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8 열 처녀 비유와 잃어버린 양 (마 25, 1-13)

도둑같은 종말(인자)의 때와 인자를 무시하는 악한 종 (마 24,43-51)
마태복음 2018 2021. 3. 27. 13:53
18-127 도둑같은 종말의 인자의 때와 인자를 무시하는 악한 종 (마 24,43-51)

〈마태복음 25: 1-13, 개역한글, 신약성경 43쪽, 찬송가 442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 새번역) 『"그런데,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마 25:2, 새번역) 『그 가운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마 25:3, 새번역)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마 25:4, 새번역)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하였다.』
(마 25:5, 새번역) 『신랑이 늦어지니,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마 25:6, 새번역)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마 25:7, 새번역) 『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제 등불을 손질하였다.』
(마 25:8, 새번역)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였다.』
(마 25:9, 새번역)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을 하였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
(마 25:10, 새번역)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마 25:11, 새번역)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마 25:12, 새번역) 『그러나 신랑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마 25:13, 새번역)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인자가 언제 올지 그 날과……'』


비유라는 의미는 비밀 이다는 거죠
즉 숨어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무엇을 대비하느냐
바로 나타나는 하나님 곧 가짜 하나님
죽은자의 하나님을 겨냥한 의미입니다

결국 비유란 비존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반대로 비유가 아닌 것은 존재를 겨냥한 거죠, 
즉 비유는 존재에게서는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는 겁니다

이런 비밀성 곧 숨어있는 하나님은
이중반복이라는 무한반복의 이중성으로써(괜히 어려운말 같지만 쉽게 생각하면
공명으로써 핑퐁 핑퐁 무한반복의 탁구치듯이 주고받는 겁니다 
이 간극, 이 공백을 형성하는 거죠
신랑과 신부가 핑퐁 탁구하듯이 서로 주고받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듯이 말이죠)

같은 의미에서 제일 마지막 구절에
그 시간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 라고 단절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 25:13, 개역)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즉 인간 쪽에서는 깨어있도록 할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는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억수로 억수로 안졸도록 허벅지를 꼬집고 꼬집고 꼬집어도
막상 깨어있고자 아무리 꼬집어서 졸음을 쫓아낼때는 죽어도 안 오지만
막상 도저히 못 참아서 결국 졸아서 잘 때
고 때만 일부러 찾아오시겠다 라는 겁니다
즉 깨어있을때를 일부러 피해 오셔야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아예 지킬려고 하덜덜 말아라 라는 겁니다
마치 앞의 글 에스겔에서 듣든지 아니듣든지 라는 표현 자체가
아무도 안듣든다 라는 전제로 깔 듯이
잃어버린 양 조차도 내 쪽에서 도저히 갖출수 없는 조건이다는 겁니다
조건 자체가 갖춤을 요구하는 존재되기 밖에 안되니까
비존재 곧 비밀에게 요청해야할 입장이지
내 숙제로 해 버리면 또 하나의 자기의 의로움이 쌓이게 되는 거죠
그 의로움을 누가 삭제 할려고 달려들면
죽이고자 하는 살인의지가 나오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다 그랬거든요)

아니 왜 우리를 이렇게 못 잡아먹어서 못 괴롭혀서 안달이시냐
왜 일부러 깨어있을때를 피해서 오시느냐 말이죠

깨어있음이라는 자체도 주님의 숙제로써
주님 홀로 깨어있는 자 이지
모든 인간은 잠 자는 자 일 뿐입니다
기도를 잠자기 위해서 할 뿐이다 라는 겁니다

아까 말한 이중성 이라고 했지요
어떤? 비유 비밀 비존재로써의 이중성이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시간과 때는 어디까지나 인간 자기 중심의 시간이다는 겁니다
즉 존재의 시간이다는 거죠
나 존재 한다 그 존재에 맞춘 시간이다는 거죠

그럼 깨어있으라 라는 말은 
나에게 말한 겁니까 
나 라는 존재에게 한 말 입니까

주체가 나 입니까 (존재)
아니면 깨어있음 입니까 (비존재)

깨어있으라 라는 것 자체가 넘어오시는
의인화 해서 넘어오시면 아무리 졸아서 잠자고 있어도 깨어나게끔 
깨우시는 자 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내 쪽에서 이루겠다 라고 해석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유도해서 가르치는 목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는 안 깨어있으면서 남 보고 자꾸 깨어 있으라꼬 하니 말이죠

또 무조건 잠자고 있는 모습을 목사가 교인에게 들키면 안되니까
깨어 있는 모습을 하나 정도는 지켜서 세뇌시켜서
우리 목사는 항상 깨어 있는 분이다 라고 자백케 만들어 놓는 사기를 쳐야

오늘 본문으로도 딱 등쳐먹을꺼 아니겠냐 말이죠
이것이 양을 잡아 먹는 삯꾼 목자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금식을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 거짓 목자 코 앞에서 보란 듯이
대 놓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써
인간들에게 규정 당해 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스스로 옳다 여김을 받는 인자 곧 누구 누구의 아들 
비밀
임마누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지 않고
금식 기도 지키고자 음식을 금하는 자와 함께 하지 않고

세리 강도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곧 먹고 마시는
스스로 옳다 함을 얻는 인자로써
선악을 넘어서버리는 단번에 말씀을 이루시더라 라는 겁니다

금식을 끊을려면 몇 시간이라는 그들의 법칙이 있을꺼 아니냐 말이죠
금하다 라는 공백 말이죠
몇 시간이라는 공백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본인 자체가 공백으로써 왔고
그 공백 속에서 세리 강도 죄인을 집어넣어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겁니다

즉 저들은 말씀을 지킴으로써 영원한 말씀을 먹지 않고(마치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 기도하듯)
예수님은 말씀을 지킬필요가 없이 말씀 그 자체로써 와서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겁니다 함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시는 겁니다
저들이 타 죽지 않게 낮아지셔서
남을 사랑해 버리심으로써 말씀을 더 이상 이룰게 없도록 다 완성해 버리십니다
더 이상 지킬게 없도록 남겨둔 숙제가 이제 하나도 없도록 말이죠
이것이 성전의 기능 곧 죄를 거룩으로 바꾸는 작업이 영원한 제사장이 하시는 겁니다)

삯꾼 목자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무지 무지 좋아요
사기 치기 딱 좋은 말씀이니 뭘 봐도
어떤 성경 구절을 펼쳐서 말하든 세뇌시키기에 딱 좋은 겁니다

뭐든지 돈으로 돌아오니까 말이죠

오히려 성령은 단절성이다
비유는 단절적이다
성경 말씀은 단절성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존재들은 자꾸 화를 버럭 버럭 냅니다

아무도 못 지키는 말씀 같아 버리면
누가 지킬려고 하겠으며
아무도 못 지킨다 라고 해 버리면
더 이상 사기를 칠 수 있는 바탕이 아예 없게 되니까 말이죠

방종을 유도 한다 라고 비판 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 사기를 치더라 말이죠

그럼 같이 빠자, 같이 껴 앉고 빠자 죽자는 말이가
네 맞아요 같이 죽고 다시 같이 살자 말이죠

그래 그래 같이 살자메????

아니 같이 죽고 그 다음에 같이 살자

아무튼 같이 살자메

삯꾼의 특징이 바로 이 앞의 단절성을 빼자는 겁니다
어차피 살꺼
같이 안 죽고
그거 빼고
같이 사는 것만 취하자 라고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 통하는 이야기만 하고
안 통하는 단절은 이야기 하지 말자

어떤 무식한 목사사모가 무는 없는 겁니다 라고 얼마나 문자적으로 보는지
자기 존재성을 바탕에 깔다 보니까
자기가 없는데 그 없는 무에
무를 말하든 유를 말하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것이겠죠
즉 항상 자기 존재 라는 유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존재로 출발하지 않습니다
비존재 곧 무에서 출발합니다
이 무가 유 보다 더 유(있음)한 유 이다 말이죠
이 없음이 있음 보다 더한 있음 보다 더한 있음이다는 거죠
비존재는 존재 보다 더한 존재이다는 겁니다

바리새인 유대인 대제사장 종교지도자 세상권력과
악한 영들까지 다 합쳐서 이 십자가 라는 없음을 없앨려고 아무리 달려들어도
그러면 그럴수로고 더더욱 또렷하게 영원하게 명료하게 되더라 말이죠
그래서 가만히 무시 전략으로 나와요
괜히 밝혀 또렷하게 되면
스스로 흐리멍텅한 것들로써 들통당할까봐 말이죠

이 무를 바로 이 없음을 바로 기능이다고 합니다
존재 보다 앞서는 것이 기능이거든요

기능이 먼저 있고 존재가 나중에 있는 겁니다
결과가 먼저 있고 원인이 나중에 증상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럼 존재는 이 기능을 담은 그릇일 뿐이다는 거죠
그릇은 존재해요
그러나 같은 그릇이다고 해도
기능은 정반대 이다는 겁니다
긍휼은 추상적인 겁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긍휼을 담은 그릇을 통해서 긍휼이 있다 라고 우리는 알게 됩니다

또 반대로 진노를 담은 그릇을 통해서
진노 라는 추상적인 것이 있다 라고 우리는 진노의 그릇을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감기는 눈에 안 보이는데 콧물이 흐르는 증상을 통해서
물질 이라는 존재라는 증상물을 통해서 눈에 안 보이는 감기가 있다 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말이죠

현대에는 초정밀 현미경을 통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다고
눈에 안 보인다 라고 없다고 취급했는데 있더라 말이죠
그러나 그것 보다 먼저 앞서는 것이
사람이 먼저 죽어나가는 것을 봐 버렸거든요
그 다음에 후차적으로 있는지 없는지 보자 라고 해서 
바이러스를 채취하고 현미경으로 들따 본 뒤에 있다 라는 유무 판정을 내리고 난 뒤에
먼저 죽었던 사람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죽었다 라고 판명하더라 말이죠
어쨌든 결국 먼저 결과가 먼저 있고 난 뒤에 후차적으로 원인을 판명하는 식이다 말이죠

양자역학으로 들어가게 되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마구 마구 뒤범벅이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 개념을 아예 빼고 논할려고 해요
불가능한 사고방식을 전개하는 셈인 거죠

결국 인간은 자기 중심의 시간관이 없음이
자기들이 만들어낸 양자컴퓨터에 의해서 밝혀져 버린 겁니다
오죽하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라고
그런 너튜브 내용이 떠돌더라 말이죠

양자물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그것을 밝혀버렸어요
뭐 하긴 그 이전에 철학이 이미 밝혀냈지만요

철학자들이 대부분 물리학자이거든요

겨우 위로랍시고 핑계 대는 것이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
쥐뿔도 아는 것이 없다 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지혜라꼬
위로 아닌 위로를

비존재가 아닌 여전히 존재에게 위로하더라 말이죠

또 존재에게로 돌아가 버려요

달리 그 말 밖에 할게 없거든요

아는게 그것 밖에 없어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라는 것을 안다 라고

움직인다 라는 거죠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정체 되어버린 순간 
안다고 하는 순간 졸지에 쥐뿔도 아는 것이 없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바로 그런 의미에서 

자기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죠
자기 숙제는 예수님의 숙제를 거부하더라 말이죠

오늘 본문이 그런 의미입니다
저마다 자기 일이 있기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존재성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즉 자기 구원
개인 사적인 일
사적인 소망
개인의 생존

여기에 타인의 일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손 놓는 자는 없다는 거죠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도
평생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부하던 자도
결국은 사적인 개인 구원을 우선시 하는 개인 일이 먼저이지
집단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 하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단절의 종말의 영
곧 때와 시를 알수 없도록 하신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날라가 버린 잃어버린 양을 찾는 
종말의 집단만이 종말의 인물의 등장과 동시에
그 인자라는 종말의 인물의 증상물로써
없는데서 갑자기 등장하게 됩니다 순식간에

반대로 인간은 숙련하고 단련해서 겨우 40년 만에 남 7번 용서해서
한 마디 한 매듭을 짖게 되니
사건 자체에 가입을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일에 들어갈수가 없는 겁니다
그 40년 이라는 시간이 있는 이상 말이죠
하루 만에 안 되면 안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영속성이 있는 자기가 중요하지
남을 7번 용서한 40년이라는 시간을 중요시 하지

단번에 순식간에 급히 하루만에 7에 70번 용서한
하나님의 사건을 하나도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적개심을 품어서 죽여 버립니다
46년 동안 짖는 것을 죽여버리면 남들로부터 반발심을 사겠지만
3일 만에 짖는 것은 역사성이 없기에 하나도 반발심을 일으키지 않거든요
사회구조 자체가 상징계로써 아버지의 이름으로 구성이 되었기에

3일 만에 짖는 것은 하나도 중요치 않는 (역사적 가치가 없잖아요
인간의 노동이 개입이 되지 않았기에)

누구 누구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눈치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임마누엘이라는 아기
누구 누구 의 아들을 구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 라고
그런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힘을 빼앗길수 없다 라고
역사성이 있는 모세의 제자로써 그 시간과 공간성을 무시하지 않겠노라 합니다

어딜 감히 삼년 짜리 밖에 안된 예수의 제자가
천삼백년 묵은 모세의 제자를 이길려고 하느냐 말이죠

삼일만에 짖는 성전은 무시해도
46년 동안 아버지의 이름으로 짖는 성전은 무시하지 않겠노라
시험하지 않겠노나 라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우기지만 그것이 바로 개인의 사적인 존재를 위한
우상숭배로써
자기 개인의 구원을 위한 일들만 골라 골라 하더라 라는 거죠

이 정도로 인간은 안 된다 라는 겁니다
이미 배후세력에 마귀가 자리 잡고 있기에 말이죠

그럼 이스라엘이란 뭐냐
바로 이런 모습을 들통당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아예 애초부터 난 이스라엘 선민이야 라고 하는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는 이방인이였는데
그거 다 탈탈탈 털리는
광야 라는 단절의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그런 목이 곧고 마음이 강퍅한 자를 어떻게 꺽으셨는지

그 흔적 그 십자가라는 흔적
스티그마(홈패임, 상처) 라는 낮추심
꺽으심을 통해서

졸지에 깨어있는자로 새로 태어나
깨우시는 깨어있으신 분의 증상물로써
등장하는 것이 잃어버린 자 곧 새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사실 첫 잃어버린 양은 예수님 뿐입니다
이 본을 뜬 주틀 붕어빵 주틀에 넣어서 새이스라엘을 찍어내신 거죠
머리 둘 곳 없는 인자로써 말이죠

반대로 그 반대인 개같은 이방인은
도리어 자신은 선민이다 라고 우기는 자로써 곧 유대인과 바리새인으로써
자기 개인 구원을 중심으로 일하도록 되어 있는 거지요

그러니 선민이라고 우기는 이스라엘이 도리어 개같은 이방인이고요
오늘날도 똑같죠 선택받은 구원받은 자 라고 우기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구요
그들로부터 버림 받은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 이다 라고 하는 자가
참 성전 되신 어린양의 뒤를 졸졸졸 뒤따르는 새노래 꾼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오늘 등불 비유, 비밀인데
인간이 해석하는 등불은

마치 절대로 조상들처럼 우리가 그 때로 돌아간다면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한다 말이죠

자 보세요 이건 정답을 미리 알았으니까
그때로 돌아가면 정답을 미리 알았으니 정답을 제대로 쓰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거 보세요 그러니까 이 놈들은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것이 정답을 바르게 쓰는 것이다 라고 본 겁니다

이건 비밀이 없어요
누구든지 다 알아먹어요 단절성이 없어요

그 반대입니다

정답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때로 돌아가면 바른 정답을 쓸게 아니라
도리어 정답을 알게 되었으니까
아무리 타임머신 타고 다시 돌아가도 나는 또 선지자를 죽일 수 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죄인이군요 라는 구제불능이라는 단절성을 뼈저리게 정답 때문에 알게 된다 말이죠

즉 이 말은 정답을 미리 표준전과 동아전과 제일 뒤에 부록이 있는 거기서 답을 알아서
정답을 쓰는 것 조차도 내 숙제로 본 것이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정답이가 정답의 숙제로써 문제지를 찾게 되면
나는 되돌아가도 또 선지자를 죽일 수 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죄인이군요 라는
문제지를 찾더라 라는 겁니다

정답이가 찾아내는 문제지 말이죠

자 그럼 등불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자기 숙제로 보는 겁니다

자기 숙제로 보게 되면 기름 준비하고 등 준비해서
신랑 맞을 준비를 하면 된다 라고 보는 겁니다

이게 아까 정답을 미리 보고 되돌아가게 되면 선지자를 안 죽일꺼다
바른 정답을 쓸 것이다 라고 자기 숙제로 보는 해석이 되는 거죠
뭐 다들 이렇게 해석 하니까
다 그렇게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준비하는 기름과 내가 준비하는 등 이란 없어요
내 숙제로 준비되는 기름이요 내 숙제로 준비되는 등 이란 없다 라는 겁니다

내 숙제로 준비 되어질 기름과 등이 아니다는 겁니다

거꾸로 반대로
기름과 등이 나를 준비하는 겁니다
그래서 비유입니다 비밀

기름과 등이 숙제를 해서 나를 못 살게 합니다

마치 욥이 준비한 기름과 등은 자기의 의로움이였는데
정작 자신의 자리를 의로움의 자리로 규정했는데
애상치 못한 저주의 자리가 됨에 있어서
이해를 못했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라는 말씀을 먹게 되니까
저주의 자리에서 절대저주인 십자가 라는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광야 속 삼일 길에서 어린양의 희생제물을 비로소 보게 되더라 말이죠
신랑을 맞이하게 되더라 말이죠
노아 방주
초상집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맞이하더라 말이죠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한 자를 꺽으심으로써 말이죠

(겔 34:12, 개역)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앞의 글 에스겔 34장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말했듯이
오늘 본문은 처녀 곧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써 이야기 하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곧 섬기는 목자
자기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 이다 라고 하십니다

(요 10:11,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개역)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개역)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잃어버림 이라는 단절과 공백이 저 삯꾼목자와의 차이로써 증거하신다 라는 거죠


자 이렇듯
기름과 등 곧 등불이 준비한 등불의 숙제로써 준비된 신부 곧 잃어버린 양은


(겔 34:12, 개역)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캄캄한 날에
심판의 날에
누구를 바라는 자 입니까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섬기시는 목자를 바라보는 자 이다는 겁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를 바라보는 자 이다는 거죠

즉 구원자가 먼저 있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이 양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목자가 먼저 있기에
그 섬기시는 목자의 섬기심이라는 기능에 맞는
의사라는 기능에 맞는 건강한 자가 아닌 환자가 그 뒤에
먼저 있는 의사의 기능을 담는 그릇으로써 증상물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럼 기름이와(의인화) 등 이 준비한 신부는 누굽니까
기름이와 등을 둘다 합치면 등불이겠지요
등불은 어떤 때에만 의미 있나요
네 맞아요 신랑이 오신날이자
동시에 어둡고 깜깜한 종말의 심판 날입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위하여 살벌하기 짝이 없는 종말의 천국 비유로써 증거되듯이 말이죠

자 그럼 종말이가 준비한 신부는 누굽니까
종말이(기름과 등)의 숙제로 준비된 신부

슬기로운 다섯처녀 입니까
어리석고 미련한 다섯 처녀 입니까

당연히 정답은 슬기롭다고 하니까 슬기로운게 정답이고
정답에는 미련하고 어리석다 하니까 미련한 다섯처녀가 틀렸다 말이죠

이게 무슨 비밀이겠습니까 다들 알아먹는데

종말에서는 누가 봐도 양이라고 양의 행동만 한 자를 염소 라고 했고
누가 봐도 염소 짖만 했는 자를 도리어 양 이라고
팔을 어긋맞게 해 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종말성의 천국은 인간이 죽어서 가는 식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 쪽으로 쳐들어 오는 식이다 라는 거죠

자 이렇게 되면 인간이 구상한 천국 개념이 다 깨어지는 겁니다
그 동안 거짓선지자 거짓 목자를 통해서 들어왔던 천국의 자리가
참된 섬기시는 목자에 의해서 그 천국의 자리는 밀려나가는 겁니다
거짓목자의 자리를 참된목자가 반드시 차지 하시듯이

그 자리가 권력의 자리로써가 아니라
높은 자리로써가 아니라
엉터리로 양을 잡아먹는 자리로 만들어 버린 것을
도리어 섬기시고자 자기 목숨을 양을 위하여 버리시는 모습으로써
엉터리 천국을 밀어버리듯 가짜목자의 자리를 밀어버리시겠다 라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로 치면 섬기는 대통령 자리를 따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잡아먹는 삯꾼 대통령 자리를 차지 함으로써
참된목자의 모습을 보이시겠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앞의 글 에스겔 34장에서 거짓백성 즉 잃어버린 양이 아닌 자들 또한 밀려 쫓겨나게 된다 라는 점입니다)

천국의 비유, 천국의 비밀로써 뭐 그리 대단히 어려운 것도 아닌 조건이다 말이죠
아 그래 신랑이 오시는 날 기름과 등을 준비하면
천국 갈수 있는 조건이 되는 구나 라고
마치 충분히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라고 볼 것이다 말이죠

바로 이런 지극히 정상적인 해석으로써 조건을 갖추면 된다 라는 의식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천국의 의미를 나타내시는데 있어서
가짜 천국과 즉 쳐들어 오는 천국이 들통내는 가짜천국과
또 거짓목자와
거기에 해당 되는 가짜백성
바로 오늘 나오는 미련한 다섯처녀죠

바로 미련한 다섯처녀를 들추어내시는 진짜 천국이요 바로 그 천국이 신랑이다 라는 겁니다

거짓목자와 거짓백성의 속성이 뭡니까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린다 말이죠
그래서 자기의 의를 쌓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도 있구요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을 안해요 즉 이 말은 자기가 쌓은 의와
맞으면 누구든지 복종을 하겠지만
자신이 쌓은 의와 하나님의 의는 하나도 안 맞아요
맞는게 없어요
그러니 복종 자체를 할 수 조차도 없다 라는 겁니다

또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다 라는 말은 정작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사랑은 없다 라는 겁니다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등등의 울리는 꽹과리를 무척 많아요
즉 스펙이 화려해요 
거룩의 온갖 조건을 엄청나게 두루 두루 갖추었다 말이죠
에디오피아 군인들의 무기가 서로 부딧끼는 달그닥 거리는 소리처럼 요란하게 말이죠

(사 18:1, 현대어) 『[유다에 온 구스 사절단] 나일강 상류의 ㄴ) 구스는 군인들이 가득 찬 나라이지만 그 시끄러운 무기 소리는 그 나라에 들리는 상엿소리에 불과하다. (ㄴ. BC 701년에 유다를 반앗수르의 동맹에 가입시키기 위하여 구스 사절단이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런데 그런 화려한 스펙이 죽은 자를 하나도 살리기는커녕
도리어 등쳐먹고 양을 잡아 먹더라 말이죠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기는커녕
자신의 화려한 스펙이
거룩 쌓기에 방해가 된다 라고 피해서 삥 둘러간다 말이죠

부자청년이 얼마나 똑똑하고 슬기로왔으면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겠습니까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했다 라고 얼마나 자부했겠냐 말이죠

문제는 전재산을 나누어 줄 정도로
그 동안 사랑은 단 하나도 없었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드러난 겁니다

네 맞아요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껍데기만 강해지지
알맹이는 하나도 없음을 단 1도 모르게 됩니다

정작 율법은 대상이 아니라
존재가 아니라

기능으로써 율법이라는 주체는 나를 죄 아래로 가두는데 말이죠
죄 아래 가두는 율법은 사라지고
주체가 인간이 되어서
나 율법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 라고 나오니까
아 그래? 그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니까
율법이라는 주체가 너를 죄 아래에 가두지 않고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을 베풀수 있다 라는
섬기는 목자
자기 목숨을 자기 양을 위하여 버리는 목자

울리는 꽹과리 스펙이 아니라
율법 다 지킨 것 다 남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앞으로는 죄 짖지 말라 라는 소리 조차도 하지 않는
무조건으로써
율법 어릴적부터 다 지킨 것 다 남에게
자기가 설정한 이웃도 아닌
불편한 이웃이라고 할 지라도 다 줄수가 있느냐 라는 점에서

율법은 애초부터 우리 속에는 사랑이 없음을 지적하는데

어 이상하다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라고?
그럼 너의 목숨과도 똑같은 전재산을 다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렴

근심하고 등 돌려서 가버릴 때

그럼 그렇지
율법이 인간의 대상물이 되어
말씀이 인간의 대상물이 되어서 지키질 리가 없는데 말야

도리어 말씀이 잃어버림을 당하는 버림 받는 돌로써
저주의 자리에 놓임으로써
자기 스스로 잃어버림을 보이시는

저 장대 높이 달린 인자 라는
머리 둘 곳 없는 인자라는 정답으로써 오셨는데

그 사랑에 맞는 원수 
그 정답에 맞는 문제지 문제아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에 맞는 잃어버린 양 단 한 마리
구원자에 맞는 의인이 아닌 죄인
의사에 맞는 건강한 자에게는 필요없고 환자에게만 필요한 의사로써

이 사랑이 없어서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십자가의 피 용서 라는 절대사랑이 없어서 망하게 되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모잘라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말이죠

거짓목자와 악한 영 들에 의해서 형성된 가짜 구원관이
바로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켜왔다 라는 그런 사고방식으로써
구원을 바란다 라는 자체가 이미 틀려먹었다 말이죠

이런 구원관은 사적인 구원관이다 말이죠
모든 종교는 즉 짐승이라는 666의 구원관은
사적인 구원관으로써
결국 모잘라 모잘라 함량미달이다 라는 겁니다
이 말을 또 아 그럼 더 채우면 될꺼 아니냐 라는 식입니다

바보 너무 똑똑한 천재들이다 말이죠
너무 너무 슬기로워서 지옥에 가요

사도와 소크라테스와의 차이 이다 말이죠
테스형 백날 불러봐라 말이죠
답이 나오나
원인이 있으면 답은 없어요

원인이 없어야 답이 이미 와 있다 아니 이미 벌써 말이죠
그 정답의 문제지만 찾으면 되요

우리가 찾는 우리 숙제가 아니라 정답이 찾아내는 정답의 숙제가 말이죠

자 이 열처녀 비유는
천국이 찾아내는 천국의 숙제
신랑의 숙제로써의 열처녀 비유입니다
두 패로 나누어져요

지지난 주 마태복음 24장의 구절처럼
하나는 데려 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짐을 당한다 라고

(마 24:40, 개역)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개역)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 24:42, 개역)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자 바로 이런 정답이라는 천국의 속성이
한 쪽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는 잔칫집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누리고 있도록 되어 있고요

다른 한 쪽은 초상집이라는 마치 종말을 통해서
심판을 통해서 다 잃어버림을 당한냥
더 이상 자기에게서 의로움을 찾을수가 없어서
외부로부터의 의로움을
외부로부터의 용서를 바라는 입장에 놓여지게 된 겁니다
마치 환자가 의사만을 고대하고 고대하듯이

바로 이런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오늘 본문에서 열처녀 비유로써 나온다 말이죠
그럼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아닌
의사와 건강한 자 곧 의사가 필요가 없는 건강한 자 와의 관계가 나와야 하고
환자와의 관계가 나오는 거죠

이것을 건강한 자는 그럼 미련한 다섯처녀이고
환자는 슬기로운 다섯처녀가 되는 거죠

이것이 정답을 바르게 맞추는 인간 쪽의 숙제가 아니라
정답이 자기 문제지를
목자가 자기 잃어버린 양을 찾는 식입니다

그럼 건강한 자는 정상적인 생각을 하겠지요
아니 환자도 아닌데 의사만을 바라고 발을 동동동 구르면서 기다릴 필요 까지야 없다 말이죠

그때 아플 때 그때 의사를 준비하면 되요

그러나 문제는 환자입니다
환자는 더 이상 기댈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의사만을 발 동동동 구르면서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거죠

오로지 자기 목숨은 이 의사에게만 달려 있습니다
그게 환자 이다 말이죠

거기에 자기의 일 
자기의 숙제 따위는 없어요
그 자체로써 기름이요 등이 되는
기름이와 등이 준비한
기름과 등의 숙제로 준비가 된 환자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자는 의사의 일이 필요가 없기에
자기 일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의사가 언제 어느새 오는지 간에
자기 시간이 날라가버린 상태가 아닌
자기 시간도 있고요
자기 일도 있게끔 되어 있다 말이죠
여기에 무슨
의사에게 매달릴 정도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겠냐 말이죠

전부가 될 수가 없고
그저 일부일 뿐이다 말이죠

즉 건강한 자와 의사와의 관계는
기능적일수가 없어요 이미 존재 즉 따로 따로 국밥입니다
의사는 의사일 뿐이고 건강한 자는 건강함에 있어서
이 둘의 기능은 서로 주고 받고 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름과 등을 준비하는 일이 건강한 자에게는
자기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할 일이 아니다 라는 거죠

결과가 먼저 떳기에
정답이 먼저 떳기에
의사가 먼저 떳기에

건강한 자가 증상물로 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건강한 자의 생각에 의하면 의사는
내가 아프게 되면 그 뒤에 후차적으로 만나야 할 자로 보는 거죠
이것이 선악이 만들어낸 천국 가짜천국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천국은 바로 저런 천국관 저런 가짜 구원관을 깨뜨리면서 오시는 겁니다
자기자신을 중심으로 한 시간관이 깨어지게 되면
의사가 등장함에 있어서
신랑이 등장함에 있어서
졸지에 환자가 되어버리고
졸지에 미련하게 의사만을 바라는 신랑만을 바라는 
전부를 걸게 되는 신부가 된다 라는 겁니다

신랑이 오면 그때 가서 기름과 등을 준비하면 된다 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지극히 건강한 지극히 슬기롭고 똑똑한 다섯처녀는
어리석고 미련한 다섯처녀가 되고
양인데 염소가 되고
의인인데 불법을 저지르게 되고

신랑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기름과 등을 준비한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신랑에게 전부를 걸었던 
어리석고 미련한 다섯처녀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다섯처녀가 되더라 말이죠
염소인데 양이 되고
악인인데 뉘우치고 돌아오더라 말이죠

이것은 각각의 두 부류의 다섯 처녀에게서 나오는 준비가 아니라
천국 자체가 이렇게 두 부류로 갈라놓는 다 라는 점에서
천국의 숙제
신랑의 숙제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신부의 숙제가 아닌

자 그럼 신랑은 정답으로써
천국으로써
자신의 숙제를 펼치심에 있어서
신부에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기록된 말씀을 먹일까요 안 먹일까요?

캬 여기서 또렷하게 갈라지는 겁니다 갭이 또렷하게 벌어지더라 말이죠

유대인의 결혼식은 캄캄한 밤에 그 절정을 이룹니다
마치 어두운 흑암이라는 심판의 날이 곧 구원의 날이 되는 부림절처럼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사랑-야다) 신부가 비로소 신랑을 알게 되듯이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표적을 
다른 사랑을
다른 신랑을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랑 이라는
죽음 보다 강한 절대 사랑만이
절대 죽음 속에서 펼쳐진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올린

(겔 34:12, 개역)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에스겔 34장 12절을 다시 올려 보면
참된 목자는
곧 지혜는 지식이라는 사랑은 어디에 있다
초상집에
방주에
광야의 3일 길 어린양의 죽음에 있다 라는 겁니다

그 반대로 양을 잡아먹는 목자와 그 백성인 가짜 백성은 대충 대충 넘어가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만을 주구장창 늘어놓고
자기의 의를 쌓은 것만 주장하지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강퍅한 애굽왕 바로왕처럼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십자가라는 어리석고 미련한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기더라 말이죠
잔치집을 왜 내버려 두고 왜 초상집에 가냐 말이죠

왜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는 자기 일을 다 버리고
왜 비도 오지도 않는데
배를 방주를 만들어서 (이것 자체도 미친짓이다 말이죠 얼마나 놀려 먹었냐 말이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이 마치 노아 때처럼
오늘날 교회사람들에게 놀림깜이 되더라 말이죠 )
아직 오지도 않은 심판을 대비한다 라고
노아 홍수를 대비한다 랍시고

죽으면 죽으리라 로 에스더 신부가 왕비가 이 심판날을 대비하듯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울면서 기다리더라 말이죠

노래 부르는 것 보다 우는 것이 낫고
태어나는 날 보다 죽는 날이 낫고

등등 왜 이렇게 삐딱하고 부정적이냐 말이죠

아닙니다 최고의 긍정 중의 긍정이다 말이죠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고
얼마나 사랑했으면
전부를 다 걸어서라도
죽으면 죽으리라를 걸어서라도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마치 여자가 남자를 뒤에서 안 듯이
당신이 내 낭군이군요 라고 여성적인 고백을 하더라 말이죠
베드로가 그래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안다 라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곧 신부로써 고백을 해요

오히려 기름과 등을 준비하는 조건을 갖추었노라 라고 베드로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 라고 한 것이
사람의 일
사탄의 일이고
다 날라가 버린 상태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의지 할 것이 없는 환자의 상태 즉 건강한 자 상태가 아닌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노라 라고 하는 의인의 상태가 아닌
세 번 부인 하고도 남는 죄인의 상태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우는 자의 자리에서
갑자기 앞 뒤 모순 되게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신랑이 신부를 새롭게 정결케 하는 혼인식으로써 캄캄한 밤에
신부가 든 등불로 인해서
저를 7에 70번 용서하실 사랑이라는 신랑
죽음을 이기는 사랑
음부의 권세를 멸하신 새신랑은 어서 어서 이 등불을 보시고
저를 이 어두운 스올에서 건져주세요 라고
도리어 저주의 자리가
그 심판의 자리가
그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자리가
신랑의 기능
의사의 기능을 재촉케 하는
어서 어서 7에 70번 용서해 달라고 하는 등불의 기능을 하더라 말이죠

심판 속에서 방주처럼 둥둥 떠 있는 신부의 위치
좌표를 결정해 주는 겁니다


혼인잔치의 하이라이트
캄캄한 밤에
그 요나의 바다 깊은 스올 지옥 무저갱 속에서
그 지옥에 까지 뛰어드신 그 많이 탕감하는 사랑에 의해
요나는 무화과 나무 잎이 없어도
포도 나무 열매 없어도
없어도 없어도
영원하신 말씀으로 인해 기뻐하리라 ~~처럼(하박국)

(합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9, 개역)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민 12:1, 새번역) 『모세가 ㉠구스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그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고 해서 모세를 비방하였다. / ㉠미디안(합 3:7) 또는 에티오피아』
(합 3:7, 개역)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합 3:1, 개역)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합 3:2,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수년 내에 어서 어서 심판케 하옵소서 라고 재촉하는 겁니다

이 부흥 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유일하게 딱 한 군데 나오는데 하박국 3장 2절입니다
그런데 다들 이 부흥을 잔치집으로 해석해요
그 반대로 초상집으로 해석하는 자가 없어요

진노 속에서의 긍휼인데
심판 속에서의 구원인데

이 종말의 의미로써의 부흥 곧 정답이 오면 잃어버린 양
곧 신부
어떤 다섯처녀?

세상의 기준에서는 슬기로운 다섯처녀가 미련한 다섯처녀이고
성경에서의 기준
곧 종말이라는 새신랑의 기준에서는 미련하게 전부를 걸어서
죽으면 죽으리라를 걸어서 기다린 환자에게만 필요한 의사를 그 종말이라는 기능을 펼치는
비존재 라는 없음이 도리어 슬기로운 다섯처녀로
세상과 반대로 분류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가짜 천국과 진짜 천국이 부딪힐수 밖에요
심판을 부흥을 땡겨 오면 되요
종말을 말이죠
누가? 우리가? 아닙니다 종말이
신랑이 말이죠

지난 주에 베드로서에서 나오던데 다시 한번 올려보면

(벧후 3:12, 개역)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8, 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9, 개역)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10, 개역)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1, 개역)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 3:12, 개역)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3, 개역)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14, 개역)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 3:15, 개역)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 3:16, 개역)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7, 개역)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벧후 3:18, 개역)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에 다 나오네요
도적 같이
또 더디 온다 라는 소문은

(벧후 3:9, 개역)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천년도 넘은 이스라엘의 속담인거죠
말씀 보다 결국 인간의 경험치인 속담을 의지할 정도로
자신의 신체를 기준으로 둔다 라는 점에서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이다 라고 시간 개념이 인간의 개인 신체라는 공간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말이죠



(벧후 3:18, 개역)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도 나오고요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네요


자 여기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나
오늘 본문의 더디오신다 라는 의미 조차도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의 방식과 반대로
얼마나 더디오시면 아무리 말씀이 그렇다 라고 우겨도
이미 인간 쪽에서는 약속은 더디다 라는 속담이 구체화 보편화 된 겁니다
결국 유대사회 자체가 하나의 교회 덩어리
국가 자체가 종교시스템이 된 입장에서
속담이 말씀 보다 더 구체화 되었다면
이건 뭐 자기를 위한 우상이 말씀 보다 더 구체화 된 겁니다

더디온다 라는 것은 인간의 시간성에는 절대로 안 맞추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서는 더딜수 밖에요
어느 정도로
하루가 천년같도록 말이죠

그러나 주님의 7에 70번의 용서를 바라는 자는 천년이 하루 같이
급히 이루어 지는 겁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항상 사랑이 붙들어 주시는 거지
즉 시간과 공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랑이거든요
크나 큰 영원한 사랑이거든요
성전 자체의 기능인데

인간들은 조건을 따지다 보니 시간과 공간에 재약을 가합니다
그러니 성전에 바치는 금처럼
돈 떨어지면
금 떨어지면
싱전의 기능도 멈춘다 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너희들이 보기에 죽은자와 같은 하루살이 같은
과부의 헌금이 천년을 확 당겨 버리는 종말의 헌금으로
돌 위에 돌을 하나도 남김없이 진짜배기 참성전이 오라 라고
가짜 성전 그림자 성전은 어서 허물어져라 라꼬
하루살이의 전재산을 다 바치더라 말이죠
마치 오늘 본문의 슬기로운 다섯처녀가 신랑에게 전부를 걸어버리듯이
부자의 헌금은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부자 자체가 영원성으로써 따로 자신의 영원성을 챙겼기에
마치 건강함 이라든지
의인됨 이라는 선민이라든지
그러니 전부를 거는 그런 종말의 행동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을 못 펼치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청년의 시선에서는 이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미련한 모습인 거죠
오히려 미련하다고 판명이 난 다섯처녀가 부자청년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겁니다
율법을 어릴적부터 지킨 등을 준비한 것으로도 됐지 뭐
전재산을 다 바칠 정도로 기름까지 준비할 필요가 뭐가 있냐

주님은 너 그거 준비 안했지 기름?
전재산을 나눌수 있는 마음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없지?
신랑을 전부를 걸어서라도 사랑하는 마음은 없지?
그렇다면 그런 천국은 존재를 위할 뿐이지

예수님을 위한 천국은 아닌
자기를 위한 우상천국
가짜천국 곧 지옥이다 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멍청하게 천국이가 인간이 죽을때까지 기다렸다가
청기 올리면 지옥 백기 올리면 천국처럼 신호등으로 이쪽으로 가세요 저쪽으로 가세요 라고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 교통 안내원이 아니라

아예 이 지상으로 내려와서
미리 갈라버리시는 식이다는 겁니다
인간을 안 기다려줘요
부지불식 간에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미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자와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된
태어나기도 전의 확증된 사랑을
이 땅에 쳐들어 와서 갈라버리시는 겁니다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로 지옥가고
원인 없는 결과로 천국 가지

준비를 인간 쪽에서 잘 하면 천국
준비를 못하면 지옥이다 라는 가짜천국을 깨뜨리면서 쳐들어 오실때에

무엇이 영원하냐 라는 겁니다

삭제될 것을 붙잡느냐
아니면 영원한 크나큰 유일한 단 하나를 붙잡느냐

붙잡냐 라는 인간 숙제가 아닌
원인 없는 결과로써
증상물로 나타나느냐 라는 겁니다

지난 주에 무엇이 없어서 망한다?
라고 갑자기 까먹어서 호세아 이지 싶다 라고 녹음이 되었는데
아모스 8장입니다

그 반대로 아무것도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네 하박국 3장이구요

즉 물이 부족해서 망하는 것도 아니고
양식이 먹을 것이 모잘라서 망하는게 아니였다 말이죠

(암 8:11, 개역)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2, 개역)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암 8:13, 개역)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암 8:14, 개역)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마지막 때 라는 부흥의 때 종말의 때는
영원한 말씀이 없어서
아무도 알려주는 자가 없어서 
이 영원한 말씀을 들려주는 자가 없어서 망한다 라고

지극히 전지적 영원한 말씀 시점으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즉 인간 쪽에서 듣고 싶습니다 이제 늦게라도 알려주시면 저는 들을께요 라고
인간의 시점을 고려하지 않아요

시간 자체가 날라가 버린다니깐요

그러니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라는 말은

듣는이가 없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없다 라는 비존재라는 기능으로만 일하라 인자야 에스겔아 라는 겁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라는 말은
시간 나면 증거하라는 말이 아니라

미련하게 신랑이 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신랑이 옆에 있는냥 행동하는 모습으로써
속이는 자 같으나 참 되며처럼
아직 비가 오지도 않는데
어서 방주에 들어가라 라고 초상집에 가라 라고 초를 치며
애굽왕 바로왕에게 곧 심판이 온다 라고 그래서 어린양의 희생을 쳐다 볼란다
안돼 못 보게 만들꼬야 라고
캄캄한 밤에 등불을 못 키도록
신랑이 못 찾도록 에덴동산 같은 여기 잔치집에서 벗어나지마 라고 하더라 말이죠
왜? 아무리 들어도 속이는 자 같거든요 누가? 모세가 말이죠
바로 왕의 입장에서 말이죠
그러니 강퍅함이냐 속이는자 같느냐 로 두 부류로 갈라버리시는 겁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두 언약(갈라디아서)만 한 세트가 됩니다


아무리 원인 없는 결과로 따져도 정답을 미리 받아도
인간은 강퍅함도 싫고 그렇다고 속이는 자 같은
저 미친듯한 방주 만들기 라는 남들이 비웃는 일이라는 하나님의 일 보다
자기 일을 먼저 우선시 둔다는 점에서

이 말씀은 더디 온다 라는 사람의 속성들 들추어내는 겁니다
배불러 터진 구원만을 쫓겠다는 거죠

그러니 우는 자가 복 된 이유는
초상집에 가는 자가 더 지혜로운 이유는
물론 자발적으로 가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구요
베드로처럼 얻어 터지고 난 뒤에
탈탈탈 다 털려서 개털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는
비밀을 말이죠

비밀 자체가 못 듣도록 귀를 막아버리니
귀머거리 입장에서
바울처럼 눈이 가버린 입장에서
더 이상 자기의 눈이 이제는 없는 입장에서
주님의 눈으로만 보는 시점에서 보니
그 동안 성경을 봤던 모든 시선이
십자가라는 정답에서 이제는 문제지만을 찾게 되는 거죠
그것이 문제지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처녀로
정답은 두 부류로 나누었다

누가 슬기롭고 누가 미련하냐 라고
정답을 묻는게 아니라
이미 정답이 왔기에

너는 어느 문제지이니? 라고 묻는 겁니다

자기 일이 있는 다섯처녀이니 부자청년처럼
아니면 자기 일이 없는 전부를 신랑만 기다리는 다섯처녀 이니 마치 탕자처럼

불의한 자니
의로운 부자청년이니 라고

정답이 자신의 문제지를 찾는 겁니다

거꾸로 쳐들어 오시는 겁니다

잡았다 잡았다 잡았다 라고 알바 자리 잡았다 라고
자리 

의자를 잡는 광고처럼

반대로 처녀를 저를 잡아주세요 라고 등불을 켜고 있는데

나머지 다섯처녀를 뭘 믿고

나 여기 있어요 저를 찾아주세요 라는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 배불러 터져 있다 라는 겁니다

이미 자기의 일들이 있으니
우선순위도 아닐뿐더러
전부를 걸수도 없는 그저 많은 일들 중에 한 부분일 뿐이다는 거죠

건강한 자처럼 말이죠

그러나 환자에게서는 의사가 전부이듯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자신이 심은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자를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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