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0 심히 두려워 말하길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 27,50-54)

엘리 엘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VS 엘리야가 저를 구원하나 보자 (마 27,45-49)
마태복음 2018 2021. 10. 3. 10:11
18-149 엘리 엘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VS 엘리야가 저를 구원하나 보자 (마 27,45-49)

〈마태복음 27,50-54 개역한글, 신약성경 51쪽, 찬송가 138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 27:50, 새번역)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마 27:51, 새번역)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마 27:52, 새번역)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마 27:53, 새번역)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마 27:54, 새번역)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지진과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였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아들이라는 의미는
산자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로써 죽는자이다는 겁니다

즉 진짜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만을 증거하는 자로써 죽어야만 하는 자이다는 거죠
그것을 아들 이라고 합니다 아들 누구 누구의 아들 인자 라고 합니다

이 기능을 먼저 이스라엘이 맡았다 말이죠
그런데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아들을 꼬추 짤라서 예루살렘 딸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를 대신 누가 감당하는고 하니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대신 이스라엘의 기능을 다 완성하심으로써
참이스라엘로 오신 주님이
산 자의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했죠 야고보서의!!!

비오지 않기를 3년 반동안 기도하고 (엘리야의 행함이 있는 믿음)
이삭이라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고 (아브라함의 행함이 있는 믿음)
거짓말로써 기생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군을 숨기는 (기생라합의 행함이 있는 믿음)

이 부정적인 행함 3가지가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야고보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종말로써
종말을 미리 앞당기는 겁니다

그 종말이 바로 아들 이라고 했지요 인자입니다

정답을 미리 앞당겨서 답을 쓰게 되는 반칙이요 부조리 이다는 겁니다
무엇이 반칙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반칙이다는 거죠

오늘 이 반칙을 우리는 미리 받아버린 겁니다
무시험 합격으로써 말이죠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 부조리 라는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 보다 옳았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는 겁니다

그가 상함 받기를 원하셨고
그가 질고 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고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겼고
그들의죄악을 친히 담당한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셨다 라는 
이 인애와 자비를 원하셨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여기에 인간의 지혜인 철학이 끼일 틈이 있을까요?
도리어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라고 비아냥 거립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 이스라엘 조차도 거리끼는 걸림돌 이다고 합니다

왜?
사람은 자기가 살아있음에서 출발하는 믿음을 펼치기 때문입니다 종교죠
선악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죽어버리면
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하고
또 유대인에게서만큼은 그렇게 하나님께 열심인 모든 것들을
허물고 3일 만에 다시 짖는 자기들의 손으로 죽인 예수님을 세워야 하니까
이 얼마나 거리끼는 걸림돌에 제대로 딱 걸려버린 것이냐 말이죠

그러니 거부해 버리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도저히 도저히 받아들일수가 없는 걸림돌이다는 거죠

사람들은 남을 7번 용서하는 디딤돌 역할로써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고 싶지
누가 다리걸어서 남을 넘어뜨리는 인간으로 살고 싶겠냐 말이죠
다윗 보세요 우리야 장군 한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야 가정 자체를 다리 걸어 넘어뜨려서 아예 없애버린 악질 중에 악질 아니냐 말이죠
그런 사람이 되고팠을까요? 

다윗 조차도 자기자신에 대한 자기사랑이라는 중독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다리 걸어 넘어뜨리고 있으니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는 의로운 왕이고팠는데
당장 그 놈을 잡아 족쳐라 라는 그 놈이 바로 다윗 니다 이 놈아 라고
의롭기는커녕 죄인 중의 괴수로써 들통나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쪽에서의 성전개념과
하나님 쪽에서의 성전기능과의 충돌이 되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만들어서
남을 7번 용서하는 디딤돌인간이 되고파하는 인간의 성전개념 신체개념 몸 하나님형상개념을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도리어 남으로부터 7에 70번 용서받아야 만 하는 항상 뭘 해도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도록 해 버렸으니

오로지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울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만드시는
이 참성전 움직이는 새성전의 기능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의사만을 외치는 환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기능)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을 주시는 주님쪽에서 넘어오시는 성전기능이 되는 거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언약성취 말씀성취입니다
이 약속을 다 이루신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말씀에 의해 죽고 말씀에 의해 다시 사시는 의를 거룩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반대로 사람에 의해 죽고 사람에 의해 다시 사는 것을 거룩이다 라고 우깁니다
그것은 거룩이 아니라 선악이다 말이죠

모든 종교는 바로 이런 선악의 교리인 사람의 교리로 인해 다시사는 부활을
구원을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구원의 산을 예수님이 박살을 내고 있으니
성전을 헐고 3일만아 다시 짖는 자여 어서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시지 라고 비웃는 겁니다
선악의 교리를 믿고 까부는 거죠

고로 인간은 늘 사람을 의식하고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겁니다

즉 예수님 당시로 치면 인간들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눈치를 보고 
사람이 만든 유대교의 교리 눈치를 보고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본의 눈치를 보고
공산당이면 공산당이 오히려 자본에 미친놈들이니까 이들 또한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사상에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거죠

그런 모든 인간의 교리에 따르면
예수님의 말씀성취와 인간의 교리성취가 서로 충돌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의식하는 것과
사람들이 사람을 눈치보면서 말씀성취를 바라는 것은 완전 정반대로써

말라기에 엘리야가 온다 라는 말씀성취를

(말 4:5, 개역)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1,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말 4:2, 개역)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3, 개역)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4:4, 개역)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말 4:5, 개역)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개역)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어 그래? 그래 그래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그래 멀리서 들어보니 엘리야를 부르는 것 같은데
어디 엘리야가 너를 구원하나 보자 라고
말씀성취를 모든 인간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있다 라는 거죠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우상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죠

재물과 우상과 하나님을 교묘히 섞은 모습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말씀성취를 문자적으로 본 겁니다
문자주의(세대주의) 이단을 배격한다 라고 하지만
정작 한 다리 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어 자체가 인간은 선악의 언어 바벨탑의 언어로 사고하고 있기 때문이기에
완벽하게 제거할수 없도록 오히려 제거하면 제거할수록 더더욱 찰싹 더 달라붙는
율법 4배나 갚으라 가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니까 말이죠

그래 그래 말라기 말씀이 과연 너 예수 에게 성취되나
아니면 우리에게 성취되나 보자

거봐 엘리야가 너를 구원하지 않잖아 라고 하더라 말이죠

바보들 엘리야를 문자적으로 본거다 말이죠

예수님이 엘리야인줄 모르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안식일의 주인을 죽이는 셈으로써
거봐 너는 안식일 어기는 자 이잖아 라고 인간의 말씀성취는 예수와 무관하다고 나온거고
거봐 그러니까 안식일 주인이 맞잖아 라고 도리어 말씀성취는 오로지 예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라고 안식일의 주인으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말씀이 성취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은 그럼 나는 예수님을 죽여야 하는
안식일의 주인을 죽여야 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자 이어야만 하냐 라고
거리끼는 걸림돌에 제대로 걸려드는 자로써 선택받은 줄도 모르고

그것이 도리어 은혜인데
그 은혜를 거부하는 식이다 라는 겁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한 이방인들은
가슴을 치면서 어찌할꼬 어찌할꼬 라고 용서해 달라고
맞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살인죄 간음죄 인구조사죄 라는 일급살인자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보더라 말이죠

왜 날 때부터 소경이요
바리새인 말 마따나 태어날때부터 저주받은 지옥갈자가 곧 이방인처럼 고아 과부 나그네가 왜 되었냐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곧 예수님이라는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부터 용서받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으로 태어난 거다 말이죠

이것을 자칭 눈 뜬자 본다고 우기는 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못 보는
말씀성취는 오로지 예수님으로만 이루어진다 라는 것을 거부하고

모세의 제자 라고 갑자기 말 바꾸는 겁니다

바로 이겁니다
모세의 눈치를 본다는 거죠 모세가 그들 말 마따나 날때부터 소경인 실로암소경을 눈뜨게 했나요? 모세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했나요? 그 또한 일급살인자 다윗과 같은 자입니다

모세가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죽었나요?

모세의 눈치를 보듯 모세의 눈치를 보는자들끼리 교리를 만들어서
율법을 끌어와서 율법의 눈치를 보고 있지
사랑하는 자는 없다 라는 겁니다

(말 4:4, 개역)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이것이 율법을 기억하는 자들 맞나요? 율법의 껍데기만을 보고 눈치는 보는 자들인가요???

(마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7, 개역)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마 27:48, 개역)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마 27:49, 개역)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라고 그들 또한 말씀을 알고
이 말씀을 이런 태도로 비꼬고 있지
만약 이루어지면 그때 가서야 믿어주면 된다고 있지

믿음 또한 행함으로보고 있지

종말이라고 보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종말이란 인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자기의 죽음
우상의 죽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허물어 짐을 보는 것이
진짜 종말의 성전이다 말이죠 참성전

누가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자기의 죽음을 봅니가

선악의 교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가 살아가는 생존으로 보고 있지
같이 죽고 같이 사는 말씀성취에는 단 하나도 관심이 없다 라는 거죠

그저 말씀성취도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하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 라는 생존으로부터 출발하는 믿음이기에
날 살려주지 못하는 이 십자가의 죽음은 도저히 믿을수가 없는

믿음생활 신앙생활에 도리어 방해하고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고 마는 겁니다

말라기를 포함한 참선지자의 활동은 바로 이 예수님의 죽음을 겨냥한 겁니다
천삼백년 만에 느닷없이 변화산에서 모세가 나타나서 하는 말
주여 어서 죽어주세요 그래야 제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수 있다 라고 하잖아요
이것이 계시록의 모세의 노래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지만 십자가의 노래를 부를수 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이 말씀성취에
내가 선하니 악하니 라는 선악의 교리가 끼여들 틈이 있겠습니까?
내 구원 내 천국 내 믿음이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만 구원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라고 24장로들이 면류관을 반납하잖아요
24장로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때에 그들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했던 자들인데

이 면류관은 당연하다 라고 넙쭉 받냐 말이죠
도리어 반납하잖아요

용서도 감지덕지인데 면류관이라니요 아니되옵니다 라고
인애와 자비를 찬양하고 있지

번제와 제사를 찬양하고 있지 않아요
바로 이 번제와 제사를 바라는 자들이
엘리야가 예수를 구원하나 보자 라고 나오는 겁니다
구원하면 그때 엎드려서 잘못했다 라고 하면 된다 라고

여전히 이 예수님의 죽음에는 관심없고
이 십자가라는 요나의 표적에서 출발할 생각이 없고

거봐 예수님도 엘리야가 구원했네 라고
구원교리 말라기의 엘리야구원이라는 문자를 그대로 믿어주고 있잖아 라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말씀성취를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 속에 자기 구원을 항삼 염두하고서 말이죠

그렇게 되면 말씀성취가 아니라
성전을 헐지 않고 3일 만에 짖는 자여 어서 구원을 펼치소서 라고 하는것과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사단의 깊은 것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나타내라 라는 식은
사단의 얕은 것만 보고 하나님의 얕은 것만 보겠다 라는 자기들이 만들어낸 말씀성취이다 말이죠

바로 그런 나를 우상으로 파괴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서
다 이루신 다시 3일만에 살아난 예수님이라는 새 몸이다는 겁니다

이 새 몸은 헌 부대 헌술 헌 몸과는 전혀 안 맞는
처음아담과 안 맞는 마지막 아담으로써

이전 것은 지나가야 새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지나가지도 않는데
또 지나가고 삭제되는 것을 거치지도 않는데 어떻게 새것을 누리게 되냐 말이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면서
고대 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허무한 것에 굴복 하는 죽음
삭제
심판
종말
이전 것은 사라짐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간다 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그동안 고대했거든요

아니 지구멸망을 지구가
자연이 고대했다고요??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했거든요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지구멸망을 거부하다가 갑자기 긍정하는 자도
결국 인간 자기를 눈치 보는 겁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관심 없어요

살아볼려고 버티다가 버티다 결국 자살하는 사람도
자기자신이라는 허구 허상을 눈치 보는 겁니다
아이고 이렇게 죽을빠에 멋들어지게 죽어서
뽀대나는 좋은 곳이나 가보자 라고 말이죠
자기교리 선악교리
나는 괜찮은 인간인데 세상이 더러버서 떠난다 라고 핑계대면서 말이죠

여전히 예수님이라는 종말의 인물에는 관심 없이
종말을 끌어당기더라 말이죠

말라기에 엘리야가 왜 온다 라고 했습니까
모든 피조물이 기다리고 기다렸거든요

아니 그런데 유독 인간이라는 피조물 만이 안기다렸거든요
메시아를 기다렸다 라고 우기는 유대인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은 안 믿어요

아니 엘리야가 예수를 구원하나 보자 라고
말씀성취가 되나 보자 라고 나오는 이유는 시험하는 이유는

엘리야가 바로 예수님이다 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즉 예수가 예수 자기자신을 어떻게 구원하나 보자 라고 보겠다 라는 것은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자기를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보고
그 구원의 방법을 따라하겠다 라는 심뽀이다 말이죠

이것이 바벨탑사상 아니냐 말이죠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 이미 빠진 그들의 메시아 사상 아니냐 말이죠
예수님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이 이 마귀사상에 빠졌듯이
그 당시 메시아 사상이
오늘날 이렇게 힘든 세상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구원사상과 역시나 똑같다 말이죠

나는 어떻게 구원받을수 있는가 라는 사상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종교교리가 된 거다 말이죠
이 교리 플러스 실천에 미쳐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는 것이고, 자기 의로움을 쌓기에 정신 팔릴 수밖에 없어요
마치 오늘날 스팩을 쌓고 성화론자들은 성화를 해야 교회에서 계급장을 받듯이
이게 카스트 제도 아니냐 말이죠

이런 계급사회 부의 불평등사회에
한국문화는 기생충처럼 오징어게임처럼
도전장을 의문을 제기한다???

마치 천주교가 남아성추행에 도전장을,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그런 말씀성취가 이루어질까요?

자본주의 자체가 돈으로 계급이 주어졌는데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과연 해체 할 수가 있냐 말이죠
자살하면 될꺼라꾸?
우상이 우상 스스로가 우상을 헐라 3일만에 짖겠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맹 3일만에 우상을 또 세우는 꼴이다 말이죠
이 의문의 반복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언제까지 오징어게임을 반복할꺼냐 말이죠

어린아이 일, 오락을 언제 까지 할껀데요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즉 말라기에서 엘리야를 언급했듯이

참선지자들은 이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종말을 말씀성취를 구했다 라는 겁니다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를 구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을 구하는 장성한 자이다 라는 거죠
자꾸 죽음을 구해여 죽음을
끝을
종말을

누구라는 인물
인자를 구해요

그 인자를 구한다 라는 말은
나는 죄인임을 그 3가지 증거물을 저당잡혀도 상관없을 정도로

이 십자가가 옳았다
이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 나의 꽁꽁꽁 숨겨둔 죄악 3가지를 포착하는 이 십자가가 옳았다 라는 겁니다

아 꽁꽁꽁 숨겨둔 죄악이 없다구요?
과거가 아닙니다
미래의 죄 까지도
새롭게 생성한 죄 마저도 말이죠

생각지도 못한 죄에
아니 이런 죄를 내가??? 설마 내가 했던 것 마저도 말이죠

결국 죽음도 죄도 저주도 모조리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다윗은 꿈에도 몰랐죠

우리야 장군 오로지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만 생각하는 자를

어서 어서 다윗 자신이 간음한 남의 아내를 취한 것을 감추기 위해서
어서 어서 동침하게 만들어야 이 죄악을 감출수가 있는데
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동시다발로 생각지도 못한 죄로 인해서

결국 살인까지 하게 되니

끝까지 자기 따나 이제는 이 이름없는 아이는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겠노라 라고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어떻게 해서든 살려보겠노라 라고
구원해 보겠노라 라고 나서지만
결국 인간이 성전에 바치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 라는 것으로는

아이를 살려내는 것이 못 되고 그렇게 되면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자의 하나님이지요

도리어 거꾸로 이름 없는 이 아이의 죽음이
꺽으신 뼈의 죽음이 도리어 다윗을 죽은 다윗을 살리는
죽은 자의 하나님만 주구장창 외치고 있는 다윗을 도리어 살려내는

산자의 하나님을 기쁜소식을 복음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참성전의 기능을 펼치더라 말이죠

자 그럼 천사의 기능은 이 참성전의 기능을 보여주고자
모든 것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평준화 시켜버리는 겁니다

모조리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다 죽여놓고서

자기 죄로 우는 자를 피 발라서 살리는

이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죽음으로써만 말씀을 성취하는 이 약속만을
밀어붙이는데 있어서

말라기에 나온 엘리야 곧 참선지자들의 대표성은
이 종말을 밀어붙이시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만을 고대하고 고대했던
인애와 자비만을 원하고 원했던

어서 어서 이 십자가의 피로 용서 해 달라고 하는
이 부르짖음을
이 상한심령을

주님은 찾고 찾는

환자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아들과 딱 맞는
인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겁니다
구원자는 죄인만을 부르러 오셨다 라는 겁니다

환자가 아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를 부를턱이 없지요
이 부르짖음을 그들 건강한 자, 의인들은 종교오락으로 부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정도로 급박하고 급박한게 아니거든요

유일하게 산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부를려면은
자신이 죽은 자 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부르짖지

그렇지 않은 자는 그저 자기구원용도로
어떻게 하면 구원얻죠
아 하나님의 아들을 부르라꼬요
주 예수를 부르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네 가족이 구원을 얻으리라

까짓꺼 불러주져 뭐 믿어주져 뭐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롬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개역)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문자로 부른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부른다는 것은

나는 죽은자 라는 겁니다 아들을 부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환자요 죄인이요 죽음이요 사망이며 수치이다는 겁니다

자기가 불러야 하는 아들을 죽을정도로
수치가 올라오는 자이다는 겁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스멀 스멀 매일 매일 올라오는 자이다는 겁니다

인자를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불뱀에게 물린 독이 온 몸에 퍼져있는 자이다는 겁니다

말씀성취는 바로 그런 죽어마땅한 자에게 펼쳐지는 겁니다
정작 모든 피조물들은 허무한 것에 굴복하면서 죽어마땅함 속에 들어가는데
곧 말씀성취 때문에 말씀에 의해서 우리를 날마나 날마다 죽이시는데
이것이 십자가 인데 말씀성취인데

우리는 이 말씀성취를 반대로 나를 살리시는 쪽으로 생각하다 보니

말씀에 의해서 죽지 아니하는 자는 말씀에 의해서 다시 산다는 것을 모르도록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못하도록

오로지 자기 의로움으로만 살고
하나님께 대해 열심으로만 살려고 할 뿐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안 쳐다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이 십자가의 피 사랑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뭐냐? 완악한 수건만 고집한다는 거죠
사라질 영광 중에서 최고로 영광스러운 얼굴에 광채가 나는 그것만을 고집하겠다
그것이 말씀성취라고 보고 있지

누가 예수님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보겠냐 말이죠

그 수치스런 십자가 날 위해 지셨네를 누가 보겠으며
누가 노래하겠냐 말이죠

정작 모세의 제자라고 우기지만 모세는 예수님에게 죽어달라고 할 정도로
완악한 수건을 벗어버렸는데 말이죠
완악한 수건의 원조가 모세 아니냐 말이죠
율법의 대표자 아니냐 말이죠

예수님께서 말씀성취의 본을 보여주셨다 말이죠
말씀에 의해서 죽는 자가 말씀에 의해서 다시 사는
이 하나님의 의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시는 이 거룩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섬기심을 말이죠

인간의 섬김은 자꾸 댓가를 요구하거든요


반대로 주님의 섬기심은 뭡니까
날마다 우리를 죽이십니다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우리는 죽여요

이렇게 말씀이 날마나 죽이는 자가 날마다 다시 사는 자입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으로 새벽이슬같은 청년이 주께로 나아오는 겁니다

그 기준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라는 기준에 의해서
이 본에 의해서
이 틀에 의해서 우리는 붕어빵 찍어내듯이 찍어냅니다

(벧전 2:21, 개역)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미 죽은 자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성취만을 외치지
인간의 말씀성취,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과는 도리어 충돌하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바로 이런 예수님의 말씀성취인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의 영광을
이 말씀성취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지 찬양자로써 말이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말씀성취를 매일 매일 짜기 바쁜데 큐티처럼 말이죠
그것으로 영광돌리겠다 라고 또 엉터리 성전개념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나타낼려고 하지 않을려는 그 성전의 참기능을
이방인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박살내시면서까지 참성전의 기능인
하나님의 이름
아들의 이름
아껴둔 이름
더럽히지 않은 은밀한 처소의 기능을 나타내심으로써 다 이루셨다 말이죠
이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도리어 우리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가루가 되는
나 라는 신체 나 라는 성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 라고 자기 나름대로의 말씀실천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가루로 만드심으로써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성취만을 쳐다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노라
절대로 십자가를 끝까지 따라가겠노라 이거 최고의 큐티 아닙니까 말씀실천 아닙니까

그런데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가 될까요?
바리새인도 못 타넘는 주제에
마귀를 무슨 수로 타 넘는 의를 펼칠수가 있겠습니까

도리어 주님으로부터 넘어오시는
마귀를 타 넘고 넘어오시는 그 의에 복종하도록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성취를 봐야
마귀의 깊은것까지 부수시고
우리가 늘 말씀실천한다는 것이 저 마귀와 한패거리로써
바리새인과 같은 독사의 자식처럼
지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가도록 막는 짖만을 했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법에 저촉 받는 자가 무슨 수로 법을 완성하겠습니까?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데
사랑은커녕 법 지키기 지키기 에만 정신팔려 있는데
자기 의를 쌓기에 정신 없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만 충성할 뿐이지, 내 열심히 특심일 뿐이지

사랑에는 일체 관심이 없어요
번제와 제사에만 정신 팔려 있지

인애와 자비에는 관심 없다 말이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사랑에는 관심 없어요

율법이 없는 자도 자기가 자기에게 법이 될 뿐이다 말이죠

그런 의문에 갇힌 자가 무슨 수로 이 의문을 넘어설수가 있겠습니까?
사랑은 곧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은 너끈히 넘어섭니다 죽음으로써 말이죠

그래서 지성소의 휘장을 찢는 겁니다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중간에 막힌 담이 허물어 짐으로써

그 중간의 경계선이 그 동안 거룩한 세계와 더러운 세계로 구분 짖는 그 경계가 무너짐으로 인해서

더 이상 인간은 거룩한 세계로 나아갈수 있는 길이 사라져 버렸다 라는 겁니다
인간이 구원 될 수 있는 길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사실은 애초부터 그랬어요
어딜 감히 인간이 더러운 주제에 종교의 교리를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 라는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이였다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말이죠

그럼 이런 장치들을 왜 주님은 하라고 했느냐
그게 다 실상을 말하기 위한 그림자로써
예수님을 쳐다보라고 했지
그림자를 지켜서 구원 받겠다 라는 것이 말이 되냐 말이죠

그럼 그림자 이다는 말은 신약에 와서야 알지
그것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 셈이네요?
지금 유대인 걱정 할게 아니라
여전히 우리들도 그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대로 하고 있기는 매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기독교라는 미신을 깨뜨리고
개혁주의라는 미신
성화론이라는 종교오락을 깨뜨릴 마음이 추호도 없기는 매 마찬가지이거든요

성화교리를 만들어 지키는게 낫습니까
개혁주의신학을 실천하는게 낫습니까

아니면 매일 매일 나를 죽이시는 십자가가 나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게 낫습니까?

나를 제대로 죽이고 일곱과 삼 곧 절대저주
나를 제대로 심판하지 않으니까 그 빈공백을 종교교리라는 오락으로 마약으로 채워서
그거 실천하는 누가 누가 잘하나 예능프로그램을 찍고 있더라 말이죠

시청률 잘 나와서 전세계 1등 하고
77프로는 넷땡릭스가 다 가지고 가고
10프로만 가지고 가는
그 자체가 부조리 아니냐 말이죠

의문의 반복 아니냐 말이죠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스스로를 회개하면서 또 다른 자본주의로
탈영토화 시켜 전복시키고 다시 재영토로
그렇게 해도 답이 없기는 매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갇혀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대중을 속일려며는 텔레비전을 아주 아주 싸게 구해할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라고
그래서 성화론이라는 카스트 제도가 굳건해 진다 라고
자꾸 서로 서로 경쟁을 붙여야 한다 말이죠

악령을 집어넣어서 자꾸 인구조사 하게 만들어야 한다 말이죠

나쁜장르의 B급 문화 라는 책에서 인도의 특유의 문화를 적어놨던데
인도가 제일 마지막으로 오징어게임 1위 했다 말이죠
다들 절대로 안될 것이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인도의 특유문화가 영화 속에 노래와 춤이 없으면 안되는 이유는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종교의 예배로써 작용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졸지에 오징어게임이 그 종교를 깨뜨렸다 라는 것은
돈 앞에 장사가 없다 라는 거죠

최고의 신은 돈인데 돈이 중요한 마당에 춤과 노래로 위로를 받아본들
마약을 빨아본들 그 마약을 구입하는 것도 돈 아니냐 라는 겁니다

발리우드도 속내를 까보면 돈이고
헐리우드도 야 큰일 났다 우리 돈 다 빼앗기게 생겼어 라고 정신차리자 라고 나온다 말이죠

이렇게 돈도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을 붙여야 이 의문의 반복에서 벗어나갈길이 없도록 한 거다 말이죠

과거 90년대 한국교회가 IMF와 함께 무너짐으로써 이제 비로소 노골적인 돈 놀이를 하는데 있어서
다락방이단과 신천지 이단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는 아예 교인 빼앗기 싸움 더 이상 교인은 늘지 않을테니
있는 교인 빼뜰어먹기 싸움이 벌어진 거다 말이죠
그러다가 신천지의 등장으로 인해 다 빼앗길 판국이다 라고 질질 짜면서
자기자녀 빼앗겼다 라고 우는 판국이 되었으니
돈의 흐름을 모르면 다 빼앗긴다 말이죠

이제는 코로나 까지 말라 죽이네 그려 ~~~~~~
돈 떨어져 나간다 라고 교회가 울고 있어요 내 돈 내 돈 내 돈 ~~~~~~~~

처음부터 성전은 무너지도록 되어 있었다 말이죠
처음 부터 이스라엘은 해체되도록
누락 되도록 되어 있었다 말이죠

오로지 예수님만 나타내도록 되어 있었기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을 성취했는가만 바라보도록 되어 있으니

이 십자가가 매일 매일 나를 죽이심으로써 내 속에 예수님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날로 날로 새롭다 말이죠

구원용 피 발림이 아니라 말씀성취로써의 피 발림이니 이 피가 얼마나 영광인가를
피를 나타내기 위해서 매일 매일 죽는 사건이 벌어지도록 하시는 거다 말이죠

우리는 이 피의 공로
예수님 혼자만 말씀성취하신 그 피의 공로만을 외치고자 이 땅에 태어나고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잠시 잠깐 살다가는 인생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하등 중요치 않습니다
정작 그런 일상 속에서 예수님이 펼쳐놓은 피잔치 피남편의 사랑만을 나타내시고자

이 세계를 허락하셨기에
이 세계에 피 만 노래하면서 예수님만 졸졸졸 따라가시면 됩니다

종교교리 실천 따위는
나의 믿음 나의 행함 나의 말씀실천 따위는

나를 위해 대신 매 맞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이 십자가의 죽음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함량미달은 짐승의 수 666일 뿐입니다

그런 나를 죽이시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살리시고자

자신의 피를 바르신 이 값없이 베푸신 피흘신 사랑
까닭없이 무조건 용서하신
원인 없는 결과 라는

이 정답만을 앞장세우시면서

문제아 탕자를 찾고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찾으시고

죄인과 환자만을 부르시러 왔다 라는
법을 어긴 자를 말이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를 말이죠

이 자기 죄로 우는 자를 찾으시고자

주님은 지금도 99양 내버려 두시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겁니다

이 죽은 자를 찾으시는 분만이 산 자의 하나님 이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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