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 양을 잡아먹는 삯꾼목자와 vs 잃어버린 양을 찾아 꼴을 먹이시는 섬기는 목자 (겔 34, 9-16)

인자야! 자기만 돌보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겔 34, 1- 9)
에스겔 2019 2021. 3. 27. 13:52
19-88 인자야! 자기만 돌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쳐서 예언하라 (겔 34, 1- 9)

〈에스겔 34: 9-16, 개역한글, 구약성경 1205 쪽,  찬송가 0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9)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1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2)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13) 내가 그것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14)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1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
(16)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겔 34:9, 현대어)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겔 34:10, 현대어) 『내가 너희들에게 책임을 물어 내 양 떼를 배상하도록 요구하겠다. 너희를 이제 목자의 자리에서 내쫓고 다시는 내 목자가 될 수 없게 하겠다. 너희가 다시는 내 백성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겠다. 너희의 목구멍 속에서 내 양 떼를 끄집어내어 다시는 내 양 떼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겠다.'』
(겔 34:11, 현대어) 『[선한 목자]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이제는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찾아서 손수 그들을 돌보아 주겠다.』
(겔 34:12, 현대어) 『맹수에게 쫓겨 흩어진 양 떼를 목자가 하나하나 다시 모아 놓듯이 나도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다시 모아 놓겠다. 그 환난의 날에 맹수에게 쫓겨 흩어져 간 그 모든 곳에서 네가 다시 그들을 데려오겠다.』
(겔 34:13, 현대어) 『세게 여러 나라와 뭇 민족들 사이에 흩어진 그들을 내가 데리고 나와서 한 곳에 모으겠다. 그리고 다시 고향땅으로 데리고 들어가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와 골짜기에서 내가 그들을 먹이겠다.』
(겔 34:14, 현대어) 『기름진 초원으로 내 양 떼를 데리고 다니며 먹이겠다.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 위에도 기름진 목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내 양 떼를 쉬게 하겠다.』
(겔 34:15, 현대어) 『내가 손수 내 양 떼를 돌보고 내가 직접 그들을 데리고 가 쉬게 하겠다.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겔 34:16, 현대어) 『잃어버린 양들도 내가 찾고 뿔뿔이 흩어진 양들도 내가 다시 데리고 오겠다. 다리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는 양들은 싸매어 주고 병든 양들은 튼튼하게 고쳐 주며 살지고 튼튼한 양들은 말썽을 부리지 못하도록 내가 다독거려 주겠다. 내가 이렇게 그들을 공평하게 돌보아주는 목자가 되겠다.』


주님은 이 세상을 지은 것에 대해서 후회 했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노아 홍수 심판입니다

즉 심판이라는 의미는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고
그 심판을 통해서 잘못된 것을 고치시겠다 라고 나서셨다 라는 거죠

결국 구원이라는 것은 이 심판성을 전재로 한
바르게 펼치시겠다는 정의 공의성이 들어간 의미이겠죠

문제는 이 심판성을 배제하고서 구원을 운운하게 되면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들이 성경 전체의 3분에 2씩이나 문자적으로도 차지하고 있는데
삼분의 이를 찢어버리고 어떻게 반도 안되는 2 분의 1도 안되는 것을 믿겠다 라고 하겠냐 말이죠
이게 농담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바리새인 곧 유대인의 지도자가 그랬다 말이죠
여기에 한국교회는 수십년동안 거의 100년을 넘을 동안
2분의 1도 아닌 10분의 1도
그야말로 십일조 하나 만의 사기치는 기술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니
뭐 말 다 한거죠
실제로 체험한 것이
제 블로그 검색순위 1위가 십일조 문제이다 말이죠
각종 기독교 미디어 상담 문제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2017년 쯤 부터는 십일조로 검색하는 순위가
10위 건 밖으로 나가버리더라 말이죠

이제 돈 으로 사기치는 기술은 한계점을 찍었다 라는 거죠

이제 심판이 점점점 구체화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보시는 시체를 보시는 시선 처럼 그 정도로 위험하다
그래서 바르게 잡고자 심판하시고
그 심판 속에서 구원을 펼치신다 라는 것인데

결국 구원은 심판이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정도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심을 보는게 아니라
이제는 사기꾼들이 십일조 내라 라는 소리로도 귀찮게 하지를 않으니까
이제 아예 교인들 자체가 사기꾼들로 나서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마치 조폭들이 요즘에는 스마트폰으로 다 찍어서 생방을 해 버리니까
위의 행님들이 위기를 느끼게 되니
아예 합법적인 사업으로 돈을 버는게 있어서
정치와 손잡고 경찰을 매수해서 사업을 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경찰이 용역 깡패를 불러서 사건을 해결하는
법이 손에 더러운 것 안 묻히고자 하는 것을
조폭들이 놓칠이유가 있겠냐 말이죠

세상에! 법 보다 방관자가 세상에 어디있겠냐 말이죠
법이야 말로 방관자 제일 1등입니다
강도 만난 자를 제사장과 레위인이 쓱 지나쳐 버리듯이 말이죠
왜? 법을 지켜야 하니까 말이죠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써 달라고 해야 하니까 말이죠

(눅 18:1, 개역)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눅 18:2, 개역)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눅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눅 18:4, 개역)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눅 18:5, 개역)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눅 18:6, 개역)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눅 18:7, 개역)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성경에도 나올 정도로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는 재판장 법관이
과부의 귀찮게 하는 기도 땜시
나서게 될 뿐이지
안그러면 계속 귀찮게 할 뿐이다 말이죠

이것을 이 불의한 재판관을 저는 고레스 라고 했고
강퍅한 애굽왕 바로왕을 통해서 영광받는다 라고 했다 말이죠

결국 여기서 기도란 영적인 일로써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만 벌어지는 종말의 기도로써
행함이 있는 믿음 곧 부정의 부정으로써의 종말의 행위로써
마지막 끝을 확 끌어오는 종말성 즉 심판 속의 구원을 말하는 겁니다

종교인이라는 달인들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말이죠
인간 기도 안 받습니다
종말성이 없거든요존재의 기도 안 받아요
비존재의 기도만 받아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는 것은 종말성이다 말이죠
누가 이 심판을 구하고 찾고 심판에게 문을 두드립니까

심판아 심판아 어서 깨어나렴 라고 하듯이 마구 마구 문을 쾅쾅쾅 다급하게 두드리는 겁니다
구원은 그 정도로 다급해요 급해요
천천히 더디 온다 가 아닙니다
지난 주 마태복음에서 다들 더디온다 라고 하잖아요
왜? 삯꾼 목자이기 때문이거든요

(마 24:48, 개역)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마 24:41, 개역)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 24:42, 개역)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마 24:43, 개역)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 24:44, 개역)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5, 개역)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마 24:46, 개역)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마 24:48, 개역)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마 24:49, 개역)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마 24:50, 개역)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마 24:51, 개역)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심판아 심판아 어서 깨어나서 우리를 심판을 하렴

이것이 종말의 기도 이다 말이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물어 달라고 하는 과부의 헌금 곧 종말의 헌금이듯이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다
곧 믿음이란 믿음 자체가 종말에만 나타나거든요
믿음이 종말성이다 말이죠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니까 말이죠
막 막 종말을 마구 마구 확 끌어당겨요

그래서 과부가 심판에게 문을 두드렸다 말이죠
이 종말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과부의 심정이 오늘 나오는 선지자의 심정
인자의 심정이다는 겁니다

빨리 빨리 이 더러운 죄악들을 불태우자 라고 말이죠
후회 하시자 마자 홍수로 심판했다 말이죠

세탁기에 물 받아서 세제 넣고 돌려서 죄를 빨아버렸다 말이죠

이제 다시는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데요

이것을 인간이 가만히 듣지 않아요
반드시 역이용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치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 라는 것을 법제화 해서 고정화 시켜버린 것을
역이용 해서

지지난 주에 그런 말 했잖아요
악인은 뉘우쳐 돌아오고
의인은 선민이라고 규정한 그 선언을 역이용 해서 본격적으로 불법을 저지른다 라고

이제 물로 심판 하지 못할껀데 우짤것이여 라고 까불다가
그래 물로는 심판 안하는 거 맞아

이제는 불로 심판 할껀데 우짜노 라고 하시는 겁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것이 확실해 지니까
저 죽음은 확실하게 규정 되었음과 동시에
나는 안 죽었고 살아있음을 확실하게 규명이 되니까
저 사람들은 저주 나는 축복 이라고 규정한 것 자체가
그런 선악의 마음 자체가 지옥이다 라는 것을
오늘밤 니 영혼 취하면 우짤래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노아 홍수로 인해 처음으로 비가 왔으니 말이죠
춥디 추운 체온 저하 라는 심판성을 격는다 말이죠
그러니 북쪽 사람들의 지옥 개념은 추운거다 말이죠
반대로 성지와 같은 천국개념은 따뜻한 남쪽개념이였다 말이죠

그러나 이제는 불로 심판을 해 버리면 추운 북이든 따뜻한 남쪽이든
다 불타 버려요

인간이 딛고 있는 그 어떤 땅도 성지가 없을 정도로 다 불로 태어버리는
지옥으로 만드시겠다 라는 것이
주님의 다급함 위기의식인데

이 급하디 급히 오시겠다 라는 종말성의 구원에

인간은 한가롭게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 맹세하고 기도하더라 말이죠
깨작 깨작 소꿉놀이 장난 종교오락을 하더라 라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겠다 라고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깨작 깨작 ~~~~~~ 장난하냐 말이죠

그러나 이들이 정작 불법을 저지를때는 개눈감추듯이 
빛의 속도로
양을 잡아먹어 버린다 라는 겁니다

그런 거짓선지자와 삯꾼 목자들이
과연 양들에게 양식을 먹이겠습니까
아니면 늘 입맛 다시면서 언제 잡아먹을까 라고 호시탐탐 노리겠습니까

자 이런 위기 속에서
주님이 구원을 펼치시겠다 라는 것은

오로지 구원 자체가 주님만의 아이디어 이지
인간에게서는 구원이라는 의미를 나타낼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어떤 아프리카 부족에게
자유 라는 말이 없다고 하더라 말이죠즉 종 되었던 적이 없는데 너가 뭔데 자유케 해 준다는 둥
구원 되게 해 준다 라는 둥
다릅할게 하나 없는데 위기 속에서 구출해주겠다 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 말이죠

즉 이들은 늘 잔치집과 같았다 라는 거죠
초상집이 아니라

주님이 초상집에 가라 라는 이유는
이 땅은 위기 속에 있기에
탈출해야 한다 라는 주님의 지혜의 말
곧 지혜자의 말을 들어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혜자도 필요가 없고
지혜자의 말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급할 게 하나 없는
위기감이 없는데 저런 소리를 자꾸 하면 반발성이 일어난다 말이죠

바로 이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 땅이 죽은 땅이라 라는 것을 선언한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탈출해야 하고
이 위험한 땅을 주님은 심판하시기로
불로 태우시기로 작정했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라는 겁니다

아니 생각을 해 보세요
출애굽 사건을 얼마나 많은 영화나 연극이나 문학이나 애니메이션이다 다 주구장창 만들어서
많이들 봤다 말이죠
유대인들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엑소더스 라고
심지어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의 이야기요 본인들의 이야기 하고 하잖아요
물론 세계에서 가장 무신론자가 많은 나라이고
모세교 라고 하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그림자입니다
아무리 출애굽기 사건 십계 사건 엑소더스 사건이
전설따라 삼천리 라고 아무리 전해오고 내려오고 전해져도 말이죠
그림자이고 실상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그 당시 잔치집은 애굽이였고
그 잔치집 에덴동산과 같았더라 라는 애굽을 탈출하여
가짜천국을 탈출하여
광야로 들어간 사건이다 말이죠 초상집에 간거다 말이죠
왜? 어린양의 죽음을 기념할려고

바로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누가 이 세상을 탈출해서
그 잔치집을 탈출해서
교회를 탈출해서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겠냐 말이죠

출애굽때에 모세가 얼마나 말도 되도 않는 소리를 했듯이
아무도 그 모세의 비정상적인 말을 안듣듯이

오늘날도 마찬하지입니다
아니 가짜천국과 같은 교회를 벗어나서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가라꼬 ~~~~~~

그 당시는 특정 장소 특정 시간이였지만
이제는 누구 라고 하는 구체적인 인물과의 관계성이다 말이죠
그렇게 그렇게 목사와의 관계를 맺고자 그렇게 수십년동안 공들여놨는데
그 교인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뭐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라 라꼬????

도대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가 누구관대??
안 보내 줄란다 라고
강퍅한 애굽왕이 십자가를 못 보도록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못 쳐다보도록 하더라 말이죠

누가? 오늘날 목사들이 말이죠

그냥 돈 만 바치래요 돈
돈 없으면 몸으로 때우던가

교회는 복 주는 곳이니까 돈만 바치면 복 준다 라는 겁니다.

어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림자로 속임수를 펼치느냐 말이죠
실상이 또렷히 있는데 말이죠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 맹세하고 기도하는 종교오락 돈 놓고 돈 먹기 장난치는
깨작 깨작 장난 치는 것이고

진짜 성전의 기능은 단 하루 만에 7에 70번 용서하는
저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는 것이다 말이죠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어요
다른 실상 있으면

반박 해 보라 말이죠

아니 그런데 목사놈들은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뭐 그리 변명이 많아서
그게 아니라 한 쪽만 치우치지 말고 이런 것도 있다 라고
자꾸 핑계를 대더라 말이죠

결국 목사라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아니 그것이 영원하면 인정해 줄께요
다 삭제 된다니깐요
사라져요

영원한 말씀만 남고요 다 사라집니다
인정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이죠

그러니 실상이신 예수님이 오면
결국 그 목자의 자리에서 밀려나야 할 판국이다 보니
이런 발악들을 마구 마구 징징 거리면서 마구 해 대는 겁니다

자 문제는 또 강조합니다만
에스겔때는 그런 지도자들 아 죽고 없어요
일송정 푸른 솔은 선구자들 다 죽었어요
그런데 이런 소리가 무슨 소용있냐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그 지도자들 곧 삯꾼 목자로부터 세뇌 당한 백성들이
과연 그들 지도자들이 다 죽고 없다고 해서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그런 잔치집을 외쳤던 강퍅한 애굽왕이 없다 라고 해서
그 없는 애굽왕을 쫓아가는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니다 라고 할수 있냐 말이죠
뻔히 최고의 국가인 에덴동산과 같았더라 라는 최고의 잔치집이
지옥이라는 실상으로 드러났어요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외치는 광야를 거부하는 백성 아니다 라고 할수 있냐 말이죠

바로 그런 점에서 여전히 인간은 안일하게 대소롭게 여기지 않는 반면에
여전히 주님 혼자 바삐 다급하게 위기감을 갖고
이 심각성을 외치시는 겁니다

아니 음부의 권세 속이라는
그 당시의 최고의 나라 바벨론
곧 큰 성 바벨론 아닙니까
과거의 에덴동산과 같았더라 라는 애굽의 뒤를 쫓는
지금 현재도 모든 나라는 부자의 나라 잔치집을 원하고 있지
누가 가난한 나라 초상집을 원하냐 말이죠

원치 않게 코로나로 이제는 부자 나라든 가난한 나라이든
상관없이 코로나가 덮치게 되니까
다들 초상집이 되었잖아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부자라고 돈 있다 라고 피해버리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긍휼히 여겨 봐주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 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 입니까
밥 한 공기 밖에 못 먹는다 라는 겁니다

부자 라고 해서 위가 두 개가 되어서
되새김질 하도록 정결한 짐승에 자동적으로 놓여지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위가 하나 밖에 없는 부정한 짐승이다는 거죠
밴또 도시락 하나 밖에 없기에
인간은 떠날 마음이 없다 라는 겁니다

벤또 도시락 위가 두 개이면 떠날 준비가 늘 되어 있는데 말이죠
이것이 정결한 짐승 곧 종말의 기능을 하거든요

웃끼게도 성화론자들의 그 거룩한 삶이라는 성화 곧 정결함이
존재를 우기는 정결이라는 거룩을 주장할 뿐이지
기능을 나타내는 종말성의 거룩은 하나도 없어요 완전 정반대의 모습만 갖추었으니까 말이죠
행함이 있는 믿음을 거꾸로 이야기하거든요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일수록 점점점 이 십자가를 어떻게 해서든 안 볼려고 하는
강퍅한 애굽왕과 같더라 말이죠
자신들의 사적인 개인 거룩만 자랑할 줄만 알았지
경건의 모양만 껍데기만 갖추었지
경건의 능력인 7에 70번의 용서를 거부하는 자들이더라 말이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사단의 회 인 유대인과 너무 너무 똑같아요

그들이 과연 때에 따라 일용할 양식을 양들을 맡겨놓으면 때에 따라 양식을 먹일까요
아니면 잡아먹을려고 등쳐먹을려고 할까요

등쳐먹죠
그래서 다들 목사랑 친하게 지내서 같이 양들을 등쳐먹어요 글쎄

그러니 이미 포로 잡혀 온지 10년 이상 지나서
지도자들 다 죽고 없어요
그 버릇
그 우상성
그 안일함이 여전히 있는 가운데

이 다급하고 심각하게 외치는 목자의 음성을 그들은 과연 들을까요
백성들 조차도 거짓목자와 같은 마음이라서 안 들을려고 하는 겁니다

웃끼게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를
오늘날 삯꾼 목자들이 도리어 더 잘 외쳐요
왜? 일단 돈이 되거든요
돈이 안 되면 바로 접어요
안그래도 바로 접어버리는 것을 봤어요 다 삭제 하더라구요

듣든지 아니듣든지 라는 말씀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라는 말씀은

다급함을 심각성을 급박함을 임박함을 말할정도로
아무도 안 듣는다 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말씀입니다
즉 최후의 마지막 발언자의 심정이다 라고
곧 문이 닫힌다 라는 의식에서 나온 겁니다

나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이 말씀을 바톤을 이어 받아서 외칠 것이다 라는 둥의
그런 여유성이 있는 말이 아닙니다

나 다름에는 다른 주자는 다시는 없습니다
나 로써 이제는 끝입니다 라고

마지막 주자로써 이 말씀을 한다 말이죠

에이 그런게 어디있노
거 봐라 에스겔 다음에도 또 참선지자도 있고
나중에는 예수님도 오잖아요

다음 주자가 얼마나 많은데
마지막 주자가 말이 되냐

거보세요 거봐 에스겔 당시에는 에스겔과 함께 묶인 세대로써
그들은 에스겔 다음에는 없는 세대로 끝납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 하라 말이죠

내일은 없어요

오늘은 오늘 뿐입니다

내일을 운운하는 것도 오늘에서 운운하는 거지
내일이 오면 그것은 내일로 남는게 아니라 또 오늘이 되는 겁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에스겔과 묶여버린 자들은 다른 주자는 없어요
에스겔이 마지막 주자일 뿐입니다

그것을 전제로 하고 듣든지 아니듣든지 라는 말씀은
안 듣는다 라는 집단성을 다 전제로 깔고서

다급성을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즉 남들은 안 다급해도 나 베드로 만큼은 다급하게 듣겠습니다 라고 못해요
개인 사적인 의미는 없거든요
집단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기능이니까
존재가 아니니까

그러니 비존재 로써
에스게은 안 듣는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미 죽이시기로 작정이 된
종말의 인물로써
믿음으로 하는 거지

행함으로 하는 실천개념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실천 따위는 천재들이나 잘해요
천재가 아닌 자들은 좀 더 늦을 뿐이고

그러나 사도나 선지자 는 죽이시기로 작정이 된 공무원입니다
이것이 사도와 소크라테스와의 차이입니다
비존재와 존재의 차이
기능과 존재의 차이
초상집이라는 광야에서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닌 자와 창의적인 잔치집을 외치는 자 와의 차이입니다

창의성은 자기에게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으면 자살할려고 해요
유토피아 건설에 실패하면 가룟유다처럼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를 못 보게 하고자 방해 하는 강퍅한 자들입니다

마치 어려운 수학은 잘 푸는데
갑자기 1 더하기 1을 못 풀어서 나는 바보인가봐 라고 막 자살해요
우울감에 빠지고 자신을 못 살게 자해를 하고

원래 바보였는데 믄 천재라고 착각했냐 말이죠
이제 알았냐 바보인줄
제자리로 돌아온 것을 기뻐해야지
탕자야 죽었다 살아왔구나 ~~~~~~~~~~

쪼매 성화 좀 했다고 얼마나 정죄를 하고 돌아다니는지 원
살인마가 따로 없어요

결국 이런 속성을 백성들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태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겠다 라는 것은

누가복음 1장처럼

많은 유대인 냅뚜고
또 많은 유대인 과부 냅뚜고
또 많은 이방인 냅뚜고
또 많은 이방인 과부 냅뚜고
딱 한 사람 이방인 중에 단 한사람 사렙다 과부 에게만
선지자 엘리야는 보내심을 받았다 말이죠

엘리사 또한 마지막 주자로써
오직 단 하나 뿐인 그대 라는 전진 아니다 심진? 심신의 노래를 부르면서
단 한 사람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 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 말이죠

아무도 안 듣는다 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상태이다는 거죠
듣든지 아니듣든지
때를 얻든지 아니얻든지 간에 상관 없이

불도져로 밀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가장 지옥과 같은 잃어버린 자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에게만
희년 곧 복음이 증거되더라 말이죠

사랑은 원수에게만 의미가 있으니까 말이죠

즉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 라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

없는 자를 찾겠다 라는 겁니다
없는데 어떻게 없는 자를 찾습니까
없는데

존재로써는 없어요

그런데 기능 곧 비존재로써는 있어요
그것도 존재 보다 더 또렷하게 있어요

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참된 목자가 떳기에
그 증상물로써 오히려 존재 보다 더 또렷하게 비존재는 존재하는 겁니다

바로 에스겔 자체가 거기에 해당 됩니다
개인 존재를 날라가 버린
개인이 없어요

그런데 죽은자 같으나 오히려 더 산자 같아요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다 가진자 같아요
죽이시기로 작정이 된 이 에스겔이 말이죠

내일 아궁이에 던질 이 들풀도 귀히 입히시듯이 말이죠

오히려 솔로몬의 영광이 이 들에 핀 백합화 보다 못하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이고 40년 만에 겨우 일곱 번 ? 때려치워라
다윗이 70 살 인가? 60살 인가? 죽고
솔로몬이 70인지 60인지
아무튼 둘 사이가 10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10살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로
부요하면 뭐 합니까 겨우 60이요 70인데

이 죽음은 솔로몬 왕이라고 해서 부자라고 해서 봐주고
피해 가는게 아닙니다

이 죽음이야 말로 인간은 부정한 짐승에 해당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남을 7번 용서하는 성화의 달인으로써
거룩을 실천해도
위가 하나 밖에 없는

거 보세요 면류관을 반납도 안하고
떠날 마음이 없는 벤또 도시락 한 개 밖에 없음을 팍팍 티 내잖아요

지가 지 스스로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티 내고 있는데
뭐 십일조 했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하나님한테 감사한다고 아무리 자기를 세뇌 시켜도
신체 자체가 스스로 부정한 짐승임을 티를 팍팍 내고 있어요

그러니 큰 것을 쳐다볼려고 하지 않으니까

더디 온다고 여기니까

티를 팍팍 내니까

도둑같이
갑자기
다급하게
훅 들어닥치는

이 종말을

비로소 거부하는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이 심각한 죄악성을 십자가 사건으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를 쌓고자
잔치집으로 자신의 신체를
국가라는 몸을 구성할려고 창고를 늘리는 부자처럼 행동한다는 자체가
이미 지옥이라는 몸임을 티를 팍팍 내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음을 전제로 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나타나는 잃어버린 양

왜? 참된 목자가 떳기에
원인 없는 결과가 떳기에

시험 없이 합격이 떳기에

정답이 먼저 떳기에

이제 나타나는 목자에게 딱 맞는 잃어버린 양을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이제 정답은 문제지를 찾는거죠

누가 70년 만에 다시 돌아가 저 새성전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짖는 것을
목격하는 증인이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지를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본인이
잃어버린 양으로써 나타남으로써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고

다시 그 잃어버린 양을 찾고자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로써 나타나시는 겁니다

이것이 주께서 내 주께 라고 했습니다

심판주의 심판을 본인이 심판 당하셨듯이 (절대저주)
스스로 내어주시고 스스로 되찾으시는 겁니다 (절대사랑을 나타내심)
이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주시는
예수의 흔적 속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스스로

(요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1,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개역)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개역)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9, 개역)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요 10:20, 개역)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요 10:21, 개역)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그야말로 귀신 시나락 까먹는
말도 안되는 소리일 수 밖에 없다 말이죠
오죽하면 신체라는 육이 못 받아들이는 티를 팍팍낼 정도로
지들끼리 논쟁하면서 싸워요
그럼 귀신을 물리친 것이 뭐냐 라고 본 것을 의지하는 사람과
이성을 의지하는 사람과
둘다 다 본 사람
그러니 이것은 오히려 이해력
인간의 믿을꺼리만 주면 언제든지 믿겠습니다를 피해가는
그야말로 못믿는 말만 골라서
안믿는다는 것을 전제로 까는
듣든지 아니듣든지를 구체화 시켜서
인간 쪽에서가 아닌
주님 쪽에서만이 자기가 사랑할 자만 챙겨서 가시겠다 라는 겁니다
긍휼히 여길

바로 참된 목자가 떳기에 반드시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없는 양
잃어버린 양

잃어버렸는데 
없는데 더 또렷한
비존재로서의 자기 양만 챙기시고자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안다 라는

이 공명의 관게
끈 이론처럼
사이
간극
공백 이론처럼
말이죠

한 몸만 챙기시겠다 라고

대 놓고서 내 몸 어디있노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자야 어디있노
라고 찾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말이죠

이 참 된 목자의 등장을 말하기 위해서
가짜 목자
거짓 목자
삯꾼 목자들이 배경으로 깔리는 한세트를 구성하고

다시 그 참된 목자 가 찾는 없는 양, 잃어버린 양을 찾고자
99마리 양이 그 자리에서 밀려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진노의 그릇으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야곱과 에서가 한 세트로써 두 언약이 한 세트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요 10:1,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 10:2, 개역)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요 10:3, 개역)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 10:4, 개역)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요 10:5, 개역)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3, 현대인)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데리고 나간다.』
(요 10:4, 현대어) 『양들은 앞장 서서 걸어가는 그를 뒤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라고 했습니다

즉 초상집이라는 광야의 삼일길에 어린양의 죽음을 쳐다보라 라는 음성이거든요

그런데 다른 목자는 다른 음성을 냅니다
다른 양들 곧 아흔아홉마리 양들도 무슨 소리인줄 모릅니다

(요 10:19, 개역)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요 10:20, 개역)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요 10:21, 개역)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이들은 이미 자기 사적인 의의 자리, 구원의 자리를 자기 스스로 마련하고자
하나님께 열심을 내었거든요

욥도 그랬습니다
자기의 의로운 자리에
저주가 떨어지는
애매한 고난
곧 케보이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말 좀 해 보라 라고
즉 말해도 못 알아먹을 정도로 이해불가가 덮쳐졌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답을 보게 되니까
저주가 떨어짐이 거부해야 할 꺼리가 아니라
천부당 만부당 할 정도로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한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사망의 몸
되도 않는 깨작 깨작 장난질 친 남 겨우 7번 용서를 했다는 것이
얼마나 수 많은 사람들을 도리어 죽음으로 몰아간 짓임을 몰랐다 라고

저주 다운 저주 인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내 심판은 내 저주는 저주 축에도 못 든다 라고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았다 라고
재를 뿌리고 머리를 쳐박고 생일을 저주 하는

지혜자가 떳기에

마땅히 나는 초상집과 같은 신체임이
육임이 드러나야 하는

살리시는 영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더라 말이죠

살리시는 영
곧 산 자의 하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시고자
자신의 의의 자리를 죄의 자리로 만들었다 말이죠

그 앞에서 졸지에 욥은 호명이 된 겁니다
같이 동참케 되어버린 겁니다

한 몸으로써 내 몸 내 따로 챙기고자 했던 내 개인적인 사적인 몸이 날라가 버리고
예수님의 몸과 함께

의인의 자리였던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서

아니 아예 죄가 되어버렸습니다
죄인 인 사람인 이라고 하면 또 존재가 되어버리니까
죄 라는 기능 자체가 되어야 포착이 안되고
이해가 불가능함에 있어서

같은 한 몸이 되지 않는 이상
이 목자의 음성을 복음을 십자가의 피 용서 라는
절대 저주와 절대 사랑을 알 길이 없는 겁니다

마치 다윗이 주께서 내 주께 라고
자손에게 주 라고 희한하고 말이 안되는
언어의 법칙(선악의 언어, 남근의 언어)에서 벗어나는
미끄러지는 언어를 하고
비밀의 언어로 하고
오히려 그 비밀이 비밀끼리 서로 잘 통하고
존재와는 단절이 되는
존재의 언어에서 벗어나는 소리를 하시니까

인간들끼리 존재들끼리 분쟁이 나듯이
가는 곳 마다 분쟁 소동이 벌어지더라 말이죠

그러니 왜 주님은 의 그 자체이면서
왜 죄 그 자체가 되는 자리에 가셨는가 말이죠

그것은 상대적으로 인간은 무슨 자리를 늘 노린다
마귀처럼
늘 비어있는 보좌만 보면 침을 질질질 흘리는
그 본색을 드러내시고자 하심입니다

늘 마귀가 독수리가 시체를 늘 노리듯이
이미 마귀에게 시체라는 먹잇감으로 작용됨에 있어서
주님 또한 인간을 보는 시선이 바로 시체보듯이 죽은자로 보시는겁니다

자기 의를 쌓고
믿음 쌓고
성경지식 쌓고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남 7번 용서
금식기간에 금식하는 경건 쌓기가

마귀가 늘 노리고 있는 먹임감 짖임을

주님은 마귀를 보고서 심각하게 여기시는데
인간은 천하태평이라서
종교오락 게임으로써 누가 점수가 더 많니 적니 라고 나오는데 있어서

그 높고 낮음 자체가 선과 악 자체를 밀어버리시겠다 라고

자신이 마귀가 노리는 죄가 되어버리셨다 말이죠

그래야 사단의 깊은 것이 드러남에 있어서
더 이상 마귀가 노릴 것이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십자가의 피 용서만 절대로 쳐다보지 못하도록만 하면 되거든요

절대 저주와 절대 사랑인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간극
이 상처
이 흔적
이 요나의 표적만 못 보도록 하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잔치집에만 머물도록
자기 의로움을 쌓도록 마구 마구 도움 주는 광명한 천사짓만 하면 되거든요

왜 그런데 악인이 회개 하고
의인이 불법을 저지르는
이 십자가의 사건을 벌리시느냐 라는 겁니다

지금 바벨론 포로 속에 있어도
초상집에 간 죽은자가 되어도

인간은 여전히 잔치집을
권력의 자리를
의인의 자리를
모세의 자리를 늘 호시탐탐 노리더라 말이죠

광야 속에 아무리 있어도
왜 낮추시고자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꺾으시는
왜 케보이 왜 하나님은 우리를 못 죽여서 안달이 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주님이신가를

저 광명한 천사 노릇으로 늘 시체를 호시탐탐 노리는 마귀만을 겨냥하고 있다 말이죠

총 들고 죽이고자 다가오는 마귀 앞에
맛있는 사탕있다 먹고 마시는 잔치집이 있다 라는 말에

주님은 우리를 초상집처럼 쥐죽은 듯이 입을 막아서 숨조차 못내도록
마귀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심에 있어서

나 여기 있어요 나를 인정해 주세요
나 살아 있어요
나는 죽어있음보다 살아있음을 누릴래요 라고 나오면

예수님이 마귀를 염두하시고서 하신 십자가의 공로가
그 단번의 용서가
일만달란트의 용서가

저 백데나리온 이라는 나의 공로에 무너져버리도록 해서야 되겠냐 말이죠

더 큰 것을 구하라 라고
주님은 이런 사태를 벌리신 겁니다

영원한 것은 말씀이고
말씀만 영원히 남고 나머지는 다 사라져요
사라질 것을 붙잡고
완악한 수건을 놓지 않는다고 해도 그 수건 몇 번 빨면 그 기능은 사라져요
존재도 헤여져서 먼지로 변해요
삭제 될 겁니다

이 영원한 말씀이라는 종말을 미리 앞당기라고
잃어버린 양을
곧 죽은자를 찾으시는 겁니다

죽은자가 나 죽은 존재 맞잖아요 라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 죽은자 이니까 인정해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죄가 되신 죄의 자리에서 저주 받으시고자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머뭇 머뭇 거림이 없이
단숨에
급박하게
신속하게 
단번에

모든 허물을 다 사하시고자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습니다
남김 없이 다 주셨습니다

이 영원하심 앞에

되도 않는 자기 의로움
인간의 남 7번 용서 했다는 둥 따위는 

또 찢어버린 의문의 증서를 다시 쓰레기 통에서 소환해서
테이프로 본드로 다시 붙이는 꼴이 됩니다

이전 것을 다시 끄집어 와서
또 그 의문의 것을 반복하는
흐릿하고 모호하고 희미한 것을 말이죠

그냥 일만달란트 매일 매일 용서 받으면서 사는
많이 탕감 받은 그 절대사랑을

저 말도 안되는 절대저주 속에서 이루셨다는 사실을

우리 같으면 좋은 환경이 아니다 라고 불평불만만 늘어놓았을텐데
저 저주 중에 저주의 환경에서 다 이루셨기에

원수도 너끈히 사랑하시는 사랑 중의 사랑
용서 중의 용서임을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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