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9 세 번째 기도와 죄인의 손에 팔려야 하심 (마 26,44-46)

(롬 8:15, 개역)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마 26,36-43)
마태복음 2018 2021. 6. 13. 10:32
18-138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마 26,36-43)

〈마태복음 26,44-46 개역한글, 신약성경 47 ,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 26:44, 새번역)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또 다시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마 26:45, 새번역)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이르렀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마 26:46, 새번역)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


인간의 세계는 말이 되는 세계이어야 합니다
말이 안되는 것은 없애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이 되는 세계를 요구합니다
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바로 그런 말이 되는 세계인 인간의 세계
곧 마귀의 세계
사람의 뜻을
철거해 달라고

단절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단절 단절 단절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이 잃어버림이라는 삼일의 간극이 없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되고도 남았다 말이죠

이 말 자체도 말이 안되죠
아니 꼬끼오 세 번이 없으면 안된다니
단절이 없으면 안된다니
[없음]이 없으면 안된다니
누구말마따나 없음을 없는 것인데 왜 자꾸 [없음]을 [무 無]를 자꾸 추구하냐 말이죠

말이 안되거든요 말 장난 같아요 속이는자 같아요 그런데 참되다니??????

(고후 6:8, 개역)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자 그렇기에
이런 인간의 세계와 다르게 예수님의 세계는
단절의 단절의 단절 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중단절 즉 삼중단절인데 복수성이니까 이중반복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바로 이런 마귀의 세계 곧 인간의 세계에
반대를 위한 반대 곧 이중부정이지요
무조건 반대한다는 겁니다

첫 번째 마귀의 시험은 돌을 떡덩이 되게 해서 경제문제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자 이것이 육의 세계입니다 짐승의 세계

그럼 예수님의 세계는 이들과 소통 자체가 안되는 단절이기에

오히려 떡덩어리를 돌로
아브라함 자손을 돌삐로
돌삐를 아브라함 자손으로 만드시는
경제문제 완전 파탄내시는 메시아 이시다는 겁니다
실제로 무덤가에 사는 귀신들린 청년을 고치시면서
귀신이 나가면서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왜 벌써 왔냐 라고
엇 시끄러워 어딜 감히 천기누설을 해 라고
돼지떼 속에 집어넣으니까 강물에 뛰어들어 돼지떼가 몰살 했다 말이죠

이 귀신들린 청년 고치심에 감사할까요
아니면 경제문제 파탄낸다 라고 쫓아냅니까

미움 받잖아요 

두 번째 마귀의 시험이 종교문제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곧 구원
남들은 다 미움 받아도 나 만큼은 사랑받게 해 달라고 말이죠

그럼 예수님의 기도는 뭐 겠습니까

네 맞아요 바로 앞의 글 에스겔 36장에서
새 영 새 마음을
심판 속에서 받게 되면
스스로 한탄함으로써 종말을 확 끌어당기는
미움 받을 짖만 골라서 하게 되는 사명을 받게 되는 겁니다

마누라가 죽어도 안 울고요
사적인 영역이 없어져요
완전히 공무원이 되어가지고 5분대 기조처럼
잠잘 때 군복을 벗지도 않고 이미 군장을 싼 상태인 초비상 상태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에서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하는 겁니다 쿨쿨 자고 있어요 
얼마나 몸이 피곤하면 말이죠

그리고는 자기의 뜻을 제거해 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미움 받고
싫어버림 받고
잃어버림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심판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림 당하는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시더라 말이죠

마귀의 두 번째 시험과 완전 반대죠

사랑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미움 받는 메시아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
아무도 쳐다도 안 보는
싫어버림바 되는 메시아가 되게 해 달라고 말이죠

참선지자가 그래서 삐딱한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어요 (부정적인)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구요

또 여기에다가 마귀는
곧 사람들은
온 천하 만국의 영광을 얻어서 최고가 되어서 경배받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 메시아가 되어 달라고 말이죠

(마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개역)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게 메시아 입니까 아니면 우상 입니까

네 맞아요 유대교를 보세요 딱 이겁니다
하나님 믿기는 개뿔 그들은요 마귀를 믿어요 마귀를
금송아지에 여호와의 이름을 새겨서 믿어요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기독교도 그런 유대교를 따라해요 글쎄

아니 저런 마귀의 세가지 시험이 교회에서 소통이 되고 있지
예수님의 겟세마네 세 번의 기도가 교회에서 소통이 되던가요? 택도 없지요

뭐 한국에서 가장 성화가 되었다 라고 자부하던 교회 조차도 
마귀의 세가지 시험이나 소통되고 있더라 말이죠

경제 문제 곧 먹고 마시는 문제 해결 되면요
구원문제를 심심풀이 땅콩으로 지금의 자기를 천국에까지 이을려고 해요 글쎄
(그 다음 마약 곧 자기구원에 손대요 자기중독인거죠
거기서 끝나고 멈추면 다행이게요 N번방 조주빈이 멈추게 해 줘서 고맙다구요?
안 멈춰 집니다 선악이 인간을 다루지 인간이 선악을 다루는게 아니거든요
정치까지 가요 기여이 하나님의 자리에 까지 가는 겁니다
모든 사람을 무릎 꿇게
정 안되면 단 한 놈이라도 무릎 꿇게 말이죠안 그러면 도로 무릎 꿇김 당하는데 누가 원하겠냐 말이죠
경제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정치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아요
누구 하나 죽는데 까지 가야 한다는 거죠 안 멈춰지는 겁니다
다윗 보세요 하나 죽인것으로도 모잘라서 세 명 까지 죽이잖아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소통 연합 캐사면서 여기에 동원이 되는 파워 밧데리 내 힘으로는 모자르니까
성령을 동원해요 글쎄
아니 구원이라는 탐욕에 동원이 되는 것이 
한국개신교신학의 성령론이다 말이죠
우상숭배에 동원이 되고
자기 개인 성화에 동원이 되는 성령이니 참
내가 니 시다바리가 라고 성령이 얼마나 우시겠어요 글쎄
운다는 말은 우리를 반드시 죽이시겠다 라는 겁니다

원래 성령의 기능이 그래요

존재로 끌어오질 못해요

존재가 사명감을 가지는게 아니라
사명감이 이스라엘의 특이성이
잉여성이 이스라엘을 다루듯이
사명이 나를 다루는 겁니다
뭐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죽이는 것 밖에
앞의 글 에스겔 36장에서 언급한 사명은
이거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나를 지근 지근 밟아 죽이는 것
미움받도록 하는 것
싫어버린바 되도록

네 맞아요 예수님이 앞으로 당하실 것을 미리 앞당겨 받는 겁니다
참선지자도 그랬거든요
이것이 종말을 땡기는 겁니다 시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시간은 존재고
공간도 존재이니까 말이죠
기능이다는 겁니다
기능은 모조리 다 한 인물에 맞추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행함은 마치 붕어빵 주틀을 만드시듯이
본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마치 붕어빵 주틀의 본을  좀 격하게 경상도 발음처럼 쎄게
뽄을 떠서

그 뽄을 뜬 틀에 우리를 마구 마구 집어넣어서 붕어빵을 찍어내듯이 말이죠

그러니 기능은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운명에 우리를 모조리 집어넣는 겁니다

아삽의 시 시편 73편에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가게 되니까 비로소 깨달았다 했잖아요

(시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성소가 공간입니까? 건물입니까? 장소입니까? 존재 입니까?
아니잖아요
네 맞아요
새성전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겁니다
아뿔사 ~~~~~~~~~~~~~
그동안 시체를 보고 배아파서 사촌에 땅샀다고 배아파 하듯이
기절을 하고 밥맛이 떨어져서 식음을 전폐하고 말이죠

아니 종이를 보고
구름을 보고
안개를 보고
배아파 죽게 되었다면 얼마나 우리가 주님과 즉 이 시편 말씀과 안통하고
소통이 안되는 단절된 상태였는가가 비로소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소는 곧 한 인물이며
인물이라고 해서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나 라는 인간은 끝까지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를 주장하는 존재이지
예수님처럼 자기의 뜻이 제거함을 당하는 미움받는 사건으로 절대로 안여겨지기 때문에
우리 자체가 사건을 당해봐야 비로소
아 존재가 아니구나를 안다 말이죠

존재를 없애버리는 사건이 되어야
기능이 되는 겁니다

앞의 글 에스겔 36장을 보자 말이죠
다윗 개인의 운명이 지금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 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개념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작용이 되면 안되요

하나님의 뜻으로 작용이 되어야 하기에
기능이 되어야 하고
사건이 되어야 하고 즉 예수님 이라는 한 인물과 연관이 되어야 하고
또 잉여 곧 특이성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잉여가 뭡니까 무조건 남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제논의 역설 
우리 어머니 말 마따나 말이 안되어요
논리가 성립이 안되어요
그런데 제논이 바보입니까 당대의 최고의 수학자 인데
철학자 인데

이스라엘이 사명을 붙잡아 본들 한계가 드러나지만
사명이 잉여가 이스라엘을 다루다 보니
오히려 멸망 속에서만 이스라엘의 기능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을 안 할려고 시드기야 왕은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고 
가롯유다처럼 악한 무화과 나무가 되는 겁니다 
선한 존재가 될려고 한 것이 되리어 악한 기능을 해요
선악을 니가 뭔데 다루냐 말이죠

예수님도 자기의 뜻을 제거해 달라고 하는데
자신을 죽도록 말이죠

바로 이런 예수님의 신랑 되심에 맞는 신부 베드로를 만들기 위해서
세 번 부인토록
마귀에게 잡히도록

그래야 지혜자의 지혜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수치를 가려주심
피 흘리심이 나타날 것 아니겠냐 말이죠

누가 이런 주의 팔이 나타날줄 누가 믿었으리요 ~~~~~~~~~~~

아무도 못 믿어요
믿음은 지가 믿을려고 하니까

믿음이 우리를 다루어야 하는데
우리가 믿음을 다룰려고 하니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만 생각할 수 밖에요
믿음을 놔라 말이죠 믿음을 포기하는 믿음을 펼쳐라 말이죠
즉 내 목숨줄을 저 믿음에게 맡겨라 라는 겁니다
믿음을 가질려고 할게 아니라

믿음에게 맡겨라 말이죠

못 맡겨요 육의 세계는
줘도 안 받아줍니다 왜 받아줍니까 뭔데 !!!!!!!! 지가 뭔데 ~~~~
그 정도로 소통이 안되는 단절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세 번째 기도하시면서 까지
이 단절성을 강조하십니다

단절 단절 단절

첫 번째 단절이 안되면 또 돌을 떡덩이 되게 해 달라고 라고
경제문제 해결 하는
그 비싼 향유를 왜 땅바닥에 허비하냐 말이죠
국채보상운동회 해야 하고
독립군 독립운동 자금으로도 해야 하고
가난한 자 특히 식민지 상황에서의 가난한 자는
그야말로 시급을 다툴정도로 급박한 문제 아니냐 말이죠

그것을 외면하고
미움받을 짖만 골라서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그 미움과 욕먹는 짖을 골라서 하고 있으니
어라 예수님까지 그 욕먹는 짖에 동참하고 있으니 말이죠

이것이 좋은 무화과 나무인 여고냐 이다는 겁니다

뭐 긍정의 배신이라는 말도 있고
평균의 종말 이라는 책도 있구
선함의 악함

선함을 추구하는 것이 위선 위 가짜이다는 겁니다

차라리 미움받고 욕먹을 짖을 하라 라는 거죠

이것이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니까 말이죠

자기 뜻 제거해 달라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그러니 자기의 뜻이 뭔지가 나와야 하고 그 다음 아버지의 뜻이 나온다 말이죠
우상이 먼저 나오고 그 우상과 한 세트를 구성함으로써
그 우상과의 차이로써 아버지의 뜻이 나온다 말이죠

바로 이렇게 구원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 곧 지난 주 스스로 한탄하여 우는 자
새 영 새 마음을 받은자

이번주 앞의 글 에스겔 36장
자기 죄를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면서
종말을 외치는 자
회개하는 영을 받은 자
즉 자기를 미워하는 자

그러나 이것은 이 인간의 세계에서는 안 통하는 겁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은
새 마음 새 영
곧 다윗이 이 정직한 영을 달라꼬
왜? 없으니까

이 세상에는 없거든요
인간의 세계에서는 없어요
단절이다는 겁니다

이 단절된 것을 겁대가리도 없이 달래요
뻔뻔스럽게 달래요
주면요 미움받을 각오하고
싫어버린바 각오하고
죽임당할 것 각오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교회에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이쁨받던 자가 갑자기 미움받는자로 돌변해 보세요
이거 뭐 완전히 배제 탈락깜 이다 말이죠

누락이다 말이죠 누락

누가 교회라는 이쁨받는자들끼리의 모임에서
누가 미움받을려고 교회 다니겠냐 말이죠
서로 서로 윈윈 하는 판국에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사명감은 가짜이다는 겁니다
못 견뎌요

엘리야 보세요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 라고 외치잖아요

이 반발성이 반드시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아가 되어야 하거든요

엘리야는 자기가 사명감을 가지고서 최선을 다했다 라고 따지는 겁니다
이거 가짜입니다
사명이 엘리야를 다루는데 있어서

아니 자기가 먼저 갈멜산에서 장작나무에 물을 뿌렸잖아요
반대로 했잖아요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을 저들의 반대로 했잖아요
했지만
어느 정도로 이것이 인간의 행함에 안맞는지
행해놓고도 모를 정도로
기능은 존재에게 포착이 안되는 겁니다
행해놓고도
마치 손에 지우개 손에 쥐고서도
방금 지우개로 글을 지워놓고도
지우개 어디 갔노 라고 하는 것처럼
자꾸 지우개를 찾아요

니 손에 있네
아니다 이거 지우개 아니다 라고 막 울면서 지우개 찾아요
자주 주변인들에게 이런 소리를 합니다
철학자들이 다 이래요
자기가 말한 것이 복음과 연관된 아주 중요한 하나의 부분적인 진리를 
아니 사실을 말 해놓고도 아니래요
이거 지우개 아니래요
철학자들이 잠깐의 힌트를 주듯이
마치 나는 모세 제자이지 예수 제자 아니다 라고
실로암 소경에게 예수님이 너를 고쳤다 라고 알려줄뿐
정작 나는 예수 안 믿어 소경아
너 소경 너 같은 너나 예수 따위를 믿지

그러나 소경은 그 비아냥은 거들또 안 봐요
네 고맙습더 아 예수 라는 분이시군요 그 이름 알려줘서 땡큐 라고

관심사가 서로 틀려요

그렇듯이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서로 다릅니다

사람이 아무리 졸음이 쏜아지고 육체가 피곤해도요
마지막 최후의 순간에는 잠도 안 와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에서도
이런 우리 인간의 세계를 안 받아준다 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팔아야 한다 라는 것을 들키기 싫어한다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그런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서 보여줌으로써 들키기 싫은 감춘 것을
들통당하는 자로 나오는 겁니다 우리 또한 똑같거든요
왜 내 뜻 안 들어주노 엘리야도 요나도 똑같아요
그런 요나의 뜻 제거하는 것이 요나의 표적이다 말이죠)

그저 좋은 모양새만 갖추고 싶어요
그래놓고도 자고 있고
깨어있지를 못해요

겉모양은 한 없이 거룩하고 깨끗하고 좋고 아름답고
그렇게 한 없이 꾸미고 싶은데
집도 아름답고 
성전도 아름답고

그런데 한 과부의 종말의 헌금은 그런 아름다운 성전의 아름다운 돌로
제주도에서 가지고 온 돌로 세운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 없이 무너뜨려 달라고 전재산을 헌금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 맞냐 말이죠
단절이다 말이죠 단절

한 없이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름다운 관계로써
스승과 제자의 멋들어진 추억을 남기고픈데
이건 뭐 서로 못 팔아먹어 안달이난 관계로 만들려고 하니
부부관계가 이래보세요

아브라함이 지 혼자 살겠다 라고
아내 사라를 팔아넘기잖아요

제자들이 지 혼자 살겠다 라고 예수님을 팔아넘기잖아요
나 저 사람 모른다 라고 했던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계로써 새이스라엘 교회와 새신랑 예수님의 관계가 형성이 된다면

지금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은 다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왜? 한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니까요
들통당하는 것 하나 없이 말이죠

인간이 사명을 다하고 있는 거죠 그게 가짜이다는 겁니다
사명이 성도를 다루는게 아니라

곧 사명은 나를 의인이 아닌 죄인으로써 들통내는 사명이다는 겁니다
곧 하나님의 원수죠
원수

그럼 예수님에게서의 사명 곧 성령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끄시느냐
하나님의 뜻
아버지의 뜻은
바로 그런 원수를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이루라 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화목제물로 삼아서 모든 허물을 덮어서
원수되어 둘로 나누어진 관계망을

하나로 한 몸으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겁니다

지금 보세요 하나의 마음이 아니잖아요

따로 놀고 있어요
예수님의 마지막 최후의 기도에서도
인간은 자기가 최후가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남입니다

아브라함 보세요 아내 목숨은 내 목숨이 아니예요
아무리 결혼 서약으로 맹세로써
검은머리 파뿌리 될 지언정 사랑하느냐 네 네 넵넵넵 백날 외쳐도
내 목숨은 내 목숨이고 아내 목숨은 아내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냅따 팔죠

내 목숨이 지금 더 급한데 ~~~~~~~~~~~~

믿음은 곧 잉여는 사명은 새 영 새 마음은
바로 그런 원수성을 들통내시는 겁니다

무화과 나뭇잎 되도 않는 것으로 백날 수치를 가려본들
소용없다 라는 겁니다

마귀에게 시체에 주검에 독수리가 몰려들 듯이 마귀에게 잡히기 전에
(스가랴서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더럽힌 제사장 거룩한 옷 에봇을 더럽혀서 마귀가 잡아올 때
새옷을 미리 준비하셨듯이
지금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새 옷을 입하시기 위해서
육체라는 옷의 한계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준비하심, 
예복-아들의 결혼잔치를 벌린 임금비유-천국비유 살벌하기 짝이 없는)

제대로 된 수치를 가려주시는 화목제물로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서
되도 않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선악으로 가린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겠다 라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불에 홀라당 1초도 되지 않고 다 타버리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옷을 찢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수치를 가려주고자

이런 사건을 
사명이
잉여가
특이성이
곧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 왜? 부정적인가 나의 뜻을 자꾸 찢으러 달려드니까
누가?
믿음이
사명이
성령 새 마음 새 영이 말이죠

이 단절성이

우리를 자꾸 의인 만드는게 아니라 죄인
원수

죄인 중의 괴수

인간 말종 중에 말종

바로 그런 원수를 만들어서
어느 정도로 이 피 옷이 대단한 가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마치 홈 쇼핑에서 한번은 스팀청소기를 광고하던데

가스레인지 위에 국 끓여서 넘쳐서 지저분하게 된 것

또는 오래된 냄비 하도 하도 태워먹어서 새까맣게 탄 것이 탁 달라 붙어서
우리가 작년에 살펴본 말씀에도 나왔죠

가마솥 비유 녹슨 가마솥 비유

https://crosslamb.tistory.com/2367

19-66 녹슨 가마 솥 비유와 예루살렘(이스라엘) (겔 24, 1-14)
에스겔 2019 2020. 10. 11. 09:56

이렇게 악 중에 악 에서도 이 절대저주 속에서도 너끈히 용서하시는 자기의 피를 자랑하고자
우리를 말도 못할 수치 덩어리로 만들어서
원수의 목전에서 모든 원수들이 다 달려들어서 죽일때에
그 원수들 손에서 건지시는 사랑을 절대사랑을 펼치시겠다는

니가 중요하냐 내 피가 중요하냐
내 이름이 중요하냐를 놓고서

자신의 십자가를 자랑하더라 말이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 목에 탁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 껄끄러움이요
헬라인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인데

우리 그리스도인 에게는 이 하나님의 미련함이 우리에게는 영광이다 말이죠

아니 뭐 볼게 있다고 이런 고멜과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냐 말이죠

말도 안됩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주소서 라고

자기의 죄를 기억해서 이 병 고쳐 달라고
의사에게 내미는 환자의 기능을
환자로써의 사명

곧 저 분이 나의 유일한 의사나
아무도 못 고치는
날 때부터 소경됨
이건 뭐 끝판왕 아닙니까 이런 어두움은 없죠

빛을 본적이 없으니 어두움도 없어요
다만 못 본다 라는 것을 다른사람들로 인해서 안 거죠
타인이 없었으면
못본다 본다 라는 개념도 없는 거죠

문제는 예수님이라는 정답이 떳기에
타인처럼 보는 관계망을 형성하고픈게 아니라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정답과 문제지의 만남을
사명이 이 실로암 소경에게 부여하는 겁니다

요엘 2장처럼 사명이 부어지면 말이죠
성령을 부으면 말이죠

오로지 예수님입니다
다른 사람은 못 고친다는 것이 이미 판명이 된 상태이니까 말이죠
바리새인은 못 고치니까 놀려먹는 것 밖에 안되요
그런데 놀려먹는 장난감이 도리어 바리새인이 소경임을 들추는데 사용되는 도구로써
그런 사명을 나타내는 겁니다

팔을 어긋맞게 하신 거죠

자 그렇듯
지금 죄인의 손에서 팔린다 라는 것은

인자의 기능이 바로 이런 날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처럼
무시꺼리로써 놀림깜 장난깜
신학논문 재료깜으로써의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라는 죄론 연구대상깜으로써
그런 어두운 소경 진짜 소경이 누구인가 라는

죄인에게 팔리우는 인자가
도리어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는 자로써의 의사로써 오신다 라는 겁니다

다른 양반은 이런 어두운 눈을 뜨게 못 한다 라는 거죠
그럼 우리는 오로지 이 인자 라는 양반의 손에서만 고침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써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다 라는 겁니다
왜? 얼마나 미웠으면 팔아버리겠냐 말이죠
싫어버린 바 되었느냐 말이죠

이것이 인자 라는 사명 곧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자야 라고 부르시는
구약의 그 참선지자들 에스겔 인자야 라고 했을때에

아 이 에스겔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해야 하고 주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자신마저도 화로다 화로다 나여 라고 부정한 백성 중의 한 사람이다 라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사명이 이들을 그렇게 몰아가는 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지요

이사야도 마찬가지 얼마나 미움 당하냐 말이죠
에스겔
예레미야

그러니 죽임을 당해야
그 죽임을 당한 그 피 값을 원수들에게 묻겠다 라고 하시듯이 말이죠

지금의 현재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이지만
유대의 역사 구약 그리고 신약
그리고 중세 근대 현대에 까지

자꾸 뭔가를 감추는 것이 있는데

물론 예수님을 죽였다 라는 이유로 주변의 타민족들이
이 이민자 유대인을 미워한 것도 있지만

사실은 참선지자들 또한 죽였다 라는 겁니다
반성했다 라고 넘어가버려요

그러니 이사야 53장 자체를 또 감추잖아요

감춘다고 감춰지냐 말이죠
스데반이 유대인 아니냐 말이죠

쉽게 말해 에스겔 인자가 하나님의 원수가 나타났다 라고 파수꾼으로써 나팔을 불다가
어디 어디
내가 하나님의 원수다 라고 했을때에
다들 입을 막잖아요 벙어리로 말이죠

스데반이 그런 회개를 해 버립니다
그럼 유대인이 죽이면서 까지 그런 회개를 못하도록

바로 앞의 글 에스겔 36장에서 자기 죄를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한다 말이죠

자 그럼 왜 미움받아야 할까요

회개 하니까 말이죠

회개 안 하면 미움 안 받아요
자기도 자기가 괜찮은 인간으로 여겨질 겁니다
회개 안하면

그러나 회개하게 되면 자기도 자기가 무지 무지 미워요
자기가 밉지 않은데

어떻게 십자가의 피 용서가 감사가 되겠냐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의 피 용서가 먼저 떳다는 것은
무조건 이유 없이 자기가 자기자신이 미워지는 겁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런 자신을 위해서 피 흘려 주신 주님께 감사해서

비싼 향유고 뭐고 다 버려서라도
주님의 죽으심을 

이 종말을

이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을

아마 예수님의 장례식을 미리 앞당겼다는 것이 더 크게 제자들에게 들렸으면
아마 이 여인을 죽일려고 할꺼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 여인은 죽음을 미리 치리는 겁니다
미움 
저주
싫어버린바
잃어버림을
바로 종말을 말이죠

그런데 거기까진 못 보고요 눈이 어두워서 말이죠
그저 크게 보이는 것은 우와 저 비싼 향유의 값어치가
땅에 흡수되어서

1초 만에 순식간에 주식투자금이 다 날라가는 멘붕이 오게 되니

아니 그 정도의 값도 예수님의 목숨 값이 못 되느냐 말이죠

예수님의 목숨이고 뭐고 돈이 더 중요하지
예수님의 목숨값은 서로 안 가질려고 해요 은 30냥 

마침 은 30냥이 어느 정도의 가치인가 싶어 검색해 보니

노예의 몸값이다 말이죠 한 300만원 정도

또 마침 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향유 값도 나오던데 은 30냥의 3배 이니까
한 900만원 
대충 그렇다 말이죠

그러니 누가 더 큰 가치가 있겠냐 말이죠
예수님이 향유 값 보다 못 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인 보다 더 못한
죄인에게 팔려야 할 정도로
노예 중에 노예
죄인 중에 죄인으로써

환자 보다 더 못한 환자로써의 의사로 오신다는 거죠

또 또 또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죠 지금

의사로 백날 와 봐도
환자 보다 못한 환자로 취급받고

노예 보다 더 못한 노예

왜? 죄인에게 팔릴 정도이니까

그 정도로 무시꺼리 무가치하다는 것이

바로 인자 라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사명이 이 인자를 그렇게 다루시는 겁니다

그랬던 인자가

우리가 벌레 만도 못하게 취급했던 그 인자가
무시꺼리
가치 없는

그 정도로 지난 주에 우리가 옳다고 좋아고 해서
주님의 이름을 버렸듯이 말이죠

그 버림받은 이름이
더럽혀서 버린 이름이

도리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의사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특이한 의사 이다 말이죠

그런 의사에 그런 환자 라고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처럼

그 남편에 그 아내 라고 부창부수 라고
같은 운명처럼

이스라엘의 운명 또한 예수님처럼 놓여지는 운명으로써
사명이 그렇게 성도를 다루는 겁니다

사도들 보세요
사도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운다 라는 말은
사도들을 죽이시기로 작정했다 라는 말 아닙니가
그럼 그 사도들의 원조 할매 원조는 누굽니까

누굽니까 ~~~~~~안 ~

예수님 아니냐 말이죠

지금 제자들이 이렇게 죄인으로써 예수님을 죄인 보다 더 못한 노예로 팔아버리지만

이것 자체가 이미 정답이 먼저 떳기에
이 모습을 들통 당하는 겁니다

정작 이런 죄인으로써 들통당함에 있어서
다른 제자들은 성령을 받아서 어찌할꼬 하지만

오히려 그 당사자 가룟유다는 이 죄인으로 들통당한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자

예수님의 운명 속에 들어가기 싫다 라고

시드기야 왕처럼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내 믿음은 내가 지킨다
내 사명은 내가 지킨다 라고

사명에 의해서 포로잡힘당하고 여고냐처럼 말이죠
잃어버림 당하고
베드로처럼 세 번 부인하게 됨으로써 
한탄하게 되는 자로 당해야 하는데

사명이 그를 다루지 않으니까

사람의 뜻
자기의 뜻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그 잘못된 부분만 도려내겠다는 심뽀로
자살을 하더라 말이죠 
스스로 뉘우쳐서 말이죠
지가 지 사명을 끝까지 다하겠다 라고 말이죠

그런 자기의 뜻을 버리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을 다루시는 성령의 일 곧 사명의 일은
예수님을 아버지의 뜻에 맞도록
예수님 자신의 뜻을 포기하게 만드시는 것이였거든요

그렇게 안하면 또 인간의

원인 있는 결과로써
또 어느세월에 성전 짖고
어느세월에 남 7번 용서하고

의문의 반복이다 말이죠
흐릿해요

사랑은 또렷합니다
흐릿하지 않아요

단번에 용서를 해요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아요

사랑만이 단번에 

한 알이면 탁

잔 ~~~~~~~~~~~~~~~~~~~딱

회충,요충,촌충,십이지장충,등등 기타 기생충엔 기타 패러사이트엔

속이 다 시원해요

결박을 풀려면 찜찜하게 남아 있으면 될까요 안될까요

아니 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걸리적 거리는게 있으면 그게 무슨
결박을 푼 겁니까

속이 다 시원하게 뻥하고 뚫여야지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놈들을 보면요
뭔가 찜찜하게 계속 남아있어요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를 달고서 계속 꼬리표처럼 달고 다녀요

이것이 종이다 말이죠 종
주인의 눈치를 늘 보는

자녀는 눈치를 안 봅니다

그 정도로 속 시원하게 모든 결박을 풀었거든요

그러니 이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지
누가 언 놈이 제사와 번제를 또 요구하냐 말이죠

목사들이 그래서 사기꾼들이다는 겁니다
자꾸 숙제를 던져요 왜 목사 말을 듣냐 말이죠
들으면 버릇 나빠져요

왜 목사를 시켰을까요
제일 안 믿는 놈들이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 자칫하면 속아넘어갈수가 있으니

늘 깨어 있어야 해요
(물론 정답이 먼저 떳기에 깨기 싫어도 깨도록 하시는 겁니다
육신은 안되어도 말이죠)

속이는 것을 넘어서 아예 집단 최면을 걸어요
누구 말 마따나 집단최면술 배운다 라고 그렇게 목사를 비판해 놓고서는
그렇게 비판한 목사놈이 자기가 최면술을 또 배우러 어디더라
외국에 막 갔다 와요 글쎄
뒤늦게 라도 집단세뇌를 시켜서 그 동안 눈치 본다고 못 벌었던 돈을 벌겠다 라고 말이죠

자기가 종이니까
남도 종 만드는데 미쳐있어요
사람의 종으로 만들어요 글쎄

자녀라면 뭘 해도 다 결박에서 놓여졌어요 제발 막 사세요 글쎄

자본주의 시대에는 돈이 주인입니다
인간이 돈입니다 돈의 노예이다 말이죠

상대방을 돈으로 못 만들면
노예 
종으로 못 만들면
돈을 못 벌어요 

도리어 종이 된다 말이죠

바로 그런 인간의 세계의
주종의 관계망을 끊어버리고자

종 팔 듯이 팔리신 예수님이

도리어 요셉이 말이죠
은 20냥에 팔렸잖아요

네 그 당시 노예 값이다 말이죠



바로 형제들끼리도 노예로 취급해야 살아남는 구조에서
그것을 끊어버리고자
그 결박을 끊고자

그 노예로 팔린 자가
죽은자가 도리어 산자를 건져내는 겁니다

살려주시는 영이 마지막 아담이
좀비 같은 첫아담을 말이죠
좀비 곧 팔렸다는 겁니다

지가 팔린줄 모르니까
남을 팔아야 사는 구조이니까 말이죠

사람은 자기 뜻에 안 맞으면 바로 팔아버려요

그런 자기의 뜻을 제거해 달라고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이 고난을 옆으로 지나가게 해 달라고 말이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겁니다

이 기도 아니였다면
베드로는 벌써 소위 시체말로 나가리 되었다 말이죠
소돔과 고모라 되었다 말이죠

그러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자유케 하시고자
자녀로 만드시고자

더 이상 종으로써 주인 눈치 보듯 남 눈치 안보도록
자유케 하시고자

모든 결박에서 끊어버리시고자

대신 매 맞으신 겁니다

그가 찔림으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도록 말이죠

이 자유케 하신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마음껏 땅끝 죽음의 어두운 바다
큰 물로기 뱃속 스올끝까지 증거하시는
증거자로 삼으시는
그 정도로 자유자인 자녀로 삼으신 겁니다

이 증거가 우리를 증인으로 말이죠

(롬 8:15, 개역)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