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 9-14)

주의 임하심의 징조와 세상 끝의 징조 (마 24, 3- 8)
마태복음 2018 2021. 2. 7. 08:45
18-120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 24, 3- 8)

〈마태복음 24: 9-14, 개역한글, 신약성경 41쪽, 찬송가 334장 아버지여 이 죄인을〉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9, 새번역)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줄 것이며, 너희를 죽일 것이다. 또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마 24:10, 새번역)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 ㉡또는 '믿음을 잃을 것이요'』
(마 24:11, 새번역)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마 24:12, 새번역)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마 24:13, 새번역)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마 24:14, 새번역)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 ㉢또는 '기쁜 소식'』


한번 앞의 글 에스겔을 연결해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시편 1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 1:4, 개역)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개역)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개역)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의 글 에스겔서 곧 애굽의 교만을 심판하심을 통해서
주님은 심판 속에서 구원을 펼치신다 라고 했습니다

아 그럼 애굽은 구원받은자 이다는 겁니까

하하하 아니올시다

왜냐하면 애굽은 이 심판을 견디지 못해요
잃어버림을 견디지 못해요

기여이 자아를 찾고자 말지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아 그럼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려야 하겠군요
하하하 그것도 교만이다 라고 했지요
자아를 잃어버리는 숙제 또한 자기가 한 것이니
도리어 더더욱 교만 더더욱 완악한 수건을 못 벗겠죠
자아를 잃어버리는 데 있어서 자아가 개입하게 되면 그게 잃어버린 겁니까
안 잃어버린 겁니까
자기가 자기를 죽은자로 만들겠다 라고 하는 것이 죽은자 입니까 아니면 교만한자 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숙제로써 개입이 등장하는 겁니다
즉 이름 갈기입니다
새 이름으로 말이죠
기존의 이름은 지나가는 거죠 
인간의 손에서 떠난 문제인 거죠

그러니 여호와의 불 이라는 하나님의 심판 곧 종말을 끌어오는 성령으로 인해서
심판을 당하는 자는 축복 받은자 라고 했습니다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말이 바로 샬롬 이라는 뜻이거든요
아니 당신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었군요
왜? 그 사람이 구원 받은 자 라서
아니지요
억수로 봐 주신 분이 안타죽도록 배려를 했다 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숙제였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반대로 그럼 의인은 심판을 견딜까요
못 견뎌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 의인이 바로 예수님 단 한 분이시기에
이 분만이 견뎠지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놈 치고 심판을 견디는 자 못 봤어요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놈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의인을 만들어 내시는데 있어서
그 주님이 숙제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그 결과물 증상물 생산물이 바로

죄인이다는 겁니다

아니 의인을 만들어 낸다면서요
네 맞아요

아 그런데 죄인을 왜 생산물로 만든다고 하나요
바로 그 죄인은 의사와 하나가 된 죄인입니다

의인은 딱 한분 예수님 뿐이고 뿐이고 ~~~~~~ 뿐이고 ~~~~~

그 의인에게 접붙임 당한 자가 바로
의인이신 예수님이 죄인에게 자신의 의를 부어서
하나가 된 자가 바로 죄인
의사에게는 환자 로써 한 몸
구원자 에게는 죄인으로써 한 몸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인 개념도
죄인 개념도
너는 죄인 아니지 나는 죄인이냐 라는 그런 교만 조차도
사실은 한 몸이 아니라
하나가 되고자 함이 아니라

따로 국밥처럼
애굽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높이고자 대접받고자 함이다는 겁니다
자아가 사라진게 아니라
오히려 더 또렷한 거죠

오늘 본문에 바로 그런 심판을 견디는 자가 복 됨에 있어서
심판을 견디는 자는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심판을 견뎠다 라고 편파판정을 해버리시는
이 십자가 라는 스캔들을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선악을 추구하는 자들에게서는
오히려 이것이 불공평이요 부정함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또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주여 안 됩니다 십자가 절대로 지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당하시면 안됩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절대로 저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정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면 저도 같이 따라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앞의 글 에스겔에서 다룬 교만입니다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겁니다
곧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지극히 선함을 추구하는 것인데 말이죠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고 있는데 ~~~~

반대로 오늘 본문 심판을 견디는 자는 뭔고 하니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을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함으로 인해서
마귀에게 포로 잡혀가서 고소장을 내밀었으나 나 결제서류에 싸인 하지 않았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눅 22:31, 현대어) 『[베드로의 장담;마26:31-35,막14:27-31.요13:36-38]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이 까부르려 하고 있다.』
(눅 22:32, 현대어) 『그러나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내가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깨닫고 돌이킨 후에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주어라.'』

(눅 22:31, 새번역)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 ㉫또는 '너희를 체질할 허락을 이미 받았다'』
(눅 22:32, 새번역)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눅 22:31, 공동)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너희를 제멋대로 다루게 되었다.』
(눅 22:32, 공동)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

(눅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청구 라는 이 법적 용어처럼 더 선악의 법적인 표현이 있나 싶어서 다른 번역을 보니
오히려 청구 보다 더 못하네요 ㅋㅋㅋ

고소장 상소문 또 뭐 있죠 바울서신에서 나온 용어가 있는데
아 맞다 송사 ~~~~ 소송


이 지극이 당연한 무조건 이기는 재판에
예수님은 부조리를 펼치시는 겁니다
내가 그 심판 내가 받으마 라고 말이죠

이것이 더 나은 제사이자
심판을 견디는 겁니다

아니잖습니까 베드로가 심판을 견디는 것이 없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심판은 정작 예수님이 받아요
대신 ~~~~~~~~~

거기에다가 믿음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 하셨다 말이죠

네 맞아요 선악의 법 보다 더 부조리한 사랑의 법입니다

자 그럼 악인은 심판을 견디질 못하며

지난 주에 악인은 어두운 밤을 못 통과 한다고 했습니다
배고픔을 채우지 못해서 하이에나처럼 울부짖느다 라고 했어요
뱃 속에 지옥이 빵구멍처럼 뻥 뚫혀져 있어서
아무리 찹아먹고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서
배고파서 웁니다

자 간따나 이 심판을 견디질 못하는데
그 코 앞에서
베드로를 용서를 하질 않나
피 옷으로 정결케 하질 않나
더 기가 막힌 것은 베드로는 자기 신부로 교회 삼아 버린다 라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 보란 듯이
마귀 보란 듯이

간따나 심판을 견디지 못해서 배고파서 울부짖는데
눈 앞에서 베드로랑 한 몸을 이루는 하나가 되어버리니

즉 앞의 글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못 쳐다 보는 것이 죽음이요 심판이다 라고 했잖아요

결국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죽음 이다는 겁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생명이 아닌 것 곧 죽음이다는 거죠

고로 누구든지 주를 사랑치 않는 자는 저주를 이미 받은 겁니다

심판을 견디지 못할뿐더러 심판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 구원이란 뭐냐 심판 속에서의 구원으로써
노아 방주가 물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냈듯이
이제는 불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율법 외에 한 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나타난 겁니다

그 외에는 울리는 꽹과리 곧 에디오피아 무기 달그닥 흔들리면서 서로 부딧히는 무기소리 이다 말이죠 저도 땡크부대에 있어봐서 아는데
옆에 탱크 지나가면 이빨이고 뭐고 다 흔들려요 온 몸이 다 덜덜덜 흔들립니다
귀를 막지 않으면 오랫동안 귀에서 삐소리가 계속 납니다

바로 이렇게 사랑이 아니면 모조리 다 죽음 뿐이다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심판을 견뎌서 의인이 아니라
사실상 심판을 누가 대신 맞아버린 겁니다
이 부조리가
이 스캔들이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배려요 사랑입니다
안 그러면 또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너 죄 지을줄 모르지 난 죄 지을줄 알어 라는 자기 자랑 높아짐 교만을 완악한 수건을 안 벗을려고 해요

누가 대신 대리 시험치고 누가 대신 합격해 주고 누가 대신
심판을 대신 받음으로 인해서
심판을 통과 했다 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이 바로
심판을 견뎠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가 되실려고 맨발로 탕자를 급격하게 가깝게 속히 신속하게 한 몸 되시고자 가차이 급하게 다가오심입니다

그 탕자가 바로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써
신속하게 하루 만에 세워진 제사장 그것도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라는 겁니다
죄 없으신 분이 직접 세운 나라

하나님과 한 분이 되신 분이
하나님이 직접 고통 없이 낳으신 아들로써 죄 없으신 분으로써
죄 없는 나라를 신속하게 세웠다 라는
그것이 탕자 이다는 거죠

너 심판을 견뎠어

아니 저는 심판을 견딘적이 없는데요
그래 맞아 내가 대신 심판 받았어

무시험 합격 땅땅땅

우와 탕자와 왕같은제사장거룩한나라그의소유된아름다운백성이 무슨 수로 연결이 됩니까
선악에서는 연결이 안 됩니다
오히려 단절 이다 말이죠
이 단절을 세상은 선악을 가르칠수 없어요 교육이 안 됩니다

어떻게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나요
더 나은 제사 이냐 말이죠
이 부조리를 세상은 선악은 후대에게 교육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분명 구약에서는 애굽왕 바로왕이 무서워서 도망쳤다 라고 해 놓고서는
신약 히브리서에서는 애굽왕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라고
대 놓고서 거짓말을 합니다
과연 거짓말 맞을까요
선악에서는 거짓말 맞아요
그럼 교육이 안 됩니다
믿음장 11장은 그야말로 믿음이란 교육 자체가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곧 인간의 믿음은 선악이니까 사기치는 것이고요
진짜로 심판을 견딜려고 해요 글쎄

오늘 본문의 제목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으로써 심판을 도저히 못 견딘다는 것을 알기에
대신 심판 받으심으로써
그 심판에 참예케 하시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심판 받았으나 다시 구원하시는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시는 이 하나님의 의
거룩
하나님의 뜻을 담는 그릇으로써 사용하심으로 인해서
넌 심판을 견뎠구나 라고 편파해석 편파판정
무시험 합격이라는 부조리를 펼치시는 것이 바로
사랑 이다는 겁니다

이 사랑 보다 부조리한게 없어요

어떻게 죄인과 하나가 되시고자 죄가 되어버리셨냐 말이죠

하늘 영광 다 버리고 말이죠
정작 바리새인이나
애굽이나
패역한 백성 이스라엘이나 자꾸 하늘 영광
솔로몬의 영광
모세의 자리를 추구하는데

왜 황무지 라는 죽음의 땅 사막 가운데서
생명수를 꽃을
백합화를 피우시느냐 라는 겁니다

관계 곧 하나가 되시고자 하심 이라는 사랑은
지옥에서 생명을 꽃 피우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천국에서 죽음을 펼치는 것이 낫습니까

십자가라는 생명은 어디에서 꽃 피우셨나요

내일 아궁이에 던질 이 들풀도 주님은 귀히 보신다 라고 했습니다

아니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이라면 아무도 거들또 안 보는게 정상 아니냐 말이죠

그래 아무도 거들또 안 보는 것을 알기는 아냐 말이죠 그게 너희들이다 라는 겁니다
모조리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 신세인 주제에

뭐가 옳고 뭐가 틀린지도 모르면서 판단하고 있다는 자체가
아궁이에 던질 들풀처럼 아무도 거들또 안 보는 무시꺼리 죽은자 아니냐 말이죠

그 죽음에 왜 예수님이 뛰어드시느냐 라는 겁니다
아무도 안 보는데
다들 무시하는데
거들또 안 보는데
다들 고개를 돌리는 싫어버린바 된 것에 아니 왜 ~~~~~~~~~

왜 이렇게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에 왜 이렇게 충성하시는 겁니까
이 아무것도 아닌 죽음에 왜 충성하냐 말이죠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물론 당연하고 다 인정 합니다
아닙니다 모든 인간을 다 죽이십니다
자 여기서 인간은 반발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확대 되다가 마치 남을 7번 용서하듯이 개인이 말이죠
그리고 집단적으로는 한 나라가 세워지기 까지 개인이 남 용서 7번 하듯이
얼마나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확대를 시켜야 겨우 겨우 한 개의 나라를 세우겠냐 말이죠

그렇게 확대 확장 되다가 죽으면 불만이 없는데
태어나자 마자 죽임을 당해 버리면
이것 보다 얼마나 억울한게 어디 있겠냐 말이죠

그 정도로 인간이 자기 뜻 하나 펼쳐보지 못하고 죽도록 하시는 것은
주님의 뜻이 그 정도로 충실하게 주님의 계획대로 펼쳐지고 있다 라는 겁니다

잘났던 못났던 늙던 어리든 평준화로 공평하게 죽이시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반발성은 처음부터 인간이 가진 속성이였고
신앙 곧 믿음은 이 속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네 맞아요 인간의 믿음은 오히려 감출려고 하지요 곧 종교성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믿음은 바로 이런 인간의 반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회개하는 영을 부어주심으로 인해서 회개하는 사람으로 태어나시도록 하시는 거죠

인간은 늘 왜 하나님은 나를 삭제하고 없앨려고 하시느냐에 대한 반발성을 늘 품어 있기에
그것을 들추어냄을 당하는 것이 믿음이 인간을 대상하고 일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안 들통날려고 반대로 내가 믿어주마 라고 거꾸로 내가 믿음을 대상물로 삼아서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성령님이든 부처님이든 뭐든지 믿고야 말겠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바로 이 회개 문제를 다룬 것이 바로 욥기 아니겠습니까

회개의 영으로부터 곧 성령이지요
들통 당하지 않은 욥의 세 친구는 어서 어서 욥에게 회개 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딱 맞습니다 욥을 괴롭히는
욥을 고난 속으로 몰고가는 자들입니다
마귀들이지요
괜히 세명이겠습니까 확증적이다 피 할수 없는 땅땅땅 마귀의 세가지 시험처럼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이들의 괴롭힘과 핍박을 말이죠

냉정하게 주님은 욥을 이 심판 이 고난을 거치도록 하시는 겁니다
마귀를 거쳐봐야 나 또한 마귀이며 
욥 또한 마귀인 것을 알테니까요 
즉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마귀와(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심판을 퍼붓고-하나님도 아닌 주제에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네 맞아요 선악이지요)
차이나시는 예수님의 죽음(정작 예수님은 심판 주로써 주께서 내 주께 도리어 심판 당하시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죄인 보다 더 나은 죄가 되셔서 대신 심판받으시는 그 사랑을 보고
머리를 쳐박고 생일을 저주하면서 잿더미를 머리에 뿌리고 탄식하면서 우는 겁니다)을 보고서 비로소 알게 하시는 겁니다.

결국 마귀에게 속한자인 선악의 주장은
회개를 어떻게 주장하는고 하니
내가 회개 해서 회개를 대상물로 삼아서 회개해야 한다는 겁니다
회개도 나의 숙제가 된 거죠

그러나 욥은 주장합니다
회개는 나의 대상물이 아니라 내 숙제가 아니라
주님의 숙제로써 내가 회개의 대상물이다 라고 말이죠

왜 나는 죽어 마땅한 자 인가
심판 받아 마땅한 자 인가 라는 것을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모든 것이 다 날라가고 떨어져 (나를 기준으로 해서 멀어져 나가는) 나가 다 탈탈탈 털렸을때에
심지어 나에게 붙은 그 죽음 마저도 떨어져 나갔을때에
누가 먼저 대신 죽었느냐 라는 겁니다
그 앞에서 내 죽음은 죽음도 아님을 알게하시고자
죽이시는 겁니다

왜 이렇게 신은 나를 없앨려고 그렇게 극성스럽게 난리를 치시느냐
케보이 

케 보이(Che Vuoi)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뭡니까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야 뭘 하든지 말든지 할꺼 아니오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태생적으로 우리는 나를 죽이시고자 하시는 주님에 반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보세요 이삭을 죽이고자 할 때 반발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동안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들통 당하지 않았냐 말이죠
그래서 웁니다 내 때문에 너 이삭아 죽어야 하는 구나
왜? 나는 뭘 해도 하나님을 비웃었거든

바로 그 비웃음을 받고 더블로 가시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
내 속에 부정함을 들추어내시고 그 부정을 부정하는
웃음이 덮쳐지는 겁니다

이 남겨둔 씨가 아니였다면 벌써 소돔과 고모라 였던 겁니다
내 숙제의 유무에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가 되는게 아니라
남겨둔 씨에 의해서 소돔과 고모라 로 결정이 되는 겁니다


이 불쌍히 여겨주심 밖에 없다 라는 거죠
그래서 웁니다

그 여자는 웁니다
얼마나 얼마나 더 ~~~~~~~~ 7에 70번 용서를 받아야 할 정도로
죄인이기에 환자 이기에
얼마나 불가능 하면 사도바울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달인이며 행함의 달인이였던 자가

얼마나 불가능 한 것을 알았는지
아 사망의 몸에 갇혔구나
포로 되었구나

이것이 사실은 앞의 글에서 이스라엘의 어원을 언급했듯이
야곱이 축복받은자 이다 라고
다 탈탈탈 털렸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자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축복받은자 라고
종말이 덮쳐짐으로써 비로소 아는 겁니다
회개의 영이 덮쳐짐으로써 말이죠

얼마나 그 동안 안 질려고 어떻게 해서든 이겨먹을려고
그래서 습득한 모든 재산 등등 마누라 까지 다 자식 까지 다 탈탈탈
왜? 그게 축복이 아니거든요


욥이 탈탈탈 다 털리는 이유는 마귀의 사고방식을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곧 우리의 사고방식이거든요
바로 세친구가 딱 달라 붙어서 껌딱지처럼 회개 하라고 추궁하잖아요

이미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이 이미 떳는데
새언약이 떳는데 계속 이전의 것으로 추궁하는 겁니다

욥은 심지어 자신의 신체가 병이 들어서 죽음까지 가는 상황에서도
주님이 그 죽음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이스라엘이요
욥이요
베드로 곧 교회 새 이스라엘
새나라 
왕같은 제사장 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아름다운 백성인
탕자 이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알게 하시는 겁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들은 뭐든지 나를 더 강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외에는 두려워 할 것이 없는 겁니다
주님이 사탄의 가시를 푹 찌른 이유입니다
사도바울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주님이 떠 먹여주지 않는 이상
스스로 회개 하는 개인의 사적인 회개는 주님은 안 받습니다
도리어 죄인 중의 괴수
만드시는 겁니다 매일 매일 피 바르시고
매일 매일 남겨두신 한 씨 덕분에 포로됨에서 구출하시는 겁니다

구원 그 이후란 없어요
매일 매일 하나가 되시고자
매일 매일 구원을 펼치시니까요

시간개념 공간개념이 생겨버리면
존재를 따지고
존재는 늘 자아의 확장만을 꿈꾸는 겁니다
남 7번 용서했다는 둥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늘 선악을 따집니다
세 번 금식하는 놈 나타나면 졸지에 또 악이 되어버리니까
네 번 금식을 못하면 선이 못된다 라고

그러니 한번 금식하는 놈들을 정죄하기 바쁘죠
일단은 두 번 금식해서 높아졌으니까 말이죠
이게 성화론 아닙니까
하여튼 마귀들이 교회를 다 장악했어요
이런 짓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이런 악인이 과연 심판을 견딜까요
이런 악인들에게는 남 7번 용서가 심판으로 안 보일껍니다
왜 언제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길테니까 말이죠
가능성이다 말이죠

이들에게 심판은 불가능성 곧
탕자를 자기들 코 앞에서 용서하시는 겁니다
도저히 못 견뎌요

마귀 보란 듯이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겁니다 7에 70번 용서를 하시는 겁니다

네 맞아요 남 7번 용서는 가능하지만
7에 70번 용서는
더 큰 것은 자기들 손에서 떠난 문제임을 알기에
이 심판을 견디질 못해 합니다

그 동안 얼마나 무시했었는데 그 무시의 자리에
그 동안 얼마나 심판하고 정죄했었는데 그 정죄의 자리에 그 심판의 자리에
자신을 그 자리에 놓고자 하겠냐 말이죠
자기를 잃어버림 당하게 될텐데 말이죠

율법을 쥐고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자리에
율법을 놓고서 그 자리에 자신을 누가 놓겠습니까
성화론자들 중에 그런놈 단 한놈도 본적이 없어요
그저 남 7번 용서도 모잘라서 더 할려고하고
그런 자기를 알아달라고 그런 자기를 배우라고 자꾸 가르쳐들려고 해요
실컷 그래놓고서는 결론은 돈 돈 돈 돈 내라 라는 겁니다
자본주의를 괜히 깔아놓은 것이 아니거든요
나 자본주의 못 벗어났다 라고 대놓고 티내요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지
그래 그렇게 그런 자기한테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다
아 그런데 돈을 안 내어놓으니까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요

제발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 기도하라 라꼬 돈 내라 라는 말이거든요

정작 성전의 의미를 날라가 버리고 말이죠 움직이는 성전인 예수님은 날라가고
예수를 알려주고 가르쳐줬으니까 돈 내라 라꼬

안 그러는 목사가 없어요
얼마나 마귀가 씌였으면 그 화 풀이를 그 밑의 밥풀떼기 하수 장로에게 했으면
그 장로들은 그 스트레스를 또 밑엤놈 에게 하고 그 밑엤놈은 또 밑엤놈
이것이 카스트 제도의 성화론 아닙니까

다들 목사 눈치만 보고 있어요 어이구 마귀들

인간의 행함은 곧 믿음은 살인의지 라는 한풀이입니다
반작용이다 말이죠

반작용을 말한 놈 니체 또한 한풀이 이더라 말이죠
지가 말해 놓고서도 자기가 그 한풀이에서 못 벗어나요
그래서 정신병걸려 죽는 겁니다

최종적인 경쟁 대상자가 예수가 되었으니까
자기가 예수 라꼬

마지막 때에 반드시 등장해야할 인물이거든요

현대인은 모두 저 도 마찬가지 이고요 바로 니체의 후예들이니까

이 사망의 몸에서 무슨 수로 건짐을 받을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피 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욥이 심판을 견뎌내었다고 무시험 합격이라는 부조리로 탄생한 새나라 새민족입니다
이 얼마나 부조리 하고 불의한 탄생입니까
남들은 차곡차곡 정성으로 쌓아서 40년 수 천년 동안 나라를 건설하고
성전을 46년 동안 쌓았는데
뭐 성전을 3일 만에 짖는다꼬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짖는 자여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시지
라고 죽음을 비웃는 겁니다
네 비웃어야 그 다음 차례 니 차례 이다 라고
산자의 하나님의 성전이 먼저 떳고
그 증상으로 인간의 모든 성전 곧 인간의 모든 신체의 죽음은 정당화 되는 겁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죽은자는 정작 살아나고)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어른이다 라고 하는 자는 이 주의 성실하심 곧 모든 인간을 죽이시는 그 어두운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고 배고파 죽겠다고 밤새도록 울부짖기만 할 뿐입니다 (살겠디고 그렇게 살인을 거짓제사로 아무리 해도 배고픔이 채워지지 않는 겁니다 의문의 반복이다 말이죠 살고자 하는 자는 정작 죽은 거다 말이죠)(시 59:14, 개역)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시 59:15, 개역)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시 59:16, 개역)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7, 개역)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5, 새번역)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배를 채우지 못하면, 밤새도록 으르렁거립니다.』
(시 59:15, 공동)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빈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울어댑니다.』

(시 59:14, 현대어) 『원수들이 어스름한 저녁때 돌아와서는 개처럼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성읍을 어슬렁댑니다.』
(시 59:15, 현대어) 『주린 배를 끌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으르렁거리는 개처럼 밤을 지새웁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말이지요 진노의 그릇을 부지런히 빚으시는 겁니다
토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으냐 라고 힐문하고 따질 수밖에 없도록 말이죠

이것이 토기장이에게 반발하는 육체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거죠

겨우 남을 7번 용서하는 한계가 주님으로부터 들통납니다
어떤 주님 ?
7에 70번 용서하시는 그 주님 앞에서 말이죠

그럼 회개란 바로 남을 7번 용서 하는 것이 아니라
7에 70번의 용서를 받는 겁니다

야곱은 야곱 속이는자 답게 모든 속성이 다 들통나야 합니다
속이는 그 속성대로 축복권을 따놓았다 라는 구원권을 따 놓았다는 것
그거 다 탈탈탈 털리는 축복을 받게 된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는 자가 축복받은자가 아니라 그건 저주 받은 자 이고
겨우 7번 밖에 못 되는 자신의 한계를 들추어내시는
7에 70번의 용서를 통해서
진정한 축복 받은 자요
회개하는 자로 태어났음을 누리는 겁니다

단번에 한 번의 제사로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에 감사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를 다음글 이사야에서 새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삼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마지막때에 끝까지 견디는 자가 출현했다 라는 것은
그 사람이 전도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주님의 전도를 하신 결과물로서
원인 없는 결과로
누구처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다윗이 용서를 받았다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했듯이
행복이란 구원이란 수치를 가려워짐을 당한자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이 다윗 언약인 새언약을 기초로 해서
하늘에 다 이룬 새이스라엘이 떳다는 이유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해체 하시는 겁니다

더 큰 것이 이미 떳기에 말이죠

종말의 사람이 출현하는 겁니다 인자 가 말이죠

여기에 이 인자와 입맞추지 못하는 자는 거짓선지자로써
눈에 보이는 교회
눈에 보이는 국가
눈에 보이는 성전
눈에 보이는 자신의 신체에

그 의문의 반복만을 하는 남 7번 용서를 어느세월에 하겠느냐 말이죠
그 육체의 한계를 들추어내시면서

주님 쪽에서 다 이루신
단번에
삼일만에 세우신 참성전으로써
7에 70번 용서로써

이 종말을 외치라고 이 새것을 외치라고
육체는 날로 날로 한게를 부패를
영은 날로 날로 새로움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이 영의 사람
이 모든 것을 견디는 자는
주님의 전도로
주님이 믿음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심으로 인해서
뭐든지 예 가 되시고 아니오 함이 없도록 하신
주님의 죄 없으심을
우리에게 덮어 씌우시고자

새약속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이룬 결과물
원인 없는 결과로써
급작스럽게 나타난 자로써
주님 자신의 계획대로 밀어붙이시는 겁니다
이 종말을 구하는 자가 바로 영의 사람입니다

더 큰 것을 구하는 자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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