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2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마 26,53-56)
예수님의 마음(종말)과 베드로의 행동(검으로 출발과 끝남) (마 26,51-54)
마태복음 2018 2021. 7. 4. 08:14
18-141 예수님의 마음(종말)과 베드로의 행동(검으로 출발과 끝남) (마 26,51-54)
〈마태복음 26,53-56 개역한글, 신약성경 47쪽, 찬송가 344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 26:53, 새번역)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마 26:54, 새번역)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마 26:55,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에게 하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었건만, 너희는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마 26:56, 새번역)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이렇게 되게 하신 것은, 예언자들의 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그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우리가 앞의 글 에스겔 37장을 통해서
바로 마른뼈 골짜기 사건 말이죠
처음 창조된 창조물이 무너지고
새롭게 창조한 새 언약에 의한
예수님의 죽음으로 출발한 믿음 곧 종말로써 다 이룬 새 하늘과 새 땅에 맞는
새피조물을 주님께서는 계획하고 밀어붙이시는 겁니다
기존의 헌 하늘과 헌 땅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믿음 곧 종교가 되는 겁니다
종교란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겠다 라는 이 선악을 주장하는 우상이다는 거죠
고로 바로 다음 글 은밀한 처소를 드러내지 않고
도리어 감추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왜 감출까요?
멋들어진 구원이 아니거든요
부끄러운 십자가 이니까 감추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서는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왜 거릴낄까요? 마음껏 자랑꺼리가 왜 못 되는 것일까요?
선악에 걸리거든요
육의 소욕에 성령의 소욕은 거리낍니다
반대로 성령의 소욕에는 육의 소욕이 방해꺼리가 되는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 창조 새언약에는
옛언약 헌 하늘 헌 땅은 거부대상이 되고
헌 하늘과 헌 땅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거부가 되는
서로의 소욕을 서로 못하도록 하더라 말이죠
성전 안의 은밀한 처소인 지성소의 기능을
유대인들은 싫어라 했습니다
그 반대로 성전에 바치는 귀하디 귀한 금은
무지 무지 좋아라 했다 말이죠
나의 자존심을 높여주거든요 이것이 바로 쓰레기 오예물 똥떵어리 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기 의를 똥 쌓듯이 쌓을 뿐이지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에는 복종하지 않는 겁니다
(롬 10:1, 개역)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 귀하디 귀한 그 금으로 맹세한
멋들어진 구원을
사도바울은 비로소 똥 덩 어 리 배설물로 취급해 버립니다
아니 다들 잔칫집에 그것도 솔로몬의 영광을 구하기 바쁜데(결국 이것이 종교죠)
그 솔로몬의 영광을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움 오예물로 여긴다 굽쇼
(빌 3:5, 개역)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개역)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7, 개역)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개역)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개역)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로 모욕적인 이 십자가 라는 영광이 덮쳐졌거든요
에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 아닙니까
그것이 무슨 영광 입니까?
부끄러운 십자가 인데
네 맞아요 그 부끄러운 십자가 나를 위해 대신 지신 겁니다
이 보다 더 또렷한 사랑 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또 의문의 반복을 쫓고
또 그 똥덩어리를 오예물을 배설물을 쫓을 이유가 뭐가 있겠냐 말이죠
정 그러면 또렷하던가? 흐릿하고 모호하고
마침이 없는데 말이죠 마침이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하거든요
이것이 바로 은밀한 처소의 기능을 거부하고자
인간들이 바치는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그리고 저 매국노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는 성화된 삶을 주신것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가 바로
오예물 똥을 뒤짚어 써 온 동네 방네 역겨운 냄새를 퍼트리고 다니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들에게는 자랑꺼리 이거든요
오히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치욕적이고 말이죠
서로가 서로를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의 소욕을 펼치는 겁니다
헌 하늘과 헌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렇게 거부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은 헌 하늘과 헌 땅을 그렇게 똥냄새 난다고 거부하고 말이죠
누가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 피 비린내를
죄가 타는 그 역겨운 냄새를 좋다 라고 흠향 향기를 흡입하냐 말이죠
하나님이 그래요 글쎄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이 그렇다 라는 겁니다
죄가 타는 냄새를 기뻐 흠향 하시더라 말이죠
(창 8:20, 개역)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창 8:21, 개역)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 8:22, 개역)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자 그렇기 때문에
종교 라는 헌 하늘과 헌 땅에서 나온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믿음에서 나온 지식으로는
즉 사랑이 없거든요 율법의 마침이 안되니까 말이죠
용서의 대충 어정쩡한 남 7번 용서와
용서의 끝판왕 또렷하고 명료한 미래완료인 7에 70번의 용서
바로 이 피 흘리심이 없이는 사함이 없는
이 은밀한 처소의 기능
지성소의 기능
죄라는 더러움을 거룩으로 옮기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제사장 온 몸에 피가 한 가득 묻게되는
우리가 계시록이였습니까 이사야 였습니까
어떻게 붉은 옷이 되었느냐 라고 묻잖아요
(사 63:2, 공동) 『"어쩌다가 당신 옷에 붉은 물이 들었습니까? 당신 옷은 마치 포도주틀을 밟다가 물든 것 같군요."』
아 찾았다 이사야 63장이였군요
어찌하여 네 옷이 붉으냐? (사 63, 1- 6)
이사야 2017 2020. 11. 1. 08:45
110 어찌하여 네 옷이 붉으냐 (사 63, 1- 6).mp3
9.65MB
18-110 어찌하여 네 옷이 붉으냐? (사 63, 1- 6)
새 이름 [버리지 않는 도성] 이라 부르리라 (사 62, 1-12)
이사야 2017 2020. 10. 25. 09:33
18-109 새 이름 [버리지 않는 도성] 이라 부르리라 (사 62, 1-12)
(이사야 63: 1- 6, 구약성경 1043 쪽, 찬송가 195장 이 세상의 모든 죄를, 187장 너희 죄 흉악하나)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사 63:1, 새번역) 『에돔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붉게 물든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화려한 옷차림으로 권세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그는 바로 나다.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의 권능을 가진 자다.』
(사 63:2, 새번역) 『어찌하여 네 옷이 붉으며, 어찌하여 포도주 틀을 밟는 사람의 옷과 같으냐?』
(사 63:3, 새번역) 『나는 혼자서 포도주 틀을 밟듯이 민족들을 짓밟았다. 민족들 가운데서 나를 도와 함께 일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분내어 민족들을 짓밟았고, 내가 격하여 그들을 짓밟았다.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내 옷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사 63:4, 새번역) 『복수할 날이 다가왔고, 구원의 해가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사 63:5, 새번역) 『아무리 살펴보아도 나를 도와서 나와 함께 일할 사람이 없었다. 나를 거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분노가 나를 강하게 하였고, 나 혼자서 승리를 쟁취하였다.』
(사 63:6, 새번역) 『내가 분노하여 민족들을 짓밟았으며, 내가 진노하여 그들이 취하여 비틀거리게 하였고, 그들의 피가 땅에 쏟아지게 하였다.』
(사 63:1, 쉬운) 『<여호와께서 백성을 심판하신다> 에돔에서 오시는 분,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시는 이분이 누구신가? 화려한 옷을 입고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이분이 누구신가? “그는 나다. 나 주는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의 능력을 가진 자다.”』
(사 63:7, 쉬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내가 여호와의 사랑을 이야기하리라. 여호와께서 하신 일로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그러움을 보이셨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다.』
(사 63:15, 쉬운) 『<도움을 구하는 기도> 주여, 주님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하늘 집에서 굽어 살펴 주소서. 여호와의 뜨거운 사랑과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찌하여 여호와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서 감추십니까?』
(사 63:1, 현대어)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성문을 지키는 파수꾼이 먼 곳에서 들이닥치는 이를 보고 물었다. `저 에돔 땅에서 오는 이가 누구냐? 에돔의 수도 보스라에서 붉은 옷을 입고 오는 이가 누구냐? 화려한 옷을 입고 기운 차게 걸어오는 이가 누구냐?' 어느 사이에 그 사람이 보초에게 이르러 대답하였다. `내가 바로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이이다!'』
(사 63:7, 현대어) 『[이스라엘의 회개와 간구] 여호와여,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제까지 주께서 베풀어 주신 일들을 내가 기억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온갖 일들을 내가 기억합니다. 오직 주님의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일들을 내가 모두 기억합니다.』
새 이름 이라는 도성 뜻이 버리지 않는 다시는 버리지 않는
잃어버리지 않겠다 라는 되찾았다 라는 뜻이다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써 그 간극 그 공백을 구체화 해서 그 공백에서 나온 것이
새이스라엘이다고 했다 말이죠
바로 이런 성전의 참된 기능을
인간들은 성전을 더렵혀 버림으로써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만 종교생활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믿음을 추구하는 종교 즉 선악을 추구하고 싶어 하지
성전 단번에 이루어지는 성전의 기능을 거부하고
더디 이루어진다
안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전을 더럽히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십일조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종교를 하겠다고 나서니
이 은밀한 처소를 부끄럽다 라고
걸림돌 이다고
드러내지 않을려고 하더라 말이죠
아니 더디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진다고 여기니
드러낼 턱이 있겠냐 말이죠
오늘 본문 보세요
말씀이 더디 이루어 질것이 뻔하다 싶어서
해 오던 습관대로 뭐를 잡습니까
칼을 잡잖아요
그런데 저쪽 또한 더디 이루어 질까봐
퍼뜩 이룰려고 뭐를 들고 강도잡듯이 합니까
뭐를 듭니까 네 맞아요
망치와 검 곧 칼을 쥐고서 오잖아요
아니 강도를 잡을려면 망치와 칼을 잡지 않으면
과연 빨리 잡힐까요?
안 잡혀요 길어도 너무 너무 길어요
그 사이에 얼마나 또 피해자가 생기겠냐 말이죠
이것이 헌 땅 헌 하늘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처음 창조된 모습이 다 무너진 거죠
그 창조의 취지가 다 무너진 겁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맞는 새창조물을 새로 창조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새 마음 새 영으로 부어서 말이죠
기존의 마음인 선악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수 없도록 말이죠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누구는 부자청년처럼 환경이 좋아서 선을 많이 지키고
누구는 환경이 나빠서 악을 더 많이 저지르게 되는
이것에
진짜 참성전의 기능인 은밀한 처소의 기능을
부자청년에게 과연 율법의 껍데기가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달라고 했을때에
자기가 이루어놓은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킨 그 의를
아무런 댓가 없이 가난한 자(환경이 나쁘다 보니 가난의 수레바퀴에서 못 벗어나는 자)에게
자기 목숨과 같은 귀하디 귀한 금과 같은 그 의로움을 그 전재산을
그 자존심을 그 목숨을 이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줄수가 있느냐 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믿음은 바로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율법의 취지는 사랑이거든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는 거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1에서 4계명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5-10계명
문제는 처음부터 사랑이 없이
은밀한 처소를 지성소를 십자가를
장대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지 않는
사랑을 안 쳐다보고
지키는 행함만 잔뜩 들고와서
그것도 겨우 되도 않는 남을 7번 용서하는 것
40년 동안 느려터지는
그것도 겨우 46년동안 짖는 성전
아직도 완공하지도 못한 성전 말이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말이죠
이웃도 하나님도 결국 못한다 라는 것이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문의 반복을 여전히 계속할 정도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그 정도로 강퍅하다 라는 것은 우상적이다 라는 겁니다
자존심이라는 오예물을 잔뜩 온 몸에 도배를 하고 있으니까
제발 내 마당좀 밟지 말라꼬
제발 좀 기도하지 말라고 시끄겁다 귀를 막을 것이다 라고
제발 나에게 보일려고 오지 말라꼬 나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려서
안 볼란다 안 볼란다
아이고 온 몸에 똥칠을 하고 자기 좀 봐 달라고 하니
때려죽어도 보기 싫다 안 볼란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사 1:11,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개역)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개역)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4, 개역)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5, 개역)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장 초장 처음부터 이렇게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끝이 좋으니까 다 좋게 되닌
마지막 장은 그럼에도불구하고 새하늘과 새땅이 다 이루어짐으로써
이제 헌 하늘 헌 땅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리시는 겁니다
손 턴 거죠
속 시원하게 빨래 끝 이라고 말이죠
바로 그런 취지에서 오늘 말씀은
이 말씀 성취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언약의 말씀 성취로 인해서
기존의 헌 하늘과 헌 땅의 내막들이 낱낱이 그 수치가 다 들어나고 들통남으로써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세 번의 기도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그 아버지의 뜻이
말씀이 기록된 대로 성취되는 것이 바로
죄인의 손에 팔리우신다 라는 겁니다
그럼 말씀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뭡니까
곧 사탄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주장하는 것이 뭡니까
온 천하 만국을 다 줄테니 무릎꿇어 절하고 경배하라 아닙니까
이것이 정치다 말이죠
온 천하의 만국을 준다 라는 것은 대통령제 왕제도에 딱 맞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칼이라는 권력과 힘이 아니라
그 반대의 길
곧 말씀에 기록되지 않은 칼이라는 권력과 힘이 아닌
그 반대인
죄인의 손에 팔리는
도리어 저들이 칼과 망치를 들고서 단번에 강도를 재압해서 잡고자 하는
바로 이런 선을 취하고 왜? 강도를 잡아야 하니까
악을 버리는 왜? 강도라는 악을 법으로 집행해서 징벌을 내려야 하니까
문제는 이 선악의 법이 과연
선하기는 선하냐 라는 겁니다
그것을 까발리는 것이 바로 은밀한 처소이다 말이죠
법이 선하기는커녕 악인의 손에서 좌우되더라 라는 거죠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고
못본척 지나치는 강도 만난 자를 보고서도 제사장과 레위인이 말이죠
왜? 시체를 만지면 율법을 어기게 되거든요
참 대단한 율법 지킴이 납셨다 말이죠
안식일날 만 골라서 손마른 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거부하는
헌 하늘과 헌 땅을 고수하는
참 대단한 안식을 지킴이 납셨다 말이죠
안식일의 주인을 거부하는
누워서 침뱉기를 한 셈인 거죠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였던 거죠
부자청년이 가난한 자에게 전재산을 못 주는 것이 들통난 것처럼 말이죠
차라리 들통나서 등돌리고 근심하고 돌아선 것은
아 부자청년이 틀렸음이 드러났지만
안식일 지키는 자는
부자청년처럼 한 명 한 명 개인이 아닌 소수가 아닌
아예 집단 아니냐 말이죠
이 다수는
금방 들통 당하겠냐 말이죠
다수를 믿고 쪽수로 밀어붙이듯이
더더욱 강퍅한 수건으로 가릴수 있는 겁니다
이 집단성 이 국가성이
과연 끝까지 가려줄까요?
언제든지 이용만 해 먹고 단물 빨아먹고 버리는 토사구팽인
언제 짤릴지 모르는 불안불안한 안식일 지키기를 왜 하냐 말이죠
뭐가 또렷하다고
뭐가 넉넉하다고
쪼매 실수하면 바로 짤라버리는데
안식일 주인 마저도 짤라버리잖아요
그 대단한 쪽수 집단성이
든든하고 미쁘기는커녕 결국 불안불안한
모호하고 흐릿하고 의문만 가득할 뿐인데
바로 이런 헌 땅 헌 하늘을
끝까지 짊어지고 갈수 있겠냐 말이죠
칼과 망치를 쥔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 젊을때야 아무것도 모르고 칼과 망치를 쥘수 있는 근육도 있고 힘이 있다 치지만
늙어보세요
병들어 보세요 망치 조차고 못 쥔다 말이죠
그 정도로 의문 덩어리이다는 겁니다
지금 쥘 수 있다면 의문 덩어리 아닌 듯 싶죠
다 의문덩어리 예요
죽을때까지도 끝까지 쥘수 있어야지요
그런데 고아도 과부도 나그네도
갓난아기도
망치 들고 태어나던가요?
태어나자 마자 망치 들수가 있던가요?
망치를 들 필요성이 전혀 없이 태어난 겁니다
그런 인간이 그 처음 창조성이 다 무너지게 되니까
너도 나도 망치를 쥐고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 말이죠
이것이 죄인의 손에 팔린다 라는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성취가 되는 겁니다
이 죄악을
이 원수성을 은밀한 처소인 지성소는
곧 십자가는 들추어냄에 있어서
유대인은 드러내기 싫어서 감추고자 했고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겁니다
수치가 드러나야 가릴수가 있는데
수치를 자기들이 알아서 가리니까
가려줄 은밀한 처소의 기능이
성전의 기능이
제사장의 기능이
피범벅이 되는 그 처참한 어린양 잡는 절대저주가 없이
인간들이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
다 땜방이 되는
그래서 성전은 그저 돈을 환전하는 금융기업으로
돈만을 매매 하는 소통하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겁니다
다른 것은 가치가 없거든요
강도는 뭐만 노립니까?
남의 재산을 빼앗는 것 아니냐 말이죠
귀하디 귀한 목숨이나 귀중품을 빼앗는 자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 강도에게서는 매매 소통은 오로지 돈 뿐이다는 거죠
그것이 사람의 손으로 짖는 성전의 기능이 되어버린 겁니다
아니 뭐가 부족해서 주님이 인간으로부터 돈 받냐 말이죠
인간도 알아요 그래도 돈 바치는 이유는 야바위 노름 오락처럼
돈 넣고 돈 먹기 하기 위함이다는 거죠
종교가 오락인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고
신원을 하지 않는 이유는
도리어 코흘리게의 주머니까지도 터는 중독에 빠져있거든요
그들은 그것이 재미요 오락꺼리이다는 거죠
부자청년이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어릴적부터 율법 지켰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헌 하늘 헌 땅의 기준에서는 참 대단한 믿음이라고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준에서는
애들 주머니를 털어버린
신원해 주기는커녕
등쳐먹은 것이다 라고 규정해 버리는 겁니다
도리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해요 글쎄
아무리 봐도 선함을 악으로 규정해 버리고
아무리 봐도 불의한 악을 선으로 규정해 버린다 말이죠
문제는 그 불의하다는 악이 선이라고 빛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보다
더 지혜로운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쳤을 때 말이죠
아 그럼 우리도 불의한 행동을 하라는 말이가
아니요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새 마음을 받은 자 만이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
곧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바치는 것 (아무리 봐도 인신제사 아니냐 말이죠)
기생 라합의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은 이스라엘 쪽에 해당되지
정작 나라 팔아먹고 자기의 신 자기의 왕 자기의 친척 가족 모조리 다 팔아넘기는 매국노 아니냐 말이죠)
이것 뿐이겠습니까
엘리야는 3년 반 동안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하더라 말이죠
즉 다 굶어죽게 하는 것과 같아요
이 종말을 당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요 기도요 헌금이요 기타등등
완전 거꾸로 아니냐 말이죠
누가 감히 저 집단을 무시하고
저 칼과 망치를 무시하고
이런 행함이 있는 믿음인 부정적인 행함을 펼칠수가 있겠냐 말이죠
새 하늘과 새 땅에 맞는 새 마음을 부음 받은 새 피조물만이 하는 겁니다
왜?
헌 하늘과 헌 땅을 거들내야 하기 때문에 말이죠
기존의 질서 개념을 다 깨뜨려야 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성전을 헐라 라는 예수님의 표현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있을수 없는
대놓고 도발하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저들이 칼을 아무리 안 쥘려고 참고 참고 참아도 못 참는 이유입니다
네 맞아요 예수님이 바로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성취하시고자
저들의 속내를 빡빡 긁어댄 겁니다
왜?
헌 하늘과 한 땅은 지나가고 삭제되고 무너져야 하거든요
이전 것은 지나가야 새 것이 될 것 아니냐 말이죠
자크 라캉의 우상학에 의하면
기존의 이론
어제까지의 앎 또는 지식은 무조건 우상화 되기 마련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어제까지 알아도
그 지식 마저도 오늘 깨뜨리지 않는다면
기존의 것 곧 우상이지요
그 허구에 발목 잡힌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이론 자체가 형성할 겨를이 없는 거죠
교리를 형성할 겨를이 없어요
사랑은 그 정도로 급박하고 지금 당장 만나는데
교리를 형성할 정도로 배불러 터진 한가한 소리를 할 여유가 어디있냐 말이죠
교리를 형성하니까 또 그것을 실천하는 자신을 구축해야 하니까
그런 실천한 자신이 얼마나 귀하게 되냐 말이죠
그게 우상이다는 겁니다
그 우상을 파괴한다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냐 말이죠
손도 없고 발도 없는 주제에 믄 자존심 말이죠
남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죠
자아를 형성할 틈이 어디 있냐 말이죠
그 허구를 왜 형성 하냐 말이죠
졸지에 그것을 깨뜨려야 할
우상을 파괴해야 할 성전의 기능을
인간들은 성전을 통해서 자아 라는 우상을 더더욱 짖더라 라는 겁니다
말씀에 기록되지도 않은 것을 왜 짖냐 말이죠
즉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지도 않은 것을 말이죠
기록되지 않은 것은 허구이다 말이죠
칼 잡기
망치 잡기가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던 가요?
십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던 가요?
하라 하지말라가 성경에 기록이 된 적이 없어요
마귀들 눈에만 하라 하지 말라만 보인다고 우겨요
그리고 결국은 정죄하고 송사하고 고소합니다
그럴줄 알고 주님이 성경 말씀에 기록했습니다
창세전에 기록했습니다
딱 하나만 기록했습니다
바로 십자가 라는 은밀한 처소인 지성소의 기능 말이죠
성전을 다 더렵혔지만
숨겨둔 은밀한 남겨둔 이름이 있었어요
이 남겨둔 이름이 없었으면 우리는 다 벌써 소돔과 고모라 되었다 말이죠
인간의 숙제인 성화 되냐 안되냐 문제를 떠나서
주님의 숙제인 은밀한 처소인 십자가의 다 이루셨다
이 십자가의 성취에 의해
소돔과 고모라 되냐 마냐가 달려있지
인간의 믿음 여부에 달린게 단 하나도 없어요
가라지만 그렇게 주장할 뿐이지요
그러니 오늘날 한국교회는 다 가라지의 주장 뿐이예요
사기꾼이고 결국 돈 내라 라는 소리 외에는 할 줄 몰라요
그러니 하라 하지말라고 협박 공갈 하는 겁니다
강도죠 날 강도
그러니 칼을 쥐고 싶어했으니 즉 그래야 상대방을 제압하죠
강도가 칼을 쥐고 약자를 제압했듯이
그 강도가 다시 칼을 쥐고 있는 경찰에게 제압당하는
이런 돌고 도는 시이소가 의문의 증서에 쓰여진
죄 아래 갇힌 자들이다는 겁니다
강도도 악이고
그 강도를 잡겠다 그 대신 돈 바쳐라 세금내라 라는 놈도 악이다 라는 겁니다
조폭과 다를바 없는 검땡이 그렇잖아요
엉뚱한 놈 잡아서 또 촛불집회 하게 만들고
그 촛불 집회로 인해 어린아이 입을 앞세워
악은 선을 이길수 없다 어두움을 빛을 이길수 없다 라고
선악을 가르치지
7에 70번 용서를 때려죽어도 노래할수 없도록 하잖아요
이미 선함이 이미 빛이 가득한데
이 은밀한 처소를 부끄러워서 가르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감추는 겁니다
그래서 칼과 망치를 들고 강도잡겠다 라고 나오니까
선악의 법이 강도잡겠다 라고 나오니까
그 바른 소리 하는 제자들도
그 선함이 가득한 소리를 했던 제자들도
강도가 아닌 강도를 잡는 경찰로써 오는 칼과 망치 앞에서
냅따 도망치는 겁니다
아니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노라 다짐했잖아요
그 선함
그 올바름
그 착함 그 바른소리 그 정의
다 어디갔나요????
남들은 다 가라지가 되어도 나 만큼은 알곡이 되겠노라 라고 했던
그 선구자~~~~~~~~
지금은 어디에 있나요
다 쥐구멍으로 다 숨어버려서 그림자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믿음 곧 선악의 민낯입니다
목숨이 걸리지 않을 때는 누구든지 목숨 걸겠다 라고 정의를 외치고
알곡 다움을 외치지만
아무도 성전의 기능인 은밀한 처소를 드러내지 않을려고 하고
꽁꽁 가매쳐 놓을려고만 해요
오히려 즉각적으로 자신의 의로움 자신의 옳았음을 내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가장 귀한 것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써 우상으로써 자존심으로써
자신의 알곡다움을 주장했지만
1300년 만에 다시 되살린 몽둥이 앞에서
그 교만이 싹트는 강퍅케 만드신 애굽왕 바로왕 앞에서
냅따 다 도망가는 겁니다
오로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세는 외쳐야 합니다
그것도 1300년 만에 다시 소환이 되어서
어서 죽어주세요 예수님 이라고
창녀 마리아가 비싼 향유
가장 귀한 전재산을 땅에 허비하면서
미리 예수님 머리 위에 부어서 장사를 죽음을 치르는
이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
곧 은밀한 처소를 드러내면서
어서 죽어주세요 라고
이 예수님의 죽음이 나 보다 옳았다 라고 외치면서 말이죠
거기에 제자들은 여전히 분노를 하면서
가난한 자를 억수로 생각하는 듯 하지만
선악을 주장하지만
알고보면 가난한 자를 누가 압제합니까
누가 신원치 않고 등쳐먹습니까
자기들 아닙니까
비싼 향유를 전재산을 부은 여인을 지금 신원합니까
압제합니까 핍박합니까 선악으로 심판합니까
그 어떤 누구도 이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을 외치는
성령받은 자를 신원할 수가 없는 겁니다
성령 받았기에 정직한 영이 없다고 울거든요
아무도 그 눈물
그 수치를 가려줄자 없어요
그 눈물을 씻겨줄 자는
예수님의 죽음 뿐입니다
이 죽음
이 십자가
이 은밀한 처소만이
그 눈물을
그 수치를 가려줄
기쁜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쁜소식이 증거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기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새 창조 앞에서
헌 땅과 헌 하늘의 무너짐의 자리를
자기자신이 자기를 알곡 되게 만듬이 도리어
하나님의 알곡 만드심을 방해하는 꼴로 드러나는 겁니다
정직한 영이 없음을 정직한 영이 성령이 들어가게 되니 상하고 통회하는 겁니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이 들어가게 되니
우는 자가 되니 비로소 돌이키는 회개의 영이 들어가게 되니
그 증상으로 우는 자가 되는 겁니다
우니까 우는 자가 되는게 아니라
우는 영이 들어가게 되니 우는 거다 말이죠
우는 성령의 숙제였던 거죠
알곡 만들기는 내 숙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숙제입니다
그 대상물로 놓여진 겁니다
지금 주님은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죄인의 손에 팔리우시고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리시는 성경말씀의 기록된대로 복종하시고 있습니다
인간은 알곡 되기를 실천할려는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는
선악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알곡되기가 졸지에 칼과 망치는 드는
나는 십일조 했고요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요
이 권력으로 저 세리와 다르다 라고 구분짖기 라는 깡패짖을 해 놓고서는
지성소 은밀한 처소에 들어올려고 하니까
딸랑 딸랑 방울을 달고 대제사장이 들어오니 지성소에서 타 죽어
시체로 밧줄을 끌어내려 쓰레기 장 오예물 버리는 휴지통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어딜 감히 거룩을 속일려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꾈려고 하냐 말이죠
완벽한 거룩 가지고 오지 않으면
절대저주의 죽음 뿐이다는 겁니다
그 죽음을 대신 당하겠다
그 절대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이 화목제물을
어딜 속일려고
함량미달인 되도 않는 선함을 들이내미느냐 라고
이 십자가를 왜 안 나타내느냐 라고 다구치시는 겁니다
누가 7에 70번의 용서라는 새 노래를 배우고 가르치고 노래할수 있겠습니까
다들 헌 노래 헌 땅 헌 하늘 이라는 남 7번 용서라는
되도 않는 용서
하다가 멈춘 느릿 느릿하고 흐릿하고 의문덩어리이고
언제 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등쳐먹는
똥덩어리 배설물을 쳐바르고 성전을 더럽힐지 모르는
자기자식을 잡아먹는
그 의문의 반복을 왜 들이내밀고
은밀한 처소는 왜 감추느냐 말이죠
이 성경에 기록된 은밀한 처소를 주님은 가감없이
지금 당장
급하게 즉각적으로
저들이 1300년 만에 지옥에서 소환이 되어서
에덴동산 보다 더한 영광을 주어서
칼과 망치 앞에서 아무도 남아있지 못하도록
모조리 다 냅따 도망치도록 해서
그 몽둥이로 그 교만 그 강퍅함으로
즉각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다 이루시는
십자가 사건을 이루시는 겁니다
이 구원의 사건을 말이죠
우리가 원했던 멋들어진 구원이 다 날라가고
참혹하고 부끄럽고 치욕적이고 부끄러운
이 수치의 사건을 다 이루심으로써
우리의 수치를 우리의 눈물을 가려주시고 씻겨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성전의 참된 기능
더러움을 거룩으로 이동 시키는 기능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기능인 화목제물로써(은밀한 처소의 기능)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칼과 망치가 이기지 못하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심으로써
새 신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자 뿔라야 햅시바야 라고
교회 라는 알곡을
인간의 믿음으로 만드시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 출발한 믿음으로 다 이루시는 겁니다
이 숙제를 주님에게 맡김으로써
그 과정을 우리는 누리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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