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6 노아의 때와 똑같은 인자의 때 (마 24,37-42)

오직 아버지만 아시고 아무도 모르는 그 날이 이제 속히오리라 (마 24,32-36)
마태복음 2018 2021. 3. 13. 17:16
18-125 오직 아버지만 아시고 아무도 모르는 그 날이 이제 속히오리라 (마 24,32-36)

〈마태복음 24:37-42, 개역한글, 신약성경 42쪽, 찬송가 260장 새벽부터 우리〉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마 24:37, 새번역)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마 24:38, 새번역)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마 24:39, 새번역)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마 24:40, 새번역)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마 24:41, 새번역)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마 24:42, 새번역)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시각에'』


앞의 글 에스겔 33장을 통해서 살펴봤듯이
인간은 성경을 보더라도 자기 멋대로 곧 임의로 그때 그때 다르게 해석하게 됩니다
즉 해석 자체를 손 놓는 해석포기 자체가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해석 당하기는커녕 한 선지자 라는 제3의 인물 또한 자신들의 평가로 인해
가부(옳고 그름)를 따지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자기 중심으로부터 출발이 되는 거죠

아니 누가 제 3자인 한 선지자로부터 평가 당하기를 바라겠냐 말이죠
차라리 편안하기 짝이 없는 내가 그 3의 인물인 한 선지자를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모든 인간의 속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조건 틀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 쪽에서 출발 했다는 자체가 이미 틀린 겁니다

처음 출발 자체가 말이죠
그 다음 그 3의 인물인 한 선지자가 말하는 내용과
즉 내용물인 거죠
내가 평상시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든지
사랑에 대한 생각
평강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것이 단 하나도 맞는 것이 1도 없다는 것이
그 3의 인물로 인해서
한 선지자로 인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불편하기 짝이 없게 되는 거죠

그 불편성 곧 거리끼는 걸림돌

특히 마태복음이니까
유대인에게서는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목에 탁 걸려서
넘기지도 못하고 뱉어지지도 않는 너무 너무 불편하게 하는 것을
시원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곧 해석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해 버리는 방식은
네 맞아요 해석 곧 신앙은 모조리
모든 인간의 믿음은 살인이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 선지자는 이것을 이 살인의지를 캐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사랑이다는 거죠
가짜사랑보다 편한게 없어요
우리의 살인의지를 감추고 감추도록 도와주니까 말이죠

언제든지 이런 질서에 배신을 하면 나는 너를 죽여버리겠다 라는 것이
이미 바탕 기본 베이직 프로그램으로 깔려 있는 겁니다
이것이 선악이다 라는 거죠

자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임의적으로 자기 멋대로 대충 대충 심상히
아따 심상 이라는 단어 하나 잡았다고 무지 써먹네요
심상히 해석합니다

이 임의적이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데

(요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령이 임의로 활동한다
마치 바람이 임의로 자기멋대로 불 듯이 말이죠
어디서 소리가 나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죠 알지 못한다 라고

자 그렇기에
인간은 성령을 임의로 마음대로 조작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조작 한다고 해서
누가 증명을 할 수가 있겠냐 말이죠
보이기를 합니까
만져지기를 합니까
증거물로 채택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 성령이 임의적이다 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인간도 임의적임을 까발리는데 있어서

임의 보다 더 임의적이다 라는 거죠
인간 자기 멋대로 보다 성령이 더 나은 임의 자기 멋대로 이다 라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인 거죠

자 그럼 한 선지자의 내용이
우리 모든 인간의 자기 멋대로 자기 유익을 쫓는 우상화 된 성경해석을 까발리는데 있어서
임의 보다 더 나은 임의로 작용을 해야
인간의 본색인 선악 곧 살인의지가 튀어나올꺼 아니겠냐 말이죠

그 살인의지가 튀어나올때에 누가 감사하겠느냐 라는 겁니다
도리어 자기를 살해해 버리는 가룟유다나
아니면 남을 살해한 곧 제 3의 인물 한 선지자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타인 살해 왜? 타인은 지옥이니까
이웃은 천국이니까 그러니 이웃설정이 아니면 인간은 못 살아요 자기편을 못 만들면 말이죠
그 제 3의 인물을 죽이는 것도 모잘라서
사도바울은 예수쟁이 이단들 다 죽이겠다 라는
자기 열심 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자기유익을 쫓았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지혜 곧 사랑 곧 원수를 사랑하는
십자가의 지혜를 거부했다
지혜문서에서 지식 곧 지혜란 한 인물이다는 겁니다
바로 한 인물로 왔다 라는 것이
마치 마귀가 호시탐탐 하나님의 보좌를 노리듯이
인간으로 왔다 라는 것을 노리듯이
같은 인간으로써 같은 동질성에서 안 죽이고는 못 배기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쌍둥이 곧 인간으로 오시는 한 인물 이어야 한다는 거죠
안 그러면 들통나지 않아요
이 참사랑에 누가 복종하겠습니까 도리어 죽이지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이란 선을 나타내고 악은 감추거든요
그런데 그 감춘 악과 하나가 되고자 한 인물 한 인간으로 와버렸으니
왜 내가 감춘 죄악을 니가 뭔데 하나가 되고자 왔느냐 라고 나올때에
선악은 이 한 선지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이 안보이는 죄악의 깊이를 깊이 도려내시고자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고자 깊이 파고들어오시거든요
누가 영접하겠습니까 아무도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시러 온 
메스(수술칼-검을 주러 왔다) 들고 온 의사를 환영하지 않는 겁니다
도리어 칼 들고 왔으니 더 더 더 싫어버린바 될 수 밖에 없는 거죠
상처는 당신을 찌른 그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주님이 마귀를 통해서 우리를 선악으로 다 찌른후에
다시 십자가의 저주로 인해서 그 저주를 대신 감당하심에 있어서
그 죽음은 죽음 축에도 못든다 라고 제대로 된 저주를 보라 라고
십자가로 다 이루는 사망권세를 이기시더라 말이죠
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더라 라는 겁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임의로, 심상히 
저 마다의 율법을 사적으로 복종하겠다 라고 열심 이였던 것이 
도리어 불복종이였다는 거죠
순종이 제사 보다 나은데
제사 라는 그 의문에 가로막혀 버린 겁니다

바로 이런 인간이 무슨 놈의 세상을 변화 시킨다 라고
남을 7번 백날 해 보세요 세상이 꿈쩍하나
40년 동안 해 본들 겨우 7번으로 세상이 안 바뀝니다

도리어 그런 세상에 휘말려 가는 것이다 말이죠

제가 마침 한참 부흥기의 절정였던 90년도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말이죠
나이도 딱 20대
그 한국교회의 가장 절정기의 점정을 딱 찍자 마자(시공간이라는 환경 자체가 말이죠)
바로 추락을 하는데
지금 보세요 어떤가?
가장 밑바닥을 대놓고서 노골적으로 보여주잖아요

총땡은 용역 깡패를 불러서 신학생 데모 시위를 막지를 않나
결국 돈 문제로 벌어진 사태이거든요 돈이 곧 정치가 되니까
마귀의 세가지 시험은 연결된 겁니다
경제 종교 정치
돈이 인간의 주인이 된 이상 못 벗어난다 말이죠
경제 종교 정치에서 자유로운자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경제는 돈 종교는 아무리 무신론자 라고 해도 자기를 위한 우상에서 못 벗어나요
정치는 바로 자기의 의 쌓기 이거든요
이웃사랑실천을 할려면 이웃을 설정해야 한다 말이죠
자기 편을 못 만들면 불안해서 미쳐요
그 불안이 어디서 옵니까
사랑이 없어서 울리는 꽹과리 달가닥 거리는 무기를 잡는 겁니다
주변인을 자신을 보호하는 보디가드로 삼아요
마치 애굽의 10가지 신이(나중에 이것이 10가지 재앙으로 변하지만)
애굽의 장자를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똘마니 였듯이
이것이 국가 라는 짐승의 내막이다 라는 겁니다
종교 라는 음녀는 이 국가 라는 짐승에 빌어붙어 살고요

이 마귀의 세가지 시험 곧 경제 종교 정치에서 못 벗어나는 주제에
뭘 해석하고 
뭘 세상을 바꾸겠다 라고
그런 사고방식을 깨뜨리시는 자가 바로 한 선지자로써 오신 분이다 라는 겁니다

이 제 3자의 등장 자체가
인간은 저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 잠식되어 있는 이상
자기로 출발하는 자기 중심의 해석에 있어서
한 선지자의 등장 자체는
무시꺼리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이미 나 자체가 저 3의 인물을 무시하고자 이미 장착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다가 한 선지자 본인 자체도
아이고 그것도 무시냐 더 더 더 무시해 봐라 라는 식으로
무시 받고자 아예 대 놓고서
나의 그 어떤 접촉점도 없겠끔하겠다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깐따나 화나는데 더 화를 돋구겠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불난 집에 휘발유 뿌리시겠다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

나의 악마성에 아이고 그것도 악마성이냐 이 정도쯤인 되어야지 헤헤헤헤 못생긴 옥동자처럼

못 생겼다 에 강조점이 있는 거죠
싫어버린 바 된 옥동자로 오시더라 말이죠

아이고 그것도 임의냐 임의 축에도 못 든다 라고
아예 46년 동안 짖고 있는 성전을 뿌싸 버려요 글쎄

아니 구약에
우리가 지금 에스겔을 살펴보고 있잖아요
얼마전에 이사야도 살펴봤듯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는 양반인데
헤롯 성전 쯤이야 ~~~~

그것을 보고도
이 말씀이 응한 것을 뻔히 보고도
한 선지자를 생각지 아니하니까

너희 가운데 있었던 한 선지자를 생각하지 기억하지 아니하니까

또 반복이 되는 겁니다

시간은 안 흘러요
사건만 반복이 됩니다

선악과 따먹은 사건
가인의 아벨 살해한 사건

구약은 역사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사건

그 사건을 동영상으로 찍었는데
아무도 해석을 못해요
한 선지자가 오기 전까지 말이죠
정답
곧 자막이 오기 전 까지는
그림으로만 보고 임의로 추측성 해석만 난무해요
자기들끼리도 그 임의로 해석한 
자막을 단 것이 다 틀리다 보니
그 임의의 자막에 따라 교파가 갈리고 교리가 다 다르다 라는 겁니다

바리새파 자체가 형성 되어 있다는 자체가
순 엉터리 이다는 거죠

어떤 목사는 저에게 무지 무지 자랑스럽게
장로교 합동측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라고 하던데
지금 보세요
맏이면 뭐해요
장자면 뭐해요
제일 먼저 도망치고 있는데
제일 밑 바닥까지 가고 있는데

또 고려파 놈들도 웃껴요
가장 덜 타락 했데요
아니 똥 통에서 가장 똥이 덜 묻었다 라고 자랑해본들
똥통에서 못 벗어나는 독안에 든 쥐 신세인데
그런 자랑이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마치 46년 동안 성전 짖고 있다는 것 자랑하고
남 7번 용서를 40년 만에 이루었다 라는
그 의문의 반복이 뭐 그리 자랑꺼리가 되는지
무지 무지 자부심을 가지고 있더라 말이죠

아이고 이 사기꾼들아
자랑할게 따로 있지
똥을 배설물을 자랑하냐 ~~~~~~~~~~
다들 보이러 온 것은
서로 서로 사기치면서 대충 대충 심상히 넘어가는데 있어서

한 선지자는 이 꼴 못 보시겠다 라고 개입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은 인간 자기 중심으로 짠 판을
주님은 이 한 선지자의 중심으로 새로운 판을 짜시겠다 라고
기존의 판을 뒤 엎어버리시고자 오셨다 라는 겁니다

왜? 인간은 뭘 해도 강도의 소굴로 만들거든요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제가 본 30년 봐도 바로 강도의 소굴에서 벗어나 본적이 없더라 말이죠
강도의 소굴에서 벗어난 교회 있으면 말해 보세요
제가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증거하는 교회 이다 라고
증거해야 함이 마땅할테니까 말이죠

더했으면 더했지
대 놓고서 나는 강도다 라고 나오잖아요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어요
양심에 화인을 맞았으니 절대로 그런 강도의 소굴에서 못 벗어납니다
부끄러워 하기는 더 자랑을 할테니 말이죠
십의 일조를 했다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했다 라고 말이죠

(딤전 4:2, 개역)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1, 개역)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2, 개역)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3, 개역)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4, 개역)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5, 개역)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 4:6, 개역)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 4:7, 개역)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8, 개역)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9, 개역)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딤전 4:10, 개역)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딤전 4:11, 개역)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딤전 4:1, 새번역) 『성령께서 환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를 것입니다.』
(딤전 4:2, 새번역) 『그러한 교훈은, 그 양심에 낙인이 찍힌 거짓말쟁이의 속임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딤전 4:3, 새번역) 『이런 자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과 진리를 아는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딤전 4:4, 새번역)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딤전 4:5, 새번역)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딤전 4:6, 새번역) 『그대가 이런 교훈으로 ㉠형제자매를 깨우치면, 그대는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지금까지 좇고 있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 / ㉠그, '형제들' ㉡또는 '집사'』
(딤전 4:7, 새번역)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딤전 4:8, 새번역)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딤전 4:9, 새번역) 『이 말은 참말이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입니다.』
(딤전 4:10, 새번역) 『우리가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사람의 구주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므로, 우리는 수고하며 애를 쓰고 있습니다.』
(딤전 4:11, 새번역) 『그대는 이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십시오.』

(디모데 전서 4장에 나오는 경건 이라는 단어를 오해 하면 안되는 것이
경건의 모양만 갖추게 되면 이것 또한 양심에 화 맞은 자들과 다를바 없는 거죠
이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면 안 되듯이
이 경건이라는 의미가 마태복음에서는 우리가 살펴봤듯이 종말성 곧 성령 십자가의 영인거죠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잃어버림이 되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라고 했듯이
마태복음 25장의 종말의 3종 세트 비유(열처녀,달란트,양과 염소)와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림의 3종 세트 비유처럼(양한마리,한드라크마,탕자)
성령께서 이렇게 종말로, 잃어버림으로, 죽음으로 우리를 몰아가신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경건이다 말이죠 우리는 훈련 또는 연습을 못하도
주님은 매일 매일 성령으로 인해 
우리를 날로 날로 후패케 하십니다 즉 날로 날로 새롭게 말이죠
특히 사도는 더더욱 양을 먹이고 양을 치고 양을 먹이고자 죽이시기로 작정하셨듯이 말이죠)


한 선지자를 통한 개입은 이 꼴 못 보겠다 라는
죄에 대한 민감함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통해서만 약속이 온다 라는 것은
곧 죄에 대한 처참하기 짝이 없는

죄의 두께를

제사장과 레위인만을 통해서 나타내셨듯이
이제 그 제사장과 레위인 또한 오염이 되어버림으로써
한 선지자를 통해서만 그 죄 문제를 다루시겠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럼 우리는 죄를 가지고 와야 하는데
자꾸 의를 가지고 온다는 점에서
경건의 모양만 자꾸 갖추겠다 라는 식이 되는
오히려 경건의 능력을 거부하더라 말이죠

(딤후 3:5, 개역)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능력이 뭡니까

디모데서에서 말하는 경건이란 곧 성령으로 인한 회개를 말하는 겁니다
나를 그냥 나도 아닌
목이 곧은 나를 낮추시고 꺽는 것이 경건이다 말이죠
성령이다 말이죠
그 회개를

하긴 뭐 인간은 성령도 자기 멋대로 다루듯이 물론 그렇게 다루어질 성령도 아니시지만
회개의 달인이 되어버리겠다 라는 식이 인간의 경건 모양 껍데기이다 말이죠
모세의 자리에 앉을려면 회개의 달인은 필수코스 일테니 말이죠

그것을 뿌수고자
종말을 확 끌어와서
잃어버림을 확 끌어와서
죽이시기로 작정이 된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경건의 능력이다 말이죠
내가 경건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곧 회개의 영이 나를 죽이시고자 몰아간다 말이죠

케보이 아니 도대체 하나님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뭔데요 말 좀 해 보세요
도대체 뭘 원하십니까

왜 이렇게 나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나서
날 못 죽여서 이렇게 나를 괴롭히십니까
전능자 께서 지독하게 나를 왜 괴롭히냐 말이죠
그렇게도 할 일이 없으십니까

전능자는 수시로 내가 나를 세우는 그 성전 짖기에
그거 뿌쑤고
자꾸 자꾸 어린양을 보라 라꼬
한 선지자
한 인물
누구 누구의 아들
인자
새성전을 보라 라꼬

시선돌리기로써 자꾸 뿌수터라 라는 겁니다

세미한 음성을 보라 라꼬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분을 보라 라꼬

크고 강한 바람, 큰 지진, 큰 불 등등의
네 생물 네 천사를 타고서 왔다 말이죠

(왕상 19:10,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1,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개역)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3, 개역)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14,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5, 개역)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왕상 19:16, 개역)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왕상 19:17, 개역)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왕상 19:18, 개역)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아니 세미한 음성으로 왔다 라고
누가 큰 바람 큰 지진 큰 불 보다 더 무서운 분이라고 여기겠냐 말이죠

누가 7천명을 더 심각하게 봅니까
도리어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나 만 더 심각하게 볼 꺼 아니겠냐 말이죠

한국에서 가장 힘든 부대는 어디냐 라고 꼬꼬무에서 나오던데
특수부대 전차부터 포병부대
다 필요없다 말이죠
내가 나온 부대가 가장 힘든 부대이다 말이죠
직접 접촉했으니 말이죠

큰 바람 큰 지진 큰 불 언제든지 도망쳐요
접촉하지 않고자 말이죠

그런데 세미한 음성은
사람의 모양으로 한
한 선지자 곧 인자는
언제든지 이용해 먹을려고 자발적으로 다가간다 말이죠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다가가듯이
인간들은 집요하게 3일 동안 쫒아가고, 예수님은 집요하게 3일 동안 도망쳐요 글쎄

(요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3, 쉬운) 『그래서 제자들은 남은 음식들을 모았습니다. 보리 빵 다섯 개로 사람들이 먹고 남은 조각들이 큰 광주리로 열두 개나 되었습니다.』
(요 6:14, 쉬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분은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가 틀림없다.”』
(요 6:15, 쉬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자기를 강제로 데려다가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곳을 떠나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 6:16, 쉬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밤이 되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로 내려갔습니다.』

(요 6:22, 쉬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음> 다음 날, 호수 반대편에 서 있던 군중은 그 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시지 않고, 제자들만 떠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 6:23, 쉬운) 『그 즈음, 배 몇 척이 디베랴에서 왔습니다. 디베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사람들이 빵을 먹었던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요 6:24, 쉬운)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그 곳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요 6:25, 쉬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사람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도착하셨습니까?”』
(요 6:26, 쉬운)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내가 행한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 분이 큰 바람 큰 지진 큰 불
곧 큰 풍랑을 일으켜서 큰 파도로 제자들을 벌벌벌 떨게 하시는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 죽게 하시는
예수님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
죄인 만드시는

(눅 8:25, 쉬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제자들은 두렵고 놀라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길래 바람과 물에게 호령하시고 바람과 물이 이분에게 순종하는가?”라고 서로 말하였습니다.』

세미한 음성이신가를 보여주시더라 말이죠
시시하게 봤는데
도통 모르겠더라 라는 겁니다

내가 알던 예수가 아니야
내가 접촉해서 스승삼아서 임금삼아서 알수 있는 양반이 아니더라 라는 겁니다
내 중심 내 인간 중심
겨우 남 7번 용서하는 인간 중심으로 알수 있는 양반이 아니라

하루에 순식간에 7에 70번
곧 490번이 아니라
모든 허물
허다한 죄를 단번의 제사로 모조리 다 없애버리는
모든 죄를, 7에 70번 완벽한 심판이자 완벽한 거룩
절대저주이자 절대사랑이라는 이 일곱으로 오신 완벽함으로 오신 

이 한 선지자를 중심으로 새 판을 짜시겠다 라는 겁니다
7에 70번의 용서의 세계 판으로 짜시고자
기존의 남 7번 용서 판을, 되도 않는 의문의 판을 싹 다 갈아엎고자 심판하시고자 왔다 라는 겁니다

누가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간담이 녹아서 받아들이겠냐 말이죠
이 행함이 있는 믿음 곧 살아있는 믿음을 말이죠

모든 인간은 행함이 없는 믿음 이라는 껍데기에
경건의 모양에 미쳐있지

경건의 능력은 구하지 않더라 라는 겁니다

경건의 모양만을 갖추었기에
경건의 능력을 도리어 구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겁니다

누가 죽이시기로 작정하는 절대저주와 절대사랑인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지혜 사랑이라는 한 선지자를 구하겠습니까
그 분이 지어주는 운명을 누가 구하겠냐 말이죠

도리어 나의 사적은 개인구원이라는 자기이익에
예수님을 우상처럼 또 끌어오는
하나님을 그렇게 
창조주를 그렇게 끌어왔던
조상의 버릇 그대로
또 그래요



너희가 창조주를 모르지
여호와가 누군지 모르지
내가 너희에게 나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려주마 라고

큰 풍랑 큰 파도로 베드로를 빠뜨려 죽여서 다시 건져내심으로 알려주시는 겁니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의 죽음은 마땅한데 왜 저를 대신 해서 심판 받냐 구요
왜 내 대신 심판 받으시는 겁니까
도대체 예수님 누구십니까

사랑이다
율법의 완성인
남을 사랑하는
원수를 사랑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그 원수의 자리
절대저주의 자리에서 비로소 사랑을 맞이하게 되듯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즉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은 반드시 심판하겠다 라는 거죠
안 그러는 자가 없거든요
누가 요나의 표적을 구하냐 말이죠
요나 본인도 거부했는데

요나가 그 음부의 권세
스올
무저갱
그 지옥이라는
바다 깊은 큰 물로기 뱃속 즉
어두움 속에 갇혀 버려서 벗어날 길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도 안되게 그 어두움 속에서
단절 속에서
빛이 직접 음부에까지 내려와서
죽음 속까지 찾아오는 생명이 있을수 있냐
길 없는 곳에 내가 곧 길이다 라고 길이 찾아오는
말도 안되는 이 일을 펼치시겠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성가대를 동원해서
빵빵하게 마구 마구 신나게 찬양하지만

사실상 아무도 그런 일은 안 벌어질 거야 라고 마음먹기 때문에 노래하고 있더라 라는 거죠

(겔 33:30, 개역)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겔 33:31, 개역)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왜? 이욕을 쫓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더디 이루어진다
안 이루어 진다

왜? 우상을 쫓으니까
자기 유익 말이죠

그래서 성전으로 기도하지 말고 맹세하지 말고 왜? 안 이루어지니까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 기도하면 빨리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속담이요 교회의 속담이요 목사들의 모든 설교 내용이다 말이죠
바쳐라 라꼬

(마 23:16, 개역)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겔 12:22, 개역)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 하는 너희의 속담이 어찜이뇨』
(겔 12:23, 개역)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 사람이 다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 속담을 못하리라 하셨다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

그런데 한 과부의 종말의 헌금은 바로 그것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뜨리는
헌금이요 기도 이다 라는 겁니다
얼마나 속히 이루어졌는지 말이죠

완전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목사의 설교와 정반대이다 말이죠

왜? 한 선지자 라는 제 3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새 판짜기가 개입이 되었거든요

마치 노아 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새 판을 짜듯이 말이죠

오늘 본문에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를 언급하십니다

노아의 때는 과거였고 인자는 때는 현재 곧 다가올 미래로 언급이 됩니다
그렇다고 마치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여길수가 없는 이유가
노아의 때와 같다 라고 그 과거의 사건에서 인간은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더 더 구체화 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때도 그림자였으니
더더욱 실상으로써의 인자는 때는 노아의 때 보다 더 심하게 되는 거죠

노아의 때는 물 심판이지만 인자는 때는 지옥 다운 지옥인 불 심판이고
노아의 때는 시집 장가 먹고 마시고 즉 잔치날을 즐기는 모습이다는 거죠
잔치 중에 잔치가 바로 결혼식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의 결혼식은 종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말이죠
어떤 임금의 자기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가 바로 종말 잔치 아니였잖습니까
얼마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잔치였냐 말이죠 혼인잔치

그런데 노아의 때는 사적인 결혼식으로써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즐거움을 누리더라 말이죠
아무도 종말 속으로 곧 방주 속으로 들어가자 라고 하지 않듯이

그런데 그 방주를 오늘날 교회 라고 사기를 치는데
그 교회가 만약에 종말적이다 라고 하면 방주가 맞겠죠
아 아니다 또 오해 할라
부동산은 아닙니다
집단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종말의 단체 라고 주장하는 수준높은 성화론자들이 있거든요
말은 맞아요
종말의 집단은 맞기는 맞는데
종말성이 하나도 없더라 말이죠
십자가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든요
오로지 개인의 성화됨을 추구함으로써 계급을 나누더라 말이죠
그런 자들의 특징이 바로 조건을 무지 무지 따져요
조건을

이러 이러한 조건이 아니면 나가달라고 말이죠

그래서 교인의 찬성여부로 교회에 들어올수 있다는
이건 뭐 성령은 노는 분으로 취급하더라 말이죠
성령의 전에서 성령이 알아서 빼고 넣고 할텐데
자기들이 먼저 나서서 성령의 수고를 덜어주겠다는냥
미리 가부를 따지겠다 라는 식이더라 말이죠

그러면 조건이 뭐 한두가지 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지 않겠냐 말이죠

저 같은 머리 나쁜자는 일단 무조건 탈락
탈락 1 순위가 되겠지요 뭐
뭐 하긴 머리 나쁜사람은 어디를 가든 1순위가 될것이지만 말이죠 ㅋㅋㅋ

너무 너무 조건이 많아요
처음엔 한 두가지 라고 자유롭다 라고 해 놓고서는
무지 무지 눈치를 주니까 조건이 억수로 갑자기 수백가지가 넘게 되는 거죠
뭐 지킨놈들은 별로 없겠지만
못 지키는 자들은 엄청나겠지요 뭐

아무튼 종말이라는 의미 자체가 서로 달라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이란 십자가의 죽음이거든요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아무리 성화가 되었든 말든
잘난 놈이든 못난 놈이든
믿음이 좋든 신앙이 엉터리이든
중간치도 없어요
그냥 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서 태어난 자가 종말의 단체인 교회인데

아마 신학 교리에서의 종말은 뭐 뻔하죠
바리새인이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듯이
구원 받을 자로 보고 있는 겁니다

즉 심판성이 없는 거죠

다 죽여놓고서 다시 살아난 자를 말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
어린양의 고난에 참예된자가 종말에만 나타나는 종말의 단체인데
그래서 아까 말한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마태복음에서의 종말성은
심판을 땅기는 자이고
그것이 마태복음 25장의 종말의 3종 세트 비유이고

이방인을 대상으로한 누가복음의 하나님의 의 곧 십자가의 의미는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은
잃어버림의 의미인 15장의 잃어버림의 3종 세트 비유 이다 말이죠
둘 다 인간 쪽에서 조건 갖추듯이 갖출수가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손에서 떠난 문제이다 말이죠
자꾸 인간 숙제인냥 종말의 단체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지만
종말의 영이신 성령께서 알아서 만든다 말이죠

자 그 종말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방주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아니 혼인잔치가 있는데
인생의 최고의 기쁨인 먹고 마시는 결혼 피로연이 있는데
왜 저 방주에 들어가냐 말이죠

누가 죽냐 말이죠

네 맞아요 누가 죽습니다

(전 7:4, 개역)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전 7:1, 개역)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 7:2, 개역)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 7:3, 개역)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전 7:4, 개역)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전 7:5, 개역)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전 7:6, 개역)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지혜라는 인물은 우리를 초상집으로 몰고 갑니다 종말의 단체인 교회이거든요
그런데 웃끼게도 교회가 도리어 강도의 소굴
그것을 뭐하고 하죠
윤락여성이 있는 곳
사창가 사창거리 그 집을 뭐라하죠
성매매하는 장소
아무튼 교회가 기쁨 주고 마음주고 꿈도 주고 ~~~ 님은 먼 곳에 ~~~ 가 되었다 말이죠

방주가 떳다는 것은 심판이 퍼부어진다는 겁니다
종말의 단체인 교회가 떳다 라는 것은
심판을 부으신다는 것이 먼저 떳기에
그 증상물로써 교회가 종말에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기능의 교회가 졸지에
존재성을 주장하게 되니

조건을 따지기 시작하더라 말이죠

그러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해 버리면 됩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어서 종말의 기능을
교회 답게 나타내어 달라꼬 말이죠

건축헌금 자꾸 달라고 사기를 치면
100억 이라고 작정건축헌금이라고 적어 내시면 됩니다
사기를 치는데에서는 사기를 쳐야
그들의 속내가 노골적으로 대놓고 나타나는 겁니다
미움 받는거 겁먹지 말고요

노아의 때 다움을 나타내시면 되는 겁니다

아니 이런 조건은 왜 그 수준높은 성화된 자들이다고 주장하는 교회는
왜 못 내세우고
그저 되도 않는 남 7번 용서~ 8번 용서~
그 되도 않는 어느 세월에 종말의 단체가 되겠냐 말이죠
꼴에 양심은 있어서 종말의 단체가 되었다 완료형은 죽어도 못 외치고
그렇게 앞으로 될 것이다 라고 항상 이미와 아직의 중간단계 라는
미완료를 주장을 해요
그게 양심적인게 아니지요
대충 대충 심상히
즉 이 말은 종말이 없다 라는 겁니다
용어만 대따 따오는 겁니다
아까 말한? 앞의 글이였나요?
사랑 이라는 단어만 따오는 겁니다
자기도 할 줄 안다고 여기는 사랑

그런데 알고보니 자기이익을 전제로 까는 사랑이지
종말적인 사랑은 아니잖아요

노아의 때가 뭡니까
종말 아닙니까
종말은 때가 아니라 인물 이다고 했어요
역사 라는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묵시 라는 인물과 사건입니다
십자가 라는 사건과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라는 인물
보라 세상 죄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라는 겁니다

그 한 선지자로써 새판을 짜는 겁니다
노아 때는 그 한 선지자가 노아로써
예수님의 운명을 대변해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기능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로써 노아가 아니라
기능 말이죠 비존재 말이죠

앞의 글 에스겔이 한 선지자 라는 예수님의 역할을 에스겔이 하는 겁니다
그 노아의 때를 맛배기로 보여줬다면
결국 노아는 인자를 말해주고자 맛배기 샘플이였고
진짜는 인자를 말하기 위함이다는 거죠
그 인자와 인자가 장대 높이 달린 사건은 종말의 사건인
십자가를 보여주는 거다 말이죠

그 노아 홍수가 그 당시의 저주의 저주인 절대저주입니다
즉 이 말은 상대적으로

방주에 들어가라 라고 해도 다들 무시하면서
잔치집에 가야 한다고 할때에

절대저주에 상대적인 기쁨을 구원을 잔치를 즐거움을 쫓고있더라 라는 거죠

우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했을때에

이 운다 라는 조건을 우리가 갖출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울게 만들어 버리는
회개를 상한심령을 통회하는 마음을 심어버리시겠다 라는 겁니다
왜? 종말의 단체 곧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바로 성령의 놀라운 탄식이라는 
제대로 우시는 분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지옥을 절대저주
지옥 다운 지옥을 본 자만이
방주 속에 살려 주세요 라고
심판을 보고 들어가지

아니 아무리 봐도 심판은커녕
즐겁고 화창한 봄날의 그야 말로 잔치하기 딱 좋은
혼인잔치하기 딱 좋은 날이다 말이죠

누가 방주 속에 들어가고자 하겠으며
노아의 때에 말이죠

바로 오늘 누가 저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고자 하겠으며

누가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가슴을 치면서
어찌할꼬 라고 상한마음이 되겠냐 말이죠

오히려 아름다운 그림에 검은 얼룩? 아니면 빨간 고춧가루
마치 이 사이에 그것도 앞니에 큰 고춧가루에 끼여 있으면
모든 것을 망치는
그야말로 얼룩을 제거하고 싶어서 미치는

아름다운 풍채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고
다들 고개를 돌리는 싫어버린바 되는 얼룩
이 잃어버린 자를

누가 쳐다보겠냐 말이죠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노아의 때에도 방주를 거들또 보도 않았듯이
인자의 때도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 라는 것은
여호와의 팔은 구원의 팔이거든요
이 구원의 팔이

하나님의 발등상으로 인해 원수로 들통당한 자에게만
구원의 팔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성인데

오히려 거꾸로 원수 아님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종말성이래요 글쎄

우는 자는 죄인이거든요
우는 자는
초상집과 같은 자는 하나님의 원수인
끝을 당한자
죽음을 본 자
자기의 죽음도 물론이거든요 자기의 죽음은 죽음 축에도 못 든다 라고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을 봐 버린자가
종말의 영이 임한 자 이다는 겁니다
아무에게나 안 보여주고든요

그들이 혹시 보더라도 당연한 제사의 한 과정이다 라고 보고 있지
인애와 자비로 못 보는 겁니다
법이 아니요 행함이 아닌데
법으로 보고 있고 지키는 제사 절차로만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저주의 저주인 절대저주를 못 보여주는 거죠

무수한 제물이 믄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언제 죄사할수 있겠냐 말이죠

40년 동안 겨우 7번? 때려치워라 말이죠

단번에 순식간에 하루만에 모든 허물을 다 덮지 못하면
그거 가짜입니다

그 정도로 심판 중의 심판을 대신 감당하는
죄 값
곧 자기 목숨 값을 대신 치랐다 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안 되요 죄 있는 자는 죄 값을 못 치룹니다
죄 없는 자 만이 치룰수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무슨 놈의 숙제를 조건을 자꾸 따지냐 말이죠

결국 자기의 부하가 되라 라는 우상숭배를 요구하는 거다 말이죠

미쳤냐 말이죠 아니 예수님 만나러 교회에 왔지
목사 만나러 왔냐 말이죠

왜 그렇게 목사에게 무릎 꿇는 자가 왜 그리 많은지
정작 예수님 앞에서는 무릎 꿇는 자는 단 한명도 없더라 말이죠

교회 백날 다녀봐도 말이죠

나를 제대로 심판 하는 자는 예수님 뿐인데 말이죠
심판 하지도 못하는 목사라는 놈에게 왜 그리 무릎 꿇냐 말이죠
목사가 날 뛰니까 장로도 날 뛰어요 자꾸 장로인 자신에게 무릎 꿇어라 라꼬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뛰더라 말이죠

아무튼 인간은 백날 해도 세상을 바꿀수가 없어요
정의를 백날 외쳐도
정의를 외치는 놈들의 특징이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더더욱 곤고하게 만들어요

그때 전두깽때 민주항쟁 운동을 하던 놈들이
지금 딴나라 당에서 자기 자리를 굳건히 하겠다 라고 미쳐 날 뛰더라 말이죠
박땡희의 딸랑이가 되겠노라 라고
김문땡이가 말이죠

갈아엎을 생각을 감히 못해요
고문 당하고 나면 더더욱 저들의 멍멍이 하수가 된다 말이죠

단번에 갈아엎어버리는 자를 못 봐서 그래요
단순히 독재 따위를 없애자 라는 수준이 아닙니다
아예 사망 자체를
죽음의 권세 자체를
없애 버리는 심판 주를 요구하지 않아요
아까 말한 종말의 단체라고 우기는 그 수준높은 성화를 주장하는 교회에서
이런 내용을 들어본적이 없어요

그저 자신들은 건전하기 짝이 없는 경건의 모양을 갖춘 대가들이다 라는 주장 밖에 없어요
예수님 쳐다 보라 라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자기를 쳐다 보래요 글쎄

아무튼 그렇게 한다고 언제 세상이 바뀌어 지겠냐 말이죠
큰 것을 구하라 말이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즉 종말의 영을 구하라 라는 겁니다
심판을 구하라 
심판을 구하는 자가 종말의 단체인데
심판이라는 단어 조차도 단 한번도 없어요
아 딱 한 경우
자기 건드리면 그때서야 심판을 운운해요
목사 건드리면 삼대니 칠대니 망한다 라는 식으로

에게 에게 겨우 칠대

이왕 건드리는 것 70대 저주 받을테니
마음껏 건드려주마
말이죠

누가 방주에 들어가라 라는 소리를 듣는자 일까요
종말의 단체는 누구일까요

저 심판을 보고 저는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라는 자에게만
우는 자 에게만
죄인에게만
환자에게만

주여 고쳐주소서 라고 의사를 부르고
그 의사가 제시한 심판 속에서의 구원을 바라는 자

감히 십자가의 형벌 속에서도
주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 요나의 표적
이 바다 깊은 큰 물고기 뱃속이라는 스올 속에서 무저갱 속에서
지옥 다운 지옥의 죽음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다니

주여 당신의 나라에서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더라 말이죠
자기도 십자가에 달려 죽는데
자기 죽음은 죽음도 아니요
저 분의 죽음만을 쳐다보더라 말이죠

얼마나 지옥 다운 지옥
죽음 다운 절대저주였으면
다른 강도가
둘 다 미쳤구나 라고

맞아요 비정상입니다
죽는 판국에 정상이다 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죽음 자체를 못 피한다 라는 자체가 이미 비정상인데
그런 죽음이라는 비정상 보다 더 나은 비정상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쳐다보는 것이 바로
종말의 단체인 교회의 기능입니다

저 십자가에 달려 죽는 분이 나의 구세주 이시다 라고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종말에
죽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쳐다보는 겁니다
곧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하나님의 일을 쳐다보는 자가 
성령의 전인 교회라는 성도입니다.

새성전이라는 인자의 증상물입니다.


(시 126: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 126:2, 개역)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 126:3, 개역)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4, 개역)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시 126:5, 개역)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126:6, 개역)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1, 현대어) 『[이제는 거두어 들이게 하소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우리를 예루살렘으로 데려오실 때 그땐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시 126:2, 현대어) 『우리어 함박웃음 짓느라 입다물 줄 몰랐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노래 절로 나왔습니다. 그때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여호와께서 저들을 위해 정말 엄청난 일 하셨구나.』
(시 126:3, 현대어) 『그래요, 여호와께서는 우리 위해 엄청난 일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시 126:4, 현대어) 『여호와여, 단비 내려 메마른 강바닥에 다시 물 흐르듯 우리 땅 우리에게 다시 주소서.』
(시 126:5, 현대어) 『눈물 흘리며 씨뿌린 이들 한없이 기뻐하며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시 126:6, 현대어) 『울며 씨뿌리러 나가는 이는 한없이 기뻐하고 노래하며 돌아오리라. 곡식단 거두어 들고 돌아오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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