌어오는 종말을 보여주는 자가
사랑받는 자로써 미움 받고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된 자가
이 사랑받는 자를 미워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 종말의 상황은 시간 이라는 종말때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가 아니라
나의 죽음을 끌어오게 되니
미움 받는 그 순간이 종말이다는 겁니다

2021년 2022년은 의미 없고요
시간이 아닌
사건 중심이 종말이니까
사실은 성경 전체가 종말사건이다는 거죠

창세기 보세요 종말 아닙니까
그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지금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말이죠
누구 말 마따나 시간은 안 흘러요
사건만 무한반복이 되는 겁니다

아벨이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미움 받아 죽게 되었으니
그 종말을 계속 펼치시겠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럼 누가 미쳐버리겠냐 말이죠
아무리 큰 성을 에녹성을 짖고
아무리 자식이 영웅 슈퍼맨 맨 맨 베트멘 원더우먼이 아무리 많아도
그 자체가 얼마나 불안 하면 영웅을 필요로 할까요

평준화 되는 불도져로 밀어버려서
울퉁불퉁 첩경을 깍고 움푹파인 골을 매꾸어 넣는
모조리 다 1층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자와 소가 벼짚을 먹고
이리와 양이 서로 장난치며
사막에 꽃이 피어나는

이 새언약이라는 주님의 계획을 인간들은 싫어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오로지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슈퍼맨 영웅을 주변에 깔아버리는
아니 자기 자식을 고아 과부 나그네 안 만들겠다 라고
잃어버린 자 되지 않겠다 라고 하는 것이 인간 부모이다 말이죠
수퍼맨이 자기를 잃어버리딥까요?
영화에서는 슈퍼맨이 심지아 죽었다가 부활하는 예수님까지 흉내를 내요
이것이 미국주의이거든요 미국의 청교도는 사이비입니다

오히려 수퍼맨 개인 자신 보다 주변에서 수퍼맨이 자기를 잃어버릴까봐
걱정하잖아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다 이래요
미신을 믿을려면 미신을 믿던가 카드를 소유하고 있으면 코로나 안 걸린다 라고 ㅋㅋㅋ
순땡음 답지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신도 한 다리 걸치고
딴나라당에도 한 다리 걸치고
우상숭배에도 한 다리 걸치고 
무슨 놈의 문어다리로 다 걸치고 있을 정도로 불안해서 말이죠
에녹성을 쌓는 겁니다
바벨탑이요 국가요
자아라는 우상을 쌓는 겁니다

그러니 장자 죽음을 놓고 충돌 하자는 식이 바로 종말입니다
출애굽때처럼

너의 아들 장자와
내 아들 장자와

누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지
이 종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밀어붙이시겠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애굽의 10가지 우상이 인간 장자를 보호하는 보디가드 방패막으로 작용해도
그 방패막이가 그 보디가드가 도리어 재앙꺼리로써 작용하듯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도록 누어서 침 뱉기가 되도록 말이죠

어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또렷하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이 심판주 이시고 그 심판을 하나님이 당하시는 이 죽음 앞에

이 또렷한 진짜 현실 앞에

이 새 것  앞에

어딜 감히 사라질 것
이전 것
삭제 될 것

남 7번 용서라를 그 쪼그만한 것으로

어딜 감히 크나큰 더 나은 것을 가릴려고 속여드느냐 말이죠
그런 의문의 반복인 미완료로 그런 흐릿하고 미완성의 것으로

또렷하고 명료하고 미래완료 미래까지 다 마침이 된 것을
가릴려고 달려드느냐 말이죠

이 완성을 다 이루셨다 라는 종말을 확 끌어당기는 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 바치셨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미움받고 죽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겁니다

이미 다 이루셨다 라는 십자가의 사랑이 떳기에
새 언약이 떳기에
이전의 것들이 발악을 하면서
새언약을 무효화 할려는 발악으로써 우리를 죽여본들

육체만 죽일 뿐이지
새 마음인 새 영을 죽일수가 없어요

주님이 이미 먼저 다시 사셨잖아요
이 하나님의 의를 무슨 수로 저들이 무효로 만들겠습니까

7에 70번의 용서는 이미 다 완료가 되어버렸는데
아무리 남을 7번 용서한 것으로

7에 70번이라는 종말의 용서
종말의 기도
종말의 헌금(과부의 헌금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는)
종말의 금식(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강도와 죄인의 친구)
등등을 그들이 막을 길이 없어요

미완료로 의문의 반복으로
미래완료를 무슨 수로 막냐 말이죠
이미 완료 되어버렸는데

그러니 이 종말을 기쁘게 확 끌어당기는 겁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우와 맞네 주님을 저들은 얼마나 미워하는 줄 알아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았음을
새록 새록 격도록 매일 매일 십자가의 사건이 터지도록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치 않는 자는 저주를 이미 받았기에 말이죠

주님은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라고
나 보다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라고 하셨다 말이죠

즉 인간은 자기 주변의 것을 자기 사랑을 위한 것으로 깔아버렸는데
그거 하나 하나 철거해 버림으로써 마치 애굽의 10가지 재앙처럼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나를 공격하는 것들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쫓겨나서 또 사울왕 때처럼 이스라엘 제일 끝에서 바깥에서 이스라엘 왕으로 세움을 받듯이
비로소 아들로부터 쫓겨남으로써 주님의 긍휼을 바라듯이)

하나 하나 떨어져나가고 최종적으로 나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나의 최종적인 공간인 역사물인 나의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심으로써
희미한 의문의 이전 것이 아닌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는 그 잃어버림 속에서도 또렷한 새것 곧
십자가의 피 용서에 감사하는 자로 만드심으로써

이 끝을 구체화 시키시는 겁니다
내 죽음은 죽음 축에도 못 들어서
욥이 피부병 고쳐달라고 하다가
주님의 죽음을 보고서
종말을 보고서
입을 자크 채우고 쟂더미를 머리에 뒤짚어 씌우고 머리를 쳐박고
생일을 저주 하면서 말이죠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기에
인간은 자기 사랑 밖에 모르는데
그 자기 사랑을 하나 하나 철거함에 있어서
그 잃어버림 속에서

주님의 또렷한 사랑인 십자가의 피 용서를 보고 놀라 자빠지도록 

허걱 거리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미움 받는 것은 미움 축에도 못 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나를 미워함이다 라는

이 종말
이 주님을 미워하는 이 십자가 사건을 종말을 또 끌어당긴다는 것임을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한 세트를 구성하는
마음이 강퍅한 완악한 애굽을 끌어와서
가장 높은 자 이잖아요
다들 저 사람은 구원을 따 놓은 당상일 것이라고 여기는 자를 끌어와서
신약으로 치면 부자청년이겠지요

낯설기 짝이 없는 구원

저 사람이 저 부자청년 유대인의 관원 선생이자 지도자가 구원 못 받으면
누가 구원을 받겠는가 라는 반응이 나와야만 하는 상황으로 만드시고

또 반대로 저 사람은 누가 봐도 지옥갈 자 이구나 라는 자를
너끈히 구원하시는
실로암 소경 곧 날 때부터 소경된자
곧 잃어버린자
고아 과부 나그네

이들에게만 희년이 되도록
기쁜소식이 되는

이 팔의 어긋남

누가 봐도 구원 될 자인 양은 염소로 
누가 봐도 지옥 갈 자인 염소는 양으로 만드시는

이 종말을 펼치시겠다 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리어 하나님의 발등상에 드러나는 원수의 자리에서
주의 오른손을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심판은 당연한 겁니다
뭘 해도 죄 밖에 없으니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피 흘려 죽기까지 복종하신
대신 매 맞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라는

이 또렷한 현실에 의해

의문의 것들은 다 지나가버리는 겁니다

뭐가 명료합니까

구원 받은 나 가 또렷합니까 그것은 우상입니다

나 란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만 또렷하고 나머지는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이미 사라진 자리에서 외치는 자가
종말을 외치는 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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