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1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나니 (마 27,55-61)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 27,50-54)
마태복음 2018 2021. 10. 17. 08:51
18-150 심히 두려워 말하길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 27,50-54)

(롬 6:4,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7,55-61 개역한글, 신약성경 51쪽, 찬송가 465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마 27:55, 새번역)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께 시중을 들면서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이었다.
(마 27:56, 새번역)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
(마 27:57, 새번역) 날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출신으로 요셉이라고 하는 한 부자가 왔다. 그도 역시 예수의 제자이다.
(마 27:58, 새번역)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니, 빌라도가 내어 주라고 명령하였다.
(마 27:59, 새번역) 그래서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삼베로 싸서,
(마 27:60, 새번역) 바위를 뚫어서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신 다음에, 무덤 어귀에다가 큰 돌을 굴려 놓고 갔다.
(마 27:61, 새번역) 거기 무덤 맞은편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아들만이 말씀을 성취하신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서를 통해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참성전 곧 새성전의 기능이다는 거죠

즉 이 말 곧 하나님 아들만이 말씀을 성취하신다 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간은 말씀성취를 하는게 아니라 말씀실천을 한다 라는 거죠
실천하고 노동하고 행함을 표하면 그것에 따른 보상을 노린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그 행함에 따른 자기 자랑 곧 육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쪽에서 성전에 바치는 개념들은 십의 일조 했다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 라고
저 세리 매국노와 같지 않다 라고 반드시 육의 자랑이 개입하게 되고
마치 마귀가 개입하듯이 말이죠
그 육의 자랑은 반드시 잔칫집과 같은 애굽을 추구하는
벌거벗은 애굽
수치를 가릴수 있는 말씀실천이라는 거룩실천의 육의 자랑이 되니

여기에 상대적인 잃어버린 자 기능을 하는 이스라엘의 기능 마른뼈 하나님의 군대의 기능을 하는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다 라고 반드시 자기자랑을 저 세리를 통해서 극대화 하면서
내가 옳았지 않았느냐
당신 시키는대로 했으니까 라는 욥의 주장처럼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탄의 일 사람의 일
사탄의 깊은 것을 거쳐서
하나님의 깊은 십자가의 지혜를 펼치심에 있어서
죽은 자를 살릴때에

살았다 라고 우기는 자들이 다 부끄 부끄가 되는 성령의 일 새 일을 새 마음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것만이 아름다움이다는 거죠

죽은 자를 위해 대신 죽는
잃어버림 당한 자를 위해 대신 잃어버림 당하는 자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친구요 이웃이니까 말이죠

예수님의 말씀성취는 보상을 바라는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성취는 죽음으로써 다 이루시는 겁니다
이것이 산 자의 하나님이고

반대로 인간은 죽은자의 하나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으로는 말씀을 성취할 수가 없다
오로지 살아있을때에 실천으로써 말씀을 이루어야 한다 라고
이것이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생명 곧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이런 나를 건드리면 안된다 라는 법을 선악의 법을 세우는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나를 건드리면 안된다 라는 선악의 법을 세우더라 말이죠
이것이 번제와 제사를 지키는 인간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울리는 꽹과리 온갖 소음을 내는 겁니다
잠잠할 수가 없어요 육의 자랑을 해야하니까 말이죠

바로 이런 인간의 이름을 갈아버린다는 의미에서 기념이름이
여호와요
거기에 걸맞는 여호와 곧 거룩한 전쟁의 신의 이름에 걸맞는 얼굴이 바로
불로써 온 얼굴이다는 겁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꽃이 불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타들어가지도 않으면서 살수 있었던 것은 불이 봐준 겁니다

소위 하나님 형상 회복 운동 펼치는 놈들 성화론자들을 보면요
하나님의 얼굴 곧 보면 타 죽는 얼굴을 안 만나보니까 그따위 운동을 펼치는 놈들이다는 겁니다

무슨 무슨 운동 하는 놈들은 다 악한 무화과 나무 이다고 했습니다
정작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도록 배려하심 섬김을 받은 자는
좋은 무화과 나무로써 포로 잡혀 가는 겁니다
마치 시드기야와 여고냐의 차이처럼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는 가룟유다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서 포로잡힌 베드로의 차이처럼 말이죠

베드로는 포로 잡힘으로써 이 사탄의 깊이를 거쳐서 하나님의 깊이를 알게 하시는
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있어서 안 망하고 곧 율법이 있어서 안 망하고

율법의 껍데기만을 추구했던 가룟유다는 율법이 없어서 망하는 이방인처럼
사탄의 깊이를 거치지 못하니까 마귀에게 속았구나를 깨닫고
그 부분만 오려내겠다 라고 자살을 하는 겁니다
자살을 하는 자들이 다 이런
무슨 무슨 운동을 하는 놈들이다 말이죠 
하나님나라 운동 하는 것 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디있냐 라는 식으로 
그러면 그럴수록 작은 실수를 한 자기자신을 용납 못하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성전에 바치는 금으로써 맹세하는 우상숭배와 같은 식인 거죠
그건 죽은 자의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이고
이것으로 잔칫집을 추구하고 있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이름을 가로막고
은밀한 처소의 기능을 막아서고
하나님의 얼굴을 그 태양빛에 그을린 얼굴을 고개돌려 버리고
자기의 얼굴을 자랑하는 모습으로써
그 어떤 육체의 얼굴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참성전의 기능의 맛을 맛 보라 라꼬
앞의 글 에스겔 39장에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자
심판 속에 불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그래야 그 불 속에서 아무 육체의 얼굴도 그 가면도 다 벗겨지고 불 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거든요

정작 하나님의 얼굴은 그런 선악을 추구하는 나를 불태우고자 나의 얼굴을 태워버리거든요
홈을 파는 겁니다
십자가로 구멍을 뻥뻥뻥 구원의 뿔로 빵구멍을 내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념이름이라고 합니다
기념이라는 홈을 파 버리니까 어디를 가든 흔적이 되니까
그 흔적 그 홈패임 그 상처 무슨 상처냐 라고 물으면
응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은 그 증거 그 흔적으로써 홈 패임 곧 상처
십자가의 흔적이야 라고 기념하는 겁니다
자랑할 게 얼마나 없었으면 매 맞은 것을 자랑하냐 말이죠
바로 기념이름이 그랬다 라고 기념하거든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갈 6:14, 개역)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5, 개역)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갈 6:16, 개역)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갈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기념이름 때문에 풍랑을 반드시 그 증상으로써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죽음 속에서만 그 이름과 그 얼굴을 보게 되니 말이죠

즉 사울이라는 큰 자는 죽고
바울이라는 작은 자는 살아난 새로태어난 겁니다
기념이름이 내 이름 사울을 갈아버리고 바울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라는 거죠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듯이

심지어 어떤 청년이 저에게 새 이름을 달라고 하던데
제가 줄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중요한 것이 기념이름이 와서 갈아버려서
갈아버린 그 상처와 그 흔적으로써 새이름을 받는데
백날 개명해 본들 죽은자의 하나님만 반복하지
산 자의 하나님 곧 나는 죽은 자의 위치이고 주님은 산자 살려주시는 의사의 위치인데
그것을 아무리 인위적으로 각색하고 연기를 한다고 해서
그 속임수가 먹혀 들겠냐 말이죠

(막 4:35, 현대어) [풍랑을 잔잔케 하시다;마8:23-27,눅8:22-25] 저녁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
(마 8:23, 현대어) [풍랑을 잔잔케 하시다;막4:35-41,눅8:22-25] 예수께서 바다를 건너가려고 배를 타시자 제자들도 따라 탔다.
(눅 8:22, 현대어) [풍랑을 잔잔케 하시다;마8:23-27,막4:35-41] 하루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일행이 떠나

사망 곧 풍랑을 만나면 죽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더더욱 죽는 다는 것을 직시하게 됨으로써

주여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내가 알던 얼굴이 아닌데요?
사망도 더러움도 죽음도 음부의 권세도 지옥도
주님 앞에서 잠잠 한데

샸다 마우스 입다물어 버리는데

저 베드로가 그 동안 예수님을 이용해서 나 구원받았다 라는 나 개인구원이라는
우상숭배 
입도 없으면서 나불나불 거리는 것 어떻게 그 동안 눈뜨고 못 볼꼴을 봤던 겁니까?
도대체 당신 누구십니까 라고

비로소 이름과 얼굴을 보고 타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라고 날 떠나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눅 5:8, 개역)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거룩 즉 참성전의 기능은
도리어 인간 쪽에서 바치는 거룩을 모조리 깨뜨리는 우상으로 규정해 버리는 식으로 오시는 겁니다

모든 우상의 얼굴은 인간의 얼굴을 본 뜬 가장 좋은 얼굴을 한 것인데
그것을 깨뜨리는 싫어버린 바 된 얼굴
흠모할 모양 없고 아름다운 풍채도 없고
질고를 아는 얼굴로써 새까맣게 타 버린 얼굴로써

니 얼굴이 이런 얼굴이다 라고 거울로써 오신 겁니다

이 주의 이름과 주의 얼굴은
죽음 위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마른뼈로 만들어서
죄인으로 만들어서
환자로 만들어서 그 위에 나타나는 이름이요 얼굴인데

단 한번도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를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 라는 거죠

주님 자신이 제대로 된 죽음을 보여주시고 그 죽음 위에서
주의 이름과 주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신랑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자는 신부 뿐입니다
신랑이 자기 신부로 삼은 그 신부 말이죠

내 쪽에서 사랑한다 라고 그 신랑의 신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신랑의 선택에 달려있는데
그 선택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얼굴을 마주대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되도 않는 함량미달의 거룩으로 신랑에게 잘 보일려고 하니
신부가 되기는커녕 마귀처럼 선악의 법만을 챙길려고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될려고 할 뿐이다 말이죠

이것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삶입니다
마귀의 세가지 시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나
돌을 떡덩이 되게 하는
요즘 케이 문화가 잉여사업을 펼침으로써
불확실한 미래로 암울한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는 먹고 사는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그 선악을 아는 자

그 다음은 종교적으로 사랑받는 신으로부터 사랑받는 자
이것 보다 잉여적인 것이 없으니까 말이죠
배고픔을 해결하면 멋들어진 구원을 위해서
사랑받고자 애를 쓰는 연예인처럼 말이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될려고 한다 말이죠

다윗이 그랬거든요
미움 받는 자가 되면 안된다 라고 인구조사를 하듯이
매일 매일 자신의 인기 여론조사를 통해서
댜통령 수행 평가 여론 조사를 통해서
비호감도 호감도를 대선주자들이 하듯이 매일 매주 매달 매년 마다 하는 겁니다
그들이 안해도 대중이 이거 안하면 미치거든요
가요톱텐 빌보드 챠트 하듯이 말이죠

국가라는 종교 라는 마약 아래에서 이것만 매일 한다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 정치적으로 드디어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온 천하 만국이 무릎 꿇고 절하도록
예수님을 드디어 무릎 꿇게 만드는 겁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듯이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예수님을 죽이는

율법 네 배나 갚아서 그 살인자를 당장 죽여라
그래 그 놈이 바로 다윗 너 그건 너 그건 너 너 땜에 죽었다 라는 겁니다

이 최악의 어둠의 극치의 자리에서
음부의 권세 정중앙 속에서

주님 자신의 이름이 옳았다
주의 얼굴을 뵈옵게 하시는 겁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라는 그 망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절대심판의 자리에서
주의 얼굴을 보는 겁니다

베드로는 다윗처럼 비로소 인자의 얼굴을 뵈옵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신랑 되신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신부 만들고자
의사 되신 예수님의 참성전의 기능이 나를 환자 만들고자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나를 죄인 나를 원수만들고자

이런 십자가라는 참성전의 기능을 펼치신
인자 이시군요 새성전 이시군요

선악의 뛰어넘어버리는 이 사랑 앞에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당신이 나를 신부 만드신 그 십자가의 영광을 그 얼굴을
제가 말릴수가 없군요
맞습니다 저는 당신의 신부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의 작품이 접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만이 신부의 고백이다는 거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그 선악을 물고 늘어지는 마귀의 깊은 것을 거쳐서
세 번 부인해서 죄가 되는게 아니라
그 이전에도 늘 죄 밖에 지은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용서했던 사랑이 바로 신랑의 사랑이였다 라는 겁니다
이것에 반발하는 것이 마귀이니까 말이죠

창세전에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했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마귀는 아무리 첫 번째 피조물인 모든 영광을 다 가진 천사였어도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때까지 이 두 나무
선악나무와 생명나무를 각자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생명나무가 이끌고 가는 자는 생명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생명이 아니라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말하고자
죽음의 자리에서 보여주는 

선악나무가 인도하는 자는 평생을 번제와 제사 라는 선악의 법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된 자기 중심으로 사는 자 이다는 거죠
아무리 종교의 신을 믿어서 그 신의 뜻대로 살아가겠다 라는 자 조차도
그 신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버린 이상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뿐이지

약속 중심으로 언약중심으로 십자가의 죽음 중심으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생명나무 중심으로 사는 자가 아니다 말이죠

오로지 선악의 법 중심으로 사는 자 이다는 겁니다

자아 라는 우상 중심으로 말이죠

이 간극을 점점점 벌리시는 겁니다


자 그럼 이제야 본문에 들어가보자 말이죠
방금 위의 것들이
죽은 자의 하나님과 즉 인간과 산자의 하나님 곧 예수님과의 충돌을 통해서
성전의 기능을
인간은 인간쪽에서 성전에 거룩한 것을 특히 말씀실천을 바치는 식이고 이것이 죽은자의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거룩을 입히시고자
더러운 것을 거룩으로 옮기시는 약속을 성취하시는 겁니다

죽음으로 다 이룬 믿음이고
인간은 자기가 살았다
살아있으니까 자기가 옳았다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라고 자기계획을 실천함으로써
인간 내부에서 출발하는 믿음으로써 말씀실천을 하더라 말이죠

자 그래서 결과는 예수님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의 죽음이 기정확실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말씀싥천이 성공을 거둔 것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리고서는 누구 하나 고침을 받거나
누구 하나 무덤에서 일어나거나

누구 하나 새생명으로 옮기움을 받던가요?

인간의 말씀실천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움을 받던가요 아니면
인간의 말씀실천이 도리어 시샘으로 변하여서
예수님을 죽이는
가인의 제사가 되었느냐 말이죠

인간의 모든 믿음은 결국은 가인의 제사 곧 아벨살인 뿐입니다

성전을 가마로 삼고 자신들은 그 가마에 담긴 고기처럼
성전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다 왜? 노아홍수때의 방주처럼 기능을 하니까 말이죠

그런데 정작 그 성전 뒤에 숨은
법궤 뒤에 숨은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를

법궤가 블레셋 군사들에게 홈니와 비느하스가 내 뒤에 숨었단다 요놈들 잡아 가라 라고
보호하고 안식처로 삼았는데 피난처로 삼았는데
도리어 피난처가 나를 어서 잡아가라 라꼬 고자질하는 기능으로 바뀌더라 말이죠

늘 홈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불을 다른 불로써 다른 얼굴로써 드렸듯이
그 버릇 어디 가겠냐 말이죠

그러니 법궤만 앞장세우면 승리를 무조건 하던 여호와의 전쟁이
어라 승리는커녕 도리어 나를 잡아라 라고 고자질 배신을 때리더라 말이죠

여호와라는 이름과 여호와의 얼굴을 나의 사적인 용도
사적인 용도란 개인구원 밖에 더 있겠냐 말이죠
그런 우상숭배용으로 사용하니까
바로 바로 걸려드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얼굴을 찢는 용도로 살인을 펼쳤습니다
그 핑계로 하나님의 전을 사모한다는 이유로 말이죠

병신들 지금 대선 운동 상황에서 누구 얼굴 가면을 찢겠다 라고 큰소리 치던데
도리어 그렇게 말한 놈들이 도리어 얼굴 찢겨질 판국인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명확해져 버렸습니다

자 이렇게 십자가 밝히 보여 또렷해 졌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죽였는데

에수님의 죽음을 명료해 졌는데
그 예수님을 죽인 인간들은 그 이후로부터 뭐 하나 또렷한게 없더라 라는 겁니다

살아있다면 살아있다는 증거가 또렷해야 하거든요
죽은 자를 살리던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던가?

더 모호해 지고 더 의문의 반복이 되어버린 겁니다

지지난 주에
그는 진짜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라고 사람들이 고백을 하던데

무덤이 열리면서 죽은 자를 새로 살리니까 말이죠

무엇이? 예수님의 죽음이 말이죠

그럼 반대로 인간의 살아있음은 왜 이렇게 무덤을 열어서 죽은 자를 살리는 말씀성취를 못하는 겁니까???

모든 인간은 잔칫집으로 향하고 있는 우상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넓은 길로 가는 망하는 자이니까
지옥이 땡기는
섞은 동앗줄을 잡고 있으니까

죽은 자가 무슨 수로 무덤을 열어서 죽은 자를 살리겠냐 말이죠
지옥이 땡기고 있는데 말이죠

산 자의 하나님이 땡기지 않으니까
말씀성취는 못하고
말씀실천으로 땡빵 하면서 껍데기만 취하고 있더라 말이죠

(롬 10:1, 개역)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니 그들은 율법의 마침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또 의문의 증서 곧 율법의 반복만을 할 뿐이다 말이죠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상숭배 곧 번제와 제사만을 반복할 뿐이지

인애와 자비를 못 보여주더라 말이죠

또 또 또 울리는 꽹과리를 반복하고
또 또 또 예수님 죽이기를 또 반복해요 글쎄
사도 죽이기를
성도 죽이기를 반복하는 교회요 이스라엘이다 말이죠

차라리 반대의 위치에 서면 되거든요
죽임을 당하??? 사도의 위치로
목베이 영혼이 되는 성도의 위치로 말이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처럼 사탄의 회 유대인처럼
오늘날 교회들이 왜 그 의문의 반복의 자리인
번제와 제사 라는 우상숭배의 자리에 왜 서냐 말이죠
잔칫집에 왜 서냐 말이죠
의인
건강한 자의 자리에 왜 서냐 말이죠

차라리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초상집의 자리에 서고
죄인
환자의 자리에 서면
나 라는 우상
나 라는 의문의 반복을 할게 아니라

또렷한 십자가 상의 다 이루었다 라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고 명료한 이 율법의 마침 곧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자리에서

인애와 자비의 자리에서
도리어 내가 그렇게 살리움을 당했다 라고

사랑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을 증거하는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이 또렷하고 명료한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서

그 무덤을 열고 죽은자를 살리는

그 죽은 놈이 바로 나 라고
이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것인데

인간은 그저 교회질서에 방해꾼 하나 없애버렸다 라고 모범 사례를 보여줘 본들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사도바울 죽이고 또 베드로 죽이고 또 성도를 죽여본들
그거 언제까지 반복할 것이냐 말이죠

밑도 끝도 없이
언제 마칠래 말이죠 ~~~~~~~~
번제와 제사를 추구하니까 마침이 없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를 구해 보세요
제가 망해도 싼 인간입니다 라고 나오면 바로 마침 이 되는데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는 더디 온다 라고
이것이 교회사람들의 속담인데

언제 마침이 되겠냐 말이죠

죄인의 자리에 서면 환자의 자리에 서면
바로 바로 즉각적으로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룬 말씀성취를 보게 될 것인데 말이죠
죄인의 자리에 못 서니까
의문의 반복으로 또 반복 또 또 또 더디 온다 라고 몰래 몰래 속담화 하더라 말이죠

(겔 12:22, 개역)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 하는 너희의 속담이 어찜이뇨
(겔 12:25, 개역)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고 응하리라 패역한 족속아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고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겔 12:28, 개역)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않을지니 나의 한 말이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즉 주님의 말씀성취가 즉각적이다 라는 것은
반드시 한세트로써 상대적인 것은 반드시 말씀이 더디 이루어진다 라는 것이
보편화
속담화 되는 그 상황을 깔고서 벌어진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얼굴 도 우상의 얼굴로 다들 추구할때에 더더욱 구체화 되는
구체적 보편성이지

이렇게 보편성을 깔고서 그 위에 구체적 보편성으로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또 개인구원이라는 탐심 우상숭배를 추구함에 있어서
또 누구를 또 두 번 죽이는 식이 되는 거죠

바위를 한 번 치면 될 것을 왜 두 번 칠려고 하느냐 말이죠
그 자체가 또 의문의 반복이 되는
내 말 안 들이니까 기적을 통해서 상대방을 무릎 꿇게 하겠다 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또 지가 옳았다를 주장할 수 밖에요 또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이지
인애와 자비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울리는 꽹과리 육의 자랑이요 에디오피가 무기들이 달가닥 거리는 소리인
상여소리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야 ~~~~ 어허야 ~~~~~~

(사 17:12, 현대어) [세계 만민의 헛된 소동] ㄱ) 세계 만민이 파도치며 밀려오는 바닷물처럼 엄청나게 몰려왔지만 죽으려고 온 것들이다! 용솟음 치며 무섭게 흐르는 물결처럼 세계 만민의 군인들이 소동을 하지만 상엿소리가 벌써 들려 온다! (ㄱ. BC 701년에 앗수르의 대왕 산헤립이 세계 만방에서 군대를 모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치러 왔다)
(사 18:1, 현대어) [유다에 온 구스 사절단] 나일강 상류의 ㄴ) 구스는 군인들이 가득 찬 나라이지만 그 시끄러운 무기 소리는 그 나라에 들리는 상엿소리에 불과하다. (ㄴ. BC 701년에 유다를 반앗수르의 동맹에 가입시키기 위하여 구스 사절단이 예루살렘으로 왔다)

(사 30:1, 현대어) [애굽과 헛된 조약을 맺지 말아라] ㄱ)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유다의 지도자들아, 너희는 반역하는 자식들이니 너희에게 상엿소리가 들려 온다. 너희가 외교적인 계획들을 세워 놓지만 내가 시킨 일은 아니다. 너희가 앗수르를 배반하고 애굽과 군사 조약을 맺었지만 내 영을 받아서 한 일이 아니다. 너희는 죄에 죄를 쌓으려고 그렇게 할 뿐이다. (ㄱ. BC 705년 경에 앗수르의 침략 위험이 커지자 유다는 애굽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사 31:1, 현대어) [인간을 의지하지 말아라] ㄴ) 애굽으로 원조를 구하러 가는 이들에게 상엿소리가 들려 온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애굽의 많은 군마와 전차들 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게는 그들이 무슨 기대를 두지도 않는다. 애굽의 도움을 받아야 옳은지 그들은 주께 여쭈어 보지도 않는다. (ㄴ. BC 705년 경 유다 왕 히스기야가 애굽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려고 사절단을 보냈을 때에 선포된 예언이다)

즉 허구이다는 거죠 발가벗은 애굽과 손잡아본들 같이 발가벗겨질 뿐이다
수치를 가리우기는커녕 말이죠
구원은커녕 저주를 상엿소리만 날꺼다 라꼬 ~~~~~ 울리는 꽹과리 ~~~~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긍휼을 구하지 않고
인애와 자비를 구하지 않고

또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를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를 구하고 있으니 악한 무화과 나무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사야가 3년 동안 발가벗고 거울로써 비춰주는 겁니다
참선지자의 기능이다 말이죠

그럼 당연히 한세트가 되는 거짓선지자는 평강이다 평강이다를 외칠수 밖에요

육의 자랑이 신나서 잔칫집처럼 웃음 하하하 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도리어 상여소리 가 된다 라는 겁니다
가마솥 두꺼운 피난 처 속에 안전하게 포근히 담겨져 있는 고기가 보호받는 것이
도리어 펄펄펄 지옥불가마 속에 들어가 저주받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도리어 죽은 자를 살리는 복음 기쁜 소식이 되고

이 예수님을 죽인 인간들의 모습은 상엿소리가 되더라 말이죠
사랑이 없으니까 울리는 꽹과리로써 또 또 또 아벨을 죽이는 짖을 또 반복해요
의문의 반복
심지어 율법껍데기 까지 붙어버렸으니
더더욱 열심으로써 의문의 반복을 말이죠

[열심으로써] 라고 적었는데 자동적으로 [열심히써] 로 바뀌는 이 한글의 기능을 해제하는 방법좀 알려주세요 ㅋㅋㅋ

이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을 구체화 하는 것이 바로 약속 곧 언약입니다
심지어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 여기 처음 나왔다가 사라지는데 있어서
이 느닷없는 등장 조차도 마치 갑자기 장기알이 성령에 의해 배치 되는 냥
그 기능을 다 하고 싹 빠져버리는
예수님의 묘 무덤을 사는 용도로써 말이죠

(마 27:57, 현대어) [무덤에 묻히시다;막15:42-47,눅23:50-56,요19:38-42] 

즉 제대로 죽었다 라는 절대저주 절대죽음이라는 단절성을 또렷하게 함으로써

확실한 죽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결국 창세기에 정녕 죽으리라 라는 제대로 된 죽음을 보여주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즉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성취로써의 절대저주 조차도 받은 적이 없다 라는 거죠
오로지 절대저주 조차도 주님의 몫으로써

우리는 이 아리마대 부자 요셉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해야 할 입장이다는 거죠

이것이 현실 진짜현실이다는 겁니다
십자가 라는 구멍이 절대저주 하나님의 심판이
곧 얼굴이 진짜 현실이다는 거죠
다 타죽어 마땅하다 라는 겁니다
왜? 더럽거든요

주의 산에 오를자 누구냐? 손 깨끗한 자

(시 24:3, 개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 24:4, 개역)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5, 개역)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 24:6, 개역)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사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사 40:9, 개역)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아무도 없다 라는 거죠

(시 24:6, 개역)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누가 나의 얼굴을 곧 신체의 대표성인 얼굴을 태울자
나의 전부를 불태워 버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누가 있겠냐 라는 거죠

그것도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 이라고
그 당사자 야곱이 당한 그 얼굴 말이죠

여호와 이름을 찾는 자도 없고
여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도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예수님과 함께 장사하는 자
함께 죽는 자 그리고 다시 함께 사는 자를

곧 한 몸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신랑이 찾은 신부

그런 자를 새로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까 위에서 언급한 원수들 보는 앞에서 말이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심으로써 말이죠 그것을 왕이라고 하거든요
왕이란 죄 문제 원수 문제를 해결하는 자를 말하거든요
그것이 구원자 아닙니까

나의 낭군 나의 신랑이다 말이죠

그래서

(시 24:7,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 24:8,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 24:9,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 24:10,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영광의 왕이 뉘신가? 여호와 이시다
전쟁에 능한 자가 누구인가? 여호와 시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즉 한 몸이 되는 자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 뿐입니다

단순히 하나가 되는 몸 곧 육체 개념입니까?
아니지요 같은 운명 같은 사고방식 같은 길을 간다 말이죠

그러니 같은 길을 가니까 죽어도 함께 죽고 다시 살아도 함께 사는 관계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오늘 본문 제목 밑에 바로 올렸습니다

(롬 6:4,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함께 장사 되었다 라고

즉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는 겁니다

이것을 건너뛰고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과 합하는 겁니까???????

절대저주를 거치지도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의 곧 거룩 곧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시는
율법 외에 한 의
곧 이것이 십자가 라는 부조리 이거든요
율법 외에 한 거룩으로 인해 다 이루신 십자가의 지혜인데

율법을 지킴으로써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에게는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이요
선악을 추구하는 헬라인의 지혜 곧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지혜 앞에서는
잔칫집에 가지 않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하냐 말이죠

애굽왕 바로왕이 왕으로써 그 당시 지혜자로써 그 지혜자의 대표성으로써
제발 모세야 광야 죽음 길 가지 말고 그 광야에서 3일 길 씩이나 들어가지 말고
그 광야 3일 길 속에 있는 어린양의 희생 피 제사 드리지 말아라

여기 애굽 잔칫집 에덴동산과 같은 여기서 드려라
거기서 드리는 거나 여기서 드리는 거나 뭐가 다른데?

여호와? 나 그 신 이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 초상집에 가서 희생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그런 신은 미친놈 아니냐?

예수를 봐라 사울(나중에 사도바울이 되지만)이라는 청년이 
왜 나사렛 이단 예수를 핍박하는지를 말이다

다 이유가 있지 않느냐

왜 초상집 삼일 길에 가야하느냐 하면은
사탄의 깊은 것을 거쳐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라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곧 지식 히브리어로 야다 사랑을 보라 라꼬

즉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바로 사탄의 깊은 것이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는 예수님을 죽이는 원인이 되는지
왜 이 의문의 반복이 되는지  

광야교회가 법궤 증거궤 언약궤 안에 저당잡히는 볼모로 잡히는 물건이 뭔고 하니
바로 하나님을 원망한 세가지 죄이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세가지 죄를 저당잡히는
세 번 부인한 것처럼

그래야 어린양 희생 피와 결부가 된다 말이죠

이 피에 맞도록 만드시는 새피조물이다는 겁니다
여호와는 지금 거룩전쟁을 하신다 말이죠

혈과 육의 싸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

곧 여호와의 이름에 맞는 부르신바 찾으신바 되도록 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 만들기
죄인 만이 구원자를 부르고
환자 만이 의사를 부르짖거든요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는 얼굴로써
수치를 가리우는 원수를 멸하는 왕의 얼굴

모조리 다 불태워 버리는 얼굴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그의 죽으심에 함께 죽고 
그의 다시 사심에 함께 사는 한 몸이 된
이 약속을 다 이루신 분을 말이죠

(골 2:12, 개역)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로마서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에서도 나오네요

(롬 6:4,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자 그러니 이제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었고
함께 장사함 바가 되었고
마음판의 할례를 하게 되었으니
이제 율법의 완성이 덮쳐져 버렸기에
율법에 저촉을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는다 라는 겁니다
완성해서 책걸이 해서 의문의 증서를 찢어버렸거든요

(롬 6:5, 개역)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6,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개역)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8, 개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제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막 사는 겁니다

막살기를 포기하는 막살기를 누리는 겁니다
자유를 포기하는 자유를 누릴정도로
더 이상 법적인 것에 저촉 받지 않는다 라는 거죠

무식하게 막살기 뭐뭐 하기 로 또 법화 해 버려요 그러니까
지켰다 너는 막살기 못 지키지? 아는 막살기를 지켰지롱 
나는 너 보다 더 낫지롱 이렇게 나오면

이게 또 법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죄의 종 노릇 또 하고 있다 말이죠
언제 또 더 낫게 되지 못하게 되면
나는 너 보다 못하구나 가 그럼 되느냐 말이죠
이런 종교오락 장난
선악의 법 장난을 수천년을 이스라엘이 했는데

어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사기를 치냐 말이죠
너나 너 자신에게 속지
누굴 속일려고 말이죠

또 잔칫집에 가는 거죠 뭐

어린아이도 다 아는 멸망의 길을 왜 가냐 말이죠
결과가 덮쳐져 버린 어린아이에게는

아무리 잔칫집이여도 넓은 길로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거든요

좁은 길 초상집은 아무도 찾지 않는 생명의 길이다 말이죠

언 놈이 생명의 길을 거부하고 멸망의 길로 가고자 하냐 말이죠
멍청한 자들 뿐이다 라는 겁니다

멍청한 자와 지혜로운 총명한 자의 대표성이 나오는데

마침 어머니랑 며칠 전에 이 내용을 두고 대화를 했다 말이죠

아비가일이라는 아내와 그의 남편 나발 이거든요

생명나무가 땡기는 자 아비가일 아내와
선악나무가 땡기는 어리석은 남편 나발과

이 내용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웃끼는 내용을 발견했어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사이던데

과연 아비가일이 지혜로운가 라는 겁니다
과연 남편 나발이 어리석은가 라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아비가일이 완벽한 100%는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진짜 엄청나게 지혜로운 것도 아니더라 라는 겁니다

나발도 마찬가지 아내가 자기가 번 돈을 막 쓰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눈 감아 주는 듯한 느낌이 팍팍 드는데
왜 무조건 어리석다 라고 성경이 규정하듯이 나오느냐 라는 느낌으로
결과를 받아들이더라도 원인을 규정하는데는 한계점이 있다 라는 뉘앙스로 글을 적었더라구요

맞아요 아내 아비가일이 남편이 힘들게 번 돈을
의도적으로 막 쓰는 경향이 보이더라 말이죠
그 목사의 글을 보니까 더 그런 느낌이더라 말이죠

그렇게 성경에 나오는 여인들을 살펴본 내용들이 다 그런 식이거든요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여자 ~~~에게서 라는 그 다섯 여인을 보세요
과연 지혜롭고 총명한 슬기로운 여자인지를

아니예요
맞아요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이 비밀입니다
원인을 찾을 수가 없어요

총명하지 않은데
그런 행동 따라했다가는 곤란한 상황에 빠지니까
처음부터 따라하지 말라는 식으로써

총멸케 하는 성령이 들어가니까
그런 행동 곧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 튀어나오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란 신앙이란 외부의 활동이지

인간은 자꾸 종교오락으로써 내부의 활동으로써 자꾸 우겨요
종교오락은 니 잘낫니 내 잘낫니 로 귀결되거든요 선악 선악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토색하지 않은 나는 선
저 매국노 세리는 악

이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이것이 인간의 신앙이요 종교오락이라는 마약이다는 겁니다
우상숭배죠

이것이 인간 쪽에서 성전에 바치는 성전에 황금을 바쳐서 맹세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 이루어지니까 뇌물 바쳐서 빨리 이루어지도록 하겠다 라는

자 그런 의미에서
아비가일 아내는 의도적으로 남편이 번 돈을 의도적으로 막쓰는 겁니다

마치 불의한 청지기 같아요

도리어 남편 나발은 가정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돈을 버냐 말이죠

자칭 빛의 아들들 같아요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고

그렇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처럼
자기의 신체를 성전을 얼마나 열심히
십의 일조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토색하지 않고(바리새인의 기도)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고(맏아들)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고(부자청년)

자 이런 모습이 바로 참성전에 반대되는 한세트로써의 우상화된 성전 개념이다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넘어오는 거룩을 거부하고
즉 기념이름이 담긴 법궤 은밀한 처소의 기능
곧 하나님의 얼굴이지요

이 얼굴 뵈옵기를 거부하고

자기 쪽에서 거룩을 바치겠다 이것이 나중에서 소원 들어주는 부채도사로
점괘비를 상납하는 식이 되는 거죠
과거 카톨릭이 면죄부 파는 식으로 말이죠

아무도 은밀한 처소의 기능을 원치 않는다 라는 겁니다

(롬 6: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개역)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개역)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4,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5, 개역)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6,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개역)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8, 개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개역)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10, 개역)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롬 6:11,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2,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롬 6:13, 개역)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4, 개역)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 6:15, 개역)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6, 개역)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7, 개역)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개역)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9, 개역)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롬 6:20, 개역)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롬 6:21, 개역)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롬 6:22, 개역)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3, 개역)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라는 겁니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는 사울의 번제와 제사 보다

(롬 10:1, 개역)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에 복종케 순종케 만들고자
세 번 부인하고 광야에서 원망의 증거물 세가지를 잡히는
이 순종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은혜에 왕노릇케 만드시는
수치를 가려주심이라는 하나님의 의 곧 십자가의 피 용서
7에 70번의 용서에 복종 순종케 만드심이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또 남을 7번 용서하겠다 라는 번제와 제사 라는 우상숭배
이것이 결국은 자기자식까지 부모까지 잡아먹는 데 까지 간다 라는 것을 모르니까 말이죠

그게 자살을 하는 자의 특징인 가룟유다의 하나님나라 운동
하나님 형상 회복 운동
회복할게 아니라 도리어 찢겨져야 하는 판국인데
새피조물이 될 생각 없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지나갈 생각은 없고
하나님 형상 회복운동으로 깨어진 고려청자를 본드 붙이기 해서
조각 퍼즐 맞추기 놀이를 하고 있으니 원

유대인들이 이런 신학으로 운동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그들은 12지파 회복에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자기들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라고 우기니까
남은자 운동을 그딴식으로 하는 거죠

단번에 하루 만에 즉각적으로 12지파 라는 이스라엘지파를 형성해야
메시아를 맞이할 수가 있는데
철천지 원수가 된 사마리아
지금의 팔레스타인과 무슨 수로 DNA 혈통을 다 조사해서 12지파를 회복할 수 있겠냐 말이죠

하면 할수록 더더욱 원수질 것 뻔한데

물론 그 이전에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 공간을 해체 시켜버렸으니까
지금 그 어떤 곳도 다 주님의 은밀한 처소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성령의 전이 된 것이 바로 우리인데

뭐 특정 공간 특정 시간 특정 장소를 고집하냐 말이죠
완악하니까 절대로 포기 못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신체 몸을
십자가에서 함께 장사 치렀거든요

이것이 예수님이 참성전으로써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게 된
은혜이다는 겁니다

이 은혜의 생명나무가 아비가일을 원인 없는 결과로써 땡기는 자로써
총명하다 라고 하고 있고

사망나무인 선악나무가 남편 나발을 땡김으로 인해서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부자여도
주님은 아이고 헐벗었구나 라고 어리석은 자라고 규정해 버리시는 겁니다
부자야 부자야 왜 헐벗었니?
사울왕 보세요 백성들이 멍청하지 않아요
가장 똑똑한 자를 왕으로 세웠거든요
그런데 성령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총명한 영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아무리 똑똑해도 어리석은 결과가 덮쳐져 버리니까
짐승의 수 666을 셀수 없는 자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아니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나의 노예를 모세 말 마따나 광야에 보내 다 죽게 할 수 없노라처럼
여호와가 누구 관데?처럼

나 다윗 누군지 모르겠는데 라고 나오니까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의 부하들을 반대로 대접해서 먹을 것을 줌으로 인해서
에라이 나발아 너는 너 이름대로 죽었뿌라 라고 나오더니
죽자 마자 바로 다윗의 아내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둘째 왕자를 낳은 아내로 말이죠

바로 시집가버려요 글쎄
이 부분이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니까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사가 이해를 못하더라구요
아니면 되짚어 보자 라는 식으로 
그 정도로 성경은 어렵다 해석 불가능하다를 말하고팠는지 몰라도 말이죠

인문학 곧 철학이 왜 거짓선지자들의 주장인지를
사탄의 깊이를 공부하는 식으로 봐야
왜 이들이 생명을 외칠수가 없는지를 살펴봐야 하거든요

그들을 거쳐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봐야 깊거든요
안 그러면 자꾸 얕은 것만 알다가 가는 거죠 뭐

예수님의 장사 되심만 또렷한게 아닙니다
주님은 세례 곧 하나님의 의에 거룩에 함께 연합하시고자
우리에게 거룩을 입히시고자
함께 장사되는 함께 죽자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 함께 죽은 자 만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십자가에 복종하는
다 이루었다 속에 들어가는 한 몸으로써

사망의 왕노릇에서 벗어나
생명이 은혜가 하나님의 거룩 곧 의가 왕노릇하는

주님의 생명 주 되심을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이 작업을 외부에서 다 이루신 겁니다

다른 사랑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 외에는

다 울리는 꽹과리요
육의 자랑만을 일삼는 의문의 또 반복 또 반복인
피곤함 뿐입니다

독수리 같이 날개를 펴고 지치지도 않고 당장 즉시로 죽은자를 살리시는 사랑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씀을 성취하심 뿐인

요나의 표적 외에는 없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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